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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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4-13



현재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A 성도님이 다른 멘토분들께 피드백을 요청했었습니다.


이에 다른 멘토분이 정성을 다해 의견을 남겨 주셨습니다. 멘토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글이어서 두 분의 동의를 얻어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멘토분들이 한 영혼을 대할 때 얼마나 심사숙고 하는지... 조언을 건넬 때 얼마나 깊은 고민 끝에 하는 것인지... 실수하고 난 뒤 얼마나 통회하는지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조심하며 말을 건네도 우리 모두는 부족하기에 앞으로도 실수는 있을 것입니다. 분명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선택했고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때로는 식사까지 거르며 섬기고 있지만 목소리 온도 때문에... 때론 급한 마음 때문에... ‘이 정도 관계면 이정도 조언은 해도 되겠지’라는 판단 착오로... 설마 이게 상대방의 역린일 줄 모르고... 그렇게 멘토들은 눈물 쏙 빠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르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내가 밸류체인에 폐를 끼친 건 아닐까. 차라리 떠나는 게 이곳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단언코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멘티 위에 군림하고 싶어서... 내가 더 잘났다고 설치고 싶어서 사역에 참여하는 한가한 바보는 여기 없습니다. 이것을 제가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런 행동 하지 않기로 서로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멘토분들은 끊임없이 저에게 피드백을 받습니다.


“멘토의 위치라고 함부로 멘티를 대하면 멘티는 장성했을 때 나를 떠납니다. 도움도 주고 상처도 주면 나중에 멘티는 나의 열매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가 멘토지만 내일은 상대방이 나와 내 아이의 멘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99번 은혜 입은 것보다 1번의 서운함을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자신 없으면 차라리 멘토링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신신당부 드리지만 우리 모두는 앞으로도 분명 실수를 할 것입니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실수를 반복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7절)



좋은 취지로 하는 것이지만 부족해서... 네 그렇습니다. 부족해서... 자의든 타의든 고의든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실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후회하며 조금씩 자신의 모난 부분을 십자가로 깎아 나아갈 갈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실수를 할 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서로 약속합시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 거야. 그동안 나에게 한 좋은 행동을 생각해봐. 실수는 나도 할 수 있어”


그럼에도 계속 같은 생각이 멤돈다면 저에게 상담요청해주세요. 제가 두 분 사이에 중보자가 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선생님을 위해 기도를 하고, 운동하면서 또 내용을 정리하고 곱씹어 보았습니다. 선생님께 필요한 부분이 무엇일까 매우 고심했습니다. ♥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멘토님보다 선생님이라는 칭호가 더 좋은데요. 선생님이 제게는 훨씬 존경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진짜 대단하시다, 이 많은 분들을 어떻게 다 인도하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멘토링하며 느낀 점은 생각보다 상처 받은 분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멘토링의 어려움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선생님께서 멘토링하실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방지하는 측면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여기 오시는 분들 대부분은 상처가 많다’입니다.


멘토링하시는 분들은 내•외적으로 상처가 많은 분들이셨습니다. 제가 그분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도 상처가 많은지라 그분들이 상처받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언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감과 위로, 격려, 에너지 전달이 주된 키워드였습니다.


선생님의 말투가 사람들을 살리고, 이 공동체를 통해 회복하기 원해서 질서를 유지하게끔 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도 순간적으로 선생님께 상처받을 때가 몇 번 있었는데요.^^ 머리로는 분명 아는데 제 마음그릇이 작아 그 깊이를 담을 수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어요)


저는 심지어 멘토링 시에도 혼내지도, 엄청 단호하게 말씀드리지도 않았어요. 아주 약간 단호했고, 심지어 후에는 축복과 사랑의 메시지를 꼭 말씀드렸는데요. 그런데 약간 단호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돌려서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경상도 억양이기 때문에 더 오해를 사실 수 있는데, ‘도-‘ 음계로 동일한 음을 내시면서 조금 느리게 말씀해 주시면 듣는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멘티분들은 우선 빠르고 에너제틱한 목소리를 거부감 있게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많이 눌려있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거예요. 그분들께 해주시면 좋은 말들은 무조건 격려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친분을 쌓으시고 경계심이 사라지시면, 그때 쌤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조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상처 받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저도 그 상황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후후 사돈 남 말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치만 정말 느끼는 것은, 어투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단 한 순간에 뒤돌아서게 만드는 말투는 모든 공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부드럽게 단호했음에도 말입니다.




2. ‘멘티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조금 더디더라도 그럴 수 있지’하고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처럼 속도가 빠른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순종하는 마음과 큰 열매시기 때문에 실천을 바로바로 하시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많이 느리더라고요.


제가 최근 느끼는 바는 생각과 의견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구나-였습니다.


선생님의 멘티분께서 열매를 덜 맺어도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깨달은 존중의 영역은 어쩌면 빠른 길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일 수 있겠다-였습니다.


만약 선생님의 멘티분이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안타깝지만 침묵이 가장 큰 도구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도중에 한 번씩 지르게 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다가 악한 사람 잘못 만나면 정말 큰일 나십니다.


분명 열매 맺을 사람을 선별하시겠지만, 알곡임에도 속도가 느릴 수 있거든요. 그 부분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면 선생님의 품위를 유지하시면서 그분과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실 수 있으실 거예요.^^



3. 이제부터는 진짜 어떤 사람들을 만나실지 모릅니다. (야생 초입에 던져진 기분입니다)


저도 조심성과 함께 경계심이 많아졌고, 나나 잘하자-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경건훈련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멘티분들이 온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다른 조언은 마시고, 의뢰받은 분야만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부분은 그분들에게 신뢰가 많이 쌓인 후 말씀하시면 저와 같은 일은.. 겪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을 말씀드렸지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 <


아는 척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선생님 염려되는 마음이 섞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제게 이런 요청을 주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무게가 무거우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가득 담아 이 편지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드립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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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27

귀하께서는 지금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


대화를 해보아도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에 다음번에 같은 상황이 오면 더 심하게 다투게 됩니다. 다툼이 반복될수록 상대방의 좋았던 면은 기억조차 못하게 되지요. 이렇듯 사람과 가까워지다 보면 이런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부모, 형제, 부부, 친구, 동역자, 멘토와 멘티 등 예외가 없습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도 다툼이 없다면 둘 다 대단히 성숙하거나,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매우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해도 적당한 도움만을 줄 뿐 직접 자기 일처럼 나서지는 않는 ‘적당한 거리’ 말이지요.


