사탄은 당신이 주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다양한 통로로 훼방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의식하며 주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훼방꾼의 방해를 받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먼저, 훼방꾼의 영향을 받았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 믿는다면, 충분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만, 엄밀히 말해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직접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인이 확신하는 일에 대해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들이 힘들어도 출근하는 이유는 1개월 후에 급여를 받는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귀하께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응답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이 없게 된 걸까요?
‘물질 축복’에 관하여 성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이 되는 듯합니다.
1. 지양하는 자
2. 지향하는 자
어떤 신앙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유익한 방향으로 각 사람을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에게는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시고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자는 자존감을 회복시키시며 세워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것을 이미 충분히 누렸던 자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궁핍과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며, 지독한 가난에 억눌려 살던 자에게는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이시기도 합니다.
즉, ‘힘을 빼는 메시지’가 있고 ‘힘을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힘을 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이 힘을 빼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랜 가난과 굶주림에 몸도 마음도 병들어있는 성도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 부자로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힘 빼기 훈련'을 하고 있는 목사님의 설교만 계속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인생은 그가 들은 메시지대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사탄이 하는 역할 중에 하나는 힘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을 힘 빼는 메시지를 듣도록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가 그에게 적합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하여 최대한 회복의 때를 늦추려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상황에 필요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곳은 ‘힘을 주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회복시키고 세워주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힘을 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분께는 이곳이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지를 접할 때 자꾸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분이 있다면 곧 다른 방식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기쁘고 설레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한 이끌림이 느껴진다면 그 음성이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본인에게 적합한 메시지에 끌리게 되고, 들은 메시지대로 순종하며 살 때 그에 걸맞은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축복 관련 메시지를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며 그 말씀대로 살아봐야겠다는 강렬한 마음과 함께 힘이 불끈 솟는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음 글을 읽어주세요.
어느 쪽이든, 자신이 선택한 신앙 안에서 열매를 거두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쪽에서도 열매가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자신의 신앙생활도 힘들어지고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저 이론만 앞세우는 말뿐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향을 정했다면 열매가 나올 때까지 한 방향의 메시지만 집중적으로 듣는 몰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응답해 주신다’는 설교를 듣고 새벽 기도를 시작한 새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며칠 후, ‘응답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교를 듣게 됩니다. 결국 그는 혼란스러워하다가 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응답받지 못한 것이 응답이라고? 뭐야, 그럼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거잖아.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럼 이렇게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이와 같이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원이 그렇습니다.
1.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 (로마서 3장 27절)
2. 구원은 행위가 필요하다.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
마치 서로 반대되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각 대상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죄로 넘어져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죄의식에 고통 받는 자에게 →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힘을 내서 다시 도전해 보자!
2. 이미 구원받았다면서 죄의식 없이 마음껏 죄를 지으며 사는 자에게 → 당신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기도와 축복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며 복을 주시는 분이다.
2. 하나님은 개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1번 메시지를 받을 사람은 누구일까요? 착하고 의로운 자? 그보다 우선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에서는, 자신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고 실제로 그것을 받게 됩니다. 야곱이 에서 대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은 그것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은혜의 통로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또한 행위가 우선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행위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3장 10절
자격으로는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것도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격이 되지 않아도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만들어진 그릇의 크기만큼 복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며 점점 더 축복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선순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이삭이 그러했으며 야곱, 요셉, 다윗 등 성경에 기록된 축복의 계보가 이 흐름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즉, 들은 말씀에 따라 그에 걸맞은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세상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정 관념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훼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해!”
그러나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상관하지 않고 일단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롬 10:13)
사람들이 저마다 말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서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먹이기도 하시고 입히기도 하시며 때로는 취직도 시켜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런 부분을 수준 낮은 신앙이라며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신(神)으로서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실 뿐 아니라 그의 간곡한 필요를 채워주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神)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영적 본능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기 위해 울부짖는 이유는 자신이 부르면 반응해 줄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뇌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백지상태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모릅니다. 아기는 배고픔이 뭔지 모릅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며 도움이 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럼에도 아기는 자신을 도와줄 존재를 부릅니다. 아기가 부모를 향해 부르짖게 만드는 최초의 동기는 불편과 결핍입니다.
