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라 디테일한 스토리는 생략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제 부끄러움은 감춰지고 믿음의 사람처럼, 인내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겁니다.
전 심하게 다쳤습니다. 3월에 다쳐서 6월에 수술하기 전까지 끔찍한 통증으로 몸과 마음은 무덤안에 갇혔습니다. 뼈가 부서진 것도 모르고 심한 타박상인 줄 알았습니다. 움직일때마다 신음이 터졌지만 몸보다 맘이 더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며칠 쉬면 불편해도 일상을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끔찍하게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의 분노와 슬픔 초라함 부정적인 감정은 날마다 증폭되어 먹지도 마실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 일어나지 못한 채 굶게 되자 의식이 흐려져갔습니다. 근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아이에게 결국 연락을 했고 놀란 아이가 달려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왜 이렇게 됐냐, 어떻게 다친 거냐, 언제 다쳤냐, 병원엔 갔냐, 왜 말 안했냐.. ’
여러 날 침대에서 꼼작 못한 저의 몰골은 다른 사람이 됐고 화장실을 가지 못해 제가 누운 자리는 축축했고 냄새도 고약했으니 아이가 놀란 건 당연했습니다. 아이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곤 울면서 119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 눈엔 제가 곧 죽을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정신을 놓쳤습니다.
처음 간 병원에선 제 의식을 돌아오게 하는 치료에 집중했고 의식이 돌아온 제게 의사는 보존 치료를 권하며 8주를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전혀 낫지 않고 점점 더 통증이 심해져 갔습니다. 아이가 척추 전문 병원을 가보자고 뭔가 잘못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간 병원 검사 결과 흉추 4번 5번 뼈가 심하게 부서졌고 11번 12번은 압박골절이 된 상태였습니다. 부서진 곳에 골시멘트를 채워 넣어야 뼈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가족은 저와 아이 둘 뿐이고 아이는 일을 하고 있어 제 옆에 오래 있어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험은 이미 오래전에 해약한 상태라 병원비가 큰 부담이었습니다. 요양원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 말에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아이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봄부터 가을까지 허겁지겁 달려와 밥을 챙기고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에 데려가고 다시 일하러 갔습니다. 평일엔 학교 조교로 일하고 밤엔 녹음하고 편집하고 금요일엔 인천 철야 예배 음향담당으로 주말엔 교회간사로 시간이 부족해 잠 잘 시간을 줄여야 했을 겁니다. 그런 아이 앞에서 아프다는 내색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아파하는 모습에 아이는 너무 괴로워했고 그 슬픔을 보는 일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라 애써 괜찮은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느낀 건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구나 그 모습을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고 어서 힘을 내자고 다짐도 하게 되곤 했습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저는 보조기에 묶여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2차 통증들이 산발적으로 절 죽여갔습니다. 보조기가 실리콘이라 여름 내내 상체를 묶고 누워있다보니 욕창이 생겼고 음식을 소화 할 수 없어 체중은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의사가 권하는 통증약물 주사도 요양원도 간병인도 제겐 사치였습니다. 병원비가 생각보다 금액이 컸고 제가 일을 못하면서 조금씩 균열이 간 일상은 8개월이 지나자 해결해야 할 청구서가 쌓여갔습니다.
전 난생처음 수술실에 들어갔고 뼈 때리는 고통을 직접 겪었습니다. 다른 부위는 마취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골시멘트를 뼈에 넣을 때는 끔찍한 통증에 비명만 내뱉었습니다. 의사 여러분이 모니터를 보고 제 뼈 상태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주고 받는 소리, 아프면 소리 지르라고 하는 소리, 하체에 어떤 증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하라는 소리... 모든 수술에는 부작용이 있고 이 시술은 하체가 마비되는 확률이 있으므로 전신 마취를 할 수 없다고 환자의 반응을 보며 시멘트를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뼈 때리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전 누가 그 말을 처음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 말을 한 사람은 뼈 때리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균 수술실의 인위적인 서늘함, 초록색 가운을 걸친 의사들, 감정은 배제된 백색의 불빛들. 전 베드에 엎드린 채 40분 동안 뼈를 때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저 마취 좀 해주세요’ 했습니다. ‘설명 드렸잖아요 이건 환자의 상태를 보며 하는 거라 전신 마취 못한다고요.’
부분마취를 했는데 왜 이렇게 아파요 겨우 겨우 말을 뱉은 내게 ‘뼈는 마취가 안돼요’ 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은 소중한 걸 잃고 나야 알게 될까요. 날 어디든 데려다주던 튼튼한 허리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양말을 신는 일이 이렇게 땀을 흘리며 신어야 하는 노동인지 몰랐습니다. 화장실을 혼자 가고 샤워하고 먹고 눕고 하는 수많은 일상의 움직임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그리웠습니다. 아이가 최선을 다해 절 도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간병인을 쓰자고 아이가 말했지만 더 이상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 할 수도 없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버겁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여름이 갔고 가을이 됐습니다. 체력은 점 점 더 떨어지고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편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1년이상 말했습니다. 전 그 말에 더 절망이 됐고 한순간 마음이 주저앉았습니다. 힘을 내려고 해도 힘은 사라지고 기도는 멈춰졌습니다. 하루에 약을 먹고 잠이 들면 겨우 두세 시간. 깨는 순간 통증에 시달리는 고통. 시멘트가 느껴지는 딱딱한 통증과 옆구리와 등의 통증. 어떤 통증이든 지속되면 사람이 정신이 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24시간 누가 붙어 있다 해도 통증을 견디는 일은 환자의 몫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전 어느새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먹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혼자 화장실을 못 가고 간다 해도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었습니다.
이 통증을 의사말대로 그렇게 오래 견뎌야 하는 거라면 자신이 없었습니다. 진통제 약물과 재활을 병행하며 일상을 다르게 견뎌야 하는 일. 그 고통의 시간이 확실치도 않고 일년 넘게 가봐야 하고 완치를 말 할 수 없다는 의사 말에 ‘죽어야겠다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죽어야겠다고 다짐을 하자 놀랍게도 통증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평안을 느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편하게 쉬겠구나 그 안도감 그 평안함...그땐 몰랐지만 자살의 영이 평안을 가장하고 사람들 마음을 공략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죽음을 택하는지 그 마음이 그냥 알아졌습니다.
‘나약함 믿음 없음, 너보다 더 힘든 사람 많아. 넌 치료하면 낫기라도 하지. 너 기도하잖아. 어쩌겠니. 시간이 약이라잖아. 기도할게.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아픈 사람만 불쌍한거지.’
그런 말을 듣기에도 지쳤고 제가 듣고 싶은 위로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전 앞으로 사는 동안 아픈 사람에게 제가 들었던 말들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 할 수 없는 말이 되었습니다. 특히 기도하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을 겁니다. 공허한 약속, 믿음 없음을 충고하는 말, 절실하지 않아서 기도 안 한다는 말,
전 혼자 죽음을 결심하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한 건 오래된 일기장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이란 감정이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운 게 없고 두렵지도 않고 가짜 평안일망정 그 평안이 소중했습니다.
단 하나, 걸리는 건 아이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아이가 받을 상처가 생각나 가슴을 잡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살 생각을 하면 두렵고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죽을 방법을 진지하게 깊게 생각했습니다. 울컥대는 뭔가가 뜨겁게 올라오곤 했지만 죽음은 강력하게 절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기도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버지...이 말이 나오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저 죽어요. 더는 못 버티겠어요. 마음도 몸도 정말 견딜 힘이 없어요. 죄송해요.'
아이가 떠올랐고 심장이 아팠지만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는 말이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빠, 저 내일 하루만 기다려볼게요. 내일 하루 어떤 것이든 아빠가 저에게 싸인을 주세요. 그 말을 한 후 싱크대를 붙잡고 오래도록 울었습니다.
다음 날이 됐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기대도 없었고 그래서 실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새벽 무기력 속에서 눈을 떴고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블로그에 숫자 표시가 있었습니다. 브리스가님이 전날 보낸 기자교육 문자였습니다.
하루만 더 기다려보겠다고 한 그 다음 날 오후 6시 11분에 문자가 와있었고 저는 확인을 못했던 겁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우연히 제가 생각나 3년 만에 문자를 주신걸까요.
사람들이 웃어도 괜찮습니다. 살고 싶어 별 핑계를 다 갖다 붙인다고 비난해도 괜찮습니다. 그 하루가 다 가기 전 제게 도착한 문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어떤 방향성을 느꼈습니다. 문자가 도착한 시각이 6시 11분. 이 숫자를 보는 순간 아빠가 저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구나.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생일이 6월 11일이라 저에겐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자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 마지막 날 교육생과 교육해주신 유진님과 편집장님께 몸이 불편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날 전 혼자 벅차서 울었습니다. 아픈 통증을 견디며 앉아있는 일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이 괴롭고 하루에 수십 번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인내에 기쁨이 있음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통증 때문에 괴롭고 힘든데 마음은 봉합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지인들에게 이 기쁨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특별한 일은 제게만 특별했고 제 아이만 공감을 해줬습니다. 제가 객원기자로 활동하게 됐다고 하자 ‘기자가 아닌 객원기자였어? 보수는 있어?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신기하게 서럽지도 않고 오히려 기쁨이 커져갔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하찮은 일이겠지요.
제가 봄에 누워있을 때 #가평별곡 이라는 채널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을 보며 위로를 받고 두 부부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저런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아주 많이 알리고 싶다 생각했고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저분들을 내가 어떻게 만나겠냐고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기자 교육 제안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루만 더 살아보겠다고 한 그날에 온 문자였으니 말입니다.
전 신이 났습니다. 몸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못 걸어도 통증이 미치게 괴롭혀도 아빠가 절 돌보시고 계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돌보실거란 걸 알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빠의 문제가 아닌 제 문제였습니다. 부끄럽지만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예전과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그냥 깨달아졌습니다.
아이에게 월차를 내고 가평에 동행해달라고 열흘 전부터 부탁을 했습니다. 첫 인터뷰니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사진선교회 일도 합니다. 그래서 사진도 부탁을 했습니다. 인터뷰 녹음을 3일 풀고 3일은 정리를 했습니다. 기사 완성이 일주일 걸렸고 오른쪽 눈은 실핏줄이 터져 온통 붉게 물들었습니다. 입안이 헐어 혀로 입 천정을 훑으면 몹시 아팠습니다.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자 마음가짐이 정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청해 둔 제 첫 인터뷰 기사가 승인이 됐습니다.
12월 7일 오후 6시 11분.
승인된 시각에 제 눈길이 멈췄고 숫자를 보는 순간 전 진공상태가 됐습니다.
브리스가님의 문자 611
첫 기사 승인 611
제생일 611
우연일까요..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배가 말했습니다. 숫자 611에 담긴 메시지는 ‘못으로 거룩하게 하나님의 손과 하나 되다’라고 합니다.
오래전 어느 날 아침, ‘아빠, 저 사랑하시면 하늘에 하트 하나만 보여주세요’ 기도를 하면서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멀리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앙증맞은 하트 하나를 발견했을 땐 언어가 순간 사라졌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고 생각이 멈췄습니다. 비현실적인 그 광경에 기쁨보다는 어떤 떨림이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처럼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브리스가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그냥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저는 믿음이 없었던 걸까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 심장이 말을 하니까요.
느닷없이 드라마 공동 집필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마음에 품고 기도했던 일들이 툭 툭 별 일 아니라는 듯 제게로 옵니다.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앉아있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기적을 품고 발을 떼려 합니다.
브리스가님
감사드립니다.
[브리스가의 답장 일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따라 칼럼 후반 부에 자매님 계좌를 적으려 합니다. 얼마가 언제까지 입금이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름병을 준비하는 것이 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실지 짐작이 됩니다. 저도 이런 것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나 은혜를 받았을 때 보답하는 것과 성도들의 감사 표현을 받는 것 또한 교회의 질서임을 배웠고 저도 그 훈련을 받는 중입니다. 받는 것도 훈련입니다. 받을 줄 알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얼굴도 본 적 없는 개인 성도님의 계좌를 적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정말 특별한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 성도님들의 참여로 은혜 가운데 모금이 마감되었습니다. 본인의 요청으로 계좌 번호를 닫습니다 2021.4.15 -
"진짜로 하나님이계신다면 정말 다른 인생 살고 연관 없는 브리스가님 고모 통해서 말씀 주려 하시고 저한테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니 뭔가를 전달하고 보여주시고 싶어하는 건 느껴요 그래서 저도 솔직히 너무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두렵지만 제 생각 일반적인 상식 다 내려놓고 미친척 하나님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저한테 고모 브리스가님 통해서 이렇게까지 살리시려는 의도와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살려 주시길 바래요...."
2020년 3월경, 필자의 두 번째 저서 '구원의 밸런스' 사전 윤문 과정에 참여할 지원자를 모집했었다.
김유진 기자가 지원했고, 완성된 원고를 본 그녀의 동생이 뜻 밖의 제안을 했다.
