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환자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잠을 자게 된다. 중증 우울증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차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씀을 접했을 때만큼이나 쉽고도 어려운 제안일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읽을 수가 없다. 너무 쉬워 보여서 오히려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것이 성경 읽기이다.
본래 믿음이란 당사자가 믿을 때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단한 기적의 현장을 보여주며 ‘당신 또한 믿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 말해 준다해도 당사자가 믿지 않고 빈정거리면 그 믿음은 결실을 거둘 수 없다. 이렇듯 믿음은 당사자가 ‘아멘’으로 화답하며 믿을 때 비로소 효력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다르다. 성경 말씀은 당사자가 믿건 믿지 않건, 심지어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며 읽어도 읽기만 하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말씀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간곡히 권해준 성경을, 담배를 피우며 읽던 청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끄게 되었다.
“이것은 담배를 피우며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훗날 말씀을 전하는 부흥 강사가 되었다. 한국 선교 초기 종이가 귀하던 시절, 도배지 대신 사용한 벽에 붙은 성경 구절을 무심코 따라 읽다가 회심한 사례는 유명하다. 선교사조차 파송될 수 없는 복음의 불모지라 할지라도 성경만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책이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의 인격체처럼 누군가의 마음 문을 열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훈련 시켜 마침내 전도자의 길을 걷게 하신다. 선교의 불모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온 성도는 목숨처럼 말씀을 사모한다. 그런 현장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
반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어 마음껏 복음을 전해도 되는 곳에선 하나님의 말씀이 희소성을 잃은 흔한 광물처럼 굴러다니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교인들은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경책과 신앙 에세이, 인터넷 설교영상 사이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취사 선택하여 듣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말씀을 평가하고 제하여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아, 이 말씀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태도는 말씀을 하나님이라는 인격 자체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정보로 대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행동일 것이다. 이런 태도로 말씀을 접하는 사람은 삶의 문제 앞에서 말씀이 능력이 되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121편 1~2절)
부도로 무너진 가정이 회복되는 10년의 세월을 이 말씀 하나 붙잡고 버텨낸 성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씀만 암송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슬픔이 사라지면서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었어요."
이렇듯 한 구절을 제대로 붙들기만 하면 그의 삶에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히브리서 4장 12절)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은 성경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눈으로 읽어야 하는 글이지만 들으려 하면 들리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음성, 사랑하는 사람의 머릿결을 넘기듯 손끝으로 말씀 구절을 소중히 쓰다듬으며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려 한다면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처럼 섬기며 연인처럼 사모하고 아이처럼 품으며 한 구절, 한 단어, 접속사마저 소중히 받드는 자세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초가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다시 태어나 성도라는 새로운 영적 존재가 된다. 다시 태어난 그는 당분간 아기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세상의 모든 아기는 미숙하며... 귀엽다. 아기 성도 역시 그러하다.
뭔가를 이루려 하는 성취욕은 인간의 지적 욕구 중 하나로서 본능과도 같다. 그래서 아기 성도들조차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고 든다. 이 중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기특하고 거룩한 시도도 있다. 하지만 아기는 노동력으로 측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기는 일터에서 일을 할 수 없으며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아기는 배려의 대상이며 보호의 대상이다. 그리고 조건 없이 사랑 받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다. 아기 성도들은 장성한 믿음에 이른 신앙 선배들의 간증을 들으며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러다가 때로는 자신이 아기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아기의 본분은 무엇일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장 17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라기만 하면 되는 존재 자체가 기쁨인 것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시다가 또 갑자기 사랑스러운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즐겁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도들은 잊곤 한다. 하나님의 제1 속성이 사랑이란 사실을... 사랑 때문에 인류를 창조하셨고, 사랑 때문에 죄를 지은 인류를 버리지 못하셨으며,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지금도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우리 곁에서 기다리고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힘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역량에 맞지 않는 중압감은 도리어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장하기를 아예 포기하게 만드는 좌절로 이끌기도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장 1절)
무엇인가를 하고 싶고, 무엇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급함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되면 때를 기다릴 수 없게 된다. 조급함은 완성도를 떨어 뜨린다. 밥은 설익고 요리는 타게 되며 알은 부화할 수 없다. 나비는 날 수 없고 영웅은 자신의 날을 맞이 할 수 없다. 그리고 성도에게 조급함이 임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목자 없는 양같이, 부모 없는 아기같이 내 힘으로만 살아야 하는 세상을 살아왔다. 그래서 끊임 없이 뭔가를 해야만 했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은혜의 땅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생존법칙은 무엇일까?
“주님이 하신다. 주님이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지구촌 곳곳 신앙 선배들의 공통된 간증이다. 그들은 분명 아기였을 것이고 일부는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를 평생 아기로 머무르도록 방치하지는 않으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11절)
충분한 배려와 보살핌 속에서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과 부모와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부모가 아이의 영원한 지원자이자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부모와의 유대감이 충분히 형성된 아이는 성인이 되어 혼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기까지 온전히 부모의 가이드를 받으며 안전하게 성장해 갈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를 신뢰하는 것 보다 나의 판단만을 의지하게 되면 말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장 15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처럼 의미 없는 세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는 아기다울 필요가 있다. 아기가 부모의 작은 눈짓에도 까르르 웃어 주듯 하나님의 소소한 은혜에도 감사를 표현하는 성도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쉬며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백수처럼 보이는 세월을 보내고 있을 지라도 그가 정녕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모든 시간들은 의미가 있다. 그는 언젠가 전능하신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직접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장 10절)
하나님이 나만 바라보시는 것 같은 유대감,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는 굳건한 신뢰... 이 모든 것들은 아기가 장성하였을 때 세상을 이길 힘의 원천이 된다.
목회자의 설교도 중요하고 찬양도 중요하고 음향까지 완벽하면 더욱 좋겠지만 이 모든 부분이 미흡하다 해도 예배는 예배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예배 시간에 정신 집중하여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예배 시간에 딴 생각을 하거나 잠이 들거나 심지어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도 그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긴 한 것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물론 예배는 온 맘과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예배는 예배다. 예전부터 현재까지 많은 불신자들이 가족과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예배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능력은 변화이다. 그 변화는 사람이 쥐어짜듯 간신히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넉넉히 부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싫어도, 귀찮아도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다 보면 점점 더 예배자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게 된다. 반면, 이런저런 핑계로 예배에 나가지 않게 되면 점점 더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한번 모든 예배에 참석해 보라. 주일 예배와 수요, 금요는 물론 가급적이면 새벽 예배까지...
가서 딴 생각을 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도 좋으니 한번 모든 예배에 참석해 보라. 설교자의 설교가 지루해도, 찬양 인도자의 찬양이 본인 취향에 맞지 않아도 예배의 자리에 자신을 끌어다가 가만히 앉혀둬 보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좋은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필자의 직장은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불신자 M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고백이다.
“오늘은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뭔가 가슴이 울컥하면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라고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착한 일을 경험한 이들의 가장 흔한 간증은 다음과 같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이 평안해 졌다거나 다퉜던 가족과 화해하고 싶어졌다는 등의 심리적 안정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의 마중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에 감사하며 조금씩 예배에 마음을 열고 참석하기 시작하면 드려지는 진정성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임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어디서 이런 추진력과 결단력이 나오는지 본인 스스로가 놀랄 정도다. 평소 같으면 손도 대지 못할 일을 흔들림 없이 우직하게 실천해 나간다. 조롱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머리는 맑고 체력은 충분하며 마음은 담대하다. 인내와 절제가 용이하여 스스로를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자신의 힘이 아닌 또 다른 존재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런 힘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저절로 예배를 사모하게 된다. 일이 잘 풀려 걱정 근심 없게 되어 신앙적 태만이 오고 그래서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가도 어려움이 오면 꺼진 스마트폰을 들고 충전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예배를 찾게 된다.
‘몰입감’은 본인 스스로 자신이 도전하려는 목표에 최적화되었음을 느끼는 상태이다. 완벽한 몰입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면 생각보다 손쉽게 ‘몰입감’에 도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예배는 정말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주일 예배를 3번씩 드리는 청년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했던 그 청년은 불과 3년이 되지 않아서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절박함은 여유로 바뀌어 있었고, 자신에게 가르침과 도움을 주려던 이들에게 역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며 소득 또한 그러했다.
교회를 다닌 지 2년도 되지 않은 청년이 모든 예배를 참석하자 모태 신앙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성도가 되었다. 성경 지식은 물론 성령체험, 사회생활에서 거둔 열매들이 온통 간증 거리가 되어 그야말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단 이뿐 아니라 교회에서 리더십을 펼치는 이들, 단기간에 비약적인 신앙 성장을 보인 성도들은 하나 같이 예배를 소중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신앙의 성장 속도가 예배 횟수와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경험합니다. 연애 감정 그 이상의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의 교제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처음 주신 그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잊게 됩니다. 결국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은 모두 잊어버리고 사랑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나도 한때는 뜨거웠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영혼에 깊이 각인된 주님과의 추억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에 성도들은 항상 첫사랑의 감격을 그리워하며 처음과 같은 신앙회복을 연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나...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한 분을 본 바 없습니다. 잠시 회복되는 듯하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낙심하는 나날만이 반복될 뿐.