아픈 노부모를 모시는 자녀 A는, 부모님을 위해서 물심양면의 헌신을 감내하고 있지만 부모님과 서로 부딪히며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1년에 한두 번 부모님을 찾아뵙고 용돈 조금을 드리고 가는 자녀 B는 부모님과 다툴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B가 부모님을 모시고 A가 1년에 한두 번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도움을 주었던 사람과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는 흔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원수가 되고 부부는 이혼합니다. 대화도 해보고 상담 치료도 받아 보지만 대부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맞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듯합니다.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상대방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상대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모난 성격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 중 누가 더 상대방에게 맞춰야 할까요? 


더 많은 경험과 지혜가 있는 쪽에게 맞추는 것, 이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은 서로 맞춰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당신이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멘토가 당신에게 순종한다면 그를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멘토의 경험과 지혜는 빌리고 싶고 다른 부분은 멘토가 당신에게 맞춰주길 바랍니까? 멘토가 당신의 맘에 쏙 들게 행동하며 당신이 원하는 도움만을 척척 주는 완벽한 사람이길 바랍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까? 혹시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있습니까?


이번에는 당신이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과 자꾸만 마찰이 생긴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그를 돕고 싶으시겠습니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적당한 조언이나 베풀 때는 상대방에게 항상 좋은 인상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함께하다 보면 매우 가까워지게 되고 상대방의 실망스런 모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중 일부는 무례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무례를 무릅쓰면서까지 상대방을 도와야 할까요? 


저는 여러 차례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그게 주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처럼 변하더군요. 일방적인 사랑을 받으면서도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무례한 자녀 같은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상대방을 보았습니다. 감사히 여기던 조언을, 하찮은 잔소리처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상대방의 무례를 피하기 위해 방어 기제를 펼치면 관계는 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진퇴양난을 경험했습니다.


사랑하기에 함께 했는데 함께 했더니 멀어지게 되는 아이러니!


인류의 숙제와도 같은 이 딜레마가 해결된 공간이 십자가입니다.


나는 성경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경청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어째서 사랑에는 공의가 필요한지를 배웠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사랑만을 보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멘토가 어려움 앞에서 말뿐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다면... 저라면 다른 멘토를 찾겠습니다. 배움만이 목적이라면 책과 강의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러나 멘토에게서 실천이 동반된 진심 어린 배려를 받았다면 그의 허물을 덮고 순종해 보세요. 자아가 죽는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 합니다. 


자신에게 진심을 보인 존재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순종은, 주님께로부터 내려온 교회가 성장해 가는 방식입니다. 교회의 질서에 순종한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열매도 따를 것입니다.


다시 늪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관계의 늪에 빠졌을 땐,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좋은 사람이야.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닐 거야. 나를 누구보다 아끼는 마음이 있을 거야.’


아무래도 그런 확신이 들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본인의 판단을 믿고 더 좋은 멘토를 찾아 떠나세요. 더 좋은 멘토를 만날 거란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순종을 훈련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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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27

성령 충만한 그녀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기도와 말씀에 힘쓴다. 


믿음의 선포로 아침을 여는 그녀, 그녀가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실행하는 신앙 루틴은 그녀의 깊은 영성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녀가 중학교 때 첫사랑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이랑 엮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었죠.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와 연락하기 시작했고, 대부분 남녀가 그러하듯 만남의 회수를 늘려가다 결혼하게 되는 루틴을 밟게 되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보거나 가까이하다 보면 마음이 동하기 마련이다. 이는, 보지도 않고 가까이도 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동할 일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원하지 않던 사람을 자꾸 만나다 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결혼하게 된 것을 본인 선택으로 봐도 되는 걸까? 


객관적인 상태에서 내린 결정과 감정에 치우쳐서 객관성을 잃은 상태에서 내린 결정, 어떤 것이 진짜 본인의 선택일까?


처음 M은 분명히 상대방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본인의 객관적 분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만나다 보니 정이 들고, 상대방의 부족한 모습마저 감싸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성은 차단되고 감성만이 활성화되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마침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은 M의 선택일까? 아니면 만나지 말라는 스스로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꾸만 만남을 갖다가 발생한 참사일까?



다행히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그녀가 평소 기도하며 꿈꿔왔던 결혼 생활은 아니지만, 온유하게 M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는 남편의 신앙 성장도 좋아 보인다. M의 신앙 전선은 이상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M의 영성이 그의 남편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배우자를 따라 우상 숭배를 하게 된 솔로몬처럼 본인의 신앙까지 훼방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그러나 만나보는 행위의 최대 리스크는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만나보니 좋은 사람이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단점들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정에 이끌려, 상황에 이끌려 하게 되는 결혼은 어떠한가?


실제로 외로움에 이끌려 ‘그냥 한 번 만나만 보는 거야. 밥만 먹고 오는 거야’ 나갔던 자리에서 깊은 만남으로 이어졌다가 후회에 빠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습은 성도들이 죄를 짓는 패턴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거야. 한 번만 보는 거야. 제목만 보자. 스토리만 보자. 딱 한 잔만 하는 거야. 인사만 하고 오자.”


“그런 식이면 남녀가 어떻게 만남을 갖고 교제합니까?”

그건 각자가 기도할 부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결혼해도 좋을 만한 사람을 사랑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결혼할 만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여기서 자신이 평소 소중하게 생각하던 가치가 나올 것이다. 말로만 신앙을 첫째로 본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인물, 재력, 학벌 다 따지다가 결국 신앙만 빼고 모든 것을 갖춘 위 링크의 N을 기억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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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27

사람은 누구나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할 에너지가 없을 뿐이다. 


