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성도 때문에 ‘목회를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 상심이 크시다기에, 마지막으로 그 성도님께 부탁드려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성도님, 당신을 위해 정말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하지 않습니까?”
목사님께는 이미 긴 세월 동안 무수한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후회’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로서 사탄이 할퀴고 간 흉터입니다. 좋은 멘토, 좋은 멘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자들은 마음속에 후회를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귀한 성도가 혼자서 문제와 싸우며 아파하는 동안 목사님께서는 아마도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때로는 원어의 의미까지 찾아가며 설교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힘쓰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 설교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위대한 설교가는 이미 인터넷에 넘쳐나고,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도 십중팔구의 성도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설교를 듣고 흘려버리며 지적 만족감에 머물러 살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설교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고,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변화 없는 삶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성도들의 삶에 무관심한 목회자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아파하는 성도를 보면서도 ‘기도합시다’라는 형식적인 말로 상황을 회피하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교회가 우리 앞에 도래했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그 성도님은 나의 부모님보다 지혜로운 분 같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다니며 누구보다 많은 헌금과 전도왕을 놓치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부도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여져 살아야 할 때 교회는 쌀 한포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성도가 몇 개월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지요? 과연 그 성도님이 나의 부모님처럼 부도가 나서 떠났어도 목사님은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셨을까요? 어려움에 처한 그 성도를 도와주셨을까요? 교회와 목회자로부터 버림받기 전에 떠난 그 성도님은 아무래도 나의 부모님보다 지혜로워 보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실상은 본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 여기저기 외부 강의를 다니는 동안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목회자의 공백’입니다.
외부 강의? 좋은 것이지요.
설교 준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목회자의 업무에는 설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본 업무는 양을 돌보는 목양입니다. 설교만 하면서 살고 싶다면 교수님이 되시거나 순회 설교자가 되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문제 앞에 방치된 성도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혼자 아파하며 여기저기 떠돌며 영적인 돌봄을 구하러 다닙니다. 대체 주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전도와 양육 아닙니까? 이 두 가지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목회자도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전도는커녕 양육조차 제대로 못하는 무수한 목회자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대체 양육이 무엇입니까? 대화 시간 조금 가져 주면 양육입니까?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장 19~20절)
양육을 했다면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수년 동안 아무런 치유와 변화, 기도 응답 등 그 어떤 영적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업무 태만일지 모릅니다. 모든 성도에게 능력이 나타날 순 없다 해도, 변화를 경험한 성도보다 경험하지 못한 성도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목회자는 스스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만 받고 물품을 주지 않는 가게 점원, 수리비만 받고 차를 고쳐주지 않는 정비사, 수강료만 받고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교사, 헌신만 받고 성도를 돌보지 않는 목회자...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목회자에게 알곡 같은 성도를 허락하실까요?
성도는 목회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자기 삶에만 집중하며 살라고... 목회자 자녀 유학 자금이나 보태 주라고 존재하는 현금인출기가 아닙니다. 성도 또한 각자의 삶이 있고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는 목회자와 동일한 인격체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태복음 18장 10~13)
목회자가 양을 방치하면 주님께서 직접 그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양을 돌봐줄 새로운 목동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매일 설교하지만, 실상 능력은 로또 당첨만큼이나 드물 게 나타나고 있는 하향평준화 된 교회의 현실 앞에서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게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가? 주님의 일이라 말하며 나를 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한창 돈을 벌며 자리 잡아야 할 그대가 ‘신학대’를 갖다가 평생 후회하며 살지 않도록 주님께서 그대에게 보내신 가이드입니다. 그대가 진짜 사명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나의 말에 영향 받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만일, 내 말을 듣고 마음에 갈등이 시작된다면 그대는 자신이 받았다고 말하는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를 갔다가 인생 설계를 망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를 들을 때 분석하게 된다. 예전처럼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2. 전도사라는 칭호를 얻는다. 교회에서 포지션이 애매해진다. 떠돌이 교인 생활이 시작된다.
3. 시무할 교회를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작은 교회의 사례비는 사실상 생활이 불가할 정도고 대형 교회는 경쟁률이 매우 높아서 사실상 유명 신학교 졸업자에게만 시무할 기회가 주어 진다.
4. 결국 개척한다. 성도가 오지 않아서 교회 운영이 어려워진다.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진다.
5. ‘주의 종이니 주의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디 가서 취직도 못하고 무직 상태로 세월을 보내며 아내가 벌어 오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간다.
아무리 봐도 사명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합리적 의심사례 체크 리스트
1. 전도를 못한다. 몇 명이나 교회로 인도해 보았는가?
2. 양육도 못한다. 혹시 상대방에게 감동 몇 번 준 것 가지고 목회자를 생각했다면...
lazy christian도 감동은 잘 받는다. 그러나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실천을 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거둘 수 없다. 동기부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도록 양육한 경험이 있는가?
전도와 양육을 하지 못한다면 귀하가 설립한 교회는 운영적자로 문을 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3. 기도도 안 한다. 솔직히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
4. 날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 통독을 몇 번이나 했는가? 성경말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칼을 못 다루는 조리사, 공구에 서툰 정비사 등 자신이 하는 일에 필요한 도구조차 다루지 못하는 비전문가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5. 직장 생활을 꾸준히 해본 적 없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니까, 주의 일을 하면 주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도피성 목회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말로 자신의 실패한 과거를 미화한다. 마치 ‘세상에서 있었으면 잘 나갔을 텐데 주님께서 부르셔서 어쩔 수 없이 목회자가 된 것’같은 뉘앙스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목회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목회자 중 상당수가 인생을 나태하게 살아온 경험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안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한 직장을 진득하게 다녀본 경험이 없다. 장사도 못하고 사업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던 사람이 목회를 하니 목회도 못하는 것이다.
6.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신학대학에 갈까 말까?’ 자문을 구하고 다닌다.
그런 질문은 주님께 기도로 여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사명자의 길을 가서야 되겠는가?
7. ‘신학교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8. 혹시 평소에 목회자와 설교를 비판한 적이 있는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상대방 동의 없이 훈계하듯 가르치려 들고 상처를 입히며 다닌 적이 있는가?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부족해 보이진 않는가?
외람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을 괴롭히는 문제아 성도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온 성도를 괴롭혀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싶을 정도까지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를 위한 격리 수용 공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곳의 목회자는 누구여야 하겠는가?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우리 아들, 목사님 해볼까?’
따라나서면, 두들겨 맞으면서도 은혜에 겨워 철이 들어가는 연단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 그런데 성도는요?”
성도 모으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힘들게 모은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교인이 얼마나 눈엣 가시처럼 꼴 보기 싫은지... 그리고 목회자로서 교인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자괴감에 회개하는 삶의 반복 속에서 자신의 철없던 옛날 모습을 깨달아 가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화 훈련 과정이다.
성도들이 서로 다툴 때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는 목사 입장이 얼마나 죽을 맛인지, 그런데도 ‘목사님이 내편 들어주지 않는다’고 양쪽 다 서운한 뉘앙스를 풍길 때 얼마나 억울하고 미칠 노릇인지... 그렇게 목사님의 심정을 넘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까지 느끼게 될 것이다.
환난으로부터 자신의 지체를 돌보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주요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귀하께서 속한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어떻게 대하나요?
1.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서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힘을 씁니까?
2. 형식적으로 금일봉 한두 번 주고 관심을 끊습니까?
3. 아예 상관조차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되었든 귀하께서도 공동체로서 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하께서도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면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을 그 교회에 남겨 두고, 그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려움에 빠진 성도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자리 잡힌 오늘날 교회의 모습,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성도를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는 많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설교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교회의 규모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참 목회자들이 존재합니다.
당뇨병으로 다리 절단 위기에 놓인 연로한 권사님의 다리를 아침, 저녁으로 안수하고 마사지 하며 위기에 함께하는 바스토의 한 목사님 부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실질적이고 위대한 설교가 있을까요?
오랜 시간 훌륭한 설교자들의 책과 강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설교보다 강력한 목회자의 능력은 사랑이라는 것, 그것은 오로지 행함을 통해서만 증명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어려움에 빠진 성도를 돌보지 않는 목회자는 삯꾼일 뿐이다.(요10:12) 그런 자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목사님, 지체라고 하지 않았나요? 형제자매라고 하지 않았나요? 팔에 염증이 생기면 잘라내시나요? 모른 척 그냥 방치하다가 적당히 썩어서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시나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교회에서 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필자는 개인과 기업체의 사업 자문을 하며, 세상 모든 직업에 ‘비 전문가’들이 넘쳐 남을 알게 되었고 분야별 가짜 전문가들에 대한 칼럼을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음식 맛없는 요리사, 수리 못하는 수리공, 과잉 진료하는 의사, 망하게 하는 창업 전문가, 투자금 날리는 투자 전문가, 자기자산도 관리 못하는 자산 관리사 등 모두가 전문가인척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그들 중에 진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은 희소했다. 이미 우리는 진짜보다 가짜가 많아서 ‘구매 후기’ 없이는 아무것도 함부로 구입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떠한가? 주님께서 세우셨으리라 믿고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해왔을 뿐 컨설턴트의 눈으로 바라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설교]
성공학 강사 흉내 내는 목회자들이 있다. 사업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목회자가 사업 성공에 대해 논하는가? 성공해 보았는가? 사업으로 벌어들인 총자산은 얼마나 되는가? 누군가의 사업을 성공시켜 본 경험이라도 있는가?
목회자의 최대 경쟁력은 복음을 들고 서 있을 때 발휘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을 때 가장 강력하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1)
이른 나이에 목회자가 된 사람 중에, 한 직장을 10년 이상 근속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 평신도 가장의 깊은 시름과 고뇌를 어찌 알고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복음 없는 목회자의 조언은 현실 모르는 비전문가의 허세 섞인 이론일 뿐이다.
[기도]
기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믿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수백명인 교회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간증이 전혀 들려 오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목회자가 기도하고 있다면 성령 역사를 동반한 기도 응답이 있기 마련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도의 불을 붙이려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말 기도하는 목회자라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는 상식적인 부분이다. 일례로,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목회자는 방언할 줄 모른다. 그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모든 방언하는 성도들을 ‘귀신 방언’으로 치부한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사도들이 받았던 것도 귀신방언 인가?
“그때 사도들이 하는 방언과 지금의 방언은 다릅니다.”
“그런 말이 성경 말씀 몇 장 몇 절에 나와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13장 8절에 보면 ‘방언도 그치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2022년 현재, 방언이 그쳤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주님께서 오시리라’고 하셨으니 지금 주님께서 오신 겁니까? 계룡산? 지리산?”
방언을 부정하는 목회자는 방언할 줄 모르고,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하는 목회자는 기도로 자신의 삶을 돌파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런 목회자와 함께하는 성도에게 기도 응답이 있겠는가?
[전도]
성도의 제1 사명은 전도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전도하는 평신도를 몇 명이나 보았는가? 책이나 영상 속 인물 말고 주변 지인 중에서 10명 이상 전도한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불신자 1명조차도 전도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다면 목회자 중에는 어떤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모두가 교실에 앉아서 ‘낚시 방법’ 토론만 하고 정작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모두가 ‘성질 죽이기’ 같은 자기와의 싸움에 빠져서 세상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제 1사명이라 할 수 있는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 평신도나 목회자나 일반이라면 다음으로 해야 할 제 2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는 평신도가 전도할 수 있도록 치유하고 성장시켜서 세상에 파송하는 것이다. 이를 양육이라 한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양육 프로그램에 순종하며 성장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성장하지도 않고 전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계속 불순종만 하는 사람은 lazy christian일 수 있다.
1번, 2번 다시 1번, 2번 그렇게 전도와 양육을 반복하다 보면 교회와 함께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성장하게 된다.
[양육]
목회자가 양육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열매로 증명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말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해야 한다. (고전 4:19)
성도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알곡이라면 30배 60배 100 이상의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양육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귀하는 알곡입니까?”
* 다른 성도들이 목회자를 통해서 힘을 얻고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데 나만 은혜를 못 받고 있다? → 본인의 영적 태만
* 나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기도 응답도 없고 삶의 돌파는커녕 대체로 눌린 삶을 살고 있다? → 목회자의 업무 태만
양의 상태를 살피고 돌보는 것이 목회다. 고로 직업적으로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는 자신의 양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다. 설교에만 심취할 거라면 그는 교수나 외부 강사가 적합하다. 어려움에 빠진 성도를 돕지 않는 목회자라면 천사의 말로 설교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훌륭한 설교는 이미 유튜브에 넘쳐나지 않는가?
‘섬김’을 받아 보지 못한 성도는 ‘섬김’의 능력을 모른다. 섬김은, 한 영혼이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집중해 주는 것’이다. ‘섬김’에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난다.
올해로 예수님을 만난지 7년째인 위 성도 또한 혼자서 목회자 한 명의 사례비에 달하는 헌금을 드리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소수에 의해 세워져 왔다. 위의 두 성도는 아래 칼럼에서, 넉넉지 않은 재정으로 핫도그 하나를 나눠 먹었던 그 지체들이다.
위 성도 한 가정이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다. 자신의 집 중 한 채를 교회 겸 사택으로 제공했으며 10명이 넘는 교인들을 전도했다. 두 부부의 헌신으로 한 목회자 부부가 충분한 사례비를 받으며 34평 좋은 아파트에서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방치되고 있는 성도 중에 장차 하늘나라의 거목이 될 새싹이 있을지 누가 알랴. 나중에 온 막내 성도가 훨씬 더 강력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Q : 목사님은 특별히 신령하다?
A :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9)으로서 주님 아래서 평등한 지위를 같습니다. 목사님뿐 아니라 누구든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 성령님께 특별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목사님은 평신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성도다. 평신도는 목사님께 육의 양식을 먹이는 성도다. 둘 다 성도다. 지체다. 형제자매고 서로 돕는 공생관계다.
“먼저 십일조로 성도의 의무를 다하시오. 십일조는 양심적이며 상식적인 것이오. 십일조 없이 교회와 목회자의 삶이 유지될 수 있겠소? 성도로서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 목사님이 성도를 위한 의무를 다하는지 살피시오.”
평신도들이 목회자를 존중해 드리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들을 돌봐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자기 실력이 아니라 부모 잘 만나서 교회를 세습한 목회자는 더욱 겸손히 복음에 힘쓰며 자신을 낮춰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출중한 경쟁자들이 있음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쭐해지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자신을 치며 평생 빚진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아직 교회 재정이 자리 잡지 못한 개척교회 목회자라면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 앞에 끊임없이 구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힘써도 ‘쭉정이는 열매를 내지 않음’을 주님께서 다양한 예화로 경고하셨다.
필자의 부모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견 없이 존경받는 목회자의 삶을 사셨지만 쭉정이와 염소들에게 둘러싸여 온전한 목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 짓는 기준은 ‘실천 여부’이다. 실천하는 알곡에게 말씀과 기도로 집중해 보라. 다른 양들 또한 그의 성장을 보며 힘을 얻을 것이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만 집중하셨다. 따르지 않는 자들은 설득하지 않고 과감히 두고 갈 길을 가셨다.
“진심으로 자신을 지체로 생각하는 목회자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그런 교회가 맞습니까?”
- 나에게 힘이 되어 줘서 나 또한 힘이 되어 주고 싶은 교회
- 내가 힘이 되어 주었더니 나에게도 힘이 되어 주는 교회
- 성도를 버리지 않는 교회
- 쓰러진 성도와 끝까지 함께하는 교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누가복음 11장 9~ 10)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참한 여자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그리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여자는 로봇이나 물건이 아니다. 그녀 또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같은 이유로, 맛없는 음식을 파는 사람이 손님이 많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음식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성실, 지혜, 열정을 주시고 필요에 따라 노하우를 알려 줄 사람을 보내 주신다.
맛없는 음식을 파는 자의 ‘손님을 많이 보내달라’는 기도에 즉시 손님을 보내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강제로 손님들이 맛없는 음식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빼앗아 의식 없는 좀비처럼 만들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의 의지로 맛없는 음식을 구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좋은 멘토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이 좋은 멘티가 되면 됩니다.”
대웅이 직장에서 시작된 영적 전투에서 지고 있다. 같은 교회 성도인 성민은 동일한 전투에서 이미 승리해 본 경험이 있다. 고로, 대웅은 성민의 말에 순종하면 무조건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싸움은 대웅이 이겼지만 성민이 대신 싸워 준 것이다. 그러나 성민에게 대웅을 돕고 싶도록 마음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하지만 전쟁터에 서 있는 것은 대웅이지 않은가?
[주님과 동행, 동역, 합심과 중보기도, 콜라보레이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5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님과 성도의 관계는 지체이다. 그러므로 머리 되신 주님께 순종하는 성민은 주님의 의지를 대신한다. 대웅은 성민이 주님께서 보내신 지원군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제안을 믿고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보내신 멘토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다. 멘토의 제안이 성경적이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하면 된다.
불성실과 나태에 찌든 삶을 벗어나려 도움을 청해오는 이가 있다. 기도를 통해 그의 삶에 들어간 나는, 예전에 내가 그 필드에서 탈출할 때 썼던 방식을 제안한다. 미친 사람처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성경 또한 그만큼 봐야 한다.
게임이나 TV에 빠진 폐인처럼 계속 성경을 보다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가 되면, 기도로 포지션을 바꾸고 시시각각 분분초초 떠오르는 그 더럽고 부정적인 생각을 미친 사람처럼 흔들어 떨쳐내야 한다.
정상적인 노력으로는 특별한 결괏값을 기대할 수 없다. 그 필드를 탈출할 수 없다. 머릿속에는 주여 주여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같은 단순한 선포가 수십 수백 번 이어져야 하며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은혜의 버스를 놓치게 되면 다음 버스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붙잡고 절대로 내리지 않아야 한다. 드라마 한편만 보고 다시 타야지 휴게소에서 잠시 내리는 순간, 좋은 멘토와 동료들이 타고 있던 버스는 떠나고 없다.
혼자서 잘해보든지, 아니면 ‘아프다고 말하면 위로와 공감은 해주지만 비전에는 동참하지 않는’, 상처와 힐링만을 반복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아팠군요. 나도 아팠어요.’ 서로 상처 붙들고 위로하고 위로받다가, 자기들끼리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또 다시 다투는 무한루프에 갇혀 살든지...
