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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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31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는 이유는, 쫓아내는 자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쫓아낸 귀신이 다시 들어오는 이유는, 당사자 안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없으면 되돌아온 귀신의 인테리어가 시작된다. 다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용역까지 부른다.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4~26)


그러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본인이 직접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영접 기도문까지 했는데도 자꾸 귀신이 들어갑니다.”


이는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계속 나쁜 생각을 하며 죄를 짓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사람들은 걱정, 근심 등 사탄이 좋아할 만한 생각을 하곤 한다. 생각이 넘치면 행동이 유발되기 시작한다.


미듐 사이즈 : 음란의 영에 사로잡혀 음란한 생각

라지 사이즈 : 음란의 영에 사로잡혀 음란한 행동


본질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악한 영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은 크게 영(靈)과 육(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을 관장하는 뇌는 ‘육’에 해당한다. 뇌 안에, 사탄이 인테리어 재료로 쓰기 좋은 악한 생각과 정보들만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지간한 설교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견고한 사탄의 방어선이 구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뇌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야 한다. 예수님은 곧 ‘말씀’이다. (요 1;1)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포도주인데, 이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씀한다. 또한, 자신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한다. (요 6:53,56)


뇌에 말씀의 비중이 100%에 달한 분이 예수님이다. 영은 이미 하나님 그 자체시다. 우리 또한, 영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말씀만 많이 먹으면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된다.


능력도 얼추 비슷하게 나타난다.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한 유형의 능력들이 삶에 나타나게 된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기도 응답도 받게 된다. 말씀의 비중이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면 악한 영은 얼씬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읽고 듣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뿌려 놓으면 그 씨앗은 어느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사탄의 진을 부수기 시작한다.


말씀 비중이 더욱 높아지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인격이 되어 ‘그것은 위험해!’, ‘이것이 축복의 길이라’고 알려 주신다. 그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인 동시에 전혀 다른 ‘나’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필자 또한 영적 체험을 사모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말씀 충만’을 권한다. 성령체험, 이를테면 데굴데굴 구르거나 쓰러져서 환상을 보는 등의 체험은 너무도 귀한 것이지만 그런 상태로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어떤 강렬한 체험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 느꼈던 크기만큼 강력한 동기부여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방언 등 성령체험을 한 성도 중 상당수가 당시의 감격을 잊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영적 수면 상태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전능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는 증표이다. 축사는 예수의 이름에 ‘이만큼 큰 권세가 있으니 너도 해 보라’는 시범의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삶에서 부딪히며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성화에 필요한 깨달음을 얻길 원하신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나서서 해주실 거였다면 ‘자유의지’를 주셨을 리가 없다.


아무리 큰 성령체험을 했어도 결국 우리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써야 하는 것은 우리의 뇌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에 ‘말씀’을 심는 것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타인의 설교보다는 직접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을 추천한다. 타인이 만난 하나님 얘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직접 만나는 것이 좋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과의 만남과 흡사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어색한 사람도 있고 지루한 사람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계속 만나다 보면 정이 들고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라면 나의 삶에 좋은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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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지인을 따라 축사를 주력으로 하는 집회에 참석했던 청년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못가! 내가 이 팔을 조사 놓을 거야. 암 걸리게 할 거야. 다리를 못 쓰게 할 거야.”

 

그날 청년과 지인 모두 귀신이 쫓겨 나가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청년은 평소 아팠던 팔다리 통증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몇 주 후, 자연스럽게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청년은 가족력으로 ‘암’이 있었으며 병원에서 염증 수치가 너무 높아서 암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필자는, 청년에게 축사 기도를 해주셨던 교회에 50만원의 헌금을 송금해 드렸다. 그리고 괄사와 부항, 티침 사용법과 ‘발목 펌프운동’, 증상에 도움이 될만한 스트레칭 방법을 알려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내 주며 부연 설명을 했다.

 

당시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았던 청년을 위해, 교회를 통해 코스트코에서 주문한 채소와 과일을 매주 10만원 어치씩 주문해서 10번을 보내드렸다. 더불어 필요한 영양제들을 보내드렸다. 그리고 말씀을 기반으로 삶을 살아가는 정보를 나누었다.

 

“염증 등 면역 질환은 스트레스와 상관관계가 있다. 혈기는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이 있는데, 예민해서 스트레스 받는 성격도 혈기의 일종이다. 타인에게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혈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온유해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혈기가 우리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과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온유하지 않으면 사업도 건강도 인간관계도 엉망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상태로 어떻게 복을 받겠는가?”

 

“사실 희노애락의 감정은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장난이다. 그러니까 내 성격만을 탓할 게 아니라 좋은 호르몬이 분비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체력이 약하고 영양 상태가 안 좋으면 더욱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니 운동과 영양 관리를 잘해야 한다.”

 

필자의 멘토링 방식은 오로지 말(말씀)에 의지해서 진행된다. 상대방에게 '들을 귀'와 '행함이 있는 믿음'만 있다면 미국, 일본, 호주, 국내 외 어느 곳에 있든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청년은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예민함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근본적 ‘성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청년의 염증 수치는 정상을 찾았고 잠을 못 이루게 하던 통증도 사라졌다. 모든 대출을 갚고 억대 연봉자가 되어 밸류체인에서 함께 하고 있다.

 

축사하는 교회로 인도했던 청년의 지인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매주 마다 축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금요일 밤, 귀신을 쫓아내도 다음 주면 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말씀충만을 기반으로 하는 축사는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준다. 본인이 괴성을 지르며 괴기스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상상해 보라. 인격이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시는 축사의 방식은 완벽하고 젠틀하다. 

 

말씀은 인간의 상식과 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삶의 문제와 직접 싸울 수 있도록 동기부여와 정보를 제공하시는 지혜로운 동반자시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우리의 삶에 뛰어드시는 든든한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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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금식기도하고 연락 주겠다더니 기껏 그녀의 지난 허물을 캐온 건가요?”


허탈한 표정으로 수빈이 말을 이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려 한다면, 그녀는 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잘못을 했고, 나와 직접 대화를 해보고 나를 알게 된 뒤로는 단 한 번도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알면서도 계속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고의였으며 반복적이었습니다. ‘안 그러겠다’고 하고 또 하고, 몰래 하고 크리스천이라면 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었습니다. 나는 내 주변에서 그대와 같은 행동을 하는 크리스천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영의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국희는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독백과도 같은 수빈의 말이 국희를 향했다.

 

“만남 초기부터 성인의 것이라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거짓말들이 있었으나 저는 이것을 그대의 ‘아픈 면’이라 생각하고 모른 척 덮어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로 만남을 주선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게 하는 행동은 이미 크리스천의 것을 넘어섰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혈기도 부릴 수 있고 속이 상하면 험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은 모든 면에서 선을 넘었습니다." 

 

"직분자의 자리에서 성도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서로 미워하며 반목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일 리 없습니다. 그간의 일들로 미루어 국희님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고 앞으로 또 어떤 성도님에게 해를 끼칠지 우려가 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저기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려 왔었습니다. 그간, 일부러 듣지 않았던 당신에 관한 문자와 음성 파일들을 전부 요청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지체들에게 화를 내는 음성은 크리스천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크리스천을 본 적이 없습니다.”