“으앙!”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를 부릅니다. 부모의 입장을 헤아리고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나아가는 아기는 없습니다. 부모님과의 소통을 그렇게 시작하는 아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의 요청을 듣고 아기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어떤 부모도 아기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다그치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과 소통이 가능해질 때까지 묵묵히 아이의 필요를 채우며 함께 합니다. 아기는 울 때마다 자신의 불편이 해소되는 것을 경험하며 조금씩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부모’라는 존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익혀가게 됩니다.
영의 성장 메커니즘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은 극한 어려움에 처하면 신(神)을 향해 부르짖는 영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르짖으면 도움을 줄 영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고아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조차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신을 찾게 만드는 첫 번째 동기는 고통 또는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소원입니다.
“아파요. 불안해요. 외로워요. 힘들어요.”
부족할 것 없는 아기는 울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일생일대의 강력한 부르짖음은 대부분 결핍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핍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부르짖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늘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마 5:3)
우리 주변에는 이미 넘치도록 많은 선생이 있습니다. 강사가 있고 책이 있으며 콘텐츠가 있습니다. 성공자로부터 ‘비법’을 배워보려 하지만 여러분은 그가 될 수 없고, 여러분의 상황은 그의 환경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돈 벌이 대상으로 생각하며 책이나 강의를 팔려는 의도로 기획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가족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경험자의 ‘동행’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이권을 개입시키지 않고 영원토록 동행해 주실 능력자는 성령님 한 분뿐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경을 읽으며 진심으로 기도하면 점점 지혜로워지고 성실해지며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부터 일대일 코칭을 받는 성도는 새로운 스승을 찾기 위해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비전과 사명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다닐 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깨달은 것 같은 착각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하자 순조롭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마치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연어의 회귀처럼, 어느 순간부터 저는 이 사명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 과거의 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확신에 사로잡혀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장 1절)
예수 믿으면 기쁘다면서요? 그런데 정말로 기쁩니까? 교회 안에 우울증이 왜 이렇게 많고 정신과 약을 드시는 분은 또 어째서 이렇게 많은 겁니까? 싸우고 반목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그런 삶을 10년, 20년 아무런 변화 없이 살고 있는...
말씀에 능력이 있다면서요? 카센터에 차를 맡겼으면 수리가 되어야 하듯 예배를 드렸으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 기도를 드렸다면 응답이 있어야 정상 아닙니까? 100명 중 100명이 모두 다 응답이 있을 순 없다 해도, 100명 중에 100명에 가까운 성도들이 응답은 커녕 삶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데 어째서 아무도 이 상황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걸까요?
‘사랑’에만 집중하느라 놓치고 있던 가치 ‘분별’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과 함께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던 메시지는 ‘분별’이었습니다. 사복음서를 ‘분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없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주목해서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태복음 10장 14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마태복음 7장 6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받지만, 삶의 회복과는 무관하다고 믿는 분, 병원비가 없고 자녀에게 먹이고 싶은 것도 못 먹일 만큼 어려워도 주님은 그런 어려움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 굶어 죽을 정도는 돼야 간신히 밥이나 먹고 살게 하는 예수님이라고 믿는 분들은 이 메시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메시지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혼이 잘 됨 같이 삶도 차츰 좋아진다고 믿는 분들, 분명 그렇게 믿는데도 믿음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지난 6년간 인터넷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성도님들을 모집하여 ‘분별’을 적용한 결과, 모두가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본적 없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 재정, 건강, 전도 등 삶의 돌파를 경험한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필자의 블로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원인은 가라지, 쭉정이, 염소, 삯꾼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교회!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교회! 그러나 신앙 성장을 방해하는 가라지, 하나님의 양들을 도둑질하는 삯꾼 목자,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염소도 숨어 있는 교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처음으로 주신 사명은 ‘번성하라’였습니다. (창세기1장 27~30절)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즉, 인간에게는 번성할 수 있는 능력이 내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이 능력이 훼손됩니다.
훼손되었던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담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며 회복의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모든 복의 원천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는 먼저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잘 되어가는 것에 비례하여 몸과 마음이 강건해지고 나아가 범사가 형통하게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심리적인 안정감 속에서, 하는 모든 일에 창세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삶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다릅니다. 물질은, 받을 자격이 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을 자격은 먼저 ‘하나님께서 물질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하나님께서 상으로 물질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어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본인이 가진 믿음은, 본인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도록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게 합니다. (히 11:1)
그러나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가 된 성도라 할지라도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약 4:2) 구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온갖 거짓된 명분으로 믿음 좋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사탄은 당신이 주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다양한 통로로 훼방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의식하며 주의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훼방꾼의 방해를 받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먼저, 훼방꾼의 영향을 받았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 믿는다면, 충분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만, 엄밀히 말해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직접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인이 확신하는 일에 대해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들이 힘들어도 출근하는 이유는 1개월 후에 급여를 받는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귀하께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응답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이 없게 된 걸까요?