그러므로 성도는 받은 은혜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잃지 않으려 소중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 다시 기도하면, 다시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건강, 직장, 사업, 결혼, 자녀 문제 등... 모든 문제를 우리 아버지께,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버지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어 낼 수 없기에 먼저 십자가 앞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고백은 ‘주세요’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첫사랑은 회복될 수 없으나 새로운 삶을 살기에 부족함 없는 크고도 놀라운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中)
사람을 일컬어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세월 속에서 많은 것들을 잊는다.
감정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랑했던 감정을 잊는다. 사랑했었던 사실은 기억하지만 사랑했었던 감정은 사라져서 다투고 미워하다가 끝내 헤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주님과의 사랑도 잊는다.
처음 주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겨서 끝까지 간직한 몇 몇 성도들만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쓰임 받는 종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 사랑의 감정을 잊는다. 그 사랑,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햇살이 주는 따스함, 봄바람의 포근함, 진하게 끓인 보리차의 향이 커피만큼이나 향기롭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본인의 배우자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 모든 것들은 따로 의식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이다. 그러나 따로 시간을 내서 느껴 볼 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자, 이제 성경과 찬송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찬송가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주일학교에서 배웠는지 부모님께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엄하고 조금은 무서운, 그래서 어렵고 또 약간은 어색한 분.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그런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거룩함을 요구하는 분이라고도 한다. 주일학교시절부터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나의 무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엄마 손에 이끌려 참석했던 부흥회에서도 나는 ‘잘못해서 하나님께 두들겨 맞고 끌려왔다’는 부흥강사님들의 강의를 여러 차례 실감나게 들은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나의 창가로 찾아 오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견해로 하나님을 수식하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본 바에 의하면 결국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믿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나를 반겨주시리라는 믿음도 생겨 조금씩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볼 엄두가 나기 시작했다.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진 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몹시 기쁘고 하나님께 대한 친근함이 날마다 더해갔다.
“주의 보좌로 나아 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세상을 등진 은둔형 외톨이가 성령님과 교제를 시작했다면 가장 먼저는 마음의 평안이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외출을 촉구하는 마음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나가서 조금 걸어 보자’
그 음성에 순종하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부정적인 마음도 따라 올 것이다. 완벽히 성령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으면 그렇게 두 음성을 듣기 마련이다.
“조금 걷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순종하지 않았더니 첫째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내 평안도 사라지고 다시 강한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렇게 다시 어둔 감정에 사로잡혀 TV, 스마트폰만 보며 지내다 보면 다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의 갈급함 때문이다. 한번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본 자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게 된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다시 그 음성이 들려올 것이다. 단, 다시 은혜를 회복하려면 평소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멈춰 서 있던 녹슨 자전거의 패달을 밟는 것처럼 쌓인 영적 이물질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둠부터 몰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혼의 대청소가 끝나면 다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가서 걸어 보자’
이번엔 순종하지 않은 뒤에 찾아올 어둔 감정이 두려워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는다. 순종했더니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처음 산책을 권면했던 음성은 점차 규칙적인 식단과 운동, 독서와 구직활동을 권하더니 성품과 태도까지 만지시기 시작한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그에게 ‘상냥하라’ 말씀하시고, 사람 눈도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숫기 없던 그에게 미소지으며 먼저 상대방에게 악수를 청하는 미션까지 부여한다.
요구하는 순종의 강도는 계속 올라가 뜬금없이 지하철역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라고 말씀한다.
‘헐,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겁니다. 소리친다 해도 제가 외친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갖게 할 뿐이라구요.’
갈등하던 그는 불순종 뒤에 찾아올 ‘님의 침묵’이 두려워 모기 만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더 크게 외쳐 보렴’
문득 ‘기왕이면 교회를 떠난 사람을 향해 외치는 것이 더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오십시오.”
빠르게 걷던 한 남성이 흠칫 놀라 멈춰 섰다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남성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 외침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자리를 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외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외치는 당사자를 훈련 시키기 위한 것이다.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감 넘치는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그는 창업에 도전하게 된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그 음성.
‘가만히 있을 바엔 나가서 전단지라도 나눠주는 것이 낫겠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여전히 긴가민가 하지만 그는 타당성 있는 그 지시에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전단지를 배포하다 보니 효율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더 명료하고 전달력이 좋은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서 고객을 유치해 본 그는 매장 내 방문한 고객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의 고객 유치 전략은 이제 매장 안팎으로 넓어진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장사꾼에서 전문 경영인이 되어 간다. TV 등 미디어에서 전문가들이 하는 말들 중 상당수를 자신이 이미 실천하고 있음에 놀라는 그, 누가 그에게 경영을 가르쳐 주었는가. 이론을 넘어서는 실천 과제를 주었는가.
그러나 그 또한 연단을 피할 수 없었으니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순종하지 않는 자세 때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순종하는 그였다. 멀리해야 한다는 강한 음성이 있었음에도 그는 한 여인을 가까이했다.
‘그녀가 아니다. 너에겐 비할 바 없는 복된 배우자가 예비 되어 있다.’
‘이건 내 생각일 거야. 하나님께서 정말 이 사람과 헤어지길 원하신다면 더 크고 선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세요.’
숱한 기적을 보았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욕심을 고집하다가 기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지금껏 자신을 선한 길로 인도해 준 그 음성에 귀를 막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
‘이 사람을 전도하면 되잖아요. 함께 교회 다니면 되잖아요.’
끊임없이 불순종을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아서 타당성을 부여한다. 그의 방황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 느꼈던 영혼의 기쁨조차 망각시킨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가 불순종해서 택한 배우자와 꾸린 가정에도 변함없이 지켜질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함께 하긴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하신 미래를 기다리지 못한 삶에는 끊임없는 장애물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 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에 원래부터 놓여 있던 장애물일 뿐이다.
이렇듯 불순종하며 살아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는 날 동안 지속적인 평안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더더욱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회개하고 순종을 결단하면 일시적으로 다시 평안이 회복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순종하지 않으면 평안대신 고난과 우울감이 잠식해 들어 올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평안과 기쁨 대신 암울한 삶만 살다가, 이따금 은혜받고 잠깐 회개해서 짧은 회복을 맛보고 다시 암울함으로 돌아가는 ‘긴 우울, 짧은 평안’의 계절을 반복하며 한살 한살 나이만 먹다 늙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천국은 갈 것이다. 그렇게 임마누엘의 약속은 지켜지긴 할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계산적인 그에게 ‘베풀라’고 권면하던 그 음성이 또 어떤 때는 다시 ‘철저히 계산하라’는 마음을 주신다. ‘함께 가라’고 했던 사람을 이제는 ‘멀리하고 경계하며 기도만 해주라’고 말씀하신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행동을 그때그때 주시는 음성에 따라 순종해 나가다 보면 세월 속에서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깨닫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중단했던 예전의 좋지 않은 행동을 다시 시작한 상대방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온전히 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필요한 사람을 끊임없이 붙여 주시고 방해가 되면 빼 버리신다. 그렇게 멤버체인지 되며 순종하는 자의 삶은 계속해서 전진뿐이다.
“그럼 함께했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에게는 또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쭙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장 中
상대방에게 뛰어가 ‘지금 당장 중단하라’고 말하려는 그에게 ‘지금은 침묵하고 기도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 음성을 무시하고 기도보다 앞서 나가서 상대방에게 조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분란이 일어난다. 분란까지는 아니어도 상대방이 조언을 따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상대방을 보며 본인은 더욱 실망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실망감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오롯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의 부정적인 감정은 상대방에게 같은 감정을 유발할 것이다. 잘못한 주제에 화까지 내는 상대방을 보며 그는 괘씸함을 느낄 것이고 언행은 더욱 거칠어질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며 한때는 가장 소중했던 동료, 동역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무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는 사탄의 시나리오! 이런 시행착오 속에서 성도는 ‘순종의 필요성’을 배워 간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삶을 감당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나 대신 나의 삶을 살아 주소서!”
연단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그렇게 순종의 훈련이 끝나 갈 때쯤 그의 발걸음은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되는 하나님의 시나리오!
노력하라는 말은 이미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사람에겐 오히려 부담감만 증폭시켜 아예 노력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다가 자꾸만 같은 죄를 범하여 낙심해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선 뭐라고 말씀하실까. 더욱 분발하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실까?
“너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단다. 이전의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단다(고후 5:17)”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밤나무에선 대추가 열리지 않는다.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밤나무에선 밤이 열릴 뿐이다. 죄의 종자였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술, 담배, 마약, 음란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이미 그것에 대한 감수성이 형성된 상태이기에 기회가 되면 다시 또 손을 댈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중독 상태로 순식간에 되돌아가게 된다. 죄도 마찬가지다. 폭력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폭력을 쓰고 싶은 욕구로부터 자유롭다.