"언니, 이거 원고가 너무 탐나는데 우리 대표님께 보여드려도 될까?"
놀랍게도 그녀의 동생이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부터 원고를 받아 본 대표님께서 출판에 대한 투자를 제안했다. 이번엔 마케팅까지 함께 해 줄 수 있는 출판사를 기도했는데 정확히 그러했다. 첫 번째 책에 이어, 두 번째 책 역시 모든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주님께서 방언을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단 한 번, 출판사에서 본게 전부인 이에게 나는 기도중에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운동 중에 주시는 마음이 있어 나는 편집자와 그녀의 언니에게 삼자 통화를 제안했다.
"전화를 끊고 즉시 기도해 보세요. 오늘 밤에도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 시작하자마자 5분 안에 주실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레 전화로 전했던 이 제안을 그녀는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김시온 편집자님이 작성한 간증문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레에르르르르 흘르흘르 레이아레이아레이아…”
방언을 위한 작정 기도를 시작한 지 일 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혀가 나도 모르게 꼬이기 시작했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혀가 떨리는 동시에 양쪽 무릎에 올려 두었던 두 손도 파르르 떨렸다. 손의 떨림 때문이었을까. 앉아 있는데도 다리까지 후들후들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는. 첫사랑의 떨림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주님의 첫사랑을 경험하기까지는 노력의 과정이 필요했고, 나름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먼저 ‘방언’을 위한 집중 기도를 제안하신 분은 브리스가 저자님이셨다. 그전부터 방언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집중 기도를 제안하신 것이다. 그러고는 저자님과 언니와 함께 기도를 했다. ‘시온이에게 방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언니의 선포 기도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저자님의 미세한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아! 오늘이구나…!’
저자님께서는 폭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컨디션이 되지 않으면 다음에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다음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쥐어 짜내서라도 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탄의 첫 번째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거야.’
잠시 숨이 탁 막혔지만, 확신에 찬 가슴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저자님께서는 ‘오늘 터질 수 있다, 5분 안에도 터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아멘’으로 받았다. 저자님과의 전화를 끊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방문을 잠그고 모든 불을 껐다. 컴컴한 방, 더듬거리며 찾은 기도 방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본인 목소리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꽂았다. 그러곤 1시간 27분짜리 찬양 반주를 틀었다.
‘이 찬양이 끝나기 전까진 자리를 뜨지 않겠어. 주님, 함께해 주세요!’
기도할 때 늘 틀어놓던 가사 없는 찬양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느낌 안에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소에 낼 수 있는 소리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힘을 실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레에르르르르…”
혀가 아주 빠르게 떨렸다. 할렐루야를 외치려고 해도 다른 말이 나왔다. 처음 발음해 보는 소리였다. 그러자 사탄이 이번엔 소리쳤다.
‘이건 방언이 아니야! 네가 하는 건 틀렸어!’
하지만 이것이 저자님이 말해 주신 ‘가능성’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의심하지 않고 기도에 집중했다.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 대로,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성령님께 맡겼다. 나의 주장이 아닌 성령님의 주장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않았다. 몸의 떨림도 점차 줄어들고 안정이 되어 갔다.
두 손을 높이 뻗었고 고개가 높이 들리기도 했다. 목소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할렐루야로 시작된 방언이 나도 모르는 말로 끝이 났다. 시간을 보니 1시간 24분이었다. 마지막 3분을 채우기 위해 침묵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제 주님께 더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기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은 ‘나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고 하는 주님의 사랑이었다.
기쁨이 넘쳤고, 어떠한 근심도 없었다. 방언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출판과정 중에도 그녀는 ‘책에서 강한 영향력이 느껴진다'고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제작에 참여한 사람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한 책,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구원의 밸런스’를 통해 많은 영혼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우리는 다툼도 많았지만 따로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유쾌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 ) 이별의...
이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슬픈? 영원한? 기약 없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원식이와 나는 둘만의 회식을 했다. 원식이가 내미는 술잔을 사이다 담은 잔으로 부딪히며 응수하다 보면 어느덧 원식이는 말도 느려지고 발음도 어눌해진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어떻게 대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따금 고함까지 질러대는 원식이 앞에서 맨정신인 나는 그 민망함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일찍 집에 가려는 나를 원식이는 언제나 간곡하게 끌어안았다.
“준아! 준아! 따악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응? 진짜 마지막.”
“피곤해. 가서 잘 거야.”
“이 새끼는 제일 건강한 놈이 맨날 피곤하데...”
원식이의 부탁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절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행동을 후회한다.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때로는 나 역시 그런 감정을 경험하며 원식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젠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혼자라는 외로움, 각종 우울한 감정이 업무에 대한 집중이 해제되는 순간 그를 엄습해 왔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간곡히 붙잡던 원식이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곤 했다.
사실 나는 원식이의 모든 면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술, 담배, 매출이 안정되자 약속을 어기고 교회에 출석을 안 하는 모습...
“또 노래방 가서 도우미 불렀어?”
“당근이지. 우리끼리 무슨 재미냐.”
“이제는 노래도 혼자 못 불러서 다른 사람 도움을 받냐?”
나는 원식이에게 그리스도인들조차 버거워할 신앙적 완벽을 기대했고 원식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나를 불편해했다. 나는 원식이에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사업 파트너일 뿐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교정을 강요하는 불편한 잔소리꾼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렸을 땐 그토록 함께 붙어 다녔던 우리,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매출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둘만의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원식이가 뜻밖의 고백을 털어놓았다. 원식이는 술을 마시면 진실을 말한다.
“준아, 미안해. 나 용서해 주라.”
“뭔데?”
“용서해 준다고 말하면 이야기할게.”
“그래. 용서할게”
원식이는 나 모르게 다른 곳에 동일한 사업체를 하나 더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 상품과 동일한 제품의 사진을 배경만 바꿔서 따로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식이는 술기운이 더해진 탓인지 꺼이꺼이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준아, 진짜 미안해. 아무도 나 신경 안 써줄 때, 너만 날 도와줬는데, 미안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 이번에 다 정리할게. 그리고 다시는 안 그럴게.”
‘주님,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하게 해주세요.’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찰나의 시간, 주님을 의지하며 본능처럼 내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식아, 너랑 나랑 사업하려고 만난 거 아니잖아. 우린 친구로 만난 거니까 일 때문에 친구를 잃지는 말자. 너도 생각 많이 하고 결정한 걸 테니 이번에 정리하고 와도 계속 같은 생각이 들 거야. 그러면 결국 다투고 헤어지겠지.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몇 차례 원식이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원식이를 설득해 사업을 정리하는 최종 결산을 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웃으며 헤어졌고 몇 번인가 전화로 안부도 주고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식이의 휴대폰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 원식이 전화번호가 바뀌었네요.”
“아유! 그러게 원식이가 연락이 안 된다.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정도로 아팠었는데, 그러다가 아버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럴까.”
무슨 일인지 원식이는 수시로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했다. 원식이의 새어머니는 오히려 나에게 원식이에게 연락이 오면 집으로 전화를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잠깐 잊으면 훌쩍 흘러가는 시간, 원식이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준아, 혹시 원식이 전화번호 알고 있니?”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더 원식이와 연락이 되느냐는 전화가 걸려왔었다. 당연히 언젠가 연락이 닿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몇 년 후 그의 집 전화번호마저 없어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아직도 이렇게 허무하게 소식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고교시절,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안양에서 청량리로 이사를 한 나는 혼자 옥탑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준아!”
수백 번도 넘게 들어서 익숙한 음성, 그러나 원식이일리 없었다.
“준아!”
문을 열자 원식이가 붕어빵을 들고 서 있었다. 추운 겨울 그다지 따뜻하지 않던 교복 코트,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식은 붕어빵을 들고 있던 원식이의 모습이 생생하다. 군포에서 청량리에 있는 우리 집까지 고등학생 원식이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 가며 혼자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왔어?”
“이 형님이 너 심심할까봐 위로해주려고 왔지.”
그렇게 원식이는 내가 새로운 집에 적응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붕어빵을 들고 찾아와 주었다. 삶의 각박한 기억에 덮여서 잊고 지냈지만 생각하면 소중했던 내 어린 기억의 일부.
나는 전도자의 나쁜 예, 전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은 삼가야 하는지 가장 소중한 친구를 희생시키며 배웠다. 원식이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죄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꼈고, 원식이는 예전처럼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를 바꾸려 했다.
지금의 내가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바람직하지 못한 시도들, 내가 다른 성도들에게 삼갈 것을 당부하는 모든 행동을 나는 원식이에게 했다.
제대 후 마땅히 일할 곳이 없던 나는, 친구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원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식이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다.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잠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애편지를 부탁하며 웃던 스스럼 없던 친구. 베스트 프랜이 누구냐는 남들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 없이 서로를 지목하던 그런 친구였다.
원식이는, 아버지와 이혼 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본인 역시 몇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승승장구 중이었다. 당시 친구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해외무역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당연히 원식이에게 전화하면 일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원식아, 나도 같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
“네가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까짓 게 무얼 하겠냐는 빈정거림이었다.
“아... 그래? 알겠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고 원식이는 굳이 나를 잡지 않았다.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던 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하게 된다는 그 말을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혹시라도 내 자신이 힘들다고 다시 원식이에게 전화하지 못하도록 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지웠다.
“아빠, 원식이네는 예수님도 안 믿는데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아요?”
비가 오면 물이 새 들어오던 녹슨 트럭 안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준아,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아버지의 말은 어린 청년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다섯 식구 다 합쳐도 100만원이 되지 않던 우리 집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하기 시작할 무렵, 원식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몰라보게 마르고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그간의 시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면 열심히 교회 다닐게요. 요즘 이렇게 기도했었는데,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네 전화번호가 생각났어.”
전화기를 분실해서 나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던 원식이는 내 전화번호가 생각난 것을 나름의 응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원식이는 엄마의 사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했다. 신용까지 엉망이 되어 그의 명의로는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보름 정도의 수감생활까지 했다고 했다.
원식이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어 술에 취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종점에 도착하면 다른 버스에 올라타 또 다른 종점으로...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으로 아무 데서나 내리고, 아무 데서 잠이 들다 정신이 들면 2~3일이 지나 있었다고 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덜컥 겁이 났던 원식이는 온전한 정신이 들 때마다 나와 함께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원식이가 나에게 찾아왔던 그 무렵, 나는 신사동과 방배동에 집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처럼 좋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골집에 더부살이 하던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식이와 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원식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진행된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새어머니와 살고 있던 원식이의 아버지는 원식에게 사업하지 말고 직장을 다니라고 하셨다. 친어머니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큰 다툼이 있어 당분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집에도 어머니의 집에도 머물 수 없던 원식이는 혼자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힘들면 가족이 함께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가족들을 두고 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러 온 그 이유를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갑자기 비가 새던 그 녹슨 트럭 안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도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려 할 때마다, 그때 그 장면이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제대 후 마땅히 일할 곳이 없던 나는, 친구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원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식이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다.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잠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애편지를 부탁하며 웃던 스스럼 없던 친구. 베스트 프랜이 누구냐는 남들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 없이 서로를 지목하던 그런 친구였다.
원식이는, 아버지와 이혼 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본인 역시 몇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승승장구 중이었다. 당시 친구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해외무역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당연히 원식이에게 전화하면 일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원식아, 나도 같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
“네가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까짓 게 무얼 하겠냐는 빈정거림이었다.
“아... 그래? 알겠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고 원식이는 굳이 나를 잡지 않았다.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던 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하게 된다는 그 말을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혹시라도 내 자신이 힘들다고 다시 원식이에게 전화하지 못하도록 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지웠다.
“아빠, 원식이네는 예수님도 안 믿는데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아요?”
비가 오면 물이 새 들어오던 녹슨 트럭 안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준아,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아버지의 말은 어린 청년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다섯 식구 다 합쳐도 100만원이 되지 않던 우리 집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하기 시작할 무렵, 원식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몰라보게 마르고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그간의 시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면 열심히 교회 다닐게요. 요즘 이렇게 기도했었는데,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네 전화번호가 생각났어.”
전화기를 분실해서 나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던 원식이는 내 전화번호가 생각난 것을 나름의 응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원식이는 엄마의 사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했다. 신용까지 엉망이 되어 그의 명의로는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보름 정도의 수감생활까지 했다고 했다.
원식이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어 술에 취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종점에 도착하면 다른 버스에 올라타 또 다른 종점으로...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으로 아무 데서나 내리고, 아무 데서 잠이 들다 정신이 들면 2~3일이 지나 있었다고 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덜컥 겁이 났던 원식이는 온전한 정신이 들 때마다 나와 함께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원식이가 나에게 찾아왔던 그 무렵, 나는 신사동과 방배동에 집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처럼 좋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골집에 더부살이 하던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식이와 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원식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진행된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새어머니와 살고 있던 원식이의 아버지는 원식에게 사업하지 말고 직장을 다니라고 하셨다. 친어머니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큰 다툼이 있어 당분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집에도 어머니의 집에도 머물 수 없던 원식이는 혼자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힘들면 가족이 함께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가족들을 두고 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러 온 그 이유를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갑자기 비가 새던 그 녹슨 트럭 안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도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려 할 때마다, 그때 그 장면이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원식이와 나는 그가 해 왔던 사업 분야 중 자본이 최소로 들어가는 온라인 의류 판매를 시작했다. 기대 이상으로 판매가 잘 되었다. 모든 판매자가 동대문에서 똑같은 옷을 받아다가 사진만 다르게 찍어서 올리는 건데 압도적으로 우리 물건이 잘 팔렸다.
