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은 엄밀히 말해 맛이 아니다. 그것은 통증 세포가 느끼는 일종의 자극이다. 어릴 땐 ‘왜 이런 걸 먹나’ 싶겠지만 그 독특한 맛에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된다.
담배는 무슨 맛? 콜록콜록한 맛!
술은 어떤 맛? 소독 당하는 맛!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먹나 싶겠지만 그 독특한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된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맛이 아니다. 자극이다. 자극에 중독이 되면 좀처럼 그것을 끊을 수 없다. 우리 몸은 전기 신호로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자극은 우리 몸이 망가지면서 방출되는 일종의 전기 신호이다. 복잡한 전자회로에 물을 뿌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닮아있다. 또한,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몸이 그러하면 마음도 그러하고 마음이 그러하면 몸도 그러하다. 우리의 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면 자극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 영혼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면 자극을 느끼게 된다.
죄는 맛이 있다. 콜록콜록, 소독소독, 짜릿짜릿 자극적인 맛이다. 담배처럼, 술처럼 특별한 맛은 없지만 그 자극은 사람을 중독되게 만든다. 아내를 두고 아내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이유도 죄의 맛 때문이다. 죄를 지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은 지갑에 쓰고 넘치도록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잣집 딸로 하여금 쓰지도 않을 값싼 물건을 도둑질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이상하게 도둑질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저도 모르게 그만...”
자극은 언제나 더 큰 자극을 부른다. 이미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재물을 모은 정치인들이 들킬 위험을 무릅쓰며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횡령을 일삼는 이유도 죄의 맛에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돈을 갖고 싶어 죄를 지었겠지만 죄에 중독된 그들의 목적은 더 이상 돈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죄를 지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얻었고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더 얻을 수 있었다. 돈과 명예, 권력, 군사력, 합법적으로 얼마든지 더 많은 여자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들로부터 더 이상 재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1:2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과 해보았던 모든 행동을 열거하며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고백한다.
“내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는데 다 의미 없더라. 내가 이것도 가져보고 저것도 가져보고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 봤는데 다 그때 뿐이더라.”
그러던 중 솔로몬은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으로부터 우상숭배를 제안받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 보지 않은 독특한 자극이었다. 그렇게 그는 죄의 맛에 빠져들게 된다. 죄에는 식음을 전폐하게 만들 정도의 맛이 있다.
제대로 죄에 사로잡혀 노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죄의 맛을 음미하는 동안에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놀고 나면 무기력과 공허의 시간이 찾아온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죄의 맛에 취해 밥맛을 잃은 것이다. 그렇게 죄를 짓다보면 자꾸만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죄의 맛에 빠져 살맛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죽도록 맛이 있어 죽을 만큼 먹게 되는 죄의 맛이다.
기도를 내려놓고 혈기와 분냄으로 성질 가는 대로 살아보라. 죄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대로 살면 분명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죄의 메커니즘은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게 될 것이다. 자기 본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독된 또 다른 자아가 죄의 맛을 갈망하며 자신의 발로 뚜벅뚜벅 죄를 찾아 나아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승리의, 능력의, 정직한, 선한, 거룩한, 자비로운 등등 셀 수없이 많은 수식어를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표현이 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수만 가지 이상의 긍정적인 수식어만 담겨 있다. 하나님께는 나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DNA가 내재 되어 있다. 본래 인간은 좋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죄로 인해 온몸과 영혼이 악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죄의 껍질에 싸여 선한 것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죄의 껍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실패의, 패배의, 무능한, 부정직, 못된, 더러운 등등 셀 수없이 많은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크고 작은 결함이 있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도 악한 영향을 받게 된다. 나쁜 삶에서 좋은 삶으로 옮기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죄의 껍질을 깨야 한다. 껍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딪혀야 한다. 깨질 때까지... 죄의 껍질을 깨기에 딱 좋은 돌이 있다. 그 돌은 살아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전서 2:4
살아있는 돌, 산 돌이신 예수님께 부딪혀서 죄의 껍질이 깨지면 그 속에서 선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속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의 가치로서 온통 좋은 것들뿐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그러하다. 사람이 이 돌에 부딪치면 악한 껍질만 깨진다. 그러나 이 돌이 사람 머리 위에서 떨어지게 되면 껍질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1:4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시기 전에 각 사람은 부지런히 이 돌에 부딪혀 죄의 껍질을 깨야만 한다. 그러나 단단한 그 껍질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한두 시간, 하루 이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정도의 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3박 4일 부흥회참석도 대부분 그 때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소 1년 이상을 쉬지 않고 부딪혀야 한다. 사람에 따라 그보다 짧을 수도 있겠지만 아예 그렇게 각오를 하고 시작하는게 나을 것이다.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려 애쓰고, 일과 중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니 몸부림쳐야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만큼의 열정으로 1년 이상 부딪혀야 한다. 그렇게 몸부림 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특정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일상생활 중에 쉼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주여,주여,주여,주여’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집으며 탄식을 내뱉게 되는 것은 덤이다.
‘주여허~’
TV등 대중 매체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랄 수도 있다.
‘어떻게 받은 은혜인데, 얼마나 노력해서 얻은 성령 충만인데...’
몇 시간씩 기도하고 말씀 읽어서 충전한 영성이 세상 미디어 한 편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것은 자연스레 배설물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이 세상 사람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1. 문제가 생기면 주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2. 주님은 문제 해결자가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세요. 상황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세요.
그쯤 되면, 전혀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듯 보이는 위 두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타인의 입이 아니라 본인 안의 성령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나태하게 살아온 시간만큼, 악하고 무능했던 세월만큼 깨지는 시간 또한 적잖이 소요될 것이니 각오는 해야 할 것이다.
“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온유하다. ”
각양 좋은 말과 선한 생각들로 나쁜 껍질을 내려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껍질에 금이 가서 속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여 껍질 내리치기를 멈추면 다시 껍질의 경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 껍질은 처음 것보다 더 두터워 깨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은혜 받지 못하고 지낸 신앙세월이 길어 질수록, 회개했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껍질은 점점 두터워 진다. 그래서 다음 번엔 더욱 세게 내리쳐야 껍질을 깰 수 있다. 그러므로 단번에 껍질을 깨고 겉 사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지간한 설교는 다 들어봐서 나도 이제 알 만큼 안다는 교만이 감싸기 전에, 말씀을 들어도 은혜는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변화 없는 신앙인의 삶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주변이 온통 그러하니 나도 그래도 될 것 같은 자기 합리화가 완성되기 전에 속 사람이 드러나야 한다. 이전 껍질은 떼어 내고 계속해서 속 사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대상 : 예수님 믿은 지 1달 된 새내기 성도, 하나님을 떠났다 돌아온 성도, 10년 이상 교회에 있었으나 아무런 응답이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
금기 : 술, 담배, 음란, 혈기, 미움, 불평, 부정적인 생각 등 나쁘다 싶은 것 끊기. 회개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내 죄 사하셨다 타협하지 말고 끊기. 할 거 안 할 거 다 하고 다니면서 왜 나만 응답 안 주시나 원망 말기
과제 : 쉬는 시간마다 성경 읽기, 잡생각 대신 하나님과 대화하기, 하루 1시간 이상 기도하기(기도가 안 돼도 기도의 자리는 지키기) 참석 가능한 예배 다 참석하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마음에 순종하기 (예를 들어, 운동하라는 마음이 들면 순종하기. 용서하라는 마음이 들면 순종하기.)
기간 : 1년 이상
주의 : 최대고비 3~4일, 1주일 이상되면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착각이니 방심말기. 1개월 후부터는 안정권이나 넘어질 순 있음. 이때 사탄의 정죄에 넘어가 포기하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관건.
이런 노력 없이도 예수님 믿는게 확실하다면 천국은 갈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없을 것입니다. 응답을 경험한 성도들은 하나 같이 말합니다. 순종하면 생각보다 정말 빨리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결단을 시작하는 순간 돕는 천사들을 보내시고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심으로 응원하십니다. 1년이 지나면 주변에서 당신의 변화를 알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번씩만 보내면 새로운 1년이 옵니다.
섬세함은 둥그런 것 보다는 날카로운 성품을 대변한다. 실제로 일 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날카로운 면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날카로운 성품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심히 낙천적이어서 온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업무적인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업무적으로 부족한 자녀들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된 언약이 기록 되어 있다.
‘네가 어디가든지 머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겠다’
업무현장에서 이 약속은 곧 업무적 탁월함을 의미한다.
성품에 대한 연단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낙천적이지만 업무적 완성도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까칠한 환경’속에서 업무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을 훈련시키시고, 일은 잘하지만 다소 날카로운 사람에게는 그 까칠함을 버리도록 이끌어 가신다. 이 둘은 각자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사람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된다.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환경,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현장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일은 잘하지만 까칠한 성품의 김완벽씨도 훈련 대상이지만, 온유해 보이나 게으르고 일 못하는 박대충씨 역시 주님께는 훈련의 대상이다.
이 둘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각자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피할 길을 만드셔서 모든 훈련생들이 결국은 그 모든 훈련을 감당하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새로운 곳에 취직하면 1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 나오는 박대충씨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실’에 대한 말씀을 듣게 하시며 그의 마음속에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음성을 끊임없이 주셨다. 대충씨는 진지하게 취업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기도는 곧 응답되었다. 대충씨는 회사에서 두 명의 조교를 만난다. 한명은 까칠한 박선배, 또 다른 한 명은 상냥하고 자상한 이선배다.
대충씨가 박선배에게 온갖 구박을 당한 뒤 회사를 그만둘까 고심하고 있을 때면 이선배가 그를 위로하며 퇴사를 막아준다. 대충씨는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했다. 그가 그렇게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가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주님, 현실을 이길 힘을 주소서. 그리고 저 망할 자식, 아니 박선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시간이 흘렀다. 대충씨는 박선배에게 욕을 안 먹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덧 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사원이 되어 있었다. 대충씨는 박선배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중보기도까지 시작했다. 만일 대충씨가 기도로 버티지 않고 훈련장에서 도망갔다면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일은 잘하지만 까칠한 김완벽씨의 눈에는 사람들의 단점만 보인다. 모든 사람이 못 마땅한 그였다. 까칠한 그는 이따금 혈기를 참지 못하고 한 번씩 사람들에게 크게 화를 내곤 한다.
"정신 똑 바로 차려요! 도대체 같은 실수를 몇 번하는 건가요? 어째서 내 주변에는 저런 답답한 인간들 밖에 없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의 업무적 완성도는 빈틈없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므로 무조건 그가 잘못 되었다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완벽씨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째서 일 잘하는 자신이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가 악화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힐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 가신다.
성령께서는 완벽씨에게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임을 상기시키신다. 동시에, 그가 추구해야 할 ‘복’이 세상에서 자기노력으로 받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임도 깨닫게 하신다. 또한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혈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완벽씨는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기쁘게 순종을 결단한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노라 다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모든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성품’과 ‘물질’이다. 실제로 주님을 만난 이들은 한결 같이 ‘물질연단’에 대해서 언급한다.