하나님의 사람이 ‘모사’가 되어 자신의 전투를 대신 치러주길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맞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맞다면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멘토에게, 실천하지 않는 멘티를 계속 붙여 두실 리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들 앞에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이 동요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이 욕구는 ‘거룩함’을 입게 된다. 이를테면, 대중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대체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용하셨다. 내 삶에 역사하셨다."
인간의 본능을 주님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신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에 의해 변질되기도 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본인 자랑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해 보이려고 위선 떠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모여 있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가창력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뽐내려는 찬양 인도자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기교를 뽐내기 위해 설교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업적을 대중 앞에 말하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사탄의 표적이 되기가 쉽다. 이들은 자신이 ‘주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주님 보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사역자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실까?
이런 교인과 함께 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도 위험하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상대방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보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사탄은 이런 관계를 통해 목회자가 주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도록 만든다. 이런 자의 재물을 받아 쓰려면 철저히 인본주의에 굴복하여 아첨도 해야 하며 때로는 거짓을 눈감아야 하는 순간도 생기기 마련이다. 선교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 하나를 소개하겠다.
1. 교회를 지으려는 성도들의 헌금을 받는다.
2. 오지에 허름한 가건물을 얻어 십자가 하나 달아 사진 찍어 보낸다.
3. 선물을 미끼로 지역민까지 모아서 촬영하면 사진은 더욱 그럴싸해진다.
4. 성도는 사진을 받아들고 뿌듯해하며 정기 후원한다.
5. 사진을 찍어 보내기 위한 세트장이었으니 시간이 지나서 가보면 교회는 사라지고 없다.
오백만원짜리 오두막 교회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과연 그 사진을 받아 든 성도가 한 사람뿐일까?
교회를 짓고 싶다던 A를 한 선교사님께 소개한 적이 있다. A는 1천만원으로 본인 혼자 교회를 짓고 싶다고 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1천만원으로 교회를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도 되어야 하니까요. 마침 교회를 짓고 싶어하는 다른 성도님이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아니요. 저는 저 혼자서 짓고 싶습니다. 태국의 어떤 선교사님은 가능하다고 하던데요?”
“혹시 태국 선교사님은 어떻게 알게 되신 분이신가요?”
“비행기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분인데 너무 신실하신 분이더라구요.”
필자가 소개한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그 헌금을 본인 계좌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일단 ‘가능하다’고 헌금을 받아서 ‘당신 혼자 지은 교회’라고 거짓말하면 될테니 말이다.
결국, A의 헌금은 태국의 선교사님에게 갔다. A의 말에 따르면 태국 선교사님께 몇 차례 더 후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연락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태국 가족 여행길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한 뒤부터라고 했다.
신앙심이 깊어 질수록 난이도 높은 영적 전투를 치르게 된다. 신앙심이 얕을 땐 자신의 원초적인 죄 문제와 싸우게 되지만, 어느 정도 성화가 진행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열매 생성’에 방해를 받는다. 신앙 초급과정이 자신과의 싸움이라면, 자신과의 싸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들은 세상을 향한 영향력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파생될 수 있는 악한 가능성 중 하나가 ‘자랑하기’다. 이는 교만과 뿌리를 같이 한다. 자랑하기에도 등급이 있다. 높은 등급에 올라갈수록 모든 영광을 홀로 독식하려 든다. 사탄적 특성이다. 그저 ‘선교 헌금 얼마 했다’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게 된 A는 ‘나 혼자 이 교회를 지었다’고 멋들어지게 자랑하고 싶었고, 그 욕심은 사탄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할 재정이 사탄에게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알곡으로 위장한 쭉정이보다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주님의 일로 위장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우려는 자들이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줄 알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처럼 적잖은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줄 알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
이들이 두려운 이유는 외관상으론 누구보다 신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목회를 돕겠다고 헌금을 들고 나설 정도인데 어찌 신실해 보이지 않겠는가. 잘만하면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기대감을 갖도록 조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관심과 기대감을 즐긴다.
그러나 목회자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은 중단되고 오직 일용할 양식 정도만 베푸시는 일반 은혜만 공급받게 된다. 간신히 목회하며 밥이나 굶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연고이다.
여기 20년간 한 목회자를 이용해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하다가 실패로 끝난 기독교인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던 두 명의 신앙 리더가 사탄의 설계에 따라 20년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지켜본 기록이다.
맞춤형 사탄 제거 수술 후기
처음부터 정옥이 사탄의 도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녀가 그렇게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신도 시절 경애는, 대형교회에서도 전도상을 놓치지 않던 성도였다. 경애의 사업장 또한 동종업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거두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개척교회들을 후원했으며 어려운 목회자와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은혜를 갚고 싶다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사모님 아니었으면 전 지금처럼 살수 없었을 겁니다. 꼭 뵙고 싶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런 경애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성공적인 목회자로서 살아가게 될 거라 믿었다. 그녀의 목회가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업부도 후, 경애가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거기서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 사모님?”
그녀가 전도했던 타자기 영업사원 미스터 김이 총 학생 회장이 되어있었다. 그는 경애부부가 자신을 전도하기 위해 어떤 헌신을 했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는지 온 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간증했다. 그 중에서도 주지스님과 지역을 주름잡던 범죄조직 행동대장을 전도한 이야기는 학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였다. 경애는 순식간에 교내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이야기는 같은 학교 신입생인 정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마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처럼 경애를 사모하게 되었다.
결혼 전까지 지독하게 가난했던 정옥은 부동산으로 고액 자산가가 되었다. 그녀는 경애의 등록금까지 내주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경애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누가 봐도 정옥은 하나님께서 경애를 위해 보내신 축복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정옥은 평소에도 선교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썼다. 보통사람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헌신이었다.
졸업 후, 산동네 집에서 교회를 개척한 경애에게 정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라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렇게 경애는 강남의 지하교회에서 든든한 협력목사 정옥과 함께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경애는 정옥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의 천사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둘의 만남 뒤에 가려진 사탄의 음모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여 년 후, 경애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남편과 자녀들 모르게 진 목회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옥 또한 정신건강에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여기 왜왔어?”
정옥에게서 간헐적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걸음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증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 증상이 있기 전부터 그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과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우울감과 공황증상으로 괴로워했다. 정옥의 공황증상은 교도소 선교에서 알게 된 봉구가 출소 후 정옥을 찾아오면서부터 가속화 되었다.
정옥의 후원으로 신학교를 졸업한 봉구는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사가 된 그는 담임목사인 경애의 설교를 비난하고 성도들을 함부로 정죄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교인들의 말에 따르면, 봉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행동과 정옥 앞에서 보이는 행동은 사뭇 다른 듯했다. 그런 봉구를 지도해 달라고 정옥에게 부탁했지만 정옥은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참 이기적이시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봉구전도사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어요.”
봉구는 정옥과 경애 사이를 오고가며 이간질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옥에게 봉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출소 당시, 누구보다 건강했던 봉구는 얼마 후부터 몸이 아프다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정옥이 이따금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봉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옥에게 전화를 걸어 우울한 하소연을 쏟아낸다.
어느 날, 평소처럼 봉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정옥은 평소와는 다르게 몸서리를 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경애에게 말했다.
“하아! 아우 숨 막혀! 하아. 내가 왜 이러지. 목사님! 저 봉구전화 못 받겠어요.”
정옥의 머리는 봉구를 구원의 열매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봉구로부터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봉구는 계속 되는 음주로 알콜 중독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고 당뇨 합병증을 고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옥과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던 미순이 말했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을 왜 자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시냐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고 했더니 저에게 주던 용돈도 싹 끊고 저랑은 말도 잘 안하시더라고요. 정옥목사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교회나 사람 중에 열매 맺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미순의 말은 정옥의 삶을 정리해서 말해주는 듯 보였다.
“아니, 구제를 하시려면 교회를 통해서 하셔야지. 본인이 용돈 주듯이 여기저기 나눠줘서 이제 이 교회는 돈 없으면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교회가 되었네요.”
여행을 떠나기 전, 정옥은 파지를 주워 생활하는 김노인에게 30만원의 구제비를 드렸다. 그러자 한 주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던 김노인이 다음주부터 1개월가량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돈은 다양한 부작용들을 양산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의 조언도 수용하지 않았다.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은 잘 알지만 질서 있게 교회를 통해 구제하시면 좋겠어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저 진짜 너무 서운해요.”
“그런 사람이 무슨 목사에요. 아줌마지.”
“아우 됐어요. 돈 안 벌어도 되니까 그 분 저희 한의원에 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아주머니는 갈비탕 2인분 사 가시면서 본인이 무슨 대단한 VIP인 줄 아시나 보죠?”
“어떻게 목사란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궁지에 몰린 사람 등쳐먹을 궁리나 하고”
N교회 M집사는 눈동자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정옥을 원망했다. 돈이 급해서 급매로 내놓은 자신의 집을 정옥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깎아서 사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상황을 이용하려 할 수 있냐는 하소연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돕고, 많은 헌금을 드린 정옥이 어째서 마음과 정신의 병을 얻은 채 사람들의 냉소까지 받게 된 것일까. 평생을 주님 앞에 헌신 봉사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탄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다양한 루트로 삼킬 자를 보낸다. 삼켜지면 열매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삼킬 자가 들어오는 통로는 바로 각자가 지은 죄이다.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통해 우리의 삶에 침투한다. 즉, 죄는 곧 사탄의 통로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토록 비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마태복음 6장 3~4절)
지나치게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정옥,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20여년간 행한 정옥의 행동들이 한 조각씩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두 딸조차 엄마가 ‘자기의’를 드러내는 모습을 못 마땅해 하고 있었다.
“엄마가 돈 자랑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엄마한테 자꾸 기대하게 만들잖아요.”
정옥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를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심지어 불우이웃에게 5 만원을 준 것까지 모든 성도들이 알도록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저에게 현금 3억이 있으니 이전할 교회를 알아보세요.”
정옥은 거액의 건축헌금을 약속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인천에서 변변한 예배당조차 갖추지 못했던 개척교회 시절, 목사님과 성도들은 기쁨으로 교회 부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정옥은 교인들이 알아본 모든 교회부지에 퇴짜를 놨고 한 푼의 건축헌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목사님이 건축헌금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가 건축헌금을 한다고 했다고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그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몇 번의 헌금을 작정하고 번복했다.
“성도들이 꽉 차면 큰 교회로 이전하겠습니다.”
“제가 의자를 더 놓겠다고 했지 언제 교회를 이전하겠다고 했어요!”
“이 땅이 팔리면 주의 종을 위해 쓰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땅값이 헌금을 작정할 때보다 7배가 넘는 금액에 팔렸음에도 서원을 지키지 않았다. 그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약속 → 칭찬 받음 →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함
그녀의 선포와 번복에는 일종의 루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강원도 가족 여행 중에 갑작스레 정옥의 기억이 지워진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여기 왜 왔어?”
하나님과의 약속을 밥 먹듯 잊어버리는 그녀에게서 간헐적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경애의 아들 K가 정옥의 두 딸에게 엄마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지 1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다.
“요즘 정옥 목사님이 영적으로 많이 힘드신 거 같아. 치매까지 올 수 있으니까 엄마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정옥의 둘째 딸은 K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영적인 체험을 한 바 있었다.
“오빠는 정말 기도하는 사람인 걸 매번 느껴요.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응답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과거 정옥은 경애에게 자신의 후배 전도사를 부탁하기도 했다.
“사례비는 제가 드릴테니 교회에서 시무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정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차마 전도사님을 해고할 수 없었던 경애는 가족들 모르게 카드 대출까지 써가며 수년간 후배 전도사의 급여를 지불했다. 본인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례비였다. 그렇게 4년간 지불 된 4천만원에 달하는 사례비는 오롯이 경애의 개인적인 채무로 남았다.
정옥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거액의 헌금을 경애와 성도들 앞에서 약속했다.
“3천만원 헌금을 하려고 하니 기도해 주세요.”
그러나 정옥은 그렇게 기도를 시킨 후 다른 교회에 헌금을 드렸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급여 한 푼 받지 못하고 때로는 임대료가 밀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정옥은 다른 교회에 거액의 연보를 했고, 그렇게 헌금한 사실을 물어본 적도 없는 경애와 성도에게 자랑하듯 말하곤 했다.
“너무너무 훌륭한 목사님이 있어서 그곳에 헌금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정옥은 그토록 칭찬했던 교회의 목사님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헌금 드린 사실을 성도들 앞에서 치하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고요.”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많은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곳,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곳에 헌금을 드리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본인이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눈빛이 확 달라지시더라고요.”
어려운 재정보다 더욱 경애를 힘들게 한 것은 정옥을 비롯한 몇몇 교인들의 ‘경애를 대하는 태도’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옥과 몇몇 교인들이 담임목사인 경애에게 함부로 소리를 지르거나 다그치며 혼내듯 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경애의 심리적 위축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그녀의 아들 K였다.
“교회 재정이 어려운 것은 그럴 수 있어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시는 거라면 그것도 감수했을 겁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닐 만큼 다닌 교인들이 목사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어차피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교회 다니다가 온 교인들이니 다시 다른 교회에 가게 되도 신앙생활을 잘할 겁니다.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누가 진짜 어머니의 성도들인지. 비록 헌금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 분들과 다시 시작하세요.”
K는 10년 전부터 한결같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해왔었다.
“정옥 목사님은 성경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계세요. 앞으로 점점 더 어머니를 힘들게 할 거예요. 정옥 목사님은 점점 더 어머니와 교회에 인색하게 행동할 겁니다. 도움 기대하지 마시고 대책을 세우셔야 해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도 나한테 은인이다.”
“네. 알아요. 그래서 저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천국가시는 날까지 목회를 하시길 원한다면 대책을 세워야 해요. 차라리 예전처럼 집에서 다시 개척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적어도 성전임대료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경애가 듣기에도 아들의 말은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경애가 ‘임대료 때문에 교회 문을 닫고 집에서 개척을 한다’고 하자 정옥이 황급히 막아섰다.
“목사님, 제가 남편과 상의해서 재정을 지원 받아올게요. 그리고 목사님이 지금까지 못 받은 사례비를 계산해 보니까 1억 5천 정도 되던데 이것도 남편과 제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도하고 계세요.”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거짓 약속을 반복하며 세월이 가고 경애의 목회 빚은 가족들도 모르게 늘어만 가고 있었다. 오히려 정옥의 헌금은 평소보다 더욱 줄어들어 평신도 보다 적은 헌금을 드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들과 함께 먹은 밥값까지 경애에게 계산하게 했고, 심지어 경애에게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 훌륭한 집사님이 있는데 너무 사정이 딱하더라고요. 내가 돕고 싶어서 그러니까 교회 재정으로 이백만원만 주세요.”
“목사님, 우리 교회에 그런 재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내가 그동안 충분히 헌금을 했는데 왜 재정이 없어요!”
정옥이 호통을 치자, 경애는 그동안 아들이 그토록 자신에게 말해왔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더이상 속으시면 안돼요. 목사님은 예전의 그 분이 아닙니다. 예전 고마웠던 기억에만 사로잡혀서 계속 속고 계시잖아요. 사탄이 정옥 목사님을 통해서 어머니의 남은 인생마저 허송세월 시키려는 겁니다.’
그러나 경애에게는 처음 정옥에게 받았던 사랑과 배려에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깊게 배어 있었다. 어쩌면 동역자의 변심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사람들은 당연히 정옥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20여 년간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경애는 정옥에게 이제 그만 은퇴를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미 은퇴할 나이도 많이 지났으니 이제 나 대신 교회를 맡아 주었으면 해요. 더이상 교회 재정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요. 자녀들에게도 면목이 없네요.”
그녀의 편지에는 아무런 부탁도 책망도 없었다. 그저 교회 문을 차마 닫고 싶지 않았던 가난한 노년의 목회자가 이 무거운 짐을 가져가 달라는, 은퇴를 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마지막 부탁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옥은 그마저도 받아주지 않았다. 정옥은 편지를 받자마자 그날 즉시로 교회를 떠났다. 그녀는 왜 그토록 황급히 교회를 떠난 것일까? 정옥이 떠난 뒤, 교회의 재정은 더욱 악화가 되었고 차마 교회 문을 닫을 수 없던 경애는 결국 은퇴를 잠시 반려하게 되었다.
현재 정옥은 모든 만남과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특별한 병명조차 나오지 않는 그녀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병원에 없다. 정옥의 남편은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걸려오는 모든 전화와 문자를 차단했다.
정옥의 말에 따르면, 정옥에게 경애는 어렵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이자, 언니이자, 신앙의 조력자였다. 심지어 정옥은 몸이 아플 때도 의사보다 경애를 먼저 찾았고, 경애는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정옥을 위해 달려갔다.
“저는 목사님을 가족 다음으로 사랑해요.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진짜 목회자죠.”
그러나 정옥은 가족 다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경애 부부가 은퇴 준비는 커녕 목회로 생긴 채무까지 떠안게 된 상태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경애의 아들 K가 찾아와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지만 정옥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저희 모르게 또 2천만원을 빌리셨더라구요. 모자란 재정을 전부 어머니가 책임지게 되어 있어서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니 교회 재정 위원들과 함께 재정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임대료가 밀리면 모든 성도가 힘을 합쳐서 내던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세우던가 해야지 담임목사님 혼자 모든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K야, 어머니가 좋아서 하시는 거니까 그냥 그대로 두렴.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일이잖니."
정옥은 평소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K는 그날의 대화를 통해 정옥의 진의를 확신했다. 경애의 남은 삶은 정옥에게는 그저 듣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듯 보였다.
어느덧 노년의 목회자가 되어 버린 경애, 정옥을 포함한 무례한 교인들이 담임목사인 경애를 혼내듯 다그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경애는 더이상 열정 넘치는 기백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아들이 새로운 시작을 제안해 왔다.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살면서 본 가장 훌륭한 목사님 중에 한 분이세요. 저도 어머니가 주님나라 가시는 날까지 목회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시작해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경애의 아들 K는 함께 섬기던 교회를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경애를 설득해왔다. K가 말하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교회 구조개편...
“쌀 나누기, 반찬 나누기, 어려운 분들 돌보시는 건 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목회자로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과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싼 임대료가 나가는 성전을 어머니 사비로 유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경애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때때로 K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목회자인 경애를 책망하기도 했다.