운동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운동할 수 없고, 공부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공부할 수 없다. 말씀보며 기도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할 수 없다. 일어설 수 있지만 일어서지 않으며 달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달릴 수 없다. 


그렇게 타성에 젖어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이의 신음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가 있다. 일생을 통 털어 몇 번은,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대체로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 축복의 사람은 좋은 정보 + 에너지의 집합체이다. 그는 좋은 정보와 에너지로 나를 선한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일어나서 달리라고 응원도 해 준다. 반응이 없으면 했던 말을 반복해서라도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 한다. 그러나 멘토의 독려가 독촉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무례한 태도를 멘토에게 내비치고 만다.


메시지를 받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메시지를 잘 받아들였음을 상대방에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선물을 받았을 때 미소짓는 표정으로 감사를 표해야 하듯 필요한 조언을 들을 때 역시 그러해야 한다.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다.



부모님과 가족으로부터 무한한 배려를 받으면서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멘토와의 관계가 가족처럼 편해지게 되면, 가족에게 하던 것처럼 상대방의 호의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고마움조차 표현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조언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퉁명스럽게 굴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가족이 아니다. 무례를 감수하며 배려를 계속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례했던 태도를 사과한다 해도 처음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처음 자신을 향했던 순수한 열정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선 기약 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그것은 처음부터 거저 누릴 수 있던 것이다. 감사할 것에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감사할 만큼 좋은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다.


지켜야 할 존중들이 무너져 내린 관계 속에선 존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선한 것들이 더 이상 채굴되지 않는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고, 자녀 관계도 그러하다. 친구, 연인, 스승과 제자 어떤 관계에서도 존중이 있어야만 얻어낼 수 있는 절댓값이 있다.


교회 안에서 멘토의 역할은 성경적인 삶의 방식을 전하는 사람이지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득을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론 상대방의 말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설득을 요구하는 횟수가 잦아진다는 것은 곧 관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설득’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하는 고된 업무기 때문이다. 오죽 힘들면 부모들이 스마트 폰 하는 자녀, 공부 안 하고 게임에 중독된 자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할까. 자녀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설득의 무게’임을 감안 한다면 정말 함께 가고 싶은 멘토를 만났을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만족할 때까지 답변해 줄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솔루션만 제안해 줄 사람은 내가 ‘돈을 지불하고 고용한 교사’ 이거나 할 일 없어 한담이나 즐기는 사람일 것이다. 


무엇보다 믿음의 영역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하는 방식 역시 설명을 전제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잔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똑같은 메시지가 반복되어 있으나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진 않는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등 어떤 이도 행해야 하는 이유, 순종을 했음에도 따라오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 설명 듣지 못했다.


간증을 전하는 신앙 선배들 역시 ‘말씀대로 살았더니 어제보단 나은 내일이 열렸기 때문’이지 그 원리를 기술적으로 완벽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께 기도로 설명을 요구하면 주시는 때도 있으나 언제나 마지막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믿음의 결단이다. 


우선 믿어야 하고 정말 믿는다면 실천에 옮겨야만 길이 열린다. 믿음과 결단의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어떤 상세한 설명 앞에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뿐이다.


“왜 그런가요? 그건 왜 그런가요? 그건 또 왜 그런가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응답받는 신앙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비단 교회뿐이 아니다. 성공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결단력 없고 실천이 약한 사람을 멀리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함께 하고 싶은 멘토와 끝까지 동행하고 싶다면 걸맞은 실천으로 자신의 신뢰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신앙적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신실한 멘토를 만났다면 겸손과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제안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없다면 힘 있게 ‘아멘’으로 화답하고 실천하는 것이 본인에게 복이고 상대방에게는 멘토 링을 이어나갈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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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7



석민의 표정과 목소리는 다소 차갑고 무뚝뚝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그런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본인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말투는 밝은 사람도 무안하게 만든다. 상대방으로부터 따뜻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본인 또한 그렇게 말해야 한다.


따뜻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상대방이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상대방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일까? 한쪽이 계속 무뚝뚝하게 굴면 상대방도 어느새 웃음을 거두게 된다.


상대방이 나를 무례하게 대하면 나도 상대방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이 들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더욱 함부로 대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리라. 실제로 무례한 사람들의 무례한 태도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주어야만 끝이 난다. 그러다 보면 ‘대체 내가 왜 저 사람 때문에 이런 불편함을 겪어야 하는 건가’ 의구심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5천 원짜리 백반을 먹을 땐 서비스가 퉁명스러워도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러나 1인분에 10만 원이 넘는 식사를 할 때 그러하면 십중팔구 클레임의 대상이 된다. 식사 대금에 친절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소중한 이들에게 얼마짜리 표정과 말투로 대하고 있는가? 50원짜리 말투로 50만 원짜리 특급 서비스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암묵적으로 친절료가 포함된 곳은 의외로 많이 있다. 친절에 가격이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는 가격이 책정된다. 친절에 가격이 붙는 이유 또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나의 주변인들에게 친절로 대하면 어떻게 될까?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 25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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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7

“옛날 옛적에 미친 호랑이가 살고 있었어요. 미친 호랑이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곤 했답니다. 이유가 있어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화가 날 때도 많았어요. 특히 밥을 안 먹은 날이면 호랑이는 더욱 미친 듯이 화를 내곤 했어요.”


“밥을 안 먹었는데 왜 화를 내나요?”

“그래서 미친 호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미친 호랑이가 살고 있다. 미친 호랑이 둘이 만나면 ‘덜’ 미친 호랑이와 ‘더’ 미친 호랑이로 서열이 정리된다. 덜미친 호랑이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평화가 찾아올까? 아니다. 둘 중 하나가 덜 미친 호랑이가 되고 나머지 한쪽은 더 미친 호랑이가 된다. 


더 미친 호랑이 둘이 만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덜미친 호랑이가 되고 나머지는 더 미친 호랑이가 된다. 그렇다면 누가 덜 미친 호랑이가 되고 누가 더 미친 호랑이가 될까?