나는 원식이의 촬영, 포토샵 실력을 극찬했다. 원식이는 더욱 신바람이 나서 업무에 열중했다. 나중에 그가 말해줘서 안 사실인데 원식이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했었고 온라인은 직원들을 썼었다고 했다. 촬영과 포토샵 모두 막 배운 초보자를 조금 넘어서는 상태였던 것이다. 원식이는 술만 마시면 진실을 말하는 습관이 있다.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잘 될 줄 몰랐어. 너랑 같이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봐.”
택배 마감까지는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촬영, 포토샵, 택배 포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따금 새벽시장까지 가야 했다. 밥도 먹지 않고 쉴 새 없이 피워대는 담배 때문에 원식이의 검은 얼굴이 더 시커멓게 보였다. 공복 상태는 사소한 것으로도 말다툼을 하게 할 만큼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원식이는 말끝마다 욕을 섞기 시작했다.
“원식아, 욕 좀 하지마라. 엄청 거슬린다.”
참으로 이상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 간에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일상 언어가 주님을 만난 뒤로 견딜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욕하지 말라고! 한 번만 더하면 나도 욕한다.”
거듭되는 요청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이 삼시세끼야, 내가 욕하지 말랬지. 누구는 욕을 못해서 안 하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원식이도 놀라고 나도 놀랬다. 그러고 보니 항상 끼고 살던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었다. 매일 가던 새벽기도는 당연히 안 갔고 수요, 금요 예배는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주일 예배만 간신히 참석하고 평일 날은 완전히 주님을 잊고 지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은 영적 패배감에 크게 낙심했다. 나는 원식이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내 모습을 보여 본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가 꽤 거룩하게 변화되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주님, 정말 죄송해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예전의 거친 성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품목당 100개, 200개씩 나가던 제품의 주문량이 2개, 5개 한 자릿수 미만으로 떨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아무리 찾아봐도 특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준아, 나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 좀 해줘.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아.”
하루가 끝나갈 무렵, 원식이는 예전에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여자가 있는 술집에 다녀온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함께 회개 기도를 드린 다음 날부터 신기하게도 다시 매출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한참 후 또다시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식아, 너 또 그런데 갔냐?”
그는 이번에도 순순히 죄를 실토했다. 원식이의 표정이 제법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인생 채찍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켜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이 지경이 돼서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 어떤 인도하심이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최후를 운전하는 내내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원식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과하리만큼 영적 존재를 무서워했다. 한 번은, 불 꺼진 집에서 옷 샘플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가 들어오는 원식이를 놀래킨 적이 있다. 나는 그날 귀신에게 놀란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한때, 원식이는 인터넷으로 사주팔자를 보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원식아, 너 그러다가 귀신 붙는다. 원래 귀신들은 자기 얘기하면 찾아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대. 그러다가 갑자기 쑥 들어와서 빙의 되는 거래.”
취사병이었던 내겐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으나 주방일은 업무의 특성상 수요, 금요예배는 물론 주일예배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 식당이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뿐 아니라 주일성수까지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빠르게 응답 되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무턱대고 큰 돈 달라는 기도 말고는 참 잘 들어주신다. 당시 필자의 아버지는 친척분의 도움으로 주말농장을 운영하셨는데, 회원 중에 한 분이 프랜차이즈 분식집의 가맹점주였던 것이다.
“대표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마, 본사에서 근무하면 일요일은 쉴 수 있을 겁니다.”
놀랍게도 대표님은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부평에서 운영하던 본점의 성공을 롤 모델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었는데, 필자가 입사할 당시에는 이미 한참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을 경험하며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주님의 각별한 배려하심 속에서 나는 주일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늦게 끝나는 업무의 특성 때문에 수요, 금요 예배는 드릴 수 없었다. 그래도 감사했다. 사실 식당일을 하면서 그것까지 바라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12시간, 대부분 서서 일해야 하는 업무여서 다리가 많이 아프고 피곤 했지만 그래도 새벽기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토록 열심히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기도했던 제목은 ‘무너진 우리 집안의 경제회복’이었다. 당시 필자의 집은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인해 다섯 식구 합친 돈이 1백 만원도 되지 않을 만큼 가난했었다. 가락시장 상인들이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한, 팔다 남은 야채를 얻어다 먹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작은 아버지의 장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부도직후,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는 다시 함께 모여 사는 것이 기도제목이었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된 후부터는 우리만의 집을 갖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다.
‘아, 이렇게 벌어서 언제 집을 사지?’
조바심에 마음이 착잡해질 때면 설교시간에 들었던 대로 감사를 실천했다. 억지로라도 감사를 실천하면 어째서인지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때, 기도의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터널의 끝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니 터널의 끝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어떻게 내가 그 삶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다시 돌아간다면 그 때처럼 견딜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터널이 어둡다고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절대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밝은 빛, 긍정, 희망, 소망의 감정을 붙들고 가야만 그것을 놓지 않아야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던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영의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감사로 연명했었기에 주저앉지 않고 터널의 끝을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매끼 3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던 나에게 식당 주방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양배추 한 통을 5분 안에 조지는 애’
직원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본인들끼리 초시계로 시간을 재며 5분 안에 양배추 슬라이스를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일 잘한다고 승진도 빨리 시켜 주셔서 송내역 앞에 위치한 가장 큰 지점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듣기로는 최 단기간 주방장이 된 케이스라고 했다. 군대에서 취득한 한식조리사 자격증 도움도 컸다.
그렇게 근심 걱정 없던 어느 날, 신앙생활에 위기가 찾아 왔다. 대표님과 오랜 친분이 있는 사람이 회사의 임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는데 나만 일요일에 쉬는 것은 불공평하며 업무에도 지장이 있으니 주일날도 출근을 하라는 것이었다.
“저는 그런 조건으로 여기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됐고, 나오던지 그만 두던지 알아서 해.”
집으로 돌아오던 길, 하루 종일 교회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뻐 들뜨던 토요일이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당연히 나는 교회를 택했다. 주일 예배를 다 드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기도를 드렸다. 아니, 기도라기보다는 하소연이었다.
“하나님, 저는 친구들도 못 만나고, 영화도 안 보고, 텔레비전도 안 보고,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이제는 교회도 못 가나요? 이럴 바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곳에서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저를 데려가주세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만큼 아버지가 아프실 때, 병원조차 모시고 갈 수 없는 형편에도 눈물은 없었다. 어머니가 들통에 수제비를 담아서 동대문시장 상인들에게 팔러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고, 누나가 사촌 누나에게 “우리 엄마 돈 갚으라고” 안경이 휘어지도록 맞고 왔을 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울며 기도하고 있을 때, 회사 대표님이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교회로 걸려왔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대표님께 내가 처한 상황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 만난 대표님은 나에게 큰 시련을 선사한 그 임원과 함께였다.
“야! 가서 커피 좀 뽑아와.”
임원을 향해 내 뱉는 대표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커피를 뽑...”
“알아서 뽑아와!”
귀찮은 듯 던지는 대표님의 말에 임원은 기어이 그 추운 겨울날, 커피 심부름을 나갔다. 쌀쌀맞다 못해 위협적으로 임원을 대하던 대표님이 내게는 그 큰 체구로 부담스러울 만큼의 자상함을 보이셨다.
“아유아유, 우리 김실장 고생 많았지? 앉어 앉어.”
커피심부름을 시키려고 임원을 데리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께서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에게 직접 보여 주시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엇이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인연보다 나를 더 배려하도록 만들었을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 식은 커피를 들고 임원이 도착하자 대표님은 내게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와 금요예배도 참석하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귀가 먹먹해지면서 평온함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수요예배도, 금요예배도 가게 해달라고 했잖니.’
성남에서 감자탕 집을 크게 하신다는 소식을 끝으로 대표님과의 연락은 끊겼다. 살면서 한 번씩 대표님이 보고 싶다.
“부평에서 그린필드 운영하셨던 대표님, 그 땐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제대로 된 인사조차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배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2010년 한가위, 나는 지옥을 경험했다. 작은 어머니 송옥순 여사가 분당 재생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장이 정지 되어 있었다. 응급침상에 축 늘어진 그녀의 옷은 분비물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처절함 때문에 내 머릿속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무료로 놔 주시던 벌침을 진작에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작은 어머니가 무릎에 벌침을 맞고 쇼크로 쓰러지신 것이다. 원망과 책임이 영원히 엉겨 붙어 따라다닐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죽음이 분비물처럼 우리 가족에게 졸아붙는 것 같았다.
“탈칵 탈칵 탈칵”
곧바로 멈춘 심장을 마사지 하는 펌프질이 시작되었다. 요란한 기계음이 응급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자리에 있던 작은 어머니의 둘째 아들 진만이는 누워서 엄마를 부르며 오열하기 시작했고 작은 아버지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용히 나의 어머니가 나와 누나, 동생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기도해라.”
그러더니, 작은 어머니를 눕혀 놓은 침대 근처에 서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곧이어 누나, 동생, 아버지 한 명씩 기도를 시작했고 나 역시 선반모서리에 의지해서 허리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하나님 작은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기도를 시작하자 비로써 정신이 들면서 심각한 현실이 하나하나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실 치사라는 거구나.’
살려달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장이 꼬이는 것처럼 아팠다.
‘아, 이래서 예수님이 기도하다가 땀방울이 핏 방울처럼 돼서 흐르셨다고 했구나.’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고 나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힘든 기도를 중단하고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마다 진만이의 울부짖는 소리와 몸부림치는 모습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이미 일반적인 기기사용 시간은 많이 경과한 상태다.’
‘이 정도 시간동안 했는데도 못 일어나면 거의 가망이 없다.’
‘심장 박동이 돌아와도 심정지 5분이 지나서 왔다면 뇌사일 확률이 높다.’
‘기기의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져서 장기에 출혈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장박동이 돌아온다 해도 이로 인한 감염으로 사망하실 수도 있다.’
이따금씩 의료진들과 다른 가족들이 하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들려왔다.
“사람들 하는 말, 전부 무시하고 그냥 기도해라.”
그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이제 그만 덮어. 그만 하고 덮어.”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의료진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작은 어머니의 심장박동이 돌아 온 것이다. 어머니의 눈가에는 진한 황 녹색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분명 일반적인 시술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끝까지 펌프를 중단하지 않았던 분께 너무나 감사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장해 주신 것이겠지만, 그 분은 그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면 궁금해지곤 한다.
그 분도 기독교인이어서 그랬을까?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애절해보여서 차마 중단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다 큰 성인이 몸부림치며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그냥 일반적인 관례대로 평소 하던 시간만큼만 했었더라면 이제는 저토록 건강한 작은 어머니가 싸늘한 주검이 될 뻔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작은 어머니는 맥박은 돌아 왔지만 의식이 없었다. 스스로 호흡도 할 수 없어 호흡기를 착용했다. 의료진들은 뇌사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단지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뇌사, 드라마에서 호흡기를 착용하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 상태 말인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천문학적으로 발생할 것 같은 치료비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우리 가족의 앞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우리는 의료진들이 너무도 냉정하게 아니, 오히려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얘기만 하는 것 같아 몹시 야속했다. 진만이는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떡해, 우리 엄마 어떻게 할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게 살아서 뭐해. 나도 같이 죽어야지. 저 사람 잘못 되면 나도 같이 죽어야지.”
작은 아버지 역시 깊은 상심을 감추지 못하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 아침, 나와 누나, 동생 세 사람은 따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는 진만이와 두 달 후 결혼 할 신부될 사람이 와 있었다. 우리는 짧은 면회를 마치고 병원 근처 벤치에 앉았다.
“작은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해지셔서 진만이 결혼식장에 들어오시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먼저 누나가 기도제목을 냈다. 우리는 마치 여리고성을 공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병원 주변을 걸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했지만 우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우울 했고 낙심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만, 응답 받으려면 믿어야하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이런 마음 상태로 기도하면 안 돼.”
나는 누나와 동생에게 기도의 방법을 제안했다.
‘우울한 마음이 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자. 작은 어머니가 건강하게 일어나서 진만이 결혼식장에 들어오는 밝고 긍정적인 상황만 상상하며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패혈증에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 뇌사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지 말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의식을 차리고 깨어나게 해주세요처럼 긍정적 어휘를 사용하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이렇게 침울하게 있으면 안 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의 제안을 진지하게 실천했다.
“후유증 없이, 아, 맞다. 이런 말 쓰지 말랬지. 건강하게 일어나셨으면 좋겠다.”