‘물질연단’을 받는 이들 중에는 ‘성품연단’을 받지 않겠다고 훈련장을 박차고 나온 이들도 섞여 있다. 즉, 자신의 모난 성품을 계속해서 버리지 않고 버티면 ‘물질연단’이 올 수 있다. 물질연단은 단순히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가족관계 등 세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한 고난을 대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단을 주신다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해 대부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오늘 날 신앙선배들의 간증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쓰임 받는 주의 종들은 하나 같이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연단’에 대해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연단하셨다.’
연단하다 :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이란 평신도 사역자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훈련에서 예외 일 수 없다. 필자가 직, 간접적으로 관찰한 바로는 물질연단은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으로 구분 되는 듯했다.
강한 것은 말 그대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말한다. 모든 것을 잃고 기도가 절로 나오는 환경에서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부드러운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훈련목적은 동일하지만 '강한 것' 만큼 처절하지는 않다. 큰 고난 없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 어찌 보면 그만큼 평소 성품이 예수님의 인격에 닮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의 신학대학 등록금을 내주셨던 은사님은 강남 포함 여러 지역에 건물과 토지를 소유한 자산가이다. 그녀는 신학생은 물론 어려운 개척교회에 차량 및 건축헌금을 드리던 의로운 부자였다. 그런 그녀 본인이 신학대학에 입학하자 물질의 연단이 찾아왔다.
“건물 임대료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부동산에 내놔도 팔리지를 않는 거야. 미국에서 유학중인 아들에게 돈을 보내줘야 하는데 방법이 없더라고. 나중에는 차 기름 값도 없어서 울면서 다녔어. 아마 사람들은 믿지도 않을 거야”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의사의 아내로 살던 그녀는 난생처음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도는 다른 물질연단 받는 이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응답이 되었다. 그녀는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소유를 그대로 지켜 주시면서도 물질로서 그녀를 연단하셨다. 그렇게 그녀는 부드럽게 물질의 연단을 마쳤다. 그녀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언약을 몸소 확인했다. 연단을 경험한 그녀의 고백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연단하셨다.”
사람들은 연단을 받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고 철저히 부서지고 깨어진다. 또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시스템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후천적 본능이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말한다.
“사실 물질 연단은 고급 매야”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이 그 매를 맞고 있을 때는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다른 많은 성도들의 연단을 지켜 본 나로서는 이제 그 말에 동의한다. 물질연단은 고급 매이다. 모든 재산을 잃고, 심지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어도 그 매는 다른 매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지키시기 위해 생명까지 거두어 가시는 것을 지켜 본 나로서는 하나님의 ‘연단’이 감사할 뿐이다. 연단 즉, 훈련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살려 두시고 지켜 주시겠다는 즉,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가.
술 마시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을 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술을 마시는 기독교인들 중에 상당수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 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가는 것이다. 한국교회 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논쟁을 양산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술 때문에 지옥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성경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술 취함’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하게 명시가 되어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술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한국교회에 속해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술을 금하는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신앙부흥을 경험했다. 또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교회 내에서 슬금슬금 술 마시는 분위기가 용인되어지면서 성도들의 기도와 예배참석, 전반적인 신앙의 열심도 사그라져가고 있다.
최초로 한국교회에 금주를 선언하게 하신 분은 분명 성령이셨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유독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만 금주를 선언하셨을까. (다른 국가들은 목사님들도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한국 특유의 음주문화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은 분명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격한 음주 문화가 있다. 마시기 시작하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분위기, 싫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술을 권하고 안 마시면 안 되는 분위기, 술을 마시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관대한 분위기,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술에 취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술은 ‘적당히’가 어려운 영역이다. 따라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한번씩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술에 취한 상태는 우리의 영성을 혼탁하게 만든다. 음주를 지양하는 한국교회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교회 성도들 역시 술을 마시면 대부분 양심의 찔림을 경험하게 된다.
음주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도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아예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합리화를 시켜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이글은 술을 마시는 성도를 정죄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술에 대한 정죄로 성도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만일, 술을 끊지 못하는 남편을 못마땅해 하는 아내가 있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남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한번쯤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 친구들과의 수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술만큼이나 우리의 영성을 희석시킨다. 몇 일간 부흥회에 참석해서 얻은 충만한 감정도 드라마 한편을 시청하고 나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곤 한다. 누군가는 술을 끊지 못하듯, 우리들 모두는 각자가 끊지 못하는 자기만의 숙제가 있기에 금주 하나만으로 우월감을 느껴서도 안 되고, 술 때문에 상대방에게 신앙적 좌절감을 맛보게 해서도 안 된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이론 + 본인 스스로 꽤 믿음이 좋다는 확신까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신앙과 술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가정이다. 비단 술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곧 세상에 대한 미련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직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주님보다 더 말이다.
“금주와 음주, 주님께서 어느 쪽을 기뻐하실까?”
생각해보면 망설임 없이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굳이 술을 마셔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술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은밀한 우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다른 노골적인 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성도라 칭하는 자가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모른척하며 교회와 세상을 오고가는 악을 행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주’는 상대방이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게 다루어서도 안 될 주제이지만,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세상의 그림자이다. 아직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스스로의 자화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걸맞은 죄의 값이 부과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뿐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견해이다. 마치 무법천지인 곳에서 사채를 사용하고 갚지 않으면 깡패가 찾아와서 채무자에게 침을 뱉고 머리채를 휘잡아 끌고 가며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제부터 너는 내꺼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 놓인 자들에게는 죄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이미 갚지 않았느냐.”
이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죄 가운데 빠진 그 상태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 가운데 빠진 자녀를 반드시 건져내어 의의 길로 돌이키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이다.
문제는 ‘의의 길로 돌이키시는’ 방법이 생각보다 아플 수 있다는 점이다.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 상태에 따라 주님의 섭리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주님을 영접한 현수와 명수, 그들은 동일하게 A라는 죄에 빠져 자꾸만 넘어진다. 현수는 진심으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주님께 기도한다. 반면, 명수는 적당히 죄를 즐기며 적당히 신앙생활을 한다. 진정성, 이 한 가지를 제외하면 둘은 죄에 있어서 모든 조건이 일치한다. 동일한 죄를 짓는 동일한 죄인이다.
“진정성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있어야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현수는 완벽하게 죄에서 벗어난 의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현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의 부족함과 허물을 덮었다. 현수는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된다. 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잘 되어가는 안정감 속에서 범사의 모든 일들 또한 잘 되고 형통해 감을 경험하고 있다. (요한삼서 1장 2절)
명수는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의 이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도통 모르겠다. 다른 성도들은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들 하는데 그는 한 번도 그런 평안을 누린 기억이 없다. 불면증으로 잠은 안 오고, 마음은 늘 불안하며 늘 원망과 미움 같은 어둠의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그는 그의 삶에서 주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현수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걷고 있다. 가끔 어긋난 길로 가려 할 때면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는 곧 순종한다.
“그쪽이 아니다.”
“네. 잘못했습니다.”
명수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명수는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점점 더 위험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가고 있다. 주님의 음성은 다급한 경고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죄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주님께서 내미는 손을 계속해서 뿌리치고 있다.
“조금만 더 놀고 갈게요.”
명수는 이제 불법으로 채권추심을 하는 깡패, 아니 사탄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다. 얻어터져서 부은 눈두덩이 사이로 희미하게 주님께서 내민 손길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깡패에게 사채를 더 얻어 세상노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중독, 그는 죄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죄의 구타는 싫지만 죄가 주는 짜릿함은 좋다. 포기할 수 없다. 멀게만 느껴지는 주님 때문에 단념하고 싶지가 않다. 명수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론상으로는 기억하지만 그 약속을 붙잡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 진정어린 마음을 드려 본적 없기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서도 성화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친구에게, 아내에게, 남편, 형제자매, 부모님 등등 기회만 되면 퉁명스럽고 쌀쌀한 말투로 너무도 쉽게 화를 낸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여전히 그러하다. 예수님을 닮기는커녕 세상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인 다혈질에 가깝다.
이들은 본인이 실컷 화내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울며 회개하는 패턴에 스스로도 염증을 느끼고 있다. 10년, 20년, 30년째 그들의 패턴은 변하지 않고 있다. 양인지 염소인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하는 행동만 보아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골고루 버무려 놓으면 같은 상품인줄 알고 지옥행 수하물 칸에 함께 실릴 판이다.
“그래도 주님께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데 지장은 없답니다.”
성도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표 중 하나가 성화이다. 역설적으로, 성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10년을 하루같이 미우면 미워하고, 싫으면 싫어하고, 화나면 화를 내며, 소리치고 짜증내며 부정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면, 까칠하고 공격적인 말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운전 중에, 일과 중에, 쇼핑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도 수그러들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정말 아주 어쩌면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자기점검이 필요할지 모른다.
구원까지 언급하긴 조심스럽다 해도, 그가 은혜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어째서 울타리 밖에 서 있게 된 걸까?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다행히 우리는 그 이유까지는 몰라도 된다. 쓴 뿌리? 무의식적 사고와 상한 감정? 알면 도움이 되겠지만 몰라도 우리에겐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면 아물기 시작한다. 연고의 성분과 그것이 상처에 작용하는 원리를 몰라도 바르면 좋아진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면 영적인 문제가 해결 된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어떻게 우리의 영에 작용하는지 그 원리를 몰라도 기도하면 감정이 다스려지기 시작한다.
사실 사람의 성품변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 죽도록 기도해야 참깨크래커에 들어있는 참깨만큼씩 변하는 것이 사람의 성품이다. 너무 작아서 티도 나지 않을 만큼 타인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 입장에선,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는 찬송 가사를 몸소 실천해가며 이룩해낸 찬란한 성화의 증거이다.
거칠기로 소문난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T는 학창시절 분노의 감정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인지 심각한 다혈질이 되어버렸다. 싸움으로 경찰서를 드나들기도 했던 그는 일단 주먹질이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낼 정도로 예민해졌고 화가 나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문을 때려 부수기까지 했던 T,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을 만난 T는 서서히 변해 갔다. 참깨크래커의 참깨만큼씩...
계속되는 분노의 시련 앞에서 그는 승리하기도 했지만 넘어지기도 했다. 승리하기는 몹시 힘들었으나 넘어지기는 참으로 쉬웠다. 승리하기 위해서 그는 기도로 몸부림을 쳐야했지만, 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넘어질 때마다 그는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죄송함. 또 하나는...
“이렇게 나를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한 상대방을 몇 배 더 두들겨 패고 싶더군요.”
화를 참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경험하고 있던 그가 화를 참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보통 사람은 화가 나면 단순히 화가 날 뿐이다. 그러나 T는 화가 나면 폭력 그 이상을 행사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견뎌야만 했다.
어디를 가나 자신의 불같은 성질을 감출 수 없어 고민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양반, 선비' 등으로 불리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받곤 한다. 지금 그의 주변인들은 T의 과거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심지어 T는 사람들에게 화를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낼 필요는 없는 겁니다. 격한 감정을 사용하지 않고 화를 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T가 주님을 만나고 2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T는 정말 온유해진 걸까?