“천만원, 이천만원씩 새로운 빚이 발견 될 때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정말 해도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지하상가에서 파는 3만원짜리 옷조차 기어이 내려놓는 어머니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K는 어머니가 자신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도, 돈도 언제나 교인들이 우선이었다. 전역한 아들이 자기 방이 없어 교회 비상구에 합판을 올려놓고 잘 때는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전주에서 채무 도피를 온 생면부지의 용국에게는 고시원을 얻어주었다.
그렇게 보살핌을 받던 이들 중 다수가 구제비를 받아쓰고, 교회의 쌀과 음식을 먹으며 목사님께 무례하게 굴거나 돈을 빌려달라는 등의 무리한 부탁을 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자신의 부탁을 더이상 들어주지 않거나 형편이 나아지면 감사 인사 없이 큰 교회로 떠났다.
“어머니, 목회는 규모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에 어머니가 감당하실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 때문에 정말로 돌봄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방치되고 있잖아요.”
10년 넘도록 어떤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경애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K와 함께하는 동역자들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성도들은 놀랍게도 경애와 K가 기도하며 선별한 리스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K는 평소 교회 봉사는 하지 않으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고 목사님께 무례하게 호통 치던 사람들을 명단에 기록하지 않았다.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곳이 아니어도 다른 교회에 출석하실 분들이니까요. 이번 기회에 본인들 마음에 드는 훌륭한 목사님을 찾아가게 되었으니 그분들 신앙을 위해서도 오히려 잘된거예요. 저는 지금 어머니의 회복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어머니가 예전 같은 영성을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새벽 1시 건, 2시 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본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몇 시간씩 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예배는 드리지 않고 사라지는, 그러면서도 경애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말투로 가르치듯 말하는, 교회 일은 전혀 돕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K는 틈틈이 경애와 동물원, 미술관,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시간을 함께 했다.
정옥은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숨겨왔던 본인의 성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소 정옥을 알던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정옥은 경애의 아들 K를 책망했다.
“이제 네 소원대로 되었냐? 네 소원대로 되었냐고?”
아울러 정옥이 K에게 보내온 편지에는 지금껏 누구도 본 적 없는 정옥의 공격적인 면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도와줬는데 이렇게 나를 이용하다니 꼴 보기 싫다. 역겹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K는 정옥의 말에도, 편지에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옥의 거친 언어는 자신보다 10살 많은 담임목사 경애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너무 안타깝다. 나한테는 은인이었는데... 다신 볼 수 없겠지.”
“아니요! 다시 연락하려고 시도해 올 겁니다. 저도 두 분이 다시 관계를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안돼요. 편지를 보니 그동안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이 가네요.”
1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K의 예견대로 정옥이 경애를 만나려는 시도를 해왔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야. 화를 내고 나면 항상 미안하다고 사과했었어. 이번에도 그런 걸 거야.”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도 그렇게 말하지요. 지금까지는 어머니 방식으로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제 방식에 따라주세요. 정옥 목사님을 위해 기도만 하시고 아직은 따로 만나시면 안 됩니다.”
K는 1개월 전 정옥에게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지난 20년 동안 경애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정옥이 말만하고 지키지 않은 약속들과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 일전에 목사님께서는, 목회는 하고 싶지만 본인이 직접 목회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지키지도 않을 재정 지원을 약속하며 어머니의 은퇴를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교회에는 헌금을 하면서 본인이 부교역자로 섬기는 교회는 성전세가 밀리건 말건, 담임 목사님이 사례비를 받건 말건 모른척하셨지요. 도대체 이 교회는 누구의 교회입니까?
유추해 보건대, 목사님이야말로 본인이 목회는 더하고 싶은데 교회에 추가적인 재정지원을 해주는 것은 싫어서 어머니를 이용하신 거 아닌가요. 목사님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시면서도 본인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곳에만 헌금을 하고 온갖 굳은 일과 어려운 교회 재정은 모른 척 하셨습니다. 남을 돕거나 헌금한 것을 모두가 알도록 몇 번이고 본인 입으로 자랑하셨지요. 성경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편지를 드린 이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저희 어머니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셔서 꾸벅꾸벅 조는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호통 치는 분들이 어머니 주변에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은퇴할 나이도 넘기셨으니,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이제 어머니 근처에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도 이제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분이 되신 것 같습니다. 다시는 어머니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역겹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어머니를 친구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20여 년 전, 목사님께 감사했던 순간만을 기억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타인보다는 가족들과 자기 자신의 회복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K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잘못도 있습니다. 관계가 이렇게 되기 전에 서로 대화를 나누셨어야지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없어요.”
K가 아는 한, 그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었다. 그러나 정옥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지혜로움이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 경애가 어째서 그토록 오랜 시간 정옥에게 속아서 끌려다니게 되었던 것일까?
처음 정옥은 진심을 담아 경애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해 정옥은 경애의 전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경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된 후부터 정옥은 도움 대신 경애의 목회와 삶에 무거운 짐과 채찍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정옥은 누구보다 가장 많이 경애의 시간을 요구했으며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본인 자랑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누구보다 경애를 함부로 대했고 이는 일부 교인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최고 연장자이자 담임 목사인 경애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정옥과 정옥의 후배 교역자는 누워서 수다를 떤다. 청소부터 추수감사절, 부활절 등 행사준비까지 모든 잡무를 담임목사 혼자 하는 동안 부목사들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치 사립학교의 이사장처럼 담임목사가 한 결과물에 대해서 평가하며 훈수만 두는 모습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교회의 한 분야를 맡아서 감당하지는 않았다. 정옥은 설교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설교 당일, 자신의 설교를 경애에게 미루기도 했다.
“목사님 나 설교 준비가 안 돼서 교회 못 가겠어요.”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였을까? 정옥은 경애에게 자신이 다른 교회에 큰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것은 마치 사탄의 바디랭귀지와도 같았다.
'이것 봐. 내가 이렇게 다른 교회에 헌금 하는 거 봤지? 나는 이런 헌금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계속 내 도움을 기대하세요.'
개미의 걸음 속도처럼 아주 천천히 조여 오는 사탄의 개인 맞춤형 올가미에 경애가 걸려들고 만 것이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정옥은 경애에게 성전 임대료를 빌려준 적은 있으나 단 한 번도 탕감해 준 적은 없었다. 때론 월 15%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와중에도 정옥이 경애에게 1년에 2차례 정도 주는 고가의 선물이었다.
“내가 백만원짜리 속옷이 왜 필요하겠어. 이런 걸 돈으로 줬으면 성전 임대료에 보탤 수 있었을 텐데... 감사한 생각만 해야 하는데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네.”
처음 정옥이 경애를 만났을 때 베풀었던 그 모든 호의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옥이 자기 의를 드러내며 점차 사탄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된 시점부터 그 신뢰는, 사탄이 경애의 목회를 훼방하는 통로로 쓰이고 말았다. 진심 어린 호의로 얻어진 신뢰가 사탄의 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다.
“아니, 그깟 박수 좀 받고 싶은 것이 무슨 그리 큰 죄인가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12장 48절)
많이 아는 만큼, 많이 받은 만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기준도 엄격해진다. 알만한 성도가 자신이 받은 바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받은 것에 비례하여 맞게 될 수 있다. 자녀들조차 우려를 표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했던 정옥, 그녀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목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청소 및 성전 관리, 고정 지출, 심지어 예배까지도...
"난 내가 뭔가를 고정적으로 맡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못해요."
그녀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막상 성전은 얻었지만 단 한 명의 성도도 없던 상황에서, 경애는 전도부터 교회 운영까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줄 좋은 대타였다. 경애는 정옥이 세운 빈 성전을 몇 번이고 성도들로 가득 채웠다. 충분히 아름다운 동행일 수 있었다.
경애는 단 한 번도 정옥의 재정지원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언젠가 지킬 약속이라 믿었기에 어려운 재정을 대출까지 얻어가면서 버텨왔다. 100만원으로 계산해도 못 받은 사례비가 2억여원, 목회로 생긴 채무는 중간중간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1억 이상, 자녀들과 지인들로부터 받은 돈까지 모두 사용해 버린 그녀의 사택 전세 보증금은 모든 대출을 상계처리하고 나면 0원이 된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자녀와 남편의 망연자실한 표정 앞에서 경애는 굳어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경애가 기대해야 할 대상은 처음부터 정옥이 아니라 하나님이였어야만 했다. 경애는 정옥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기대하며 기도했어야 했다. 경애는 늘 입으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교회 재정 지원자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정옥을 올려놓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경애는 결코 하나님 대신 인간을 의지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 그녀의 삶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경애의 목회 생활 20년, 프라임 타임은 그렇게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정옥은 온갖 거짓 약속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적당한 물질 공세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정옥은 고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는 어떻게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옥에게 조금 더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였고 정옥 또한 그런 관심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곤 했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정옥은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할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함, 그것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할 때 느껴지는 죄의 맛인 줄은 몰랐다. 그 짜릿함에 대한 갈망이 자신을 죄에 대한 중독으로 이끌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은 하나님의 능력자들이 사탄의 설계 아래서 열매 없는 삶을 종용받고 있다. 언제나 본인이 헌금과 구제한 것을 자랑하는 정옥에게서 어째서인지 열매에 대한 자랑은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평생 단짝 미순 목사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옥 목사님 돈 받아 쓴 사람들 중에 잘 된 사람 있나 보세요. 하나도 없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 등 다양한 비유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알곡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위 사례는 필자의 부모님 이야기다. 이는 필자로 하여금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깊은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럴 땐,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아보아야 한다. 어떻게든 겸손을 구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교회에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징벌적 사명’이다. 다 마음에 안 들어 하니 하나님께서 ‘그럼 네가 해 보라’고 앞장 세우신 것이다.
미취학 아동에게 히어로 의상 입혀 주듯 홀로 백의종군케 하시는 신(神)의 한 수, 일종의 격리 수용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감사함으로 받은 사명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불평하다 걷게 된 길이니 고난은 예비 되어있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오는 성도 역시 목회자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올 것이다. 본인이 섬겼던 목회자를 향해서 했던 말과 행동, 품은 생각까지 그대로 성도들에게 받게 될 것이다. 순종하면 순종의 열매를, 불순종에는 불순종의 열매를...
적당히 순종하는 것에는 적당히 순종의 열매를, 못마땅한 마음에는 성도들로부터 못마땅한 마음을, 부정적인 평가의 말에는 동일한 평가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장 2절)
본인을 통해 목회자가 겪었을 고통과 불편을 그대로 돌려받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며 회개하고 철이 들어가게 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화훈련코스이다. 빨리 깨닫고 회개해야 연단도 빨리 지나간다.
버틸수록 영혼의 피골은 상접해지고 얼굴은 하나님의 종인지, 귀신 들린 박수무당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사납게 변해간다.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고 금전은 마르며 몸에는 지병이 끊이지 않아 멘탈까지 오락가락한다. 라이프 사이클이 하위 레벨 무속인들의 것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장 1절)
목회자의 가이드에 따르지 않으면 목회자와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논하기 이전에 어느 조직에나 적용되는 상식이다. 성도는 교회에 속해야 하며 교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믿고 사랑하는 온전한 지체의 연합이다.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성도와 함께 목회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목회자도 사람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성도가 있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계속 시달리다보면 축복 기도는 고사하고 '제발, 저 분 좀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며 동행할 수 있겠는가?
힘 좀 있다고 다윗에게 조건부 순종과 컨트롤을 시도했던 요압의 말로를 기억 할 것이다. 누구보다 많은 공을 세웠던 그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는가. 언성을 높이며 감정을 휘두르면 목회자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업무의 특성상 힘 한번 못써보고 당할 수밖에 없다.
혹시 목회자가 분을 못 이겨 함께 핏대를 세우고 덤빈다면 목회자를 공격한 자에게는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만일, 목회자가 수욕을 참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해야 한다. 참 목회자를 모욕한 그는, 목회자를 위해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 훈련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능한 이유를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성도가 위험한 결정을 하려고 한다. 그에게 위험을 알릴 누군가가 필요하다.
2. 계속되는 고난으로 성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며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음성과 주님의 음성도 구분 하지 못하는 이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보다 목회자, 순 모임의 장이나 간사 등 교회 리더들을 통해 지체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경 공부 중일 수도 있고 기도 후 나눔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평소 순종 훈련이 되어있으면 그는 교회 내 리더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불순종의 결과를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목회자 등 리더를 위한 것도 아니다. 순종은, 순종하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다. 만일 자신이 순종에 약한 편이라면, 교회의 리더들과 갈등이 있다면, 리더들이 슬금슬금 본인과의 대화를 피하는 것 같다면 ‘절대적인 순종 과정’을 필수 교양과목으로 듣게 하실 공산이 크다.
불순종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대놓고 안 하기
2. 입맛에 맞는 것만 하기
3. 하겠다고 말하고 세월 보내기
4.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기
5. 몰래 행동하기
5번은, 영적 리더와 성령 안에서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 자들에게 사탄의 통로가 되곤 한다. 리더에게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긴밀하게 나누고 기도하며 응답을 받아가던 성도가 어째서인지 문제를 일으킬 때가 되면 리더 몰래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리더에게 말하면 반대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한번, 두번 몰래 행하다가 갑자기 문제가 터져서 어쩔 수 없이 기도 부탁을 하게 되면 멘토는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실망하고, 멘티 역시 자신을 향한 멘토의 태도에 실망하여 스스로 멀어지게 되는 클리셰, 그렇다면 그런 생각은 누가 넣어 줬을까?
몰래 행동하는 것은 속이는 것 즉, 거짓말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 숨기려는 것은 어둠의 속성이다. 빛의 자녀가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사탄의 세력은 그의 삶에서 활성화를 시작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케이스를 기억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기만했기에 받은 형벌이다.
입맛에 맞는 말만 순종하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본인 마음에 드는 예언만 해주는 선지자를 찾아다녔던 성경 속 인물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덤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몸집을 키울 수 없는 것처럼, 순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 듣고 싶은 말씀만 찾아 듣는 이는 평생 1단계 연단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사탄과 맞서기 위해 세워진 전투 기관이다. 전쟁터에서의 불순종은 곧 처벌을 의미한다. 리더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처벌은 리더가 받는다. 그러나 리더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면 처벌은 모두 병사의 것이 된다.
성도의 순종을 악하게 이용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교회의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책임은 성도가 직접 감당해야 할 것이다.
혹시 목회자 또는 리더가 못 마땅해서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고 인터넷 예배만 드리고 있는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목자 없는 양같이 떠돌고 있는가? 목회자들이 만만하게 느껴지는가? 이를 테면, 목사님께 언성도 높일 수 있고, 맡긴 교회 업무를 거리낌 없이 거절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이 목사님께 있는 것 같다면, 기도로 점검하며 순종할 수 있는 목회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할지 모른다. 평생 그렇게 살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옮긴 교회에서도, 또 다시 옮긴 교회에서도 본인 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면 본인이 목회자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될지 모른다.
모든 직업은 기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이라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스님은 직업일까? 목사님도 직업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직업이다.
혜민 스님이 무소유 대신, 풀(full) 소유를 실천하다 대중들로부터 크게 질타를 받고 있다. 혜민뿐 아니라 대중들이 존경하는 스타 강사 등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전략적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들의 삶에 직접 들어가 보면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경우들이 꽤 있다.
잉꼬부부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아닐 수 있고,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활기차 보이지만 우울증에 시달리고, 부유해 보이지만 그 부유함조차 비즈니스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일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주봉석씨 또한 다른 사람처럼 돈이 벌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불교를 통해 길이 열렸고 이때다 싶어 노를 젓다 보니 혜민 스님이라는 초대박 사업 아이템이 되어 버린 상황, 그러나 이것이 그 한 사람만의 문제인 걸까?
이른바, ‘부자 되는 방법’ 강사 중에는 본인조차 실천해 본 적 없는 내용을 강의하는 이도 있다. 그들이 돈을 번 것은 강의 내용대로 실천해서가 아니라 강의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가 돼 본 적 없는 사람의 ‘부자 되는 방법’ 강의는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당연한 소리, 적당한 희망과 위로, 듣기는 좋으나 딱히 쓸모는 없는 이른바 예능 강의다. 부자인 척, 행복한 척, 꿈을 이룬 척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보여지는 모습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어차피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혜민만큼은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질타를 받는 걸까? 그가 가진 직업의 본질 때문일 것이다. 평생 꽃길만 걸어 본 자가 온갖 호사를 누리며 한 푼이라도 더 쓸어 담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면서, 더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더 내려놓으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으니, 신앙심을 품고 그의 말을 경청해 온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기독교 내에는 없는 걸까? 혜민 같은 케이스가 목회자 중에는 없겠는가.
목회자라는 직업을 만들었더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후안무치의 사기꾼들이 하나님의 자녀보다 열심히 공부하여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이들을 사기꾼이라 칭해도 마땅한 이유는 그들이 받아가는 급여의 근원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전제하에 지불된 성도의 헌금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들 말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성도도 없고 헌금도 없고 그들이 받아가는 월급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목회자라는 직업의 자격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믿는 다면 그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행함은 무엇일까.
돈이 생기는 곳이면 언제나 그러하듯 교회에도 이권이 발생한다.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 버티려는 자들의 팽팽한 다툼이 세습 등 여러 이슈로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사실 이권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유지 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연결 고리는 ‘이권’ 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잘 맞지만 아무런 이권이 없는 관계’
‘마음은 안 맞지만 함께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
후자 쪽이 유지될 확률이 높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성전 임대료 등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목회자 급여까지 이권 없이는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 내 이권의 근원은 무엇일까? 성도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전혀 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신실한 목회자’
‘십일조를 잘하는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삯꾼 목회자’
어느 목회자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회를 영위할 수 있을까.
성경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백성들 때문에 지금의 목회자격인 제사장들이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버려 교회가 붕괴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스라엘의 몰락과 때를 함께 한다. 비단, 성경적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교회를 통해 충분한 케어를 받으면서도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인간적, 도의적, 상식적인 입장에서만 봐도 몰염치하다. 교회 유지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목회자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성도’라 함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 됨을 고백하는 진짜 성도를 말한다.
물론 십일조로 말미암는 의무는 목회자에게도 해당이 된다. 성도들의 십일조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자녀를 키우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면서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땐 ‘기도해 봅시다’ 말만 하면서 도망 다니는 목회자는 업무적 기만행위에 해당한다. 성도들의 사업, 직장, 건강, 가정 문제에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헌신과 충성만을 강요하는 목회자 역시 그러하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장 12~ 15절
믿음이 있는 기도여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믿음이 있는지는 행함으로 증명이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6) 목회자는 자신의 성도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기도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행함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진짜로 상대방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가 기록된 사건이 있다. 피 값을 주고 우리 목숨을 건지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전 재산과 맞먹는 사고 보상금을, 자신의 성도도 아닌, 그저 자신을 전도사님이라고 불러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어준 목회자의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목회자의 기준은 이것이다. 내가 감히 목회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성도의 위기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모든 성도에게 은혜를 선사한다.