 

수빈의 스마트 폰 화면에는 국희에 대한 성도들의 제보가 띄워져 있었다.


- 조심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기도 한데...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국희님은... 대놓고 수빈 선교사님을 험담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욕할만한 상황들을 열거하는 편이라고 말하는게 더 맞습니다. 사역에 굉장히 많은 부분,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는 것처럼, 사역을 많이 돕는 것처럼 보여지게 말하고...

 

호감 사게 잘해주며 시작하는데 중간중간 거짓된 양념으로 다른 사람 욕을하며 내부를 결속하는 형식이 되지요 -

 


파도조차 없는 영의 깊은 물 속은 더욱 음산해 보였다.

 

"눈앞에 있었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구했을 거라’고 저에게 말했던 날, 돌이킨 줄 알았습니다. 1년이 넘도록 아픈 팔을 위해 내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던 날, 주님 앞에 ‘당신의 통증을 내 팔로 옮겨 주시라고, 내가 대신 운동하며 이 통증과 싸우겠다’고 전화기를 붙들고 기도한 그 날, ‘팔의 통증이 나았다’고 당신이 내게 감사를 표했던 날, 이제는 정말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이제 돌이키셔야 합니다. 돌이켜야 참된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대의 지시로 저의 뒷조사를 했던 T 집사님도 삶의 회복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3년을 기다렸고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지기만 합니다. 돌이키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고 지체들에게 사역 설립자를 험담하고 다니는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요?”

 

국희는 여전히 한 손으로 수빈의 발목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1년 정도 이 사역에 힘이 되어 주었고 남은 3년은 나를 어렵게만 했습니다. 하루는 당신에게 화가 나고 또 하루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렇게 3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으로 함께 했던 동역자분들이 반목하는 모습을 보면서 3년여 시간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저는 다투었던 분들이 다시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나 또 어느 사람이나 문제는 있습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용서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적하셨다면 나는 과거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가 여기 모여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 화목하고 용서하라는 주님 말씀에는 순종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2~24)

 

"누구나 말씀을 지키지 못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몇 년이 넘는 세월을 이렇게 미워하며 원수처럼 지낼 수는 없는 겁니다. 게다가 그녀에게 먼저 소리를 지르고 함부로 대한 것도 당신이지 않습니까.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남의 잘못을 그리 들추려 합니까? 이곳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아닙니까? 주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킨다면 저 역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돕겠습니다. 그대의 신학교 등록금을 부담하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먼저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셔야 합니다. 지금껏 제가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에 이렇게 나의 실명과 얼굴까지 걸고 사역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습니까"

 

"성도님은 지금 교회에서 목회자를 괴롭히는 교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돌이키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 그 상태로 3년이 흘렀습니다. 돌이키십시오. 아니면 떠나십시오. 떠났다가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오십시오. 생면 부지의 타인도 도왔는데 함께 했던 분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 있습니까? 속히 떠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익숙한 중저음, 아굴라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의 깊은 물속에 잠긴 국희를 바라보는 브리스가가 있었다.

 

“그녀가 저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놓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나에게 침을 뱉고 사람들에게 사역을 훼방하는 말들을 하고 다닙니다. 저는 아직도 선교를 위해 모금 활동까지 했던 사람과 음지에 숨어서 그 모든 악한 일들을 벌인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를 알리라. (마 7장 20절) 오직 열매로만 분별하십시오.”

“하지만 국희는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열매가 없을 수 있지요?”

 

“기도하는 모습을 직접 보셨는지요?”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어디 상황을 분별해 봅시다. 하루에 몇 시간씩, 몇 년을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직업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거처까지 제공해 주겠다는 사람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 분란을 일으켜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열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거친 언행을 하고 사역 리더를 험담하기까지 합니다. 맡은 사역은 해오지 않고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재촉하면 화를 냅니다. 거짓말도 합니다. 사역을 내려 놓으라고 해도 내려 놓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이 본인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믿건 안 믿건 그건 자매님의 선택입니다.”

 

“설마 오래 기도하는 척, 믿음 좋은 척 그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식을 주의하라. (누가복음 12장 1절)

 

“바리새인들은 믿음 좋은 척 행동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매슬로우의 5단계 기본 욕구 중 자아실현의 욕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간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리새인의 DNA를 가진 자들은 지금도 교회에서 목회자를 괴롭히며 사역을 훼방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믿음 좋은 척 행동합니다. 2천 년이 흐르는 동안 성경도 변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주의 사항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선교를 위한 모금 활동까지 자발적으로 주도했던 분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양신 역사라고 하지요. 처음, 국희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옛 자아를 내려 놓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에게 사로 잡혀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된 것이지요." 



수빈은 국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온갖 죄와 거짓으로 얼룩진 과거의 아이디를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아이디로 주님과 함께 부활하세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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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19세에서 스무 살로 넘어갈 무렵, 싸움으로 경찰서까지 들락거려야 할 정도로 J의 방황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엉망이었다.

 

J는 홀연한 불빛 속에서 잠을 깼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아니 자신과 닮은 형뻘 되는 사람 아니, 아저씨? 아빠인가?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것은 J 자신과 너무도 닮은 사람들의 무리였다.


“누구세요?”

“난 5년 후의 너야.”

“난 10년 후”

“난 20년”

“나는 60년일세.” 

 

J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20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양자 통로는 10분이 한계니 인사는 이쯤하고 빨리 말할게”

“양자 통로?”

“네가 타임머신이라고 알고 있는 그 장치라고 생각하면 돼”

“넌 곧 신학 대학을 가게 될 거야.”

“뭐라고? 내가 신학대를? 미친 거 아냐?”

 

“그리고 넌, 친구 원식이와 함께 인터넷으로 스포츠웨어를 팔아 큰돈을 벌게 될 거야.” 

“내가?”

“하지만 그전에 너는 믿었던 지인에게 속아서 장사에 뛰어 들었다가 고난을 겪게 되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는 그 경험 때문에 사업에 관한한 지인조차 믿지 않고 검토해 보는 습관을 갖게 되니까. 덕분에 평생 사기를 당하지 않지. 그리고 힘들었던 장사 경험 때문에 매장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기도하게 돼. 기도했으니 당연히 응답도 받고...”

“그 기도의 응답이 인터넷 사업이야.”

 

캐주얼 차림의 말끔한 사내가 말했다.

“나는 30세의 너야. 넌 선생님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될 거야.”

“내가? 꼴통 중에서도 꼴통들만 간다는 K공고에서도 꼴등을 한 내가?”


“넌 교육 분야에서 지금의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공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너는 거기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고 약속을 밥 먹듯이 번복하는 악한 사람들 때문에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거야.”

“그리고 보험사에 입사하게 되지.”


수트 차림에 무테안경의 사내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그 악한 사람들을 미리 피하란 말이구나?”

“그럴 필요 없어. 아니 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미래를 살아 본 적이 없거든.” 


“넌 보험사에 입사하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기도를 시작하게 돼. 억대 연봉을 받는 연도 대상자가 되고 억대 연봉자 모임 최고 그레이드를 달성하게 되지. 기도하면 계약이 터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될 것 같던 계약도 깨지는 경험의 반복으로 믿음의 메커니즘을 깨닫게 돼.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신앙 서적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네가 이용당하고 배신당한 경험은, 사람들을 악인들과 각종 리스크로부터 지켜 주는 ㈜밸류체인이라는 회사를 설립하는 초석이 돼. 밸류체인은 네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지적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집약체야.”


