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를 적국의 앞잡이라며 맹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복자들의 나라에서 권세를 잡아 자기 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예루살렘을 재건케 했다. 끌려간 노예가 그토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목숨 건 기도가 있었다. 이는 꿈 해몽과 같은 초월적 지혜로도 나타났다.
그리고 말씀이 있었다. 다니엘은 정복자들의 나라에서 고위급 관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고레스 왕의 세계 정복에 동기를 부여했다.
“왕이여 보소서. 여기 성경에 당신의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천하를 다스릴 자로 준비하셨습니다. (단 2:48)”
말씀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신의 경전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는 예언을 본 고레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니엘이 전해 준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세상을 정복할 믿음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롬 10:17)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고레스에게 발현했던 믿음의 메커니즘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이루는 실질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히 11:1)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바빌론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성도들 또한 기도와 말씀을 멀리하다가 온갖 사탄 숭배자들의 심볼로 도배된 게임과 대중문화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기술 발전에 따른 환경 변화와 맞물려 ‘메타 유니버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국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는 모든 말과 행동이 감시 대상이다.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통제 시대의 전조다. 사람들은 이미 ‘언론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고 검열이라는 플랫폼 소유주들의 기준에 순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정이 삭제되거나 정지되기에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바빌론과도 같은 메타버스의 권세 앞에서 다니엘처럼 선한 능력으로 일어설 것인가? 그저 ‘나쁜 것’이라고 비방하며 오프라인만 고집하다가, 신문물로 무장한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집과 재산, 가족들을 빼앗기는 쇄국 정치의 끝을 경험할 것인가?
필자가 추천하는 최적의 기도 환경은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다니엘 또한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게 되었다. 나의 무능이 드러날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그 힘’의 필요성은 극명해지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최적의 기도 환경을 제공한다.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곳은 오프라인에 비해 기도 응답 또한 빠르고 수월하다. 오프라인에서 고객을 이끌기 위해서는 ‘물리적 이동’이라는 매우 번거롭고 긴 절차가 요구된다. 이는 고객의 구매 결정을 방해하고 변심을 유도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결정하는 즉시 결제가 이루어진다. 또한, 만남을 갖기 위해 부수적으로 소요되던 외출준비와 이동이라는 시간 소모가 없다.
“고객을 보내주세요”
기도하면 즉시 하나님께로부터 반응이 온다. 고객을 보내 주시거나 고객을 이끌기 위한 아이디어를 주신다. 계속 기도하며 행동하다 보면 결과물이 나온다. 그렇게 기도하며 준비한 결과물들은 당장 성과가 없다해도 훗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비용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누구나 리스크 없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멋지게 인테리어 된 매장이 없어도 그런 매장을 갖춘 사람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는 이 환경은, 아마추어 프레이어(prayer) 에게도 기도해 볼 엄두가 나게 만든다.
밸류체인은 이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를 제공한다. 온라인 공간이 아니었다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이런 인재들을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난이도 있는 글을 소화할 수 있는 문해력과 전문성을 갖춘 기도하는 성도들로만 멤버를 구성해서 공통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오프라인이었다면 대체 얼마의 비용과 기간이 소요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성도님들과 그 부모님, 자녀와 형제자매들이 밸류체인에 오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영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밸류체인을 찾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주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나고 자란 영재들을 밸류체인에 보내주시고 있다.
user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온라인에서는 어린 나이로 인해 받는 업무적 제약이 없다. 그러므로 어린 멤버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만 찾아주면 누구보다 빠르게 관련 분야의 전문성을 형성하여 실무에 투입가능하다.
조금만 훈련하면 어지간한 어른만큼의 결과물을 내고 이내 추월한다. 배운 스킬은 당장 현금화도 가능하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브랜딩 레퍼런스가 된다.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으로 이력서를 장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스킬은 아래처럼 링크 하나로 이력서를 대신한다.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이 박봉, 구직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학력이라고는 내세울 것 없던 이들이 그들보다 더 많은 소득과 시간적 여유를 누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경쟁력의 기준이 스펙에서 실무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메타버스는 지금껏 누구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환경이다. 때문에, 기능의 다양성과 방대함을 측량할 수조차 없다. 이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마스터급 전문성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먼저 선점하고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사람이 기준이 될 것이다. 먼저 개척한 사람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대륙과도 같은 메타 유니버스에서 당신을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어떤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지혜를 후히 주시고, 급한 실무에는 ‘만남의 축복’을 통해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는 하나님뿐이다.
밸류체인에는 실무 능력 없이 강의만 할 줄 아는 ‘이론만’ 전문가가 없다. 밸류체인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신 유명 히어로도 없다. 필요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정직과 전문성은 밸류체인이 보증한다.
주님께서는 이곳에 필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다. 비용 없이, 오로지 기도와 말씀으로만...
교회의 기둥과 벽돌 역할을 하는 것은 성도이다. 성도만 있으면 이 교회는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다. 성도가 곧 교회이기에 성도를 세워야 한다. 세운 성도는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한다. 성도라는 교회의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성도들의 리스크 없는 사업체 건립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체를 이룬 밸류체인 멤버들은 미국, 일본, 호주, 베트남, 미얀마 어느 나라 어느 환경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각자가 소유한 정보를 공유하고 검토하여 기회는 추구하고 리스크는 배제한다.
이 교회는 목회자들의 목회 지원 시스템이다. 이는 필자가 신학생 때부터 동기들에게 선포해 온 ‘나는 목회자들을 후원하는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기도의 응답이다. 또한 이 교회는, 사업 현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성도들과 함께 싸워줄 연합군 지원 시스템이 될 것이다.
1세대 교회가 교제 중심, 2세대 교회가 건물 중심으로 모였다면, 3세대 교회부터는 비전을 공유하는 비전 중심의 교회이길 소망 한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비전과 일치해야만 한다.
‘말로만 비전’이 아니라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을 정도의 디테일을 갖춘 구체적인 비전, 하나님을 핑계로 상대방을 소모품처럼 공짜로 사용하다가 잘 되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이기적인 비전이 아니라, 참여자 모두에게 실질적인 득이 되기에 함께 지속적으로 공유 가능한, 누구나 상식만 있다면 이것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공개된 정직한 비전 말이다.
그러나 먹고 살만한 가게들이 문을 닫는 경우들도 즐비하다. 그들이 문을 닫는 이유는 ‘먹고 살만’만 하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싶어지는 슬럼프를 경험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직원일 때의 가장 큰 메리트는 최악의 경우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다. 퇴사로 인해 발생하는 별도의 금전적 지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폐업 비용, 즉 그만둘 때도 지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돼지씨는 주5일, 9시부터 18시까지 근무하시는군요. 토, 일, 공휴일은 쉬시나요?”
“꿀”
“지금부터 오너가 되면 겪게 될 불편요소를 생각해 볼 겁니다. 대체로 음식점을 하면 주말과 공휴일은 쉴 수가 없습니다. 주말 매출이 평일 매출의 1.5배에서 많게는 두 배 이상 되는 곳도 있으니까요. 좀 더 명확히 말씀드리면 쉴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직원과 오너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꿀꿀”
“직원은 쉬어도 월급이 나오지만 오너는 쉬게 되면 지출은 있는데 수입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고정 지출이 600만원인 점포의 경우, 하루 쉴 때마다 주머니에서 20만원씩 없어지는 셈이죠. 직원일 때는 휴가비를 받고 쉬었는데 오너가 되면 휴가비를 내면서 쉬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돈이 나간다. 이 얼마나 두려운 상상입니까?”
“꾸우울?”
“하하. 그건 본인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 돼지씨는 지금 오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는 겁니다. 혹시 여행 좋아하십니까?”
“꿀”
“정기적으로 반드시 여행을 가야만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이 오너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당분간 여행 금지. 그런데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돼지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에그 타르트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돼지씨는 지금 10시간 정도 근무를 하고 계신데요. 퇴근하면 집에서 일 생각 전혀 하지 않고 쉬십니까? 업무로부터 해방이 되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꿀”
“그럼, 여기서 다른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창업을 계획하시는 이유가 뭐죠?”
“...”
“큰돈을 벌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인가요?”
“....”
“사실 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본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업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럭저럭 수익이 발생하던 점포가 슬럼프로 인해 폐점에까지 이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적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으시지요?”
“꿀”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꿀꿀꿀 꿀꿀꿀꿀꿀”
“네. 맞습니다. 성공을 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동기라는 놈이죠. 그러므로 성공을 위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동기의 부여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만일 이것이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성공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기를 갉아 먹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슬럼프라는 것이죠. 예전 우리 부모님들 세대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어도 더 이상 바랄게 없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일자리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저 일거리가 있는 것에 감사하고 힘들어도 견디면서 다들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여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상당수의 오너들이 먹고 살 만큼의 수입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삶의 질 대비 수익이 기대에 못 미쳐서 슬럼프를 겪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폐업을 합니다.”
돼지는 이야기에 몰입될수록 에그 타르트를 소중한 보물인 것 마냥 감싸 쥐었다.
“실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대치동에 칼국수 집을 창업한 은행 지점장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넉넉한 월급으로 생활하시던 분께서 칼국수 집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을 위해서 본인이 노후를 준비해보려는 좋은 동기였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창업을 해놓고 보니 본인이 그토록 좋아하던, 대낮에 찜질방 가서 고스톱치기를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말까지 일해서 버는 수입은 대략 400만원.”
“꿀?”
“네, 그만하면 꿀이죠. 그 당시에 그분의 나이와 경력에 비하면 괜찮은 수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겐 그 정도 고생해서 번 돈치고는 너무도 작게 느껴졌었나 봅니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누구도 자신의 짐을 나누어질 사람이 없다는 것, 결국 심리적 부담감에 우울 증상이 극에 달해서 가게를 처분했습니다.”
고액 연봉자가 아니라면 1억을 모으는데 5~10년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한방에 털어 내는 것이 사업이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는 사업이 주식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망한 사람들이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며 꼭 하는 말이 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생활패턴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나중에 슬럼프로 폐업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근무환경, 소득 등 본인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하려는 사업이 자신이 원하는 조건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예) 나는 하루 10시간까지만 근무하고 싶고 주말, 공휴일은 쉬고 싶다. 그러나 월 소득이 700만원 이상 된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해 보니 내가 하려는 사업은 주말과 공휴일 근무가 필수였다. 게다가 월소득 700만원을 벌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겠다.
많은 이들이 본인이 선택한 업종이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템인지 조차 확인해 보지 않고 사업을 시작한다. 본인이 감수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가 클수록 슬럼프에 빠질 확률은 크다. 주말마다 여행을 가는 것을 포기하기 힘든 사람이 주말 근무가 필수인 업종을 선택한다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첫째, 선택한 창업업종에서 받게 될 기대소득과 지금 본인이 직장에서 받는 급여를 비교해 볼 것
둘째, 오너가 되면 직원으로 일할 때 보다 얼마만큼 더 일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더 많은 일을 했을 때 수입은 얼마나 더 들어오는가?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것
일은 더 많이 하는데 수입은 그대로이거나 더 적게 들어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계속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개인 사업자들의 소득은 높지 않다. 예를 들어 같은 업종에 근무하는 근로자가 사업주보다 더 큰 소득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월 소득이 300만원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이것저것 제하면 특별히 손에 쥐어지는 돈 없이 간신히 생활비만 빠듯하게 충당되는 경우도 많다. 이때 가장 많이 드는 생각.
“이거 벌자고, 내 돈 들여서 이 고생을 하나?”
그리고 이 부정적인 생각에 점차 동화되면 마침내 슬럼프가 그를 덮는다. 슬럼프는 창의력과 능동성을 마비시킨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창의력과 능동성이 작동 불능상태가 되었으니 작은 문제가 찾아와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시간 나면 스마트폰이나 하면서 근무시간만 때우다가 마침내 폐업까지 이르는 수순을 밟게 된다.
“돼지씨는 현재 직장에서 퇴근과 동시에 업무에서 해방이 되고 주말의 휴식과 월 1회의 휴무가 있으며 여행을 위한 휴가 기간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입은 300만원 가량 되지요. 만일 가게를 열었는데 수입이 회사 다닐 때와 똑같이 300만원 가량 되고,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주말과 휴가도 포기해야 한다면 아마도 할까 말까 갈등이 되실 겁니다.”
“꿀”
“그렇다면 수입이 직장보다 적은 200만원이면서 위의 조건들을 수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업에 뛰어들기 전에 이런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 보세요.”
규모가 상당하다. 필자가 본 바에 의하면 그 집의 특징은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맛도 평범하고 종업원들의 친절도도 무난하다. 인테리어부터 모든 것이 평범하다. 너무 특색이 없어서 오히려 더욱 성공의 이유를 궁금하게 만들 정도다. 명성에 어울리는 어떤 특별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집이 되었을까. 눈에 띈 것이 하나 있다면 여기저기 주인장이 엄선해서 붙여 놓은 글귀들이었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
‘이러면 성공할 수 있다.’
