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십 년간 교회에 다녔지만 구원받지 못했었다. 구원받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권사님, 장로님은 물론 목사님 중에도 이 같은 고백을 하는 분들이 있다. 신학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시 신학대학을 졸업했을 것이다. 신학대학에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그도 한때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가 된 뒤, 하는 행동으로 보면 그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걸까?
첫째, 학습된 구원 때문이다. 길동이는 퀴즈왕 선발대회 예선전 모범 답안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다. 길동이는 예선전 문제를 모두 맞춰 퀴즈왕 대회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길동이는 본선 대회의 정답을 모른다. 길동이는 본선 대회에 나가서 어떻게 될까?
“당신은 지금 구원받았습니까? 지금 죽으면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멘’이다. 모두 그렇게 배워서 교리 문답 시간에 배운 대로 답변을 한다. 그렇게 답변하지 않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리 문답 시간, 오 집사는 마음에 걸리는 질문이 몇 가지 있었지만 아내가 한 말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질문에 네네만 하세요.”
오 집사는 지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구원받았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오 집사는 새 신자들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맡고 있다. 만일 그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라면 구원받지 않은 이가 구원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둘째, 구원을 자존심 문제로 생각하며 언짢아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냐는 질문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시험 삼아 주변 성도들에게 질문해 보라.
“성도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심지어 이단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고민을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기 쉽지 않다.
‘내가 그래도 집사인데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그냥 구원받았다고 해야겠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끼리 서로 구원받은 척 지낼 수도 있는 환경, 이 상황은 마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셋째,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다. 직접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설명하는 말씀이 복음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구절은 엄밀히 말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라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대인관계, 사회생활, 헌금과 같은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흘림, 부활에 관한 설교가 복음이다. 실제로 설교 시간에는 영혼 구원에 관한 메시지 외에도 일터와 가정에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렇다면 어째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설교를 하는 건가요?”
교회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성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도 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교회 강단에서는 ‘십자가의 복음’ 외에도 신앙생활에 관련된 설교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구원의 진리는 누구나 한번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것이 아니기에(물론 사람에 따라 단번에 깨달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구원의 비밀을 깨닫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10년 넘게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로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듣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성경공부를 제안하는 것은 이단들의 포교 수법이기도 하므로 외부인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네 번째, 욕심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자 예수님의 메시지를 눈앞에서 직접 들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던 그들의 욕심이 눈과 귀를 막은 것이다. 나의 필요, 나의 욕심, 나의 방법, 자신의 욕심이 강할수록 본인이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게 된다.
다섯 번째, 죄이다. 죄 역시 영혼의 눈과 귀를 가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인데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이 멀어지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행위가 ‘회개’이다. 회개하면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회개’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여섯 번째, 진정성 부족이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된다. 신앙심이 전혀 없던 무신론자도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게 된다. 몹시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나 심각한 위기 상황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든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결핍을 경험하기란 쉽지가 않다. 취업난이라지만 제3국의 빈민들만큼 상황이 심각한 것은 아니다. 급여가 작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일해서 받은 돈으로 먹고는 살 수 있고 아쉬운 대로 문화생활까지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결핍에도 이내 적응을 한다. 가난해진 사람은 가난에 적응해 가난과 더불어 살아간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노력 대신 약에 의지하여 병과 더불어 살아간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닥쳐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럭저럭 견딜만한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방치하면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혈압이 높은 사람은 혈압약을, 당뇨가 있는 사람은 당뇨약을 먹으면 큰 불편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운동이나 식이요법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합병증이 찾아온다. 가정의 잦은 분란을 방치하면 언젠가 가정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도저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이따금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믿음 좋아 보이던 성도 가정에 극심한 어려움이 찾아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성도는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 가운데 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쏟아 낸다.
“나는 그동안 종교인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로 교회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 고난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의 신앙, 즉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식’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다. 불신자와 그리스도인이 걷고 있는 육교가 무너지면 둘 다 떨어져서 다치거나 죽는다. 그리스도인만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제외를 받아 공중부양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 같은 우박에 맞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죽거나 다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바에 의하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런 사고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그 장소에 가지 않게 해주시거나 또는 그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박에 맞지 않도록 피할 곳을 주신다.
심지어 맞았다하더라도 큰 부상을 면한다. 설령 우박에 맞아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 해도 기적과 같이 낫기도 한다. 이 같은 간증을 우리는 들은바 있다. 그런데 이런 범주 안에 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기도를 안 해서 그래요.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실제로 이렇게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 정면으로 반박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믿음의 기도에 이런 위험 요소를 예방하고, 극복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안 하면 불신자와 신자는 다를 바가 없다. 영적인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똑같이 이기적이고, 똑같이 화를 내며, 똑같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에 적용되는 법칙이 나에게만 예외 이길 바란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없이 구원을 이루셨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조차도 피할 수 없었던 세상의 법칙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는 이상 누구에게나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위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그 위기를 발판삼아 더 좋은 길로 가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셨지만 그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기도로 극복한 성도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고난을 주셨다.”