“너는 이십 대 중반부터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면, 자신도 성공하게 되는 구조의 사업에 관심을 갖게 돼. 그래서 다단계부터 시작해서 지사장, 총판 등 교육회사 임원까지 맡게 되지. 너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제적인 면에서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게 돼. 그러나 사실상 너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너는 오랜 시간 추구해온 그 꿈을, 보험사에서 억대 연봉사원들을 육성해 내는 것을 끝으로 진저리를 치며 내려놓게 돼.”


“왜지?”

“성장시켜 놓기만 하면 더 좋은 기회를 찾아서 떠나니까. 성공하게 된 뒤 보이는 몇몇 사람의 태도 변화도 한몫했지. 너는 상대방이 무례한 태도를 보이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끊어내. 그리고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주님 앞에 반성하며 괴로워하지.”

 

“하지만 네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너는 곧, 차갑고 냉정한 성격마저 사용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게 될 거야.”

“너는 사람들을, 어제보다 나은 재정과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달란트를 갖게 돼.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에게만 도움이 될 뿐 너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그래서 너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게 돼.”


“제발 이 저주받은 재능을 거두어 주소서. 그저 나의 삶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행히 그 기도는 응답 되지 않아.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러니 무작정 기도해 놓고 응답 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 없어. 네가 충분히 기도한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을 테니까.”

 

“너는 책을 출간하고, 책을 통해 동역자들을 모으게 돼.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밸류체인이 세워져 가지. 너는 밸류체인에서 건축과 투자 등으로, 일하지 않고 버는 큰 수익도 경험하게 되고, 네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주님의 일도 하게 돼.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너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부터 너도 도움을 받는 경험을 하게 돼.”


“그리고 너에게 늘 슬픔을 선사하던 우울증에서도 치유함을 받지. 다시 말해 밸류체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너를 살릴 수 있도록 주신 구원의 통로이자 도피성이야. 그런데 네가 그 시련을 피해버리면 이 모든 미래 설계가 어떻게 흔들릴지 몰라.”

 

“저기 있는 사람들 보이지?”

이젠 누가 누군지 구분하는 것을 포기한 어린 J는 그가 가리키는 홀로그램 장치를 응시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너에게 도움을 받아서 인생을 역전시킨 사람들이야.” 

“내가 저 사람들을?” 

“아니 정확히는 주님이 변화시키셨지. 네가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기도하고 말씀을 읽다 보면 그들의 삶에 주님께서 응답을 주셨으니까.”

 

“하지만 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실망과 좌절을 반복하게 될거야. 네가 하는 사역에서조차 너에게 무례하게 굴며 다른 지체들에게 너를 험담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의 말만 듣고 너를 오해하는 사람도 생길 거야. 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을 거야. 너는 진심으로 호소하겠지만 그들은 잠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거야.”


“그냥 인연을 끊어 버리면 되잖아?”

“안돼!”

모든 J 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들 중에 알곡이 있을 수 있어. 하나님께서 목숨처럼 사랑하는 어린 알곡이 섞여 있을 수 있기에 넌 그들을 네 손으로 찍어 내선 안돼.” 

“하지만 조심해야 해. 사탄이 너를 훼방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쭉정이들을 보낼 거야.”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상대방의 실천 여부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든.”

“그러나 행함이 있는 쭉정이도 있어. 기도하는 척, 말씀 보는 척, 믿음 좋은 척하는 쭉정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


“그걸 내가 분별할 수 있을까?”

“열매를 봐. 쭉정이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열매가 없을 테니까.”

 

“우리는 100세 브리스가의 초대로 함께 모여서 너에게 왔어. 시공간을 연결하는 양자 통로가 그때 발견되거든. 하지만 누구나 그 장치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메시지를 과거로 보내기 위해서는 본인의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거든. 특히 이렇게 자신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믿음의 파장이 필요하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너무 복잡하잖아. 그냥 복권 당첨 번호나 알려줘!”

 

“그러면, 모든 양자 배열이 어긋나 다른 미래가 너에게 올 거야. 아무래도 다른 미래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보다 좋을 것 같지 않은데...”


“너는 깊은 슬픔으로 죽음까지 생각할 만큼 오랜 세월을 보냈고 그것은 어떤 성공이나 재물로도 채워지지 않았지. 나는 어렵게 찾은 지금의 소중한 삶을 복권 당첨 따위와 바꾸고 싶지 않아.”

중저음으로 말하는 또 다른 J였다.

 

“그렇게 최상의 미래를 누리고 있다면 굳이 이렇게 나에게 나타나 말하는 이유는 뭔데?”

“너의 기쁨!”

“하나님께서는 네가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원하시니까.”


“우리는 모두 걱정과 근심 그리고 후회로 얼룩진 삶을 살았어. 옷 장사로 큰돈을 벌 걸 알았다면, 옷 장사를 하기 전에도 그렇게 근심하며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학원으로, 교육사업으로, 보험으로, 건축으로 나중에 돈을 벌 걸 알았다면 하루하루를 근심과 싸우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게 평생을, 근심과 싸우고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살았지”

“그러다가 알곡들을 케어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어.”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사람이 노심초사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 근심 걱정이 삶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모습, 그러다가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 모두 나를 보는 것 같더라.”


“하나님은 너의 작은 신음에 아파하시며 네가 기뻐할 때 함께 즐거워하신단다.”

“우리가 이렇게 너에게 온 것은 앞으로 네가, 너의 모든 삶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길 바라기 때문이야.”

 

“허허허. 이제 마무리 인사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던 푸근한 인상의 노신사였다.


“나는 80년 후의 자넬세. 올해로 100세가 되었다네. 신학 박사로 교회 안의 쭉정이들로부터 알곡 성도를 지키는 방어신학, 4차 산업이라는 키워드로 시작된 IT 세상에 걸맞은 새로운 교회론과 실천 신학 장르를 개척했다네. 잊지 말게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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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허리뼈가 내려앉아서 극심한 요실금 증세가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당신을 아프게 할지 모를 이 메시지를 그래도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성도의 자세가 ‘자신의 죄를 점검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 전, 아래 칼럼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예견되어 있던 고난일지 모릅니다. 


언니의 집을 훔치고, 차를 훔치고 장신구와 귀중품을 훔치면서도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신실한 성도로 봉사하며 지내는, 그래서 스스로가 누구보다 믿음 좋은 성도라 자부하는 당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그것뿐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있는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한쪽 눈이 실명되었고, 남은 한쪽 눈마저 멀어 가는 사람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저 역시 살면서 단 한번도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회개 하라'는 메시지를 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블로그에 수록된 200개가 넘는 칼럼 중에도 오늘과 같은 글은 없습니다. 모든 원망을 뒤집어 쓸 것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당신은, 고난 역시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한복음 11장 5절

 

나사로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임에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나사로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자신의 누이들이 몸을 파는 가련한 삶을 나사로가 방관했다는 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희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내 누이 몸에 손을 대는 인간은 기필코 내가 죽일 것이다.”