우리 셋은 일점일획의 부정적 단어도 사용하지 않을 만큼 긍정으로 똘똘 뭉쳐 합심으로 기도했다. 그 때, 우리로선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저녁 무렵 작은 어머니가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무런 후유증 없이 퇴원한 작은 어머니는 지극히 건강한 몸으로 둘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보나마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우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끔 그런 일들이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나지 않더냐고... 그러나 기도 응답은 응답을 받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위기에 빠진 자신의 자녀들을 구하러 오신 전능자를 느꼈다.
사탄의 덫에 붙잡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위기에 빠진 우리를 구하기 위해 홍해를 가르고, 전쟁터에서 적들을 궤멸시키시며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던지시던 그 분께서 친히 역사하셨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여운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하나님을 더디 응답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오래오래 기도해야 응답하시고 한참 많이 기도해야 간신히 응답해 주시는...
그러나 나는 그날, 자녀의 위험 앞에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너무도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사탄을 꾸짖으며 소리치시는 분노의 불꽃을 보았다. 자신의 자녀를 감싸 안으시는 자상한 손길을 느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힘’을 통해 죽었던 생명을 살리시고, 우리 가족을 크나 큰 곤란가운데서 건져주셨던 그 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그녀의 간증을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그러했다. 말씀중심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영적체험을 지나치게 터부시하다가 결국은 영적체험을 모조리 죄악시하는 분위기에까지 이르게 된 이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영적체험을 담은 신앙간증이 희소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목회자들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영적체험이 없으니 기도하지 않게 된 것일까? 아니면 기도하지 않았으니 영적체험이 없게 된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사활을 걸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사도행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녀가 경험한 영적체험 몇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급하게 200만원이 필요했는데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었어요. 그 때, 민원장님께 전화가 걸려 왔어요.”
"기도하고 있는데 자꾸만 당신에게 200만원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주신다. 혹시 200만원이 필요한가요?"
민원장님의 배려로 급한 불을 끈 그녀.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300만원이 없어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번에도 민원장님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또 한 번 전율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 되었다.
물론 그녀는 아무에게도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녀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민원장님은 필요한 돈의 액수까지 정확히 말하며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이번에 필요한 돈은 3000만원, 어김없이 민원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젠 민원장님도 자신의 영적인 촉(?)에 확신이 생겼는지 웃으며 말했다.
“어! 이번엔 금액이 좀 큰데...”
필자 또한 민원장님을 알고 있다. 틈만 나면 성경을 읽는 그녀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평소 환상을 보거나 예언기도를 하거나 받으러 다니는 분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체험이 민원장님을 통해 일어났을까?
그녀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현수막을 보고 찾아 온 손님 중에 하나였던 그녀를 전도하기 위해 민원장님은 5년이 넘는 기간을 기도했다. ‘기도할게요’ 말만하지 않고 진짜로 기도했더니 진짜로 응답 주셨다. 그녀를 교회로 인도할 수 있도록 영권을 부어주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의 변화를 거쳐 교회로 향하게 되었다.
첫째 아무래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
둘째 민원장님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인도자인 것 같다.
어떻게 혈연도 아닌 타인을 위해 5년이 넘는 시간을 기도할 수 있었을까.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될 당시, 민원장님 또한 인생의 어둔 터널 속을 지나고 있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살려 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오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 말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했을까. 기도했다.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 아니던가.
누구나 끊임없이 기도하다보면 주님께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만난 민원장님의 눈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 그녀가 들어왔다. 민원장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녀를 전도하기 위해 기도했다. 그러자 주님께선 민원장님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민원장님이 기도했으니 민원장님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민원장님은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바라보면서 기도심지에 불이 붙고 말았다.
“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네.”
자신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눈앞에서 목격한 민원장님은 마침내 ‘그 힘’에 눈을 뜨게 된다. 민원장님은 불과 몇 년 만에 채무를 갚고 14억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다. 돈도 빌려주시는 하나님이 돈은 안 갚아 주시겠는가.
성도들이 기도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흡사 성냥이 켜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막 켜진 성냥이 제일 환한 것처럼, 지금 막 기도의 심지에 불이 붙은 성도들은 주변을 압도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한다. 그 모습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구절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다.
어느 날, 민원장이라는 성냥이 켜졌고 그 작은 불꽃 하나가 신집사라는 성냥에 옮겨 붙었다.
막 켜진 성냥의 특성은 첫째 세상 것에 대한 배타성이다. 재밌어 죽겠던 드라마와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저 그렇게 느껴지며, 자연스럽게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둘째 주님 것에 대한 수용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건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 결과 타인의 신앙체험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루트를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며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사람의 성품만큼이나 다양하다.
아직 켜지지 않은 성냥들은 정확히 반대로 행동한다. 여전히 세상에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신앙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든다.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말씀사경회에서는 영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축복에 대해 나누는 자리에선 고난을,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선 축복의 하나님을 언급한다.
본인 입장에선 밸런스를 맞추려는 시도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실상은 분위기파악못하고 이의제기와 반론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교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들이 주님의 뜻 가운데서 행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불편함’이다. 그로 인해 발제자와 주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20절)
어째서 그녀에게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 주어지느냐고 묻는다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3년이 조금 넘는 예배 사수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오로지 기도로서 말이다. 그것은 진로나 금전문제 일수도 있고 가족들의 구원일 수도 있다. 절대로 재정적인 어려움에는 처할 수 없을 만큼 돈 많은 부잣집 딸도, 승승장구 중인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도 각자 자신만의 기도제목을 들고서 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터널 반대편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돈 많은 이들의 인생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부족한 것이 없어 기도하지 않았더니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자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영적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본인은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억울합니다. 저는 분명 기도했단 말이에요.”
형식적으로 주절거리는 식사기도만으로 그 터널을 돌파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생일대의 기도제목이 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살려 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오는 기도의 제목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본인의 심령이 가난한 줄도 모르는 이들은 애통하는 심정으로 기도할 수 없다. 그런 심정으로 기도해 본 경험이 없다면, 그렇게 끝까지 기도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통상적으로 그 터널을 통과하는데 소요 되는 기간은, 새벽기도를 포함하여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 기준으로 1년 이상 소요 되는 듯하다.
그 터널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적 특징은 고립감, 아무리 불러도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 아닌가 따위의 초보적인 신앙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가끔 응답도 주시곤 하지만 그 응답이 삶을 변화시킬 만큼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다. 이를 테면, 기도 했더니 ‘아픈 손목이 깨끗이 나았다. 비가 그쳤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주고 갔다.’ 와 같은 소소한 것들 말이다.
그렇게 1년 이상을 감내하여 마침내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되면,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터널 속에서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늘 주님이 함께 계셨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막 켜진 성냥의 시대가 도래한다.
엘리야 때처럼 기적도 선포된다. 이번엔 혼자만의 소소한 간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을만한, 누가 들어도 기적이라 할 만한 규모의 응답들이 시작된다. 기도하는 예배자의 성냥은 언젠가 반드시 켜지기 마련이다.
수업사이의 공백에 사우나를 가려던 그녀는 현수막에 이끌려 피부관리실의 문을 밀었다. 그녀는 현수막에 숨겨진 주님의 초대장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전 영어과외를 해요.”
“그럼 저는 선생님을 관리 해드릴 테니 선생님께선 제 아들을 가르쳐주시겠어요?”
그렇게 21세기형 물물교환이 시작되었다. 민원장님의 사업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이 꿈은 훗날 그녀로 하여금 바랄 수 없던 중에도 기도하게 만드는 숙명의 기도제목이 된다.
그녀의 삶에 위기가 찾아 왔다. 그녀는 민원장님의 피부관리실에서 알게 된 한 독실한(?) 불교신자에게 자기도 절에 같이 데려가 달라고 요청을 했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을 만큼 당시 그녀는 절박했었다.
다행히 그 불교 신자와 그녀 모두 민원장님 손에 이끌리어, 아니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후일, 불교신자였던 분은 김포에 있는 한 교회에서 권사님이 된다. 주님께선 이 권사님을 통해서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복선을 장치해 두셨다. 일단 권사님 앞에 책갈피를 하고 다시 그녀의 스토리로 넘어가보자.
민원장님은 그녀를 전도하기위해 5년이 넘는 기간을 중보했다. 그 결과, 그녀와 민원장님 사이에 사도행전적인 기적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영적체험의 반복으로 인해 그녀는 교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민원장님과 함께 반포 남서울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된다.
그녀는 거기서 구역장 오집사님을 만났다. 이따금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는 용도로 ‘기도해 봅시다’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구역장님은 그녀를 피상적으로 돕지 않았다. 대체로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서는 적극적인 실천이 동반되는데 주님께서는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실천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정황상 그녀의 구역장 오집사님은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었던 것 같다. 오집사님의 실천을 주님은 어떻게 사용하셨을까.
그녀의 구역장님은 피부관리사를 꿈꾸는 그녀에게 직접 손님이 되어 주었고 다른 손님들도 소개시켜 주었다. 뭐라고 소개를 했는지, 소개를 받은 손님들 또한 다른 손님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이 소개 가운데 그녀의 삶에 큰 힘이 되어 줄 또 한 명의 은인, 박권사님을 만나게 된다. 일련의 과정속에서 그녀는 또 한 번 확신을 갖게 되었다.
‘피부관리, 잘 만하면 정말 좋은 아이템이구나.’
‘난 정말 손 기술이 없구나.’
그녀의 삶은 더욱 악화가 되어 공황증상으로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민원장님은 방배동 지하에 있는 조그만 개척교회를 소개시켜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새벽기도 삼일만 나가봐”
그녀는 그곳에서 인자한 할머니 이 목사님을 만났다. 이 목사님은 그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관련된 성경구절만 찾아서 읽어 주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아무 힘이 없어요. 말씀이 능력이에요.”
필자도 그 프로그램(?)을 알고 있다. ‘예수보혈’로 시작해서 ‘예수보혈’로 끝나는 그 성구읽기는 한 마디로... 쉽지... 않다. 조용조용하게 일정한 톤으로 성경을 읽어주시면 그야말로 잠이 솔솔 온다. 눈은 천근만근인데 앞에서 읽어주시는 목사님 성의를 봐서 졸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가끔은 목사님 본인도 함께 졸고 계신다는 것.
놀랍게도 이 졸린, 아니 능력의 성경읽기로 몇 사람의 심령이 회복 되었는지 모른다. 심령의 회복은 곧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먼저 그 교회의 성도인 송집사님, 김집사님 부부가 있다. 가정 경제 파탄의 원인을 모두가 김집사님의 남편에게만 돌리며 이혼을 권유하던 때에 당시 두 부부가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였던 이전도사님이 말했다.
“가족은 위기가 왔을 때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돕는 것이잖아요. 지금까지는 남편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니 이젠 남편을 위해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나 기도해 보세요.”
김집사님은 집 앞 골목에서 떡볶이 노점을 열었고 이전도사님은 기꺼이 단골손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김집사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집사님의 가족은 살던 집에서 내쫓겨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집사님은 당시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기도해 봅시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김집사님은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다.
“기도해 봅시다.”
김집사님은 이전도사님과도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기도해 보자는 답변이었다.
며칠 후, 김집사님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트럭이 이전도사님을 들이 받고 운전사가 차만 놔두고 도망을 친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그러나 다행히도 전도사님은 곧 의식을 되찾았다. 1개월 넘도록 입원해 있던 전도사님은 퇴원 후 가장 먼저 김집사님을 찾았다.
“집사님,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었어요.”
전도사님은 1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보상금으로 받은 160만원에서 헌금을 제하고 남은 돈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녀는 전도사님 가족이 사업부도로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지금은 간신히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전도사님이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피 값을 그녀에게 내민 것이다. 한사코 거부하는 김집사님에게 전도사님은 말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야.”
김집사님 부부는 그 돈을 보증금으로 단칸 월세 방을 얻어 새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도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 두 부부는 기꺼이 첫 번째 성도가 되어 주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된 김집사님은 당시의 채무를 갚고 서울 방배동에 본인 명의의 집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그녀에게 이목사님을 소개한 민원장님 또한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다. 경제 및 가정의 어려움으로 심신마저 붕괴되어 버린 민원장님은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 심신의 회복을 거쳐 무너졌던 가정과 경제를 회복시켰다. 불과 몇 년 만에 채무를 해결하고 지금은 14억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다.
교수, 학생, 자영업자, 샐러리맨, 부자와 가난한 자 다양한 사람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회복을 받고 자신들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 남겨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생활보호 대상자, 차상위계층 뿐이었다. 덕분에 목사님 부부는 20년 목회생활 동안 단 한 번도 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급여는커녕 자녀들이 보내온 헌금과 용돈, 남편이 농사지어 번 몇 푼 안 되는 돈까지 모두 목회에 쏟아 붓고도 모자라 가족들 모르게 대출까지 받았다.