‘내가 쓰러졌을 때도 우리 목사님은 나를 위해 저렇게 하시겠구나. 내가 어디 가서 저런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헌신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그런 목회자가 계속해서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성도의 십일조는 목회자의 삶을 지탱하고, 목회자의 기도와 케어는 성도의 삶을 지탱하는 공생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 된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십일조가 차고 넘쳐서 십일조 성도들이 수천, 수만을 넘어서면 목회자들은 성도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성도 한두 명쯤 나자빠져도 목회자에게는 아무런 데미지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성도들의 문제에 교회가 직접나서지 않아도 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고 말았다.
교회에 충성 봉사하다가 삶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사님이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말만 하고 도망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평생을 충성 봉사해 온 교회가, 나의 환난 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기도합시다' 말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 2장 15~16
얼마전, 이 편지의 주인공으로부터 병원비를 제하고 10만원 가량이 남았다는 감사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고 목소리조차 들어 본 적 없는, 3년 전 대화가 끝이었던 분을 위해서 나는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권이 없는 성도를 위해서도 나는 기도와 행함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이끌어 내곤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아니던가.
성도들이 서로를 아끼고 돕는다면 교회는 누구나 소속 되길 원하는 안식처가 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할 때도 쓰러진 성도부터 살핀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온갖 좋은 일은 다 하면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전도조차도 하지 못해 쇄락의 길을 걷는 무능함의 극치를 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울 한 교회의 청년 리더들이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헌신을 강요하냐’고 단체로 내년 직책을 맡지 않겠다고 했으며 교회를 떠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나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복이 있어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아도 버티기만 하면 목회자에게는 사례비라는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금전적인 보상이 없는 성도들에게 유일한 보상은 ‘은혜’ 뿐이다. 당장 기도의 응답이 없어도 성도들은 은혜를 받으면 교회에 충성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을까.
성도들이 일터에서 하기 싫어도 근무하는 것처럼, 목회자 또한 기도와 말씀을 업무의 일부로 생각하고 의무적으로 감당하면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교회 문제의 근원은 기도하지 않는 리더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책임은 언제나 자신의 직책에 걸맞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던 이가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 중 상당수가 WCC라고 했다가 또 누구는 루머라고 한다. 진실과 거짓이 뒤죽박죽 섞여서 온통 아비규환이다. 이걸 누가 분별해 줄까. 본인이 판단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을 장착해야 한다. 사람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끊임없이 영 분별하며 나가야 한다. 결과에 대한 손해는 아무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단체라는 힘의 논리에 밀려 자칫하면 이단이 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글 또한 힘을 지닌 목회자들의 모임에 눈엣가시 같을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이 이 사역에 역기능이 될 수 있음도 안다. 실제로 세력들이 모여서 마음을 먹으면 나처럼 세력 없는 사역자에게 이단 도장 찍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들로 악마의 편집을 하여 근거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제도적 이단’이다. 성경적으로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내 교회 성도들 뺏길까봐 이단 도장을 찍는, 이권 때문에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이다. 하지만 나는 서울의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공격이 있다해도 나의 이권에는 위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성도들의 십일조로 먹고살지 않는다. 평신도 사역자로 자비량하며 내가 쓸 것 내가 벌어서 쓰고 다른 교회를 돕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나는 교회에 ‘이권’이 없다. 그런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권 때문이다. 나의 이권은 하늘나라에 있다.
나는 본래 직업적으로 고객을 기만하는 가짜 전문가들과 업체들로부터 선량한 이들을 지키는 컨설팅을 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대상이 교회로까지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쓰기까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비판을 하는 자는 자신도 비판을 받게 된다’는 성경 말씀은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이것이 교만은 아닐까’ 수 없이 점검하며 ‘교회의 분열과 서로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고심 끝에 난생 처음으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동기들 중 상당수는 목회자가 되었다. 또한 직,간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목회자 분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도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기도를 하나도 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나태한 평신도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군가의 십일조로 생활하는 목회자이다. 그가 내 목회자가 아닌 것을 그저 다행으로 생각하면 될까.
내가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낼 수 있을까. 나는 목회자를 섬기는 것이 복이라 배웠고 그렇게 믿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회자를 내 손으로 훼방하게 될까 진심으로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에 대한 의견을 함부로 내 놓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이권이 사라질 위기가 전혀 없으면 태만과 퇴보가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 있는 안목으로 교회와 목회자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목회자 역시 그런 성도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최선을 다해 직분을 감당하기를 바랄 뿐이다.
암세포 = 타인의 몸에 붙어 연명하면서도 본체의 생명 활동을 방해하는 세포, 본체가 죽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 =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운’ 신학교에 붙어 연명하면서도 교회의 생명 활동을 방해함.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급여는 어디서 줄까? 신학대학이다. 그렇다면 신학대학의 등록금은 누가 낼까?
1)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람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의 종이 되길 원하는 사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고 신학대학에 오겠는가? 신학대학에 지불되는 등록금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들이 지불한 돈이다. 만일, 세상에 모든 성도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믿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독교 신학대학이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서 강의하던 자유주의 신학 교수 또한 일자리를 잃게 된다. 고로 자유주의 신학자는 혼자서는 소득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암세포와 다를 바 없다.
“신은 없다.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교수,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에 반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교수를 강단에 세우는 신학대학 리스트는 공개되어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그리하여 주의 종이 되고자 학자금 대출까지 얻어 입학한 성도들이 ‘하나님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지적 사기는 예방되어야 한다. 천문학을 배우려 돈을 지불한 학생에게 천문학이 얼마나 쓸모 없는 학문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사기가 아닌가? 공룡을 배우러 온 아이들에게 사실 공룡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부모들이 환불 요구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교수에게 급여를 주는 신학교, 그런 신학교 출신 목회자를 선발하는 교회 또한 성도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선지 동산에 사탄의 지분률이 올라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 교수님께-
부디 당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 자유주의 신학대학을 설립하세요.
당신의 강의를 들어 줄 학생 모집도 직접 해보세요.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누군가의 밥벌이를 위해 흘려진 피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미는 어설픈 합리적 의심과 근거자료들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신학대학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모임에 와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숨기고 교묘하게 교수에 임용되어 청중들이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뿌리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까. 적당한 명예와 급여가 탐이 났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학생들이 지불한 수업료로 급여를 받아가는 당신은, 스스로의 신념을 팔아먹은 비겁한 기회주의자입니다.
복음을 가로막고 훼방하는 당신에게는 끊임없는 저주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당신이 부정하게 취득한 급여로 생계를 이어온 당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이 함께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돈과 명예 좀 얻어 보겠다고 그 구차한 발걸음을 이곳에 옮기지 마세요. 가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 본인과 가족들을 부양하세요. 스스로와 가족들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세요.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힌 당신의 삶에 뼛속까지 스며오는 심신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로 삶의 살점이 한 덩이씩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유익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하나하나 합쳐져서 언젠가 당신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부당한 급여로 사 먹은 쌀알은 비수가 되어 당신의 영과 육을 관통할 것입니다.
그 직책을 포기하지 못하겠으면 기도를 해보십시오. 소중한 일터를 마련해 준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진심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살아 계시다면 만나 주십시오.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믿음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믿으려는 시도도 없이 주님의 교회에서 암세포처럼 행동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미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 값을 당신과 당신의 집에서 찾으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한 달에 400~800만원가량의 헌금을 드리기도 했었지만 필자의 부모님은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으신 적이 없었다. 자녀들이 드린 헌금만으로도 책정 된 월100만원의 사례비는 충분히 받으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으실 수 없었다. 사탄이 개입하면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뒤에는 언제나 사탄이 있다.
그렇게 된 이유를 꼽아보자면
첫 번째, 담임목회자도 사례비 한 푼 못 받는 미자립 개척교회에 사례비를 받는 부교역자들이 몇 분이나 되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담임목회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들에게는 사례비가 지급되었다. 부교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느라 담임목회자는 사례비를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난한 개척교회에 이토록 많은 부목사님들이 시무하시게 된 걸까?
“사례비는 제가 드릴 테니 이곳에서 시무하게 해주세요.”
재정 지원을 약속했던 동역자가 그렇게 한분 두분 모셔왔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차마 목사님들을 해고 할 수 없던 부모님은 자녀들 모르게 마이너스 통장까지 써가며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감당해 왔다.
두 번째, 헌금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성전 임대료가 지출되었다. 이것 역시 재정 후원을 약속했던 동역자의 말만 믿고 기다렸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모든 마이너스 재정은 부모님의 몫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 교회 재정을 훨씬 넘어서는 구제를 실천하며 전도했다.
3번을 제외한 두 가지 요소가 사탄의 장치이다. 목사님들이 사탄의 장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사탄이 만들었다는 의미다. 사탄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당사자들의 후회이다.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한 것이라면 후회가 없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마지막 황금기를 다 보내신 부모님은 좀 더 일찍 아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신다.
유튜브에는 자신의 가난한 노후를 탄식하는 목회자들의 영상이 흘러넘친다. 그런 동영상들은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모두 감당한 목회자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며 기뻐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께 3번을 중단하시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단지 교회재정에 맞도록 1번과 2번은 조정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씀드려왔을 뿐이다. 수입에 맞게 지출을 줄이자는 말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부모님은 이런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지금은 이렇게 짧게 결론지어 말하고 있지만 힘들고 답답했던 수없이 많은 상황들이 있었다. 10여 년 전쯤의 일이다. 한도가 꽉 찬 부모님의 마이너스 통장을 정리해 드리려던 나는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이거 다 갚아드려도 또다시 마이너스 만드시겠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아버지는 멋쩍은 듯 웃으시며 말했다. 매월 80만원 가량의 대출이자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땐 대출원금 전액을 상환시킨 후, 이자는 받지 않겠으니 필자에게 원금만 조금씩 갚아 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대출이자는 잘도 내시던 분들이 어째서인지 아들의 돈은 갚지 않으셨다. 아니 못 갚으셨다. 신기하게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영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음을...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과 나의 삶을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가난한 목회자의 삶, 나는 내 역량이 닿는 만큼 성도로서 또한 자녀로서 할 도리를 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부모님은 내 모든 신앙의 원천이 되신 분들이다. 부모님은 내가 살면서 본 참된 목회자 중에 한 분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여러 건의 가정 파탄을 막으셨고 심지어 병원에서 포기했던 죽을 뻔한 사람도 살리셨다. 노숙자와 가난하고 우울했던 사람들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체적인 변화의 결과물들도 만들어 내셨다.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삶은 슬프게도 나에게 목회자의 부정적인 실물 교본이 되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전도하고 구제하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규모에 맞는 지출관리를 하지 않으면 재정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렇게 소득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다 보내고 나면 준비되지 않은 노후를 맞게 된다.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 짐은 온전히 자녀들의 몫이 된다.
기댈 수 있는 자녀가 없다면 가난 또는 극심하게 가난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 순리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본인 잘못이다. 이것은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구제를 열심히 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50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믿을만한 목회자를 만나 후원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요 기쁨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후원하는 신실한 목회자가 부모님이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나는 내가 드린 헌금이 복음사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로 소진되는 것도 보게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부모님은 돈을 벌기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 그래서 목회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모든 아이러니함 뒤에는 사탄이 있다.
둘째, 믿을 만한 사람이 믿을 만한 행동을 하며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의지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 하나님 대신 사람을 기대하면 열매 없이 허송세월하게 된다는 것.
부모님의 삶을 보며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기대해야 한다. 목회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든 성도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목회자는 그래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재정으로 목회자를 지원하는 평신도의 삶이 윈-윈 일 수 있다는 것, 응답을 바란다면 믿음이 있어야하고 믿음에 걸맞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 물질을 구한다고 하면서 물질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돈이 벌리지도 않고 모이지도 않는다는 것.
나는 부모님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역을 할 때는 철저히 주님의 일을, 돈을 벌 때는 돈이 될 일을 했다. 부모님은 목회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돈을 벌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을 일들만 골라서 하셨다. 아버지는 유기농 농작물을 재배해서 판매하셨다. 5만원짜리를 팔기 위해 왕복 1만원 가량의 연료비와 2만원 짜리 밥을 사주고 족히 2시간은 대화를 나누신다.
한 분야에 집중을 해도 벌릴까 말까 한 것이 돈인데 스포츠마사지를 포함해서 아버지는 대략 10가지 정도의 아이템에 도전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거나 돈이 될 일도 돈이 안 되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목회도 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에게 성전청소 등을 맡긴 후에는 수고비를 꼭 지불하셨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자원 봉사해야 하는 항목들에 대해 부모님은 인건비를 지급했다. 하지만 그 돈을 받은 교인 중에서 잘된 사람도 없고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도 없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무슨 돈을 받아요.”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대가를 받지 않고 봉사한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셈법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나 또한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에도 주님의 일을 하고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에 대한 인건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불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더욱 아팠던 이유는 부모님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목회도, 돈 벌이도 두 분은 최선을 다하셨다. 지금도 저녁마다 동네 휘트니스 센터에 가시는 두 분은 평생토록 성인병이나 약과는 무관한 삶을 사실 정도로 건강을 지키며 최선을 다해 본인들의 삶을 살아 내셨다.
부모님의 진심어린 헌신과 섬김을 나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나는 두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원망했다. 목회에만 전념하실 수 있기를... 저축까지는 아니어도 좋으니 더 이상의 마이너스재정은 만드시지 않기를...
어린 시절, 가난의 끝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다시는 그 가난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목회를 해야 한다.”
‘나도 당신들처럼 가난한 목회자로 살라는 건가?’
부모님은 당신들이 준비하지 못한 노후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들에게 어째서 본인들처럼 가난한 목회자가 되지 않느냐는 말로 마음의 짐을 더하신다. 이따금 삶에 위기가 찾아 올 때면 그 말이 나의 짐을 더욱 무겁게 느껴지도록 만들곤 한다.
부모님이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 또한 부모님의 삶에 대해 내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부모님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로 사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시절, 누구보다 비즈니스적인 능력이 있던 분들이셨고,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께 많은 헌금도 드렸던 분들이다. 또한 평신도 시절의 어머니는 전도왕을 놓치지 않던 분이다.
그랬던 분들이 지난 20년의 목회기간 내내 목회도 돈 벌이도 어느 것 하나 두각을 나타내시지 못했다. 목회를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기웃거리실 바엔 차라리 나처럼 돈을 벌면서 목회를 기웃거리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이면서도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끊을 수 없다면 본인의 목회자적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부모님의 삶에 아쉬웠던 점이 있다. 가족들과 그리고 가족 같은 성도들의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목회를 여기저기 사탄에게 속아서 끌려 다니며 어느 한쪽에도 몰입하지 못한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성도 한명 없는 지하성전에 앉아 몇 년 동안 나 홀로 목회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목회자들 중에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사람은 과연 한사람도 없겠는가.
내 평생 가장 즐거웠던 직업 두 번째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다. 그리고 첫 번째는, 생각만 해도 목이 멜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는 그것은 목회자이다. 사실은 나도 목회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신학대학도 졸업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목회를 보면서 목회자의 꿈을 접었다.
나는 부모님의 아픈 목회를 은혜롭게 구조조정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긴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드려왔다. 내가 적지 않은 헌금을 드렸던 지난 10여 년의 세월 동안 응답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심지어 응답이 불가능해보였던 이 기도는 ‘그 힘 사용설명서’를 출간하고 하나님께 사역으로 드리기로 작정했던 기간 중에 ‘기도 부흥’ 사역에 함께 해 주신 동역자들을 통해서 응답되었다.
사탄의 장치를 제거하자마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일단 부모님의 삶의 질이 달라졌다. 이젠 행복하게 목회에만 전념하실 수 있기를... 지키지도 않을 재정후원약속이나 헌금서원으로 목회자를 조련하려는 사탄의 그림자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기를...
하나님이 계시듯 사탄도 존재한다. 사탄은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합리적인 이유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 그러니 속지 마시기를...
귀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시멘트처럼 바래버린 거친 피부가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눈꺼풀조차 들어 올릴 힘이 없는 그대는 당신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가족들을 힘겹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귀하는 삶에 큰 미련이 없는 듯 보였지만 가족들의 울음 앞에서 다시 한번 힘을 내 보기로 다짐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나 늦어 버린 세월...
병마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비로소 그대는 지나간 삶에 대한 후회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세월을 돌이킬 수 있다면.... 한 번만 세월을 돌이킬 수 있다면... 운동하고 스트레스 관리를 하며 식이 요법을 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후회로 얼룩진 당신의 기도... 그러나 도저히 이루어질 수는 없는 기도... 그 기도마저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도록 당신의 과거로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형태로 그대와 지금 함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의 우주에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실 것입니다.
건강한 자여 있으라!
활기찬 자여 있으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여 있으라!
이제 당신의 미래를 예언하겠습니다.
그대가 매일 운동을 한다면 어둡고 우울했던 마음은 밝아지고 체력 향상과 함께 삶을 제압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비타민, 미네랄을 꾸준히 복용한다면 면역력 향상과 함께 감기 등 잔병치레와 피로감이 제압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스턴트, 탄수화물, 배달 외식 류의 식단을 지양하고 차라리 반찬 가게에서 주문한 한식 찬과 채소류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변화되며 비로소 당신의 토양이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암은 아니, 모든 병증은 토양에 맞춰 열리는 열매에 불과합니다. 닦아도 자꾸만 피어나는, 통풍이 되지 않는 습한 지하 방 벽지에 핀 곰팡이처럼... 육신의 토양이 바뀌지 않는 한 종양은 제거해도 자꾸만 재발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이 모든 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동적 의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처음엔 영혼의 건강이 찾아오고, 건강해진 영혼은 뒤틀어져있는 삶의 모든 영역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해로운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던 것들을 끊어 낼 수 있게 되고 좋은 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간 의지박약으로 나 자신조차 어찌할 바를 몰라 끌려다녔던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게 되고, 나아가 주변 사람들의 삶을 견인하는 말씀의 통로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아직 빛이 있다면 제 이야기가 들릴 것입니다. 제 말에 수긍이 가고 실천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른다면 아직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지마저 완전히 사라져 무기력한 삶에 복속되기 전에 행함으로서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십시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자녀가 되리라고 (요한복음 12장 36절)
이 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 공간에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창세기 1장 3절)
[부제 :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방법]
떠난 성도 때문에 ‘목회를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 상심이 크시다기에, 마지막으로 그 성도님께 부탁드려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성도님, 당신을 위해 정말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하지 않습니까?”