 

이렇게 끝까지 누이들을 만류하는 대신 상황을 받아들였던 나사로,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난 후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삶을 살았을지 아니면 여전히 죄를 지으며 죄와 회개 사이를 오가는 삶을 살았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나사로는 막 바로 거룩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니면 오늘날 일부 교인들처럼 주일날은 예배를 드리고 평일 날은 죄악으로 돌아가는 죄와 회개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고난에는 성도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성도를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고난, 잘못 가는 성도를 바로 잡는 고난, 의미는 다르지만 역할은 동일합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나사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한복음 11장4절)

 

하나님께서 나사로에게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죽어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가능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우리 모두는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죄에 대한 완고함이 지나치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허락해서라도 성도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함을 우리는 무수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당신이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단언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잘못했어요. 고쳐 주세요. 엄마, 언니, 미안해요. 고마워요' 이런 고백조차 자유롭게 나오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상대방의 원망스런 모습만 보이며 분노가 솟구친다면 당신은 이미 사탄의 권세 아래 있을 공산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은 당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작동시킨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속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당신은 물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소유까지 함께 빨려 들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은혜의 때에 주님을 찾으십시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 앞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회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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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어쩌면 너무 이른 나이, 호주에 도착한 누리가 머물게 된 곳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아이의 순수함 때문이었을까. 집사님을 따라 매 주일 교회를 다니던 누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자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을 만난 아이는 본능처럼 하나님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은 어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닿지 않는 듯했다. 그런 상황은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천국을 보고 온 성도의 ‘천국 간증’을 접하게 되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뛰는 가슴을 누르며 누리는 천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아, 나도 천국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힘차게 전할 수 있을 텐데…’

누리는 매일 밤, 침대에 엎드려 작은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저에게도 천국을 보여주세요. 하나님을 안 믿는 친구들이랑 가족들에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제가 보고 오면 알려줄 수 있잖아요.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더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잖아요. 하나님, 제게도 천국을 보여주세요.’


그렇게 천국을 소망하며 기도하다 잠들기를 며칠, 아이는 드디어 꿈을 꾸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흐려지지 않을 만큼 선명한 꿈을…




출입문과 마주한 곳에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집사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창문 넘어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마당이었다. 마당 넘어 보이는 지평선 멀리엔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밝은 햇살이 무색할 만큼 짙은 검은색을 발하고 있었다. 아이는 궁금했다.


“집사님, 저기 끝에 보이는 검은 산은 뭐에요?”

“저 산은 지옥이란다.”


지옥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옥은 어떤 곳일까?’


누리는 지옥이라도 가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집사님, 우리 구경 가요.”

상냥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집사님과 함께 아이는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검은 산 정상에는 화산처럼 보이는 분화구가 둘을 맞았다. 분화구를 통해 누리가 내려다본 지옥의 모습은 건물 철거현장을 연상케 했다. 흡사 지저분한 쇠기둥과 막대기들이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깊은 분화구 바닥 끝엔 불구덩이가 있었고 한쪽 귀퉁이에는 TV 화면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스크린이 놓여 있었다. 누리는 집사님의 손을 꼭 잡고 분화구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깊이 들어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옥의 모습, 누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존재는 검은 형체를 하고 있었다.

 

‘아, 저게 사탄이구나’

누리는 직감적으로 그 존재를 분별했다. 검은 존재에게 끌려가는 행렬 속 사람들은 알몸인 채로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악!”

날카로운 꼬챙이 끝이 사람들의 살을 꿰뚫었다. 산채로 살점을 관통당한 이들의 비명은 이곳이 지옥이란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아악!”

채찍을 맞으며 끌려가는 사람들, 빠져나올 수 없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찍어 누르는 사탄의 긴 막대…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사탄이 어우러져 지옥의 모습을 완성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누리와 집사님에게 손을 대려는 사탄은 없었다.


‘우리를 본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모르는 체하는 걸까?’


가장 깊은 바닥에 도착한 누리가 본 사탄의 모습은 검은 연기과 검붉은 진흙으로 뒤덮인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둘을 못 본 체하며 지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누리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집사님, 사탄들이 왜 우릴 보고 그냥 지나치나요?”

“우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란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함부로 할 수 없어서 건드리지 못하는 거란다”

 

다른 한쪽에선 사탄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마시며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름들이 차례대로 올라오고 있었다.


“집사님,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슬프게도 곧 지옥으로 불려 올 사람들의 이름이란다.”


화면 빼곡히 나열되어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름들이 누리의 발걸음을 잡아 세웠다. 안타까운 마음에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카운트다운을 목도 했다.


“10⋯9⋯8⋯”

“집사님, 갑자기 화면에 숫자가 떴어요!”

“이제 저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이 세상은 끝이 나고 하나님께서 오실 거야.”

“세상이 끝난다고요?”

“걱정하지 마. 우린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거란다.”


누리를 바라보는 집사님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자했다. 그러나 누리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아니었다.


‘아,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점점 숫자가 내려갈수록 아이의 두려움은 커져 갔다.


“7⋯6⋯5⋯”

아직 전도하지 못한 가족과 친구들 생각에 아이는 서 있던 자리에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아직 안 돼요. 제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함께 천국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누리는 난생처음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4⋯3⋯2⋯”


그것은 이내 부르짖음으로 바뀌었다.

‘저에게 전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더 주세요! 제발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걸까. 스크린의 숫자가 0을 가리키기 직전 누리는 눈을 떴다.

 

생생하고 두려운, 그리고 조금은 신비로운, 아이는 그것이 그저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꿈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아이는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지옥의 모습과 사탄의 형상, 그것들이 역사할 수 있는 범위,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 휴거 그리고 각 개인을 향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 


그 모든 사건을 담은 꿈은, 교회를 막 다니기 시작해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 했던 아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지금도 아이는 낯선 땅에서 처음 자신을 반겨 주었던 집사님을 떠올리곤 한다.

‘아, 그때 그 집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아니었다면, 다른 악한 신을 믿는 곳이었다면, 내가 받아들인 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이었다면 지금쯤 내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들을 떠나 오른 출국 길의 외로움, 낯선 환경이 주는 두려움…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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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어떤 형들이 선생님 따귀를 때렸어요.”


지나가던 불량배들이 자신을 쳐다봤다는 이유로 소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놀이방 교사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소년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가 말한 장소로 내달렸다.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쇠파이프를 보자 한 청년은 도망을 쳤고, 따귀를 때린 청년은 그자리에 서서 소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이 혼자가 되자 소년은 쇠파이프를 바닥에 내던지고 청년을 주먹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청년의 얼굴에 피가 번졌다. 뒤늦게 달려온 소년의 부모님과 누나와 여동생, 선생님까지 매달려 소년을 떼어내려 했지만 청년의 머리채를 손에 가득 움켜잡고 휘갈기는 소년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놔! 놓으라고!”


 

싸우면 함께 때리기보다는 맞아주는 쪽을 택했던 순둥이 소년에게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부모님의 사업부도였다. 부모님은 채권자를 피해 갑작스레 집을 떠나야 했고 어린 삼남매만 있던 집에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OO유통 연락바람’

 

험상궂은 사내들이 붉은 매직으로 집안의 벽 이곳저곳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는 생일선물로 받은 소년의 검은색 카세트를 들고 갔다. 삼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친척집에 맡겨졌다. 