그런 가난한 교회에 그녀, 지금의 신집사님이 오게 된 것이다. 3일만 참석해 보려던 그녀의 발걸음은 결국 3년이 되었다. 그녀와 목사님, 두 사람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말씀을 읽었다.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노숙자였던 최성도님의 자립을 돕다가 목사님의 팔이 심하게 부서져 버린 것이다. 최성도님에게 스스로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위해 추운 겨울날 함께 박스를 줍다가 미끄러져 벌어진 일이다. 말씀 읽기가 당연히 중단 될 줄 알았는데 목사님은 팔에 기브스를 하고 변함없이 그녀와 함께 했다.
그렇게 말씀을 들으며 그녀도, 그녀의 삶도 함께 변해갔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예배시간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 금요, 새벽예배까지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예배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배자의 기도가 응답되기 시작했다.
요즘 그녀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그녀의 건강과 외모까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직업의 특성상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남을 돌볼 수 없는 그녀, 지인들은 볼 때마다 그녀의 빠른 외모변화에 놀라움을 표할 정도다. 아무래도 그녀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형통해져가는 듯하다.
그녀는 이따금 '돌보지 못해 엉망이 되어 가던 본인의 건강까지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곤 한다. 새삼 느낀다. 하나님의 자상함 속에는 전능자답지 않은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촘촘한 장치들로 구성된 이 축복의 메커니즘에서 하나의 벽돌을 빼면 지금의 결과 값은 나오지 않는다. 마치 성경에서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장구한 세월 속에서 놀랍도록 맞아 떨어져가고 있는 오늘 날의 모습처럼, 그녀의 삶도 그렇게 예수 십자가의 기.승.전 그리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녀의 시선이 홍보 현수막을 향하던 때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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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사람들은 대체로 응답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될 때 기도를 시작한다. 아예 응답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는 기도자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라도 대통령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어떤가.
“선교하게 현금 1조를 주세요.”
나름 거룩한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그래도 역시 진지하게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루어질만한 가능성이 보일 때 기도하기 시작한다.
신 집사님의 기도제목은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창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첫째, 피부관리실을 창업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없다.
둘째, 창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낮에는 영어과외, 밤에는 맥도날드 알바를 하는 그녀는 피부 관리실을 오픈한다 해도 손님이 어느 정도 차서 임대료 등을 부담하고 수입을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소득의 공백을 견딜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누군가 대신 오픈준비를 해주지 않는 이상 그녀의 창업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셋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손맛이 없다. 다시 말해 손기술이 없다.
손맛이 얼마나 없는지 교회 식구들이 손님까지 소개시켜 주며 그녀를 전적으로 도와주려 했었지만 재구매가 일어나지 않아 결국 중도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창업을 하려고 한다. 오픈할 수 있을까. 오픈해도 망하지 않고 잘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기도 중에 집사님이 자꾸 생각이 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싶어서 일단 여쭤보러 왔습니다. 저희 기도팀원에게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기도부탁을 하고 왔습니다.”
그녀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 아들 K였다. 그녀는 K와 안면정도만 있을 뿐 따로 식사를 해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함께 피부관리실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그녀는 가난한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올해로 78세를 맞은 그녀의 교회 담임목사님은 20년 목회 생활동안 단 한 번도 급여를 받아 본적이 없었다. 목사님은 믿었던 부목회자에게 속아서 모든 재정을 사용하고 빚까지 지고 있었다. 목사님은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며 전도도 하면서 남은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의 아들 K는 부모님의 창업을 극구 반대했다.
“그 연세에 뭔가를 하신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20년 목회하신 댓가가 겨우 이것인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런 K의 마음을 돌이킨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부모님의 상급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면서 기뻐하셨을 부모님의 모습들도... 어떤 부모는 술과 도박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어떤 부모는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데,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저축을 하셨으니 감사해야겠지요. 또한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오픈 준비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신 집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올해 신년기도제목으로 피부관리실을 하고 싶다고 써냈었어요. 너무나도 하고 싶긴 하지만, 저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요.”
그녀는 피부관리실 창업에 동참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K에게 이야기했다.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K는 개인사업체뿐 아니라 기업컨설팅까지 다양한 경영자문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해 그를 통해 미리 준비시켜 두셨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는 기술도 없는걸요. 사람들이 저보고 손맛이 없다고들 하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것은 못했었어요.”
“아, 그 문제라면 더욱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손기술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대부분 상향평준화가 됩니다. 한번 연습해서 안 되면 열 번, 열 번해서 안 되면 백번 그러다보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손기술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습능력과 전달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습능력과 전달능력이요?”
“많은 분들이 어느 정도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 노력을 멈춥니다. 아시다시피 공부하기를 멈추는 순간,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가 시작되지요. 인체를 다루는 일이라 끊임없이 연구하며 공부해야하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고객에게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달능력도 필요합니다. 제가 듣기로 집사님은 20년 이상을 교사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학습능력과 정보 전달능력을 이미 갖추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손기술보다 더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개월간 돕겠습니다. 안되면 2개월, 그 후로도 계속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앞으로 손 기술이 부족하다는 말은 다시는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믿음대로 되니까요.”
생각보다 그녀의 손 기술은 빠르게 개선되었다. K는 두 번 만에 그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찾아내었고 기술은 즉시 개선되었다. 1개월 남짓 트레이닝을 마치고 샵을 오픈 하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녀의 천사들이 가장 먼저 방문을 했다. 그녀가 전에 다니던 남서울교회 식구들이었다. 새 신자였던 그녀를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 그녀들은 말했다.
“와! 신 집사. 정말 잘하네.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어.”
동시에 그동안 말 못했던 애정 어린 푸념도 쏟아졌다.
“손맛이 워낙 없어서 소개하기가 애매 했었는데 이제 소개 많이 해야겠다.”
“피부 관리실 하는 게 꿈이라고 기도 부탁을 해서 기도를 하긴 했었지만, 사실 어느 세월에 응답 될까 솔직히 좀 그랬었어. 그런데 진짜 할렐루야다. 집사님”
오픈 2주차부터 그녀의 샵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리를 받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게, 동료, 손님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준비 시키셨을까.
앞서 우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응답 받을 가능성이 있어보일 때 기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나눈바 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기도를 시작했었다. 당시 어린 초보 신자나 다름없던 그녀가, 그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상황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20여년 이상, 꾸준히 과외로 고소득을 올리던 그녀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과외는 줄고 어머니는 큰 부채를 만드신 후 치매까지 앓게 되신 것이다. 빚과 병원비를 감당하던 그녀에게 공황증세가 찾아왔고 응급실에 가게 될 정도까지 되었다.
이 정도 데미지만으로 스스로 인생을 로그아웃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게 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 초심자인 그녀에게 믿음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보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기도 밖에 할 수 없던 상황. 그녀의 기도는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고 돈 많이 주시면 선교할게요 같은 비전을 담은 고급기도도 아니었다. 그녀의 기도는 명료했다. 그리고 절박했다.
“살려주세요. 우리 가족을 지켜 주세요.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게 저를 지켜주세요.”
차곡차곡 작은 응답들이 쌓여갔고 그녀는 변화되어갔다. 변화된 그녀의 모습은 친구와 가족들을 교회로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짐작컨대 그런 크고 작은 응답 속에서 그녀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렇게 영혼이 회복 된 그녀는 삶의 무게에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다. 억대 연봉자였던 그녀가 거리낌 없이 과거의 드레스를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편의점 알바, 맥도날드 야간 근무를 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미래를 꿈꾸는 것을 포기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현실의 무거운 짐을 다른 가족들에게 몽땅 지우고 공부하는 백수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의 무게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미래까지 준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도했더니 주님이 준비시켜 주셨다.
나약해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을 그녀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자 어떤 척박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를 지킬 수 있고,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전문성을 통해 탁월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요즘 그녀가 심상치 않다. 진행하는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의 생생한 도우심도 체험했다. 이따금 그녀에게 당부하곤 한다.
“아무래도 집사님께서는 축복의 사이클 안에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대체로 2~3년 정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두 부류로 갈라지더군요. 끝까지 예배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늘 높이 독수리처럼 나는 사람, 슬금슬금 예배에 소홀해지다가 성장이 멈추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집사님은 지금처럼 예배를 꼭 붙들고 가셔야 합니다.”
그녀는 수년 전부터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맥도날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오래 전 믿음의 선배들이 사용했다던 ‘교회에서 잠자기’를 시전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바에 의하면 이런 경우 주님께서는 잠자는 시간도 기도시간으로 쳐주신다는 소문이다.
3년 전,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독자님에게 3년 만에 문자를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 전략 -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라 디테일한 스토리는 생략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제 부끄러움은 감춰지고 믿음의 사람처럼, 인내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겁니다.
전 심하게 다쳤습니다. 3월에 다쳐서 6월에 수술하기 전까지 끔찍한 통증으로 몸과 마음은 무덤안에 갇혔습니다. 뼈가 부서진 것도 모르고 심한 타박상인 줄 알았습니다. 움직일때마다 신음이 터졌지만 몸보다 맘이 더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며칠 쉬면 불편해도 일상을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끔찍하게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의 분노와 슬픔 초라함 부정적인 감정은 날마다 증폭되어 먹지도 마실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 일어나지 못한 채 굶게 되자 의식이 흐려져갔습니다. 근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아이에게 결국 연락을 했고 놀란 아이가 달려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왜 이렇게 됐냐, 어떻게 다친 거냐, 언제 다쳤냐, 병원엔 갔냐, 왜 말 안했냐.. ’
여러 날 침대에서 꼼작 못한 저의 몰골은 다른 사람이 됐고 화장실을 가지 못해 제가 누운 자리는 축축했고 냄새도 고약했으니 아이가 놀란 건 당연했습니다. 아이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곤 울면서 119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 눈엔 제가 곧 죽을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정신을 놓쳤습니다.
처음 간 병원에선 제 의식을 돌아오게 하는 치료에 집중했고 의식이 돌아온 제게 의사는 보존 치료를 권하며 8주를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전혀 낫지 않고 점점 더 통증이 심해져 갔습니다. 아이가 척추 전문 병원을 가보자고 뭔가 잘못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간 병원 검사 결과 흉추 4번 5번 뼈가 심하게 부서졌고 11번 12번은 압박골절이 된 상태였습니다. 부서진 곳에 골시멘트를 채워 넣어야 뼈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가족은 저와 아이 둘 뿐이고 아이는 일을 하고 있어 제 옆에 오래 있어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험은 이미 오래전에 해약한 상태라 병원비가 큰 부담이었습니다. 요양원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 말에 알았다고 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아이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봄부터 가을까지 허겁지겁 달려와 밥을 챙기고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에 데려가고 다시 일하러 갔습니다. 평일엔 학교 조교로 일하고 밤엔 녹음하고 편집하고 금요일엔 인천 철야 예배 음향담당으로 주말엔 교회간사로 시간이 부족해 잠 잘 시간을 줄여야 했을 겁니다. 그런 아이 앞에서 아프다는 내색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아파하는 모습에 아이는 너무 괴로워했고 그 슬픔을 보는 일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라 애써 괜찮은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느낀 건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구나 그 모습을 보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고 어서 힘을 내자고 다짐도 하게 되곤 했습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저는 보조기에 묶여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2차 통증들이 산발적으로 절 죽여갔습니다. 보조기가 실리콘이라 여름 내내 상체를 묶고 누워있다보니 욕창이 생겼고 음식을 소화 할 수 없어 체중은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의사가 권하는 통증약물 주사도 요양원도 간병인도 제겐 사치였습니다. 병원비가 생각보다 금액이 컸고 제가 일을 못하면서 조금씩 균열이 간 일상은 8개월이 지나자 해결해야 할 청구서가 쌓여갔습니다.
전 난생처음 수술실에 들어갔고 뼈 때리는 고통을 직접 겪었습니다. 다른 부위는 마취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골시멘트를 뼈에 넣을 때는 끔찍한 통증에 비명만 내뱉었습니다. 의사 여러분이 모니터를 보고 제 뼈 상태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주고 받는 소리, 아프면 소리 지르라고 하는 소리, 하체에 어떤 증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하라는 소리... 모든 수술에는 부작용이 있고 이 시술은 하체가 마비되는 확률이 있으므로 전신 마취를 할 수 없다고 환자의 반응을 보며 시멘트를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뼈 때리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전 누가 그 말을 처음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 말을 한 사람은 뼈 때리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균 수술실의 인위적인 서늘함, 초록색 가운을 걸친 의사들, 감정은 배제된 백색의 불빛들. 전 베드에 엎드린 채 40분 동안 뼈를 때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저 마취 좀 해주세요’ 했습니다. ‘설명 드렸잖아요 이건 환자의 상태를 보며 하는 거라 전신 마취 못한다고요.’