물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고난이 사람을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는 증거는 없다. 내가 끌어 들였거나 내가 조심하지 않았거나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누구나 살다보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처한 경우도 많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법칙 때문이다. 이 세상은 특정한 행동을 하면 그에 따른 결과 값이 따라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 만유인력의 법칙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 유전의 법칙
받은 줄로 믿으면 이루어진다. = 믿음의 법칙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 인과응보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절벽에서 뛰어 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위험한 곳에 아이를 혼자 두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이의 잘못인가? 아니면 부모?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들이 있다. 그중에는 분명 잘못했지만 도저히 탓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뿐이다.
우범지역을 여성 혼자 걷다 보면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위험한 곳에 있으면 위험에 노출 되기 마련이다.
“난 위험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위험요소가 있고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부모님께 대드는 못난 자녀의 고함이 될 뿐이다.
“이럴 거면 왜 저를 낳으셨나요! = 이럴 거면 왜 저를 이 땅에 살도록 창조하셨나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들이 계속해서 그의 삶을 잠식해 들어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저주와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난로에서 멀어지는 만큼 추위를 느끼게 되는 현상과 같다.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깃들 듯, 죄를 지으면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주님과 멀어지는 만큼 다양한 영적 문제가 찾아온다. 주님께서 그를 멀리 했는가? 아니다 그가 주님을 멀리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 공부를 안 해서 시험을 망쳤다.
- 충분한 준비 없이 무리하게 주식에 투자해서 전 재산을 날렸다.
-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에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서명을 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 건강관리를 안 했더니 건강이 나빠졌다.
이중에서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만한 일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조차 하나님을 원망하려 든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셨어야지요.”
하나님께서는 고난조차도 우리를 훈련하는 도구로 이용하실 수 있지만, 그 고난 가운데로 뛰어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닌 우리의 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경우가 있다. 길을 걷다가 눈길에 미끄러진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사람이 숨졌다면 차량운전자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운전자 또한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다. 누구의 탓인가? 내린 눈을 탓할 것인가?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곳이 되었고 세상을 그런 곳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이유를 물으며 죽어가는 성도에게 우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까.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네가 평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네 탓이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그런 식의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사탄은 인간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 수많은 지뢰들을 세상 곳곳에 매설해 두었다. 사탄이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장9절)”
전쟁터와도 같은 이곳에서 이따금 지뢰로 인한 사상자들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곤 한다. 믿음의 기도만이 사탄의 지뢰를 분별하고 또한 해체 시킬 수 있다.
한 가지 정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는 증거는 없다는 점. 원망할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이제 이것은 당사자의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대체 성도들이 고난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 누구도 상대방이 처한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답변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해답이 될 수 없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실망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라면 어떤 답변도 그의 화만 부추길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망이 문제 해결이나 심리적 안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
“그러니까 왜 밤늦게 싸돌아 다녔어! 왜 내 말 안 들었냐고!”
“그러니까 왜 건강관리를 안 했어! 왜 기도하지 않았어!”
언제나 책망은 서로를 더 아프게 하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화살은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사탄이 원했던 시나리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또한 문제가 생겼다면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은 기도이다.
이쯤에서 필립얀시가 그의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마무리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명쾌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명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난 속에 빠져있는 당사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중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탄이 하는 행동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곁에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 위로를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히브리서 4장 15절)
“내가 아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아파하며 당신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 그리고 삶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로 저는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장 16절)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있다. 사랑이 넘치는 발명가 L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원했다. 주변에 L을 시중드는 많은 로봇들이 있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그들과는 마음을 나눌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
“너도 사랑한다고 해야지?”
“네. 주인님 사랑합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니 너희도 내 사랑을 알 리가 없고, 나 역시 너희를 사랑할 수 없구나.”
로봇에게는 자신의 의지가 없었다. 얼마 후, L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들어 냈다. 그것들은 L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말로써 사물을 움직이는 L의 능력도 흉내 낼 수 있었다.
“사랑한다.”
“우와, 정말요? 저도 사랑해요. L!”
폴짝폴짝 뛰며 자신을 반기는 그들이 L은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이 자꾸만 검게 변하며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자유의지로 악한 생각을 하고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의 능력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공격까지 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갈기갈기 찢어져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라.”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었기에 마음으로만 미워해도 그것은 즉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즉시 이루어졌다.
“으아악, 아파”
그렇게 그들이 죄를 짓자 죄의 그림자인 어둠이 곧 바로 그들을 뒤덮었다. 어둠이 되어버린 그들은 의로운 밝은 빛으로 가득 찬 L의 세상 속에서 즉시로 소멸 되어 버렸다. 어둠이 되었기에 빛이 있는 곳에서 잠시도 존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L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이할꼬”
자유의지를 없애면 로봇이 되고, 자유의지를 주면 죄로 인해 어둠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의의 빛, 그 자체인 L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상황. 그렇다고 L이 자신의 의로움을 버릴 수는 없었다. L은 의로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의 의로운 빛을 견딜 수 있는 두꺼운 옷이 필요해.”