뭔가 심기일전을 자극하는 글귀들이 무수히 붙어 있었다. ‘그 힘’ 사용자들을 관찰해 온 나로서는 그런 주인장의 마음가짐이 성공을 견인했으리라 짐작했다.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성공관련 서적에서도 이 같은 ‘특별한 이유 없는 성공’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에게서 성공의 이유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이것은 성공한 사람 본인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성공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억지로라도 찾으려 한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 낸 성공원리가 얼마나 쓸모 있을까?
다행히 최근 서점가에는 성공자들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는 말라고 경고하는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인생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자들의 성공이유를 꼽을 때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있기는 하다. 확신, 즉 강력한 믿음이다. 사업을 할 때 믿음과 확신 즉, 그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객관적 증거는 준비 기간에서부터 나타난다. 사업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소득이 없기 마련인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함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충분한 기간, 충분한 품질이 나올 때까지 집중하는 것을 방해 한다. 결국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픈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이 없으면 투자에도 소극적이게 된다.
“안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리하게 투자할 필요는 없지.”
결국 안 될 것을 염려해서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그의 사업체는 그의 생각대로 되고 만다. 손님이 몰려 올 것이라 믿고 최상의 투자로 창업을 준비한 사업체와 망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색한 투자로 준비한 사업체, 과연 어느 쪽이 더 손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처럼 긍정적인 생각이 긍정적 결과를,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 결과를 불러 온다는 말은 미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제외한다 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나 이 사업 해도 괜찮을까요?”
대체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미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신중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말리려 해도 그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
불확신은 열정을 차단한다. 심지어 이미 계약금을 지불하고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불안해한다. 불확신은 가게를 오픈한 후에도 이어진다. 손님이 조금만 줄거나 매출이 하락하는 것 같으면 ‘어떡하지?’ 근심하며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신의 일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맞서 싸워 극복하려 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나? 슬슬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반면 확신이 있는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 한다.
“이 문제만 극복하면 분명 크게 성공할 거야. 해결책을 찾아보자.”
대부분의 문제는 답을 찾으려 하면 답이 보인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계속 맛을 찾으려고 레시피를 조정하다 보면 결국은 맛이 있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단순한 실천을 하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제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중할 줄 모른다.
집중하지 않는 습관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부터 시작 된다. 공부시간에 딴 생각을 해본 이들, 시험기간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시간을 보낸 이들은 집중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알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집중하지 않는 습관이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업무를 미루고 회피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그것은 나태함 일수도 있고 무책임 일수도 있다.
그것은 성실함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성실함을 이끌어 내는 가장 검증 된 방법은 ‘문제에 대한 집중’이다. 사람이 강력한 집중 상태에 이르게 되면 뇌에서는 업무에 도움이 되는 행동유발 호르몬이 분비된다.
특히 사람이 기도를 통해 깊은 정신집중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호르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공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는 노르에피네프린과 기억력에 도움을 주는 아세틸콜린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도파민이 창의력을 샘솟게 하며,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서를 안정시키는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사람들에게는 엔도르핀이 동기를 부여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루고 싶은 목표와 믿음이 각인 된 사람이 성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에도 이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엔도르핀이 우리가 성공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마다 뇌에서 분비가 된다면 현실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일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느껴진다. 힘든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성공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도록 고통대신 즐거움을 느끼도록 보상을 주는 것이다.
문제에 완벽히 집중하게 되면 굳이 성실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집중상태가 지나치게 되면 일에 미쳐 있는 상태, workaholic 에까지 이르게 되어 가족들이 쉬라고 뜯어 말려야 할 정도가 된다. 도박, 술, 노는 것에 미쳐서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에너지를 업무에 쏟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일중독, 즉 workaholic 이다. 이렇듯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 힘은 무의식이 진지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을 때 발휘되기 시작한다.
집중하면 내가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우연’이라는 요소를 언급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기도 할 때 ‘우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 하다보면 수많은 우연들이 동반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와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들고, 내가 필요로 하는 장소에 나타나는 우연들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의 이유를 ‘열심’에서 찾으려한다. 하지만, 초일류가 된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물리적 노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통쾌한 장면을 선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드라마라는 장치를 고안해냈다. 그 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악인을 만들어 놓고 잔뜩 감정을 고조시킨 후에 그를 후려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한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답답하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장면들을 긴 시간 감내하며 지켜봐야만 한다. 악인도 가짜고, 벌도 가짜다. 진짜인 것은 본인이 느끼는 감정 뿐이다. 기능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이런 바보짓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짜 카타르시스 장사는 돈이 된다. 카타르시스 상인들은 언제나 새로운 제품을 들고 사람들의 지갑 문을 두드린다.
“고객님! 신제품이 나왔습니다.”
여기 또 다른 형태의 감성팔이가 있다. 언젠가부터 소위 ‘자존감을 높여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들이 미디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휴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열심히 일만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들을 마치 조롱하는 듯한 캠페인도 등장했다. 그 결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을 받게 되고,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전 재산을 털어 세계여행을 다니는 청년들이 특별한 삶의 상징처럼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밑도 끝도 없이 ‘괜찮다고, 당신 잘하고 있다고’ 칭찬과 위로를 주는 감성 판매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한 번 안아주세요.”
그들의 메시지는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일하는, 그래서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좋은 강의일 것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위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서 하루하루를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도 자기 합리화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자고로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몸을 해하는 것일수록 달콤하다. 달콤한 그 메시지는 무책임한 삶을 사는 불성실한 인생들이 달게 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시지의 영향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저 본인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꿈을 찾겠다고 결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20대를 보내고 심지어 30대를 보낸 후 40대를 넘어서고 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다. 준비 없이 20대를 보낸 청년들은 준비되지 않은 30대를 맞이했다. 아무 것도 준비 되어 있지 않은 30대 청년들에게 세상은 묻는다.
“당신은 20대 때 무엇을 하셨나요?”
어른처럼 보이지만 실상 정신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사춘기 청소년과 20대 초, 중반 고객님들이 좋아할 만한 그럴싸한 위로를 던져 주고 그들에게 강의와 책을 팔아먹고 부를 축적한 이들은 자신들의 팬과 독자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았다. 노후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의 노후는 온전히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청년들이 듣기 좋은 위로의 말에 속아 힘들게 취직한 일터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배낭매고 세계여행을 떠나려 할 때, 진실 된 책망과 훈계로 그들을 만류하던 부모들은 모두 자신의 자녀들로부터 꼰대라 낙인찍힌 원수가 되었다.
“어떤 것이 진정 네 자신을 위한 행동인지 생각해 보렴.”
“나는 엄마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자신의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그 못난 성인아이들을 책임져 주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고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그들의 부모들이다.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던 그 자상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들에게 감성을 팔아먹은 대가로 그들은 무엇을 얻고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들은 돈을 얻었고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얻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돈, 이것은 누구에게나 꽤 괜찮은 보상이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요상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고상한 말을 꺼내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은 지금 당장 돈이 안 된다 해도 그들에게 꽤 괜찮은 보상일 것이다.
자, 이렇듯 감성팔이들은 나름대로의 보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객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에게 젊음을 지불하고 받은 싸구려 위로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위로는 영원히 그들의 삶을 다독여주고 있는가? 그들이 말한 대로 실천 했더니 정말 인생이 행복해졌는가? 배낭매고 세계일주를 다녀왔더니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져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위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그렇게 내 사정도 모르면서 환심을 얻을 속셈으로 그저 듣기 좋은 립 서비스를 해대는 장사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상황을 알고 나를 정확히 아는 상태에서, 나의 오늘과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낼 때 위로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어떤 아픔이 있고 어떤 삶의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하나만 얻어 걸리라’는 식으로 뿌려대는 위로를 가장한 메시지는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타서 뭉쳐 놓은 밥덩이와도 같다. 그렇게 독이 잔뜩 들어 있는 밥 덩어리를 한 입 베어 먹고 독에 감염된 줄도 모른 채 듣고 또 들으며 ‘잘될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셀프 칭찬하며 살아가다가보면 어느새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꿈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오늘 짊어져야 할 자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청년들은 알아야 한다. 특별한 삶을 살겠다고 내버려 둔 본인 삶의 무게는 온전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진정한 위로는 나를 사랑하는, 그래서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음을...
신명기 :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신신당부. 축복의 땅인 동시에 물리쳐야 할 적들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어린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더 이상 곁에서 그들과 함께 해줄 수 없었던 모세, 모세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연설을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그 힘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떠난 자리에는 악한 어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경쟁이 치열한 사업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그만큼 검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경쟁이 거의 없는 신사업, 이른바 블루오션의 최대 단점은 그 안에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이미 수요가 확보된 검증된 사업 아이템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레드오션의 재발견입니다.
미용은 사람의 의식주와 더불어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급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요 또한 못지않기에 경쟁력을 갖추기만 한다면 1차적으로 생활이 가능해지고 나아가서 다양한 사업 확장도 꿈꿀 수 있습니다. 즉,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세상 모든 영역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경쟁이 없는 사업은 없습니다. 블루오션 조차도 사업성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삽시간에 경쟁자들로 가득 찬 레드오션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어차피 우리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는 어떤 사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을 지키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도, 생명력을 불어 넣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 승리가 미치는 영향력은 어디까지 일까요? 과연 생명의 주님은 우리 삶의 어떤 부분까지 함께 해 주실까요? 단순히 영혼구원에만 관여하실까요? 구원 받은 자녀들의 삶에는 무관심하신 분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마 1장 23절)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언급하며, 세상 끝나는 날까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에 대해서 약속합니다.(마 28장 20절) 돈을 벌기 위해 헤어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도자로서 헤어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이라면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14절까지의 적용]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샵에서도 복을 받고 세미나에 가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광고지의 소산과 서브 디자이너를 통해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5 대기용 소파와 경대와 세면대가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경쟁업체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가위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펌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샵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거룩한 디자이너가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손님의 소개와 간판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사 네 땅에 때를 따라 손님을 보내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디자인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세요.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고 기도를 하면 그 지혜가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마다 주님께 지혜를 구하면 문제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추상적이게 보이던 미용실의 성공과 실패의 메커니즘이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기도로 첫 단추를 꿰세요. 처음부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기도로 해결하는 습관을 들여 놓으면 나중에 큰 어려움이 찾아와도 기도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해결해 주소서”
본인이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 주소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업가에게는 ‘해결해 주세요.’라는 기도보다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이론 -
모든 경험자들의 말을 경청하되 누구의 말에도 휩쓸리지 마세요. 당신은 그가 될 수 없고 그의 환경은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좋은 스승을 구하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배울 수 없는 독특한 경쟁력을 갖추게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임마누엘,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당신만의 성공 공식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 실기 -
1) 컷트
실기에 있어 경험만한 스승은 없습니다. 실습할 수 있는 대상을 충분히 구해보세요. 두상에 따라, 얼굴형에 따라, 모발에 따라, 목의 두께와 길이, 심지어 피부색에 어울리는 최상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연구한다면 개인마다 어울리는 최상의 디자인을 제안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님과 호흡하며 조금씩 컷을 해나가는 섬세함을 추구합니다. 이 흐름은 연륜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레 과감함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하다 보면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2) 펌
본인만의 베스트 펌을 만드세요. 역시 실습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실기에서의 실력 = 실습한 숫자 입니다. 어설픈 경험자의 조언보다 인터넷 컨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실력 있는 경험자들이 주는 정보를 원하는 회수만큼 반복해서 봅니다. 기본기를 마스터 한 뒤에는 언제나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를 생각해 봅니다. 디자인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3) 염색
원 제품 그대로 사용하는 것 외에도 제품의 배합을 통해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색을 만들어 봅니다. 관심을 기울인다면 각 회사별 컬러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파악해서 응용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든 결과물과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고객과 나눌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분야에 열정이 넘치는 모습은 손님으로 하여금 당신만을 찾고 싶게끔 만들어 줄 것입니다.
- 교제 (community)
부정적인 말을 내 뱉는 사람을 멀리 합니다. 그들을 동료로 두면 당신의 믿음은 서서히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모든 커뮤니티에는 부정적인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디자이너 커뮤니티보다 믿음의 커뮤니티를 선택하세요. 그들의 기도가 당신을 지켜 줄 것입니다. 인맥관리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 말씀
손님이 없는 시간은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이 탄탄했던 전도자들은 모두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 기도
쉬지 말고 기도합니다. 내가 아닌 주님의 손길이, 손님 한분 한분의 머릿결에 깃들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디자인해 보세요. 당신은 곧 기도로 임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던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입사 후 1~2개월간의 교육을 마치면 창업 컨설턴트가 된다고 한다. 과연 그 정도 교육을 받고 제대로 된 창업컨설팅을 할 수 있을까? 3개월 만에 창업 컨설턴트를 그만두고 나온 신씨의 말이다.
“예를 들어 볼게요. 멀쩡하게 장사 잘하고 있는 가게를 찾아갑니다. 권리금 1억 받아 주겠다고 해서 매물접수를 받아 오는 거예요. 그리고 가게 보러 오는 사람한테는 1억 4천만원에 팔아요. 4천만원이 우리 수입이 되는 거죠. 근데 회사랑 내 위에 팀장이란 놈이 다 해 처먹고 제 손에 쥐어지는 건 얼마 없더라니까요. 가르쳐 준 것도 없으면서 일은 내가하고 돈은 지들이 챙기고...”