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폭력을 사용했던 경험이 있는 자는 폭력을 쓰고 싶은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 욕구와 싸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험담, 미움, 복수, 절도, 거짓말 등 한번 활성화 된 죄는 다시 비 활성화 시킬 수 없다. 발아된 죄의 싹은 잡초처럼 뽑아도 계속 돋아나서 인간의 힘만으론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노력을 통해서 죄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모든 죄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참을 수 없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패턴의 반복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죄란 그런 것이다. 모든 죄는 이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노력해도 자꾸만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은 깊은 절망감이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주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성경은 말씀한다.
“죽을 필요 없다. 넌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우리의 본래 일정표이다.
죄지음 → 죽음 → 심판을 받기 위해 심판대 앞으로 감 → 유죄 판결 → 지옥 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변경된 일정표이다.
죄지음 → 주님이 대신 죽으심 → 주님께서 나 대신 심판대 앞으로 감 → 무죄 판결 → 무죄로 인해 십자가 사형으로 인한 죽음은 무효가 됨 → 다시 살아나심 →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 대신 내 삶을 살아 주심
변경된 일정표를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일정표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악마 숭배자들의 간증을 듣다 보면 ‘악마와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소원을 들어준 대가로 악마는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자신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악마가 주인이 된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운전미숙에 음주, 난폭 운전까지 일삼다 큰 사고를 낸 난봉꾼이 있다. 차는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부서졌고 상대방 피해를 보상하지 않으면 구속까지 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때 한 신사가 나타나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 부서진 차를 내게 준다면 깨끗이 고쳐 주고, 당신에게 청구된 금액 또한 모두 해결해 주겠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차를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이상하긴 하지만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이 거래를 수락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신사는 청구금을 해결하고 부서진 차를 수리하여 새것처럼 만들었다. 이제 이 자동차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신사는 차를 뺏지 않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하려는 좋은 일에 동참해 준다면 나 또한 당신의 일을 돕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이제부터 이 차에 내가 동승하여 운전방법도 가르쳐 주겠소. 나와 함께한다면 이 차는 좋은 일에만 사용될 것이고 당신 또한 더 이상 위험하고 미숙한 운전자가 아니라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것이오.”
난봉꾼은 생각에 잠겼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예전처럼 차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렇게 고마운 분의 제안을 무시할 순 없잖아. 생각해 보니 내게도 좋은 기회일지 몰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까. 이분과 함께하면 어둡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을지 몰라. 게다가 이 부유한 신사분도 나를 도와준다고 했어. 벌금도 대신 내주고 차까지 고쳐 준 걸 보니, 저분 마음에 들기만 하면 분명 큰 도움을 주실 거야. 한번 믿어보자.’
눈치챘는가. 부서지고 망가졌던 그 차는 곧 우리의 몸이고 미숙한 운전실력을 가진 운전자는 우리다. 신사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차는 다시 미숙한 난봉꾼이 운전하는 차가 된다. 난봉꾼이 운전하는 차는 어떻게 될까?
청구서 정산 내역에 따라 변경된 일정표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고 우리 몸의 소유권은 사실상 주님이 된다.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동차가 운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쓰임새를 갖듯 사람의 몸 또한 운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죄인의 영혼이 운전하는 육신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운전자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인간의 육신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에서는 이 상황을 식물의 접붙임으로 설명하고 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1장 中
아담이라는 죄에 오염된 나쁜 나무가 있다. 우리는 그에게 붙어 있던 가지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나무로 접붙여졌다. 나쁜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좋은 나무로 옮겨 붙여진 우리는 이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좋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맛보게 된다. 이 사실을 믿는가? 믿어야만 붙어 있을 수 있다. 그 믿음이 없는 자는 좋은 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中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영의 영역이다. 마치 귀신에 빙의 된 자들이 귀신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다가 점차 삶이 망가지듯,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새로운 인격이 형성되어 그 인격이 시키는 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다. 성경은 이를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도가 심한 경우,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 하여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인격이 존재하는 이른바 다중인격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감정에 사로잡혀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이 원리를 반대로 적용해 보자. 악한 행실이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인격에서 튀어나온 행동이라면 선한 행실 역시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성경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술에 취한 상태와 비교 설명하고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이 그러하듯 성령 충만 받게 되면 평소의 자신이라면 할 수 없던 선한 일들을 능히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 운전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 앞에 직면했을 때 내면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음성은 순종할수록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게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점차 들리지 않게 된다. 그 음성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려 하면 ‘사랑하라’ 권면하고, 끓어 오르는 혈기로 폭발하려 할 땐 ‘온유하라’ 다독인다.
주님을 영접한 뒤부터 시작된 이 음성은 본래 내 안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 음성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근심이 서서히 차오르고, 순종하면 평안이 점차 마음속을 채워온다. 처음 순종이 가장 어렵다. 그러나 몇 번 순종하다 보면 이렇게 사는 삶이, 내 마음대로 사는 삶보다 훨씬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는 순종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처음 순종에 따르는 보상은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 순종하다 보면 성령님의 음성이 삶의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온전한 믿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살면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복을 받게 되겠구나.”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정죄하는 교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세요.”
그러나 성령체험과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전하는 이른바 ‘성령 사역자’들은 하나같이 영혼의 구원과 함께 물질, 신유 같은 개인의 필요까지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기도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기도하는 성도들, 적당히 말고 충분히 기도하는 성도들은 한결같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고 간증한다.
이것은 믿음이고 믿음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겠는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
원희에게 주님은 4번처럼 느껴진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문밖에서 싫은 음식의 냄새만 맡아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민감한 손님처럼 생각된다. 원희는 주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주님이 이토록 죄에 민감한 분인 줄 알았다면 그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처음엔 이렇지 않으셨다. 죄가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누구보다 가깝게 함께 하시던 주님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절대적인 기준을 요구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면 원희는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원희에게, 마치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를 불러 세우셨던 주님, 그의 마음 문을 간절히 두드리던 주님이셨는데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갈급한 것은 그가 되었다.
샤론의 꽃 같은 주님의 매력은 원희의 영혼을 강하게 사로잡았고 그로 인해 원희는 언제나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다. 오래전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셨던 것처럼, 때로는 다급하게 또 때로는 눈물로 주님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원희가 처음으로 주님께 매달려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그는 물질보다 주님의 성품을 구하고 있었고, 그가 판매하는 상품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업사원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님께서 원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처럼 부르시더니 완벽한 온유, 완벽한 인내를 넘어 이제는 분노하게 만든 상대방을 사랑하고 축복까지 해주라 말씀하신다. 놀라운 사실은 10년 전이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순종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주님께서 원희에게 요구하시는 기도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앞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기준이 더욱 엄격해지리란 것을 그도 알고 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그는 달리 갈 곳이 없다. 대안이 없다. 세상 것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아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시도는 부질없었다. 어떤 것은 그냥 재미가 없고 어떤 것은 아주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엔 어김없이 공허감이 주님 대신 그를 찾아왔다.
“와!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요.”
연습을 하면 실력은 늘었지만 재미없는 것은 여전했다.
“하다 보면 재미있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 의미 없는 행위를 재미있어질 때까지 견디며 반복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상 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공허감이 싫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공허감은 커지고 그것은 이내 알 수 없는 우울감과 오버랩되고 만다. 아! 바보같이 깜빡 잊고 있었다. 그 공허감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는 영원함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었고 진리는 돌이켜지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오직 주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 그는 성경 속 인물들이 느꼈던 희로애락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헤맸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무엇인지 안다. 영의 심장은 주님과 동행할 때면 뜨겁게, 주님의 부재로 차갑게 얼어붙는다.
이제 그는 주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면 어김없이 울리는 영혼의 사이렌... 호흡이 끊어질 것 같다. 산소처럼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의 임재, 맥박은 안정을 되찾고 삶은 다시 활력을 뿜는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이것은 여행이나 음식, 영화 따위로는 얻을 수 없는 절대 감정이다.
사랑은 사랑에 반응한다. 사랑만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완벽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준 상대방에게 구속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강제성이 전혀 없는 자발적인 구속으로 상대방을 위해 사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죄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리라.
지쳐 낙심되어 쓰러지면 어김없이 다가오시고 당신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할 때면 여지없이 멀어지는 주님의 밀고 당김 속에서, 그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날마다 많은 시간을 기도했고 삶 곳곳에서 기도의 응답도 경험했다. P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하는 성도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P가 전하는 메시지에 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P와 함께 이야기 나누길 원했으며 P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일이라 믿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렸다. P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지만 생각만큼 열매는 나타나지 않았다.
10 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P를 만났을 때, 그는 성도의 교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은혜 받으면 뭐합니까. 어차피 실천도 하지 않을 거면서... 며칠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거면서...”
P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 기도요청해오는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기도요청을 한 성도들은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배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고 하루에 1장의 성경조차 읽지 않았으며 10분도 진득하게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P에게 기도를 요청해왔다. 사실 그것은 기도부탁이라기보다는 흔한 고민상담에 가까웠다. P는 실망스런 마음에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천하지 않는 솔루션은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 P의 독려를 들은 성도들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조언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태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P는 더욱 실천을 촉구했고 마치 내준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성도들의 실천여부를 확인하려했다. P의 독려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실천을 재촉하는 말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P는 상대방이 자신의 그런 태도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P 역시 상대방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성도들을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실천에 대한 촉구는 스스로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좀 더 발전된 모습과 더 나은 내일을 요구했다. 효과는 있었다. P는 다방면에서 꾸준한 발전을 보였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문제가 찾아왔다.