부분마취를 했는데 왜 이렇게 아파요 겨우 겨우 말을 뱉은 내게 ‘뼈는 마취가 안돼요’ 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은 소중한 걸 잃고 나야 알게 될까요. 날 어디든 데려다주던 튼튼한 허리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양말을 신는 일이 이렇게 땀을 흘리며 신어야 하는 노동인지 몰랐습니다. 화장실을 혼자 가고 샤워하고 먹고 눕고 하는 수많은 일상의 움직임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그리웠습니다. 아이가 최선을 다해 절 도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간병인을 쓰자고 아이가 말했지만 더 이상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 할 수도 없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일도 버겁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여름이 갔고 가을이 됐습니다. 체력은 점 점 더 떨어지고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편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1년이상 말했습니다. 전 그 말에 더 절망이 됐고 한순간 마음이 주저앉았습니다. 힘을 내려고 해도 힘은 사라지고 기도는 멈춰졌습니다. 하루에 약을 먹고 잠이 들면 겨우 두세 시간. 깨는 순간 통증에 시달리는 고통. 시멘트가 느껴지는 딱딱한 통증과 옆구리와 등의 통증. 어떤 통증이든 지속되면 사람이 정신이 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24시간 누가 붙어 있다 해도 통증을 견디는 일은 환자의 몫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전 어느새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고 먹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혼자 화장실을 못 가고 간다 해도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었습니다.
이 통증을 의사말대로 그렇게 오래 견뎌야 하는 거라면 자신이 없었습니다. 진통제 약물과 재활을 병행하며 일상을 다르게 견뎌야 하는 일. 그 고통의 시간이 확실치도 않고 일년 넘게 가봐야 하고 완치를 말 할 수 없다는 의사 말에 ‘죽어야겠다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죽어야겠다고 다짐을 하자 놀랍게도 통증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평안을 느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편하게 쉬겠구나 그 안도감 그 평안함...그땐 몰랐지만 자살의 영이 평안을 가장하고 사람들 마음을 공략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죽음을 택하는지 그 마음이 그냥 알아졌습니다.
‘나약함 믿음 없음, 너보다 더 힘든 사람 많아. 넌 치료하면 낫기라도 하지. 너 기도하잖아. 어쩌겠니. 시간이 약이라잖아. 기도할게.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아픈 사람만 불쌍한거지.’
그런 말을 듣기에도 지쳤고 제가 듣고 싶은 위로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전 앞으로 사는 동안 아픈 사람에게 제가 들었던 말들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 할 수 없는 말이 되었습니다. 특히 기도하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을 겁니다. 공허한 약속, 믿음 없음을 충고하는 말, 절실하지 않아서 기도 안 한다는 말,
전 혼자 죽음을 결심하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한 건 오래된 일기장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이란 감정이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운 게 없고 두렵지도 않고 가짜 평안일망정 그 평안이 소중했습니다.
단 하나, 걸리는 건 아이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아이가 받을 상처가 생각나 가슴을 잡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살 생각을 하면 두렵고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죽을 방법을 진지하게 깊게 생각했습니다. 울컥대는 뭔가가 뜨겁게 올라오곤 했지만 죽음은 강력하게 절 유혹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기도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버지...이 말이 나오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저 죽어요. 더는 못 버티겠어요. 마음도 몸도 정말 견딜 힘이 없어요. 죄송해요.'
아이가 떠올랐고 심장이 아팠지만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는 말이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빠, 저 내일 하루만 기다려볼게요. 내일 하루 어떤 것이든 아빠가 저에게 싸인을 주세요. 그 말을 한 후 싱크대를 붙잡고 오래도록 울었습니다.
다음 날이 됐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기대도 없었고 그래서 실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새벽 무기력 속에서 눈을 떴고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블로그에 숫자 표시가 있었습니다. 브리스가님이 전날 보낸 기자교육 문자였습니다.
하루만 더 기다려보겠다고 한 그 다음 날 오후 6시 11분에 문자가 와있었고 저는 확인을 못했던 겁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우연히 제가 생각나 3년 만에 문자를 주신걸까요.
사람들이 웃어도 괜찮습니다. 살고 싶어 별 핑계를 다 갖다 붙인다고 비난해도 괜찮습니다. 그 하루가 다 가기 전 제게 도착한 문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어떤 방향성을 느꼈습니다. 문자가 도착한 시각이 6시 11분. 이 숫자를 보는 순간 아빠가 저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구나. 그렇게 느꼈습니다. 제 생일이 6월 11일이라 저에겐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자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 마지막 날 교육생과 교육해주신 유진님과 편집장님께 몸이 불편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날 전 혼자 벅차서 울었습니다. 아픈 통증을 견디며 앉아있는 일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이 괴롭고 하루에 수십 번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인내에 기쁨이 있음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통증 때문에 괴롭고 힘든데 마음은 봉합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지인들에게 이 기쁨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특별한 일은 제게만 특별했고 제 아이만 공감을 해줬습니다. 제가 객원기자로 활동하게 됐다고 하자 ‘기자가 아닌 객원기자였어? 보수는 있어?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신기하게 서럽지도 않고 오히려 기쁨이 커져갔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하찮은 일이겠지요.
제가 봄에 누워있을 때 #가평별곡 이라는 채널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을 보며 위로를 받고 두 부부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저런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아주 많이 알리고 싶다 생각했고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저분들을 내가 어떻게 만나겠냐고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기자 교육 제안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루만 더 살아보겠다고 한 그날에 온 문자였으니 말입니다.
전 신이 났습니다. 몸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못 걸어도 통증이 미치게 괴롭혀도 아빠가 절 돌보시고 계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돌보실거란 걸 알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빠의 문제가 아닌 제 문제였습니다. 부끄럽지만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예전과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그냥 깨달아졌습니다.
아이에게 월차를 내고 가평에 동행해달라고 열흘 전부터 부탁을 했습니다. 첫 인터뷰니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사진선교회 일도 합니다. 그래서 사진도 부탁을 했습니다. 인터뷰 녹음을 3일 풀고 3일은 정리를 했습니다. 기사 완성이 일주일 걸렸고 오른쪽 눈은 실핏줄이 터져 온통 붉게 물들었습니다. 입안이 헐어 혀로 입 천정을 훑으면 몹시 아팠습니다.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자 마음가짐이 정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청해 둔 제 첫 인터뷰 기사가 승인이 됐습니다.
12월 7일 오후 6시 11분.
승인된 시각에 제 눈길이 멈췄고 숫자를 보는 순간 전 진공상태가 됐습니다.
브리스가님의 문자 611
첫 기사 승인 611
제생일 611
우연일까요..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배가 말했습니다. 숫자 611에 담긴 메시지는 ‘못으로 거룩하게 하나님의 손과 하나 되다’라고 합니다.
오래전 어느 날 아침, ‘아빠, 저 사랑하시면 하늘에 하트 하나만 보여주세요’ 기도를 하면서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멀리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앙증맞은 하트 하나를 발견했을 땐 언어가 순간 사라졌습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고 생각이 멈췄습니다. 비현실적인 그 광경에 기쁨보다는 어떤 떨림이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처럼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브리스가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그냥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저는 믿음이 없었던 걸까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 심장이 말을 하니까요.
느닷없이 드라마 공동 집필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마음에 품고 기도했던 일들이 툭 툭 별 일 아니라는 듯 제게로 옵니다.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앉아있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기적을 품고 발을 떼려 합니다.
브리스가님
감사드립니다.
[브리스가의 답장 일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따라 칼럼 후반 부에 자매님 계좌를 적으려 합니다. 얼마가 언제까지 입금이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름병을 준비하는 것이 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실지 짐작이 됩니다. 저도 이런 것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나 은혜를 받았을 때 보답하는 것과 성도들의 감사 표현을 받는 것 또한 교회의 질서임을 배웠고 저도 그 훈련을 받는 중입니다. 받는 것도 훈련입니다. 받을 줄 알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얼굴도 본 적 없는 개인 성도님의 계좌를 적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정말 특별한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한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 성도님들의 참여로 은혜 가운데 모금이 마감되었습니다. 본인의 요청으로 계좌 번호를 닫습니다 2021.4.15 -
독자님들께~
안녕하세요. 브리스가입니다.
뜻하지 않게 연말연시에 맞춰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있으셨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마음일 것입니다.
액수 보다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돕는 손길이 한 분은 아닐 것이기에 모이면 힘이 될 것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칼럼의 링크를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축복의 통로 되신 성도님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녀가 심상치 않다 1] 바로가기
2년 전, 이 고백을 했던 청년과 함께...
"진짜로 하나님이계신다면 정말 다른 인생 살고 연관 없는 브리스가님 고모 통해서 말씀 주려 하시고 저한테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니 뭔가를 전달하고 보여주시고 싶어하는 건 느껴요 그래서 저도 솔직히 너무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두렵지만 제 생각 일반적인 상식 다 내려놓고 미친척 하나님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저한테 고모 브리스가님 통해서 이렇게까지 살리시려는 의도와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살려 주시길 바래요...."
위 모임 리더분의 지원을 받아 또 한 번의 성장을 했습니다.
‘결이고움’과 ‘미모고움’은 자매 브랜드로 ㈜밸류체인에서 기획하였습니다.
2020년 3월경, 필자의 두 번째 저서 '구원의 밸런스' 사전 윤문 과정에 참여할 지원자를 모집했었다.
김유진 기자가 지원했고, 완성된 원고를 본 그녀의 동생이 뜻 밖의 제안을 했다.
"언니, 이거 원고가 너무 탐나는데 우리 대표님께 보여드려도 될까?"
놀랍게도 그녀의 동생이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부터 원고를 받아 본 대표님께서 출판에 대한 투자를 제안했다. 이번엔 마케팅까지 함께 해 줄 수 있는 출판사를 기도했는데 정확히 그러했다. 첫 번째 책에 이어, 두 번째 책 역시 모든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주님께서 방언을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단 한 번, 출판사에서 본게 전부인 이에게 나는 기도중에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운동 중에 주시는 마음이 있어 나는 편집자와 그녀의 언니에게 삼자 통화를 제안했다.
"전화를 끊고 즉시 기도해 보세요. 오늘 밤에도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 시작하자마자 5분 안에 주실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레 전화로 전했던 이 제안을 그녀는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김시온 편집자님이 작성한 간증문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레에르르르르 흘르흘르 레이아레이아레이아…”
방언을 위한 작정 기도를 시작한 지 일 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혀가 나도 모르게 꼬이기 시작했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혀가 떨리는 동시에 양쪽 무릎에 올려 두었던 두 손도 파르르 떨렸다. 손의 떨림 때문이었을까. 앉아 있는데도 다리까지 후들후들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는. 첫사랑의 떨림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주님의 첫사랑을 경험하기까지는 노력의 과정이 필요했고, 나름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먼저 ‘방언’을 위한 집중 기도를 제안하신 분은 브리스가 저자님이셨다. 그전부터 방언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집중 기도를 제안하신 것이다. 그러고는 저자님과 언니와 함께 기도를 했다. ‘시온이에게 방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언니의 선포 기도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저자님의 미세한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아! 오늘이구나…!’
저자님께서는 폭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컨디션이 되지 않으면 다음에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에너지가 넘쳤고, ‘다음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쥐어 짜내서라도 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탄의 첫 번째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거야.’
잠시 숨이 탁 막혔지만, 확신에 찬 가슴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저자님께서는 ‘오늘 터질 수 있다, 5분 안에도 터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아멘’으로 받았다. 저자님과의 전화를 끊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방문을 잠그고 모든 불을 껐다. 컴컴한 방, 더듬거리며 찾은 기도 방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본인 목소리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꽂았다. 그러곤 1시간 27분짜리 찬양 반주를 틀었다.
‘이 찬양이 끝나기 전까진 자리를 뜨지 않겠어. 주님, 함께해 주세요!’
기도할 때 늘 틀어놓던 가사 없는 찬양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느낌 안에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소에 낼 수 있는 소리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힘을 실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레에르르르르…”
혀가 아주 빠르게 떨렸다. 할렐루야를 외치려고 해도 다른 말이 나왔다. 처음 발음해 보는 소리였다. 그러자 사탄이 이번엔 소리쳤다.
‘이건 방언이 아니야! 네가 하는 건 틀렸어!’
하지만 이것이 저자님이 말해 주신 ‘가능성’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의심하지 않고 기도에 집중했다.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 대로,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성령님께 맡겼다. 나의 주장이 아닌 성령님의 주장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않았다. 몸의 떨림도 점차 줄어들고 안정이 되어 갔다.
두 손을 높이 뻗었고 고개가 높이 들리기도 했다. 목소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할렐루야로 시작된 방언이 나도 모르는 말로 끝이 났다. 시간을 보니 1시간 24분이었다. 마지막 3분을 채우기 위해 침묵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제 주님께 더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어! 아, 정말 기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은 ‘나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고 하는 주님의 사랑이었다.
기쁨이 넘쳤고, 어떠한 근심도 없었다. 방언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출판과정 중에도 그녀는 ‘책에서 강한 영향력이 느껴진다'고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제작에 참여한 사람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한 책,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구원의 밸런스’를 통해 많은 영혼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우리는 다툼도 많았지만 따로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유쾌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 ) 이별의...
이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슬픈? 영원한? 기약 없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원식이와 나는 둘만의 회식을 했다. 원식이가 내미는 술잔을 사이다 담은 잔으로 부딪히며 응수하다 보면 어느덧 원식이는 말도 느려지고 발음도 어눌해진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 어떻게 대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따금 고함까지 질러대는 원식이 앞에서 맨정신인 나는 그 민망함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일찍 집에 가려는 나를 원식이는 언제나 간곡하게 끌어안았다.