가족이나 연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덜 미친 호랑이가 된다. 보편적으로 부모호랑이와 자녀호랑이가 있으면 자녀가 더 미친 호랑이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자녀였던 더 미친 호랑이가 본인도 자녀를 낳게 되면, 본인이 덜 미친 호랑이가 되어 ‘더 미칠 수 있는 권리’를 자녀에게 내어준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호랑이가 상대방에게 함부로 화를 내며 미쳐 날 뛸 수 있는 권리는 ‘상대방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 기반 한다. 그러므로 더 미친 호랑이는 비겁하다. 



업무 현장에서는 조련이 된 호랑이가 덜 미친 호랑이가 된다. 한 책의 제목이 생각난다.

“Manners Maketh Man.”


상대방에 대한 매너를 배운 호랑이는 화를 절제할 줄 안다. 배운 호랑이는 못 배운 호랑이와는 달리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상대방에게 함부로 화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연 배출되지 않은 그 모든 화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못 배운 호랑이는 똥오줌 못 가리고 아무데서나, 누구한테나 화를 낸다. 화를 내는 유형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자연인 유형이다. 자연스럽게 꾸밈없이 화를 낸다. 현대문명의 혜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처럼 거칠게 폭언을 내뱉는다. 


두 번째 유형은 텔레파시 공격을 한다. 자연인들처럼 직접적으로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자신의 불편한 심경을 전달해서 상대방도 불편해지게끔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만약 상대방이 화가 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면 알아 챌 때까지 차가운 음성이나 표정, 침묵으로 분위기를 다운시켜 자신이 화났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남녀 커플이 다툴 때 자주 사용되는 ‘나는 하찮게 화 따위를 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왜 화가 나 있는지 맞춰 달라는 말은 아니지만, 맞추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내가 화나내는 사람은 아님’ 스킬이 이에 해당한다. 


자연인끼리 부딪히면 불꽃이 튀고 고성이 난무하는 백병전 양상을 띤다. 텔레파시 능력자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신경전이 벌어진다. 자연인과 텔레파시 능력자, 이 둘의 전투 행태는 각각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서로를 잃게 된다는 것. 다투면 다툴수록 서로는 서로를 잃어가게 된다. 


성경은 ‘화’를 내지 말 것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당부하고 있다. 화를 내는 사람의 불이익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얻을 유익에 대해 말씀한다. 화를 통해 잃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불이익, 동시에 화를 내지 않음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다. 반복적으로 화를 내면 사람을 잃게 된다. 계속 화를 내면 가족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떠나버린다. 한 번 떠나버린 사람의 마음은 다시 돌이키기가 어렵다. 사랑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듯 멀어진 마음 또한 다시 좁히기 어렵다. 


가족 간의 연은 끊지 않더라도 이미 멀어져버린 감정은 처음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어색해져버린 감정을 견디며 억지로라도 살아보려 노력은 하겠지만 화를 내기 전처럼 행복하게 살기는 쉽지 않다. 반면,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좋은 사람’을 얻게 된다.


“아닌데요. 화를 참으면 상대방이 나를 덜 미친 호랑인 줄 알고 더 미쳐 날 뛰던데요.”


보석은 희소해서 보석이 되었다. 온유함을 끝까지 견지하다보면 언젠가 보석 같은 사람을 얻게 될 것이다. 필자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전도한 M과의 이야기다. M은 좋은 형이었다. 아니 정말 좋은 형이었다.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라 말하던 그는 강원도에서 필자의 동네로 이사를 와서 새벽예배부터 모든 예배에 함께 참석했다. 


그는 아침마다 나와 큐티를 하며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기도로 극복해 나갔다. M은 언제나 나의 믿음과 기도에 대한 설교를 최고라며 추켜세웠다.

“준아, 너 설교할 때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거 알아? 넌 분명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이 될 거야. 난 네가 목회를 하게 되면 평생 어디든 함께 할 거야.”


그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했다. 심지어 기도하는 음성과 동작까지도 따라했다. M은 필자가 설명하는 ‘믿음의 기도’를 가장 잘 실천하는 성실한 학생이기도 했다. 그의 간증을 들은, 연세대와 장신대 신학과를 다니던 H와 K가 나를 만나고 싶다며 찾아왔다. H는 사역을 함께하는 끈끈한 동역자가 되었다.


그런 M에게 신앙적 슬럼프가 찾아 왔다. 그의 자취방에서 소주병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PC방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언급하기 곤란한 잘못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그에게 차가운 감정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주님의 마음으로 염려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그 때 M에게 표출했던 감정은 인간적인 실망에서 비롯된 ‘화’일 뿐이었다. 그것을 느낀 M은 서서히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처음에는 마음이 멀어지고 그 다음엔 집이 멀어졌다. 


그의 방황을 되돌린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를 통한 주님의 사랑이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난 하나님이 그의 방황을 멈춰 세웠다. 현재 M은 안산의 한 교회에서 신실한 집사로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믿음의 기도를 실천했다. 화장실이 밖에 있는 단칸방에서 전세를 살던 혈혈단신의 그는 이제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중간 중간 그의 부동산 매매 과정에 함께 했던 나는 그의 부동자산이 10억 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잘 설계 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와 함께하던 예전의 그 형이 아니다. 나는 M과 가끔 안부를 주고받긴 하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동역자를 잃었다. 모두 다 그 미친 호랑이, 아니 호랑이를 단속하지 못한 내 탓이다. 나도 안다. M의 그런 감정들을 이해해 주기엔 그 땐 내가 어렸다는 것을... 


그러나 몰랐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인간관계는 화에 있어서 갑을 관계가 설정되기 마련이다. 갑끼리 묶어 놓으면 그 안에서 다시 갑과 을로 나뉜다. 을끼리 묶어놔도 마찬가지, 한쪽이 갑이 되어 갑질을 시작하면 한쪽은 을이 된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유지 될 수 없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참아주는 화는 사실 참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쌓이고 있을 뿐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퇴적층을 형성하며 견고히 쌓인 퇴적암은 사람의 힘으로 부술 수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분이다. 어머니의 온유함은 종종 만만함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 어머니에게 실컷 화를 내놓고는 나중에 사과하며 ‘어머니 같아서 그랬어요. 친 언니 같아서 그랬어요.’ 하면서 변명으로 수습하려는 이들이 어머니 주위에 있다. 