‘물질 축복’에 관하여 성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이 되는 듯합니다.
1. 지양하는 자
2. 지향하는 자
어떤 신앙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유익한 방향으로 각 사람을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에게는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시고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자는 자존감을 회복시키시며 세워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것을 이미 충분히 누렸던 자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궁핍과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며, 지독한 가난에 억눌려 살던 자에게는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이시기도 합니다.
즉, ‘힘을 빼는 메시지’가 있고 ‘힘을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힘을 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이 힘을 빼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랜 가난과 굶주림에 몸도 마음도 병들어있는 성도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 부자로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힘 빼기 훈련'을 하고 있는 목사님의 설교만 계속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인생은 그가 들은 메시지대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사탄이 하는 역할 중에 하나는 힘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을 힘 빼는 메시지를 듣도록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가 그에게 적합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하여 최대한 회복의 때를 늦추려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상황에 필요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곳은 ‘힘을 주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회복시키고 세워주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힘을 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분께는 이곳이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지를 접할 때 자꾸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분이 있다면 곧 다른 방식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기쁘고 설레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한 이끌림이 느껴진다면 그 음성이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본인에게 적합한 메시지에 끌리게 되고, 들은 메시지대로 순종하며 살 때 그에 걸맞은 응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축복 관련 메시지를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며 그 말씀대로 살아봐야겠다는 강렬한 마음과 함께 힘이 불끈 솟는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음 글을 읽어주세요.
자신의 신앙 노선을 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1. 나의 문제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2.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만 역사하실 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선택한 신앙 안에서 열매를 거두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쪽에서도 열매가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자신의 신앙생활도 힘들어지고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저 이론만 앞세우는 말뿐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향을 정했다면 열매가 나올 때까지 한 방향의 메시지만 집중적으로 듣는 몰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응답해 주신다’는 설교를 듣고 새벽 기도를 시작한 새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며칠 후, ‘응답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교를 듣게 됩니다. 결국 그는 혼란스러워하다가 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응답받지 못한 것이 응답이라고? 뭐야, 그럼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거잖아.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럼 이렇게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이와 같이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원이 그렇습니다.
1.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 (로마서 3장 27절)
2. 구원은 행위가 필요하다.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
마치 서로 반대되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각 대상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죄로 넘어져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죄의식에 고통 받는 자에게 →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힘을 내서 다시 도전해 보자!
2. 이미 구원받았다면서 죄의식 없이 마음껏 죄를 지으며 사는 자에게 → 당신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기도와 축복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며 복을 주시는 분이다.
2. 하나님은 개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다면 1번 메시지를 받을 사람은 누구일까요? 착하고 의로운 자? 그보다 우선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에서는, 자신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고 실제로 그것을 받게 됩니다. 야곱이 에서 대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은 그것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은혜의 통로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또한 행위가 우선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행위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3장 10절
자격으로는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것도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격이 되지 않아도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만들어진 그릇의 크기만큼 복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며 점점 더 축복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선순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이삭이 그러했으며 야곱, 요셉, 다윗 등 성경에 기록된 축복의 계보가 이 흐름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간절함’은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다음 글을 읽어주세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롬 10:17)
즉, 들은 말씀에 따라 그에 걸맞은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세상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정 관념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훼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해!”
그러나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상관하지 않고 일단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롬 10:13)
사람들이 저마다 말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서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먹이기도 하시고 입히기도 하시며 때로는 취직도 시켜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런 부분을 수준 낮은 신앙이라며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신(神)으로서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실 뿐 아니라 그의 간곡한 필요를 채워주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神)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영적 본능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기 위해 울부짖는 이유는 자신이 부르면 반응해 줄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뇌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백지상태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 모릅니다. 아기는 배고픔이 뭔지 모릅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며 도움이 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럼에도 아기는 자신을 도와줄 존재를 부릅니다. 아기가 부모를 향해 부르짖게 만드는 최초의 동기는 불편과 결핍입니다.