“아니요. 저는 온유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저는 언제든 예전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분노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단순히 소리 지르고 싶은 정도가 아닙니다. 정상인들은 화를 내도 이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여전히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닮기 위해 20여 년간 몸부림을 쳤다. 주님께 죄송해서 운적도 있지만 분노를 참는 것이 힘들어서 운적도 있었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자신을 보며 평생을 그런 감정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해서 운적도 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가 고작 이 정도라고 T는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처음보다는 발전했지만 아직 저는 노력하지 않은 보통 사람만큼도 못 됩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변화를 포기하지 않는 건가요?”
“주님 때문입니다. 변화는 힘이 들지만 주님 뜻을 모른척하며 내 맘대로 막 사는 것은 더 힘이 드니까요. 주님 닮기를 시도하며 쌓아가던 공든 탑이 무너질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막 살려고도 몇 번 해봤지요. 근데 도저히 못하겠습디다. 저는 이제 예전처럼 죄도 맘대로 못 짓겠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자신도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반푼이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발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내 주변에서 T만큼 자신을 변화시킨 사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가 전혀 없는, 아니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둘러 싸여있다. 퉁명스러운 사람은 계속 퉁명스럽고, 짜증 많은 사람은 20년째 꾸준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상대방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T에게 성화의 노하우를 들어보자.
“화가 날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여기까진 모두가 아는 바,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날 때는 기도하기가 싫어지더군요.”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증상, 이것도 모두가 경험한 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음성인가요?”
“차분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음성,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은 한 번뿐이었지만 너무도 선명해서 화가 날 때마다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게 되더군요.”
T가 들었다는 그 음성, 그것은 아마도 주님 닮길 소망하는 T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 즉 레마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화를 참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은 기도를 발견 했어요. 화가 날 때마다 좋은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좋은 동료가 되게 해주세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더니 그 즉시로 제가 정말 좋은 자녀, 좋은 동료, 좋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더군요. 내 평생 처음으로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평소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훈련했더니 극한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화가 나도 예전처럼 심각한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무턱대고 돈 달라는 기도 빼고는 꽤 잘 들어주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닮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화날 때 진심으로 기도하면 가장 먼저는 평정심이 온다. 그리고 단순히 참아주는 차원을 넘어 매우 세련 된 처세술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상황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바보처럼 당하고도 힘이 없어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상황을 점잖게 역전시킬 수 있게 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를 존경하게까지 만드는 주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된다.
깡패가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고, 양아치라 불리던 이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반전 말이다. 기도다운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영에 제대로 사로잡힌 성도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다.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주님께서 안 들어 주실 리 없는 가장 쉬운 기도의 응답일 것이다. 그런 기도조차 응답을 받고 있지 못하다면 대체 얼마나 기도를 안 하고 있다는 방증인가.
단순히 갚아 주는 정도로 멈춰서는 안 된다. 악인도 놀라 손사래를 칠 정도의 지독한 악이어야 한다. 즉, 악인보다 더 악해져야 한다. 다신 안 그럴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강도 높은 보복을 가해야 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만들 수 있다면 악은 제압된다. 자! 이제 그 구역의 악인은 내가 되었다.
이따금 어설픈 분노로 상대방의 혈기에 맞서려하는 크리스천이 눈에 띤다.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이것 보세요!”
크리스천 A가 한 마디 하려하자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기세로 달려든다. 이제 A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처음보다 더 큰 악이 필요해졌다.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으면서 반격에 나서야 할 차례다. 그러나 A에겐 그 정도의 악이 없다. 상대방은 본인이 기선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기세등등하여 A를 조롱하기 시작한다. A는 처음보다 더 큰 인내심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C는 아랫집 베란다에서 피워대는 담배연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아랫집을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랫집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C는 화가 났다. 그는 문득 자신이 위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농구공으로 드리블을 할 수도 있고, 줄넘기를 할 수도 있으며, 탭 댄스를 출수도 있다. 큰 힘들이지 않아도 평소 걷던 걸음걸이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층간 소음으로 아랫집에 보복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 분이 걸린다.
“주님!”
아직 온전히 성화되지 않은 C이기에 아랫집을 항복시킬 수 있을 만한 악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이 불씨를 다시 살려 내면 아랫집도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면 C는 더 큰 악으로 그에게 응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탁구처럼 몇 번의 공이 오고가다보면 서로를 향한 악한 감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마침내 아랫집이 백기를 들면 C는 잠시 승리감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사탄의 참소와 정죄, 긴 회개 끝에 주섬주섬 아랫집에 내려가서 그는 또 사과를 하게 되겠지. 육의 승리는 곧 영의 패배가 되니 어쩌면 좋은가. 그냥 억울해도 져줘야 할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21절)
‘차라리 담배 냄새를 맡겠습니다.’
C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선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되었을까?
능력의 하나님께서 아무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 C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한다면 응답해 주실까? 그러나 고작 이런 문제 따위로 그렇게까지는 기도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소한 것부터 기도해야지요!”
주일 학교 때부터 그렇게 하라고 배운바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C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 냄새 때문에 몇 번인가 기도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랫집은 전혀 미동조차 없다.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그렇다면 고작 담배 연기 때문에 3일 금식기도라도 하란 말인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미소라도 보이며 더 잘 대해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나를 얕잡아보고 더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깨달은 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악인을 의식하며 그를 상대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을 없는 듯 무심하게 대하며 내가 마땅히 행할 그리스도인의 도를 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된다. 상대방이 혈기를 부리건 말건 나는 온유를 선택하며, 상대방이 아무리 강해도 나는 담대함을 선택하고, 상대방이 복잡하고 난해하게 굴어도 나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선택한다. 작은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보다 큰 문제 앞에서도 상대방의 반응에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저 사람이 담배를 안 피웠으면 좋겠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감정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므로 누군가와 다투느니 차라리 담배 연기를 맡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 힘’의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악의 불씨를 꺼내 휘두르는 순간 ‘그 힘’의 통로가 차단되고 우리는 더 이상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주여, 보소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주님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또한 저를 놓지 마소서.’
곧, 주님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복의 근원으로서 내재된 자신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초월한 믿음,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 된다. 이제 담배 냄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 문제로 나의 영성을 오염시키기엔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살면 주님께서 내게도 복을 주시겠구나. 나도 복을 받겠구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선명해지며 자존감이 회복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실 거라는 믿음도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반대로,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악으로 맞짱을 뜨고 다니는 사람이 주님께 읍소할 수 있을까?
펄펄 끓는 악을 상대방에게 쏟아 붓고 곧바로 교회에 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정과 사업장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적인 소시오패스 즉, 화인 맞은 심령일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해서 선으로 악을 이겨본 성도만이 긍정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주의 뜻을 따르니 주님도 나를 기뻐 받으시리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의 삶도 형통하리라.’
확신에 차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렇듯 말씀으로 승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말씀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본 이는 타인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능력의 통로가 된다. 그는 상대방의 형편없는 현재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상대방의 가능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다.
'나를 변화시킨 주님께서 그 또한 변화시키리라.'
강한 믿음은 상대방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 현실이 어떠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이 견고하면 상대방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나의 믿음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 네가 너를 바꿀 믿음이 없다면 나의 믿음으로 너를 살게 할거야. 엄마는 너를 위해서 끝까지 기도할거야.”
상대방이 사용하는 언어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항상 평강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변화가 더디더라도, 아니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야고보서 3장 11절)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힘’의 통로이기에 다른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 고린도후서 12장 10절)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영적성장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자극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켜준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의 최대 고민 중 하나인,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일단 상황이 닥치면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죄와 정죄의 사슬을 능히 끊어 낼 수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아둔함이 발견되곤 한다. 그들의 거짓말은 티가 난다. 그들은 티 나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아둔하다.
“나 집도 몇 채있고, 땅도 여기저기 있어. 난 취미삼아 일하러 나온 거야. 돈을 꼭 벌어야 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야.”
아무도 물어 본적 없는 말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하며, 자신을 포장하고 다니는 H 여사님은 월말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실제 상황을 고백하곤 한다.
“돈 들어가는 데가 있어서 000원 이상은 꼭 벌어야 되는데...”
거짓말 중에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치장용 거짓말’이 있다. 잘난체는 하고 싶지만 잘난 것이 없을 때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되는 듯싶다. 치장용 거짓말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 좋은 것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치장용 거짓말을 하는 사람조차 멀리하려 한다.
C는 깊이 신뢰하던 사람에게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설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퍼즐이 들어맞듯 거짓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1. 거짓말이 탄로 났음을 상대방에게 알린다.
2. 모르는 척 해준다.
C는 2번을 선택했다. 그러자 또 다른 두 가지 선택지가 펼쳐진다.
1. 인간관계를 종전과 같이 유지한다.
2. 슬슬 거리를 두며 멀리한다.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보며 대중은 일종의 혐오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멀리하려 한다. 거짓말쟁이들은 사람들이 왜 자기를 멀리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을 알 정도면 그렇게 뻔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려는 사람을 나무랄 순 없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피하고 싶은 것은 일종의 방어본능일 수도 있으니...
세상에 어느 누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겠는가. C 또한 본능적으로 2번 선택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언제, 무슨 거짓말을, 어디까지 할지 모르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어떤 일을 진행하겠는가. 그러나 주님의 입장은 조금 다르신 듯 했다.
‘너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 앞에서 C는 그의 허물보다, 어떻게든 C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어 했던 상대방의 마음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상대방을 예전처럼 대할 자신은 없었다.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행동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닙니까?”
‘너의 행동은 언제나 네가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와 일치하는가.’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레마, 비로소 C는 상대방을 예전처럼 대할 용기가 생겼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이따금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은 모습으로 행동한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탄의 자녀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이지만 사탄의 자녀가 있다.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긴 하지만, 한 가지 행동만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너무도 뻔한 거짓말을 해 올 때 또는 다양한 잘난체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7절)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너그러움이라는 감정을 연습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믿음의 법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 볼 때 허물을 들춰내고 지적을 하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다. 격려해주고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며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사람에게 적합한 행동양식이다.
“하지만,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은 죄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따금 부모에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곤 한다.
“나는 우주 비행사야.”
그러나 어느 부모도 자녀들을 거짓말쟁이라 꾸짖지 않는다.
“그건 아이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자녀가 어른이 되어도 부모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취직 못한 자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취직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을 까발리는 부모는 없다. 그것을 덮어주는 이유는 아마도 자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리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8절)
평소 그다지 바르게 살지도 않으면서 시시때때로 입 바른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사랑은 없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하는 것 봤어!”
틀린 말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 5절)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거짓말은 상대방의 결핍에 대한 아픔으로, 그가 꿈꾸는 비전으로, 또 중보기도 제목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듯 거짓말을 재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 = 기도제목 → 중보기도 훈련의 기회 → 기도하는 사람을 너그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듦
여기서 말하는 ‘때’에는 시간뿐 아니라 자격 또한 포함된다. 만약,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10절)
마찬가지로 자격을 충족시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고, 자격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다. 우리 중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은혜 :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비록 자격은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복일까?