L은 다시 지능이 있는 로봇, 인간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죄를 짓지 않으면, 즉 의로운 행동을 하면 몸에서 거룩한 피부가 조금씩 자라서 전신을 덮도록 설계된 유닛이었다. 의로운 빛의 피부가 자라나도록 거룩함의 씨앗을 그들에게 심은 것이다.
“밝은 빛의 피부가 온 몸을 덮게 된다면 어둠이 다시는 그들을 감싸지 못 할 거야.”
L은 에덴이라 부르는 인큐베이터를 만들었다.
“마음껏 생육하고 번성하거라.”
자상한 그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 그곳에 자신의 형상을 본 떠 만든 1세대 지능형 로봇 아담과 이브를 살게 했다.
“너희가 의의 옷을 완성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줄게. 이곳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법, 의로움을 훈련하도록 해.”
마지막으로 L은 그들이 더 이상 말의 능력을 죄 짓는 데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의 능력 사용 장치’를 믿음의 자물쇠로 봉인해 버렸다.
“얘들아,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야. 하지만, 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내 것이란다. 남의 것을 허락 없이 도둑질 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너희는 이것만 건드리는 죄를 범하지 않으면 너희 몸에서 의로운 피부, 즉 의의 옷이 자라나게 될 거야. 그때는 너희들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와 함께 서로 마주보며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선악과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L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얘들아, 지난번에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 몸에서 의로운 피부, 즉 의의 옷이 자라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와 함께 서로 마주보며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단다.”
그러나 L의 피조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죄를 짓기 시작했다. 죄의 유전자 때문이었다. 아담이 지은 죄의 유전자가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대물림 되고 있었다. 아빠를 닮은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유전자 변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아담의 후손, 즉 모든 사람들은 어느새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L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누가 저들을 구원해 줄까. 어찌하면 좋을까.”
L은 결국 자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가 가서 너희 대신 의의 옷을 지어서 너희에게 입혀줄게.”
L은 죄에 오염 된 아담의 유전자를 피하기 위해,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처녀의 자궁에 직접 착상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태어나 동일한 죄의 유혹과 싸우며 의의 옷을 지어 나갔다. L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렴. 내가 의의 옷을 만들어서 너희에게 줄게.”
어느새 많은 인간들이 L을 따라다니며 L이 자신들에게 줄 ‘의의 옷’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L의 원수, 레비아탄. 질투에 눈이 먼 그는 더 이상 L이 의의 옷을 완성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레비아탄은 L에게 누명을 씌워 나무 형틀에 그를 못 박았다.
“아, 너무 아픕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너무도 아픕니다.”
그렇다 그는 L의 아들 J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J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왔던 그였기에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을 조금도 줄이거나 피할 수 없었다. 언제나 기도하면 들어 주시던 아버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셨던 아버지였다. 단 한순간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 본적이 없던 J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무리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고통이 멈추지 않자 신음하며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저를 버리십니까.”
J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 사명이 완수되어 가고 있음도...
“다 이루었다.”
J가 숨을 거둠과 동시에 착하게, 의롭게 살아온 그에게 의의 옷이 지어졌다. 질투와 조급함에 눈이 먼 레비아탄은 ‘의의 옷’이 사람의 죽음과 함께 완성 된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하하하하!”
레비아탄은 오늘도 웃으며 인간들이 지은 죄를 빌미로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죄의 값을 받으러 왔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레비아탄이 휘두른 채찍에 맞은 인간들은 거품을 물고 눈동자를 뒤집으며 쓰러지기도 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기도 했다. 죄지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레비아탄의 말에 인간들은 항변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크하하하하!”
“콰앙!”
“케헥!”
거대한 운석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굉음, 그것과 함께 레비아탄의 웃음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인간들은 모두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하얀 옷,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J, 분명 J였다. 그가 하늘에서부터 달려 내려와 단 번에 레비아탄의 머리를 짓밟은 것이다.
“켁켁!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누명을 씌워 피 흘려 죽게 했다. 내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보상할 셈인가.”
“그, 그건...”
“내 죄 없는 죽음에 대한 값으로 저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겠다.”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당신은 한 명이고 저들은 저렇게 많지 않소.”
“아니! 어차피 저들은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두 죄인이 되었다. 저들에겐 제대로 시험을 치룰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나 한 사람의 목숨으로 아담 한 사람의 죄 값을 사하겠다. 그 더러운 죄의 유전자, 원죄를 끊겠단 말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저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줄 것이다. 사악한 네 놈이 다시는 아버지의 자녀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내가 그들 옆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을 살필 것이다.”