문제 )
A, B, C, D 총 4개의 프랜차이즈가 있다. 창업컨설턴트는 과연 어떤 매물을 고객에게 소개할까?
1. 고객에게 적합한 물건
2. 본인에게 수당이 많이 남는 물건
진실 된 창업컨설턴트가 아니라면 정답은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는 한 건의 수당이 달린 것이겠지만 의뢰인에게는 인생이 달린 문제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비자들은 이들에게 속는 것일까?
사람들은 좋은 것보다는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학부모들은 잘 가르치는 학원보다는 잘 가르칠 것처럼 보이는 학원을 선택한다. 이렇듯 소비자들의 안목은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에 치중한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학원이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곤 한다. 인테리어와 교육품질은 연관성이 없다. 소비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감성은 언제나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다.
전문가보다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계약을 따내기도 한다. 부동산, 창업, 보험, 재테크, 투자자문등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는 지나치게 어린 청년들은 조금 더 유의하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문성은 대체로 연륜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남에 사무실을 열고 수입차를 타며 그럴듯한 인테리어와 전문가처럼 보이는 옷차림과 말투로 무장하면 속는 사람이 제법 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저렇게 핸섬하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멋진 꽃 미남이 전문가가 아닐 리 없어.’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많다고 다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질을 꿰 뚫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지혜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훈련도 되어 있어야 한다. 이따금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망할 만한 자리에 망할 만한 점포를 낸 오너들을 보곤 한다.
‘아니 어쩌자고 여기에 저런 가게를 냈지?’
얼마 후 가보면 그 가게는 이미 폐업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자신의 예측이 맞아 떨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제 3자의 눈에는 보이는 것들이 당사자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하면 보이는 것들이 ‘당장 뭐라도 해야겠다’는 조급함에 쫓기는 당사자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망할만한 자리에 망할 만한 점포를 오픈한 이들 중에는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소개를 받은 이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문가’라는 호칭은 전문성이 없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 된지 오래다. 어제 입사했어도 오늘부터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전문성을 확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몫이 된다.
“본사 소개로 계약했는데 나중에 주변 상인들이 저에게 바가지 엄청 썼다고 하더라구요.”
국밥 프랜차이즈를 하는 민호씨는 좋은 자리를 구했다는 본사 직원의 말만 듣고 권리금을 2500만원 주고 가게를 계약했다. 그러나 입점 후 주변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점포는 원래 권리금이 없었던 자리였다. 그 돈은 누가 챙겼을까? 오죽하면 중개거래의 불문율이 ‘아는 사람한테는 절대 사지 말 것’이 되었을까.
"받고 싶으신 금액이 얼마인가요?"
"2억입니다."
"그럼 2억 이상 받으면 제가 갖겠습니다."
"그러세요."
중개인은 2억5천에 부동산을 매도 했고 5천은 본인이 챙겼다. 시세보다 5천을 더 주고 산 사람은 중개인의 지인인 듯하다.
"아, 글쎄 나만 믿고 투자하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중개거래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상황이다. 직접 시세조사만 했어도 확인 할 수 있는 문제들을 확인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생각의 부재를 겪고 있다. 급할수록, 바쁠수록 생각하는 능력은 더욱 더 마비되어 온다.
“네가 손님이라면 이거 먹고 또 오고 싶겠니?”
자기가 먹어봐도 맛없는 음식을 파는 이들이 있다. 맛없는 음식으로 창업을 하면? 망한다. 전혀 어려운 예측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교육이 없어도 누구나 예측해 볼 수 있는 이 간단한 생각조차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은 생각의 결핍을 겪고 있다. 그 공백을 우리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는 말이 있다.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바뀌어도 방향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지식들이 정보의 홍수를 이루며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이 많은 정보들을 모두 검토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지혜이다. 지식은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지식을 더한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지혜는 일견 동의어인 듯 보이지만 의미적 차이가 크다. 지식은 단순히 특정 대상에 대한 정보를 의미하고 지혜는 그것들을 수집, 분석할 수 있는 전체적인 운용능력을 뜻한다. 지식이 있어도 사람은 실패할 수 있으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지식 가진 자를 요구하지만 지식을 가진 자는 지혜를 가진 자의 다스림을 받는다. 지식을 가진 자는 필요에 따라 쓰임 받고 버림도 받지만 지혜 있는 자는 늘 존귀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초월하는 하늘의 지혜를 공급 받을 수 있다.
성경 곳곳에서는 지혜를 예수님의 대명사로 표기하고 있다. 실제로 ‘지혜’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 바꿔 대입시켜도 본래의 의미 전달에 무리가 없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 잠언 1장 20절
‘예수님=지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곧 지혜의 임재를 의미한다.
생각의 부재에서 온 현대인의 공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채울 수 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울 수 있다. 연륜을 초월하는 탁월한 지성은 강력한 영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다.
성령 충만하면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지성이 공존하는 소위 말하는 초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기도하면 뜨거운 열정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 속에서 침착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덕지덕지 포장한 세상의 두꺼운 속임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경력직 근무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근무해도 받는 급여가 200만원 안팎, 다녀야 하나? 다녀야 한다. 그런 직장이라도 다녀야 하는 이유는 그거라도 버는 것이 벌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돈 때문만이 아니다.
꿈을 찾는 다는 핑계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놀면서 소득 없이 살아가는 성인들이 있다. 배움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타인의 원조를 받으며 일평생 공부만 하다가 늙어 죽어가는 젊음들이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전공심화를 거쳐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직업 없는 삶을 살아가는 다 큰 자녀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저, 다시 공부해서 좋은 직장 가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에만 몰입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너 지금 하루에 몇 시간이나 공부하니? 한 16시간씩 하니? 다 큰 녀석이 다른 가족들에게 도움 받아가면서 공부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지.”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넌 지금 성인이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안 하고 있잖아. 더 큰 꿈을 위해 극단적으로 회사를 나온 사람이 여가생활은 평범한 사람처럼 하려고 하니? 문화생활도 포기하고 친구도 만나지 말아야 공평한거 아니니?”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공부도 극단적으로 할 자신 없으면 남들처럼 일단 일을 시작해. 그리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해. 너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니?”
“...”
“삶을 살아나가는 방식이야. 절대로 소득의 공백을 만들지 마. 인생은 네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는 거야. 돈 벌면서 꿈을 좇는 삶도 나쁘지만은 않아.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잖아. 그런데 잘 거 다자고, 놀 거 다 놀면서 너의 꿈이 이루어질까.”
“독하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니? 넌 이미 학창시절동안, 공부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 했어. 그런 네가 지금부터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지금부터는 진짜 열심히 할 겁니다.”
“이미 십년 넘게 주어졌던 기회를 날린 사람을 뭘 믿고 가족들이 또 다시 희생을 해야 하니?”
“지금 취직할만한 곳은 급여가 너무 적어요.”
“그래. 잘 봤어. 정확한 문제제기야. 그래서 고작 생각해 낸 해법이 아예 돈을 안 버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꿈속에서 나와 현실을 살아. 꿈은 현실에 있는 사람이 추구할 때 의미가 있어. 당사자가 아예 꿈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현실은 어떻게 되겠니? 너의 부모, 형제, 배우자와 자녀들은?”
“의지력이라는 단어를 보면 뒤에 힘력(力)자가 붙어 있잖아. 이처럼 힘력 자가 붙는 모든 것은 훈련을 통해 힘을 키울 수 있어. 정신력, 인내력, 친화력, 의지력 등등... 우선 일을 해. 일을 하면서 꿈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의지력을 훈련해. 일 끝나고 스마트폰 볼 시간에 공부를 해. 그리고 운동을 해. 여가 시간을 꿈을 이루는데 온전히 사용해봐. 만일 여기서 실패한다면 넌 절대로 회사를 그만둬선 안 돼. 드라마 보다보면 가수를 꿈꾸는 철부지 50대 백수 남편, 이런 컨셉의 캐릭터들 가끔 나오잖아. 그게 네 미래 모습일 수 있어.”
“헐.”
“꿈은 배움이 아니라 의지력, 정신력 등등 이런 힘으로 이루어 내는 거야. 정말 강한 의지로, 공부만 할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된다면 그 때가서 도전해. 너의 인생에 스스로 리스크를 발생시키지 마.”
“그럼 어디에 취직할까요?”
“공짜로 부려 먹는 곳만 아니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최저임금 안팎의 임금을 주는 직장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야.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넌 그곳에서 목소리 내는 훈련을 해야 해.”
“목소리 내는 훈련이요?”
대기업 S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월급은 많이 주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다.”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지만 S그룹처럼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돈도 조금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주는 곳이다. 양극화로 인한 경제생태계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받고 일을 해야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급여는 어디까지나 내가 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나의 자존심과 스트레스에 대한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건비를 계산 할 때는 일반노동력 + 감정노동력을 함께 계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 값은 얼마일까?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보면 스트레스에 대한 시간당 비용을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병도 만들지만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할 수 있는 에너지도 고갈시킨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능하게, 점점 바보로 만든다. 즉, 사람이 계속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점점 망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목숨 걸고 일하는 분들에게 생명수당이 붙듯 스트레스 또한 그래야 하지만 세상은 그 값을 쳐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계산해야 한다.
“고작 이정도 급여를 주면서 나에게 그런 부당한 스트레스를 줘?”
그런 생각이 든다면 당당하게 상황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훈련을 하자. 어차피 그 직장에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누구인가? 당신의 부모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해서 키운 귀한 자녀가 아니던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모른척하지 말자. 그리하면 당신 자신이 당신을 더욱 믿고 따를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온유함이지 비굴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당당함과 겸손의 밸런스를 갖추십시오.”
주먹으로 싸워서 이기면 0점, 말로 싸워 이기면 50점, 상대방을 속상하게 하지 않고 나의 품위도 지키며 승리했다면 100점이다. 화를 자주 내면 흥분 잘하는 성격이 된다. 흥분하면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
승패의 가장 큰 보루는 평정심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세상과 맞서는 법을 훈련하자. 훈련하면? 훈련된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키며 세상을 이기는 법은 충분히 훈련가능하다. 화를 내야만 하는 순간을 위해 거룩하게 화내는 법을 연습해두자. 해법은 잠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벽에 붙여 놓은 조직도를 바닥에 눕혀서보면 수평이 된다. 바닥에 붙여 놓으면 보기가 불편해서 벽에 붙여 놓은 것일 뿐, 조직도는 원래 그렇게 보는 것이다. 상하관계, 즉 직장 내 서열이 인간의 서열까지 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해진 근무시간보다 더 일시키고 연장 근무수당을 주지 않는 도둑질, 시집 못간 히스테리를 나에게 부리며 함부로 구는 직장 상사,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오너 등등...
우리는 이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형은 너희들이 만만해서 가장 많이 간다는 인바운드 콜센터, 특히 아웃소싱 업체가 주관하는 업체는 추천을 하고 싶지 않아. 많은 친구들이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받으며 일평생 들어 본적 없는 욕을 먹어. 그 모습을 부모님이 보시면 어떠실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라는 말, 많이 들어 봤지? 내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지켜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회사는 자기회사 사원들에게 욕설을 내뱉는 고객을 왜 그냥 두는가?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고객님, 지금 저한테 욕하셨나요? 고소하겠습니다.”
모든 상담원들이 욕설을 들을 때마다 회사를 그만 둘 각오로 강경대응 한다면, 비겁하고 못된 손놈들도 없어지겠지만 무엇보다 회사가 미리 나서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쩌면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급여에 반영 될지도...
구직사이트에 정기적으로 계속 모집공고를 올리는 회사는 직원들이 끊임없이 퇴사하는 회사다. 입사지원 시 신중을 기하자. 사람들이 자꾸만 그만두는 곳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콜센터는 적은 급여에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할 정도로 직원을 닦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 회사는 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우린 그런 회사라도 다니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현실 탓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나태함이 골수까지 파고들어 정신이 썩어버릴 수있다.
박봉을 주는 회사에서 얻을 것은 비전이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놀지 않고 일을 하는 성실함과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누구 앞에서든 여유롭고 당당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훈련을 해보자. 성공에 필요한 값진 자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유하되 당당하고, 당당하되 겸손하자. 언제든 그만 두어도 되지만 도망치진 말자.
꿈도 비전도 없는 직장에서, 어떻게든 최소 급여로 최대한 사람을 부려먹을 궁리만 하면서 감히 부당한 스트레스까지 준다면? 당당함을 실습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이것은 S그룹 사원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터무니없는 급여를 주는 회사의 사원들에게만 주어지는 역 스톡옵션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짤릴 까봐? 그런 회사, 옆에 또 있고 옆에 또 있고 옆에 또 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고들 한다. 당신은... 그곳에서... 잃을 것이 없다.
* 장애 : 활동을 하는 데 한계가 있거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지칭한다 (두산백과)
손에 장애가 있는 이는 손으로 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 발에 장애가 있는 이는 발로 작업을 할 수 없고, 청각 장애가 있으면 들으면서 해야 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손도, 발도, 청각도,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 스스로 성실히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으나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능력자 또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욕을 먹을 정도로 심각한 업무장애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지육신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장애인’ 취급은 받지 않는다.