우리는 이따금 성령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모략인지 모를 도전을 받곤 한다.
“당신이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여 봐. 그 따위로 행동하면서 무슨 전도를 한다고 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거룩한 영향력이긴 하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복음 그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로마서 1장 17절)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의로 타인을 변화 시킬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도대체 얼마나 의로워야 다른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을까. 나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을 교회에까지는 따라 나오게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교회에 나온다고 다 천국에 가는가?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믿음은 사람의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말미암는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 성품과 행동이 도무지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아도 내가 주님을 만났다면 지금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 성격 고친 다음에, 그 행실 고친 다음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복음을 한 번도 전하지 못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품은 사실은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주님과 함께할 때 이루어지게 되는데, 주님께서 가장 강력히 역사하시는 순간이 복음전파의 현장이다.
바울의 편지를 읽다보면 시간에 따른 바울의 성품변화를 엿볼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수없이 많은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많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의 종인 그였지만 초창기 그의 모습은 어쩐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동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분명 예수님의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복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경과해갈수록 그의 편지에서 변화되어가는 그를 느낄 수 있다. 나도 이만하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는 뉘앙스로 말하던 그의 자부심, 아니 어쩌면 약간의 교만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겸손과 부드러운 내면의 소유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발견케 된다. 마침내 그가 고백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에게 겸손을 가르쳤는가. 누가 그를 그토록 변화되게 만들었는가. 복음이다. 복음을 전하면 조금 빨리, 조금 더 많이 변할 수 있다. 사실 바울 서신서의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복음 전파의 현장 속에서 서서히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그를 느낄 수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복에 걸맞은 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걸맞은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받게 된다. 반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여간해서는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충만히 받을 수 없다. 제한적인 일용할 은혜를 누릴 순 있어도 물 붓듯이 부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남들에게 상처 주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라. 십중팔구 전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간신히 구원은 받았겠지만 (어쩌면 구원도 못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아무리 봐도 주님을 닮아 있지 않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번도 전도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영혼 귀한 줄 모른다. 목사님 입장에선 난처할 따름이다. 그것도 성도이니 쫓아낼 순 없고, 그냥 놔두자니 자꾸만 염소처럼 뿔로 다른 양들을 들이받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과연 행동의 본으로 상대방을 감화 감동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 변화되어야 한다면, 십중팔구는 내가 변화되기 전에 상대방은 늙어 죽어 지옥 불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다행히 성경은 그럴 필요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만든다고 말씀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은 믿음이다. 복음을 전하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장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한 의로 인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전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사탄의 음성, 정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 또한 사탄의 방해전파, 정죄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나의 행위,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받는다.
은혜란, 굶주린 거리의 아이가 내민 손에 쥐어 주는 따뜻한 떡 한 덩어리와도 같다. 누구도 가엾은 아이를 도울 때 ‘넌 누구니? 넌 어떤 착한 행실을 했니?’ 캐묻지 않는다. 그냥... 준다. 우리 또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후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또한 사탄이 주는 정죄이다. 왜냐하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2절)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도 된다고 성경에 기록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때’에는 시간뿐 아니라 자격 또한 포함된다. 그러므로 전해야 한다. 변한 후 전한다? 아니다. 전하면 변한다. 변하기 시작한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가장 먼저 복음 전달자를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성령의 불을 봉송하는 성화 봉송주자, 즉 전도자는 성령의 불을 품고 있기에 마땅히 성령의 불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불길에 휩싸이면 가장 먼저는 죄악 된 면모들이 밝히 들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부르짖게 된다. 아니 절규하게 된다.
‘
아아아, 주님! 저의 죄악 된 모습을 성령의 불로 태우소서.’
마침내 그 불순물들에 성령의 불길이 옮겨 붙으면... 이내 하나씩 타들어 가게 된다. 사실상 사람의 성품 변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보통은 평생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성품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있어서만큼은 이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특혜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으면 변해야하고, 변하고 싶다면 전해야 한다. 바빠도 전하고 한가해도 전한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도 전하고 마음이 심난 할 때도 전할 수 있으면 전해야 한다. 복음 증거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일까?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축복의 통로. 물을 전하는 수로는 언제나 흠뻑 젖어있기 마련이듯,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통로인 당신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로 흠뻑 젖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능력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불꽃같은 기도의 응답, 능력의 삶을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녹여야 한다는 것, 소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사라진다. 죽는 것이다.
서서히 자신이 녹아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금의 심정은 어떨까?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존재는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기제'가 있다. 이 시스템은 신체의 위협을 받았을 때도 발동되지만 정신적인 무시를 당했을 때도 발동한다. 사람들은 육체적 공격을 당했을 때 뿐 아니라 정신적 공격을 당했을 때에도 존재감에 대한 위협을 느끼며 반격을 하려든다. 이것은 본능이다.
사람은 위협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본능이 있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은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주먹부터 나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하나의 본능이 추가 된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본능이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서로를 오해하게 만든다.
이렇게 두 가지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 어떻게 될까. 전쟁터, 즉 살아있는 지옥이 된다.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 또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내 행동을 해석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판단 도구의 정확도는 신뢰할만하지 않다. 상대방이 큰소리, 부릅뜬 눈, 공격적인 감정을 보이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멍청한 시스템은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못한다. 달콤하게 말하면 적군도 무사통과시키는 반면, 큰소리를 내면 자신의 부모조차도 적으로 간주해서 발포명령을 내리곤 한다. 따라서 말 또는 눈빛 등으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상대방 또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적절한 대응을 준비할지 모른다. 이것은 본능이다.
“위협이요? 난 그냥 그 녀석이 지각해서 짜증 좀 냈을 뿐이라고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먼저 잘못했는가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짜증이나 고성, 눈을 흘기는 행동은 상대방을 존중할 때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감정이다. 감정은 감정을 자극한다.
실제로 이혼 또는 중대한 사건, 사고 중에 상당수가 극히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해 감정의 충돌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모든 본능이 그러하듯 이 본능 또한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세상의 어떤 동기도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생존본능과도 같은 이 방어기제를 내려놓게 만들 수 없다.
이 때,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수님. 주님을 만난 우리는 결국 깨닫게 된다.
“나 지금 잘못살고 있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 눈빛에 이끌려 서서히 ‘내려놓음’을 시도하려 하지만 칼과 방패를 내려놓는 순간마다 여기서 푹, 저기서 푹, 불쑥불쑥 나타나 나의 자아를 찔러댄다. 그들은 내가 무장해제 된 상태인 것을 알고 평소보다 더욱 거세게 나를 공격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탄이 가르쳐 준 것이다. 지금 무장해제 상태니까 가서 맘껏 공격하라고...
참다못한 소금이 다시 창검을 손에 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참다 참다 폭발했으니 이번엔 칼도 두 자루, 쌍칼이다. .
“야! 이 비겁한 족속들아. 참아주니까 더하냐? 나도 칼 있다. 큰 맘 먹고 예수님 좀 닮아보려 했더니 열받아서 못해먹겠네.”
자신의 자아가 여전히 건재함을 세상에 뽐낸 소금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물끄러미. 아아아! 주님!
예수님을 닮는 것이 왜 힘들까? 사실 온유하게 사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도전일지 모른다. 문제는 내 주변이 전혀 온유하지 않다는 것. 세상은 온유해 질 마음이 없다. 세상 누구도 나의 도전을 도와주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비협조적이다.
우리는 불공평한 이중 잣대를 요구 받고 있다. 나는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상대방은 화를 내도되는 불공평한 상황을 받아 들여야 한다. 왼쪽 뺨을 때린 인간은 최소한 똑같이는 때려줘야 다음에 또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을 텐데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소리치면 세상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훈련의 성과가 정말 쌀알에 붙은 티끌만큼도 안돼 보인다는 것이다. 성과물이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 승산 없어 보이는, 불공평하기까지 한 싸움을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든다. 우리는 온통 흉기와 둔기로 무장한 세상 앞에서 화평이란 이름의 방패만 들고 버텨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시선을 피해보려 시도도 해본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느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다윗조차 견디지 못하고 애원하지 않았던가.
“제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거두신 적 없다. 정신을 차려보면 주님은 늘 같은 자리에 서계셨다. 슬금슬금 주님의 시선을 피해 나의 발이 꽤나 멀리와 버렸을 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오랜 만에 회개로 성령 충만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소금, 그런 소금에게 1번으로 칼을 꽂은 것은 그의 남편, 2번 아들, 3번 딸이다. 가까이 있으니 가장 먼저 찌른다. 자주 보니 자주 찌른다. 기쁜 찬양 곡조는 어느새 고난의 찬송곡이 되어 흐른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드디어 소금이 녹기 시작한다. 죽어 녹아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주님은 더 이상 물끄러미 바라만 보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다가가 그를 감싸 안으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주님 영접한 뒤에도 계속 신경질 내면서 화낼 거 다 내도 천국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위로, 그 속에는 세상을 초월할만한 심리적 안정감은 물론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 또한 형통해지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비전의 완성일 수도 있고 질병의 치유일수도 있다. 어쩌면 어느 절박한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달성할 순 없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을 닮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런 상급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받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대신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 승리에 참여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상급도 받게 된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듯 우리는 믿음으로 다른 모든 상급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은혜라 한다.
은혜 :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혜택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한 나의 성품, 그러나 상 주실 것을 믿고 있으면 주님께서 점점 상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진짜인지 여부는 당사자의 실천의지로 증명이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7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의 풀무불길을 견뎌낸 그는, 그 믿음에 대한 상급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반면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작은 고난도 감수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인생 또한 그들의 믿음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안녕하십니까.
혈기 충만 브라우니 박사올시다.
무슨 박사냐고요? 척척박사올시다.
‘혈기와 축복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득하였습니다.
혈기는 ‘밖으로 부리는 사람’과 ‘안으로 부리는 사람’ 이렇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과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혈기를 밖으로 부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빠지게 만들고, 안으로 부리는 사람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빠지게 만듭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천국 입성도 하기 전에 빛나는 존재감을 얻게 된다 이말입니다.
허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모발~ 모발을 지킬 수 있을까요?
혈기가 올라올 때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참아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터~!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번번이 넘어져 왔습니다.
과연 해법은 없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상 주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 주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혈기가 올라올 때,
그 혈기를 다스리면 주님께서 상급으로 복 주실 것이 믿어지십니까?
믿으신다면 혈기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올라오는 혈기를 쏟아내는 것보다 주님께서 주실 상급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혈기쯤은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마 9:29)
주님께서 주실 상급보다 나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분들 또한 자신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혈기뿐 아니라 버리지 못하는 모든 죄 문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눈앞의 죄를 짓는 것보다 주님께서 주실 복이 더 크다고 믿는다면 다스릴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혈기라는 것이 잘만 사용하면 업무적으로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혈기 자체가 강력한 에너지 다발이기에 그렇습니다. 혈기가 있는 분들은 스타트 업 등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자리를 잡게 할 때 뛰어난 추진력과 열정을 보이곤 합니다.