그들은, 항상 참아주는 어머니라서 그렇게 화를 내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어머니 본인도 자신이 화를 잘 참는 사람인 줄 아셨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화’는 어머니를 태우고 있었다. 어머니의 자존감을 태우고, 어머니의 열정을 태우고, 어머니의 미소를 태웠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내게 사람들로부터 당한 상처를 토로하시곤 한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나한테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한다. 


“그래도 감사해야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귀한 사람들인데, 나는 감사한 것만 생각할래.”

마치 버그가 생긴 AI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성품과 인간 본연의 자아가 부딪혀 내는 버퍼링 같다. 


사람들은 배움이나 노력을 통해서 화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상대방에게 퍼부은 화로 발생한 상처도 충분히 사과하면 수습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번 활성화 된 감정은 다시 비활성화 시킬 수 없다. 죄란 그런 것이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인간의 힘으론 멈출 수가 없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누군가 먼저 화를 냈다면 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일단 한 번 화를 내면 이미 시스템은 활성화 되어 되돌릴 수 없다. 그 때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상대방에게 화를 내게 되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패턴이 반복 될 것이다. 


상대방 또한 내가 낸 화에 상응하는 감정들로 내게 반격해 올 것이다. 반격을 하지 못하게 제압하면 그 화로 자신의 심령과 오장육부를 태우며 스스로 산화되어 갈 것이다. 사랑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님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삭히다가 자신감, 자존감을 잃고 그렇게 자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리 들어도 사람들은 ‘화’의 위험성을 모른다. 사람이 ‘화의 위력’을 제대로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화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게 되었을 때이다. 만일 당신 안에 미친 호랑이가 살고 있다면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이 그것을 다스릴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주님, 저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여주소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매너가 아니라 사랑이다.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 1%의 위선도 섞이지 않은 진짜사랑, 상대방이 소주를 마셔도 변하지 않고, 상대방이 그 어떤 행동으로 나를 실망시켜도 흔들리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주는 상대방을 실망시키는 것이 미안해서 스스로 돌이키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사랑, 그런 사랑이 세상에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 있고 그런 사랑을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간구하는 것이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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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25

성도에게 있어서 고민은 곧 기도제목이다. 그러므로 신앙상담은 곧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성도와 성도가 나누는 상담의 자리에는 제3의 인물이 참여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대화에 하나님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기도이다. 이것이 Field Manual이다. 그러나 FM대로 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봤다면 얼마나 보았는가. 대부분 FM을 따르지 않는다. 이유는 기도가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보다 대화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이 빠진 상태에서 상담을 나누게 되면 결국 ‘인간’만 남게 된다. 인간만 남겨진 상담현장의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될까?


거의 모든 내담자는 상담자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자가 듣기 싫은 솔루션을 말하면 내담자는 반감을 갖기도 한다. 한 내담자가 두 명의 상담자를 만났다. 한 사람은 무능력자A, 다른 한 사람은 능력자 B이다. 무능력자 A가 내담자에게 말했다. 


“상대방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내담자의 반응은 싸늘하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세요. 찾아 온 내가 잘못이지. 괜히 시간만 버렸네.”



같은 말을 능력자 B가 했다. 

“상대방을 용서하세요.”

“능력자 B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순종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했는데 누가 했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능력자 B의 영향력은 영원한 것일까? 


내담자는 능력자 B에게 매료 되어 날마다 B를 찾아 갔다. 함께 밥과 차를 마시고 운동과 사우나도 가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날마다 함께 하다 보니 내담자는 B의 인간적인 모습들까지 모두 보게 되었다. 

어떤 날은 B의 하품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B가 말하는 중간마다 음이탈, 일명 삑사리를 내는 모습도 보았다. B가 피곤에 지친 퀭한 눈으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보았다. 내담자의 눈에 능력자 B가 점점 평범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담자는 평소처럼 자문을 구하기 위해 능력자 B를 찾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세요.”

그러나 내담자의 반응은 평소와는 달리 싸늘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세요. 찾아 온 내가 잘못이지. 괜히 시간만 버렸네.”



사람이 사람에게 답을 얻을 수 있는 기간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유지되는 기한까지이다. 이 유효기간을 유지하는 방법은 슬프게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돕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상대방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관계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다. (잠언 10장 19절) 


나는 아끼는 사람일수록 아껴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반복된 경험 때문이다.


1. 상대방은 내가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해 몹시 고마워하며 제안한 솔루션을 즉시 실천한다. 

2. 그러나 만남이 반복 될수록 제안하는 솔루션에 대한 실천이 약해진다. 

3. 상황이 더 악화되면 솔루션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상담자로서의 내 생명이 끝나버린 것이다. 처음엔 나의 역량 부족 때문이라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일말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면 상대방이 끝까지 내 솔루션을 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노력은 하겠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월등한 ‘완벽함’을 갖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원인이 상대방에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상담자의 말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은 내담자의 선택에 달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필자가 발견한 신앙 상담 시 주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경건의 울타리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라. 지나치게 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울타리를 넘게 될 수 있다. 

2.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라. 가까워지다 못해 편해져서 나중에는 서로를 우습게 볼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되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면 공감은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권면을 한 번에 수렴한 경우를 본 기억이 없다. 자신들은 해당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위험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차, 삼차 경각심을 권면해도 주의해서 듣지 않는다. 영락없이 사고가 터진다. 갈등이 붉어진다. 십중팔구가 아니라 100%다. 예외가 없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본 것 같다.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카로운 가시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찌르고 찔리게 된다.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우물 물을 계속 퍼내다보면 결국에는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흙탕물이 올라오듯, 끊임없이 대화를 퍼내다보면 나중에는 쓸데없는 말이 올라오기 마련이다. 