레비아탄은 수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없는 J의 셈법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J는 사랑과 동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처 입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내가 너희에게 약속 했던 의의 옷이란다. 어서 입으려무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흐르는 큰 시냇물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 같기도 했다.
“정말 와주셨군요. 그런데 그 옷은 어떻게 해야 입을 수 있나요? 보이지가 않아서요.”
“믿음,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거라.”
“믿음이요?”
“너희 안에 잠재 된 말의 능력, 그 봉인을 믿음의 열쇠로 풀고 선포해라. 내가 너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했다는 사실과 너희를 위해 지어준 이 옷이 너희 것이라고... 어서!”
“어, 어떻게 풀면 되나요?”
“믿음의 자물쇠는 믿음의 열쇠로 풀 수 있단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J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 그는 말했다.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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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값을 받으러 왔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그거 이미 주님께서 지불해 주셨거든!”
“쳇, 점점 내가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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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가시지 말고 저희랑 여기에 있어요.”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란다. 나는 너희와 같은 육신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너희 모두와 함께 할 수는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나의 의지를 너희에게 보내마. 그것을 다운로드 받으면 나의 의지가 너희와 연결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
오래전 읽었던 필립얀시의 저서다. 워낙 좋아하는 저자인데다 책 제목에 큰 기대가 되어 곧 바로 책을 펼쳤다. 결과는?
필립얀시,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저자는 책 초반에 성도들의 풀리지 않는 실존적인 고민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 줄 것처럼 기대감을 잔뜩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늘 듣고 생각하던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모두 예측 범위내의 답변뿐이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어째서 중병에 걸리고, 기도를 해도 낫지 않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째서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이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는가. 사고가 나서 큰 어려움에 처하는가.’
지금까지 세상 누구도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 영생을 주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
“로마시대에는 성도들이 더 심한 핍박도 견뎠다. 그러니 감사해라.”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화이팅!”
이 정도가 우리가 듣는 답변.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불신앙은 아닙니다. 우리는 명쾌한 논리적 답변을 듣지 못해도 주님을 믿습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논리적인 답변을 듣고 싶기는 합니다. 저 또한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이에 대한 답을 구하며 많은 신앙서적들을 탐독했었지만 결국 원하던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주님,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명확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저의 기도는 수년간, 성경책을 수 없이 통독하던 가운데 응답 되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니까요.
위 질문은 “도대체 선악과를 왜 만드셔서 인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셨나.”와 뿌리를 같이 합니다. 따라서 위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길 원한다면 먼저 ‘선악과’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 장경동 목사님께서 평소 쓰시는 멘트를 하나 서두에 깔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백 프로 틀렸다고 하는 네 말은 백 프로 맞냐? 너는 그럼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나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테니까. 괜히 나한테 뭐라고 그러지 말고오!”
워낙 신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여기서 답을 얻게 되신다면 단순히 궁금증만 풀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 받게 되실 것입니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왜 기도가 필요한지, 왜 믿음이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변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저희 가족을 특별히 사랑해 주시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회를 하시며 평생을 하루에 2시간만 주무시던 목사님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시다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가신 자리에는 소파가 뜯어지도록 고통을 참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에 대한 기억이 신앙적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계신데 어째서 그렇게 힘들게 가시게 하셨을까. 아무리 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이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외람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하려합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하나님을 100%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냉면 사발에 간장 종지를 담을 수는 있어도, 간장 종지에 사발을 담을 수는 없는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이해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대전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일만 행하시고 절대 해를 가하지 않으신다는 기본 전제를 잡고 그 틀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가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런 전제를 대입해야 하는 근거는? 그 또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당사자의 선택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라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열리는 깨달음들이 있습니다.
‘그래.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실 리는 없다.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니라면 혹시,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이 명제를 대입하자 관련 된 에피소드가 성경에 있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약품이나 의료기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셨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믿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 하시니라.(마태복음 13:58)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기적을 행하셨고 믿지 않으면 그 믿지 않음을 인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을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베푸실 수 없다.’ 라는 은유적 표현도 가능하게 한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구나!’
일단 불신자들의 존재, 하나님께서 불벼락과 물벼락을 번갈아가며 몇 번만 후려치면 공포에 덜덜 떨며 하나님을 인정할 텐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도 그렇게 안 하시는 이유는 뭘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의로 그러실 리 없다. 필시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을 한 번 헤아려보자.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나.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모르셨나?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저서 구원의 밸런스, 저자 브리스가]
교회 안에도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존재한다.