일례로, 일 잘하는 분 중에는 예민하고 한 성격씩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이 눈에 띕니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빠르고 일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그러고 보니 까칠한 천재는 있어도 까칠한 바보는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혈기를 포함한 모든 죄는 본래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이 FM이고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신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잘못하면 죽을 줄 알라!’는 심판의 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네가 받을 벌은 내가 대신 받았으니 염려하지 말고 힘을 내서 다시 도전해 보렴. 성화에 한 단계씩 성공할 때마다 상급을 줄게.”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 역시 자신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도 일정 부분 이해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잘못할 때마다 벌주시기 위해 회초리를 들고 계실 거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
vs
주님께서 나의 모든 형벌을 끝내주셨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
과연 어느 쪽이, 넘어져도 힘을 내서 다시 성화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인생이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기가 수월할 것 같습니까?
혈기를 폭발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법이 궁금하십니까?
5단계까지 뛰어 올라오십시오.
매운맛은 엄밀히 말해 맛이 아니다. 그것은 통증 세포가 느끼는 일종의 자극이다. 어릴 땐 ‘왜 이런 걸 먹나’ 싶겠지만 그 독특한 맛에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된다.
담배는 무슨 맛? 콜록콜록한 맛!
술은 어떤 맛? 소독 당하는 맛!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먹나 싶겠지만 그 독특한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된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맛이 아니다. 자극이다. 자극에 중독이 되면 좀처럼 그것을 끊을 수 없다. 우리 몸은 전기 신호로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자극은 우리 몸이 망가지면서 방출되는 일종의 전기 신호이다. 복잡한 전자회로에 물을 뿌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닮아있다. 또한,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몸이 그러하면 마음도 그러하고 마음이 그러하면 몸도 그러하다. 우리의 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면 자극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 영혼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면 자극을 느끼게 된다.
죄는 맛이 있다. 콜록콜록, 소독소독, 짜릿짜릿 자극적인 맛이다. 담배처럼, 술처럼 특별한 맛은 없지만 그 자극은 사람을 중독되게 만든다. 아내를 두고 아내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이유도 죄의 맛 때문이다. 죄를 지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은 지갑에 쓰고 넘치도록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잣집 딸로 하여금 쓰지도 않을 값싼 물건을 도둑질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이상하게 도둑질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저도 모르게 그만...”
자극은 언제나 더 큰 자극을 부른다. 이미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재물을 모은 정치인들이 들킬 위험을 무릅쓰며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횡령을 일삼는 이유도 죄의 맛에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돈을 갖고 싶어 죄를 지었겠지만 죄에 중독된 그들의 목적은 더 이상 돈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죄를 지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얻었고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더 얻을 수 있었다. 돈과 명예, 권력, 군사력, 합법적으로 얼마든지 더 많은 여자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들로부터 더 이상 재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1:2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과 해보았던 모든 행동을 열거하며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고백한다.
“내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는데 다 의미 없더라. 내가 이것도 가져보고 저것도 가져보고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 봤는데 다 그때 뿐이더라.”
그러던 중 솔로몬은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으로부터 우상숭배를 제안받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 보지 않은 독특한 자극이었다. 그렇게 그는 죄의 맛에 빠져들게 된다. 죄에는 식음을 전폐하게 만들 정도의 맛이 있다.
제대로 죄에 사로잡혀 노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죄의 맛을 음미하는 동안에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놀고 나면 무기력과 공허의 시간이 찾아온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죄의 맛에 취해 밥맛을 잃은 것이다. 그렇게 죄를 짓다보면 자꾸만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죄의 맛에 빠져 살맛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죽도록 맛이 있어 죽을 만큼 먹게 되는 죄의 맛이다.
기도를 내려놓고 혈기와 분냄으로 성질 가는 대로 살아보라. 죄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대로 살면 분명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죄의 메커니즘은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게 될 것이다. 자기 본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독된 또 다른 자아가 죄의 맛을 갈망하며 자신의 발로 뚜벅뚜벅 죄를 찾아 나아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승리의, 능력의, 정직한, 선한, 거룩한, 자비로운 등등 셀 수없이 많은 수식어를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표현이 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수만 가지 이상의 긍정적인 수식어만 담겨 있다. 하나님께는 나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DNA가 내재 되어 있다. 본래 인간은 좋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죄로 인해 온몸과 영혼이 악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죄의 껍질에 싸여 선한 것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죄의 껍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실패의, 패배의, 무능한, 부정직, 못된, 더러운 등등 셀 수없이 많은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크고 작은 결함이 있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도 악한 영향을 받게 된다. 나쁜 삶에서 좋은 삶으로 옮기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죄의 껍질을 깨야 한다. 껍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딪혀야 한다. 깨질 때까지... 죄의 껍질을 깨기에 딱 좋은 돌이 있다. 그 돌은 살아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베드로전서 2:4
살아있는 돌, 산 돌이신 예수님께 부딪혀서 죄의 껍질이 깨지면 그 속에서 선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속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의 가치로서 온통 좋은 것들뿐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그러하다. 사람이 이 돌에 부딪치면 악한 껍질만 깨진다. 그러나 이 돌이 사람 머리 위에서 떨어지게 되면 껍질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1:4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시기 전에 각 사람은 부지런히 이 돌에 부딪혀 죄의 껍질을 깨야만 한다. 그러나 단단한 그 껍질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한두 시간, 하루 이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정도의 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3박 4일 부흥회참석도 대부분 그 때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소 1년 이상을 쉬지 않고 부딪혀야 한다. 사람에 따라 그보다 짧을 수도 있겠지만 아예 그렇게 각오를 하고 시작하는게 나을 것이다.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려 애쓰고, 일과 중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니 몸부림쳐야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만큼의 열정으로 1년 이상 부딪혀야 한다. 그렇게 몸부림 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특정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일상생활 중에 쉼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주여,주여,주여,주여’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집으며 탄식을 내뱉게 되는 것은 덤이다.
‘주여허~’
TV등 대중 매체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랄 수도 있다.
‘어떻게 받은 은혜인데, 얼마나 노력해서 얻은 성령 충만인데...’
몇 시간씩 기도하고 말씀 읽어서 충전한 영성이 세상 미디어 한 편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것은 자연스레 배설물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이 세상 사람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자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1. 문제가 생기면 주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2. 주님은 문제 해결자가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세요. 상황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세요.
그쯤 되면, 전혀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듯 보이는 위 두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타인의 입이 아니라 본인 안의 성령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나태하게 살아온 시간만큼, 악하고 무능했던 세월만큼 깨지는 시간 또한 적잖이 소요될 것이니 각오는 해야 할 것이다.
“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온유하다. ”
각양 좋은 말과 선한 생각들로 나쁜 껍질을 내려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껍질에 금이 가서 속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여 껍질 내리치기를 멈추면 다시 껍질의 경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 껍질은 처음 것보다 더 두터워 깨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은혜 받지 못하고 지낸 신앙세월이 길어 질수록, 회개했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껍질은 점점 두터워 진다. 그래서 다음 번엔 더욱 세게 내리쳐야 껍질을 깰 수 있다. 그러므로 단번에 껍질을 깨고 겉 사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지간한 설교는 다 들어봐서 나도 이제 알 만큼 안다는 교만이 감싸기 전에, 말씀을 들어도 은혜는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변화 없는 신앙인의 삶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주변이 온통 그러하니 나도 그래도 될 것 같은 자기 합리화가 완성되기 전에 속 사람이 드러나야 한다. 이전 껍질은 떼어 내고 계속해서 속 사람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대상 : 예수님 믿은 지 1달 된 새내기 성도, 하나님을 떠났다 돌아온 성도, 10년 이상 교회에 있었으나 아무런 응답이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
금기 : 술, 담배, 음란, 혈기, 미움, 불평, 부정적인 생각 등 나쁘다 싶은 것 끊기. 회개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내 죄 사하셨다 타협하지 말고 끊기. 할 거 안 할 거 다 하고 다니면서 왜 나만 응답 안 주시나 원망 말기
과제 : 쉬는 시간마다 성경 읽기, 잡생각 대신 하나님과 대화하기, 하루 1시간 이상 기도하기(기도가 안 돼도 기도의 자리는 지키기) 참석 가능한 예배 다 참석하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마음에 순종하기 (예를 들어, 운동하라는 마음이 들면 순종하기. 용서하라는 마음이 들면 순종하기.)
기간 : 1년 이상
주의 : 최대고비 3~4일, 1주일 이상되면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착각이니 방심말기. 1개월 후부터는 안정권이나 넘어질 순 있음. 이때 사탄의 정죄에 넘어가 포기하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관건.
이런 노력 없이도 예수님 믿는게 확실하다면 천국은 갈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없을 것입니다. 응답을 경험한 성도들은 하나 같이 말합니다. 순종하면 생각보다 정말 빨리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결단을 시작하는 순간 돕는 천사들을 보내시고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심으로 응원하십니다. 1년이 지나면 주변에서 당신의 변화를 알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번씩만 보내면 새로운 1년이 옵니다.
대체로 업무적 완성도가 높은 사람들은 섬세하다.
섬세함은 둥그런 것 보다는 날카로운 성품을 대변한다. 실제로 일 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날카로운 면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날카로운 성품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심히 낙천적이어서 온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업무적인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업무적으로 부족한 자녀들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된 언약이 기록 되어 있다.
‘네가 어디가든지 머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겠다’
업무현장에서 이 약속은 곧 업무적 탁월함을 의미한다.
성품에 대한 연단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낙천적이지만 업무적 완성도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까칠한 환경’속에서 업무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을 훈련시키시고, 일은 잘하지만 다소 날카로운 사람에게는 그 까칠함을 버리도록 이끌어 가신다. 이 둘은 각자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사람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된다.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환경,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현장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일은 잘하지만 까칠한 성품의 김완벽씨도 훈련 대상이지만, 온유해 보이나 게으르고 일 못하는 박대충씨 역시 주님께는 훈련의 대상이다.
이 둘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각자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피할 길을 만드셔서 모든 훈련생들이 결국은 그 모든 훈련을 감당하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새로운 곳에 취직하면 1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 나오는 박대충씨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실’에 대한 말씀을 듣게 하시며 그의 마음속에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음성을 끊임없이 주셨다. 대충씨는 진지하게 취업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의 기도는 곧 응답되었다. 대충씨는 회사에서 두 명의 조교를 만난다. 한명은 까칠한 박선배, 또 다른 한 명은 상냥하고 자상한 이선배다.
대충씨가 박선배에게 온갖 구박을 당한 뒤 회사를 그만둘까 고심하고 있을 때면 이선배가 그를 위로하며 퇴사를 막아준다. 대충씨는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했다. 그가 그렇게 날마다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가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주님, 현실을 이길 힘을 주소서. 그리고 저 망할 자식, 아니 박선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시간이 흘렀다. 대충씨는 박선배에게 욕을 안 먹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덧 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사원이 되어 있었다. 대충씨는 박선배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중보기도까지 시작했다. 만일 대충씨가 기도로 버티지 않고 훈련장에서 도망갔다면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일은 잘하지만 까칠한 김완벽씨의 눈에는 사람들의 단점만 보인다. 모든 사람이 못 마땅한 그였다. 까칠한 그는 이따금 혈기를 참지 못하고 한 번씩 사람들에게 크게 화를 내곤 한다.