인격의 깊이가 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은 인격이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 훼손된다. 우스운 모습을 봤으면 우습게 볼 것이고, 만만한 모습을 봤으면 만만하게 볼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아무리 훌륭해도 내가 우습게 보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 또한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 번 서로에 대한 존중이 무너지면 서로가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처럼은 회복할 수 없다. 왜 만났는가? 왜 함께 했었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보석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석에 생긴 흠집은 아무리 쓰다듬어도 제거되지 않는다. 다투고 화해할 때마다 흠집이 더해져 마침내 보석은 빛을 잃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보석일 수 없게 되는 이유? 


사람이라 그렇다. 사람은 그렇다. 가족을 보라. 가장 많이 사랑하지만 가장 가깝기에 가장 많이 무시하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가족이라는 끈이 있어서 헤어 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 같이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다. 


“인간관계를 그렇게 따지면서 하면 불편하지 않나요?”


불편하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불편함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필자에게 육성을 받은 사원들이 억대연봉자가 되었고, 그 중에 한 명은 이른 나이에 H생명의 지점장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배운 방식대로 사원들을 육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사원들에게 나를 자신의 스승님이라고 소개하자 그들이 말했다.


“말투와 분위기가 많이 닮으셨어요.”

말투와 분위기가 닮을 정도로 가까이 지내면서, 업무적 효율성까지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관계를 유지해온 학원장들만이 매출이 올랐고 지금까지도 나와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밥 사주고, 커피까지 사줘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던 초창기 멤버들 중에는 열매가 없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에게 내 말의 영향력은 떨어졌고, 일부는 나의 친절을 만만함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무례한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서서히 나를 거두었다. 리더십이 무너지면 팀워크까지 붕괴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아끼던 사람들이었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나라고 쉬웠을 리 없다. 후회로 얼룩진 나의 부족했던 리더십이 남긴 교훈은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일수록 아껴 만나기”


세상에는, 가까워지면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가까워지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인지 육안상으로는 확인 할 수 없기에, 또 설령 그런 사람이라 해도 가까워지지 않으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기에 나는 모든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 유지를 하려고 노력했다. 적당한 거리 유지, 비즈니스 현장에서 체득한 이 원칙을 신앙상담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기”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이 멈추지 않는다. 교회가 무너진다. 교회는 마치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고슴도치들의 모임과도 같아서 자칫 방심하는 순간,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한다. 

그저 차나 마시면서, 서로 듣기 좋은 수다나 떨며 노닥거리는 모임이라면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인격들이 만나서 힘을 합쳐 하나의 목표를 이루려 할 때 이견이 발생하며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수 없이 반복해서 강조해도 결국은 본인들이 겪어봐야만 비로소 온전히 깨달아지는 교훈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소중한 관계들을 여러 차례 박살내 봐야만 온전히 깨닫게 되는 교훈이다. 물론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아서 새로운 친구, 새로운 동역자, 새로운 멘토를 찾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두려운 사실은 사람이 하는 반복 된 행동은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상담자 찾기 → 감동하기 → 가까워지기 → 편해지기 → 함부로 하기 → 멀어지기 


내담자 찾기 → 보람느낌 → 가까워지기 → 편해지기 → 함부로 하기 → 멀어지기 


이 패턴이 형성된 사람의 삶에 평안이 있을까. 안정이 있을까. 그렇게 끊임없이 새것,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를 찾아다니는 사람의 인생에 참 열매가 있을까? 


친구, 멘토, 동료 심지어 배우자까지 새것, 새것, 새것 증후군에 감염된 사람처럼 끊임없이 새것으로 갈아치우는 삶을 살다가 열매 없이 생을 마감하길 원치 않는다면 나쁜 패턴을 형성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패턴이 형성 되었다면 지금 끊어야 한다. 


작은 일은 혼자 할 수 있지만 큰 업무일수록 팀워크가 필수이다. 그러므로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는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 그 분은 곧 주님이시다. 주님이 빠진 교제는 위험하다. 귀한 만남일수록, 소중한 만남일수록 절제가 필요하고, 최선의 절제는 기도로써 주님을 서로의 중앙에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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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3-22

조금 먼 거리에서 K를 본 사람들은 그가 상당히 온유한 줄 아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K 본인도 자신이 그런 줄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 멀리에 있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가시에 찔리면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찔린 이가 아파한다. 찔린 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K 역시 아파한다. 아니 그가 더 아파하는 듯하다. 예수님의 심장을 갖게 된 뒤부터 K에게 나타난 증상, 남을 아프게 하면 자신이 더 아프다. 가시에 찔린 이들 중에 더러는 자신의 가시를 뽑아서 K를 찌른다. 본인이 받은 고통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K는 한 번 더 아파한다. 


서로의 가시에 찔릴 만큼 다가온 것을 보면 분명 가까운 사이련만 그들은 그렇게 찌르고 찔리며 서로 아파한다. 내가 아픈 것도 싫지만 남을 아프게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고로 K는 절규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언행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본심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멘토링을 하다보면 이따금 오인 사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이 먼저 도움을 청해놓고 멘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도 있다.


“탕!”

“왜 나를 쏘는 게요? 당신이 내게 도움을 청했지 않소.”

“도와 달라고 했지 듣기 싫은 말을 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은 없소.”


“당신에게 필요한 말들이지 않소?”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하시오.”


“벌써 스무 번도 넘게 그리했잖소.”

“그래도 그런 말을 듣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소.”


“미안하오. 그렇다면 당신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는 내 갈 길을 가겠소.”

“탕!”


“이번엔 또 왜 쏘는 게요?”

“가라고 한 적은 없소.”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

“당신은 그저 내 곁에서 내가 계속 빈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내 불평을 들으며, 나에게 끊임없는 위로와 희망찬 말을 해주면 되오”


D는 자신을 도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막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상대방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담아내기엔 자신의 그릇이 지나치게 협소하다. D는 본인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허비하는 것에 무감각할거라 믿는 듯하다. D는 멘토가 내준 어떤 과제도 실천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든다. 