들판을 가득 메운 잠자리 떼가 기쁨의 비행을 할 만큼 따사로운 가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또한 밝았으며 맑기도 했다. 그러나 P의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하늘은 푸르지 않았으며 밝지 않았다. 도시의 그늘처럼 잿빛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뺨 굴곡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눈물의 의미를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유 없는 슬픔이 그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소소한 목표들을 대부분 달성한 그는 이제 최종 목표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최종 목표를 이룬다 해도 그것이 그의 삶에 지속적인 행복을 선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 또 잠깐 얼마동안은 짜릿할 것이다. 구름이라도 밟은 듯 아스팔트 바닥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기분도 들것이다. 잠시나마 성취감은 그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P는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P는 마치 해야 할 숙제가 있는 학생처럼 의무감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 낸 미소 때문에 그를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과정 가운데 P의 차가운 면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냉정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원치 않았으며 본인 또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빈틈없이 정확했으며 옳았다. 하지만, 그의 ‘옮음’이 상대방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정확함’이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
P는 날카로웠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던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움에 찔려 아파했다. 그러나 그것은 P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시에 찔린 이들 중 몇몇은 더 날카로운 가시로 그의 살을 찔렀다. 이것 역시 그가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찌르고 찔리며 P는 아파했다. 그는 찌르길 원치 않았으며 찔리기도 원치 않았다. 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다가오면 나의 가시에 당신은 찔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또한 나를 찌르겠지요. 나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나는 이 거리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신 또한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주세요.”
P는 자꾸만 상대방의 부족한 면을 바라보게 되는 자신의 시선이 싫었다. 끊임없이 완벽을 요구하는 스스로에게 지쳐버렸다. 그런 성품이 업무적 완성도를 높여 준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기도했다.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태어났습니까. 왜 내 눈에는 온통 문제점만 보입니까. 고쳐야 할 것들만 보입니까. 차라리 나를 고쳐 주소서.”
거인의 정원처럼 냉기만이 감돌던 P의 마음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사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사랑을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그의 영을 채우기 시작했다. 살짝만 비벼도 부서져 내리는 비스킷 조각처럼 말라서 푸석대는 그의 영혼에 은혜의 단비가 내려앉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잔뜩 머금어질 때쯤 마침내 P의 사랑도 눈을 떴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하나님과의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의 세상은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로수의 나뭇잎사귀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던 P는 업무 중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곤 했다.
‘앗! 제가 2시간 동안 주님 생각을 안했네요. 저를 기다리셨나요? 주님, 너무나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고백은 새벽기도를 위해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어 수면이 그의 의식을 소등시킬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필름이 끊겼다. 언제,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기도는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랑을 속삭이진 않는다. 근무 시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는 이제 거룩함을 가장한 다소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기도할 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오늘도 제 삶에 함께해 주시고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고...”
어린아이 같던 그의 기도는, 마치 남자다움을 강요받고 자란 성인남성처럼 무뚝뚝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즈니스 관계처럼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그의 영혼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中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채우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아! 나에게 사랑이 없었구나.’
P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어 했던 이유, 본인 또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힘들었던 이유, 그것은 ‘사랑의 부재’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자 그는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그의 눈에는 온통 ‘사랑’이라는 글자만이 가득 들어왔다.
‘아니!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렇게 많았었나.’
그는 사랑 없이 사랑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 없이 전했던 것이다.
‘주님, 사람 자체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저에게 사람 그 자체를 사랑으로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안목을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서자 사람들 또한 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실천하지 않는 상대방을 책망하지 않았다. 기다리며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의 가성비를 논하지 않았다. 잠깐씩이었지만 떠오르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눈웃음 짓는 시간도 있었다. 드디어 그의 삶에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본인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고집을 내려놓았다. 그는 웃으며 P에게 항복했다.
“하하하! 제가 졌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다 맞는 말씀이니까요.”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동화되어 있는 시간만큼은 상대방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상대방에게 실망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그의 기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무심코 기도를 읇조리던 그는 스스로의 기도를 듣고 본인도 살짝 놀랐다. 무엇인가를 구하는 요청 대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어느새 그의 눈물은 멈추어 있었다. 다시 사랑이 시작된 후부터였을 것이다. P의 정원에 더 이상의 찬바람이 불지 않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와 그 반대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를 정리해 보자. 우선 성령충만하면 침착하고 그렇지 않을 땐 산만하다. 성령으로 충만할 땐 행복하고 밝으며 자신감과 인내심이 뒷받침 된다.
반대로 성령님의 부재가 느껴질 때는 기분이 어두워지고 삶은 불만족스러우며 매사에 끈기가 부족하여 하는 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성령충만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상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령충만 여부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서 문제를 받아들이고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너무 많은 비교 케이스가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함축된다.
"모든 좋은 것 아니면 모든 나쁜 것”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성령의 부재, 그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고통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마치 자리를 비우신 듯한 그 느낌하나 만으로도 성도는 충분한 압박감을 느낀다. 다윗이 절규하며 외쳤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장 11절)
전체 문맥에서 느껴지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다윗은 ‘성령의 부재’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성령부재’는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는 마이너스 감정을 선사한다. 빛이 떠난 자리에 어둠이 깃들 듯 슬픔, 우울, 분노와 같은 어둠의 감정들이 승냥이 패거리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미워할만 해서 미워했고 괘씸한 사람이 승승장구하기에 질투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좋지 않다. 모두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감정들인데 어째서인지 내 마음이 좋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악한 감정을 허락하며 살아보지만 그럴수록 기쁨은 사라지고 어두운 감정들이 스스로를 장악한다.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실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구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잔뜩 기(氣)가 산 사람의 모습과 닮아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흡사 기가 꺾인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기가 죽은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는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기에 일차적으로는 전도가 힘들어진다. 감정상태가 불안정해지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의욕이 없어지며 그러한 감정으로 유발된 부정적인 결과물들이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령충만’ 속에서 영업의 정점에 올라섰던 영업 맨은 ‘성령부재’를 느끼는 순간부터 계약 체결이 잘 안 되기 시작한다. 생산직에서 일하는 성도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을 생산하고 목회자는 설교의 영향력이 사라진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후회할 행동들을 멈추지 못하고 서비스직 종사자의 경우 서비스의 질이 나빠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성령부재’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것뿐이다. 즉,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원래 본인 자리로 되돌아간 것뿐이다. 그렇게 예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 자리가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예전처럼 대충 살아지지가 않는다. 막 사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더 이상 죄가 즐겁지 않다. 어째서일까?
이미 ‘성령충만’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해 본 경험이 있기에 ‘성령의 부재’가 얼마나 어둡고 아프고 슬픈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평생 고아로 살다가 아버지의 품을 경험해 보았기에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하루를 살아보고 삶의 문제를 돌파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성령부재’ 상태로 남은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성령충만을 통해 진정한 안정감을 경험해 본 이들은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즉시로 깨닫게 된다.
‘돌아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께로 가야 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편 42편 1절)
그것은 우리의 영이 자각하는 생존 본능이다. 성령 충만을 이미 경험한 이로서는 ‘성령의 부재’ 상태가 얼마나 큰 위기인지를 직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성령님을 내 삶에 모셔 들이길 원한다면
첫째, 그에 걸맞은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생각의 수도꼭지를 단속하여 성령께서 기뻐하실 만한 생각이 아니면 즉시 수도꼭지를 잠가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악한 것 위에 깃드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분노하고 염려하면서 성령님을 모실 수는 없다. 더 이상 나쁜 생각이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둘째, 성령님을 초대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평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영을 모셔 들일 수 없다. 주신 것은 물론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해서도 이미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셋째,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하나님께 몰입이 필요하다. 어차피 성령 충만한 상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다. 성령충만함은 특별함에 도달한 상태이다. 특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평범을 넘어서는 특별한 신앙노력이 필요하다.
이렇듯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일단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가 않다. 이것은 자전거로 속도를 내는 원리와 흡사하다. 멈춰있는 자전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주어 페달을 밞아야 하지만 일단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크게 힘들여 페달을 밞지 않아도 자전거가 굴러가는 원리와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영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고통에 가까운 신앙적 몸부림을 통해 간신히 성령으로 충만해져 본 사람은 함부로 성령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그 소중한 느낌을 소멸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렵게 되찾은 영적인 충만함과 안정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 마음은 24시간 기도를 가능하게 만든다. 주야로 주님을 묵상하며 성령님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성령충만을 늘 부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문화생활이란것에 할애할 시간적 여유마저 사라진다. 혹시라도 성령님을 놓칠세라 계속해서 주님께 집중하고 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자녀가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는 자가 있느냐.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9~13절)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졌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말씀이 되어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요한복음 1장 中)
불면증 환자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잠을 자게 된다. 중증 우울증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차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씀을 접했을 때만큼이나 쉽고도 어려운 제안일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읽을 수가 없다. 너무 쉬워 보여서 오히려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것이 성경 읽기이다.