소년은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아버지가 빚쟁이들에게 붙잡혀서 따귀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돈을 떼어 먹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고, 아버지와 삼촌을 함정에 빠뜨려 부도나게 만든 사람이 건달을 동원하여 오히려 부모님을 협박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년은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의 극한 분노를 느끼곤 했다. 때로는 분노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날은 서른을 넘긴 고모의 딸이 소년의 집에 놀러왔다가 책상에 놓아 둔 돈 봉투를 훔쳐갔다. 이모가 생활비로 주고 간 그 돈은 삼남매의 전재산이기도 했다. 소년의 누나는 고모의 집까지 돈을 찾으러 갔다가 그녀에게 구타를 당하고 안경까지 망가진 채로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 난 소년은 며칠 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빚쟁이들에게 잡혀 봉고차에 태워져가는 것을 본 소년은 밤새 자신의 엄마를 찾아 다녔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당하고 있지 않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소년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본 장면처럼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 강도는 점점 더해져서 마침내 흉기를 들고 기억 속의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15세 소년의 마음속에서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버릴만한 크기의 분노가 자라나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을 욕하는 덩치 큰 아이와 다투다 옆구리를 맞은 소년은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소년은 숨을 쉴 수가 없어 한참을 바닥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일 이후, 날마다 일진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매를 맞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소년의 시계와 고가의 가죽점퍼를 빼앗아갔다. 


마치 코인을 넣고 펀치를 치는 시늉을 하며 달려와서 소년을 때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 주먹을 맞은 소년은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할 사람도,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던 소년은 그 모든 상황을 혼자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했다. 한쪽 눈이 멍든 채로 찍힌 졸업앨범 속 풀 죽은 소년의 모습은 그의 고된 중학 시절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소년은 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실업계 중에서도 가장 드센 아이들이 온다는 고등학교를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소년원 출신들이 많다는 악명 높은 학교였다. 1학년 1학기 초, 체격 좋은 한 친구가 소년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힘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소년은 그동안 수없이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상상을 현실로 옮겼다. 


학교는 실업계였고 건축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사용해서는 안 될 도구였다. 소년은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제압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학교에 퍼졌다.


“1학년 4반에 또라이가 들어왔다.”



그 일 때문인지 새로운 학교에선 아무도 소년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힘깨나 쓰는 아이들의 무리가 소년에게 다가와 호감을 표시했다. 소년은 더 이상 싸움을 참지 않았다. 소년의 손마디는 학대에 가까운 운동으로 인해 다쳐있기 일쑤였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싸울 때마다 모든 것을 걸었다. 경찰서까지 드나들 정도가 되었지만 소년은 상관하지 않았다. 


숙원대로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을 만나면 앙갚음도 해주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사소한 사건에도 폭발적으로 화를 내었으며 한번 화가 나면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년은 가족들에게까지 화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부모님에게 심하게 소리를 지르고 모진 말을 퍼부어 댔다. 그러나 돌아서면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 하는 소년, 누구보다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하던 그였다. 


혼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방과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의 절반을 드리고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나머지 절반마저 드리던 아들, 동생의 학비를 내주던 오빠, 타인에게 무례한 말도 하지 못하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 화가 나면 미친 사람처럼 돌변했다. 


소년 또한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수 없이 다짐해도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소년은 그런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소년의 누나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린 동생을 향해 울며 소리쳤다.


“너, 네가 화를 낼 때 네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


소년의 마음을, 아니 소년을 되돌려놓기 위해 그의 부모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부탁을 해도, 화를 내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뺨을 때리자 소년은 달리는 차의 문을 열었다. 황급히 차를 세우자 이번에는 달리는 버스를 향해 돌진하는 소년, 아버지는 가까스로 소년을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손찌검이라도 받으면 소년은 점점 더 강한 폭력으로 스스로를 공격했다. 때리면 때릴수록 그는 더욱 망가져 갔다.


 

영적으로는 악한 영이 빙의한 상태, 심리학적으로는 복수하고 싶다는 끊임없는 소년의 갈망이 또 하나의 인격 즉, 이중 자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소년은 자신의 상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지만 15살의 소년은 아마도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자녀들만 남겨 두고 간 부모님께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자의식 : 가엾은 우리 부모님, 내가 빨리 돈 벌어서 도와드려야 해


무의식 : 애들만 놔두고 자기들끼리만 도망을 가! 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 놓을 것이지 혼자 양심 바른 척 해봐야 누가 알아준다고...


어느 날 소년이 잠에서 깨었을 때, 누나와 여동생과 자신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험난한 경험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년은 부모님과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도... 혼자 구타를 당하고 홀로 두려움에 떨면서도 묵묵히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듯 보였지만 아마도 소년의 영혼은 절규하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 왜 저희만 두고 가셨어요.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셨어요. 저희도 데리고 가셨어야죠. 학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가족이 함께 있어야죠. 무섭고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아팠어요’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자아, 그 또한 자기주장을 가진 별개의 인격체이므로 원자아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파괴를 위해 만들어진 그 새로운 인격이 일단 활성화 되면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 없다.

 

“부도가 났을 때도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는데 네가 그렇게 변했을 땐 정말 망한 것이 실감이 나더라.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본 소년의 부모는 마지막으로  필사적인 기도를 선택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얼마나 길고 뜨겁게 기도를 했던지, 그가 기도를 시작하면 다른 성도들이 그의 뒤에 길게 늘어앉아 기도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저희도 김집사님 기도의 불 좀 옮겨 붙여 가려고요. 하하하!”

 

그렇게 소년의 아버지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갔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만 되돌려 주시면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는 서원까지 하게 되었다. 두 부부는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나님께 아들을 돌려달라고 날마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되돌린 것은 뜻밖에도 축복의 하나님이었다.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축복의 하나님을 소개 받게 되었다. 한 푼 없이 시작한 사업체를 현재가치로 수백억 규모의 기업으로 일으키기까지의 끊임없는 신앙 간증들... 


당시의 소년은 구원이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질병처럼 가족에게 닥쳐온 지독한 가난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뿐이었다. 그 당시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기복신앙인이었다.


소년은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군에 입대한 그는 부모님 말씀대로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취사병이었던 그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 놓고 혼자 보일러실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정예배를 드렸던 순서대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성경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자신과 가족들을 돌봐주실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대 후에도 형편은 그대로였다. 아픈 아버지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일을 하던 모습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그가 기대했던 물질의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못 자국이었다.


 

십자가의 주님을 경험한 후에도 소년의 두 번째 자아는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곤 했다.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일상적인 시비 앞에서 그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린 소년을 몹시도 비통하게 만들었다. 소년은 그런 자신을 보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저를 고쳐 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이런 상태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성품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너의 옛 사람은 이미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너의 무거운 짐을 나에게 다오. 이제 너의 삶은 내가 대신 살아가마.’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만큼 소년이 화를 내는 강도와 횟수도 줄어갔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또 다시 넘어지곤 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절망하고 있는 그를 다루는 주님의 방식은 책망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이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너는 이미 내 안에 있다.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너는 이미 새것이 되었다’



잘못한 것보다는 잘한 것을, 절망적인 상황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소년의 안목을 열어 주시는 주님이셨다.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정점에 달할 무렵, 소년은 예수님이 너무 좋은 나머지 신학대학까지 입학을 하게 되었다. 