"정신 똑 바로 차려요! 도대체 같은 실수를 몇 번하는 건가요? 어째서 내 주변에는 저런 답답한 인간들 밖에 없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의 업무적 완성도는 빈틈없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므로 무조건 그가 잘못 되었다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완벽씨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째서 일 잘하는 자신이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가 악화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힐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 가신다.
성령께서는 완벽씨에게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임을 상기시키신다. 동시에, 그가 추구해야 할 ‘복’이 세상에서 자기노력으로 받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임도 깨닫게 하신다. 또한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반하는 혈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완벽씨는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기쁘게 순종을 결단한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노라 다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모든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성품’과 ‘물질’이다. 실제로 주님을 만난 이들은 한결 같이 ‘물질연단’에 대해서 언급한다.
‘물질연단’을 받는 이들 중에는 ‘성품연단’을 받지 않겠다고 훈련장을 박차고 나온 이들도 섞여 있다. 즉, 자신의 모난 성품을 계속해서 버리지 않고 버티면 ‘물질연단’이 올 수 있다. 물질연단은 단순히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가족관계 등 세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한 고난을 대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단을 주신다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해 대부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오늘 날 신앙선배들의 간증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쓰임 받는 주의 종들은 하나 같이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연단’에 대해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연단하셨다.’
연단하다 :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이란 평신도 사역자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훈련에서 예외 일 수 없다. 필자가 직, 간접적으로 관찰한 바로는 물질연단은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으로 구분 되는 듯했다.
강한 것은 말 그대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말한다. 모든 것을 잃고 기도가 절로 나오는 환경에서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부드러운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는 훈련목적은 동일하지만 '강한 것' 만큼 처절하지는 않다. 큰 고난 없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 어찌 보면 그만큼 평소 성품이 예수님의 인격에 닮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의 신학대학 등록금을 내주셨던 은사님은 강남 포함 여러 지역에 건물과 토지를 소유한 자산가이다. 그녀는 신학생은 물론 어려운 개척교회에 차량 및 건축헌금을 드리던 의로운 부자였다. 그런 그녀 본인이 신학대학에 입학하자 물질의 연단이 찾아왔다.
“건물 임대료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부동산에 내놔도 팔리지를 않는 거야. 미국에서 유학중인 아들에게 돈을 보내줘야 하는데 방법이 없더라고. 나중에는 차 기름 값도 없어서 울면서 다녔어. 아마 사람들은 믿지도 않을 거야”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의사의 아내로 살던 그녀는 난생처음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도는 다른 물질연단 받는 이들이 고백했던 것처럼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응답이 되었다. 그녀는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소유를 그대로 지켜 주시면서도 물질로서 그녀를 연단하셨다. 그렇게 그녀는 부드럽게 물질의 연단을 마쳤다. 그녀는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언약을 몸소 확인했다. 연단을 경험한 그녀의 고백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연단하셨다.”
사람들은 연단을 받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되고 철저히 부서지고 깨어진다. 또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시스템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후천적 본능이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말한다.
“사실 물질 연단은 고급 매야”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이 그 매를 맞고 있을 때는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다른 많은 성도들의 연단을 지켜 본 나로서는 이제 그 말에 동의한다. 물질연단은 고급 매이다. 모든 재산을 잃고, 심지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어도 그 매는 다른 매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지키시기 위해 생명까지 거두어 가시는 것을 지켜 본 나로서는 하나님의 ‘연단’이 감사할 뿐이다. 연단 즉, 훈련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살려 두시고 지켜 주시겠다는 즉,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가.
“술 마시면 지옥가나요?”
“안 갑니다”
“오! 할렐루야”
“반응을 보니 어쩌면 당신은 갈지도 모르겠네요.”
술 마시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을 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술을 마시는 기독교인들 중에 상당수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 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가는 것이다. 한국교회 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논쟁을 양산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술 때문에 지옥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성경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술 취함’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하게 명시가 되어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술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한국교회에 속해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술을 금하는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신앙부흥을 경험했다. 또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교회 내에서 슬금슬금 술 마시는 분위기가 용인되어지면서 성도들의 기도와 예배참석, 전반적인 신앙의 열심도 사그라져가고 있다.
최초로 한국교회에 금주를 선언하게 하신 분은 분명 성령이셨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유독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만 금주를 선언하셨을까. (다른 국가들은 목사님들도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한국 특유의 음주문화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은 분명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격한 음주 문화가 있다. 마시기 시작하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분위기, 싫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술을 권하고 안 마시면 안 되는 분위기, 술을 마시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관대한 분위기,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술에 취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술은 ‘적당히’가 어려운 영역이다. 따라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한번씩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술에 취한 상태는 우리의 영성을 혼탁하게 만든다. 음주를 지양하는 한국교회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교회 성도들 역시 술을 마시면 대부분 양심의 찔림을 경험하게 된다.
음주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도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아예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합리화를 시켜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이글은 술을 마시는 성도를 정죄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술에 대한 정죄로 성도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만일, 술을 끊지 못하는 남편을 못마땅해 하는 아내가 있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남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한번쯤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 친구들과의 수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술만큼이나 우리의 영성을 희석시킨다. 몇 일간 부흥회에 참석해서 얻은 충만한 감정도 드라마 한편을 시청하고 나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곤 한다. 누군가는 술을 끊지 못하듯, 우리들 모두는 각자가 끊지 못하는 자기만의 숙제가 있기에 금주 하나만으로 우월감을 느껴서도 안 되고, 술 때문에 상대방에게 신앙적 좌절감을 맛보게 해서도 안 된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이론 + 본인 스스로 꽤 믿음이 좋다는 확신까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신앙과 술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가정이다. 비단 술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곧 세상에 대한 미련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직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주님보다 더 말이다.
“금주와 음주, 주님께서 어느 쪽을 기뻐하실까?”
생각해보면 망설임 없이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굳이 술을 마셔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술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은밀한 우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다른 노골적인 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성도라 칭하는 자가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모른척하며 교회와 세상을 오고가는 악을 행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주’는 상대방이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게 다루어서도 안 될 주제이지만,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세상의 그림자이다. 아직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스스로의 자화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걸맞은 죄의 값이 부과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뿐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견해이다. 마치 무법천지인 곳에서 사채를 사용하고 갚지 않으면 깡패가 찾아와서 채무자에게 침을 뱉고 머리채를 휘잡아 끌고 가며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제부터 너는 내꺼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 놓인 자들에게는 죄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이미 갚지 않았느냐.”
이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죄 가운데 빠진 그 상태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 가운데 빠진 자녀를 반드시 건져내어 의의 길로 돌이키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이다.
문제는 ‘의의 길로 돌이키시는’ 방법이 생각보다 아플 수 있다는 점이다.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 상태에 따라 주님의 섭리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주님을 영접한 현수와 명수, 그들은 동일하게 A라는 죄에 빠져 자꾸만 넘어진다. 현수는 진심으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주님께 기도한다. 반면, 명수는 적당히 죄를 즐기며 적당히 신앙생활을 한다. 진정성, 이 한 가지를 제외하면 둘은 죄에 있어서 모든 조건이 일치한다. 동일한 죄를 짓는 동일한 죄인이다.
“진정성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있어야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현수는 완벽하게 죄에서 벗어난 의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현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의 부족함과 허물을 덮었다. 현수는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된다. 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잘 되어가는 안정감 속에서 범사의 모든 일들 또한 잘 되고 형통해 감을 경험하고 있다. (요한삼서 1장 2절)
명수는 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의 이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도통 모르겠다. 다른 성도들은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들 하는데 그는 한 번도 그런 평안을 누린 기억이 없다. 불면증으로 잠은 안 오고, 마음은 늘 불안하며 늘 원망과 미움 같은 어둠의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그는 그의 삶에서 주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현수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걷고 있다. 가끔 어긋난 길로 가려 할 때면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는 곧 순종한다.
“그쪽이 아니다.”
“네. 잘못했습니다.”
명수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명수는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점점 더 위험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가고 있다. 주님의 음성은 다급한 경고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죄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주님께서 내미는 손을 계속해서 뿌리치고 있다.
“조금만 더 놀고 갈게요.”
명수는 이제 불법으로 채권추심을 하는 깡패, 아니 사탄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다. 얻어터져서 부은 눈두덩이 사이로 희미하게 주님께서 내민 손길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깡패에게 사채를 더 얻어 세상노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중독, 그는 죄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죄의 구타는 싫지만 죄가 주는 짜릿함은 좋다. 포기할 수 없다. 멀게만 느껴지는 주님 때문에 단념하고 싶지가 않다. 명수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론상으로는 기억하지만 그 약속을 붙잡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 진정어린 마음을 드려 본적 없기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서도 성화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친구에게, 아내에게, 남편, 형제자매, 부모님 등등 기회만 되면 퉁명스럽고 쌀쌀한 말투로 너무도 쉽게 화를 낸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여전히 그러하다. 예수님을 닮기는커녕 세상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인 다혈질에 가깝다.
이들은 본인이 실컷 화내고,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울며 회개하는 패턴에 스스로도 염증을 느끼고 있다. 10년, 20년, 30년째 그들의 패턴은 변하지 않고 있다. 양인지 염소인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하는 행동만 보아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골고루 버무려 놓으면 같은 상품인줄 알고 지옥행 수하물 칸에 함께 실릴 판이다.
“그래도 주님께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데 지장은 없답니다.”
성도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표 중 하나가 성화이다. 역설적으로, 성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10년을 하루같이 미우면 미워하고, 싫으면 싫어하고, 화나면 화를 내며, 소리치고 짜증내며 부정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면, 까칠하고 공격적인 말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운전 중에, 일과 중에, 쇼핑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도 수그러들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정말 아주 어쩌면 구원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자기점검이 필요할지 모른다.
구원까지 언급하긴 조심스럽다 해도, 그가 은혜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어째서 울타리 밖에 서 있게 된 걸까?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다행히 우리는 그 이유까지는 몰라도 된다. 쓴 뿌리? 무의식적 사고와 상한 감정? 알면 도움이 되겠지만 몰라도 우리에겐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면 아물기 시작한다. 연고의 성분과 그것이 상처에 작용하는 원리를 몰라도 바르면 좋아진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면 영적인 문제가 해결 된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어떻게 우리의 영에 작용하는지 그 원리를 몰라도 기도하면 감정이 다스려지기 시작한다.
사실 사람의 성품변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 죽도록 기도해야 참깨크래커에 들어있는 참깨만큼씩 변하는 것이 사람의 성품이다. 너무 작아서 티도 나지 않을 만큼 타인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 입장에선,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는 찬송 가사를 몸소 실천해가며 이룩해낸 찬란한 성화의 증거이다.