본래 믿음이란 당사자가 믿을 때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단한 기적의 현장을 보여주며 ‘당신 또한 믿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 말해 준다해도 당사자가 믿지 않고 빈정거리면 그 믿음은 결실을 거둘 수 없다. 이렇듯 믿음은 당사자가 ‘아멘’으로 화답하며 믿을 때 비로소 효력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다르다. 성경 말씀은 당사자가 믿건 믿지 않건, 심지어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며 읽어도 읽기만 하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말씀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간곡히 권해준 성경을, 담배를 피우며 읽던 청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끄게 되었다.
“이것은 담배를 피우며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훗날 말씀을 전하는 부흥 강사가 되었다. 한국 선교 초기 종이가 귀하던 시절, 도배지 대신 사용한 벽에 붙은 성경 구절을 무심코 따라 읽다가 회심한 사례는 유명하다. 선교사조차 파송될 수 없는 복음의 불모지라 할지라도 성경만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책이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의 인격체처럼 누군가의 마음 문을 열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훈련 시켜 마침내 전도자의 길을 걷게 하신다. 선교의 불모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온 성도는 목숨처럼 말씀을 사모한다. 그런 현장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
반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어 마음껏 복음을 전해도 되는 곳에선 하나님의 말씀이 희소성을 잃은 흔한 광물처럼 굴러다니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교인들은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경책과 신앙 에세이, 인터넷 설교영상 사이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취사 선택하여 듣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말씀을 평가하고 제하여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아, 이 말씀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태도는 말씀을 하나님이라는 인격 자체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정보로 대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행동일 것이다. 이런 태도로 말씀을 접하는 사람은 삶의 문제 앞에서 말씀이 능력이 되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121편 1~2절)
부도로 무너진 가정이 회복되는 10년의 세월을 이 말씀 하나 붙잡고 버텨낸 성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씀만 암송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슬픔이 사라지면서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었어요."
이렇듯 한 구절을 제대로 붙들기만 하면 그의 삶에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히브리서 4장 12절)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은 성경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눈으로 읽어야 하는 글이지만 들으려 하면 들리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음성, 사랑하는 사람의 머릿결을 넘기듯 손끝으로 말씀 구절을 소중히 쓰다듬으며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려 한다면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처럼 섬기며 연인처럼 사모하고 아이처럼 품으며 한 구절, 한 단어, 접속사마저 소중히 받드는 자세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초가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다시 태어나 성도라는 새로운 영적 존재가 된다. 다시 태어난 그는 당분간 아기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세상의 모든 아기는 미숙하며... 귀엽다. 아기 성도 역시 그러하다.
뭔가를 이루려 하는 성취욕은 인간의 지적 욕구 중 하나로서 본능과도 같다. 그래서 아기 성도들조차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고 든다. 이 중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기특하고 거룩한 시도도 있다. 하지만 아기는 노동력으로 측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기는 일터에서 일을 할 수 없으며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아기는 배려의 대상이며 보호의 대상이다. 그리고 조건 없이 사랑 받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다. 아기 성도들은 장성한 믿음에 이른 신앙 선배들의 간증을 들으며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러다가 때로는 자신이 아기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아기의 본분은 무엇일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장 17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라기만 하면 되는 존재 자체가 기쁨인 것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시다가 또 갑자기 사랑스러운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즐겁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성도들은 잊곤 한다. 하나님의 제1 속성이 사랑이란 사실을... 사랑 때문에 인류를 창조하셨고, 사랑 때문에 죄를 지은 인류를 버리지 못하셨으며,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지금도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우리 곁에서 기다리고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힘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역량에 맞지 않는 중압감은 도리어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장하기를 아예 포기하게 만드는 좌절로 이끌기도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장 1절)
무엇인가를 하고 싶고, 무엇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급함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되면 때를 기다릴 수 없게 된다. 조급함은 완성도를 떨어 뜨린다. 밥은 설익고 요리는 타게 되며 알은 부화할 수 없다. 나비는 날 수 없고 영웅은 자신의 날을 맞이 할 수 없다. 그리고 성도에게 조급함이 임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목자 없는 양같이, 부모 없는 아기같이 내 힘으로만 살아야 하는 세상을 살아왔다. 그래서 끊임 없이 뭔가를 해야만 했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은혜의 땅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생존법칙은 무엇일까?
“주님이 하신다. 주님이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지구촌 곳곳 신앙 선배들의 공통된 간증이다. 그들은 분명 아기였을 것이고 일부는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를 평생 아기로 머무르도록 방치하지는 않으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11절)
충분한 배려와 보살핌 속에서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과 부모와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부모가 아이의 영원한 지원자이자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부모와의 유대감이 충분히 형성된 아이는 성인이 되어 혼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기까지 온전히 부모의 가이드를 받으며 안전하게 성장해 갈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를 신뢰하는 것 보다 나의 판단만을 의지하게 되면 말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장 15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처럼 의미 없는 세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는 아기다울 필요가 있다. 아기가 부모의 작은 눈짓에도 까르르 웃어 주듯 하나님의 소소한 은혜에도 감사를 표현하는 성도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쉬며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백수처럼 보이는 세월을 보내고 있을 지라도 그가 정녕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모든 시간들은 의미가 있다. 그는 언젠가 전능하신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직접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장 10절)
하나님이 나만 바라보시는 것 같은 유대감,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는 굳건한 신뢰... 이 모든 것들은 아기가 장성하였을 때 세상을 이길 힘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예배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곤 한다.
목회자의 설교도 중요하고 찬양도 중요하고 음향까지 완벽하면 더욱 좋겠지만 이 모든 부분이 미흡하다 해도 예배는 예배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예배 시간에 정신 집중하여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예배 시간에 딴 생각을 하거나 잠이 들거나 심지어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도 그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긴 한 것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물론 예배는 온 맘과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예배는 예배다. 예전부터 현재까지 많은 불신자들이 가족과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예배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능력은 변화이다. 그 변화는 사람이 쥐어짜듯 간신히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넉넉히 부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싫어도, 귀찮아도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다 보면 점점 더 예배자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게 된다. 반면, 이런저런 핑계로 예배에 나가지 않게 되면 점점 더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한번 모든 예배에 참석해 보라. 주일 예배와 수요, 금요는 물론 가급적이면 새벽 예배까지...
가서 딴 생각을 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도 좋으니 한번 모든 예배에 참석해 보라. 설교자의 설교가 지루해도, 찬양 인도자의 찬양이 본인 취향에 맞지 않아도 예배의 자리에 자신을 끌어다가 가만히 앉혀둬 보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좋은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필자의 직장은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불신자 M도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고백이다.
“오늘은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뭔가 가슴이 울컥하면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라고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착한 일을 경험한 이들의 가장 흔한 간증은 다음과 같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이 평안해 졌다거나 다퉜던 가족과 화해하고 싶어졌다는 등의 심리적 안정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의 마중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에 감사하며 조금씩 예배에 마음을 열고 참석하기 시작하면 드려지는 진정성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임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어디서 이런 추진력과 결단력이 나오는지 본인 스스로가 놀랄 정도다. 평소 같으면 손도 대지 못할 일을 흔들림 없이 우직하게 실천해 나간다. 조롱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머리는 맑고 체력은 충분하며 마음은 담대하다. 인내와 절제가 용이하여 스스로를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자신의 힘이 아닌 또 다른 존재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런 힘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저절로 예배를 사모하게 된다. 일이 잘 풀려 걱정 근심 없게 되어 신앙적 태만이 오고 그래서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가도 어려움이 오면 꺼진 스마트폰을 들고 충전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예배를 찾게 된다.
‘몰입감’은 본인 스스로 자신이 도전하려는 목표에 최적화되었음을 느끼는 상태이다. 완벽한 몰입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면 생각보다 손쉽게 ‘몰입감’에 도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예배는 정말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주일 예배를 3번씩 드리는 청년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했던 그 청년은 불과 3년이 되지 않아서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절박함은 여유로 바뀌어 있었고, 자신에게 가르침과 도움을 주려던 이들에게 역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며 소득 또한 그러했다.
교회를 다닌 지 2년도 되지 않은 청년이 모든 예배를 참석하자 모태 신앙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성도가 되었다. 성경 지식은 물론 성령체험, 사회생활에서 거둔 열매들이 온통 간증 거리가 되어 그야말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단 이뿐 아니라 교회에서 리더십을 펼치는 이들, 단기간에 비약적인 신앙 성장을 보인 성도들은 하나 같이 예배를 소중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신앙의 성장 속도가 예배 횟수와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은혜’라 불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경험합니다. 연애 감정 그 이상의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의 교제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처음 주신 그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잊게 됩니다. 결국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은 모두 잊어버리고 사랑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나도 한때는 뜨거웠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영혼에 깊이 각인된 주님과의 추억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에 성도들은 항상 첫사랑의 감격을 그리워하며 처음과 같은 신앙회복을 연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나...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한 분을 본 바 없습니다. 잠시 회복되는 듯하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낙심하는 나날만이 반복될 뿐.