신체적 장애는 있으나 성인으로서 해야 할 ‘밥값’을 하는 사람, 신체 건강한 성인이지만 ‘밥값’도 못하는 사람, 둘 중 누가 진짜 장애인일까?
우리는 앞서 ‘장애’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이들을 장애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덕분에 그들은 본인들이 정상인인 줄 착각하고 산다. 그래서 심각한 줄 모른다.
의료기술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장애는 사람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장애는 기적으로만 극복되는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의지적 장애 역시 그러한 듯하다. 그들에게도 만물을 소생케 하는 주님의 기적이 필요하다.
마치 메마른 뼈에 힘줄과 살이 차오르듯, 아골 골짜기처럼 바싹 말라비틀어진 정신 상태에 주님의 생기가 임하시면 그는 곧 꿈꾸는 자가 된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실천해야 할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는 의지가 뒷받침되기 시작한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주님께 접붙임을 받은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삶의 문제 앞에서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영적 장애를 가진 이는 꿈만 있고 꿈에 대한 대가는 지불할 줄 모르는 의지적 장애인이 된다. 그는 좋은 강의를 모르핀처럼 자신에게 주입하며 방구석에 앉아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생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시대에도, 아니 짐승들조차도 가장 생산성 있는 나이를 그처럼 생산성 제로의 상태로 보내며 노년을 기다리진 않는다.
이제 그들은 좋은 말로는 통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지만 본인 스스로를 어찌 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그들에게서 최소한의 생산성이라도 뽑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노예를 부리던 인간들처럼 두들겨 패서라도 일을 시키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장애의 근원을 유추해보자.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하고자 하는 본인 의지에 반항하는 내안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바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의지적 장애를 최초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절대 다수가 그럭저럭 학교는 다니지만 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공부와 담을 쌓는다. 넘지 못한 그 담벼락은 그대로 남겨져서 사람들의 다음 도전을 가로막는다. 성인이 된 뒤에도 몇몇 소수만이 그 장애물을 넘을 뿐, 역시 다수는 그것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럭저럭 직장을 다니거나 자영업을 한다.
이미 10년 넘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배어 버렸다. 그것은 게으름, 의지박약, 불성실, 작심삼일 등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장애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현대인들 중에 상당수가 부분적 의지장애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꿈은 있으나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렇게 수년이 더 지나버리면 꿈마저 사라져 버린다.
이렇듯 자신이 뜻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없고, 행동할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사람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 꿈대로도 못사는 나를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 내 뜻에 반항하는 이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자신의 삶에서 본인의 의지로 존재하길 바란다면 누구든 한번은 그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평생 그는 그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병원에서 치유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불치병에 가까운 난치병이다.
하지만 차라리 우리에겐 잘 될 일일지 모른다. 해법이 명확하지 않은가. 불치병을 대하는 유일한 자세는 기도, 기도뿐이다. 믿음으로 기도해 보지 않았던가. 주님은 무턱대고 돈 달라는 기도 빼고는 정말 신기하리만치 잘 들어주신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응답 되는 기도, 눈으로 보일 정도로 확연히 드러나는 기도의 응답은 아마도 장애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기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이다. 장애를 없애 달라는 기도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응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예외 없이 응답 된다.
이미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무수한 성도들의 간증이 있지 않은가. 단순히 장애를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압도적 존재가 되어 있다. 그들은 그 신체적 장애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고, 인간으로서 한 번은 넘어야 할 그 담장을 넘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장애가 축복이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 의지적 장애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주님은 그를 모른 척 하실까? 그를 방치하실까? 그렇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 두실까?
성경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장애, 심각한 장애가 있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환경이 자신에게 임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누구도 당신에게 성공의 길을 대신 찾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만큼은 확실히 막아 드리겠습니다.’
상진의 눈에 벽에 걸린 독특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천편일률적인 문구가 아닌 것이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피자가게를 내고 싶다고 하셨죠.”
“네”
“어떤 업종이든 일단 시작한 다음에는 앞만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점이 있는지를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간은 시작하기 전까지입니다. 시작 전에 모든 부정적인 면을 충분히 찾아보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약금을 지불한 뒤에는 괜찮지만 완불한 뒤부터는 부정적인 생각을 1%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 이미 계약금을 지불한 뒤에도 계속 위험요소나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출혈을 막는 방법이지요.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해 볼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는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니까요. 그래서 계약금은 최대한 적게 거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눈이 멀어 계약금을 걸기 전까지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계약금을 걸고 난 뒤에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도 그 때나마 깨달은 사람은 양호한 겁니다. 인테리어까지 다하고 개업하는 날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실제 계약금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나요?”
“대개는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예전에 학원을 오픈하려던 원장님이 계약금을 걸고 보니까 아차 싶은 부분이 발견 되더랍니다.”
“그래서 계약금을 순순히 포기 했나요?”
“그분은 예전에 한번 창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지요. 그때도 계약금을 걸고 나니까 문제점이 보이더랍니다. 그러나 이미 지불된 계약금이 아까워서 일을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훨씬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답니다.”
“훨씬 큰 손해요?”
“인테리어와 시설, 집기류 외에 기회비용 등의 보이지 않는 손실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문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에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성장하게 되지요. 그 원장님은 계약금 100만원을 손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곳에서 수강생 100명이 넘는 학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포기한 계약금 100만원으로 명당자리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면 수업료치고 비싼 것은 아니지요.”
세상에는 반드시 수강료를 지불해야만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실패 또한 그러하다. 가장 좋은 배움은 타인의 실패를 거울삼아 배우는 것이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 간접경험을 직접 경험화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계약금을 건 시점을 계약 완료 시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계약이 완료 되는 시점은 계약금을 모두 지불한 다음이다. 사실상 그 전까지는 완전히 결정 된 것이 아니다. 즉, 돌이킬 수 있다. 계약금은 손해를 보겠지만 때로는 그런 특별한 결단이 특별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생선조림을 만들다가 불을 줄이는 타이밍을 놓치면 재료가 눌어붙다가 나중에는 타게 된다. 요리에 서툰 초보 주부는 이럴 때 탄 부분을 국자로 긁는다. 그렇게 해서 탄 부분이 요리 전체에 퍼져버리면? 모든 재료에 탄 맛이 베어서 요리 전체를 먹지 못하게 된다. 재료가 타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탄 부분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냄비로 옮기는 것이다. 번거롭고 귀찮아보여도 이것이 최선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인생을 걸 정도의 비장함이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최선의 컨디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돈에 맞추어, 형편에 맞추어 적당히 끼워 맞추려는 태도를 추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창업하기 전에 결함이 발견 되었다면 탄 냄비에서 즉시 꿈과 비전이라는 재료를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 그때 중단했어야 하는데...’ 라는 쓴 후회의 맛을 평생 음미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올 수 있는 빌미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은 마치 수도꼭지와 같아서 한번 틀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정적인 생각은 지배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그 부정적인 생각이 내 몸과 마음을 장악해서 일도 하기 싫게 만들고 의욕도 소멸시켜 마침내 실패를 안겨 준다.
초긍정 상태에 이른 사람은 평상시에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반대로 부정의 정점에 이른 사람 또한 평상시라면 하지 않을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선택한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둔한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목숨까지도 끊게 만든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게, 부정적인 요소를 사전에 봉쇄하려 한다면 완불 전에 모조리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계약 완료 후, 이미 창업한 뒤에 문제점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땐,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일단 사업이 시작된 다음부터는 절대, 절대로 금물입니다. 그것이 설령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 해도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 둘 부정적인 생각들을 용납하다보면 그 못된 생각의 낙타가 어느새 나의 텐트를 모조리 장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오싹하네요.”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주님께 기도하자.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더 큰 긍정의 마음으로 그것을 덮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문제없는 사업은 없습니다. 문제에게 주도권을 뺏기면 사업은 죽은 목숨,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덤벼라. 기도로 상대해 주마. 1시간 기도해서 안 되면 2시간, 2시간 기도해서 안 되면 3시간, 아니 날마다 죽도록 기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너를 극복하고야 말겠다. 끊임없는 기도로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그럼 저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일단 기도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께 기도로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다음은요?”
“피자가게의 좋은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피자가게를 창업하려고 하시는 거겠지요?”
“네.”
“그럼 지금부터는 피자 가게의 나쁜 점. 즉 피자가게를 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최대한 찾아보세요. 이렇듯 생각이 필요한 모든 부분을 기도하며 고민해 보십시오. 그러면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지혜로운 생각의 홍수가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가요.”
“오늘은 시간이 많이 되었으니 다음에 뵙지요. 오늘 상담료는 피자로 받겠습니다. 앞장서시지요.”
예능강의는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서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를 말한다. 이런 강의는 예능처럼 재미있고 듣기는 좋으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연 직업자체가 우리에게 원초적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일을 하며 겪는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과정을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일 자체가 게임하듯이, 영화 보듯이 즐거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실제로 게임을 해서 돈을 버는 프로게이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게임이 너무 좋아서 게임으로 돈을 버는 프로게이머가 되는 순간부터 이들에게 게임은 일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게임이 일이 되는 순간부터 게임에 농땡이를 부리는 게이머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습 즉 게임을 게을리 한다.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하더니 이젠 게임도 하지 않으려 든다.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도 게임이라고 부르는 그들 세계의 업무를 열심히, 꾸준히 한 사람만이 성공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던 일도 그것이 업무가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취미로 할 때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문성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복이 필요한 요소들이 발생한다. 이 단순한 반복이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결국 아무리 즐겁던 일도 즐겁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평생 다른 일을 찾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여행이 좋아 가이드가 된 사람에게도 업무적 권태기가 찾아오고, 만화가 좋아서 만화가를 선택한 이들, 심지어 목회자에게도 슬럼프는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업무적 슬럼프를 극복해서 꾸준하게 한 분야에 매진하게 만드는 인내와 끈기일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예능강의만 믿고 즐거운 일을 찾으려 하고 있다. 어딘가 그런 일이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그런 일거리를 찾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적성, 즉 즐거운 일을 찾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적성을 찾은 사람을 혹시 주변에서 본적이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일, 즉 즐거워서 가슴이 뛰면서 질리지도 않는데 돈도 벌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상상속의 동물 유니콘처럼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유니콘을 보았습니다.”
유니콘을 보았다는 정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정수는 더욱 신이 나서 강의를 하지만 사실 그는 유니콘을 본적이 없다.
“유니콘을 만나면 너무나 즐겁고 힘이 나며 돈도 생긴답니다.”
그의 말만 믿고 유니콘을 찾으러 떠난 청년은 이제 50대를 바라보는 중장년이 되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유니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도 유니콘을 보았습니다.”
유니콘을 보았다고 말해서 짭짤하게 강의 수입을 올리는 정수를 보며 유사품 예능강사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유니콘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예능강사들이 활동하는 지금, 이제 누구도 유니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서 유니콘은 발견되지 않았다. 보았다는 강사들은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본적이 없다. 즐거운 일, 그래서 감정적인 기복 없이 끝까지 즐겁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은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는 듯싶다.
즐겁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려 노력해서 일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일이 게임처럼 즐거웠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은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이일저일 깨작거리는 모습은,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영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할 줄 안다.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평생 만족할 수 없다.
이백만원 벌던 사람이 오백만원을 벌게 되어도, 칠백만원, 일천만원을 벌게 되어도 곧 그는 학습 된 대로 만족감을 소멸시키며 더 강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자극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만족감을 느끼는 습관이 필요하고 그것은 감사하라는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완성이 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집중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무리 좋은 일이 주어져도 집중할 줄을 모른다.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은 유니콘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즐겁지 않아도, 힘들어도, 인내하며 꾸준히 한 분야에 매진하다 보면 열매가 맺히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찾던 유니콘, 업무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인 것이다.
업무적 성과를 보는 즐거움은 그동안의 노고를 단번에 잊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열매가 없는 동안에도 꾸준히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앞으로 열릴 열매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모든 노력을 가능케 하는 탁월한 원동력이다. 반면, 열매 맺지 못하는 이들은 ‘믿음’이 없다. 그들은 본인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하지 못한다.
그들은 본인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본인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켜보며 더욱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행동이 불성실해질수록 그들은 더욱더 부정적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그들은 미래의 텅텅 빈 바구니를 바라보며 더욱 꿈도 희망도 사라져간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성인으로서 한 직종에 몸을 담고 꾸준하게 돈을 벌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주님께서 주신 믿음 덕분이다. 주께서 좌정하사 우리 삶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시면 나이가 들어서도 나이 값, 밥값 못하는 어른이 되어 깃털처럼 가벼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진득하게 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누리는 호사 중 한가지임에 분명하다.
즐거운 업무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즐기려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가치 있는 일을 찾겠다고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사람들의 눈에 가장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한 사람보다도 가치 없는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다니엘은 지배국 바빌론에서 고위 행정직을 지냈다.
누군가는 그를 적국의 앞잡이라며 맹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복자들의 나라에서 권세를 잡아 자기 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예루살렘을 재건케 했다. 끌려간 노예가 그토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목숨 건 기도가 있었다. 이는 꿈 해몽과 같은 초월적 지혜로도 나타났다.
