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추구하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이따금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권에 놓이게 된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사탄의 일을 한다. 또는 하나님의 일을 사탄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본인이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옳지 않은 길을 간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사로잡혀있는 동안 저지른 과오를 수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이에 관련된 가장 흔한 예는 교회의 분열을 통한 복음의 확산에서 발견된다. A라는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 안에서, B라는 부목회자가 A를 비판하며 한 무리의 성도들을 이끌고 나간다. 분명 사탄의 역사다. 갈라선 무리들은 나가서 다른 교회를 세웠다. 어쨌거나 이제 교회는 2개가 되었다.
부족한 성도들의 모임이긴 하지만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는 나타난다. 전도의 열매가 있고 기도의 응답도 있다. 어차피 부족한 우리 모두가 아닌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보수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오를 수습해 가신다.
얼마 후, 싸움을 주동해서 분가한 교회에 또 다른 싸움이 일어났다. C라는 성도가 한 무리의 성도들을 이끌고 나간다. 그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 가고 심한 욕설까지 난무한다. 완벽한 사탄의 역사다. B는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눈물로 통회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C의 악한 행실을 통해 B를 회개하게 하시고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다듬어 가신다.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C와 C를 따라 나간 성도들은 나가자마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가 자다가 경기를 하고 가족들에게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암 진단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업상의 어려움들을 겪는다. 이들에게 고난이 임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C와 C를 비롯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개하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들의 신앙은 이를 계기로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결국이 그러한 것은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교회는 3개가 되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장 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께서 성도를 돌이키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재물을 잃는다. 때로는 건강, 심지어 가족들의 안전까지 위협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털어가는 것은 사탄이다. 노략질하는 것은 사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의 행동조차 사용하셔서 성도들을 더욱 깊은 성화의 단계로 이끄신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 모든 시련의 목적은 동일하다.
우리의 이면에는 옛사람의 성품이 남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약해지면 튀어나오곤 한다. 그 상태가 장기화되면 어김없이 주님은 우리를 돌이키신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채찍은 ‘침묵’이다. 강퍅케 됨이 견고해질수록 근심하시는 주님의 탄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면서 슬슬 밥맛도 사라지고 살맛도 사라져 간다. 인생의 허무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기도 줄이 막힌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들지 않는다.
‘주여, 이 시간 회개의 영을 내려 주시옵소서.’
마지못해 약간은 뻣뻣한 자세로 회개를 시도한다. 아직까지는 말투가 제법 건방지다. 통성으로 기도하면 막힌 기도가 좀 뚫리려나 싶어 ‘주여’도 외쳐보고 큰 소리로 기도도 해보지만 답답한 가슴의 응어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슬슬 자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목이 곧아 뻣뻣했던 자세가 꺾이고 하나님을 향한 말투는 1차원적 언어로 바뀐다. 치장하는 모든 미사여구와 수식어가 사라지고 아빠와 어린 나, 둘만 남게 된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말씀을 붙들고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행여 ‘온유함’의 끈을 놓칠세라 조심조심 성도들과 대화에 임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여기저기서 자원하는 지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방식으로...’
가룟 유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최대 과제였던 구원사역에 쓰임 받았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예에 가장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참여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구원과 함께 사명을 받는다.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는 성화라는 과정은 곧 사명자를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사명자인데 그 사명은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메신저는 본인 자신이 그 메시지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오늘 당신이라는 메신저를 통해서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필자는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 부르심 받았다. 세상에는 분명 나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더 많이 기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전혀 기도하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싶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앉힐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힘을 통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가진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본인이 먼저 순종하여 그 메시지 자체가 된다면 그보다 더 완벽한 사명의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죄를 지어도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분명하다면 주님은 떠나지 않으신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임마누엘의 정확한 뜻을 알게 되면 악용될 소지가 있을 정도로 강력한 언약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든 주님은 함께 하신다. 우리의 행동에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백성과 함께 하시는데 이유는 없다. 내가 잘해도 함께 하시고 죄를 지어도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하지만 임마누엘의 약속을 차마 이용할 수는 없다.
‘이번에 내가 가게를 하나 내려고 하는데 하나님 뜻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내가 어디서 어느 직업을 선택하든 주님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사탄의 그림자 귀신이 아니라, 인격을 소유해서 우리 또한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대학을 가든, 대학을 가든 안 가든, 동쪽으로 이사를 가든 서쪽으로 가든, 어느 직업, 어떤 직장을 선택하건 주님은 함께 하신다. 그곳에서 당신이 기도하면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된다.
그러므로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내게 복에 복을 더해 달라고 기도했던 야베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1차원적으로 기도하는 자세가 영이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솔직한 모습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 즉 선택권을 주셨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불신자들의 존재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불신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가는 길에 주님도 함께 하신다. 나의 직업을 정해 놓으시고 안 가면 두들겨 패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속신앙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김남준목사님의 파격적인 말씀이 신학생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다.
“목사님, 저 계속 신학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가!가!가! 가서 일 열심히 하고 살아.”
“그런데 제가 서원을 해서...”
“괜찮으니까 가!”