세상 누구도, 달리는 연습을 하지 않는 사람을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시킬 순 없다. 물속에 몸도 담그려 하지 않는 사람을 수영대회에서 우승시킬 수 없으며, 채소 손질 한 번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요리사로 만들어 줄 수 없다. 결국, D는 자신을 도우려다 크고 작은 말실수로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 원망과 미움의 감정을 거두지 않는다. 은혜는 강물에 새겨 흘려보내고, 상대방의 실수는 바위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며 곱씹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우려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지침은 이러하다. 

“주님보다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목사님은 운전 중에 상향등과 경적을 울리며 운전했던 자신의 허물을 설교시간에 고백하고, 또 다른 목사님은 부부싸움 도중에 자신이 전기청소기를 때려 부순 것을 고백했다. 영화광이었던 L 목사님은 설교 중에도 영화의 장면을 예화로 사용할 정도였는데, 예화로 사용했던 한 영화는 SF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묘사와 폭력성이 지나쳐서 19금으로 분류 된 것이었다.


‘영화가 아니면 설교가 안 되시나? 도대체 얼마나 영화를 많이 보시면 설교 중에도 영화 얘기가 빠지지 않을까? 저렇게 영화를 보시는데도 영성이 유지가 될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던 ‘저울’이 저울질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는 판단을 차단하고 목사님을 위해 중보기도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중보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대상자가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내게는 L목사님이 그러했다. 나는 L목사님이 떠오를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L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뜻밖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우상이 있다. 내게는 영화가 우상이었다. 나는 이것을 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끊었다”


L목사님은 내가 자신을 위해 중보한 것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만 혼자 그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보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상대방을 위하는 열심 때문에 상대방을 다그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논리정연한 훈계가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암울한 상대방의 현재 상황을 본인에게 인식시키며 ‘정신 차리라’는 다그침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100%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적대감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중보기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첫째가 훈계를 시도하는 것이요 둘째가 중보기도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첫째가 중보기도요 둘째도 그러하다.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만 기도를 하려든다. 마찬가지로 부모들은 본인이 자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해본 뒤에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부모의 기도에는 인간의 훈계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영향력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도를 사용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자신이 도저히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망가져 버렸을 때 비로소 기도다운 기도가 시작된다.그리하면 모두가 포기해 내버려졌던, 나중 되어 있던 자들이 먼저 되는 반전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한다. 


가장 많이 사랑하지만 가장 많이 상처 주는 존재 가족, 서로의 가시에 찔려 적군인 줄 알고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주며 함께하는 존재, 까칠해 보이지만 분명 아군이다. 아군은 공격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상처 없이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본인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오직 기도만이 그를, 또 나를,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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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1



얼마 전, 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격려해 주시던 목사님께서 건강검진을 받고 간단한 수술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유가족들은 말했다.


“분명 병원에서는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었습니다.”


교회에서 선물해 드린 정수기를 받고 무척 기뻐하시던 고성도님은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명을 달리하셨다. 얼마 전에는 노숙을 하다가 아버지의 전도로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던 최영빈성도님이 주님의 품에 안겼다. 모두 나의 부모님보다 연세가 적은 분들이었다. 어느새 나의 부모님은 내일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연령이 되어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 들의 풀꽃 같음을 느끼며 나는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내가 느낀 바로 진정한 효도란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망자의 주검 앞에서 남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부모님과 함께 한 기억뿐인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효도를 단 한 번도 부모님께 해드리진 못했다.


“효도하는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이따금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이 기도에 그다지 큰 열정을 쏟아붓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식사 기도하듯 형식적으로 드리는 기도와도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롤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하하하, 저희 어머니는 어제도 혼자서 비빔밥 한 대접을 몰래 드시려다 저한테 딱 걸렸지요. 들키니까 함께 먹으려고 비빈 거라고 거짓말을 하시더라고요. 진짜 귀여우셔.”


부모님을 귀여워하는 다 자란 어른이 있다. 마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부모님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영화도 본다고 했다. 나는 주변에서 30을 넘긴 성인 중에, 아니 전 연령을 통틀어 그렇게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P가 부모님을 대하는 모습에서 나는 부모님을 향한 진짜 사랑을 느꼈다.


사람들은 가족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가족들이 느끼도록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은 나에게 일종의 문화충격을 안겨 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부모님 앞에서 상냥한 아들이 아니다. 약간은 무뚝뚝한, 필요한 대화만 하는 아들이 되어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부모님의 안위를 위해서 뭐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실행할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지금 나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고객들 앞에서도 보이는 미소를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않았다. 함께 영화를 본적도 없었고, 여행은커녕 그 흔한 드라이브 한 번 간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 어떤 소소한 것도 따로 시간을 내서 부모님과 함께 한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1순위, 그러나 시간을 내드린 순서로는 부모님을 가장 후순위에 두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부모님을 내 주변 누구보다 사랑한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가장 무심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 1%의 비중도 없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커피를 함께 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들과 보낸 만큼의 시간도 부모님께 드리지 못했을까.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을 사업가로, 목회자로 살아온 부모님이었다. 내가 어렸을 땐, 너무 바빠서 얼굴조차 보기 힘든 두 분이었다.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나는 맞을 만한 행동을 했고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나를 때리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웠고, 어른이 되어선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그러나 주변의 사건, 사고를 접할 때마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P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또한 존경스러웠다. 그렇게 진심으로 부모님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기도도 했다.

나는 부모님과 의도적으로라도 시간을 함께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은 바쁘다며 순순히 나를 따라나서지 않으셨다. 나는 두 분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난생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영종도에 가서 해물칼국수를 먹고 왔다. 그것이 다였다.