그러므로 성도는 받은 은혜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잃지 않으려 소중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 다시 기도하면, 다시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건강, 직장, 사업, 결혼, 자녀 문제 등... 모든 문제를 우리 아버지께, 살아계신 전능자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버지께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어 낼 수 없기에 먼저 십자가 앞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고백은 ‘주세요’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첫사랑은 회복될 수 없으나 새로운 삶을 살기에 부족함 없는 크고도 놀라운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中)
사람을 일컬어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세월 속에서 많은 것들을 잊는다.
감정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랑했던 감정을 잊는다. 사랑했었던 사실은 기억하지만 사랑했었던 감정은 사라져서 다투고 미워하다가 끝내 헤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주님과의 사랑도 잊는다.
처음 주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겨서 끝까지 간직한 몇 몇 성도들만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쓰임 받는 종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 사랑의 감정을 잊는다. 그 사랑,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햇살이 주는 따스함, 봄바람의 포근함, 진하게 끓인 보리차의 향이 커피만큼이나 향기롭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본인의 배우자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 모든 것들은 따로 의식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이다. 그러나 따로 시간을 내서 느껴 볼 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자, 이제 성경과 찬송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찬송가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주일학교에서 배웠는지 부모님께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엄하고 조금은 무서운, 그래서 어렵고 또 약간은 어색한 분.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그런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거룩함을 요구하는 분이라고도 한다. 주일학교시절부터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나의 무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엄마 손에 이끌려 참석했던 부흥회에서도 나는 ‘잘못해서 하나님께 두들겨 맞고 끌려왔다’는 부흥강사님들의 강의를 여러 차례 실감나게 들은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나의 창가로 찾아 오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견해로 하나님을 수식하려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본 바에 의하면 결국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씀을 믿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나를 반겨주시리라는 믿음도 생겨 조금씩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볼 엄두가 나기 시작했다.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진 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몹시 기쁘고 하나님께 대한 친근함이 날마다 더해갔다.
“주의 보좌로 나아 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그래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세상을 등진 은둔형 외톨이가 성령님과 교제를 시작했다면 가장 먼저는 마음의 평안이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외출을 촉구하는 마음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나가서 조금 걸어 보자’
그 음성에 순종하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부정적인 마음도 따라 올 것이다. 완벽히 성령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으면 그렇게 두 음성을 듣기 마련이다.
“조금 걷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순종하지 않았더니 첫째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내 평안도 사라지고 다시 강한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렇게 다시 어둔 감정에 사로잡혀 TV, 스마트폰만 보며 지내다 보면 다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의 갈급함 때문이다. 한번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본 자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게 된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다시 그 음성이 들려올 것이다. 단, 다시 은혜를 회복하려면 평소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멈춰 서 있던 녹슨 자전거의 패달을 밟는 것처럼 쌓인 영적 이물질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둠부터 몰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혼의 대청소가 끝나면 다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가서 걸어 보자’
이번엔 순종하지 않은 뒤에 찾아올 어둔 감정이 두려워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는다. 순종했더니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처음 산책을 권면했던 음성은 점차 규칙적인 식단과 운동, 독서와 구직활동을 권하더니 성품과 태도까지 만지시기 시작한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그에게 ‘상냥하라’ 말씀하시고, 사람 눈도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숫기 없던 그에게 미소지으며 먼저 상대방에게 악수를 청하는 미션까지 부여한다.
요구하는 순종의 강도는 계속 올라가 뜬금없이 지하철역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라고 말씀한다.
‘헐,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겁니다. 소리친다 해도 제가 외친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만 갖게 할 뿐이라구요.’
갈등하던 그는 불순종 뒤에 찾아올 ‘님의 침묵’이 두려워 모기 만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더 크게 외쳐 보렴’
문득 ‘기왕이면 교회를 떠난 사람을 향해 외치는 것이 더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오십시오.”
빠르게 걷던 한 남성이 흠칫 놀라 멈춰 섰다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남성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 외침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자리를 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외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외치는 당사자를 훈련 시키기 위한 것이다.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감 넘치는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그는 창업에 도전하게 된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그 음성.
‘가만히 있을 바엔 나가서 전단지라도 나눠주는 것이 낫겠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여전히 긴가민가 하지만 그는 타당성 있는 그 지시에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전단지를 배포하다 보니 효율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더 명료하고 전달력이 좋은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서 고객을 유치해 본 그는 매장 내 방문한 고객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의 고객 유치 전략은 이제 매장 안팎으로 넓어진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장사꾼에서 전문 경영인이 되어 간다. TV 등 미디어에서 전문가들이 하는 말들 중 상당수를 자신이 이미 실천하고 있음에 놀라는 그, 누가 그에게 경영을 가르쳐 주었는가. 이론을 넘어서는 실천 과제를 주었는가.
그러나 그 또한 연단을 피할 수 없었으니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순종하지 않는 자세 때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순종하는 그였다. 멀리해야 한다는 강한 음성이 있었음에도 그는 한 여인을 가까이했다.
‘그녀가 아니다. 너에겐 비할 바 없는 복된 배우자가 예비 되어 있다.’
‘이건 내 생각일 거야. 하나님께서 정말 이 사람과 헤어지길 원하신다면 더 크고 선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세요.’
숱한 기적을 보았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욕심을 고집하다가 기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지금껏 자신을 선한 길로 인도해 준 그 음성에 귀를 막은 그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
‘이 사람을 전도하면 되잖아요. 함께 교회 다니면 되잖아요.’
끊임없이 불순종을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아서 타당성을 부여한다. 그의 방황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 느꼈던 영혼의 기쁨조차 망각시킨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가 불순종해서 택한 배우자와 꾸린 가정에도 변함없이 지켜질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함께 하긴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하신 미래를 기다리지 못한 삶에는 끊임없는 장애물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 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에 원래부터 놓여 있던 장애물일 뿐이다.
이렇듯 불순종하며 살아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는 날 동안 지속적인 평안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더더욱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회개하고 순종을 결단하면 일시적으로 다시 평안이 회복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순종하지 않으면 평안대신 고난과 우울감이 잠식해 들어 올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평안과 기쁨 대신 암울한 삶만 살다가, 이따금 은혜받고 잠깐 회개해서 짧은 회복을 맛보고 다시 암울함으로 돌아가는 ‘긴 우울, 짧은 평안’의 계절을 반복하며 한살 한살 나이만 먹다 늙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천국은 갈 것이다. 그렇게 임마누엘의 약속은 지켜지긴 할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계산적인 그에게 ‘베풀라’고 권면하던 그 음성이 또 어떤 때는 다시 ‘철저히 계산하라’는 마음을 주신다. ‘함께 가라’고 했던 사람을 이제는 ‘멀리하고 경계하며 기도만 해주라’고 말씀하신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행동을 그때그때 주시는 음성에 따라 순종해 나가다 보면 세월 속에서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깨닫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중단했던 예전의 좋지 않은 행동을 다시 시작한 상대방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온전히 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필요한 사람을 끊임없이 붙여 주시고 방해가 되면 빼 버리신다. 그렇게 멤버체인지 되며 순종하는 자의 삶은 계속해서 전진뿐이다.
“그럼 함께했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에게는 또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쭙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장 中
상대방에게 뛰어가 ‘지금 당장 중단하라’고 말하려는 그에게 ‘지금은 침묵하고 기도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 음성을 무시하고 기도보다 앞서 나가서 상대방에게 조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분란이 일어난다. 분란까지는 아니어도 상대방이 조언을 따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상대방을 보며 본인은 더욱 실망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실망감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오롯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의 부정적인 감정은 상대방에게 같은 감정을 유발할 것이다. 잘못한 주제에 화까지 내는 상대방을 보며 그는 괘씸함을 느낄 것이고 언행은 더욱 거칠어질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키며 한때는 가장 소중했던 동료, 동역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무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는 사탄의 시나리오! 이런 시행착오 속에서 성도는 ‘순종의 필요성’을 배워 간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삶을 감당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나 대신 나의 삶을 살아 주소서!”
연단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그렇게 순종의 훈련이 끝나 갈 때쯤 그의 발걸음은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되는 하나님의 시나리오!
노력하라는 말은 이미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사람에겐 오히려 부담감만 증폭시켜 아예 노력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다가 자꾸만 같은 죄를 범하여 낙심해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선 뭐라고 말씀하실까. 더욱 분발하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실까?
“너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단다. 이전의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단다(고후 5:17)”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밤나무에선 대추가 열리지 않는다.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밤나무에선 밤이 열릴 뿐이다. 죄의 종자였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술, 담배, 마약, 음란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이미 그것에 대한 감수성이 형성된 상태이기에 기회가 되면 다시 또 손을 댈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중독 상태로 순식간에 되돌아가게 된다. 죄도 마찬가지다. 폭력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폭력을 쓰고 싶은 욕구로부터 자유롭다.
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폭력을 사용했던 경험이 있는 자는 폭력을 쓰고 싶은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 욕구와 싸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험담, 미움, 복수, 절도, 거짓말 등 한번 활성화 된 죄는 다시 비 활성화 시킬 수 없다. 발아된 죄의 싹은 잡초처럼 뽑아도 계속 돋아나서 인간의 힘만으론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노력을 통해서 죄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러나 모든 죄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참을 수 없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패턴의 반복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죄란 그런 것이다. 모든 죄는 이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노력해도 자꾸만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은 깊은 절망감이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주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성경은 말씀한다.