그리고 말씀이 있었다. 다니엘은 정복자들의 나라에서 고위급 관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고레스 왕의 세계 정복에 동기를 부여했다.
“왕이여 보소서. 여기 성경에 당신의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천하를 다스릴 자로 준비하셨습니다. (단 2:48)”
말씀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신의 경전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는 예언을 본 고레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니엘이 전해 준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세상을 정복할 믿음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롬 10:17)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고레스에게 발현했던 믿음의 메커니즘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이루는 실질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히 11:1)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바빌론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성도들 또한 기도와 말씀을 멀리하다가 온갖 사탄 숭배자들의 심볼로 도배된 게임과 대중문화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기술 발전에 따른 환경 변화와 맞물려 ‘메타 유니버스’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배국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는 모든 말과 행동이 감시 대상이다.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통제 시대의 전조다. 사람들은 이미 ‘언론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고 검열이라는 플랫폼 소유주들의 기준에 순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정이 삭제되거나 정지되기에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바빌론과도 같은 메타버스의 권세 앞에서 다니엘처럼 선한 능력으로 일어설 것인가? 그저 ‘나쁜 것’이라고 비방하며 오프라인만 고집하다가, 신문물로 무장한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집과 재산, 가족들을 빼앗기는 쇄국 정치의 끝을 경험할 것인가?
필자가 추천하는 최적의 기도 환경은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다니엘 또한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게 되었다. 나의 무능이 드러날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그 힘’의 필요성은 극명해지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최적의 기도 환경을 제공한다.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곳은 오프라인에 비해 기도 응답 또한 빠르고 수월하다. 오프라인에서 고객을 이끌기 위해서는 ‘물리적 이동’이라는 매우 번거롭고 긴 절차가 요구된다. 이는 고객의 구매 결정을 방해하고 변심을 유도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결정하는 즉시 결제가 이루어진다. 또한, 만남을 갖기 위해 부수적으로 소요되던 외출준비와 이동이라는 시간 소모가 없다.
“고객을 보내주세요”
기도하면 즉시 하나님께로부터 반응이 온다. 고객을 보내 주시거나 고객을 이끌기 위한 아이디어를 주신다. 계속 기도하며 행동하다 보면 결과물이 나온다. 그렇게 기도하며 준비한 결과물들은 당장 성과가 없다해도 훗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비용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누구나 리스크 없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멋지게 인테리어 된 매장이 없어도 그런 매장을 갖춘 사람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는 이 환경은, 아마추어 프레이어(prayer) 에게도 기도해 볼 엄두가 나게 만든다.
밸류체인은 이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를 제공한다. 온라인 공간이 아니었다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이런 인재들을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난이도 있는 글을 소화할 수 있는 문해력과 전문성을 갖춘 기도하는 성도들로만 멤버를 구성해서 공통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오프라인이었다면 대체 얼마의 비용과 기간이 소요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성도님들과 그 부모님, 자녀와 형제자매들이 밸류체인에 오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영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밸류체인을 찾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주님께서는 세계 곳곳에서 나고 자란 영재들을 밸류체인에 보내주시고 있다.
user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온라인에서는 어린 나이로 인해 받는 업무적 제약이 없다. 그러므로 어린 멤버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만 찾아주면 누구보다 빠르게 관련 분야의 전문성을 형성하여 실무에 투입가능하다.
조금만 훈련하면 어지간한 어른만큼의 결과물을 내고 이내 추월한다. 배운 스킬은 당장 현금화도 가능하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브랜딩 레퍼런스가 된다.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으로 이력서를 장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스킬은 아래처럼 링크 하나로 이력서를 대신한다.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이 박봉, 구직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학력이라고는 내세울 것 없던 이들이 그들보다 더 많은 소득과 시간적 여유를 누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경쟁력의 기준이 스펙에서 실무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메타버스는 지금껏 누구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환경이다. 때문에, 기능의 다양성과 방대함을 측량할 수조차 없다. 이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마스터급 전문성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먼저 선점하고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사람이 기준이 될 것이다. 먼저 개척한 사람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대륙과도 같은 메타 유니버스에서 당신을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어떤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지혜를 후히 주시고, 급한 실무에는 ‘만남의 축복’을 통해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는 하나님뿐이다.
밸류체인에는 실무 능력 없이 강의만 할 줄 아는 ‘이론만’ 전문가가 없다. 밸류체인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신 유명 히어로도 없다. 필요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정직과 전문성은 밸류체인이 보증한다.
주님께서는 이곳에 필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다. 비용 없이, 오로지 기도와 말씀으로만...
교회의 기둥과 벽돌 역할을 하는 것은 성도이다. 성도만 있으면 이 교회는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다. 성도가 곧 교회이기에 성도를 세워야 한다. 세운 성도는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한다. 성도라는 교회의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성도들의 리스크 없는 사업체 건립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체를 이룬 밸류체인 멤버들은 미국, 일본, 호주, 베트남, 미얀마 어느 나라 어느 환경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각자가 소유한 정보를 공유하고 검토하여 기회는 추구하고 리스크는 배제한다.
이 교회는 목회자들의 목회 지원 시스템이다. 이는 필자가 신학생 때부터 동기들에게 선포해 온 ‘나는 목회자들을 후원하는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기도의 응답이다. 또한 이 교회는, 사업 현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성도들과 함께 싸워줄 연합군 지원 시스템이 될 것이다.
1세대 교회가 교제 중심, 2세대 교회가 건물 중심으로 모였다면, 3세대 교회부터는 비전을 공유하는 비전 중심의 교회이길 소망 한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비전과 일치해야만 한다.
‘말로만 비전’이 아니라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을 정도의 디테일을 갖춘 구체적인 비전, 하나님을 핑계로 상대방을 소모품처럼 공짜로 사용하다가 잘 되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이기적인 비전이 아니라, 참여자 모두에게 실질적인 득이 되기에 함께 지속적으로 공유 가능한, 누구나 상식만 있다면 이것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공개된 정직한 비전 말이다.
통상적으로 폐업은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는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먹고 살만한 가게들이 문을 닫는 경우들도 즐비하다. 그들이 문을 닫는 이유는 ‘먹고 살만’만 하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 두고 싶어지는 슬럼프를 경험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직원일 때의 가장 큰 메리트는 최악의 경우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다. 퇴사로 인해 발생하는 별도의 금전적 지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폐업 비용, 즉 그만둘 때도 지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돼지씨는 주5일, 9시부터 18시까지 근무하시는군요. 토, 일, 공휴일은 쉬시나요?”
“꿀”
“지금부터 오너가 되면 겪게 될 불편요소를 생각해 볼 겁니다. 대체로 음식점을 하면 주말과 공휴일은 쉴 수가 없습니다. 주말 매출이 평일 매출의 1.5배에서 많게는 두 배 이상 되는 곳도 있으니까요. 좀 더 명확히 말씀드리면 쉴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직원과 오너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꿀꿀”
“직원은 쉬어도 월급이 나오지만 오너는 쉬게 되면 지출은 있는데 수입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고정 지출이 600만원인 점포의 경우, 하루 쉴 때마다 주머니에서 20만원씩 없어지는 셈이죠. 직원일 때는 휴가비를 받고 쉬었는데 오너가 되면 휴가비를 내면서 쉬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돈이 나간다. 이 얼마나 두려운 상상입니까?”
“꾸우울?”
“하하. 그건 본인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 돼지씨는 지금 오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는 겁니다. 혹시 여행 좋아하십니까?”
“꿀”
“정기적으로 반드시 여행을 가야만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이 오너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당분간 여행 금지. 그런데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돼지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에그 타르트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돼지씨는 지금 10시간 정도 근무를 하고 계신데요. 퇴근하면 집에서 일 생각 전혀 하지 않고 쉬십니까? 업무로부터 해방이 되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꿀”
“그럼, 여기서 다른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창업을 계획하시는 이유가 뭐죠?”
“...”
“큰돈을 벌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인가요?”
“....”
“사실 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본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업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럭저럭 수익이 발생하던 점포가 슬럼프로 인해 폐점에까지 이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적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으시지요?”
“꿀”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꿀꿀꿀 꿀꿀꿀꿀꿀”
“네. 맞습니다. 성공을 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동기라는 놈이죠. 그러므로 성공을 위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동기의 부여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만일 이것이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성공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기를 갉아 먹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슬럼프라는 것이죠. 예전 우리 부모님들 세대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어도 더 이상 바랄게 없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일자리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저 일거리가 있는 것에 감사하고 힘들어도 견디면서 다들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여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상당수의 오너들이 먹고 살 만큼의 수입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삶의 질 대비 수익이 기대에 못 미쳐서 슬럼프를 겪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폐업을 합니다.”
돼지는 이야기에 몰입될수록 에그 타르트를 소중한 보물인 것 마냥 감싸 쥐었다.
“실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대치동에 칼국수 집을 창업한 은행 지점장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넉넉한 월급으로 생활하시던 분께서 칼국수 집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을 위해서 본인이 노후를 준비해보려는 좋은 동기였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창업을 해놓고 보니 본인이 그토록 좋아하던, 대낮에 찜질방 가서 고스톱치기를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말까지 일해서 버는 수입은 대략 400만원.”
“꿀?”
“네, 그만하면 꿀이죠. 그 당시에 그분의 나이와 경력에 비하면 괜찮은 수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겐 그 정도 고생해서 번 돈치고는 너무도 작게 느껴졌었나 봅니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누구도 자신의 짐을 나누어질 사람이 없다는 것, 결국 심리적 부담감에 우울 증상이 극에 달해서 가게를 처분했습니다.”
고액 연봉자가 아니라면 1억을 모으는데 5~10년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한방에 털어 내는 것이 사업이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는 사업이 주식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망한 사람들이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며 꼭 하는 말이 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생활패턴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나중에 슬럼프로 폐업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근무환경, 소득 등 본인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하려는 사업이 자신이 원하는 조건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예) 나는 하루 10시간까지만 근무하고 싶고 주말, 공휴일은 쉬고 싶다. 그러나 월 소득이 700만원 이상 된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해 보니 내가 하려는 사업은 주말과 공휴일 근무가 필수였다. 게다가 월소득 700만원을 벌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겠다.
많은 이들이 본인이 선택한 업종이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템인지 조차 확인해 보지 않고 사업을 시작한다. 본인이 감수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가 클수록 슬럼프에 빠질 확률은 크다. 주말마다 여행을 가는 것을 포기하기 힘든 사람이 주말 근무가 필수인 업종을 선택한다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첫째, 선택한 창업업종에서 받게 될 기대소득과 지금 본인이 직장에서 받는 급여를 비교해 볼 것
둘째, 오너가 되면 직원으로 일할 때 보다 얼마만큼 더 일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더 많은 일을 했을 때 수입은 얼마나 더 들어오는가?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것
일은 더 많이 하는데 수입은 그대로이거나 더 적게 들어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계속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개인 사업자들의 소득은 높지 않다. 예를 들어 같은 업종에 근무하는 근로자가 사업주보다 더 큰 소득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월 소득이 300만원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이것저것 제하면 특별히 손에 쥐어지는 돈 없이 간신히 생활비만 빠듯하게 충당되는 경우도 많다. 이때 가장 많이 드는 생각.
“이거 벌자고, 내 돈 들여서 이 고생을 하나?”
그리고 이 부정적인 생각에 점차 동화되면 마침내 슬럼프가 그를 덮는다. 슬럼프는 창의력과 능동성을 마비시킨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창의력과 능동성이 작동 불능상태가 되었으니 작은 문제가 찾아와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시간 나면 스마트폰이나 하면서 근무시간만 때우다가 마침내 폐업까지 이르는 수순을 밟게 된다.
“돼지씨는 현재 직장에서 퇴근과 동시에 업무에서 해방이 되고 주말의 휴식과 월 1회의 휴무가 있으며 여행을 위한 휴가 기간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입은 300만원 가량 되지요. 만일 가게를 열었는데 수입이 회사 다닐 때와 똑같이 300만원 가량 되고,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주말과 휴가도 포기해야 한다면 아마도 할까 말까 갈등이 되실 겁니다.”
“꿀”
“그렇다면 수입이 직장보다 적은 200만원이면서 위의 조건들을 수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업에 뛰어들기 전에 이런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 보세요.”
전라도에 유명한 콩나물국밥 집이 있다.
규모가 상당하다. 필자가 본 바에 의하면 그 집의 특징은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맛도 평범하고 종업원들의 친절도도 무난하다. 인테리어부터 모든 것이 평범하다. 너무 특색이 없어서 오히려 더욱 성공의 이유를 궁금하게 만들 정도다. 명성에 어울리는 어떤 특별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집이 되었을까. 눈에 띈 것이 하나 있다면 여기저기 주인장이 엄선해서 붙여 놓은 글귀들이었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
‘이러면 성공할 수 있다.’
뭔가 심기일전을 자극하는 글귀들이 무수히 붙어 있었다. ‘그 힘’ 사용자들을 관찰해 온 나로서는 그런 주인장의 마음가짐이 성공을 견인했으리라 짐작했다.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성공관련 서적에서도 이 같은 ‘특별한 이유 없는 성공’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에게서 성공의 이유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이것은 성공한 사람 본인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성공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억지로라도 찾으려 한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 낸 성공원리가 얼마나 쓸모 있을까?