한 번은 일부러 아버지 따로, 어머니 따로 만나 매운 갈비찜을 사드렸다. 그날도 우리는 갈비찜을 먹는 것에만 충실했다. 그 뒤로도 가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려 시도했다. 그렇게 나름 노력을 했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서, P에게서 발견되던 진심 어린 사랑은 느낄 수 없었다. 부모님은 자꾸만 교회 얘기만 하셨고 나 또한 부모님과 함께하는 그 순간에도 다른 일들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가끔 혼자 미술관에 가곤 한다. 여느 날처럼 미술관을 향하던 중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났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부자연스러운 조합으로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했다.


“흐으으으으으 으 흐으으으 으 으으”


조금은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는 사람 모양의 거대 조형물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이게 무슨 소리니?”

“저기서 나는 소리예요."


어머니는 자리에 한참 동안 멈춰 서서 신기한 듯 그 조형물을 바라보셨다.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브로콜리 파마를 한, 짱구 같은 뒤태로 서서 난생처음 신기한 조형물을 바라보고 있는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진심... 귀여웠다.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런 곳은 비쌀 건데 집에서 마시자.”


습관적으로 버티는 부모님을 모시고 한강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동작대교 위 카페에 갔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아버지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고백을 듣게 되었다.


“난 네가 어렸을 때 너를 너무 엄하게 때렸던 것이 항상 후회가 된다.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해 보면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으니... 나 같은 자녀는 내가 처음이었을 테니 시행착오가 없을 순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심지어 짐승의 새끼들조차 그러하지 아니한가. 우리의 엄마도, 아빠도 한때는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하던 귀여운 어린아이였었겠지. 까까머리, 단발머리로 웃으며 동네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떡볶이도 사 먹던 시절이 있었겠지. 지금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어린아이들 같은 어린아이였었겠지. 그렇게 우리 부모님도 누군가의 눈에는,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였었겠지.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두 분의 모습 속에서 그때 그 아이들이 보이곤 한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그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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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5



“기도 안 해서 그렇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그것은 본인이 자기 입으로 해야 할 고백이지 타인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말했다면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특정 개인을 향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시험에 빠뜨리게 될 수 있다.


‘아, 저 사람 때문에 교회가기 싫다.’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는 것이다.



“기도 안 해서 그렇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맞는 말일수도 있다. 그러나 급하다고 아무 칼이나 들고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듯 하나님의 일에는 사용해선 안 될 말이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성급하게 내 뱉는 상처 될 말들.


‘만일 내가 한 말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결과적으로 나는 사탄의 쓰임을 받은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일 것이다. 영적인 세계는 결과가 정말 중요하다. 구제와 봉사를 아무리해도 구원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울타리를 쳐야 한다. 사랑과 화평, 온유함.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언어적 선택을 끝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넘어서지 않는다.


누가 얘기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잘못을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 또는 화가 나 있을 뿐이다.


낙심해 있는 사람에게 ‘기도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은 아픈 상처에 뿌려진 식초가 될 수 있다. 부상당한 맹수처럼 잔뜩 독이 올라있는 그가 경계를 풀고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면 먼저 위로와 격려를 통해 경계심을 내려놓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여부를 확인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는 현장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예수님은 위로의 영, 화평케 하시는 분. 따라서 본인이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나섰다고 믿는다면 현장에서도 그런 열매가 있어야 한다.


본인은 선한 의도로 한 조언이었지만 현장에 악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얼른 예수그리스도라는 울타리를 쳐야 한다. 내 조언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평안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3장에는 혀를 말을 조종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재갈로, 배의 운전대에 해당하는 키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혀가 자동차로 말하자면 핸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운전을 잘못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게 되는 것처럼, 이어서 성경은 작은 혀를 잘 못 사용했을 때 야기 될 수 있는 큰 재앙들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는 대개 사람을 통해 나타나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한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위로와 격려 등 여러 형태가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을 굳건히 세워주는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세워줌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내가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교만이야말로 인간관계를 박살내는 주범이다.


목회상담학에서는 성도를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에 비유한다. 일반 상담학에서도 사람을 훈계하는 것을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세심한 작업으로 분류한다. 한마디의 지적을 하기 위해서 10마디의 칭찬을 서두에 깔아야 하고, 1분의 훈계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면 1시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여 상대방이 적대감을 내려놓도록 준비를 시켜야 한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이런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상대방을 위한 조언을 하려들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한 마디의 조언을 위해 이런 수고를 감당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꺼내려고 했던 충고의 말을 도로 넣어두어야 한다.


“내가 한 마디만 할게.”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후련함을 위해서 내 뱉으려 한 말일 뿐이고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충고를 해준 횟수만큼 주변에 적들이 쌓이게 될 것이다.


[조언에 있어 사람들이 하는 큰 착각 두 가지]


첫째 자신의 말이 상대방을 변화 시킬만한 영향력이 있다는 착각

둘째 자신이 상대방에게 조언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


오너는 부하직원들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늘 능동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단점을 지적하는 말로는 사람을 능동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하며 방법을 구해야지요.”


내게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의 단점을 바로 잡아 주고 싶은 정의감이 불끈 솟아오른다면 세 가지를 기억하자.


1. 내 말대로 하면 상대방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2. 절대 상대방의 감정 선을 건드리지 않고 화평 가운데에서만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3. 내용 전달로만 끝내지 않는다. A/S, 즉 상대방이 나의 말을 수용해서 실천할 수 있도록, 변화 될 때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상담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기도가 왜 필요한지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답답해서 못하겠는데요.”

“그렇다면 당신은 상대방에게 조언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묵상


내가 천사처럼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의미 없이 두드려대는 꽹과리 소리와 같고, 기도를 많이 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하고, 성경지식에 능통해서 성경의 기록연대까지 줄줄 암기할지라도 나는 주님의 일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일 것이요. 구제하는데 많은 기부금을 낼지라도 한 영혼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져 내겠다는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없다면 그 구제는 아무런 상급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나의 말보다 주님의 의지가 앞서 나가서, 하고 싶은 말을 오래 참다보니 감정의 불길이 자연 진화되어 온유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1할의 교만한 마음 없이 섬기는 마음으로, 내가 아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건네는 것.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인 듯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것은 믿음의 기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의 구원도 또 내 이웃의 구원도... 그러므로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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