목사님께는 이미 긴 세월 동안 무수한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후회’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로서 사탄이 할퀴고 간 흉터입니다. 좋은 멘토, 좋은 멘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자들은 마음속에 후회를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귀한 성도가 혼자서 문제와 싸우며 아파하는 동안 목사님께서는 아마도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때로는 원어의 의미까지 찾아가며 설교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힘쓰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 설교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위대한 설교가는 이미 인터넷에 넘쳐나고,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도 십중팔구의 성도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설교를 듣고 흘려버리며 지적 만족감에 머물러 살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설교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고,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변화 없는 삶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성도들의 삶에 무관심한 목회자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아파하는 성도를 보면서도 ‘기도합시다’라는 형식적인 말로 상황을 회피하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교회가 우리 앞에 도래했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그 성도님은 나의 부모님보다 지혜로운 분 같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다니며 누구보다 많은 헌금과 전도왕을 놓치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업부도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여져 살아야 할 때 교회는 쌀 한포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성도가 몇 개월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지요? 과연 그 성도님이 나의 부모님처럼 부도가 나서 떠났어도 목사님은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셨을까요? 어려움에 처한 그 성도를 도와주셨을까요? 교회와 목회자로부터 버림받기 전에 떠난 그 성도님은 아무래도 나의 부모님보다 지혜로워 보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실상은 본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 여기저기 외부 강의를 다니는 동안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목회자의 공백’입니다.
외부 강의? 좋은 것이지요.
설교 준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목회자의 업무에는 설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본 업무는 양을 돌보는 목양입니다. 설교만 하면서 살고 싶다면 교수님이 되시거나 순회 설교자가 되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문제 앞에 방치된 성도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혼자 아파하며 여기저기 떠돌며 영적인 돌봄을 구하러 다닙니다. 대체 주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전도와 양육 아닙니까? 이 두 가지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목회자도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전도는커녕 양육조차 제대로 못하는 무수한 목회자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대체 양육이 무엇입니까? 대화 시간 조금 가져 주면 양육입니까?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장 19~20절)
양육을 했다면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수년 동안 아무런 치유와 변화, 기도 응답 등 그 어떤 영적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업무 태만일지 모릅니다. 모든 성도에게 능력이 나타날 순 없다 해도, 변화를 경험한 성도보다 경험하지 못한 성도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목회자는 스스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만 받고 물품을 주지 않는 가게 점원, 수리비만 받고 차를 고쳐주지 않는 정비사, 수강료만 받고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교사, 헌신만 받고 성도를 돌보지 않는 목회자...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목회자에게 알곡 같은 성도를 허락하실까요?
성도는 목회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자기 삶에만 집중하며 살라고... 목회자 자녀 유학 자금이나 보태 주라고 존재하는 현금인출기가 아닙니다. 성도 또한 각자의 삶이 있고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는 목회자와 동일한 인격체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태복음 18장 10~13)
목회자가 양을 방치하면 주님께서 직접 그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양을 돌봐줄 새로운 목동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매일 설교하지만, 실상 능력은 로또 당첨만큼이나 드물 게 나타나고 있는 하향평준화 된 교회의 현실 앞에서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게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가? 주님의 일이라 말하며 나를 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목회자가 주께 아뢰되, “주여, 이러실 거면 왜 저를 목회자로 부르셨나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
나는 한창 돈을 벌며 자리 잡아야 할 그대가 ‘신학대’를 갖다가 평생 후회하며 살지 않도록 주님께서 그대에게 보내신 가이드입니다. 그대가 진짜 사명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나의 말에 영향 받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만일, 내 말을 듣고 마음에 갈등이 시작된다면 그대는 자신이 받았다고 말하는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를 갔다가 인생 설계를 망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를 들을 때 분석하게 된다. 예전처럼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2. 전도사라는 칭호를 얻는다. 교회에서 포지션이 애매해진다. 떠돌이 교인 생활이 시작된다.
3. 시무할 교회를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작은 교회의 사례비는 사실상 생활이 불가할 정도고 대형 교회는 경쟁률이 매우 높아서 사실상 유명 신학교 졸업자에게만 시무할 기회가 주어 진다.
4. 결국 개척한다. 성도가 오지 않아서 교회 운영이 어려워진다.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진다.
5. ‘주의 종이니 주의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디 가서 취직도 못하고 무직 상태로 세월을 보내며 아내가 벌어 오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간다.
아무리 봐도 사명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합리적 의심사례 체크 리스트
1. 전도를 못한다. 몇 명이나 교회로 인도해 보았는가?
2. 양육도 못한다. 혹시 상대방에게 감동 몇 번 준 것 가지고 목회자를 생각했다면...
lazy christian도 감동은 잘 받는다. 그러나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실천을 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거둘 수 없다. 동기부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도록 양육한 경험이 있는가?
전도와 양육을 하지 못한다면 귀하가 설립한 교회는 운영적자로 문을 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3. 기도도 안 한다. 솔직히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
4. 날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 통독을 몇 번이나 했는가? 성경말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칼을 못 다루는 조리사, 공구에 서툰 정비사 등 자신이 하는 일에 필요한 도구조차 다루지 못하는 비전문가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5. 직장 생활을 꾸준히 해본 적 없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니까, 주의 일을 하면 주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도피성 목회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말로 자신의 실패한 과거를 미화한다. 마치 ‘세상에서 있었으면 잘 나갔을 텐데 주님께서 부르셔서 어쩔 수 없이 목회자가 된 것’같은 뉘앙스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목회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목회자 중 상당수가 인생을 나태하게 살아온 경험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안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한 직장을 진득하게 다녀본 경험이 없다. 장사도 못하고 사업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던 사람이 목회를 하니 목회도 못하는 것이다.
6.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신학대학에 갈까 말까?’ 자문을 구하고 다닌다.
그런 질문은 주님께 기도로 여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사명자의 길을 가서야 되겠는가?
7. ‘신학교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8. 혹시 평소에 목회자와 설교를 비판한 적이 있는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상대방 동의 없이 훈계하듯 가르치려 들고 상처를 입히며 다닌 적이 있는가?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부족해 보이진 않는가?
외람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을 괴롭히는 문제아 성도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온 성도를 괴롭혀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싶을 정도까지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를 위한 격리 수용 공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곳의 목회자는 누구여야 하겠는가?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우리 아들, 목사님 해볼까?’
따라나서면, 두들겨 맞으면서도 은혜에 겨워 철이 들어가는 연단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 그런데 성도는요?”
성도 모으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힘들게 모은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교인이 얼마나 눈엣 가시처럼 꼴 보기 싫은지... 그리고 목회자로서 교인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자괴감에 회개하는 삶의 반복 속에서 자신의 철없던 옛날 모습을 깨달아 가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화 훈련 과정이다.
성도들이 서로 다툴 때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는 목사 입장이 얼마나 죽을 맛인지, 그런데도 ‘목사님이 내편 들어주지 않는다’고 양쪽 다 서운한 뉘앙스를 풍길 때 얼마나 억울하고 미칠 노릇인지... 그렇게 목사님의 심정을 넘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까지 느끼게 될 것이다.
교회에는 방주, 도피성의 기능이 있다.
환난으로부터 자신의 지체를 돌보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주요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귀하께서 속한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어떻게 대하나요?
1.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서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힘을 씁니까?
2. 형식적으로 금일봉 한두 번 주고 관심을 끊습니까?
3. 아예 상관조차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되었든 귀하께서도 공동체로서 그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하께서도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면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을 그 교회에 남겨 두고, 그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려움에 빠진 성도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자리 잡힌 오늘날 교회의 모습,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성도를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는 많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설교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교회의 규모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참 목회자들이 존재합니다.
당뇨병으로 다리 절단 위기에 놓인 연로한 권사님의 다리를 아침, 저녁으로 안수하고 마사지 하며 위기에 함께하는 바스토의 한 목사님 부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실질적이고 위대한 설교가 있을까요?
오랜 시간 훌륭한 설교자들의 책과 강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설교보다 강력한 목회자의 능력은 사랑이라는 것, 그것은 오로지 행함을 통해서만 증명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어려움에 빠진 성도를 돌보지 않는 목회자는 삯꾼일 뿐이다.(요10:12) 그런 자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목사님, 지체라고 하지 않았나요? 형제자매라고 하지 않았나요? 팔에 염증이 생기면 잘라내시나요? 모른 척 그냥 방치하다가 적당히 썩어서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시나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교회에서 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필자는 개인과 기업체의 사업 자문을 하며, 세상 모든 직업에 ‘비 전문가’들이 넘쳐 남을 알게 되었고 분야별 가짜 전문가들에 대한 칼럼을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음식 맛없는 요리사, 수리 못하는 수리공, 과잉 진료하는 의사, 망하게 하는 창업 전문가, 투자금 날리는 투자 전문가, 자기자산도 관리 못하는 자산 관리사 등 모두가 전문가인척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그들 중에 진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은 희소했다. 이미 우리는 진짜보다 가짜가 많아서 ‘구매 후기’ 없이는 아무것도 함부로 구입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떠한가? 주님께서 세우셨으리라 믿고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해왔을 뿐 컨설턴트의 눈으로 바라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설교]
성공학 강사 흉내 내는 목회자들이 있다. 사업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목회자가 사업 성공에 대해 논하는가? 성공해 보았는가? 사업으로 벌어들인 총자산은 얼마나 되는가? 누군가의 사업을 성공시켜 본 경험이라도 있는가?
목회자의 최대 경쟁력은 복음을 들고 서 있을 때 발휘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을 때 가장 강력하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1)
이른 나이에 목회자가 된 사람 중에, 한 직장을 10년 이상 근속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 평신도 가장의 깊은 시름과 고뇌를 어찌 알고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복음 없는 목회자의 조언은 현실 모르는 비전문가의 허세 섞인 이론일 뿐이다.
[기도]
기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믿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수백명인 교회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간증이 전혀 들려 오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목회자가 기도하고 있다면 성령 역사를 동반한 기도 응답이 있기 마련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도의 불을 붙이려는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말 기도하는 목회자라면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는 상식적인 부분이다. 일례로,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목회자는 방언할 줄 모른다. 그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모든 방언하는 성도들을 ‘귀신 방언’으로 치부한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사도들이 받았던 것도 귀신방언 인가?
“그때 사도들이 하는 방언과 지금의 방언은 다릅니다.”
“그런 말이 성경 말씀 몇 장 몇 절에 나와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13장 8절에 보면 ‘방언도 그치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2022년 현재, 방언이 그쳤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주님께서 오시리라’고 하셨으니 지금 주님께서 오신 겁니까? 계룡산? 지리산?”
방언을 부정하는 목회자는 방언할 줄 모르고,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하는 목회자는 기도로 자신의 삶을 돌파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런 목회자와 함께하는 성도에게 기도 응답이 있겠는가?
[전도]
성도의 제1 사명은 전도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전도하는 평신도를 몇 명이나 보았는가? 책이나 영상 속 인물 말고 주변 지인 중에서 10명 이상 전도한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불신자 1명조차도 전도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다면 목회자 중에는 어떤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모두가 교실에 앉아서 ‘낚시 방법’ 토론만 하고 정작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모두가 ‘성질 죽이기’ 같은 자기와의 싸움에 빠져서 세상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제 1사명이라 할 수 있는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 평신도나 목회자나 일반이라면 다음으로 해야 할 제 2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는 평신도가 전도할 수 있도록 치유하고 성장시켜서 세상에 파송하는 것이다. 이를 양육이라 한다.
평신도는 목회자의 양육 프로그램에 순종하며 성장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성장하지도 않고 전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계속 불순종만 하는 사람은 lazy christian일 수 있다.
1번, 2번 다시 1번, 2번 그렇게 전도와 양육을 반복하다 보면 교회와 함께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성장하게 된다.
[양육]
목회자가 양육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열매로 증명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말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해야 한다. (고전 4:19)
[남자라면 건욱처럼] 바로가기
성도가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알곡이라면 30배 60배 100 이상의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양육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귀하는 알곡입니까?”
* 다른 성도들이 목회자를 통해서 힘을 얻고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데 나만 은혜를 못 받고 있다? → 본인의 영적 태만
* 나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기도 응답도 없고 삶의 돌파는커녕 대체로 눌린 삶을 살고 있다? → 목회자의 업무 태만
양의 상태를 살피고 돌보는 것이 목회다. 고로 직업적으로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는 자신의 양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다. 설교에만 심취할 거라면 그는 교수나 외부 강사가 적합하다. 어려움에 빠진 성도를 돕지 않는 목회자라면 천사의 말로 설교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훌륭한 설교는 이미 유튜브에 넘쳐나지 않는가?
‘섬김’을 받아 보지 못한 성도는 ‘섬김’의 능력을 모른다. 섬김은, 한 영혼이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집중해 주는 것’이다. ‘섬김’에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난다.
[호주에서 찾은 보석 오희초 성도] 바로가기
위 성도 한 분이 매월 드리는 헌금은 목회자 한 명분의 사례비에 달한다. 성도 한 분만으로 전임 사역자가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하나님의 백조, 홍채아 성도] 바로가기
올해로 예수님을 만난지 7년째인 위 성도 또한 혼자서 목회자 한 명의 사례비에 달하는 헌금을 드리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소수에 의해 세워져 왔다. 위의 두 성도는 아래 칼럼에서, 넉넉지 않은 재정으로 핫도그 하나를 나눠 먹었던 그 지체들이다.
[고아들의 아버지께서 일하시려나 봅니다] 바로가기
[남자라면 건욱처럼] 바로가기
위 성도 한 가정이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다. 자신의 집 중 한 채를 교회 겸 사택으로 제공했으며 10명이 넘는 교인들을 전도했다. 두 부부의 헌신으로 한 목회자 부부가 충분한 사례비를 받으며 34평 좋은 아파트에서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방치되고 있는 성도 중에 장차 하늘나라의 거목이 될 새싹이 있을지 누가 알랴. 나중에 온 막내 성도가 훨씬 더 강력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Q : 목사님은 특별히 신령하다?
A :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9)으로서 주님 아래서 평등한 지위를 같습니다. 목사님뿐 아니라 누구든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 성령님께 특별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목사님은 평신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성도다. 평신도는 목사님께 육의 양식을 먹이는 성도다. 둘 다 성도다. 지체다. 형제자매고 서로 돕는 공생관계다.
“먼저 십일조로 성도의 의무를 다하시오. 십일조는 양심적이며 상식적인 것이오. 십일조 없이 교회와 목회자의 삶이 유지될 수 있겠소? 성도로서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 목사님이 성도를 위한 의무를 다하는지 살피시오.”
평신도들이 목회자를 존중해 드리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들을 돌봐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자기 실력이 아니라 부모 잘 만나서 교회를 세습한 목회자는 더욱 겸손히 복음에 힘쓰며 자신을 낮춰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출중한 경쟁자들이 있음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쭐해지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자신을 치며 평생 빚진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아직 교회 재정이 자리 잡지 못한 개척교회 목회자라면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 앞에 끊임없이 구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힘써도 ‘쭉정이는 열매를 내지 않음’을 주님께서 다양한 예화로 경고하셨다.
필자의 부모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견 없이 존경받는 목회자의 삶을 사셨지만 쭉정이와 염소들에게 둘러싸여 온전한 목회 결실을 맺지 못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 짓는 기준은 ‘실천 여부’이다. 실천하는 알곡에게 말씀과 기도로 집중해 보라. 다른 양들 또한 그의 성장을 보며 힘을 얻을 것이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만 집중하셨다. 따르지 않는 자들은 설득하지 않고 과감히 두고 갈 길을 가셨다.
“진심으로 자신을 지체로 생각하는 목회자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그런 교회가 맞습니까?”
- 나에게 힘이 되어 줘서 나 또한 힘이 되어 주고 싶은 교회
- 내가 힘이 되어 주었더니 나에게도 힘이 되어 주는 교회
- 성도를 버리지 않는 교회
- 쓰러진 성도와 끝까지 함께하는 교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누가복음 11장 9~ 10)
난봉꾼이, 난봉꾼인 채로 어질고 참한 여자를 아내로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참한 여자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그리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여자는 로봇이나 물건이 아니다. 그녀 또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같은 이유로, 맛없는 음식을 파는 사람이 손님이 많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음식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성실, 지혜, 열정을 주시고 필요에 따라 노하우를 알려 줄 사람을 보내 주신다.
맛없는 음식을 파는 자의 ‘손님을 많이 보내달라’는 기도에 즉시 손님을 보내서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강제로 손님들이 맛없는 음식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빼앗아 의식 없는 좀비처럼 만들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의 의지로 맛없는 음식을 구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좋은 멘토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이 좋은 멘티가 되면 됩니다.”
대웅이 직장에서 시작된 영적 전투에서 지고 있다. 같은 교회 성도인 성민은 동일한 전투에서 이미 승리해 본 경험이 있다. 고로, 대웅은 성민의 말에 순종하면 무조건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싸움은 대웅이 이겼지만 성민이 대신 싸워 준 것이다. 그러나 성민에게 대웅을 돕고 싶도록 마음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하지만 전쟁터에 서 있는 것은 대웅이지 않은가?
[주님과 동행, 동역, 합심과 중보기도, 콜라보레이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5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님과 성도의 관계는 지체이다. 그러므로 머리 되신 주님께 순종하는 성민은 주님의 의지를 대신한다. 대웅은 성민이 주님께서 보내신 지원군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제안을 믿고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보내신 멘토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다. 멘토의 제안이 성경적이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하면 된다.
불성실과 나태에 찌든 삶을 벗어나려 도움을 청해오는 이가 있다. 기도를 통해 그의 삶에 들어간 나는, 예전에 내가 그 필드에서 탈출할 때 썼던 방식을 제안한다. 미친 사람처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성경 또한 그만큼 봐야 한다.