다행히 최근 서점가에는 성공자들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는 말라고 경고하는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인생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자들의 성공이유를 꼽을 때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있기는 하다. 확신, 즉 강력한 믿음이다. 사업을 할 때 믿음과 확신 즉, 그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객관적 증거는 준비 기간에서부터 나타난다. 사업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소득이 없기 마련인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함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충분한 기간, 충분한 품질이 나올 때까지 집중하는 것을 방해 한다. 결국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픈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이 없으면 투자에도 소극적이게 된다.
“안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리하게 투자할 필요는 없지.”
결국 안 될 것을 염려해서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그의 사업체는 그의 생각대로 되고 만다. 손님이 몰려 올 것이라 믿고 최상의 투자로 창업을 준비한 사업체와 망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인색한 투자로 준비한 사업체, 과연 어느 쪽이 더 손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처럼 긍정적인 생각이 긍정적 결과를,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 결과를 불러 온다는 말은 미신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제외한다 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나 이 사업 해도 괜찮을까요?”
대체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미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신중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말리려 해도 그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
불확신은 열정을 차단한다. 심지어 이미 계약금을 지불하고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불안해한다. 불확신은 가게를 오픈한 후에도 이어진다. 손님이 조금만 줄거나 매출이 하락하는 것 같으면 ‘어떡하지?’ 근심하며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신의 일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맞서 싸워 극복하려 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나? 슬슬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반면 확신이 있는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 한다.
“이 문제만 극복하면 분명 크게 성공할 거야. 해결책을 찾아보자.”
대부분의 문제는 답을 찾으려 하면 답이 보인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계속 맛을 찾으려고 레시피를 조정하다 보면 결국은 맛이 있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단순한 실천을 하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제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중할 줄 모른다.
집중하지 않는 습관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부터 시작 된다. 공부시간에 딴 생각을 해본 이들, 시험기간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시간을 보낸 이들은 집중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알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집중하지 않는 습관이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업무를 미루고 회피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그것은 나태함 일수도 있고 무책임 일수도 있다.
그것은 성실함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성실함을 이끌어 내는 가장 검증 된 방법은 ‘문제에 대한 집중’이다. 사람이 강력한 집중 상태에 이르게 되면 뇌에서는 업무에 도움이 되는 행동유발 호르몬이 분비된다.
특히 사람이 기도를 통해 깊은 정신집중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호르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공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는 노르에피네프린과 기억력에 도움을 주는 아세틸콜린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도파민이 창의력을 샘솟게 하며,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서를 안정시키는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사람들에게는 엔도르핀이 동기를 부여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루고 싶은 목표와 믿음이 각인 된 사람이 성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에도 이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엔도르핀이 우리가 성공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마다 뇌에서 분비가 된다면 현실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일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느껴진다. 힘든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성공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도록 고통대신 즐거움을 느끼도록 보상을 주는 것이다.
문제에 완벽히 집중하게 되면 굳이 성실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집중상태가 지나치게 되면 일에 미쳐 있는 상태, workaholic 에까지 이르게 되어 가족들이 쉬라고 뜯어 말려야 할 정도가 된다. 도박, 술, 노는 것에 미쳐서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에너지를 업무에 쏟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일중독, 즉 workaholic 이다. 이렇듯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 힘은 무의식이 진지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을 때 발휘되기 시작한다.
집중하면 내가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우연’이라는 요소를 언급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기도 할 때 ‘우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 하다보면 수많은 우연들이 동반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와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들고, 내가 필요로 하는 장소에 나타나는 우연들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의 이유를 ‘열심’에서 찾으려한다. 하지만, 초일류가 된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물리적 노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없다.
악인이 상응하는 벌을 받는 장면은 인간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통쾌한 장면을 선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드라마라는 장치를 고안해냈다. 그 장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악인을 만들어 놓고 잔뜩 감정을 고조시킨 후에 그를 후려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한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답답하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장면들을 긴 시간 감내하며 지켜봐야만 한다. 악인도 가짜고, 벌도 가짜다. 진짜인 것은 본인이 느끼는 감정 뿐이다. 기능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이런 바보짓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짜 카타르시스 장사는 돈이 된다. 카타르시스 상인들은 언제나 새로운 제품을 들고 사람들의 지갑 문을 두드린다.
“고객님! 신제품이 나왔습니다.”
여기 또 다른 형태의 감성팔이가 있다. 언젠가부터 소위 ‘자존감을 높여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들이 미디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휴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열심히 일만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들을 마치 조롱하는 듯한 캠페인도 등장했다. 그 결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을 받게 되고,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전 재산을 털어 세계여행을 다니는 청년들이 특별한 삶의 상징처럼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밑도 끝도 없이 ‘괜찮다고, 당신 잘하고 있다고’ 칭찬과 위로를 주는 감성 판매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한 번 안아주세요.”
그들의 메시지는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일하는, 그래서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좋은 강의일 것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위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서 하루하루를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도 자기 합리화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자고로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몸을 해하는 것일수록 달콤하다. 달콤한 그 메시지는 무책임한 삶을 사는 불성실한 인생들이 달게 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메시지의 영향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저 본인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꿈을 찾겠다고 결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20대를 보내고 심지어 30대를 보낸 후 40대를 넘어서고 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다. 준비 없이 20대를 보낸 청년들은 준비되지 않은 30대를 맞이했다. 아무 것도 준비 되어 있지 않은 30대 청년들에게 세상은 묻는다.
“당신은 20대 때 무엇을 하셨나요?”
어른처럼 보이지만 실상 정신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사춘기 청소년과 20대 초, 중반 고객님들이 좋아할 만한 그럴싸한 위로를 던져 주고 그들에게 강의와 책을 팔아먹고 부를 축적한 이들은 자신들의 팬과 독자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았다. 노후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의 노후는 온전히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청년들이 듣기 좋은 위로의 말에 속아 힘들게 취직한 일터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배낭매고 세계여행을 떠나려 할 때, 진실 된 책망과 훈계로 그들을 만류하던 부모들은 모두 자신의 자녀들로부터 꼰대라 낙인찍힌 원수가 되었다.
“어떤 것이 진정 네 자신을 위한 행동인지 생각해 보렴.”
“나는 엄마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자신의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그 못난 성인아이들을 책임져 주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미워하고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그들의 부모들이다.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던 그 자상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들에게 감성을 팔아먹은 대가로 그들은 무엇을 얻고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들은 돈을 얻었고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얻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돈, 이것은 누구에게나 꽤 괜찮은 보상이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요상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고상한 말을 꺼내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은 지금 당장 돈이 안 된다 해도 그들에게 꽤 괜찮은 보상일 것이다.
자, 이렇듯 감성팔이들은 나름대로의 보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객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들에게 젊음을 지불하고 받은 싸구려 위로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위로는 영원히 그들의 삶을 다독여주고 있는가? 그들이 말한 대로 실천 했더니 정말 인생이 행복해졌는가? 배낭매고 세계일주를 다녀왔더니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져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위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그렇게 내 사정도 모르면서 환심을 얻을 속셈으로 그저 듣기 좋은 립 서비스를 해대는 장사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상황을 알고 나를 정확히 아는 상태에서, 나의 오늘과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낼 때 위로는 의미를 지닌다.
상대방에게 어떤 아픔이 있고 어떤 삶의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하나만 얻어 걸리라’는 식으로 뿌려대는 위로를 가장한 메시지는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타서 뭉쳐 놓은 밥덩이와도 같다. 그렇게 독이 잔뜩 들어 있는 밥 덩어리를 한 입 베어 먹고 독에 감염된 줄도 모른 채 듣고 또 들으며 ‘잘될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셀프 칭찬하며 살아가다가보면 어느새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꿈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오늘 짊어져야 할 자신의 짐을 지지 않으려는 청년들은 알아야 한다. 특별한 삶을 살겠다고 내버려 둔 본인 삶의 무게는 온전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진정한 위로는 나를 사랑하는, 그래서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음을...
신명기 :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신신당부. 축복의 땅인 동시에 물리쳐야 할 적들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어린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더 이상 곁에서 그들과 함께 해줄 수 없었던 모세, 모세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연설을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그 힘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떠난 자리에는 악한 어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경쟁이 치열한 사업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그만큼 검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경쟁이 거의 없는 신사업, 이른바 블루오션의 최대 단점은 그 안에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이미 수요가 확보된 검증된 사업 아이템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레드오션의 재발견입니다.
미용은 사람의 의식주와 더불어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급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요 또한 못지않기에 경쟁력을 갖추기만 한다면 1차적으로 생활이 가능해지고 나아가서 다양한 사업 확장도 꿈꿀 수 있습니다. 즉,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세상 모든 영역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경쟁이 없는 사업은 없습니다. 블루오션 조차도 사업성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삽시간에 경쟁자들로 가득 찬 레드오션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어차피 우리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는 어떤 사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을 지키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도, 생명력을 불어 넣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 승리가 미치는 영향력은 어디까지 일까요? 과연 생명의 주님은 우리 삶의 어떤 부분까지 함께 해 주실까요? 단순히 영혼구원에만 관여하실까요? 구원 받은 자녀들의 삶에는 무관심하신 분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마 1장 23절)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언급하며, 세상 끝나는 날까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에 대해서 약속합니다.(마 28장 20절) 돈을 벌기 위해 헤어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도자로서 헤어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이라면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14절까지의 적용]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샵에서도 복을 받고 세미나에 가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광고지의 소산과 서브 디자이너를 통해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5 대기용 소파와 경대와 세면대가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경쟁업체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가위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펌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샵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거룩한 디자이너가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손님의 소개와 간판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사 네 땅에 때를 따라 손님을 보내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디자인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세요.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고 기도를 하면 그 지혜가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마다 주님께 지혜를 구하면 문제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추상적이게 보이던 미용실의 성공과 실패의 메커니즘이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기도로 첫 단추를 꿰세요. 처음부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기도로 해결하는 습관을 들여 놓으면 나중에 큰 어려움이 찾아와도 기도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해결해 주소서”
본인이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 주소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업가에게는 ‘해결해 주세요.’라는 기도보다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이론 -
모든 경험자들의 말을 경청하되 누구의 말에도 휩쓸리지 마세요. 당신은 그가 될 수 없고 그의 환경은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좋은 스승을 구하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배울 수 없는 독특한 경쟁력을 갖추게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임마누엘,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당신만의 성공 공식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 실기 -
1) 컷트
실기에 있어 경험만한 스승은 없습니다. 실습할 수 있는 대상을 충분히 구해보세요. 두상에 따라, 얼굴형에 따라, 모발에 따라, 목의 두께와 길이, 심지어 피부색에 어울리는 최상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연구한다면 개인마다 어울리는 최상의 디자인을 제안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님과 호흡하며 조금씩 컷을 해나가는 섬세함을 추구합니다. 이 흐름은 연륜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레 과감함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실천하다 보면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2) 펌
본인만의 베스트 펌을 만드세요. 역시 실습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실기에서의 실력 = 실습한 숫자 입니다. 어설픈 경험자의 조언보다 인터넷 컨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실력 있는 경험자들이 주는 정보를 원하는 회수만큼 반복해서 봅니다. 기본기를 마스터 한 뒤에는 언제나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를 생각해 봅니다. 디자인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3) 염색
원 제품 그대로 사용하는 것 외에도 제품의 배합을 통해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색을 만들어 봅니다. 관심을 기울인다면 각 회사별 컬러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파악해서 응용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든 결과물과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고객과 나눌 수 있는 소재가 될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분야에 열정이 넘치는 모습은 손님으로 하여금 당신만을 찾고 싶게끔 만들어 줄 것입니다.
- 교제 (community)
부정적인 말을 내 뱉는 사람을 멀리 합니다. 그들을 동료로 두면 당신의 믿음은 서서히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모든 커뮤니티에는 부정적인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디자이너 커뮤니티보다 믿음의 커뮤니티를 선택하세요. 그들의 기도가 당신을 지켜 줄 것입니다. 인맥관리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 말씀
손님이 없는 시간은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이 탄탄했던 전도자들은 모두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 기도
쉬지 말고 기도합니다. 내가 아닌 주님의 손길이, 손님 한분 한분의 머릿결에 깃들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디자인해 보세요. 당신은 곧 기도로 임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믿음의 선배들이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던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구직사이트에서 보면 ‘창업컨설팅’이라는 직종이 있다.
입사 후 1~2개월간의 교육을 마치면 창업 컨설턴트가 된다고 한다. 과연 그 정도 교육을 받고 제대로 된 창업컨설팅을 할 수 있을까? 3개월 만에 창업 컨설턴트를 그만두고 나온 신씨의 말이다.
“예를 들어 볼게요. 멀쩡하게 장사 잘하고 있는 가게를 찾아갑니다. 권리금 1억 받아 주겠다고 해서 매물접수를 받아 오는 거예요. 그리고 가게 보러 오는 사람한테는 1억 4천만원에 팔아요. 4천만원이 우리 수입이 되는 거죠. 근데 회사랑 내 위에 팀장이란 놈이 다 해 처먹고 제 손에 쥐어지는 건 얼마 없더라니까요. 가르쳐 준 것도 없으면서 일은 내가하고 돈은 지들이 챙기고...”