“죽을 필요 없다. 넌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우리의 본래 일정표이다.
죄지음 → 죽음 → 심판을 받기 위해 심판대 앞으로 감 → 유죄 판결 → 지옥 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변경된 일정표이다.
죄지음 → 주님이 대신 죽으심 → 주님께서 나 대신 심판대 앞으로 감 → 무죄 판결 → 무죄로 인해 십자가 사형으로 인한 죽음은 무효가 됨 → 다시 살아나심 →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 대신 내 삶을 살아 주심
변경된 일정표를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일정표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악마 숭배자들의 간증을 듣다 보면 ‘악마와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소원을 들어준 대가로 악마는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자신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게 된다. 악마가 주인이 된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운전미숙에 음주, 난폭 운전까지 일삼다 큰 사고를 낸 난봉꾼이 있다. 차는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부서졌고 상대방 피해를 보상하지 않으면 구속까지 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때 한 신사가 나타나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 부서진 차를 내게 준다면 깨끗이 고쳐 주고, 당신에게 청구된 금액 또한 모두 해결해 주겠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차를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이상하긴 하지만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이 거래를 수락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신사는 청구금을 해결하고 부서진 차를 수리하여 새것처럼 만들었다. 이제 이 자동차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신사는 차를 뺏지 않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하려는 좋은 일에 동참해 준다면 나 또한 당신의 일을 돕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이제부터 이 차에 내가 동승하여 운전방법도 가르쳐 주겠소. 나와 함께한다면 이 차는 좋은 일에만 사용될 것이고 당신 또한 더 이상 위험하고 미숙한 운전자가 아니라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것이오.”
난봉꾼은 생각에 잠겼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예전처럼 차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렇게 고마운 분의 제안을 무시할 순 없잖아. 생각해 보니 내게도 좋은 기회일지 몰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까. 이분과 함께하면 어둡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을지 몰라. 게다가 이 부유한 신사분도 나를 도와준다고 했어. 벌금도 대신 내주고 차까지 고쳐 준 걸 보니, 저분 마음에 들기만 하면 분명 큰 도움을 주실 거야. 한번 믿어보자.’
눈치챘는가. 부서지고 망가졌던 그 차는 곧 우리의 몸이고 미숙한 운전실력을 가진 운전자는 우리다. 신사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차는 다시 미숙한 난봉꾼이 운전하는 차가 된다. 난봉꾼이 운전하는 차는 어떻게 될까?
청구서 정산 내역에 따라 변경된 일정표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고 우리 몸의 소유권은 사실상 주님이 된다.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동차가 운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쓰임새를 갖듯 사람의 몸 또한 운전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죄인의 영혼이 운전하는 육신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운전자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인간의 육신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에서는 이 상황을 식물의 접붙임으로 설명하고 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1장 中
아담이라는 죄에 오염된 나쁜 나무가 있다. 우리는 그에게 붙어 있던 가지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나무로 접붙여졌다. 나쁜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좋은 나무로 옮겨 붙여진 우리는 이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좋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맛보게 된다. 이 사실을 믿는가? 믿어야만 붙어 있을 수 있다. 그 믿음이 없는 자는 좋은 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 中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영의 영역이다. 마치 귀신에 빙의 된 자들이 귀신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다가 점차 삶이 망가지듯,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새로운 인격이 형성되어 그 인격이 시키는 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다. 성경은 이를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도가 심한 경우,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 하여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인격이 존재하는 이른바 다중인격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감정에 사로잡혀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이 원리를 반대로 적용해 보자. 악한 행실이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인격에서 튀어나온 행동이라면 선한 행실 역시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성경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술에 취한 상태와 비교 설명하고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이 그러하듯 성령 충만 받게 되면 평소의 자신이라면 할 수 없던 선한 일들을 능히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 운전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 앞에 직면했을 때 내면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음성은 순종할수록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게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점차 들리지 않게 된다. 그 음성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려 하면 ‘사랑하라’ 권면하고, 끓어 오르는 혈기로 폭발하려 할 땐 ‘온유하라’ 다독인다.
주님을 영접한 뒤부터 시작된 이 음성은 본래 내 안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 음성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근심이 서서히 차오르고, 순종하면 평안이 점차 마음속을 채워온다. 처음 순종이 가장 어렵다. 그러나 몇 번 순종하다 보면 이렇게 사는 삶이, 내 마음대로 사는 삶보다 훨씬 유익함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는 순종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처음 순종에 따르는 보상은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 순종하다 보면 성령님의 음성이 삶의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온전한 믿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살면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복을 받게 되겠구나.”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정죄하는 교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세요.”
그러나 성령체험과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전하는 이른바 ‘성령 사역자’들은 하나같이 영혼의 구원과 함께 물질, 신유 같은 개인의 필요까지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기도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기도하는 성도들, 적당히 말고 충분히 기도하는 성도들은 한결같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고 간증한다.
이것은 믿음이고 믿음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겠는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유형
1. 투덜거리면서도 먹어 주는 유형
2. 투덜거리기만 하고 먹지 않는 유형
3. 말없이 먹어 주는 유형
4. 말없이 먹지 않는 유형
원희에게 주님은 4번처럼 느껴진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문밖에서 싫은 음식의 냄새만 맡아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민감한 손님처럼 생각된다. 원희는 주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주님이 이토록 죄에 민감한 분인 줄 알았다면 그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처음엔 이렇지 않으셨다. 죄가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누구보다 가깝게 함께 하시던 주님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절대적인 기준을 요구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면 원희는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원희에게, 마치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를 불러 세우셨던 주님, 그의 마음 문을 간절히 두드리던 주님이셨는데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갈급한 것은 그가 되었다.
샤론의 꽃 같은 주님의 매력은 원희의 영혼을 강하게 사로잡았고 그로 인해 원희는 언제나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다. 오래전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셨던 것처럼, 때로는 다급하게 또 때로는 눈물로 주님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원희가 처음으로 주님께 매달려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그는 물질보다 주님의 성품을 구하고 있었고, 그가 판매하는 상품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업사원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님께서 원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처럼 부르시더니 완벽한 온유, 완벽한 인내를 넘어 이제는 분노하게 만든 상대방을 사랑하고 축복까지 해주라 말씀하신다. 놀라운 사실은 10년 전이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순종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주님께서 원희에게 요구하시는 기도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앞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기준이 더욱 엄격해지리란 것을 그도 알고 있다. 그러나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그는 달리 갈 곳이 없다. 대안이 없다. 세상 것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아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시도는 부질없었다. 어떤 것은 그냥 재미가 없고 어떤 것은 아주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엔 어김없이 공허감이 주님 대신 그를 찾아왔다.
“와!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요.”
연습을 하면 실력은 늘었지만 재미없는 것은 여전했다.
“하다 보면 재미있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 의미 없는 행위를 재미있어질 때까지 견디며 반복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상 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공허감이 싫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공허감은 커지고 그것은 이내 알 수 없는 우울감과 오버랩되고 만다. 아! 바보같이 깜빡 잊고 있었다. 그 공허감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는 영원함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었고 진리는 돌이켜지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오직 주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 그는 성경 속 인물들이 느꼈던 희로애락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헤맸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무엇인지 안다. 영의 심장은 주님과 동행할 때면 뜨겁게, 주님의 부재로 차갑게 얼어붙는다.
이제 그는 주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면 어김없이 울리는 영혼의 사이렌... 호흡이 끊어질 것 같다. 산소처럼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의 임재, 맥박은 안정을 되찾고 삶은 다시 활력을 뿜는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이것은 여행이나 음식, 영화 따위로는 얻을 수 없는 절대 감정이다.
사랑은 사랑에 반응한다. 사랑만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완벽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준 상대방에게 구속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강제성이 전혀 없는 자발적인 구속으로 상대방을 위해 사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죄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리라.
지쳐 낙심되어 쓰러지면 어김없이 다가오시고 당신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할 때면 여지없이 멀어지는 주님의 밀고 당김 속에서, 그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이 그러하듯 P 또한 주님을 만난 직후에는 뜨거웠었다.
그는 날마다 많은 시간을 기도했고 삶 곳곳에서 기도의 응답도 경험했다. P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하는 성도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P가 전하는 메시지에 그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P와 함께 이야기 나누길 원했으며 P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일이라 믿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렸다. P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지만 생각만큼 열매는 나타나지 않았다.
10 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P를 만났을 때, 그는 성도의 교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은혜 받으면 뭐합니까. 어차피 실천도 하지 않을 거면서... 며칠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거면서...”