“준아! 준아! 따악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응? 진짜 마지막.”
“피곤해. 가서 잘 거야.”
“이 새끼는 제일 건강한 놈이 맨날 피곤하데...”
원식이의 부탁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절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행동을 후회한다.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에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때로는 나 역시 그런 감정을 경험하며 원식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젠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혼자라는 외로움, 각종 우울한 감정이 업무에 대한 집중이 해제되는 순간 그를 엄습해 왔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간곡히 붙잡던 원식이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곤 했다.
사실 나는 원식이의 모든 면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술, 담배, 매출이 안정되자 약속을 어기고 교회에 출석을 안 하는 모습...
“또 노래방 가서 도우미 불렀어?”
“당근이지. 우리끼리 무슨 재미냐.”
“이제는 노래도 혼자 못 불러서 다른 사람 도움을 받냐?”
나는 원식이에게 그리스도인들조차 버거워할 신앙적 완벽을 기대했고 원식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나를 불편해했다. 나는 원식이에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사업 파트너일 뿐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교정을 강요하는 불편한 잔소리꾼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렸을 땐 그토록 함께 붙어 다녔던 우리,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매출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둘만의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원식이가 뜻밖의 고백을 털어놓았다. 원식이는 술을 마시면 진실을 말한다.
“준아, 미안해. 나 용서해 주라.”
“뭔데?”
“용서해 준다고 말하면 이야기할게.”
“그래. 용서할게”
원식이는 나 모르게 다른 곳에 동일한 사업체를 하나 더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 상품과 동일한 제품의 사진을 배경만 바꿔서 따로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식이는 술기운이 더해진 탓인지 꺼이꺼이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준아, 진짜 미안해. 아무도 나 신경 안 써줄 때, 너만 날 도와줬는데, 미안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 이번에 다 정리할게. 그리고 다시는 안 그럴게.”
‘주님,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하게 해주세요.’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찰나의 시간, 주님을 의지하며 본능처럼 내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식아, 너랑 나랑 사업하려고 만난 거 아니잖아. 우린 친구로 만난 거니까 일 때문에 친구를 잃지는 말자. 너도 생각 많이 하고 결정한 걸 테니 이번에 정리하고 와도 계속 같은 생각이 들 거야. 그러면 결국 다투고 헤어지겠지.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몇 차례 원식이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원식이를 설득해 사업을 정리하는 최종 결산을 했다. 우리는 평소처럼 웃으며 헤어졌고 몇 번인가 전화로 안부도 주고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식이의 휴대폰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 원식이 전화번호가 바뀌었네요.”
“아유! 그러게 원식이가 연락이 안 된다.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정도로 아팠었는데, 그러다가 아버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럴까.”
무슨 일인지 원식이는 수시로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했다. 원식이의 새어머니는 오히려 나에게 원식이에게 연락이 오면 집으로 전화를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잠깐 잊으면 훌쩍 흘러가는 시간, 원식이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준아, 혹시 원식이 전화번호 알고 있니?”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더 원식이와 연락이 되느냐는 전화가 걸려왔었다. 당연히 언젠가 연락이 닿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몇 년 후 그의 집 전화번호마저 없어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아직도 이렇게 허무하게 소식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고교시절,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안양에서 청량리로 이사를 한 나는 혼자 옥탑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준아!”
수백 번도 넘게 들어서 익숙한 음성, 그러나 원식이일리 없었다.
“준아!”
문을 열자 원식이가 붕어빵을 들고 서 있었다. 추운 겨울 그다지 따뜻하지 않던 교복 코트,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식은 붕어빵을 들고 있던 원식이의 모습이 생생하다. 군포에서 청량리에 있는 우리 집까지 고등학생 원식이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 가며 혼자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왔어?”
“이 형님이 너 심심할까봐 위로해주려고 왔지.”
그렇게 원식이는 내가 새로운 집에 적응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붕어빵을 들고 찾아와 주었다. 삶의 각박한 기억에 덮여서 잊고 지냈지만 생각하면 소중했던 내 어린 기억의 일부.
나는 전도자의 나쁜 예, 전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은 삼가야 하는지 가장 소중한 친구를 희생시키며 배웠다. 원식이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죄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꼈고, 원식이는 예전처럼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를 바꾸려 했다.
지금의 내가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바람직하지 못한 시도들, 내가 다른 성도들에게 삼갈 것을 당부하는 모든 행동을 나는 원식이에게 했다.
“준아! 준아!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응? 진짜 마지막이야.”
외롭고 힘들었을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한 시간이 아쉬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제대 후 마땅히 일할 곳이 없던 나는, 친구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원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식이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다.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잠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애편지를 부탁하며 웃던 스스럼 없던 친구. 베스트 프랜이 누구냐는 남들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 없이 서로를 지목하던 그런 친구였다.
원식이는, 아버지와 이혼 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본인 역시 몇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승승장구 중이었다. 당시 친구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해외무역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당연히 원식이에게 전화하면 일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원식아, 나도 같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
“네가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까짓 게 무얼 하겠냐는 빈정거림이었다.
“아... 그래? 알겠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고 원식이는 굳이 나를 잡지 않았다.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던 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하게 된다는 그 말을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혹시라도 내 자신이 힘들다고 다시 원식이에게 전화하지 못하도록 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지웠다.
“아빠, 원식이네는 예수님도 안 믿는데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아요?”
비가 오면 물이 새 들어오던 녹슨 트럭 안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준아,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아버지의 말은 어린 청년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다섯 식구 다 합쳐도 100만원이 되지 않던 우리 집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하기 시작할 무렵, 원식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몰라보게 마르고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그간의 시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면 열심히 교회 다닐게요. 요즘 이렇게 기도했었는데,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네 전화번호가 생각났어.”
전화기를 분실해서 나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던 원식이는 내 전화번호가 생각난 것을 나름의 응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원식이는 엄마의 사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했다. 신용까지 엉망이 되어 그의 명의로는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보름 정도의 수감생활까지 했다고 했다.
원식이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어 술에 취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종점에 도착하면 다른 버스에 올라타 또 다른 종점으로...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으로 아무 데서나 내리고, 아무 데서 잠이 들다 정신이 들면 2~3일이 지나 있었다고 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덜컥 겁이 났던 원식이는 온전한 정신이 들 때마다 나와 함께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원식이가 나에게 찾아왔던 그 무렵, 나는 신사동과 방배동에 집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처럼 좋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골집에 더부살이 하던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식이와 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원식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진행된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새어머니와 살고 있던 원식이의 아버지는 원식에게 사업하지 말고 직장을 다니라고 하셨다. 친어머니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큰 다툼이 있어 당분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집에도 어머니의 집에도 머물 수 없던 원식이는 혼자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힘들면 가족이 함께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가족들을 두고 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러 온 그 이유를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갑자기 비가 새던 그 녹슨 트럭 안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도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려 할 때마다, 그때 그 장면이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제대 후 마땅히 일할 곳이 없던 나는, 친구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원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식이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다.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잠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연애편지를 부탁하며 웃던 스스럼 없던 친구. 베스트 프랜이 누구냐는 남들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 없이 서로를 지목하던 그런 친구였다.
원식이는, 아버지와 이혼 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본인 역시 몇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승승장구 중이었다. 당시 친구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해외무역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당연히 원식이에게 전화하면 일할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
“원식아, 나도 같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
“네가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까짓 게 무얼 하겠냐는 빈정거림이었다.
“아... 그래? 알겠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얼른 전화를 끊었고 원식이는 굳이 나를 잡지 않았다.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던 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하게 된다는 그 말을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혹시라도 내 자신이 힘들다고 다시 원식이에게 전화하지 못하도록 그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지웠다.
“아빠, 원식이네는 예수님도 안 믿는데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아요?”
비가 오면 물이 새 들어오던 녹슨 트럭 안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준아,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아버지의 말은 어린 청년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다섯 식구 다 합쳐도 100만원이 되지 않던 우리 집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하기 시작할 무렵, 원식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몰라보게 마르고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그간의 시련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면 열심히 교회 다닐게요. 요즘 이렇게 기도했었는데,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네 전화번호가 생각났어.”
전화기를 분실해서 나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던 원식이는 내 전화번호가 생각난 것을 나름의 응답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원식이는 엄마의 사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지게 되었다고 했다. 신용까지 엉망이 되어 그의 명의로는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보름 정도의 수감생활까지 했다고 했다.
원식이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을 찾아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어 술에 취해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종점에 도착하면 다른 버스에 올라타 또 다른 종점으로...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으로 아무 데서나 내리고, 아무 데서 잠이 들다 정신이 들면 2~3일이 지나 있었다고 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덜컥 겁이 났던 원식이는 온전한 정신이 들 때마다 나와 함께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원식이가 나에게 찾아왔던 그 무렵, 나는 신사동과 방배동에 집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처럼 좋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골집에 더부살이 하던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식이와 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원식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진행된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새어머니와 살고 있던 원식이의 아버지는 원식에게 사업하지 말고 직장을 다니라고 하셨다. 친어머니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큰 다툼이 있어 당분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집에도 어머니의 집에도 머물 수 없던 원식이는 혼자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힘들면 가족이 함께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가족들을 두고 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러 온 그 이유를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다.
“인생이 굉장히 길거든.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어.”
갑자기 비가 새던 그 녹슨 트럭 안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도 가끔, 바쁘다는 핑계로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려 할 때마다, 그때 그 장면이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원식이와 나는 그가 해 왔던 사업 분야 중 자본이 최소로 들어가는 온라인 의류 판매를 시작했다. 기대 이상으로 판매가 잘 되었다. 모든 판매자가 동대문에서 똑같은 옷을 받아다가 사진만 다르게 찍어서 올리는 건데 압도적으로 우리 물건이 잘 팔렸다.
나는 원식이의 촬영, 포토샵 실력을 극찬했다. 원식이는 더욱 신바람이 나서 업무에 열중했다. 나중에 그가 말해줘서 안 사실인데 원식이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했었고 온라인은 직원들을 썼었다고 했다. 촬영과 포토샵 모두 막 배운 초보자를 조금 넘어서는 상태였던 것이다. 원식이는 술만 마시면 진실을 말하는 습관이 있다.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잘 될 줄 몰랐어. 너랑 같이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봐.”
택배 마감까지는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촬영, 포토샵, 택배 포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따금 새벽시장까지 가야 했다. 밥도 먹지 않고 쉴 새 없이 피워대는 담배 때문에 원식이의 검은 얼굴이 더 시커멓게 보였다. 공복 상태는 사소한 것으로도 말다툼을 하게 할 만큼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원식이는 말끝마다 욕을 섞기 시작했다.
“원식아, 욕 좀 하지마라. 엄청 거슬린다.”
참으로 이상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 간에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일상 언어가 주님을 만난 뒤로 견딜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욕하지 말라고! 한 번만 더하면 나도 욕한다.”
거듭되는 요청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이 삼시세끼야, 내가 욕하지 말랬지. 누구는 욕을 못해서 안 하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원식이도 놀라고 나도 놀랬다. 그러고 보니 항상 끼고 살던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었다. 매일 가던 새벽기도는 당연히 안 갔고 수요, 금요 예배는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주일 예배만 간신히 참석하고 평일 날은 완전히 주님을 잊고 지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은 영적 패배감에 크게 낙심했다. 나는 원식이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내 모습을 보여 본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가 꽤 거룩하게 변화되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주님, 정말 죄송해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예전의 거친 성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품목당 100개, 200개씩 나가던 제품의 주문량이 2개, 5개 한 자릿수 미만으로 떨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고 아무리 찾아봐도 특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준아, 나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 좀 해줘.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아.”
하루가 끝나갈 무렵, 원식이는 예전에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여자가 있는 술집에 다녀온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함께 회개 기도를 드린 다음 날부터 신기하게도 다시 매출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한참 후 또다시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식아, 너 또 그런데 갔냐?”
그는 이번에도 순순히 죄를 실토했다. 원식이의 표정이 제법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인생 채찍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켜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이 지경이 돼서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 어떤 인도하심이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최후를 운전하는 내내 끊임없이 쏟아 내었다.
원식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과하리만큼 영적 존재를 무서워했다. 한 번은, 불 꺼진 집에서 옷 샘플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가 들어오는 원식이를 놀래킨 적이 있다. 나는 그날 귀신에게 놀란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한때, 원식이는 인터넷으로 사주팔자를 보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원식아, 너 그러다가 귀신 붙는다. 원래 귀신들은 자기 얘기하면 찾아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대. 그러다가 갑자기 쑥 들어와서 빙의 되는 거래.”
“진짜? 사실 나 요즘 공부하는데 자꾸 베란다 쪽 위에서 누가 날 내려다보는 것 같아.”
“벌써 찾아왔네.”
“어우, 무서워! 하지 마.”