“서원하고 안가면 하나님께 두들겨 맞을까봐.”
“아이고! 괜찮아.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유쾌한 음성에 신학생 모두가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속에는 성도의 미래를 염려하는 진심어린 조언이 담겨 있었음을 이젠 알 것 같다. 사명자의 길, 거창하게 순교까지 각오하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각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지육신 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반 백수로 늙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곤 한다. 교회를 개척했는데 성도가 하나도 없어 목회를 접는다.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자니 목회자로서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사례비가 지급 되는 교회가 많지 않다.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는 생각 때문에 취업도 하지 못한다. 다른 교회 예배에 참석은하지만 예전처럼 평신도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목사라고 말하자니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그렇다고 숨길일도 아니지 않은가.
필자의 주변만 해도 10년 넘게 직업도, 목회 활동도 하지 않고 지내 온 분들이 있다. 사모님들이 홀로 온갖 일을 다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한때는 목회자의 길을 결단할 만큼 신앙심 깊었던 분들이 이제 평신도도 목회자도 아닌 생산성 제로의 상태로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신학대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일하고 헌금도 하는 건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신학대학교에 처음 입학한 나는 신학생들끼리 유명 목사님 험담하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저래도 되나?’
그러나 계속 듣다 보니 어느새 나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우선, 목사님의 험담을 들은 뒤부터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예전처럼 은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설교를 들을 때,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각하며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기술적 평가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인생을 좌우하던 생명의 말씀이 강의가 된 것이다. 공부는 되었을지 몰라도 은혜와는 멀어져갔다. 주님과의 첫사랑, 영적인 순수성을 잃고 말씀을 편식하는 까탈스러움이 생겨버린 것이다.
은혜 받지 못하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처음으로 찾아 왔다. 잘 알겠는데 행동으로는 못 옮기는, 은혜를 상실한 전형적인 크리스찬의 모습. 그것이 나였다.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안 되고, 성경 봐야 하는데 성경이 눈에 안 들어 왔다. 어떻게 해야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모르는 성도가 누가 있을까.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 처음 마주하게 된 그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었고 힘이 들었다.
때로는 식어가는 내 모습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따금 몸부림치며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한번 시작 된 영적인 냉각은 계속 진행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님을 가까이 느낄 수 없었다. 사탄이 나에게 주입한 그 설교 비평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설교를 들을 때 비정상적일 정도의 ‘아멘’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야 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이 어떻게 사용 될지 모르는 지금의 나로서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추구하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이따금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권에 놓이게 된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사탄의 일을 한다. 또는 하나님의 일을 사탄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본인이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 모두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옳지 않은 길을 간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사로잡혀있는 동안 저지른 과오를 수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이에 관련된 가장 흔한 예는 교회의 분열을 통한 복음의 확산에서 발견된다. A라는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 안에서, B라는 부목회자가 A를 비판하며 한 무리의 성도들을 이끌고 나간다. 분명 사탄의 역사다. 갈라선 무리들은 나가서 다른 교회를 세웠다. 어쨌거나 이제 교회는 2개가 되었다.
부족한 성도들의 모임이긴 하지만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는 나타난다. 전도의 열매가 있고 기도의 응답도 있다. 어차피 부족한 우리 모두가 아닌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보수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오를 수습해 가신다.
얼마 후, 싸움을 주동해서 분가한 교회에 또 다른 싸움이 일어났다. C라는 성도가 한 무리의 성도들을 이끌고 나간다. 그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 가고 심한 욕설까지 난무한다. 완벽한 사탄의 역사다. B는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눈물로 통회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C의 악한 행실을 통해 B를 회개하게 하시고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다듬어 가신다.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C와 C를 따라 나간 성도들은 나가자마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가 자다가 경기를 하고 가족들에게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암 진단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업상의 어려움들을 겪는다. 이들에게 고난이 임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C와 C를 비롯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개하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들의 신앙은 이를 계기로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결국이 그러한 것은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교회는 3개가 되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장 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께서 성도를 돌이키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재물을 잃는다. 때로는 건강, 심지어 가족들의 안전까지 위협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털어가는 것은 사탄이다. 노략질하는 것은 사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의 행동조차 사용하셔서 성도들을 더욱 깊은 성화의 단계로 이끄신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 모든 시련의 목적은 동일하다.
우리의 이면에는 옛사람의 성품이 남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약해지면 튀어나오곤 한다. 그 상태가 장기화되면 어김없이 주님은 우리를 돌이키신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채찍은 ‘침묵’이다. 강퍅케 됨이 견고해질수록 근심하시는 주님의 탄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면서 슬슬 밥맛도 사라지고 살맛도 사라져 간다. 인생의 허무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한다. 기도 줄이 막힌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들지 않는다.
‘주여, 이 시간 회개의 영을 내려 주시옵소서.’