“으앙!”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를 부릅니다. 부모의 입장을 헤아리고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나아가는 아기는 없습니다. 부모님과의 소통을 그렇게 시작하는 아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의 요청을 듣고 아기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어떤 부모도 아기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다그치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과 소통이 가능해질 때까지 묵묵히 아이의 필요를 채우며 함께 합니다. 아기는 울 때마다 자신의 불편이 해소되는 것을 경험하며 조금씩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부모’라는 존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익혀가게 됩니다.
영의 성장 메커니즘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은 극한 어려움에 처하면 신(神)을 향해 부르짖는 영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르짖으면 도움을 줄 영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고아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조차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신을 찾게 만드는 첫 번째 동기는 고통 또는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소원입니다.
“아파요. 불안해요. 외로워요. 힘들어요.”
부족할 것 없는 아기는 울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일생일대의 강력한 부르짖음은 대부분 결핍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핍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부르짖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늘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마 5:3)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교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감은 서로가 마음을 열고 진짜 속내를 드러낼 때 탄력을 얻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며 교감하는 인격적 만남이 없다면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동기’입니다.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사람은 진심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주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부모님’ 또는 ‘아픈 자녀’ 아니면 ‘자신의 처지’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염려합니다.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나쁜 결과가 올 수 없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께로 정하고 진심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했던 사람 중에 나쁜 성적표를 받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들은 감당치도 못할 거룩을 흉내 내다가 아예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 선한 척하는 것을 위선(僞善)이라 합니다. 입으로는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은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넘치도록 많은 선생이 있습니다. 강사가 있고 책이 있으며 콘텐츠가 있습니다. 성공자로부터 ‘비법’을 배워보려 하지만 여러분은 그가 될 수 없고, 여러분의 상황은 그의 환경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돈 벌이 대상으로 생각하며 책이나 강의를 팔려는 의도로 기획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가족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경험자의 ‘동행’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이권을 개입시키지 않고 영원토록 동행해 주실 능력자는 성령님 한 분뿐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경을 읽으며 진심으로 기도하면 점점 지혜로워지고 성실해지며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부터 일대일 코칭을 받는 성도는 새로운 스승을 찾기 위해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비전과 사명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다닐 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깨달은 것 같은 착각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하자 순조롭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마치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연어의 회귀처럼, 어느 순간부터 저는 이 사명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 과거의 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확신에 사로잡혀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장 1절)
이 시간 피할 수 없는 영적 질문을 마주하려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모두가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응답받는 성도는 얼마나 됩니까?
예수 믿으면 기쁘다면서요? 그런데 정말로 기쁩니까? 교회 안에 우울증이 왜 이렇게 많고 정신과 약을 드시는 분은 또 어째서 이렇게 많은 겁니까? 싸우고 반목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그런 삶을 10년, 20년 아무런 변화 없이 살고 있는...
말씀에 능력이 있다면서요? 카센터에 차를 맡겼으면 수리가 되어야 하듯 예배를 드렸으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 기도를 드렸다면 응답이 있어야 정상 아닙니까? 100명 중 100명이 모두 다 응답이 있을 순 없다 해도, 100명 중에 100명에 가까운 성도들이 응답은 커녕 삶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데 어째서 아무도 이 상황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걸까요?
‘사랑’에만 집중하느라 놓치고 있던 가치 ‘분별’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과 함께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던 메시지는 ‘분별’이었습니다. 사복음서를 ‘분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없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주목해서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태복음 10장 14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마태복음 7장 6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받지만, 삶의 회복과는 무관하다고 믿는 분, 병원비가 없고 자녀에게 먹이고 싶은 것도 못 먹일 만큼 어려워도 주님은 그런 어려움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 굶어 죽을 정도는 돼야 간신히 밥이나 먹고 살게 하는 예수님이라고 믿는 분들은 이 메시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메시지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혼이 잘 됨 같이 삶도 차츰 좋아진다고 믿는 분들, 분명 그렇게 믿는데도 믿음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지난 6년간 인터넷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성도님들을 모집하여 ‘분별’을 적용한 결과, 모두가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본적 없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 재정, 건강, 전도 등 삶의 돌파를 경험한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필자의 블로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원인은 가라지, 쭉정이, 염소, 삯꾼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교회!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교회! 그러나 신앙 성장을 방해하는 가라지, 하나님의 양들을 도둑질하는 삯꾼 목자,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염소도 숨어 있는 교회...
스스로를 정죄하며 자신을 탓할 만큼 탓해 본 그대여!
그대 탓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대의 탓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