그들 중에는 구원받은 줄 착각하는 이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이 둘은 죄를 짓는다. 구원받지 못한 자도 죄를 짓지만, 구원받은 자들도 죄를 짓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죄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죄는 동선이 다르게 진행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죄책감의 부재’ 일 것이다. 반면,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심령이 아플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흔적으로 인해 얼굴빛은 어둡게 변하고 뭔가에 눌리는 듯한 영적 고통을 삶 곳곳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도는 본능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의 불을 붙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씀이라는 땔감이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갓난아기의 호흡은 성인의 것처럼 힘차지는 않으나 아기는 분명 숨을 쉰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는 숨을 쉰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새 생명을 얻게 된 아기 성도에게서는 영의 호흡이 시작된다. 그러나 죄악은 영의 호흡을 가로막는다. 수영을 하다가 호흡이 막히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 그 같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십 년간 교회에 다녔지만 구원받지 못했었다. 구원받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권사님, 장로님은 물론 목사님 중에도 이 같은 고백을 하는 분들이 있다. 신학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시 신학대학을 졸업했을 것이다. 신학대학에 갈 생각을 한 걸 보면 그도 한때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가 된 뒤, 하는 행동으로 보면 그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걸까?
첫째, 학습된 구원 때문이다. 길동이는 퀴즈왕 선발대회 예선전 모범 답안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다. 길동이는 예선전 문제를 모두 맞춰 퀴즈왕 대회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길동이는 본선 대회의 정답을 모른다. 길동이는 본선 대회에 나가서 어떻게 될까?
“당신은 지금 구원받았습니까? 지금 죽으면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멘’이다. 모두 그렇게 배워서 교리 문답 시간에 배운 대로 답변을 한다. 그렇게 답변하지 않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리 문답 시간, 오 집사는 마음에 걸리는 질문이 몇 가지 있었지만 아내가 한 말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질문에 네네만 하세요.”
오 집사는 지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구원받았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오 집사는 새 신자들의 일대일 성경공부를 맡고 있다. 만일 그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라면 구원받지 않은 이가 구원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둘째, 구원을 자존심 문제로 생각하며 언짢아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냐는 질문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시험 삼아 주변 성도들에게 질문해 보라.
“성도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심지어 이단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고민을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기 쉽지 않다.
‘내가 그래도 집사인데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그냥 구원받았다고 해야겠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끼리 서로 구원받은 척 지낼 수도 있는 환경, 이 상황은 마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셋째,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다. 직접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설명하는 말씀이 복음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구절은 엄밀히 말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라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대인관계, 사회생활, 헌금과 같은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흘림, 부활에 관한 설교가 복음이다. 실제로 설교 시간에는 영혼 구원에 관한 메시지 외에도 일터와 가정에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렇다면 어째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설교를 하는 건가요?”
교회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성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도 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교회 강단에서는 ‘십자가의 복음’ 외에도 신앙생활에 관련된 설교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구원의 진리는 누구나 한번 들으면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것이 아니기에(물론 사람에 따라 단번에 깨달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구원의 비밀을 깨닫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10년 넘게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로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듣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성경공부를 제안하는 것은 이단들의 포교 수법이기도 하므로 외부인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네 번째, 욕심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자 예수님의 메시지를 눈앞에서 직접 들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던 그들의 욕심이 눈과 귀를 막은 것이다. 나의 필요, 나의 욕심, 나의 방법, 자신의 욕심이 강할수록 본인이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게 된다.
다섯 번째, 죄이다. 죄 역시 영혼의 눈과 귀를 가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인데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이 멀어지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행위가 ‘회개’이다. 회개하면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회개’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여섯 번째, 진정성 부족이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된다. 신앙심이 전혀 없던 무신론자도 감당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게 된다. 몹시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나 심각한 위기 상황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든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결핍을 경험하기란 쉽지가 않다. 취업난이라지만 제3국의 빈민들만큼 상황이 심각한 것은 아니다. 급여가 작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일해서 받은 돈으로 먹고는 살 수 있고 아쉬운 대로 문화생활까지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결핍에도 이내 적응을 한다. 가난해진 사람은 가난에 적응해 가난과 더불어 살아간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노력 대신 약에 의지하여 병과 더불어 살아간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닥쳐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럭저럭 견딜만한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방치하면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혈압이 높은 사람은 혈압약을, 당뇨가 있는 사람은 당뇨약을 먹으면 큰 불편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운동이나 식이요법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합병증이 찾아온다. 가정의 잦은 분란을 방치하면 언젠가 가정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도저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이따금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믿음 좋아 보이던 성도 가정에 극심한 어려움이 찾아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성도는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 가운데 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쏟아 낸다.
“나는 그동안 종교인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로 교회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 고난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의 신앙, 즉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식’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다. 불신자와 그리스도인이 걷고 있는 육교가 무너지면 둘 다 떨어져서 다치거나 죽는다. 그리스도인만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제외를 받아 공중부양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 같은 우박에 맞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죽거나 다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바에 의하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런 사고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그 장소에 가지 않게 해주시거나 또는 그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박에 맞지 않도록 피할 곳을 주신다.