문제 )
A, B, C, D 총 4개의 프랜차이즈가 있다. 창업컨설턴트는 과연 어떤 매물을 고객에게 소개할까?
1. 고객에게 적합한 물건
2. 본인에게 수당이 많이 남는 물건
진실 된 창업컨설턴트가 아니라면 정답은 정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는 한 건의 수당이 달린 것이겠지만 의뢰인에게는 인생이 달린 문제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비자들은 이들에게 속는 것일까?
사람들은 좋은 것보다는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학부모들은 잘 가르치는 학원보다는 잘 가르칠 것처럼 보이는 학원을 선택한다. 이렇듯 소비자들의 안목은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에 치중한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학원이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곤 한다. 인테리어와 교육품질은 연관성이 없다. 소비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감성은 언제나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다.
전문가보다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계약을 따내기도 한다. 부동산, 창업, 보험, 재테크, 투자자문등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는 지나치게 어린 청년들은 조금 더 유의하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문성은 대체로 연륜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남에 사무실을 열고 수입차를 타며 그럴듯한 인테리어와 전문가처럼 보이는 옷차림과 말투로 무장하면 속는 사람이 제법 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저렇게 핸섬하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멋진 꽃 미남이 전문가가 아닐 리 없어.’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많다고 다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질을 꿰 뚫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지혜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훈련도 되어 있어야 한다. 이따금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망할 만한 자리에 망할 만한 점포를 낸 오너들을 보곤 한다.
‘아니 어쩌자고 여기에 저런 가게를 냈지?’
얼마 후 가보면 그 가게는 이미 폐업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자신의 예측이 맞아 떨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제 3자의 눈에는 보이는 것들이 당사자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하면 보이는 것들이 ‘당장 뭐라도 해야겠다’는 조급함에 쫓기는 당사자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망할만한 자리에 망할 만한 점포를 오픈한 이들 중에는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소개를 받은 이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문가’라는 호칭은 전문성이 없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 된지 오래다. 어제 입사했어도 오늘부터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전문성을 확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몫이 된다.
“본사 소개로 계약했는데 나중에 주변 상인들이 저에게 바가지 엄청 썼다고 하더라구요.”
국밥 프랜차이즈를 하는 민호씨는 좋은 자리를 구했다는 본사 직원의 말만 듣고 권리금을 2500만원 주고 가게를 계약했다. 그러나 입점 후 주변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점포는 원래 권리금이 없었던 자리였다. 그 돈은 누가 챙겼을까? 오죽하면 중개거래의 불문율이 ‘아는 사람한테는 절대 사지 말 것’이 되었을까.
"받고 싶으신 금액이 얼마인가요?"
"2억입니다."
"그럼 2억 이상 받으면 제가 갖겠습니다."
"그러세요."
중개인은 2억5천에 부동산을 매도 했고 5천은 본인이 챙겼다. 시세보다 5천을 더 주고 산 사람은 중개인의 지인인 듯하다.
"아, 글쎄 나만 믿고 투자하라니까."
"알겠습니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중개거래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상황이다. 직접 시세조사만 했어도 확인 할 수 있는 문제들을 확인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생각의 부재를 겪고 있다. 급할수록, 바쁠수록 생각하는 능력은 더욱 더 마비되어 온다.
“네가 손님이라면 이거 먹고 또 오고 싶겠니?”
자기가 먹어봐도 맛없는 음식을 파는 이들이 있다. 맛없는 음식으로 창업을 하면? 망한다. 전혀 어려운 예측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교육이 없어도 누구나 예측해 볼 수 있는 이 간단한 생각조차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은 생각의 결핍을 겪고 있다. 그 공백을 우리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는 말이 있다.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바뀌어도 방향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지식들이 정보의 홍수를 이루며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이 많은 정보들을 모두 검토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지혜이다. 지식은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지식을 더한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지혜는 일견 동의어인 듯 보이지만 의미적 차이가 크다. 지식은 단순히 특정 대상에 대한 정보를 의미하고 지혜는 그것들을 수집, 분석할 수 있는 전체적인 운용능력을 뜻한다. 지식이 있어도 사람은 실패할 수 있으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지식 가진 자를 요구하지만 지식을 가진 자는 지혜를 가진 자의 다스림을 받는다. 지식을 가진 자는 필요에 따라 쓰임 받고 버림도 받지만 지혜 있는 자는 늘 존귀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초월하는 하늘의 지혜를 공급 받을 수 있다.
성경 곳곳에서는 지혜를 예수님의 대명사로 표기하고 있다. 실제로 ‘지혜’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 바꿔 대입시켜도 본래의 의미 전달에 무리가 없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 잠언 1장 20절
‘예수님=지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곧 지혜의 임재를 의미한다.
생각의 부재에서 온 현대인의 공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채울 수 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울 수 있다. 연륜을 초월하는 탁월한 지성은 강력한 영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다.
성령 충만하면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지성이 공존하는 소위 말하는 초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기도하면 뜨거운 열정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 속에서 침착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덕지덕지 포장한 세상의 두꺼운 속임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임금 인상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
경력직 근무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근무해도 받는 급여가 200만원 안팎, 다녀야 하나? 다녀야 한다. 그런 직장이라도 다녀야 하는 이유는 그거라도 버는 것이 벌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돈 때문만이 아니다.
꿈을 찾는 다는 핑계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놀면서 소득 없이 살아가는 성인들이 있다. 배움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타인의 원조를 받으며 일평생 공부만 하다가 늙어 죽어가는 젊음들이 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전공심화를 거쳐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직업 없는 삶을 살아가는 다 큰 자녀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저, 다시 공부해서 좋은 직장 가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에만 몰입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너 지금 하루에 몇 시간이나 공부하니? 한 16시간씩 하니? 다 큰 녀석이 다른 가족들에게 도움 받아가면서 공부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지.”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넌 지금 성인이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안 하고 있잖아. 더 큰 꿈을 위해 극단적으로 회사를 나온 사람이 여가생활은 평범한 사람처럼 하려고 하니? 문화생활도 포기하고 친구도 만나지 말아야 공평한거 아니니?”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공부도 극단적으로 할 자신 없으면 남들처럼 일단 일을 시작해. 그리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해. 너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니?”
“...”
“삶을 살아나가는 방식이야. 절대로 소득의 공백을 만들지 마. 인생은 네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는 거야. 돈 벌면서 꿈을 좇는 삶도 나쁘지만은 않아.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잖아. 그런데 잘 거 다자고, 놀 거 다 놀면서 너의 꿈이 이루어질까.”
“독하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니? 넌 이미 학창시절동안, 공부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 했어. 그런 네가 지금부터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지금부터는 진짜 열심히 할 겁니다.”
“이미 십년 넘게 주어졌던 기회를 날린 사람을 뭘 믿고 가족들이 또 다시 희생을 해야 하니?”
“지금 취직할만한 곳은 급여가 너무 적어요.”
“그래. 잘 봤어. 정확한 문제제기야. 그래서 고작 생각해 낸 해법이 아예 돈을 안 버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꿈속에서 나와 현실을 살아. 꿈은 현실에 있는 사람이 추구할 때 의미가 있어. 당사자가 아예 꿈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현실은 어떻게 되겠니? 너의 부모, 형제, 배우자와 자녀들은?”
“의지력이라는 단어를 보면 뒤에 힘력(力)자가 붙어 있잖아. 이처럼 힘력 자가 붙는 모든 것은 훈련을 통해 힘을 키울 수 있어. 정신력, 인내력, 친화력, 의지력 등등... 우선 일을 해. 일을 하면서 꿈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의지력을 훈련해. 일 끝나고 스마트폰 볼 시간에 공부를 해. 그리고 운동을 해. 여가 시간을 꿈을 이루는데 온전히 사용해봐. 만일 여기서 실패한다면 넌 절대로 회사를 그만둬선 안 돼. 드라마 보다보면 가수를 꿈꾸는 철부지 50대 백수 남편, 이런 컨셉의 캐릭터들 가끔 나오잖아. 그게 네 미래 모습일 수 있어.”
“헐.”
“꿈은 배움이 아니라 의지력, 정신력 등등 이런 힘으로 이루어 내는 거야. 정말 강한 의지로, 공부만 할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된다면 그 때가서 도전해. 너의 인생에 스스로 리스크를 발생시키지 마.”
“그럼 어디에 취직할까요?”
“공짜로 부려 먹는 곳만 아니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최저임금 안팎의 임금을 주는 직장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야.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넌 그곳에서 목소리 내는 훈련을 해야 해.”
“목소리 내는 훈련이요?”
대기업 S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월급은 많이 주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다.”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지만 S그룹처럼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돈도 조금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주는 곳이다. 양극화로 인한 경제생태계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받고 일을 해야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급여는 어디까지나 내가 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일 뿐, 나의 자존심과 스트레스에 대한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건비를 계산 할 때는 일반노동력 + 감정노동력을 함께 계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 값은 얼마일까?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보면 스트레스에 대한 시간당 비용을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병도 만들지만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할 수 있는 에너지도 고갈시킨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능하게, 점점 바보로 만든다. 즉, 사람이 계속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점점 망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목숨 걸고 일하는 분들에게 생명수당이 붙듯 스트레스 또한 그래야 하지만 세상은 그 값을 쳐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계산해야 한다.
“고작 이정도 급여를 주면서 나에게 그런 부당한 스트레스를 줘?”
그런 생각이 든다면 당당하게 상황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훈련을 하자. 어차피 그 직장에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누구인가? 당신의 부모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해서 키운 귀한 자녀가 아니던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모른척하지 말자. 그리하면 당신 자신이 당신을 더욱 믿고 따를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온유함이지 비굴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당당함과 겸손의 밸런스를 갖추십시오.”
주먹으로 싸워서 이기면 0점, 말로 싸워 이기면 50점, 상대방을 속상하게 하지 않고 나의 품위도 지키며 승리했다면 100점이다. 화를 자주 내면 흥분 잘하는 성격이 된다. 흥분하면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
승패의 가장 큰 보루는 평정심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세상과 맞서는 법을 훈련하자. 훈련하면? 훈련된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키며 세상을 이기는 법은 충분히 훈련가능하다. 화를 내야만 하는 순간을 위해 거룩하게 화내는 법을 연습해두자. 해법은 잠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벽에 붙여 놓은 조직도를 바닥에 눕혀서보면 수평이 된다. 바닥에 붙여 놓으면 보기가 불편해서 벽에 붙여 놓은 것일 뿐, 조직도는 원래 그렇게 보는 것이다. 상하관계, 즉 직장 내 서열이 인간의 서열까지 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해진 근무시간보다 더 일시키고 연장 근무수당을 주지 않는 도둑질, 시집 못간 히스테리를 나에게 부리며 함부로 구는 직장 상사,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오너 등등...
우리는 이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형은 너희들이 만만해서 가장 많이 간다는 인바운드 콜센터, 특히 아웃소싱 업체가 주관하는 업체는 추천을 하고 싶지 않아. 많은 친구들이 1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받으며 일평생 들어 본적 없는 욕을 먹어. 그 모습을 부모님이 보시면 어떠실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대하라는 말, 많이 들어 봤지? 내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지켜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회사는 자기회사 사원들에게 욕설을 내뱉는 고객을 왜 그냥 두는가?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고객님, 지금 저한테 욕하셨나요? 고소하겠습니다.”
모든 상담원들이 욕설을 들을 때마다 회사를 그만 둘 각오로 강경대응 한다면, 비겁하고 못된 손놈들도 없어지겠지만 무엇보다 회사가 미리 나서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쩌면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급여에 반영 될지도...
구직사이트에 정기적으로 계속 모집공고를 올리는 회사는 직원들이 끊임없이 퇴사하는 회사다. 입사지원 시 신중을 기하자. 사람들이 자꾸만 그만두는 곳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콜센터는 적은 급여에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할 정도로 직원을 닦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 회사는 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우린 그런 회사라도 다니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현실 탓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나태함이 골수까지 파고들어 정신이 썩어버릴 수있다.
박봉을 주는 회사에서 얻을 것은 비전이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놀지 않고 일을 하는 성실함과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누구 앞에서든 여유롭고 당당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훈련을 해보자. 성공에 필요한 값진 자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유하되 당당하고, 당당하되 겸손하자. 언제든 그만 두어도 되지만 도망치진 말자.
꿈도 비전도 없는 직장에서, 어떻게든 최소 급여로 최대한 사람을 부려먹을 궁리만 하면서 감히 부당한 스트레스까지 준다면? 당당함을 실습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이것은 S그룹 사원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터무니없는 급여를 주는 회사의 사원들에게만 주어지는 역 스톡옵션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짤릴 까봐? 그런 회사, 옆에 또 있고 옆에 또 있고 옆에 또 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고들 한다. 당신은... 그곳에서... 잃을 것이 없다.
* 장애 : 활동을 하는 데 한계가 있거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지칭한다 (두산백과)
손에 장애가 있는 이는 손으로 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 발에 장애가 있는 이는 발로 작업을 할 수 없고, 청각 장애가 있으면 들으면서 해야 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손도, 발도, 청각도,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 스스로 성실히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으나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능력자 또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욕을 먹을 정도로 심각한 업무장애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지육신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장애인’ 취급은 받지 않는다.