소년의 부모님은 조그만 지하 개척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하지만 생활보호 대상자와 소외계층들을 섬기다보니 교회의 재정은 언제나 마이너스였다. 부모님의 마이너스 통장은 늘 한도치에 달해 있었고 성전 임대료는 항상 몇 개월씩 밀려 있었다.

 

“차라리 교회 문을 닫고 다른 교회의 부교역자로 들어가시면 어떨까요?”


소년의 제안을 부모님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든 교회 문을 닫고 싶어 하는 소년의 마음속에 한 음성이 들려왔다.

 

‘교회는 닫는 것이 아니라 여는 것이다’

 

소년은 그 목소리에 응답했다.


‘그렇다면 주님, 저를 사용해주세요. 교회를 세우는 자로 저를 써 주소서. 언제까지 침묵하실 건가요?’


‘세상 모든 부귀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만지시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니 저의 성품 때문에 복주시기를 망설이지 마시고 차라리 저를 하나님의 복에 합당한자로 만들어 주세요’


소년의 기도는 응답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자가 되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 시련, 아니 연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년은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을 생각하며 크고 작은 시비 앞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기꺼이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즉시로 소년에게 평안의 믿음을 보상으로 주셨다.


‘내가 이렇게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분명 내게 상을 주실 거야’

 

그 믿음은 소년을 주님 앞에서 몇 시간씩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그 믿음은 실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구체적인 축복의 결과물들이 소년의 삶에 나타났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 소년은 동네북이 되었다. 지나가던 개도치고 소도치고 너도 치고 나도 치는 동네 북 말이다. 물론 소년도 화를 낼 때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분노 에너지는 조금도 줄지를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결국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은 소년, 상대에게 화해를 먼저 요청하는 것 또한 소년이다. 


소년의 주변에는 이런 점을 악용하여 소년에게 마음껏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큰소리 한번 못 내는 쫄보들이 소년에게는 마음껏 자신의 감정을 발산한다.


"주님, 내가 잘못해도 내가 사과하고 저들이 잘못해도  내가 사과 해야 합니까? 왜 맨날 저만 그래야 합니까?”


하지만 그럴때마다 소년의 가슴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어떤 날은 흔쾌히, 또 다른 어떤 날은 마지못해서 어쨌거나 결국에는 그 음성에 순종하는 소년, 그러나 '화'라는 감정에 제대로 사로잡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소년에게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머리를 숙이는 것은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졌다고 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일종의 분노 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다. 



신앙, 성품, 학식 모든 면에서 비할 바 없이 부족했던 소년은 결과적으로 그의 주변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책과 성경을 읽은 그는 신앙서적을 출간한 작가가 되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기도하며 임한 결과 사회 각 분야의 보석 같은 인맥들을 얻게 되었다. 그는 그의 주변 인들 중에 가장 건강하고 가장 극적인 물질의 축복을 경험했다. 소년은 말한다.


"어째서 신앙생활을 몇십 년씩 해도 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왜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 화내고 싶은 거 다 내고, 미워할 거 다 미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까? 나 같은 사람도 참는데 당신이 왜 못 참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의 혁신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힘이 필요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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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이상하게 기도만 하려고 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요.”


D는 주님께 권능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철수세미로 문지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기도를 멈추면 그토록 아팠던 증상이 씻은 듯이 괜찮아져요.” 


그러나 다시 또 기도를 시작하려고하면 영락없이 그 증상이 찾아왔다. 그의 삶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권능을 구하는 기도 → 전신통증 → 기도 포기 → 통증이 사라짐 → 권능을 구하는 기도 → 전신통증 → 기도 포기

 


필자가 처음 성령체험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영적인 현상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게 다음처럼 기도할 것을 제안하셨다.

“사탄은 주님께서 상대해 주세요.”


그런 영적인 체험 없이도 얼마든지 힘차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영적체험을 하는 것이 역기능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도 영적인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삶이 그렇지 않은 성도들에 비해 그다지 메리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귀신을 본다’, ‘미래를 예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날카로운 성격과 표정,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지병을 앓고 있는 분들도 많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며 규칙적인 소득원이 없어 재정형편이 좋지 않은 분들도 많았다. 그들의 삶은 필자가 지켜 본 무속인들의 삶과 상당부분 일치했다. 표정과 분위기마저 그리스도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푸근함과는 멀어 보였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긴 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그런 은사자들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생각하여 전적인 존경과 신뢰를 담아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대체로 어려웠고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의지하는 이들 또한 그러했다. 


기도할 때마다 귀신이 방해하러 찾아와서 내쫓는다는 어떤 목사님은 언제나 사나운 표정이어서 사람들이 단 둘이 있기가 무섭다고 말할 정도였다. 예언기도를 한다는 또 다른 목사님은 전국 석차 최상위권 학생의 ‘지원대학 합격’을 예언했지만 틀렸다. 그렇게 쉬운 예언조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사를 믿는다. 나는 분명히 신비로운 하나님의 영적은사를 경험했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 은사자들 중에 처음부터 거짓 선지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출발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성령체험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몇 번의 영적인 체험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내게 주신 고정된 은사인 줄 착각했었다. 내가 사용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가능한... 


그러나 실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현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고 또 어떤 때는 특별히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발현이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영적은사는 은사자의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또한 영적은사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

 

즉,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있어야 발현이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사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영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영적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려면 우선적으로 상당한 양의 성경을 읽어야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도에 몰입해야 한다. 

 

만일, 성령충만한 상태가 아닌데도 은사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죄 가운데 있거나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은사가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이는 영, 즉 사탄의 간교일 확률이 있다. 문제는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인지 다른 영의 역사인지를 구분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차전도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우리 아이가 이번에 합격 할까요?”


차전도사는 남편과 심한 부부싸움 뒤였지만 자신을 찾아 온 성도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차전도사는 급하게 기도하여 응답(?)을 만들어 냈고 용케도 그 예언기도는 적중했다. 자신감이 생긴 차전도사는 점점 더 말씀과 기도 없이 예언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것일까? 

 

악한 귀신들을 직접 상대하는 쪽으로 은사가 계발되면 자신의 영적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실수를 할 수 있다. 사울왕의 ‘대리제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성령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상태가 아닐 때에도, 소통하는 척이라도 해 보려는 심리가 사람에게는 내제되어 있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은사자들이 그렇게 배도하고 이단, 또는 이단의 경계에서 줄 타기를 하고 있다.

 

사탄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사라진다. 성경에서 빛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고 예수님은 곧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우리 삶에 모셔 들이는 행위는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모든 상황을 분별할 수 있다. 


이 은사는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쉬우며 무엇보다 기복이 없다. 말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진실한 의지가 있으면 문제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씀을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면 속지 않으며 실패가 없다.

 

“저는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귀신이 보입니다. 너무나도 무섭고 밤마다 가위에 눌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건강부터 회복하세요. 영과 육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육신의 건강을 회복한 상태에서 영의 상황을 판단하세요. 육체의 컨디션이 회복되면 영의 문제로 생각되던 심각한 것들이 상당부분 자연스레 사라져 있거나 완화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영과 육을 훈련하는 기간을 정하자. 