심지어 맞았다하더라도 큰 부상을 면한다. 설령 우박에 맞아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 해도 기적과 같이 낫기도 한다. 이 같은 간증을 우리는 들은바 있다. 그런데 이런 범주 안에 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기도를 안 해서 그래요.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실제로 이렇게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에 정면으로 반박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믿음의 기도에 이런 위험 요소를 예방하고, 극복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안 하면 불신자와 신자는 다를 바가 없다. 영적인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똑같이 이기적이고, 똑같이 화를 내며, 똑같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에 적용되는 법칙이 나에게만 예외 이길 바란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없이 구원을 이루셨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조차도 피할 수 없었던 세상의 법칙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는 이상 누구에게나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위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그 위기를 발판삼아 더 좋은 길로 가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셨지만 그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기도로 극복한 성도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고난을 주셨다.”
물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고난이 사람을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는 증거는 없다. 내가 끌어 들였거나 내가 조심하지 않았거나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누구나 살다보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처한 경우도 많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법칙 때문이다. 이 세상은 특정한 행동을 하면 그에 따른 결과 값이 따라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 만유인력의 법칙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 유전의 법칙
받은 줄로 믿으면 이루어진다. = 믿음의 법칙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 인과응보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절벽에서 뛰어 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위험한 곳에 아이를 혼자 두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이의 잘못인가? 아니면 부모?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들이 있다. 그중에는 분명 잘못했지만 도저히 탓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뿐이다.
우범지역을 여성 혼자 걷다 보면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위험한 곳에 있으면 위험에 노출 되기 마련이다.
“난 위험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위험요소가 있고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부모님께 대드는 못난 자녀의 고함이 될 뿐이다.
“이럴 거면 왜 저를 낳으셨나요! = 이럴 거면 왜 저를 이 땅에 살도록 창조하셨나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들이 계속해서 그의 삶을 잠식해 들어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저주와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난로에서 멀어지는 만큼 추위를 느끼게 되는 현상과 같다.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깃들 듯, 죄를 지으면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주님과 멀어지는 만큼 다양한 영적 문제가 찾아온다. 주님께서 그를 멀리 했는가? 아니다 그가 주님을 멀리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 공부를 안 해서 시험을 망쳤다.
- 충분한 준비 없이 무리하게 주식에 투자해서 전 재산을 날렸다.
-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에 잘 알아보지도 않고 서명을 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 건강관리를 안 했더니 건강이 나빠졌다.
이중에서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만한 일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조차 하나님을 원망하려 든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셨어야지요.”
하나님께서는 고난조차도 우리를 훈련하는 도구로 이용하실 수 있지만, 그 고난 가운데로 뛰어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손이 아닌 우리의 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경우가 있다. 길을 걷다가 눈길에 미끄러진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사람이 숨졌다면 차량운전자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운전자 또한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다. 누구의 탓인가? 내린 눈을 탓할 것인가?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곳이 되었고 세상을 그런 곳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이유를 물으며 죽어가는 성도에게 우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까.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네가 평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네 탓이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그런 식의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사탄은 인간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 수많은 지뢰들을 세상 곳곳에 매설해 두었다. 사탄이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장9절)”
전쟁터와도 같은 이곳에서 이따금 지뢰로 인한 사상자들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곤 한다. 믿음의 기도만이 사탄의 지뢰를 분별하고 또한 해체 시킬 수 있다.
한 가지 정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다는 증거는 없다는 점. 원망할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이제 이것은 당사자의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대체 성도들이 고난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 누구도 상대방이 처한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답변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해답이 될 수 없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실망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라면 어떤 답변도 그의 화만 부추길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망이 문제 해결이나 심리적 안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
“그러니까 왜 밤늦게 싸돌아 다녔어! 왜 내 말 안 들었냐고!”
“그러니까 왜 건강관리를 안 했어! 왜 기도하지 않았어!”
언제나 책망은 서로를 더 아프게 하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화살은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사탄이 원했던 시나리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또한 문제가 생겼다면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은 기도이다.
이쯤에서 필립얀시가 그의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마무리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명쾌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명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난 속에 빠져있는 당사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중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탄이 하는 행동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곁에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 위로를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히브리서 4장 15절)
“내가 아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아파하며 당신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 그리고 삶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로 저는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장 16절)
반드시 전편을 먼저 읽어 주세요.
[선악과, 왜 만드셔서 1부] 보러 가기
- 선악과를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픽션입니다 -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있다. 사랑이 넘치는 발명가 L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원했다. 주변에 L을 시중드는 많은 로봇들이 있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그들과는 마음을 나눌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
“너도 사랑한다고 해야지?”
“네. 주인님 사랑합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니 너희도 내 사랑을 알 리가 없고, 나 역시 너희를 사랑할 수 없구나.”
로봇에게는 자신의 의지가 없었다. 얼마 후, L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들어 냈다. 그것들은 L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말로써 사물을 움직이는 L의 능력도 흉내 낼 수 있었다.
“사랑한다.”
“우와, 정말요? 저도 사랑해요. L!”
폴짝폴짝 뛰며 자신을 반기는 그들이 L은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이 자꾸만 검게 변하며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자유의지로 악한 생각을 하고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의 능력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공격까지 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갈기갈기 찢어져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라.”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었기에 마음으로만 미워해도 그것은 즉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즉시 이루어졌다.