마지못해 약간은 뻣뻣한 자세로 회개를 시도한다. 아직까지는 말투가 제법 건방지다. 통성으로 기도하면 막힌 기도가 좀 뚫리려나 싶어 ‘주여’도 외쳐보고 큰 소리로 기도도 해보지만 답답한 가슴의 응어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슬슬 자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목이 곧아 뻣뻣했던 자세가 꺾이고 하나님을 향한 말투는 1차원적 언어로 바뀐다. 치장하는 모든 미사여구와 수식어가 사라지고 아빠와 어린 나, 둘만 남게 된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말씀을 붙들고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행여 ‘온유함’의 끈을 놓칠세라 조심조심 성도들과 대화에 임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여기저기서 자원하는 지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방식으로...’
가룟 유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최대 과제였던 구원사역에 쓰임 받았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예에 가장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참여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구원과 함께 사명을 받는다.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는 성화라는 과정은 곧 사명자를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사명자인데 그 사명은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메신저는 본인 자신이 그 메시지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오늘 당신이라는 메신저를 통해서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필자는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 부르심 받았다. 세상에는 분명 나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더 많이 기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전혀 기도하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싶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앉힐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힘을 통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가진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본인이 먼저 순종하여 그 메시지 자체가 된다면 그보다 더 완벽한 사명의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해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죄를 지어도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분명하다면 주님은 떠나지 않으신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임마누엘의 정확한 뜻을 알게 되면 악용될 소지가 있을 정도로 강력한 언약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든 주님은 함께 하신다. 우리의 행동에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백성과 함께 하시는데 이유는 없다. 내가 잘해도 함께 하시고 죄를 지어도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하지만 임마누엘의 약속을 차마 이용할 수는 없다.
‘이번에 내가 가게를 하나 내려고 하는데 하나님 뜻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내가 어디서 어느 직업을 선택하든 주님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사탄의 그림자 귀신이 아니라, 인격을 소유해서 우리 또한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대학을 가든, 대학을 가든 안 가든, 동쪽으로 이사를 가든 서쪽으로 가든, 어느 직업, 어떤 직장을 선택하건 주님은 함께 하신다. 그곳에서 당신이 기도하면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된다.
그러므로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내게 복에 복을 더해 달라고 기도했던 야베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1차원적으로 기도하는 자세가 영이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솔직한 모습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 즉 선택권을 주셨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불신자들의 존재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불신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가는 길에 주님도 함께 하신다. 나의 직업을 정해 놓으시고 안 가면 두들겨 패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속신앙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김남준목사님의 파격적인 말씀이 신학생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다.
“목사님, 저 계속 신학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가!가!가! 가서 일 열심히 하고 살아.”
“그런데 제가 서원을 해서...”
“괜찮으니까 가!”
“서원하고 안가면 하나님께 두들겨 맞을까봐.”
“아이고! 괜찮아.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유쾌한 음성에 신학생 모두가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말속에는 성도의 미래를 염려하는 진심어린 조언이 담겨 있었음을 이젠 알 것 같다. 사명자의 길, 거창하게 순교까지 각오하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각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지육신 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반 백수로 늙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곤 한다. 교회를 개척했는데 성도가 하나도 없어 목회를 접는다.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자니 목회자로서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사례비가 지급 되는 교회가 많지 않다.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는 생각 때문에 취업도 하지 못한다. 다른 교회 예배에 참석은하지만 예전처럼 평신도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목사라고 말하자니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그렇다고 숨길일도 아니지 않은가.
필자의 주변만 해도 10년 넘게 직업도, 목회 활동도 하지 않고 지내 온 분들이 있다. 사모님들이 홀로 온갖 일을 다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한때는 목회자의 길을 결단할 만큼 신앙심 깊었던 분들이 이제 평신도도 목회자도 아닌 생산성 제로의 상태로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신학대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일하고 헌금도 하는 건실한 하나님의 일꾼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신학대학교에 처음 입학한 나는 신학생들끼리 유명 목사님 험담하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저래도 되나?’
그러나 계속 듣다 보니 어느새 나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우선, 목사님의 험담을 들은 뒤부터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예전처럼 은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설교를 들을 때,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각하며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기술적 평가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인생을 좌우하던 생명의 말씀이 강의가 된 것이다. 공부는 되었을지 몰라도 은혜와는 멀어져갔다. 주님과의 첫사랑, 영적인 순수성을 잃고 말씀을 편식하는 까탈스러움이 생겨버린 것이다.
은혜 받지 못하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처음으로 찾아 왔다. 잘 알겠는데 행동으로는 못 옮기는, 은혜를 상실한 전형적인 크리스찬의 모습. 그것이 나였다.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안 되고, 성경 봐야 하는데 성경이 눈에 안 들어 왔다. 어떻게 해야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모르는 성도가 누가 있을까.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 처음 마주하게 된 그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었고 힘이 들었다.
때로는 식어가는 내 모습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따금 몸부림치며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한번 시작 된 영적인 냉각은 계속 진행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님을 가까이 느낄 수 없었다. 사탄이 나에게 주입한 그 설교 비평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설교를 들을 때 비정상적일 정도의 ‘아멘’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야 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이 어떻게 사용 될지 모르는 지금의 나로서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나는 여전히 설교라면 평가할 줄 모르고 갈망하며 듣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