신체적 장애는 있으나 성인으로서 해야 할 ‘밥값’을 하는 사람, 신체 건강한 성인이지만 ‘밥값’도 못하는 사람, 둘 중 누가 진짜 장애인일까?
우리는 앞서 ‘장애’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이들을 장애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덕분에 그들은 본인들이 정상인인 줄 착각하고 산다. 그래서 심각한 줄 모른다.
의료기술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장애는 사람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장애는 기적으로만 극복되는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의지적 장애 역시 그러한 듯하다. 그들에게도 만물을 소생케 하는 주님의 기적이 필요하다.
마치 메마른 뼈에 힘줄과 살이 차오르듯, 아골 골짜기처럼 바싹 말라비틀어진 정신 상태에 주님의 생기가 임하시면 그는 곧 꿈꾸는 자가 된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실천해야 할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는 의지가 뒷받침되기 시작한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주님께 접붙임을 받은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삶의 문제 앞에서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영적 장애를 가진 이는 꿈만 있고 꿈에 대한 대가는 지불할 줄 모르는 의지적 장애인이 된다. 그는 좋은 강의를 모르핀처럼 자신에게 주입하며 방구석에 앉아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생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시대에도, 아니 짐승들조차도 가장 생산성 있는 나이를 그처럼 생산성 제로의 상태로 보내며 노년을 기다리진 않는다.
이제 그들은 좋은 말로는 통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지만 본인 스스로를 어찌 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그들에게서 최소한의 생산성이라도 뽑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노예를 부리던 인간들처럼 두들겨 패서라도 일을 시키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장애의 근원을 유추해보자.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하고자 하는 본인 의지에 반항하는 내안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바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의지적 장애를 최초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절대 다수가 그럭저럭 학교는 다니지만 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공부와 담을 쌓는다. 넘지 못한 그 담벼락은 그대로 남겨져서 사람들의 다음 도전을 가로막는다. 성인이 된 뒤에도 몇몇 소수만이 그 장애물을 넘을 뿐, 역시 다수는 그것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럭저럭 직장을 다니거나 자영업을 한다.
이미 10년 넘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가 몸에 배어 버렸다. 그것은 게으름, 의지박약, 불성실, 작심삼일 등의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장애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현대인들 중에 상당수가 부분적 의지장애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꿈은 있으나 꿈을 이룰 수 없다. 그렇게 수년이 더 지나버리면 꿈마저 사라져 버린다.
이렇듯 자신이 뜻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없고, 행동할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사람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 꿈대로도 못사는 나를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 내 뜻에 반항하는 이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자신의 삶에서 본인의 의지로 존재하길 바란다면 누구든 한번은 그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평생 그는 그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병원에서 치유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불치병에 가까운 난치병이다.
하지만 차라리 우리에겐 잘 될 일일지 모른다. 해법이 명확하지 않은가. 불치병을 대하는 유일한 자세는 기도, 기도뿐이다. 믿음으로 기도해 보지 않았던가. 주님은 무턱대고 돈 달라는 기도 빼고는 정말 신기하리만치 잘 들어주신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응답 되는 기도, 눈으로 보일 정도로 확연히 드러나는 기도의 응답은 아마도 장애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기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이다. 장애를 없애 달라는 기도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응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예외 없이 응답 된다.
이미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무수한 성도들의 간증이 있지 않은가. 단순히 장애를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압도적 존재가 되어 있다. 그들은 그 신체적 장애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고, 인간으로서 한 번은 넘어야 할 그 담장을 넘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장애가 축복이라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 의지적 장애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주님은 그를 모른 척 하실까? 그를 방치하실까? 그렇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 두실까?
성경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장애, 심각한 장애가 있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환경이 자신에게 임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누구도 당신에게 성공의 길을 대신 찾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만큼은 확실히 막아 드리겠습니다.’
상진의 눈에 벽에 걸린 독특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천편일률적인 문구가 아닌 것이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피자가게를 내고 싶다고 하셨죠.”
“네”
“어떤 업종이든 일단 시작한 다음에는 앞만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점이 있는지를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간은 시작하기 전까지입니다. 시작 전에 모든 부정적인 면을 충분히 찾아보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약금을 지불한 뒤에는 괜찮지만 완불한 뒤부터는 부정적인 생각을 1%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 이미 계약금을 지불한 뒤에도 계속 위험요소나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출혈을 막는 방법이지요.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해 볼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는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니까요. 그래서 계약금은 최대한 적게 거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눈이 멀어 계약금을 걸기 전까지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계약금을 걸고 난 뒤에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도 그 때나마 깨달은 사람은 양호한 겁니다. 인테리어까지 다하고 개업하는 날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실제 계약금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나요?”
“대개는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예전에 학원을 오픈하려던 원장님이 계약금을 걸고 보니까 아차 싶은 부분이 발견 되더랍니다.”
“그래서 계약금을 순순히 포기 했나요?”
“그분은 예전에 한번 창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지요. 그때도 계약금을 걸고 나니까 문제점이 보이더랍니다. 그러나 이미 지불된 계약금이 아까워서 일을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훨씬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답니다.”
“훨씬 큰 손해요?”
“인테리어와 시설, 집기류 외에 기회비용 등의 보이지 않는 손실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문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에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성장하게 되지요. 그 원장님은 계약금 100만원을 손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곳에서 수강생 100명이 넘는 학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포기한 계약금 100만원으로 명당자리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면 수업료치고 비싼 것은 아니지요.”
세상에는 반드시 수강료를 지불해야만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실패 또한 그러하다. 가장 좋은 배움은 타인의 실패를 거울삼아 배우는 것이지만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 간접경험을 직접 경험화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계약금을 건 시점을 계약 완료 시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계약이 완료 되는 시점은 계약금을 모두 지불한 다음이다. 사실상 그 전까지는 완전히 결정 된 것이 아니다. 즉, 돌이킬 수 있다. 계약금은 손해를 보겠지만 때로는 그런 특별한 결단이 특별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생선조림을 만들다가 불을 줄이는 타이밍을 놓치면 재료가 눌어붙다가 나중에는 타게 된다. 요리에 서툰 초보 주부는 이럴 때 탄 부분을 국자로 긁는다. 그렇게 해서 탄 부분이 요리 전체에 퍼져버리면? 모든 재료에 탄 맛이 베어서 요리 전체를 먹지 못하게 된다. 재료가 타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탄 부분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냄비로 옮기는 것이다. 번거롭고 귀찮아보여도 이것이 최선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인생을 걸 정도의 비장함이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최선의 컨디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돈에 맞추어, 형편에 맞추어 적당히 끼워 맞추려는 태도를 추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창업하기 전에 결함이 발견 되었다면 탄 냄비에서 즉시 꿈과 비전이라는 재료를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 그때 중단했어야 하는데...’ 라는 쓴 후회의 맛을 평생 음미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올 수 있는 빌미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은 마치 수도꼭지와 같아서 한번 틀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정적인 생각은 지배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그 부정적인 생각이 내 몸과 마음을 장악해서 일도 하기 싫게 만들고 의욕도 소멸시켜 마침내 실패를 안겨 준다.
초긍정 상태에 이른 사람은 평상시에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반대로 부정의 정점에 이른 사람 또한 평상시라면 하지 않을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선택한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둔한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목숨까지도 끊게 만든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게, 부정적인 요소를 사전에 봉쇄하려 한다면 완불 전에 모조리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계약 완료 후, 이미 창업한 뒤에 문제점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땐,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일단 사업이 시작된 다음부터는 절대, 절대로 금물입니다. 그것이 설령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 해도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 둘 부정적인 생각들을 용납하다보면 그 못된 생각의 낙타가 어느새 나의 텐트를 모조리 장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오싹하네요.”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주님께 기도하자.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더 큰 긍정의 마음으로 그것을 덮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문제없는 사업은 없습니다. 문제에게 주도권을 뺏기면 사업은 죽은 목숨,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덤벼라. 기도로 상대해 주마. 1시간 기도해서 안 되면 2시간, 2시간 기도해서 안 되면 3시간, 아니 날마다 죽도록 기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너를 극복하고야 말겠다. 끊임없는 기도로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그럼 저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일단 기도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께 기도로서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다음은요?”
“피자가게의 좋은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피자가게를 창업하려고 하시는 거겠지요?”
“네.”
“그럼 지금부터는 피자 가게의 나쁜 점. 즉 피자가게를 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최대한 찾아보세요. 이렇듯 생각이 필요한 모든 부분을 기도하며 고민해 보십시오. 그러면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지혜로운 생각의 홍수가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가요.”
“오늘은 시간이 많이 되었으니 다음에 뵙지요. 오늘 상담료는 피자로 받겠습니다. 앞장서시지요.”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예능강의 멘트가 있다.
예능강의는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서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를 말한다. 이런 강의는 예능처럼 재미있고 듣기는 좋으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연 직업자체가 우리에게 원초적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일을 하며 겪는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과정을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일 자체가 게임하듯이, 영화 보듯이 즐거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실제로 게임을 해서 돈을 버는 프로게이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게임이 너무 좋아서 게임으로 돈을 버는 프로게이머가 되는 순간부터 이들에게 게임은 일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게임이 일이 되는 순간부터 게임에 농땡이를 부리는 게이머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습 즉 게임을 게을리 한다.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하더니 이젠 게임도 하지 않으려 든다.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도 게임이라고 부르는 그들 세계의 업무를 열심히, 꾸준히 한 사람만이 성공하게 된다.
아무리 좋아하던 일도 그것이 업무가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취미로 할 때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문성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복이 필요한 요소들이 발생한다. 이 단순한 반복이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결국 아무리 즐겁던 일도 즐겁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평생 다른 일을 찾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여행이 좋아 가이드가 된 사람에게도 업무적 권태기가 찾아오고, 만화가 좋아서 만화가를 선택한 이들, 심지어 목회자에게도 슬럼프는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업무적 슬럼프를 극복해서 꾸준하게 한 분야에 매진하게 만드는 인내와 끈기일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예능강의만 믿고 즐거운 일을 찾으려 하고 있다. 어딘가 그런 일이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그런 일거리를 찾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적성, 즉 즐거운 일을 찾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적성을 찾은 사람을 혹시 주변에서 본적이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일, 즉 즐거워서 가슴이 뛰면서 질리지도 않는데 돈도 벌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상상속의 동물 유니콘처럼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유니콘을 보았습니다.”
유니콘을 보았다는 정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정수는 더욱 신이 나서 강의를 하지만 사실 그는 유니콘을 본적이 없다.
“유니콘을 만나면 너무나 즐겁고 힘이 나며 돈도 생긴답니다.”
그의 말만 믿고 유니콘을 찾으러 떠난 청년은 이제 50대를 바라보는 중장년이 되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유니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도 유니콘을 보았습니다.”
유니콘을 보았다고 말해서 짭짤하게 강의 수입을 올리는 정수를 보며 유사품 예능강사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유니콘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예능강사들이 활동하는 지금, 이제 누구도 유니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서 유니콘은 발견되지 않았다. 보았다는 강사들은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본적이 없다. 즐거운 일, 그래서 감정적인 기복 없이 끝까지 즐겁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은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는 듯싶다.
즐겁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려 노력해서 일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일이 게임처럼 즐거웠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은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이일저일 깨작거리는 모습은,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영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할 줄 안다.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평생 만족할 수 없다.
이백만원 벌던 사람이 오백만원을 벌게 되어도, 칠백만원, 일천만원을 벌게 되어도 곧 그는 학습 된 대로 만족감을 소멸시키며 더 강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자극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만족감을 느끼는 습관이 필요하고 그것은 감사하라는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완성이 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집중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무리 좋은 일이 주어져도 집중할 줄을 모른다.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며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은 유니콘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 즐겁지 않아도, 힘들어도, 인내하며 꾸준히 한 분야에 매진하다 보면 열매가 맺히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찾던 유니콘, 업무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인 것이다.
업무적 성과를 보는 즐거움은 그동안의 노고를 단번에 잊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열매가 없는 동안에도 꾸준히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앞으로 열릴 열매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모든 노력을 가능케 하는 탁월한 원동력이다. 반면, 열매 맺지 못하는 이들은 ‘믿음’이 없다. 그들은 본인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하지 못한다.
그들은 본인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본인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켜보며 더욱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행동이 불성실해질수록 그들은 더욱더 부정적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그들은 미래의 텅텅 빈 바구니를 바라보며 더욱 꿈도 희망도 사라져간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성인으로서 한 직종에 몸을 담고 꾸준하게 돈을 벌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주님께서 주신 믿음 덕분이다. 주께서 좌정하사 우리 삶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시면 나이가 들어서도 나이 값, 밥값 못하는 어른이 되어 깃털처럼 가벼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진득하게 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누리는 호사 중 한가지임에 분명하다.
즐거운 업무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즐기려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가치 있는 일을 찾겠다고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동안 사람들의 눈에 가장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한 사람보다도 가치 없는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나요?”
“꾸준히 기도하는 방법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