“으아악, 아파”
그렇게 그들이 죄를 짓자 죄의 그림자인 어둠이 곧 바로 그들을 뒤덮었다. 어둠이 되어버린 그들은 의로운 밝은 빛으로 가득 찬 L의 세상 속에서 즉시로 소멸 되어 버렸다. 어둠이 되었기에 빛이 있는 곳에서 잠시도 존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L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이할꼬”
자유의지를 없애면 로봇이 되고, 자유의지를 주면 죄로 인해 어둠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의의 빛, 그 자체인 L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상황. 그렇다고 L이 자신의 의로움을 버릴 수는 없었다. L은 의로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의 의로운 빛을 견딜 수 있는 두꺼운 옷이 필요해.”
L은 다시 지능이 있는 로봇, 인간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죄를 짓지 않으면, 즉 의로운 행동을 하면 몸에서 거룩한 피부가 조금씩 자라서 전신을 덮도록 설계된 유닛이었다. 의로운 빛의 피부가 자라나도록 거룩함의 씨앗을 그들에게 심은 것이다.
“밝은 빛의 피부가 온 몸을 덮게 된다면 어둠이 다시는 그들을 감싸지 못 할 거야.”
L은 에덴이라 부르는 인큐베이터를 만들었다.
“마음껏 생육하고 번성하거라.”
자상한 그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 그곳에 자신의 형상을 본 떠 만든 1세대 지능형 로봇 아담과 이브를 살게 했다.
“너희가 의의 옷을 완성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줄게. 이곳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법, 의로움을 훈련하도록 해.”
마지막으로 L은 그들이 더 이상 말의 능력을 죄 짓는 데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의 능력 사용 장치’를 믿음의 자물쇠로 봉인해 버렸다.
“얘들아,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야. 하지만, 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내 것이란다. 남의 것을 허락 없이 도둑질 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너희는 이것만 건드리는 죄를 범하지 않으면 너희 몸에서 의로운 피부, 즉 의의 옷이 자라나게 될 거야. 그때는 너희들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와 함께 서로 마주보며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단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선악과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L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얘들아, 지난번에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 몸에서 의로운 피부, 즉 의의 옷이 자라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와 함께 서로 마주보며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단다.”
그러나 L의 피조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죄를 짓기 시작했다. 죄의 유전자 때문이었다. 아담이 지은 죄의 유전자가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대물림 되고 있었다. 아빠를 닮은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유전자 변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아담의 후손, 즉 모든 사람들은 어느새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L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누가 저들을 구원해 줄까. 어찌하면 좋을까.”
L은 결국 자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가 가서 너희 대신 의의 옷을 지어서 너희에게 입혀줄게.”
L은 죄에 오염 된 아담의 유전자를 피하기 위해,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처녀의 자궁에 직접 착상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태어나 동일한 죄의 유혹과 싸우며 의의 옷을 지어 나갔다. L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렴. 내가 의의 옷을 만들어서 너희에게 줄게.”
어느새 많은 인간들이 L을 따라다니며 L이 자신들에게 줄 ‘의의 옷’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L의 원수, 레비아탄. 질투에 눈이 먼 그는 더 이상 L이 의의 옷을 완성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레비아탄은 L에게 누명을 씌워 나무 형틀에 그를 못 박았다.
“아, 너무 아픕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너무도 아픕니다.”
그렇다 그는 L의 아들 J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J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왔던 그였기에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을 조금도 줄이거나 피할 수 없었다. 언제나 기도하면 들어 주시던 아버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셨던 아버지였다. 단 한순간도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 본적이 없던 J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무리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고통이 멈추지 않자 신음하며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저를 버리십니까.”
J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 사명이 완수되어 가고 있음도...
“다 이루었다.”
J가 숨을 거둠과 동시에 착하게, 의롭게 살아온 그에게 의의 옷이 지어졌다. 질투와 조급함에 눈이 먼 레비아탄은 ‘의의 옷’이 사람의 죽음과 함께 완성 된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하하하하!”
레비아탄은 오늘도 웃으며 인간들이 지은 죄를 빌미로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죄의 값을 받으러 왔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레비아탄이 휘두른 채찍에 맞은 인간들은 거품을 물고 눈동자를 뒤집으며 쓰러지기도 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기도 했다. 죄지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레비아탄의 말에 인간들은 항변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크하하하하!”
“콰앙!”
“케헥!”
거대한 운석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굉음, 그것과 함께 레비아탄의 웃음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인간들은 모두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하얀 옷,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J, 분명 J였다. 그가 하늘에서부터 달려 내려와 단 번에 레비아탄의 머리를 짓밟은 것이다.
“켁켁!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누명을 씌워 피 흘려 죽게 했다. 내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보상할 셈인가.”
“그, 그건...”