거칠기로 소문난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T는 학창시절 분노의 감정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인지 심각한 다혈질이 되어버렸다. 싸움으로 경찰서를 드나들기도 했던 그는 일단 주먹질이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낼 정도로 예민해졌고 화가 나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문을 때려 부수기까지 했던 T,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을 만난 T는 서서히 변해 갔다. 참깨크래커의 참깨만큼씩...
계속되는 분노의 시련 앞에서 그는 승리하기도 했지만 넘어지기도 했다. 승리하기는 몹시 힘들었으나 넘어지기는 참으로 쉬웠다. 승리하기 위해서 그는 기도로 몸부림을 쳐야했지만, 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넘어질 때마다 그는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죄송함. 또 하나는...
“이렇게 나를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한 상대방을 몇 배 더 두들겨 패고 싶더군요.”
화를 참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경험하고 있던 그가 화를 참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보통 사람은 화가 나면 단순히 화가 날 뿐이다. 그러나 T는 화가 나면 폭력 그 이상을 행사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견뎌야만 했다.
어디를 가나 자신의 불같은 성질을 감출 수 없어 고민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양반, 선비' 등으로 불리며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받곤 한다. 지금 그의 주변인들은 T의 과거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심지어 T는 사람들에게 화를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낼 필요는 없는 겁니다. 격한 감정을 사용하지 않고 화를 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T가 주님을 만나고 2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T는 정말 온유해진 걸까?
“아니요. 저는 온유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저는 언제든 예전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분노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단순히 소리 지르고 싶은 정도가 아닙니다. 정상인들은 화를 내도 이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여전히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닮기 위해 20여 년간 몸부림을 쳤다. 주님께 죄송해서 운적도 있지만 분노를 참는 것이 힘들어서 운적도 있었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자신을 보며 평생을 그런 감정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해서 운적도 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가 고작 이 정도라고 T는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처음보다는 발전했지만 아직 저는 노력하지 않은 보통 사람만큼도 못 됩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변화를 포기하지 않는 건가요?”
“주님 때문입니다. 변화는 힘이 들지만 주님 뜻을 모른척하며 내 맘대로 막 사는 것은 더 힘이 드니까요. 주님 닮기를 시도하며 쌓아가던 공든 탑이 무너질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막 살려고도 몇 번 해봤지요. 근데 도저히 못하겠습디다. 저는 이제 예전처럼 죄도 맘대로 못 짓겠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자신도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반푼이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발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내 주변에서 T만큼 자신을 변화시킨 사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가 전혀 없는, 아니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둘러 싸여있다. 퉁명스러운 사람은 계속 퉁명스럽고, 짜증 많은 사람은 20년째 꾸준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상대방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T에게 성화의 노하우를 들어보자.
“화가 날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여기까진 모두가 아는 바,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날 때는 기도하기가 싫어지더군요.”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증상, 이것도 모두가 경험한 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음성인가요?”
“차분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음성,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은 한 번뿐이었지만 너무도 선명해서 화가 날 때마다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게 되더군요.”
T가 들었다는 그 음성, 그것은 아마도 주님 닮길 소망하는 T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 즉 레마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화를 참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은 기도를 발견 했어요. 화가 날 때마다 좋은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좋은 동료가 되게 해주세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더니 그 즉시로 제가 정말 좋은 자녀, 좋은 동료, 좋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더군요. 내 평생 처음으로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평소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훈련했더니 극한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화가 나도 예전처럼 심각한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무턱대고 돈 달라는 기도 빼고는 꽤 잘 들어주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 닮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화날 때 진심으로 기도하면 가장 먼저는 평정심이 온다. 그리고 단순히 참아주는 차원을 넘어 매우 세련 된 처세술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상황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바보처럼 당하고도 힘이 없어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상황을 점잖게 역전시킬 수 있게 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를 존경하게까지 만드는 주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된다.
깡패가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고, 양아치라 불리던 이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반전 말이다. 기도다운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영에 제대로 사로잡힌 성도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다.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주님께서 안 들어 주실 리 없는 가장 쉬운 기도의 응답일 것이다. 그런 기도조차 응답을 받고 있지 못하다면 대체 얼마나 기도를 안 하고 있다는 방증인가.
악(惡)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단순히 갚아 주는 정도로 멈춰서는 안 된다. 악인도 놀라 손사래를 칠 정도의 지독한 악이어야 한다. 즉, 악인보다 더 악해져야 한다. 다신 안 그럴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강도 높은 보복을 가해야 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만들 수 있다면 악은 제압된다. 자! 이제 그 구역의 악인은 내가 되었다.
이따금 어설픈 분노로 상대방의 혈기에 맞서려하는 크리스천이 눈에 띤다.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이것 보세요!”
크리스천 A가 한 마디 하려하자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기세로 달려든다. 이제 A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처음보다 더 큰 악이 필요해졌다.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으면서 반격에 나서야 할 차례다. 그러나 A에겐 그 정도의 악이 없다. 상대방은 본인이 기선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기세등등하여 A를 조롱하기 시작한다. A는 처음보다 더 큰 인내심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C는 아랫집 베란다에서 피워대는 담배연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아랫집을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랫집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C는 화가 났다. 그는 문득 자신이 위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농구공으로 드리블을 할 수도 있고, 줄넘기를 할 수도 있으며, 탭 댄스를 출수도 있다. 큰 힘들이지 않아도 평소 걷던 걸음걸이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층간 소음으로 아랫집에 보복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 분이 걸린다.
“주님!”
아직 온전히 성화되지 않은 C이기에 아랫집을 항복시킬 수 있을 만한 악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이 불씨를 다시 살려 내면 아랫집도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면 C는 더 큰 악으로 그에게 응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탁구처럼 몇 번의 공이 오고가다보면 서로를 향한 악한 감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마침내 아랫집이 백기를 들면 C는 잠시 승리감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사탄의 참소와 정죄, 긴 회개 끝에 주섬주섬 아랫집에 내려가서 그는 또 사과를 하게 되겠지. 육의 승리는 곧 영의 패배가 되니 어쩌면 좋은가. 그냥 억울해도 져줘야 할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21절)
‘차라리 담배 냄새를 맡겠습니다.’
C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선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되었을까?
능력의 하나님께서 아무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 C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한다면 응답해 주실까? 그러나 고작 이런 문제 따위로 그렇게까지는 기도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소한 것부터 기도해야지요!”
주일 학교 때부터 그렇게 하라고 배운바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C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 냄새 때문에 몇 번인가 기도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랫집은 전혀 미동조차 없다.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그렇다면 고작 담배 연기 때문에 3일 금식기도라도 하란 말인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미소라도 보이며 더 잘 대해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나를 얕잡아보고 더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깨달은 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악인을 의식하며 그를 상대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을 없는 듯 무심하게 대하며 내가 마땅히 행할 그리스도인의 도를 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면 된다. 상대방이 혈기를 부리건 말건 나는 온유를 선택하며, 상대방이 아무리 강해도 나는 담대함을 선택하고, 상대방이 복잡하고 난해하게 굴어도 나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선택한다. 작은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보다 큰 문제 앞에서도 상대방의 반응에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저 사람이 담배를 안 피웠으면 좋겠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감정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므로 누군가와 다투느니 차라리 담배 연기를 맡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해야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 힘’의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악의 불씨를 꺼내 휘두르는 순간 ‘그 힘’의 통로가 차단되고 우리는 더 이상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주여, 보소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주님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또한 저를 놓지 마소서.’
곧, 주님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복의 근원으로서 내재된 자신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초월한 믿음,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 된다. 이제 담배 냄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 문제로 나의 영성을 오염시키기엔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복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살면 주님께서 내게도 복을 주시겠구나. 나도 복을 받겠구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선명해지며 자존감이 회복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실 거라는 믿음도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반대로,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악으로 맞짱을 뜨고 다니는 사람이 주님께 읍소할 수 있을까?
펄펄 끓는 악을 상대방에게 쏟아 붓고 곧바로 교회에 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정과 사업장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적인 소시오패스 즉, 화인 맞은 심령일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해서 선으로 악을 이겨본 성도만이 긍정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주의 뜻을 따르니 주님도 나를 기뻐 받으시리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의 삶도 형통하리라.’
확신에 차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렇듯 말씀으로 승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말씀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본 이는 타인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능력의 통로가 된다. 그는 상대방의 형편없는 현재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상대방의 가능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다.
'나를 변화시킨 주님께서 그 또한 변화시키리라.'
강한 믿음은 상대방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 현실이 어떠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이 견고하면 상대방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나의 믿음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 네가 너를 바꿀 믿음이 없다면 나의 믿음으로 너를 살게 할거야. 엄마는 너를 위해서 끝까지 기도할거야.”
상대방이 사용하는 언어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항상 평강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변화가 더디더라도, 아니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야고보서 3장 11절)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힘’의 통로이기에 다른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 고린도후서 12장 10절)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영적성장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자극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켜준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의 최대 고민 중 하나인,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일단 상황이 닥치면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죄와 정죄의 사슬을 능히 끊어 낼 수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아둔함이 발견되곤 한다. 그들의 거짓말은 티가 난다. 그들은 티 나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아둔하다.
“나 집도 몇 채있고, 땅도 여기저기 있어. 난 취미삼아 일하러 나온 거야. 돈을 꼭 벌어야 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야.”
아무도 물어 본적 없는 말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하며, 자신을 포장하고 다니는 H 여사님은 월말이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실제 상황을 고백하곤 한다.
“돈 들어가는 데가 있어서 000원 이상은 꼭 벌어야 되는데...”
거짓말 중에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치장용 거짓말’이 있다. 잘난체는 하고 싶지만 잘난 것이 없을 때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되는 듯싶다. 치장용 거짓말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 좋은 것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치장용 거짓말을 하는 사람조차 멀리하려 한다.
C는 깊이 신뢰하던 사람에게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설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퍼즐이 들어맞듯 거짓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1. 거짓말이 탄로 났음을 상대방에게 알린다.
2. 모르는 척 해준다.
C는 2번을 선택했다. 그러자 또 다른 두 가지 선택지가 펼쳐진다.
1. 인간관계를 종전과 같이 유지한다.
2. 슬슬 거리를 두며 멀리한다.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보며 대중은 일종의 혐오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멀리하려 한다. 거짓말쟁이들은 사람들이 왜 자기를 멀리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을 알 정도면 그렇게 뻔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려는 사람을 나무랄 순 없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피하고 싶은 것은 일종의 방어본능일 수도 있으니...
세상에 어느 누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겠는가. C 또한 본능적으로 2번 선택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언제, 무슨 거짓말을, 어디까지 할지 모르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어떤 일을 진행하겠는가. 그러나 주님의 입장은 조금 다르신 듯 했다.
‘너에게 그런 거짓말을 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 앞에서 C는 그의 허물보다, 어떻게든 C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어 했던 상대방의 마음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상대방을 예전처럼 대할 자신은 없었다.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행동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닙니까?”