게임이나 TV에 빠진 폐인처럼 계속 성경을 보다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정도가 되면, 기도로 포지션을 바꾸고 시시각각 분분초초 떠오르는 그 더럽고 부정적인 생각을 미친 사람처럼 흔들어 떨쳐내야 한다.
정상적인 노력으로는 특별한 결괏값을 기대할 수 없다. 그 필드를 탈출할 수 없다. 머릿속에는 주여 주여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같은 단순한 선포가 수십 수백 번 이어져야 하며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은혜의 버스를 놓치게 되면 다음 버스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붙잡고 절대로 내리지 않아야 한다. 드라마 한편만 보고 다시 타야지 휴게소에서 잠시 내리는 순간, 좋은 멘토와 동료들이 타고 있던 버스는 떠나고 없다.
혼자서 잘해보든지, 아니면 ‘아프다고 말하면 위로와 공감은 해주지만 비전에는 동참하지 않는’, 상처와 힐링만을 반복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아팠군요. 나도 아팠어요.’ 서로 상처 붙들고 위로하고 위로받다가, 자기들끼리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또 다시 다투는 무한루프에 갇혀 살든지...
하나님의 사람이 ‘모사’가 되어 자신의 전투를 대신 치러주길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맞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맞다면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멘토에게, 실천하지 않는 멘티를 계속 붙여 두실 리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 중 하나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이것은 대중들 앞에서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이 동요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이 욕구는 ‘거룩함’을 입게 된다. 이를테면, 대중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대체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용하셨다. 내 삶에 역사하셨다."
인간의 본능을 주님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신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에 의해 변질되기도 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본인 자랑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해 보이려고 위선 떠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모여 있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가창력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뽐내려는 찬양 인도자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기교를 뽐내기 위해 설교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업적을 대중 앞에 말하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사탄의 표적이 되기가 쉽다. 이들은 자신이 ‘주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주님 보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사역자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실까?
이런 교인과 함께 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도 위험하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상대방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보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사탄은 이런 관계를 통해 목회자가 주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도록 만든다. 이런 자의 재물을 받아 쓰려면 철저히 인본주의에 굴복하여 아첨도 해야 하며 때로는 거짓을 눈감아야 하는 순간도 생기기 마련이다. 선교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 하나를 소개하겠다.
1. 교회를 지으려는 성도들의 헌금을 받는다.
2. 오지에 허름한 가건물을 얻어 십자가 하나 달아 사진 찍어 보낸다.
3. 선물을 미끼로 지역민까지 모아서 촬영하면 사진은 더욱 그럴싸해진다.
4. 성도는 사진을 받아들고 뿌듯해하며 정기 후원한다.
5. 사진을 찍어 보내기 위한 세트장이었으니 시간이 지나서 가보면 교회는 사라지고 없다.
오백만원짜리 오두막 교회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과연 그 사진을 받아 든 성도가 한 사람뿐일까?
교회를 짓고 싶다던 A를 한 선교사님께 소개한 적이 있다. A는 1천만원으로 본인 혼자 교회를 짓고 싶다고 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1천만원으로 교회를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도 되어야 하니까요. 마침 교회를 짓고 싶어하는 다른 성도님이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아니요. 저는 저 혼자서 짓고 싶습니다. 태국의 어떤 선교사님은 가능하다고 하던데요?”
“혹시 태국 선교사님은 어떻게 알게 되신 분이신가요?”
“비행기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분인데 너무 신실하신 분이더라구요.”
필자가 소개한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그 헌금을 본인 계좌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일단 ‘가능하다’고 헌금을 받아서 ‘당신 혼자 지은 교회’라고 거짓말하면 될테니 말이다.
결국, A의 헌금은 태국의 선교사님에게 갔다. A의 말에 따르면 태국 선교사님께 몇 차례 더 후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연락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태국 가족 여행길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한 뒤부터라고 했다.
신앙심이 깊어 질수록 난이도 높은 영적 전투를 치르게 된다. 신앙심이 얕을 땐 자신의 원초적인 죄 문제와 싸우게 되지만, 어느 정도 성화가 진행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열매 생성’에 방해를 받는다. 신앙 초급과정이 자신과의 싸움이라면, 자신과의 싸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들은 세상을 향한 영향력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파생될 수 있는 악한 가능성 중 하나가 ‘자랑하기’다. 이는 교만과 뿌리를 같이 한다. 자랑하기에도 등급이 있다. 높은 등급에 올라갈수록 모든 영광을 홀로 독식하려 든다. 사탄적 특성이다. 그저 ‘선교 헌금 얼마 했다’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게 된 A는 ‘나 혼자 이 교회를 지었다’고 멋들어지게 자랑하고 싶었고, 그 욕심은 사탄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할 재정이 사탄에게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알곡으로 위장한 쭉정이보다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주님의 일로 위장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우려는 자들이다.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줄 알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처럼 적잖은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줄 알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
이들이 두려운 이유는 외관상으론 누구보다 신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목회를 돕겠다고 헌금을 들고 나설 정도인데 어찌 신실해 보이지 않겠는가. 잘만하면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기대감을 갖도록 조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관심과 기대감을 즐긴다.
그러나 목회자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은 중단되고 오직 일용할 양식 정도만 베푸시는 일반 은혜만 공급받게 된다. 간신히 목회하며 밥이나 굶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연고이다.
여기 20년간 한 목회자를 이용해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하다가 실패로 끝난 기독교인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던 두 명의 신앙 리더가 사탄의 설계에 따라 20년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지켜본 기록이다.
맞춤형 사탄 제거 수술 후기
처음부터 정옥이 사탄의 도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녀가 그렇게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신도 시절 경애는, 대형교회에서도 전도상을 놓치지 않던 성도였다. 경애의 사업장 또한 동종업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거두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개척교회들을 후원했으며 어려운 목회자와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은혜를 갚고 싶다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사모님 아니었으면 전 지금처럼 살수 없었을 겁니다. 꼭 뵙고 싶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런 경애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성공적인 목회자로서 살아가게 될 거라 믿었다. 그녀의 목회가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업부도 후, 경애가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거기서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 사모님?”
그녀가 전도했던 타자기 영업사원 미스터 김이 총 학생 회장이 되어있었다. 그는 경애부부가 자신을 전도하기 위해 어떤 헌신을 했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는지 온 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간증했다. 그 중에서도 주지스님과 지역을 주름잡던 범죄조직 행동대장을 전도한 이야기는 학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 정도였다. 경애는 순식간에 교내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이야기는 같은 학교 신입생인 정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마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처럼 경애를 사모하게 되었다.
결혼 전까지 지독하게 가난했던 정옥은 부동산으로 고액 자산가가 되었다. 그녀는 경애의 등록금까지 내주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경애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누가 봐도 정옥은 하나님께서 경애를 위해 보내신 축복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정옥은 평소에도 선교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썼다. 보통사람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헌신이었다.
졸업 후, 산동네 집에서 교회를 개척한 경애에게 정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라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렇게 경애는 강남의 지하교회에서 든든한 협력목사 정옥과 함께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경애는 정옥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의 천사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둘의 만남 뒤에 가려진 사탄의 음모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여 년 후, 경애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남편과 자녀들 모르게 진 목회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옥 또한 정신건강에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여기 왜왔어?”
정옥에게서 간헐적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걸음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증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 증상이 있기 전부터 그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과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우울감과 공황증상으로 괴로워했다. 정옥의 공황증상은 교도소 선교에서 알게 된 봉구가 출소 후 정옥을 찾아오면서부터 가속화 되었다.
정옥의 후원으로 신학교를 졸업한 봉구는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사가 된 그는 담임목사인 경애의 설교를 비난하고 성도들을 함부로 정죄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교인들의 말에 따르면, 봉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행동과 정옥 앞에서 보이는 행동은 사뭇 다른 듯했다. 그런 봉구를 지도해 달라고 정옥에게 부탁했지만 정옥은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참 이기적이시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봉구전도사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어요.”
봉구는 정옥과 경애 사이를 오고가며 이간질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옥에게 봉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출소 당시, 누구보다 건강했던 봉구는 얼마 후부터 몸이 아프다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정옥이 이따금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봉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옥에게 전화를 걸어 우울한 하소연을 쏟아낸다.
어느 날, 평소처럼 봉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정옥은 평소와는 다르게 몸서리를 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경애에게 말했다.
“하아! 아우 숨 막혀! 하아. 내가 왜 이러지. 목사님! 저 봉구전화 못 받겠어요.”
정옥의 머리는 봉구를 구원의 열매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봉구로부터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봉구는 계속 되는 음주로 알콜 중독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고 당뇨 합병증을 고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옥과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던 미순이 말했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을 왜 자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니시냐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고 했더니 저에게 주던 용돈도 싹 끊고 저랑은 말도 잘 안하시더라고요. 정옥목사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교회나 사람 중에 열매 맺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미순의 말은 정옥의 삶을 정리해서 말해주는 듯 보였다.
“아니, 구제를 하시려면 교회를 통해서 하셔야지. 본인이 용돈 주듯이 여기저기 나눠줘서 이제 이 교회는 돈 없으면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교회가 되었네요.”
여행을 떠나기 전, 정옥은 파지를 주워 생활하는 김노인에게 30만원의 구제비를 드렸다. 그러자 한 주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오던 김노인이 다음주부터 1개월가량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돈은 다양한 부작용들을 양산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의 조언도 수용하지 않았다.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은 잘 알지만 질서 있게 교회를 통해 구제하시면 좋겠어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저 진짜 너무 서운해요.”
“그런 사람이 무슨 목사에요. 아줌마지.”
“아우 됐어요. 돈 안 벌어도 되니까 그 분 저희 한의원에 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아주머니는 갈비탕 2인분 사 가시면서 본인이 무슨 대단한 VIP인 줄 아시나 보죠?”
“어떻게 목사란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궁지에 몰린 사람 등쳐먹을 궁리나 하고”
N교회 M집사는 눈동자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정옥을 원망했다. 돈이 급해서 급매로 내놓은 자신의 집을 정옥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깎아서 사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상황을 이용하려 할 수 있냐는 하소연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돕고, 많은 헌금을 드린 정옥이 어째서 마음과 정신의 병을 얻은 채 사람들의 냉소까지 받게 된 것일까. 평생을 주님 앞에 헌신 봉사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탄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다양한 루트로 삼킬 자를 보낸다. 삼켜지면 열매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삼킬 자가 들어오는 통로는 바로 각자가 지은 죄이다.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통해 우리의 삶에 침투한다. 즉, 죄는 곧 사탄의 통로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토록 비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마태복음 6장 3~4절)
지나치게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정옥,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20여년간 행한 정옥의 행동들이 한 조각씩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두 딸조차 엄마가 ‘자기의’를 드러내는 모습을 못 마땅해 하고 있었다.
“엄마가 돈 자랑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엄마한테 자꾸 기대하게 만들잖아요.”
정옥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를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심지어 불우이웃에게 5 만원을 준 것까지 모든 성도들이 알도록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저에게 현금 3억이 있으니 이전할 교회를 알아보세요.”
정옥은 거액의 건축헌금을 약속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인천에서 변변한 예배당조차 갖추지 못했던 개척교회 시절, 목사님과 성도들은 기쁨으로 교회 부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정옥은 교인들이 알아본 모든 교회부지에 퇴짜를 놨고 한 푼의 건축헌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목사님이 건축헌금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제가 건축헌금을 한다고 했다고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그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몇 번의 헌금을 작정하고 번복했다.
“성도들이 꽉 차면 큰 교회로 이전하겠습니다.”
“제가 의자를 더 놓겠다고 했지 언제 교회를 이전하겠다고 했어요!”
“이 땅이 팔리면 주의 종을 위해 쓰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땅값이 헌금을 작정할 때보다 7배가 넘는 금액에 팔렸음에도 서원을 지키지 않았다. 그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약속 → 칭찬 받음 →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함
그녀의 선포와 번복에는 일종의 루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강원도 가족 여행 중에 갑작스레 정옥의 기억이 지워진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여기 왜 왔어?”
하나님과의 약속을 밥 먹듯 잊어버리는 그녀에게서 간헐적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경애의 아들 K가 정옥의 두 딸에게 엄마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지 1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다.
“요즘 정옥 목사님이 영적으로 많이 힘드신 거 같아. 치매까지 올 수 있으니까 엄마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정옥의 둘째 딸은 K를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영적인 체험을 한 바 있었다.
“오빠는 정말 기도하는 사람인 걸 매번 느껴요.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응답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과거 정옥은 경애에게 자신의 후배 전도사를 부탁하기도 했다.
“사례비는 제가 드릴테니 교회에서 시무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정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차마 전도사님을 해고할 수 없었던 경애는 가족들 모르게 카드 대출까지 써가며 수년간 후배 전도사의 급여를 지불했다. 본인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사례비였다. 그렇게 4년간 지불 된 4천만원에 달하는 사례비는 오롯이 경애의 개인적인 채무로 남았다.
정옥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거액의 헌금을 경애와 성도들 앞에서 약속했다.
“3천만원 헌금을 하려고 하니 기도해 주세요.”
그러나 정옥은 그렇게 기도를 시킨 후 다른 교회에 헌금을 드렸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급여 한 푼 받지 못하고 때로는 임대료가 밀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정옥은 다른 교회에 거액의 연보를 했고, 그렇게 헌금한 사실을 물어본 적도 없는 경애와 성도에게 자랑하듯 말하곤 했다.
“너무너무 훌륭한 목사님이 있어서 그곳에 헌금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정옥은 그토록 칭찬했던 교회의 목사님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헌금 드린 사실을 성도들 앞에서 치하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더라고요.”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많은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곳,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곳에 헌금을 드리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본인이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눈빛이 확 달라지시더라고요.”
어려운 재정보다 더욱 경애를 힘들게 한 것은 정옥을 비롯한 몇몇 교인들의 ‘경애를 대하는 태도’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옥과 몇몇 교인들이 담임목사인 경애에게 함부로 소리를 지르거나 다그치며 혼내듯 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경애의 심리적 위축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그녀의 아들 K였다.
“교회 재정이 어려운 것은 그럴 수 있어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시는 거라면 그것도 감수했을 겁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닐 만큼 다닌 교인들이 목사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어차피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교회 다니다가 온 교인들이니 다시 다른 교회에 가게 되도 신앙생활을 잘할 겁니다.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누가 진짜 어머니의 성도들인지. 비록 헌금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 분들과 다시 시작하세요.”
K는 10년 전부터 한결같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해왔었다.
“정옥 목사님은 성경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계세요. 앞으로 점점 더 어머니를 힘들게 할 거예요. 정옥 목사님은 점점 더 어머니와 교회에 인색하게 행동할 겁니다. 도움 기대하지 마시고 대책을 세우셔야 해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도 나한테 은인이다.”
“네. 알아요. 그래서 저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천국가시는 날까지 목회를 하시길 원한다면 대책을 세워야 해요. 차라리 예전처럼 집에서 다시 개척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적어도 성전임대료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경애가 듣기에도 아들의 말은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경애가 ‘임대료 때문에 교회 문을 닫고 집에서 개척을 한다’고 하자 정옥이 황급히 막아섰다.
“목사님, 제가 남편과 상의해서 재정을 지원 받아올게요. 그리고 목사님이 지금까지 못 받은 사례비를 계산해 보니까 1억 5천 정도 되던데 이것도 남편과 제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도하고 계세요.”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거짓 약속을 반복하며 세월이 가고 경애의 목회 빚은 가족들도 모르게 늘어만 가고 있었다. 오히려 정옥의 헌금은 평소보다 더욱 줄어들어 평신도 보다 적은 헌금을 드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들과 함께 먹은 밥값까지 경애에게 계산하게 했고, 심지어 경애에게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 훌륭한 집사님이 있는데 너무 사정이 딱하더라고요. 내가 돕고 싶어서 그러니까 교회 재정으로 이백만원만 주세요.”
“목사님, 우리 교회에 그런 재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내가 그동안 충분히 헌금을 했는데 왜 재정이 없어요!”
정옥이 호통을 치자, 경애는 그동안 아들이 그토록 자신에게 말해왔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더이상 속으시면 안돼요. 목사님은 예전의 그 분이 아닙니다. 예전 고마웠던 기억에만 사로잡혀서 계속 속고 계시잖아요. 사탄이 정옥 목사님을 통해서 어머니의 남은 인생마저 허송세월 시키려는 겁니다.’
그러나 경애에게는 처음 정옥에게 받았던 사랑과 배려에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깊게 배어 있었다. 어쩌면 동역자의 변심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사람들은 당연히 정옥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20여 년간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경애는 정옥에게 이제 그만 은퇴를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미 은퇴할 나이도 많이 지났으니 이제 나 대신 교회를 맡아 주었으면 해요. 더이상 교회 재정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요. 자녀들에게도 면목이 없네요.”
그녀의 편지에는 아무런 부탁도 책망도 없었다. 그저 교회 문을 차마 닫고 싶지 않았던 가난한 노년의 목회자가 이 무거운 짐을 가져가 달라는, 은퇴를 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마지막 부탁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옥은 그마저도 받아주지 않았다. 정옥은 편지를 받자마자 그날 즉시로 교회를 떠났다. 그녀는 왜 그토록 황급히 교회를 떠난 것일까? 정옥이 떠난 뒤, 교회의 재정은 더욱 악화가 되었고 차마 교회 문을 닫을 수 없던 경애는 결국 은퇴를 잠시 반려하게 되었다.
현재 정옥은 모든 만남과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특별한 병명조차 나오지 않는 그녀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병원에 없다. 정옥의 남편은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걸려오는 모든 전화와 문자를 차단했다.
정옥의 말에 따르면, 정옥에게 경애는 어렵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이자, 언니이자, 신앙의 조력자였다. 심지어 정옥은 몸이 아플 때도 의사보다 경애를 먼저 찾았고, 경애는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정옥을 위해 달려갔다.
“저는 목사님을 가족 다음으로 사랑해요.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진짜 목회자죠.”
그러나 정옥은 가족 다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경애 부부가 은퇴 준비는 커녕 목회로 생긴 채무까지 떠안게 된 상태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경애의 아들 K가 찾아와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지만 정옥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저희 모르게 또 2천만원을 빌리셨더라구요. 모자란 재정을 전부 어머니가 책임지게 되어 있어서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니 교회 재정 위원들과 함께 재정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임대료가 밀리면 모든 성도가 힘을 합쳐서 내던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세우던가 해야지 담임목사님 혼자 모든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K야, 어머니가 좋아서 하시는 거니까 그냥 그대로 두렴.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일이잖니."