P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 기도요청해오는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기도요청을 한 성도들은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배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고 하루에 1장의 성경조차 읽지 않았으며 10분도 진득하게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P에게 기도를 요청해왔다. 사실 그것은 기도부탁이라기보다는 흔한 고민상담에 가까웠다. P는 실망스런 마음에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천하지 않는 솔루션은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 P의 독려를 들은 성도들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조언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태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P는 더욱 실천을 촉구했고 마치 내준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성도들의 실천여부를 확인하려했다. P의 독려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실천을 재촉하는 말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P는 상대방이 자신의 그런 태도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P 역시 상대방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성도들을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실천에 대한 촉구는 스스로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좀 더 발전된 모습과 더 나은 내일을 요구했다. 효과는 있었다. P는 다방면에서 꾸준한 발전을 보였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문제가 찾아왔다.
들판을 가득 메운 잠자리 떼가 기쁨의 비행을 할 만큼 따사로운 가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또한 밝았으며 맑기도 했다. 그러나 P의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하늘은 푸르지 않았으며 밝지 않았다. 도시의 그늘처럼 잿빛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뺨 굴곡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눈물의 의미를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유 없는 슬픔이 그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소소한 목표들을 대부분 달성한 그는 이제 최종 목표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최종 목표를 이룬다 해도 그것이 그의 삶에 지속적인 행복을 선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 또 잠깐 얼마동안은 짜릿할 것이다. 구름이라도 밟은 듯 아스팔트 바닥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기분도 들것이다. 잠시나마 성취감은 그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P는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P는 마치 해야 할 숙제가 있는 학생처럼 의무감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 낸 미소 때문에 그를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과정 가운데 P의 차가운 면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냉정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원치 않았으며 본인 또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빈틈없이 정확했으며 옳았다. 하지만, 그의 ‘옮음’이 상대방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정확함’이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
P는 날카로웠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던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움에 찔려 아파했다. 그러나 그것은 P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시에 찔린 이들 중 몇몇은 더 날카로운 가시로 그의 살을 찔렀다. 이것 역시 그가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찌르고 찔리며 P는 아파했다. 그는 찌르길 원치 않았으며 찔리기도 원치 않았다. 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다가오면 나의 가시에 당신은 찔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또한 나를 찌르겠지요. 나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나는 이 거리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신 또한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 주세요.”
P는 자꾸만 상대방의 부족한 면을 바라보게 되는 자신의 시선이 싫었다. 끊임없이 완벽을 요구하는 스스로에게 지쳐버렸다. 그런 성품이 업무적 완성도를 높여 준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기도했다.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다.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태어났습니까. 왜 내 눈에는 온통 문제점만 보입니까. 고쳐야 할 것들만 보입니까. 차라리 나를 고쳐 주소서.”
거인의 정원처럼 냉기만이 감돌던 P의 마음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사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사랑을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그의 영을 채우기 시작했다. 살짝만 비벼도 부서져 내리는 비스킷 조각처럼 말라서 푸석대는 그의 영혼에 은혜의 단비가 내려앉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잔뜩 머금어질 때쯤 마침내 P의 사랑도 눈을 떴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하나님과의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의 세상은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로수의 나뭇잎사귀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던 P는 업무 중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곤 했다.
‘앗! 제가 2시간 동안 주님 생각을 안했네요. 저를 기다리셨나요? 주님, 너무나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고백은 새벽기도를 위해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어 수면이 그의 의식을 소등시킬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필름이 끊겼다. 언제,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기도는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랑을 속삭이진 않는다. 근무 시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는 이제 거룩함을 가장한 다소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로 기도할 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오늘도 제 삶에 함께해 주시고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고...”
어린아이 같던 그의 기도는, 마치 남자다움을 강요받고 자란 성인남성처럼 무뚝뚝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즈니스 관계처럼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그의 영혼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中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채우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아! 나에게 사랑이 없었구나.’
P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어 했던 이유, 본인 또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힘들었던 이유, 그것은 ‘사랑의 부재’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자 그는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그의 눈에는 온통 ‘사랑’이라는 글자만이 가득 들어왔다.
‘아니!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렇게 많았었나.’
그는 사랑 없이 사랑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 없이 전했던 것이다.
‘주님, 사람 자체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저에게 사람 그 자체를 사랑으로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안목을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서자 사람들 또한 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실천하지 않는 상대방을 책망하지 않았다. 기다리며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의 가성비를 논하지 않았다. 잠깐씩이었지만 떠오르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눈웃음 짓는 시간도 있었다. 드디어 그의 삶에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본인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고집을 내려놓았다. 그는 웃으며 P에게 항복했다.
“하하하! 제가 졌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다 맞는 말씀이니까요.”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동화되어 있는 시간만큼은 상대방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다. 상대방에게 실망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그의 기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무심코 기도를 읇조리던 그는 스스로의 기도를 듣고 본인도 살짝 놀랐다. 무엇인가를 구하는 요청 대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어느새 그의 눈물은 멈추어 있었다. 다시 사랑이 시작된 후부터였을 것이다. P의 정원에 더 이상의 찬바람이 불지 않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과는 반대로 성령의 부재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와 그 반대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를 정리해 보자. 우선 성령충만하면 침착하고 그렇지 않을 땐 산만하다. 성령으로 충만할 땐 행복하고 밝으며 자신감과 인내심이 뒷받침 된다.
반대로 성령님의 부재가 느껴질 때는 기분이 어두워지고 삶은 불만족스러우며 매사에 끈기가 부족하여 하는 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성령충만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상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령충만 여부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상황에서 문제를 받아들이고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너무 많은 비교 케이스가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함축된다.
"모든 좋은 것 아니면 모든 나쁜 것”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성령의 부재, 그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고통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마치 자리를 비우신 듯한 그 느낌하나 만으로도 성도는 충분한 압박감을 느낀다. 다윗이 절규하며 외쳤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장 11절)
전체 문맥에서 느껴지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다윗은 ‘성령의 부재’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성령부재’는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는 마이너스 감정을 선사한다. 빛이 떠난 자리에 어둠이 깃들 듯 슬픔, 우울, 분노와 같은 어둠의 감정들이 승냥이 패거리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미워할만 해서 미워했고 괘씸한 사람이 승승장구하기에 질투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좋지 않다. 모두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감정들인데 어째서인지 내 마음이 좋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악한 감정을 허락하며 살아보지만 그럴수록 기쁨은 사라지고 어두운 감정들이 스스로를 장악한다.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실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구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잔뜩 기(氣)가 산 사람의 모습과 닮아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흡사 기가 꺾인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기가 죽은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는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기에 일차적으로는 전도가 힘들어진다. 감정상태가 불안정해지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의욕이 없어지며 그러한 감정으로 유발된 부정적인 결과물들이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령충만’ 속에서 영업의 정점에 올라섰던 영업 맨은 ‘성령부재’를 느끼는 순간부터 계약 체결이 잘 안 되기 시작한다. 생산직에서 일하는 성도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을 생산하고 목회자는 설교의 영향력이 사라진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후회할 행동들을 멈추지 못하고 서비스직 종사자의 경우 서비스의 질이 나빠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성령부재’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것뿐이다. 즉,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원래 본인 자리로 되돌아간 것뿐이다. 그렇게 예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 자리가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예전처럼 대충 살아지지가 않는다. 막 사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더 이상 죄가 즐겁지 않다. 어째서일까?
이미 ‘성령충만’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해 본 경험이 있기에 ‘성령의 부재’가 얼마나 어둡고 아프고 슬픈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평생 고아로 살다가 아버지의 품을 경험해 보았기에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하루를 살아보고 삶의 문제를 돌파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은 ‘성령부재’ 상태로 남은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성령충만을 통해 진정한 안정감을 경험해 본 이들은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즉시로 깨닫게 된다.
‘돌아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께로 가야 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편 42편 1절)
그것은 우리의 영이 자각하는 생존 본능이다. 성령 충만을 이미 경험한 이로서는 ‘성령의 부재’ 상태가 얼마나 큰 위기인지를 직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성령님을 내 삶에 모셔 들이길 원한다면
첫째, 그에 걸맞은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생각의 수도꼭지를 단속하여 성령께서 기뻐하실 만한 생각이 아니면 즉시 수도꼭지를 잠가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악한 것 위에 깃드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분노하고 염려하면서 성령님을 모실 수는 없다. 더 이상 나쁜 생각이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둘째, 성령님을 초대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평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영을 모셔 들일 수 없다. 주신 것은 물론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해서도 이미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셋째,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하나님께 몰입이 필요하다. 어차피 성령 충만한 상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다. 성령충만함은 특별함에 도달한 상태이다. 특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평범을 넘어서는 특별한 신앙노력이 필요하다.
이렇듯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일단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가 않다. 이것은 자전거로 속도를 내는 원리와 흡사하다. 멈춰있는 자전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힘을 주어 페달을 밞아야 하지만 일단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크게 힘들여 페달을 밞지 않아도 자전거가 굴러가는 원리와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영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고통에 가까운 신앙적 몸부림을 통해 간신히 성령으로 충만해져 본 사람은 함부로 성령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그 소중한 느낌을 소멸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렵게 되찾은 영적인 충만함과 안정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 마음은 24시간 기도를 가능하게 만든다. 주야로 주님을 묵상하며 성령님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성령충만을 늘 부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문화생활이란것에 할애할 시간적 여유마저 사라진다. 혹시라도 성령님을 놓칠세라 계속해서 주님께 집중하고 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자녀가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는 자가 있느냐.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9~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