‘너의 행동은 언제나 네가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와 일치하는가.’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레마, 비로소 C는 상대방을 예전처럼 대할 용기가 생겼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이따금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은 모습으로 행동한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탄의 자녀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이지만 사탄의 자녀가 있다.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긴 하지만, 한 가지 행동만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너무도 뻔한 거짓말을 해 올 때 또는 다양한 잘난체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7절)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면 너그러움이라는 감정을 연습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믿음의 법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 볼 때 허물을 들춰내고 지적을 하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다. 격려해주고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며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사람에게 적합한 행동양식이다.
“하지만,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은 죄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따금 부모에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곤 한다.
“나는 우주 비행사야.”
그러나 어느 부모도 자녀들을 거짓말쟁이라 꾸짖지 않는다.
“그건 아이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자녀가 어른이 되어도 부모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취직 못한 자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취직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을 까발리는 부모는 없다. 그것을 덮어주는 이유는 아마도 자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리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8절)
평소 그다지 바르게 살지도 않으면서 시시때때로 입 바른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사랑은 없다.
“내가 언제 틀린 말 하는 것 봤어!”
틀린 말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 5절)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거짓말은 상대방의 결핍에 대한 아픔으로, 그가 꿈꾸는 비전으로, 또 중보기도 제목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듯 거짓말을 재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 = 기도제목 → 중보기도 훈련의 기회 → 기도하는 사람을 너그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듦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때’에는 시간뿐 아니라 자격 또한 포함된다. 만약, 자격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10절)
마찬가지로 자격을 충족시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고, 자격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다. 우리 중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은혜 :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비록 자격은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복일까?
우리는 이따금 성령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모략인지 모를 도전을 받곤 한다.
“당신이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여 봐. 그 따위로 행동하면서 무슨 전도를 한다고 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 거룩한 영향력이긴 하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복음 그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로마서 1장 17절)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의로 타인을 변화 시킬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도대체 얼마나 의로워야 다른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을까. 나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을 교회에까지는 따라 나오게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교회에 나온다고 다 천국에 가는가?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믿음은 사람의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말미암는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 성품과 행동이 도무지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아도 내가 주님을 만났다면 지금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 성격 고친 다음에, 그 행실 고친 다음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복음을 한 번도 전하지 못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품은 사실은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주님과 함께할 때 이루어지게 되는데, 주님께서 가장 강력히 역사하시는 순간이 복음전파의 현장이다.
바울의 편지를 읽다보면 시간에 따른 바울의 성품변화를 엿볼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수없이 많은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많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의 종인 그였지만 초창기 그의 모습은 어쩐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동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분명 예수님의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복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경과해갈수록 그의 편지에서 변화되어가는 그를 느낄 수 있다. 나도 이만하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는 뉘앙스로 말하던 그의 자부심, 아니 어쩌면 약간의 교만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겸손과 부드러운 내면의 소유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발견케 된다. 마침내 그가 고백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에게 겸손을 가르쳤는가. 누가 그를 그토록 변화되게 만들었는가. 복음이다. 복음을 전하면 조금 빨리, 조금 더 많이 변할 수 있다. 사실 바울 서신서의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복음 전파의 현장 속에서 서서히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그를 느낄 수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복에 걸맞은 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걸맞은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받게 된다. 반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여간해서는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충만히 받을 수 없다. 제한적인 일용할 은혜를 누릴 순 있어도 물 붓듯이 부으시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남들에게 상처 주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라. 십중팔구 전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간신히 구원은 받았겠지만 (어쩌면 구원도 못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아무리 봐도 주님을 닮아 있지 않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번도 전도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영혼 귀한 줄 모른다. 목사님 입장에선 난처할 따름이다. 그것도 성도이니 쫓아낼 순 없고, 그냥 놔두자니 자꾸만 염소처럼 뿔로 다른 양들을 들이받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과연 행동의 본으로 상대방을 감화 감동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큼 변화되어야 한다면, 십중팔구는 내가 변화되기 전에 상대방은 늙어 죽어 지옥 불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다행히 성경은 그럴 필요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만든다고 말씀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은 믿음이다. 복음을 전하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장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한 의로 인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전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사탄의 음성, 정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 또한 사탄의 방해전파, 정죄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나의 행위,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받는다.
은혜란, 굶주린 거리의 아이가 내민 손에 쥐어 주는 따뜻한 떡 한 덩어리와도 같다. 누구도 가엾은 아이를 도울 때 ‘넌 누구니? 넌 어떤 착한 행실을 했니?’ 캐묻지 않는다. 그냥... 준다. 우리 또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후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또한 사탄이 주는 정죄이다. 왜냐하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 2절)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도 된다고 성경에 기록된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때’에는 시간뿐 아니라 자격 또한 포함된다. 그러므로 전해야 한다. 변한 후 전한다? 아니다. 전하면 변한다. 변하기 시작한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가장 먼저 복음 전달자를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성령의 불을 봉송하는 성화 봉송주자, 즉 전도자는 성령의 불을 품고 있기에 마땅히 성령의 불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불길에 휩싸이면 가장 먼저는 죄악 된 면모들이 밝히 들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부르짖게 된다. 아니 절규하게 된다.
‘
아아아, 주님! 저의 죄악 된 모습을 성령의 불로 태우소서.’
마침내 그 불순물들에 성령의 불길이 옮겨 붙으면... 이내 하나씩 타들어 가게 된다. 사실상 사람의 성품 변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보통은 평생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성품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있어서만큼은 이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특혜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으면 변해야하고, 변하고 싶다면 전해야 한다. 바빠도 전하고 한가해도 전한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도 전하고 마음이 심난 할 때도 전할 수 있으면 전해야 한다. 복음 증거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일까?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축복의 통로. 물을 전하는 수로는 언제나 흠뻑 젖어있기 마련이듯,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통로인 당신은 언제나 예수그리스도로 흠뻑 젖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능력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불꽃같은 기도의 응답, 능력의 삶을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니 짠 맛을 내야 한다는 말씀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문제는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녹여야 한다는 것, 소금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사라진다. 죽는 것이다.
서서히 자신이 녹아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소금의 심정은 어떨까?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존재는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기제'가 있다. 이 시스템은 신체의 위협을 받았을 때도 발동되지만 정신적인 무시를 당했을 때도 발동한다. 사람들은 육체적 공격을 당했을 때 뿐 아니라 정신적 공격을 당했을 때에도 존재감에 대한 위협을 느끼며 반격을 하려든다. 이것은 본능이다.
사람은 위협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본능이 있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은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주먹부터 나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하나의 본능이 추가 된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본능이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서로를 오해하게 만든다.
이렇게 두 가지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 어떻게 될까. 전쟁터, 즉 살아있는 지옥이 된다.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 또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내 행동을 해석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판단 도구의 정확도는 신뢰할만하지 않다. 상대방이 큰소리, 부릅뜬 눈, 공격적인 감정을 보이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멍청한 시스템은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못한다. 달콤하게 말하면 적군도 무사통과시키는 반면, 큰소리를 내면 자신의 부모조차도 적으로 간주해서 발포명령을 내리곤 한다. 따라서 말 또는 눈빛 등으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상대방 또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적절한 대응을 준비할지 모른다. 이것은 본능이다.
“위협이요? 난 그냥 그 녀석이 지각해서 짜증 좀 냈을 뿐이라고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먼저 잘못했는가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짜증이나 고성, 눈을 흘기는 행동은 상대방을 존중할 때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감정이다. 감정은 감정을 자극한다.
실제로 이혼 또는 중대한 사건, 사고 중에 상당수가 극히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해 감정의 충돌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모든 본능이 그러하듯 이 본능 또한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세상의 어떤 동기도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생존본능과도 같은 이 방어기제를 내려놓게 만들 수 없다.
이 때,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수님. 주님을 만난 우리는 결국 깨닫게 된다.
“나 지금 잘못살고 있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구나.”
그 눈빛에 이끌려 서서히 ‘내려놓음’을 시도하려 하지만 칼과 방패를 내려놓는 순간마다 여기서 푹, 저기서 푹, 불쑥불쑥 나타나 나의 자아를 찔러댄다. 그들은 내가 무장해제 된 상태인 것을 알고 평소보다 더욱 거세게 나를 공격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탄이 가르쳐 준 것이다. 지금 무장해제 상태니까 가서 맘껏 공격하라고...
참다못한 소금이 다시 창검을 손에 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참다 참다 폭발했으니 이번엔 칼도 두 자루, 쌍칼이다. .
“야! 이 비겁한 족속들아. 참아주니까 더하냐? 나도 칼 있다. 큰 맘 먹고 예수님 좀 닮아보려 했더니 열받아서 못해먹겠네.”
자신의 자아가 여전히 건재함을 세상에 뽐낸 소금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물끄러미. 아아아! 주님!
예수님을 닮는 것이 왜 힘들까? 사실 온유하게 사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도전일지 모른다. 문제는 내 주변이 전혀 온유하지 않다는 것. 세상은 온유해 질 마음이 없다. 세상 누구도 나의 도전을 도와주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비협조적이다.
우리는 불공평한 이중 잣대를 요구 받고 있다. 나는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상대방은 화를 내도되는 불공평한 상황을 받아 들여야 한다. 왼쪽 뺨을 때린 인간은 최소한 똑같이는 때려줘야 다음에 또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을 텐데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소리치면 세상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훈련의 성과가 정말 쌀알에 붙은 티끌만큼도 안돼 보인다는 것이다. 성과물이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 승산 없어 보이는, 불공평하기까지 한 싸움을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든다. 우리는 온통 흉기와 둔기로 무장한 세상 앞에서 화평이란 이름의 방패만 들고 버텨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시선을 피해보려 시도도 해본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느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다윗조차 견디지 못하고 애원하지 않았던가.
“제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거두신 적 없다. 정신을 차려보면 주님은 늘 같은 자리에 서계셨다. 슬금슬금 주님의 시선을 피해 나의 발이 꽤나 멀리와 버렸을 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오랜 만에 회개로 성령 충만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소금, 그런 소금에게 1번으로 칼을 꽂은 것은 그의 남편, 2번 아들, 3번 딸이다. 가까이 있으니 가장 먼저 찌른다. 자주 보니 자주 찌른다. 기쁜 찬양 곡조는 어느새 고난의 찬송곡이 되어 흐른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드디어 소금이 녹기 시작한다. 죽어 녹아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주님은 더 이상 물끄러미 바라만 보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다가가 그를 감싸 안으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주님 영접한 뒤에도 계속 신경질 내면서 화낼 거 다 내도 천국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위로, 그 속에는 세상을 초월할만한 심리적 안정감은 물론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 또한 형통해지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비전의 완성일 수도 있고 질병의 치유일수도 있다. 어쩌면 어느 절박한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달성할 순 없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을 닮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런 상급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받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대신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 승리에 참여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상급도 받게 된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듯 우리는 믿음으로 다른 모든 상급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은혜라 한다.
은혜 :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혜택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한 나의 성품, 그러나 상 주실 것을 믿고 있으면 주님께서 점점 상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진짜인지 여부는 당사자의 실천의지로 증명이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7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의 풀무불길을 견뎌낸 그는, 그 믿음에 대한 상급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반면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작은 고난도 감수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인생 또한 그들의 믿음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