정옥은 평소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K는 그날의 대화를 통해 정옥의 진의를 확신했다. 경애의 남은 삶은 정옥에게는 그저 듣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듯 보였다.
어느덧 노년의 목회자가 되어 버린 경애, 정옥을 포함한 무례한 교인들이 담임목사인 경애를 혼내듯 다그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경애는 더이상 열정 넘치는 기백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아들이 새로운 시작을 제안해 왔다.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살면서 본 가장 훌륭한 목사님 중에 한 분이세요. 저도 어머니가 주님나라 가시는 날까지 목회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시작해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경애의 아들 K는 함께 섬기던 교회를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경애를 설득해왔다. K가 말하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교회 구조개편...
“쌀 나누기, 반찬 나누기, 어려운 분들 돌보시는 건 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목회자로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과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싼 임대료가 나가는 성전을 어머니 사비로 유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경애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때때로 K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목회자인 경애를 책망하기도 했다.
“천만원, 이천만원씩 새로운 빚이 발견 될 때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정말 해도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지하상가에서 파는 3만원짜리 옷조차 기어이 내려놓는 어머니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K는 어머니가 자신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도, 돈도 언제나 교인들이 우선이었다. 전역한 아들이 자기 방이 없어 교회 비상구에 합판을 올려놓고 잘 때는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전주에서 채무 도피를 온 생면부지의 용국에게는 고시원을 얻어주었다.
그렇게 보살핌을 받던 이들 중 다수가 구제비를 받아쓰고, 교회의 쌀과 음식을 먹으며 목사님께 무례하게 굴거나 돈을 빌려달라는 등의 무리한 부탁을 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자신의 부탁을 더이상 들어주지 않거나 형편이 나아지면 감사 인사 없이 큰 교회로 떠났다.
“어머니, 목회는 규모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에 어머니가 감당하실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 때문에 정말로 돌봄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방치되고 있잖아요.”
10년 넘도록 어떤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경애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K와 함께하는 동역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너를 통해 일하시려나 보구나.”
K는 가장 먼저 교회의 구조개편을 시작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쫓아 낼 수는 없으니 어머니가 나오셔야 합니다.”
일부 성도들이 경애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목사님 댁 화장실에서 예배를 드려도 좋으니까 제발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해주세요.”
그렇게 찾아온 성도들은 놀랍게도 경애와 K가 기도하며 선별한 리스트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K는 평소 교회 봉사는 하지 않으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고 목사님께 무례하게 호통 치던 사람들을 명단에 기록하지 않았다.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곳이 아니어도 다른 교회에 출석하실 분들이니까요. 이번 기회에 본인들 마음에 드는 훌륭한 목사님을 찾아가게 되었으니 그분들 신앙을 위해서도 오히려 잘된거예요. 저는 지금 어머니의 회복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어머니가 예전 같은 영성을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새벽 1시 건, 2시 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본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몇 시간씩 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예배는 드리지 않고 사라지는, 그러면서도 경애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말투로 가르치듯 말하는, 교회 일은 전혀 돕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K는 틈틈이 경애와 동물원, 미술관,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시간을 함께 했다.
정옥은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숨겨왔던 본인의 성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소 정옥을 알던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정옥은 경애의 아들 K를 책망했다.
“이제 네 소원대로 되었냐? 네 소원대로 되었냐고?”
아울러 정옥이 K에게 보내온 편지에는 지금껏 누구도 본 적 없는 정옥의 공격적인 면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도와줬는데 이렇게 나를 이용하다니 꼴 보기 싫다. 역겹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K는 정옥의 말에도, 편지에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옥의 거친 언어는 자신보다 10살 많은 담임목사 경애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너무 안타깝다. 나한테는 은인이었는데... 다신 볼 수 없겠지.”
“아니요! 다시 연락하려고 시도해 올 겁니다. 저도 두 분이 다시 관계를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안돼요. 편지를 보니 그동안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이 가네요.”
1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K의 예견대로 정옥이 경애를 만나려는 시도를 해왔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야. 화를 내고 나면 항상 미안하다고 사과했었어. 이번에도 그런 걸 거야.”
“아내를 때리는 남편들도 그렇게 말하지요. 지금까지는 어머니 방식으로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제 방식에 따라주세요. 정옥 목사님을 위해 기도만 하시고 아직은 따로 만나시면 안 됩니다.”
K는 1개월 전 정옥에게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지난 20년 동안 경애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정옥이 말만하고 지키지 않은 약속들과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 일전에 목사님께서는, 목회는 하고 싶지만 본인이 직접 목회를 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지키지도 않을 재정 지원을 약속하며 어머니의 은퇴를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교회에는 헌금을 하면서 본인이 부교역자로 섬기는 교회는 성전세가 밀리건 말건, 담임 목사님이 사례비를 받건 말건 모른척하셨지요. 도대체 이 교회는 누구의 교회입니까?
유추해 보건대, 목사님이야말로 본인이 목회는 더하고 싶은데 교회에 추가적인 재정지원을 해주는 것은 싫어서 어머니를 이용하신 거 아닌가요. 목사님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시면서도 본인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곳에만 헌금을 하고 온갖 굳은 일과 어려운 교회 재정은 모른 척 하셨습니다. 남을 돕거나 헌금한 것을 모두가 알도록 몇 번이고 본인 입으로 자랑하셨지요. 성경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편지를 드린 이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저희 어머니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셔서 꾸벅꾸벅 조는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호통 치는 분들이 어머니 주변에 없기를 바랍니다. 이미 은퇴할 나이도 넘기셨으니,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이제 어머니 근처에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도 이제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분이 되신 것 같습니다. 다시는 어머니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역겹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어머니를 친구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는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20여 년 전, 목사님께 감사했던 순간만을 기억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타인보다는 가족들과 자기 자신의 회복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K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잘못도 있습니다. 관계가 이렇게 되기 전에 서로 대화를 나누셨어야지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없어요.”
K가 아는 한, 그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었다. 그러나 정옥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지혜로움이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 경애가 어째서 그토록 오랜 시간 정옥에게 속아서 끌려다니게 되었던 것일까?
처음 정옥은 진심을 담아 경애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해 정옥은 경애의 전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경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된 후부터 정옥은 도움 대신 경애의 목회와 삶에 무거운 짐과 채찍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정옥은 누구보다 가장 많이 경애의 시간을 요구했으며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본인 자랑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누구보다 경애를 함부로 대했고 이는 일부 교인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최고 연장자이자 담임 목사인 경애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정옥과 정옥의 후배 교역자는 누워서 수다를 떤다. 청소부터 추수감사절, 부활절 등 행사준비까지 모든 잡무를 담임목사 혼자 하는 동안 부목사들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치 사립학교의 이사장처럼 담임목사가 한 결과물에 대해서 평가하며 훈수만 두는 모습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교회의 한 분야를 맡아서 감당하지는 않았다. 정옥은 설교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설교 당일, 자신의 설교를 경애에게 미루기도 했다.
“목사님 나 설교 준비가 안 돼서 교회 못 가겠어요.”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였을까? 정옥은 경애에게 자신이 다른 교회에 큰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것은 마치 사탄의 바디랭귀지와도 같았다.
'이것 봐. 내가 이렇게 다른 교회에 헌금 하는 거 봤지? 나는 이런 헌금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계속 내 도움을 기대하세요.'
개미의 걸음 속도처럼 아주 천천히 조여 오는 사탄의 개인 맞춤형 올가미에 경애가 걸려들고 만 것이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정옥은 경애에게 성전 임대료를 빌려준 적은 있으나 단 한 번도 탕감해 준 적은 없었다. 때론 월 15%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와중에도 정옥이 경애에게 1년에 2차례 정도 주는 고가의 선물이었다.
“내가 백만원짜리 속옷이 왜 필요하겠어. 이런 걸 돈으로 줬으면 성전 임대료에 보탤 수 있었을 텐데... 감사한 생각만 해야 하는데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네.”
처음 정옥이 경애를 만났을 때 베풀었던 그 모든 호의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옥이 자기 의를 드러내며 점차 사탄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된 시점부터 그 신뢰는, 사탄이 경애의 목회를 훼방하는 통로로 쓰이고 말았다. 진심 어린 호의로 얻어진 신뢰가 사탄의 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다.
“아니, 그깟 박수 좀 받고 싶은 것이 무슨 그리 큰 죄인가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12장 48절)
많이 아는 만큼, 많이 받은 만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기준도 엄격해진다. 알만한 성도가 자신이 받은 바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받은 것에 비례하여 맞게 될 수 있다. 자녀들조차 우려를 표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했던 정옥, 그녀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목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청소 및 성전 관리, 고정 지출, 심지어 예배까지도...
"난 내가 뭔가를 고정적으로 맡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못해요."
그녀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막상 성전은 얻었지만 단 한 명의 성도도 없던 상황에서, 경애는 전도부터 교회 운영까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줄 좋은 대타였다. 경애는 정옥이 세운 빈 성전을 몇 번이고 성도들로 가득 채웠다. 충분히 아름다운 동행일 수 있었다.
경애는 단 한 번도 정옥의 재정지원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언젠가 지킬 약속이라 믿었기에 어려운 재정을 대출까지 얻어가면서 버텨왔다. 100만원으로 계산해도 못 받은 사례비가 2억여원, 목회로 생긴 채무는 중간중간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1억 이상, 자녀들과 지인들로부터 받은 돈까지 모두 사용해 버린 그녀의 사택 전세 보증금은 모든 대출을 상계처리하고 나면 0원이 된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자녀와 남편의 망연자실한 표정 앞에서 경애는 굳어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경애가 기대해야 할 대상은 처음부터 정옥이 아니라 하나님이였어야만 했다. 경애는 정옥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기대하며 기도했어야 했다. 경애는 늘 입으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교회 재정 지원자의 자리에 하나님 대신 정옥을 올려놓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경애는 결코 하나님 대신 인간을 의지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 그녀의 삶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았던 경애의 목회 생활 20년, 프라임 타임은 그렇게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정옥은 온갖 거짓 약속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적당한 물질 공세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정옥은 고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는 어떻게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옥에게 조금 더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였고 정옥 또한 그런 관심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곤 했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정옥은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할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함, 그것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할 때 느껴지는 죄의 맛인 줄은 몰랐다. 그 짜릿함에 대한 갈망이 자신을 죄에 대한 중독으로 이끌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은 하나님의 능력자들이 사탄의 설계 아래서 열매 없는 삶을 종용받고 있다. 언제나 본인이 헌금과 구제한 것을 자랑하는 정옥에게서 어째서인지 열매에 대한 자랑은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평생 단짝 미순 목사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옥 목사님 돈 받아 쓴 사람들 중에 잘 된 사람 있나 보세요. 하나도 없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 등 다양한 비유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알곡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위 사례는 필자의 부모님 이야기다. 이는 필자로 하여금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깊은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 군데, 세 군데 교회를 옮겨도 목회자가 못마땅하다면 본인이 문제일 수 있다.
이럴 땐,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아보아야 한다. 어떻게든 겸손을 구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교회에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징벌적 사명’이다. 다 마음에 안 들어 하니 하나님께서 ‘그럼 네가 해 보라’고 앞장 세우신 것이다.
미취학 아동에게 히어로 의상 입혀 주듯 홀로 백의종군케 하시는 신(神)의 한 수, 일종의 격리 수용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감사함으로 받은 사명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불평하다 걷게 된 길이니 고난은 예비 되어있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오는 성도 역시 목회자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올 것이다. 본인이 섬겼던 목회자를 향해서 했던 말과 행동, 품은 생각까지 그대로 성도들에게 받게 될 것이다. 순종하면 순종의 열매를, 불순종에는 불순종의 열매를...
적당히 순종하는 것에는 적당히 순종의 열매를, 못마땅한 마음에는 성도들로부터 못마땅한 마음을, 부정적인 평가의 말에는 동일한 평가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장 2절)
본인을 통해 목회자가 겪었을 고통과 불편을 그대로 돌려받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며 회개하고 철이 들어가게 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성화훈련코스이다. 빨리 깨닫고 회개해야 연단도 빨리 지나간다.
버틸수록 영혼의 피골은 상접해지고 얼굴은 하나님의 종인지, 귀신 들린 박수무당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사납게 변해간다.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고 금전은 마르며 몸에는 지병이 끊이지 않아 멘탈까지 오락가락한다. 라이프 사이클이 하위 레벨 무속인들의 것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장 1절)
목회자의 가이드에 따르지 않으면 목회자와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논하기 이전에 어느 조직에나 적용되는 상식이다. 성도는 교회에 속해야 하며 교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믿고 사랑하는 온전한 지체의 연합이다.
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성도와 함께 목회를 하고 싶은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목회자도 사람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성도가 있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계속 시달리다보면 축복 기도는 고사하고 '제발, 저 분 좀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를 신뢰하며 동행할 수 있겠는가?
힘 좀 있다고 다윗에게 조건부 순종과 컨트롤을 시도했던 요압의 말로를 기억 할 것이다. 누구보다 많은 공을 세웠던 그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는가. 언성을 높이며 감정을 휘두르면 목회자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업무의 특성상 힘 한번 못써보고 당할 수밖에 없다.
혹시 목회자가 분을 못 이겨 함께 핏대를 세우고 덤빈다면 목회자를 공격한 자에게는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만일, 목회자가 수욕을 참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해야 한다. 참 목회자를 모욕한 그는, 목회자를 위해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 훈련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능한 이유를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성도가 위험한 결정을 하려고 한다. 그에게 위험을 알릴 누군가가 필요하다.
2. 계속되는 고난으로 성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뭔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며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음성과 주님의 음성도 구분 하지 못하는 이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보다 목회자, 순 모임의 장이나 간사 등 교회 리더들을 통해 지체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경 공부 중일 수도 있고 기도 후 나눔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평소 순종 훈련이 되어있으면 그는 교회 내 리더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불순종의 결과를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목회자 등 리더를 위한 것도 아니다. 순종은, 순종하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다. 만일 자신이 순종에 약한 편이라면, 교회의 리더들과 갈등이 있다면, 리더들이 슬금슬금 본인과의 대화를 피하는 것 같다면 ‘절대적인 순종 과정’을 필수 교양과목으로 듣게 하실 공산이 크다.
불순종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대놓고 안 하기
2. 입맛에 맞는 것만 하기
3. 하겠다고 말하고 세월 보내기
4.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기
5. 몰래 행동하기
5번은, 영적 리더와 성령 안에서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 자들에게 사탄의 통로가 되곤 한다. 리더에게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긴밀하게 나누고 기도하며 응답을 받아가던 성도가 어째서인지 문제를 일으킬 때가 되면 리더 몰래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리더에게 말하면 반대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한번, 두번 몰래 행하다가 갑자기 문제가 터져서 어쩔 수 없이 기도 부탁을 하게 되면 멘토는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실망하고, 멘티 역시 자신을 향한 멘토의 태도에 실망하여 스스로 멀어지게 되는 클리셰, 그렇다면 그런 생각은 누가 넣어 줬을까?
몰래 행동하는 것은 속이는 것 즉, 거짓말과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 숨기려는 것은 어둠의 속성이다. 빛의 자녀가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사탄의 세력은 그의 삶에서 활성화를 시작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케이스를 기억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기만했기에 받은 형벌이다.
입맛에 맞는 말만 순종하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본인 마음에 드는 예언만 해주는 선지자를 찾아다녔던 성경 속 인물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덤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몸집을 키울 수 없는 것처럼, 순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 듣고 싶은 말씀만 찾아 듣는 이는 평생 1단계 연단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사탄과 맞서기 위해 세워진 전투 기관이다. 전쟁터에서의 불순종은 곧 처벌을 의미한다. 리더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처벌은 리더가 받는다. 그러나 리더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면 처벌은 모두 병사의 것이 된다.
성도의 순종을 악하게 이용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교회의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책임은 성도가 직접 감당해야 할 것이다.
혹시 목회자 또는 리더가 못 마땅해서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고 인터넷 예배만 드리고 있는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목자 없는 양같이 떠돌고 있는가? 목회자들이 만만하게 느껴지는가? 이를 테면, 목사님께 언성도 높일 수 있고, 맡긴 교회 업무를 거리낌 없이 거절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이 목사님께 있는 것 같다면, 기도로 점검하며 순종할 수 있는 목회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할지 모른다. 평생 그렇게 살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옮긴 교회에서도, 또 다시 옮긴 교회에서도 본인 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면 본인이 목회자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될지 모른다.
순종이란 '왜'라는 의문을 십자가에 못 박고 따르는 것이다 -마틴 루터
“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럼 돈은 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서요.”
모든 직업은 기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이라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스님은 직업일까? 목사님도 직업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직업이다.
혜민 스님이 무소유 대신, 풀(full) 소유를 실천하다 대중들로부터 크게 질타를 받고 있다. 혜민뿐 아니라 대중들이 존경하는 스타 강사 등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전략적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들의 삶에 직접 들어가 보면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경우들이 꽤 있다.
잉꼬부부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아닐 수 있고,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활기차 보이지만 우울증에 시달리고, 부유해 보이지만 그 부유함조차 비즈니스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일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주봉석씨 또한 다른 사람처럼 돈이 벌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불교를 통해 길이 열렸고 이때다 싶어 노를 젓다 보니 혜민 스님이라는 초대박 사업 아이템이 되어 버린 상황, 그러나 이것이 그 한 사람만의 문제인 걸까?
이른바, ‘부자 되는 방법’ 강사 중에는 본인조차 실천해 본 적 없는 내용을 강의하는 이도 있다. 그들이 돈을 번 것은 강의 내용대로 실천해서가 아니라 강의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가 돼 본 적 없는 사람의 ‘부자 되는 방법’ 강의는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당연한 소리, 적당한 희망과 위로, 듣기는 좋으나 딱히 쓸모는 없는 이른바 예능 강의다. 부자인 척, 행복한 척, 꿈을 이룬 척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보여지는 모습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어차피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혜민만큼은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질타를 받는 걸까? 그가 가진 직업의 본질 때문일 것이다. 평생 꽃길만 걸어 본 자가 온갖 호사를 누리며 한 푼이라도 더 쓸어 담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면서, 더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더 내려놓으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으니, 신앙심을 품고 그의 말을 경청해 온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기독교 내에는 없는 걸까? 혜민 같은 케이스가 목회자 중에는 없겠는가.