훈련기간 동안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사람과의 교제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훈련기간은 본인이 정하라. 단, 반드시 지켜라. 훈련기간 동안 만들어지는 영육간의 상태가 앞으로 삶과 사역의 크기를 결정한다.

 

2. 질서의 하나님이다. 

운동으로 체력을 만들라. 식사를 잘하라. 잠을 자라. 잠이 오지 않으면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라. 잘 먹고 햇빛을 쬐며 운동을 한뒤 성경을 읽고 있으면 신기할 만큼 잠을 잘 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성경을 읽기가 싫을 것이다. 심지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 평안이 오고 잠도 잘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럴 땐, 사탄에게 붙들린 상태이니 더욱 더 성경을 펼치자.

 

3. 내 안에 사탄이, 귀신이 들어왔다면 밥을 굶겨야 한다. 

영의 양식은 성경말씀이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은 우리의 영에 생명을 공급한다. 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분노로 얼룩진 생각과 말은 악한 영들에게 양식을 공급한다. 특히 혈기는 귀신들에게 특식과도 같다. 귀신들을 위해 보양식을 생산하지 말자.

 

4. 원망의 마음을 추방하라. 

모든 원망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자신의 삶에 귀신이 들어오는 통로를 여는 행위이다. 유산을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의사의 실수로 생긴 의료사고가 분명해 보였다. 여인은 들끓는 분노로 의사를 원망했고, 그 분노의 불길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옮겨 붙었다. 


그녀의 남동생은 망치로 그 의사의 머리를 부수는 상상을 시작했다. 그 상상은 점점 구체화되어 범행수법과 장소, 시간등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누나는 끝끝내 남동생에게 의사의 신상정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녀와 가족들이 살의까지 느낄 만큼 피 끓는 분노에 사로잡혀 타들어가는 동안, 그 의사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 괴로워서 힘들어 한 사람은 그녀 본인과 그녀를 세상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의 가족들뿐이었다. 


그녀의 몸 속에는 계속해서 커다란 크기의 종양이 생겨나고 있다. 종양이 귀신의 소행이라는 의학적 증거는 없지만 완전히 귀신을 보지 않게 된 뒤, 종양이 사라졌다는 공통된 사례담들이 있다. 

 

5. 염려, 큰 문제가 조약돌처럼 작아 보이게 될 때까지 기도하라.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제 인류는 거의 모든 세상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영적인 것까지도...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만큼은 설명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자. 만일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귀신들이 좋아하는 근심과 걱정을 양산하면 어떻게 될까. 


귀신들이 온다. 먹거리를 만들어 주니 먹으러 온다. 결국 귀신이 보이고 귀신들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귀신에게 밥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것을 생산해야 한다. 어둠을 물리치려고 발버둥 쳐 봐야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사라진다. 


어둠 자체를 쫓아 낼 수 없듯이 악한 세력들 또한 쫓으려 해도 쫓아지지 않는다. 선한 것을 만들어내야 악한 것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동기는 거룩한 동기로 대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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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첨벙첨벙” 

“살려 주세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상담 좀 해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죄의 깊은 물속에 빠진 누군가가 살려 달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몇 주 전부터 연수에게 계속 상담신청을 해오던 정미였다. 연수는 정미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물속으로 몸을 던져 그녀에게로 헤엄쳐갔다.  


“어서 제 손을 잡으세요.” 

그러나 정미는 연수의 팔 대신 목을 부둥켜안았다. 


“앗! 이러면 둘 다 빠져요. 어서 제 손을 잡고 저를 따라서 기도의 호흡을 하세요. 기도로 물장구를 치세요. 예배드리세요. 성경말씀 읽으세요.”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러나 정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수는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수영을 할 줄 알긴 했지만 예수님만큼 잘하는 것은 아니었던 그녀는 어느새 손과 발이 무거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물장구치는 손과 발의 속도가 느려지자 연수의 몸은 죄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자매님, 기도 좀 부탁드려요.” 


연수가 정미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 하자 정미는 더욱 거세게 그녀의 목을 움켜 안았다. 우울, 근심, 절망, 불평, 미움 등 더러운 감정들로 가득 차 있는 죄의 강물이 연수의 코와 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의 강물을 들이키자 이내 연수의 마음은 우울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연수는 더 이상 기도의 물장구를 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잃고 기도도, 예배도 귀찮게만 느껴지려던 그때, 어디선가 낮고 굵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53장 5절)”



“퍽” 

“꾸엑!” 

“퍼억” 

“꾸에엑!” 


말씀의 지팡이가 정미의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자 그녀는 마치 도살장의 돼지와도 같은 소리를 뿜어냈다. 정미는 원망과 아쉬움, 시기와 질투가 가득 담긴 눈초리로 연수를 노려보았다. 


“더럽게 바쁜 척 하네. 상담할 사람 당신 아니고도 많거든요!” 

정미의 빈정대는 말투에 연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내가 또 속았구나.” 

정신이 들자 연수는 다시 기도와 말씀의 물장구로 해변을 향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해변가에 다다르자 두 남자가 모닥불에 말씀의 떡을 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죄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영혼을 끌어 건져낼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아굴라가 말씀의 떡을 떼어 연수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했습니다.” 


말씀을 받으며 연수는 머리를 거듭 조아렸다. 

“그녀는 20년째 죄의 깊은 물속에서, 지나가는 성도들에게 상담신청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상담만 받아서는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없지요.” 

“네?” 


“어느 정도 성장한 성도는 복음의 현장으로 뛰어나가야 합니다. 실전에 투입되는 순간부터 주님의 동행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급속한 영적성장도 이루어지지요. 앞으로 영의 깊은 물속에 빠진 이를 보시거든 직접 들어가지 말고 말씀의 지팡이를 던져서 물 밖으로 건져내십시오.” 


“하지만, 상대방이 물가로부터 너무 멀리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또 제가 내민 말씀의 지팡이를 붙잡지 않을 때는요?” 


“그럴 때는 물가에 서서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십시오. 그 사람의 삶과 그가 겪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직접 들어가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까지가 우리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만 상대방을 신경 쓰게 됩니다.” 


조그만 노트에 성경을 필사하며 말씀의 떡을 굽던 브리스가의 손이 멈춰 섰다. 


“시장에서 떡꼬치를 파는 왕서방의 이야기입니다. 왕서방은 떡꼬치가 팔릴 때마다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반대로 떡꼬치가 팔리지 않으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우울해 했습니다. 그는 떡꼬치 하나에 일희일비 했지요. 하루 온 종일,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다가 순식간에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이 슬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옆에 있는 사람조차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손님이 5분 동안만 오지 않아도 그의 얼굴은 검게 사색이 되었습니다. 급격한 감정 변화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던 왕서방은 결국 심각한 우울증상으로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연수는 한 조각의 말씀을 더 떼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평정심입니다.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평정심은 필요합니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그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에게 평정심이 필요한 이유는 지나친 감정사용으로 인한 에너지 고갈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사용한다는 것, 즉 신경을 쓴다는 것은 곧 에너지의 누수를 의미합니다.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방전되어 무기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업무를 처리할 때는 가급적이면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미친 듯이 기뻐하며 공을 차는 축구 선수 또는 계속 짜증을 내며 드리블을 하는 농구선수를 상상해 보십시오.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감정에 사로잡힌 자는 어떤 업무도, 어떠한 협상도 제대로 치르기 어렵습니다. 모든 비즈니스에는 공통적으로 평정심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 또한 영적인 비즈니스에 해당하므로 가급적 감정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기분이 좋으면 교회봉사를 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은 건강한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기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전파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연수는 이제 말씀의 떡을 통째로 들고 삼키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그녀로 하여금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사모하게 만들었다.