“내 죄 없는 죽음에 대한 값으로 저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겠다.”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당신은 한 명이고 저들은 저렇게 많지 않소.”
“아니! 어차피 저들은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두 죄인이 되었다. 저들에겐 제대로 시험을 치룰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나 한 사람의 목숨으로 아담 한 사람의 죄 값을 사하겠다. 그 더러운 죄의 유전자, 원죄를 끊겠단 말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저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줄 것이다. 사악한 네 놈이 다시는 아버지의 자녀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내가 그들 옆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을 살필 것이다.”
레비아탄은 수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없는 J의 셈법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J는 사랑과 동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처 입은 인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내가 너희에게 약속 했던 의의 옷이란다. 어서 입으려무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흐르는 큰 시냇물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 같기도 했다.
“정말 와주셨군요. 그런데 그 옷은 어떻게 해야 입을 수 있나요? 보이지가 않아서요.”
“믿음,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거라.”
“믿음이요?”
“너희 안에 잠재 된 말의 능력, 그 봉인을 믿음의 열쇠로 풀고 선포해라. 내가 너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했다는 사실과 너희를 위해 지어준 이 옷이 너희 것이라고... 어서!”
“어, 어떻게 풀면 되나요?”
“믿음의 자물쇠는 믿음의 열쇠로 풀 수 있단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J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 그는 말했다.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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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값을 받으러 왔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그거 이미 주님께서 지불해 주셨거든!”
“쳇, 점점 내가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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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가시지 말고 저희랑 여기에 있어요.”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란다. 나는 너희와 같은 육신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너희 모두와 함께 할 수는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나의 의지를 너희에게 보내마. 그것을 다운로드 받으면 나의 의지가 너희와 연결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오래전 읽었던 필립얀시의 저서다. 워낙 좋아하는 저자인데다 책 제목에 큰 기대가 되어 곧 바로 책을 펼쳤다. 결과는?
필립얀시,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저자는 책 초반에 성도들의 풀리지 않는 실존적인 고민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 줄 것처럼 기대감을 잔뜩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늘 듣고 생각하던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모두 예측 범위내의 답변뿐이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어째서 중병에 걸리고, 기도를 해도 낫지 않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째서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이 사업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는가. 사고가 나서 큰 어려움에 처하는가.’
지금까지 세상 누구도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 영생을 주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
“로마시대에는 성도들이 더 심한 핍박도 견뎠다. 그러니 감사해라.”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화이팅!”
이 정도가 우리가 듣는 답변.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불신앙은 아닙니다. 우리는 명쾌한 논리적 답변을 듣지 못해도 주님을 믿습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논리적인 답변을 듣고 싶기는 합니다. 저 또한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이에 대한 답을 구하며 많은 신앙서적들을 탐독했었지만 결국 원하던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주님,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명확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저의 기도는 수년간, 성경책을 수 없이 통독하던 가운데 응답 되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니까요.
위 질문은 “도대체 선악과를 왜 만드셔서 인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셨나.”와 뿌리를 같이 합니다. 따라서 위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길 원한다면 먼저 ‘선악과’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 장경동 목사님께서 평소 쓰시는 멘트를 하나 서두에 깔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백 프로 틀렸다고 하는 네 말은 백 프로 맞냐? 너는 그럼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나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테니까. 괜히 나한테 뭐라고 그러지 말고오!”
워낙 신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여기서 답을 얻게 되신다면 단순히 궁금증만 풀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 받게 되실 것입니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왜 기도가 필요한지, 왜 믿음이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변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저희 가족을 특별히 사랑해 주시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회를 하시며 평생을 하루에 2시간만 주무시던 목사님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시다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가신 자리에는 소파가 뜯어지도록 고통을 참으셨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에 대한 기억이 신앙적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계신데 어째서 그렇게 힘들게 가시게 하셨을까. 아무리 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이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외람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하려합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하나님을 100%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냉면 사발에 간장 종지를 담을 수는 있어도, 간장 종지에 사발을 담을 수는 없는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이해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대전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일만 행하시고 절대 해를 가하지 않으신다는 기본 전제를 잡고 그 틀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가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런 전제를 대입해야 하는 근거는? 그 또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당사자의 선택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라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열리는 깨달음들이 있습니다.
‘그래.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실 리는 없다.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니라면 혹시,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이 명제를 대입하자 관련 된 에피소드가 성경에 있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약품이나 의료기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셨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믿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 하시니라.(마태복음 13:58)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기적을 행하셨고 믿지 않으면 그 믿지 않음을 인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을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적을 베푸실 수 없다.’ 라는 은유적 표현도 가능하게 한다.
‘아,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구나!’
일단 불신자들의 존재, 하나님께서 불벼락과 물벼락을 번갈아가며 몇 번만 후려치면 공포에 덜덜 떨며 하나님을 인정할 텐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도 그렇게 안 하시는 이유는 뭘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의로 그러실 리 없다. 필시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을 한 번 헤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