목회자라는 직업을 만들었더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후안무치의 사기꾼들이 하나님의 자녀보다 열심히 공부하여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이들을 사기꾼이라 칭해도 마땅한 이유는 그들이 받아가는 급여의 근원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전제하에 지불된 성도의 헌금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들 말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성도도 없고 헌금도 없고 그들이 받아가는 월급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해 목회자라는 직업의 자격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믿는 다면 그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행함은 무엇일까.
돈이 생기는 곳이면 언제나 그러하듯 교회에도 이권이 발생한다.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 버티려는 자들의 팽팽한 다툼이 세습 등 여러 이슈로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사실 이권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유지 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연결 고리는 ‘이권’ 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잘 맞지만 아무런 이권이 없는 관계’
‘마음은 안 맞지만 함께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
후자 쪽이 유지될 확률이 높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성전 임대료 등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목회자 급여까지 이권 없이는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 내 이권의 근원은 무엇일까? 성도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전혀 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신실한 목회자’
‘십일조를 잘하는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삯꾼 목회자’
어느 목회자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회를 영위할 수 있을까.
성경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백성들 때문에 지금의 목회자격인 제사장들이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버려 교회가 붕괴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스라엘의 몰락과 때를 함께 한다. 비단, 성경적 입장을 배제하더라도 교회를 통해 충분한 케어를 받으면서도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는 인간적, 도의적, 상식적인 입장에서만 봐도 몰염치하다. 교회 유지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목회자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성도’라 함은,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 됨을 고백하는 진짜 성도를 말한다.
물론 십일조로 말미암는 의무는 목회자에게도 해당이 된다. 성도들의 십일조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자녀를 키우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면서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땐 ‘기도해 봅시다’ 말만 하면서 도망 다니는 목회자는 업무적 기만행위에 해당한다. 성도들의 사업, 직장, 건강, 가정 문제에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헌신과 충성만을 강요하는 목회자 역시 그러하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장 12~ 15절
믿음이 있는 기도여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믿음이 있는지는 행함으로 증명이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6) 목회자는 자신의 성도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기도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행함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진짜로 상대방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가 기록된 사건이 있다. 피 값을 주고 우리 목숨을 건지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전 재산과 맞먹는 사고 보상금을, 자신의 성도도 아닌, 그저 자신을 전도사님이라고 불러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어준 목회자의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목회자의 기준은 이것이다. 내가 감히 목회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성도의 위기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모든 성도에게 은혜를 선사한다.
‘내가 쓰러졌을 때도 우리 목사님은 나를 위해 저렇게 하시겠구나. 내가 어디 가서 저런 분을 만날 수 있을까’
헌신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그런 목회자가 계속해서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성도의 십일조는 목회자의 삶을 지탱하고, 목회자의 기도와 케어는 성도의 삶을 지탱하는 공생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 된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십일조가 차고 넘쳐서 십일조 성도들이 수천, 수만을 넘어서면 목회자들은 성도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성도 한두 명쯤 나자빠져도 목회자에게는 아무런 데미지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성도들의 문제에 교회가 직접나서지 않아도 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고 말았다.
교회에 충성 봉사하다가 삶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사님이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말만 하고 도망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평생을 충성 봉사해 온 교회가, 나의 환난 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기도합시다' 말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 2장 15~16
얼마전, 이 편지의 주인공으로부터 병원비를 제하고 10만원 가량이 남았다는 감사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고 목소리조차 들어 본 적 없는, 3년 전 대화가 끝이었던 분을 위해서 나는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권이 없는 성도를 위해서도 나는 기도와 행함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이끌어 내곤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아니던가.
성도들이 서로를 아끼고 돕는다면 교회는 누구나 소속 되길 원하는 안식처가 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할 때도 쓰러진 성도부터 살핀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온갖 좋은 일은 다 하면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전도조차도 하지 못해 쇄락의 길을 걷는 무능함의 극치를 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울 한 교회의 청년 리더들이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헌신을 강요하냐’고 단체로 내년 직책을 맡지 않겠다고 했으며 교회를 떠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나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복이 있어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아도 버티기만 하면 목회자에게는 사례비라는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금전적인 보상이 없는 성도들에게 유일한 보상은 ‘은혜’ 뿐이다. 당장 기도의 응답이 없어도 성도들은 은혜를 받으면 교회에 충성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을까.
성도들이 일터에서 하기 싫어도 근무하는 것처럼, 목회자 또한 기도와 말씀을 업무의 일부로 생각하고 의무적으로 감당하면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교회 문제의 근원은 기도하지 않는 리더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책임은 언제나 자신의 직책에 걸맞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던 이가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 중 상당수가 WCC라고 했다가 또 누구는 루머라고 한다. 진실과 거짓이 뒤죽박죽 섞여서 온통 아비규환이다. 이걸 누가 분별해 줄까. 본인이 판단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을 장착해야 한다. 사람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끊임없이 영 분별하며 나가야 한다. 결과에 대한 손해는 아무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단체라는 힘의 논리에 밀려 자칫하면 이단이 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글 또한 힘을 지닌 목회자들의 모임에 눈엣가시 같을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이 이 사역에 역기능이 될 수 있음도 안다. 실제로 세력들이 모여서 마음을 먹으면 나처럼 세력 없는 사역자에게 이단 도장 찍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들로 악마의 편집을 하여 근거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제도적 이단’이다. 성경적으로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내 교회 성도들 뺏길까봐 이단 도장을 찍는, 이권 때문에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이다. 하지만 나는 서울의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공격이 있다해도 나의 이권에는 위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성도들의 십일조로 먹고살지 않는다. 평신도 사역자로 자비량하며 내가 쓸 것 내가 벌어서 쓰고 다른 교회를 돕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나는 교회에 ‘이권’이 없다. 그런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권 때문이다. 나의 이권은 하늘나라에 있다.
나는 본래 직업적으로 고객을 기만하는 가짜 전문가들과 업체들로부터 선량한 이들을 지키는 컨설팅을 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대상이 교회로까지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쓰기까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비판을 하는 자는 자신도 비판을 받게 된다’는 성경 말씀은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이것이 교만은 아닐까’ 수 없이 점검하며 ‘교회의 분열과 서로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고심 끝에 난생 처음으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동기들 중 상당수는 목회자가 되었다. 또한 직,간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목회자 분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도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기도를 하나도 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나태한 평신도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군가의 십일조로 생활하는 목회자이다. 그가 내 목회자가 아닌 것을 그저 다행으로 생각하면 될까.
내가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낼 수 있을까. 나는 목회자를 섬기는 것이 복이라 배웠고 그렇게 믿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회자를 내 손으로 훼방하게 될까 진심으로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에 대한 의견을 함부로 내 놓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이권이 사라질 위기가 전혀 없으면 태만과 퇴보가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 있는 안목으로 교회와 목회자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목회자 역시 그런 성도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최선을 다해 직분을 감당하기를 바랄 뿐이다.
암세포 = 타인의 몸에 붙어 연명하면서도 본체의 생명 활동을 방해하는 세포, 본체가 죽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 =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운’ 신학교에 붙어 연명하면서도 교회의 생명 활동을 방해함.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급여는 어디서 줄까? 신학대학이다. 그렇다면 신학대학의 등록금은 누가 낼까?
1)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람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의 종이 되길 원하는 사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고 신학대학에 오겠는가? 신학대학에 지불되는 등록금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들이 지불한 돈이다. 만일, 세상에 모든 성도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믿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독교 신학대학이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서 강의하던 자유주의 신학 교수 또한 일자리를 잃게 된다. 고로 자유주의 신학자는 혼자서는 소득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암세포와 다를 바 없다.
“신은 없다.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교수,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에 반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교수를 강단에 세우는 신학대학 리스트는 공개되어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그리하여 주의 종이 되고자 학자금 대출까지 얻어 입학한 성도들이 ‘하나님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지적 사기는 예방되어야 한다. 천문학을 배우려 돈을 지불한 학생에게 천문학이 얼마나 쓸모 없는 학문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사기가 아닌가? 공룡을 배우러 온 아이들에게 사실 공룡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부모들이 환불 요구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교수에게 급여를 주는 신학교, 그런 신학교 출신 목회자를 선발하는 교회 또한 성도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선지 동산에 사탄의 지분률이 올라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 교수님께-
부디 당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 자유주의 신학대학을 설립하세요.
당신의 강의를 들어 줄 학생 모집도 직접 해보세요.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누군가의 밥벌이를 위해 흘려진 피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미는 어설픈 합리적 의심과 근거자료들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신학대학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모임에 와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숨기고 교묘하게 교수에 임용되어 청중들이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뿌리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까. 적당한 명예와 급여가 탐이 났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학생들이 지불한 수업료로 급여를 받아가는 당신은, 스스로의 신념을 팔아먹은 비겁한 기회주의자입니다.
복음을 가로막고 훼방하는 당신에게는 끊임없는 저주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당신이 부정하게 취득한 급여로 생계를 이어온 당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이 함께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돈과 명예 좀 얻어 보겠다고 그 구차한 발걸음을 이곳에 옮기지 마세요. 가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 본인과 가족들을 부양하세요. 스스로와 가족들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세요.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힌 당신의 삶에 뼛속까지 스며오는 심신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로 삶의 살점이 한 덩이씩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유익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하나하나 합쳐져서 언젠가 당신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부당한 급여로 사 먹은 쌀알은 비수가 되어 당신의 영과 육을 관통할 것입니다.
그 직책을 포기하지 못하겠으면 기도를 해보십시오. 소중한 일터를 마련해 준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진심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살아 계시다면 만나 주십시오. 믿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믿음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믿으려는 시도도 없이 주님의 교회에서 암세포처럼 행동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부르짖어 기도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미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 값을 당신과 당신의 집에서 찾으시는 날이 임하기 전에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까지 나는 십일조를 거른 적이 없다.
한 달에 400~800만원가량의 헌금을 드리기도 했었지만 필자의 부모님은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으신 적이 없었다. 자녀들이 드린 헌금만으로도 책정 된 월100만원의 사례비는 충분히 받으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으실 수 없었다. 사탄이 개입하면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뒤에는 언제나 사탄이 있다.
그렇게 된 이유를 꼽아보자면
첫 번째, 담임목회자도 사례비 한 푼 못 받는 미자립 개척교회에 사례비를 받는 부교역자들이 몇 분이나 되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담임목회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들에게는 사례비가 지급되었다. 부교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느라 담임목회자는 사례비를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난한 개척교회에 이토록 많은 부목사님들이 시무하시게 된 걸까?
“사례비는 제가 드릴 테니 이곳에서 시무하게 해주세요.”
재정 지원을 약속했던 동역자가 그렇게 한분 두분 모셔왔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차마 목사님들을 해고 할 수 없던 부모님은 자녀들 모르게 마이너스 통장까지 써가며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를 감당해 왔다.
두 번째, 헌금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성전 임대료가 지출되었다. 이것 역시 재정 후원을 약속했던 동역자의 말만 믿고 기다렸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모든 마이너스 재정은 부모님의 몫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 교회 재정을 훨씬 넘어서는 구제를 실천하며 전도했다.
3번을 제외한 두 가지 요소가 사탄의 장치이다. 목사님들이 사탄의 장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사탄이 만들었다는 의미다. 사탄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당사자들의 후회이다.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한 것이라면 후회가 없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마지막 황금기를 다 보내신 부모님은 좀 더 일찍 아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신다.
유튜브에는 자신의 가난한 노후를 탄식하는 목회자들의 영상이 흘러넘친다. 그런 동영상들은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모두 감당한 목회자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며 기뻐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께 3번을 중단하시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단지 교회재정에 맞도록 1번과 2번은 조정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씀드려왔을 뿐이다. 수입에 맞게 지출을 줄이자는 말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부모님은 이런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지금은 이렇게 짧게 결론지어 말하고 있지만 힘들고 답답했던 수없이 많은 상황들이 있었다. 10여 년 전쯤의 일이다. 한도가 꽉 찬 부모님의 마이너스 통장을 정리해 드리려던 나는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이거 다 갚아드려도 또다시 마이너스 만드시겠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아버지는 멋쩍은 듯 웃으시며 말했다. 매월 80만원 가량의 대출이자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땐 대출원금 전액을 상환시킨 후, 이자는 받지 않겠으니 필자에게 원금만 조금씩 갚아 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대출이자는 잘도 내시던 분들이 어째서인지 아들의 돈은 갚지 않으셨다. 아니 못 갚으셨다. 신기하게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영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음을...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과 나의 삶을 분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가난한 목회자의 삶, 나는 내 역량이 닿는 만큼 성도로서 또한 자녀로서 할 도리를 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부모님은 내 모든 신앙의 원천이 되신 분들이다. 부모님은 내가 살면서 본 참된 목회자 중에 한 분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여러 건의 가정 파탄을 막으셨고 심지어 병원에서 포기했던 죽을 뻔한 사람도 살리셨다. 노숙자와 가난하고 우울했던 사람들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체적인 변화의 결과물들도 만들어 내셨다.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삶은 슬프게도 나에게 목회자의 부정적인 실물 교본이 되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전도하고 구제하는 목회자라 할지라도 규모에 맞는 지출관리를 하지 않으면 재정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렇게 소득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다 보내고 나면 준비되지 않은 노후를 맞게 된다.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 짐은 온전히 자녀들의 몫이 된다.
기댈 수 있는 자녀가 없다면 가난 또는 극심하게 가난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 순리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본인 잘못이다. 이것은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구제를 열심히 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50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믿을만한 목회자를 만나 후원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요 기쁨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후원하는 신실한 목회자가 부모님이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나는 내가 드린 헌금이 복음사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로 소진되는 것도 보게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부모님은 돈을 벌기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 그래서 목회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모든 아이러니함 뒤에는 사탄이 있다.
둘째, 믿을 만한 사람이 믿을 만한 행동을 하며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의지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 하나님 대신 사람을 기대하면 열매 없이 허송세월하게 된다는 것.
부모님의 삶을 보며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기대해야 한다. 목회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든 성도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목회자는 그래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재정으로 목회자를 지원하는 평신도의 삶이 윈-윈 일 수 있다는 것, 응답을 바란다면 믿음이 있어야하고 믿음에 걸맞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 물질을 구한다고 하면서 물질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돈이 벌리지도 않고 모이지도 않는다는 것.
나는 부모님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역을 할 때는 철저히 주님의 일을, 돈을 벌 때는 돈이 될 일을 했다. 부모님은 목회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돈을 벌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을 일들만 골라서 하셨다. 아버지는 유기농 농작물을 재배해서 판매하셨다. 5만원짜리를 팔기 위해 왕복 1만원 가량의 연료비와 2만원 짜리 밥을 사주고 족히 2시간은 대화를 나누신다.
한 분야에 집중을 해도 벌릴까 말까 한 것이 돈인데 스포츠마사지를 포함해서 아버지는 대략 10가지 정도의 아이템에 도전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거나 돈이 될 일도 돈이 안 되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목회도 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에게 성전청소 등을 맡긴 후에는 수고비를 꼭 지불하셨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자원 봉사해야 하는 항목들에 대해 부모님은 인건비를 지급했다. 하지만 그 돈을 받은 교인 중에서 잘된 사람도 없고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도 없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무슨 돈을 받아요.”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대가를 받지 않고 봉사한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셈법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나 또한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에도 주님의 일을 하고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에 대한 인건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불해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더욱 아팠던 이유는 부모님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목회도, 돈 벌이도 두 분은 최선을 다하셨다. 지금도 저녁마다 동네 휘트니스 센터에 가시는 두 분은 평생토록 성인병이나 약과는 무관한 삶을 사실 정도로 건강을 지키며 최선을 다해 본인들의 삶을 살아 내셨다.
부모님의 진심어린 헌신과 섬김을 나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나는 두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원망했다. 목회에만 전념하실 수 있기를... 저축까지는 아니어도 좋으니 더 이상의 마이너스재정은 만드시지 않기를...
어린 시절, 가난의 끝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다시는 그 가난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목회를 해야 한다.”
‘나도 당신들처럼 가난한 목회자로 살라는 건가?’
부모님은 당신들이 준비하지 못한 노후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들에게 어째서 본인들처럼 가난한 목회자가 되지 않느냐는 말로 마음의 짐을 더하신다. 이따금 삶에 위기가 찾아 올 때면 그 말이 나의 짐을 더욱 무겁게 느껴지도록 만들곤 한다.
부모님이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나 또한 부모님의 삶에 대해 내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부모님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로 사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시절, 누구보다 비즈니스적인 능력이 있던 분들이셨고,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께 많은 헌금도 드렸던 분들이다. 또한 평신도 시절의 어머니는 전도왕을 놓치지 않던 분이다.
그랬던 분들이 지난 20년의 목회기간 내내 목회도 돈 벌이도 어느 것 하나 두각을 나타내시지 못했다. 목회를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기웃거리실 바엔 차라리 나처럼 돈을 벌면서 목회를 기웃거리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이면서도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끊을 수 없다면 본인의 목회자적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부모님의 삶에 아쉬웠던 점이 있다. 가족들과 그리고 가족 같은 성도들의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목회를 여기저기 사탄에게 속아서 끌려 다니며 어느 한쪽에도 몰입하지 못한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성도 한명 없는 지하성전에 앉아 몇 년 동안 나 홀로 목회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목회자들 중에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사람은 과연 한사람도 없겠는가.
내 평생 가장 즐거웠던 직업 두 번째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다. 그리고 첫 번째는, 생각만 해도 목이 멜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는 그것은 목회자이다. 사실은 나도 목회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신학대학도 졸업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목회를 보면서 목회자의 꿈을 접었다.
나는 부모님의 아픈 목회를 은혜롭게 구조조정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긴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드려왔다. 내가 적지 않은 헌금을 드렸던 지난 10여 년의 세월 동안 응답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심지어 응답이 불가능해보였던 이 기도는 ‘그 힘 사용설명서’를 출간하고 하나님께 사역으로 드리기로 작정했던 기간 중에 ‘기도 부흥’ 사역에 함께 해 주신 동역자들을 통해서 응답되었다.
사탄의 장치를 제거하자마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일단 부모님의 삶의 질이 달라졌다. 이젠 행복하게 목회에만 전념하실 수 있기를... 지키지도 않을 재정후원약속이나 헌금서원으로 목회자를 조련하려는 사탄의 그림자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기를...
하나님이 계시듯 사탄도 존재한다. 사탄은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 합리적인 이유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 그러니 속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