 

“주의 말씀이 내 길에 빛이 되시니 내 입에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따금, 누군가의 딱한 사정과 안타까운 상황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감정에 동화되어 함께 슬퍼지고, 함께 화가 나고 때로는 함께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그들의 감정에 침노 당했기 때문입니다. 침노하지 않으면 침노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법칙입니다. 공감능력은 상담에 꼭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공감이 지나쳐 동화되어버리면 어둠속에 갇혀 있는 상대방을 양지로 끌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영의 깊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나의 기쁨, 나의 열정, 내안에 좋은 감정들이 상대방을 침노해서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상대방 안에 있던 좋지 않은 감정들이 나를 침노해서 나를 사로잡습니다.” 


“아멘,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인 줄 믿습니다.” 


“흰색물감 한 컵에 검정색 물감을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흰색물감은 곧 잿빛이 됩니다. 이렇게 잿빛으로 오염된 물감을 흰색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한 방울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흰색물감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에게 침노를 받아 잿빛 감정에 오염이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엄청나게 기도해서 엄청난 양의 흰색 물감을 공급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잿빛인생, 즉 우울하고 암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 악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아무것도하지 않아도 그의 스폰서 사탄으로부터 검정색 물감을 끊임없이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흰색 물감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에 반해, 사탄으로부터 악의 물감을 공급 받기위해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탄에게 요청할 필요도 없지요.” 


“마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떠 옮기는 사람과 틀어 놓은 수도꼭지가 경쟁하는 것 같군요.” 

“따라서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에겐 불리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혈과 육으로는 승산이 없기에 이 싸움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아아, 애초부터 주님께서 나서 주시기를 기다리며 간구했어야 했는데...” 


“가급적이면 응대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주님께 임재를 요청한다. 둘째, 상대방에게 말씀의 지팡이를 내민다. 셋째, 말씀과 기도로 물장구치는 법을 알려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 9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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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30

“시러시러시러. 못 나가. 나 이대로 못 나가. 컹컹 커헝! 이년 거지 만들어야 하는데 억울해. 아이고 억울해. 컹컹! 나 좀 내버려 둬. 이것들아!”

 

앳된 얼굴의 건장한 사내가 중년 여성의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강대상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응시하며 한 번씩 개가 짖는 듯한 소리를 내 뱉었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안경 쓰신 분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영수씨가 자꾸만 비난을 하며 방해를 하니까 저 옆에 키 큰 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리치며 꾸짖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면서 저렇게 달려드네요.”

“아우, 무서워라. 어떻게 이런 일이...”

 

영수의 눈빛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붙잡아 땅바닥에 눕혔다. 그러자 그는 마치 뜨거운 아스팔트위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누운 채로 펄떡펄떡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그를 누르고 있었지만 장어처럼 꿈틀거리며 뛰어대는 그를 제압하기엔 속수무책인 듯했다. 영수는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계속해서 십자가를 응시했다.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으이그 비려. 으이그 비려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53장 5절)”


“털퍼덕”


아굴라가 성구를 암송하자 영수는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영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아, 제가 왜 바닥에...”


아굴라가 그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자 브리스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할 때 베드로가 반대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청중 모두가 알고 있는 답이었지만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요.”


휴가를 나온 듯 보이는 군복 입은 한 청년이 큰 목소리로 모두를 대신해 답을 했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베드로야! 하신 것도 아니고 바로 사탄아! 물러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세상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빛 또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둠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빛에 서있는가? 아니면 어둠에 서 있는가?”

 

브리스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제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본질은 기도해서 부자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척하다가 아예 기도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갈급한 기도제목을 들고 주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방금 보셨던 것처럼 지금 교회 내에는 기도의 집중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기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사랑과 화평, 온유함 같은 예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의 기도와 신앙을 정죄, 비판하는 사람 주변에 맺히는 열매들을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려는 성도들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십중팔구 지적을 들은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집니다." 


"본래 조언이란 상대방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그 모든 절차를 생략합니다. 이런 무례한 행동은 세상 사람들조차도 터부시하는 행동이지요.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 그리고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격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최고의 지성, 성령께서 그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분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는 가난을 일반화 시키려는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의 복을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멘! 예수님 믿는다고 모든 사람이 부자일 수도 없지만,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도 이상한 거니까요.”


“그러나 이 분들은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물질축복 받았다는 간증이나 예화만 나오면 반론을 펼칩니다. 이분들에게는 모든 축복에 대한 메시지가 공격 대상인 것이지요. 마치 모든 성도들이 가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거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겠습니까?”



모든 청중들의 눈빛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표정으로 브리스가를 향했다.


“결정적으로 이분들이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고 의심되는 부분은 삶과 신앙의 불일치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탄으로 몰락하게 된 계기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교만 때문 아닌가요.”



브리스가는 대답대신 청년을 짧게 응시했다.

“그들은 무조건 상대방이 자신보다 부족할 거라고 단정 짓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은 모르고 있을 거라는 확신, 이것은 뿌리 깊은 교만의 증거입니다.”


숙연해진 표정으로 사람들은 브리스가와 군인청년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실족케 하고, 낙심케 하는 말들을 그리스도인이 다른 지체를 향해서 던지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게 할 만큼 공격적입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다투는 모습을 보면 잘잘못을 떠나서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사탄의 사역은 자기만 지옥 가는 것이 억울해서 남들도 끌고 가려는 것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은혜 못 받았다고 남들도 은혜 못 받게 만드는 사람들, 자기 삶이 안 풀리고 힘들다고 다른 사람도 가난하고 힘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자꾸 누군가를 험담하며 분열시키고,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도 아닌데 자꾸 반론을 제기 한다면?”


“사탄이라는 거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될 존재는 교회 밖에 있습니다. 혹시 교회에서 위와 같은 특징을 보이시는 분들 중에 전도하시는 분 보신 적 있습니까?”


삽시간에 침묵이 청중을 덮쳤다.

 

“여러분은 회의석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의견은 내지 않고 계속해서 남의 의견에 부정적인 의사만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들은 전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어떤 생산적인 행동도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신 사역을 감당하려 힘쓰는 지체들을 찾아다니며 부정적인 영향력만 행사하지요. 우리는 그들과의 논쟁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만일 그들의 반론을 하나하나 상대하다보면 아마도 우리는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성경의 말씀을 언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여, 너희는, 너희도 기도하지 않고 다른 이도 기도하지 않게 만드는 도다. 화있을진저 만인에게 평등하신 하나님의 복이 너희 삶에는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머무르지 않게 되리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으리라.



The Power Church

대한예수교장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