“네가 자꾸 점보니까 처녀 귀신들한테 소문났나보다.”
주섬주섬, 그는 품안에서 투명 PVC재질로 싸여진 빨간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야?”
“부적이야, 엄마가 줬어.”
“태워.”
“엄청 비싼 거래”
“그러면 품에 꼭 지니고 있어. 그럼 어디든 그 부적에 붙은 귀신이 널 따라다닐 거야.”
“대신 태워줘.”
나는 원식이에게 부적과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였다.
제대 후, 처음으로 선택한 직업은 조리사였다.
취사병이었던 내겐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으나 주방일은 업무의 특성상 수요, 금요예배는 물론 주일예배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 식당이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뿐 아니라 주일성수까지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빠르게 응답 되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무턱대고 큰 돈 달라는 기도 말고는 참 잘 들어주신다. 당시 필자의 아버지는 친척분의 도움으로 주말농장을 운영하셨는데, 회원 중에 한 분이 프랜차이즈 분식집의 가맹점주였던 것이다.
“대표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마, 본사에서 근무하면 일요일은 쉴 수 있을 겁니다.”
놀랍게도 대표님은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부평에서 운영하던 본점의 성공을 롤 모델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었는데, 필자가 입사할 당시에는 이미 한참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을 경험하며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주님의 각별한 배려하심 속에서 나는 주일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늦게 끝나는 업무의 특성 때문에 수요, 금요 예배는 드릴 수 없었다. 그래도 감사했다. 사실 식당일을 하면서 그것까지 바라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12시간, 대부분 서서 일해야 하는 업무여서 다리가 많이 아프고 피곤 했지만 그래도 새벽기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토록 열심히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기도했던 제목은 ‘무너진 우리 집안의 경제회복’이었다. 당시 필자의 집은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인해 다섯 식구 합친 돈이 1백 만원도 되지 않을 만큼 가난했었다. 가락시장 상인들이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한, 팔다 남은 야채를 얻어다 먹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작은 아버지의 장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부도직후,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는 다시 함께 모여 사는 것이 기도제목이었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된 후부터는 우리만의 집을 갖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다.
‘아, 이렇게 벌어서 언제 집을 사지?’
조바심에 마음이 착잡해질 때면 설교시간에 들었던 대로 감사를 실천했다. 억지로라도 감사를 실천하면 어째서인지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때, 기도의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터널의 끝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니 터널의 끝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어떻게 내가 그 삶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다시 돌아간다면 그 때처럼 견딜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터널이 어둡다고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절대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밝은 빛, 긍정, 희망, 소망의 감정을 붙들고 가야만 그것을 놓지 않아야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던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영의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감사로 연명했었기에 주저앉지 않고 터널의 끝을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매끼 3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던 나에게 식당 주방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양배추 한 통을 5분 안에 조지는 애’
직원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본인들끼리 초시계로 시간을 재며 5분 안에 양배추 슬라이스를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일 잘한다고 승진도 빨리 시켜 주셔서 송내역 앞에 위치한 가장 큰 지점을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듣기로는 최 단기간 주방장이 된 케이스라고 했다. 군대에서 취득한 한식조리사 자격증 도움도 컸다.
그렇게 근심 걱정 없던 어느 날, 신앙생활에 위기가 찾아 왔다. 대표님과 오랜 친분이 있는 사람이 회사의 임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는데 나만 일요일에 쉬는 것은 불공평하며 업무에도 지장이 있으니 주일날도 출근을 하라는 것이었다.
“저는 그런 조건으로 여기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됐고, 나오던지 그만 두던지 알아서 해.”
집으로 돌아오던 길, 하루 종일 교회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뻐 들뜨던 토요일이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당연히 나는 교회를 택했다. 주일 예배를 다 드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기도를 드렸다. 아니, 기도라기보다는 하소연이었다.
“하나님, 저는 친구들도 못 만나고, 영화도 안 보고, 텔레비전도 안 보고,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이제는 교회도 못 가나요? 이럴 바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곳에서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저를 데려가주세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만큼 아버지가 아프실 때, 병원조차 모시고 갈 수 없는 형편에도 눈물은 없었다. 어머니가 들통에 수제비를 담아서 동대문시장 상인들에게 팔러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고, 누나가 사촌 누나에게 “우리 엄마 돈 갚으라고” 안경이 휘어지도록 맞고 왔을 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울며 기도하고 있을 때, 회사 대표님이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교회로 걸려왔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대표님께 내가 처한 상황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 만난 대표님은 나에게 큰 시련을 선사한 그 임원과 함께였다.
“야! 가서 커피 좀 뽑아와.”
임원을 향해 내 뱉는 대표님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커피를 뽑...”
“알아서 뽑아와!”
귀찮은 듯 던지는 대표님의 말에 임원은 기어이 그 추운 겨울날, 커피 심부름을 나갔다. 쌀쌀맞다 못해 위협적으로 임원을 대하던 대표님이 내게는 그 큰 체구로 부담스러울 만큼의 자상함을 보이셨다.
“아유아유, 우리 김실장 고생 많았지? 앉어 앉어.”
커피심부름을 시키려고 임원을 데리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께서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에게 직접 보여 주시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엇이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인연보다 나를 더 배려하도록 만들었을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 식은 커피를 들고 임원이 도착하자 대표님은 내게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와 금요예배도 참석하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귀가 먹먹해지면서 평온함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수요예배도, 금요예배도 가게 해달라고 했잖니.’
성남에서 감자탕 집을 크게 하신다는 소식을 끝으로 대표님과의 연락은 끊겼다. 살면서 한 번씩 대표님이 보고 싶다.
“부평에서 그린필드 운영하셨던 대표님, 그 땐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제대로 된 인사조차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배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가족에게는 추석 명절만 다가오면 떠오르는 악몽과도 같았던 사건이 있다.
2010년 한가위, 나는 지옥을 경험했다. 작은 어머니 송옥순 여사가 분당 재생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장이 정지 되어 있었다. 응급침상에 축 늘어진 그녀의 옷은 분비물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처절함 때문에 내 머릿속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무료로 놔 주시던 벌침을 진작에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작은 어머니가 무릎에 벌침을 맞고 쇼크로 쓰러지신 것이다. 원망과 책임이 영원히 엉겨 붙어 따라다닐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죽음이 분비물처럼 우리 가족에게 졸아붙는 것 같았다.
“탈칵 탈칵 탈칵”
곧바로 멈춘 심장을 마사지 하는 펌프질이 시작되었다. 요란한 기계음이 응급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자리에 있던 작은 어머니의 둘째 아들 진만이는 누워서 엄마를 부르며 오열하기 시작했고 작은 아버지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용히 나의 어머니가 나와 누나, 동생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기도해라.”
그러더니, 작은 어머니를 눕혀 놓은 침대 근처에 서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곧이어 누나, 동생, 아버지 한 명씩 기도를 시작했고 나 역시 선반모서리에 의지해서 허리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하나님 작은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기도를 시작하자 비로써 정신이 들면서 심각한 현실이 하나하나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실 치사라는 거구나.’
살려달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장이 꼬이는 것처럼 아팠다.
‘아, 이래서 예수님이 기도하다가 땀방울이 핏 방울처럼 돼서 흐르셨다고 했구나.’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고 나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힘든 기도를 중단하고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마다 진만이의 울부짖는 소리와 몸부림치는 모습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이미 일반적인 기기사용 시간은 많이 경과한 상태다.’
‘이 정도 시간동안 했는데도 못 일어나면 거의 가망이 없다.’
‘심장 박동이 돌아와도 심정지 5분이 지나서 왔다면 뇌사일 확률이 높다.’
‘기기의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져서 장기에 출혈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장박동이 돌아온다 해도 이로 인한 감염으로 사망하실 수도 있다.’
이따금씩 의료진들과 다른 가족들이 하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들려왔다.
“사람들 하는 말, 전부 무시하고 그냥 기도해라.”
그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이제 그만 덮어. 그만 하고 덮어.”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의료진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작은 어머니의 심장박동이 돌아 온 것이다. 어머니의 눈가에는 진한 황 녹색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분명 일반적인 시술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끝까지 펌프를 중단하지 않았던 분께 너무나 감사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장해 주신 것이겠지만, 그 분은 그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면 궁금해지곤 한다.
그 분도 기독교인이어서 그랬을까?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애절해보여서 차마 중단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다 큰 성인이 몸부림치며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그냥 일반적인 관례대로 평소 하던 시간만큼만 했었더라면 이제는 저토록 건강한 작은 어머니가 싸늘한 주검이 될 뻔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작은 어머니는 맥박은 돌아 왔지만 의식이 없었다. 스스로 호흡도 할 수 없어 호흡기를 착용했다. 의료진들은 뇌사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단지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뇌사, 드라마에서 호흡기를 착용하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 상태 말인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천문학적으로 발생할 것 같은 치료비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우리 가족의 앞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우리는 의료진들이 너무도 냉정하게 아니, 오히려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얘기만 하는 것 같아 몹시 야속했다. 진만이는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떡해, 우리 엄마 어떻게 할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게 살아서 뭐해. 나도 같이 죽어야지. 저 사람 잘못 되면 나도 같이 죽어야지.”
작은 아버지 역시 깊은 상심을 감추지 못하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 아침, 나와 누나, 동생 세 사람은 따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는 진만이와 두 달 후 결혼 할 신부될 사람이 와 있었다. 우리는 짧은 면회를 마치고 병원 근처 벤치에 앉았다.
“작은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해지셔서 진만이 결혼식장에 들어오시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먼저 누나가 기도제목을 냈다. 우리는 마치 여리고성을 공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병원 주변을 걸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했지만 우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우울 했고 낙심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만, 응답 받으려면 믿어야하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이런 마음 상태로 기도하면 안 돼.”
나는 누나와 동생에게 기도의 방법을 제안했다.
‘우울한 마음이 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자. 작은 어머니가 건강하게 일어나서 진만이 결혼식장에 들어오는 밝고 긍정적인 상황만 상상하며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패혈증에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 뇌사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지 말고 건강하게 해주세요. 의식을 차리고 깨어나게 해주세요처럼 긍정적 어휘를 사용하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이렇게 침울하게 있으면 안 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의 제안을 진지하게 실천했다.
“후유증 없이, 아, 맞다. 이런 말 쓰지 말랬지. 건강하게 일어나셨으면 좋겠다.”
우리 셋은 일점일획의 부정적 단어도 사용하지 않을 만큼 긍정으로 똘똘 뭉쳐 합심으로 기도했다. 그 때, 우리로선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저녁 무렵 작은 어머니가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무런 후유증 없이 퇴원한 작은 어머니는 지극히 건강한 몸으로 둘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보나마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우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끔 그런 일들이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나지 않더냐고... 그러나 기도 응답은 응답을 받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위기에 빠진 자신의 자녀들을 구하러 오신 전능자를 느꼈다.
사탄의 덫에 붙잡혀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할 위기에 빠진 우리를 구하기 위해 홍해를 가르고, 전쟁터에서 적들을 궤멸시키시며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던지시던 그 분께서 친히 역사하셨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여운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하나님을 더디 응답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오래오래 기도해야 응답하시고 한참 많이 기도해야 간신히 응답해 주시는...
그러나 나는 그날, 자녀의 위험 앞에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너무도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사탄을 꾸짖으며 소리치시는 분노의 불꽃을 보았다. 자신의 자녀를 감싸 안으시는 자상한 손길을 느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힘’을 통해 죽었던 생명을 살리시고, 우리 가족을 크나 큰 곤란가운데서 건져주셨던 그 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즘도 이렇게 부르시는 경우가 있구나.”
처음 그녀의 간증을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그러했다. 말씀중심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영적체험을 지나치게 터부시하다가 결국은 영적체험을 모조리 죄악시하는 분위기에까지 이르게 된 이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영적체험을 담은 신앙간증이 희소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목회자들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영적체험이 없으니 기도하지 않게 된 것일까? 아니면 기도하지 않았으니 영적체험이 없게 된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사활을 걸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사도행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녀가 경험한 영적체험 몇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급하게 200만원이 필요했는데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었어요. 그 때, 민원장님께 전화가 걸려 왔어요.”
"기도하고 있는데 자꾸만 당신에게 200만원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주신다. 혹시 200만원이 필요한가요?"
민원장님의 배려로 급한 불을 끈 그녀.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300만원이 없어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번에도 민원장님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또 한 번 전율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 되었다.
물론 그녀는 아무에게도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녀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민원장님은 필요한 돈의 액수까지 정확히 말하며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이번에 필요한 돈은 3000만원, 어김없이 민원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젠 민원장님도 자신의 영적인 촉(?)에 확신이 생겼는지 웃으며 말했다.
“어! 이번엔 금액이 좀 큰데...”
필자 또한 민원장님을 알고 있다. 틈만 나면 성경을 읽는 그녀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평소 환상을 보거나 예언기도를 하거나 받으러 다니는 분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체험이 민원장님을 통해 일어났을까?
그녀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현수막을 보고 찾아 온 손님 중에 하나였던 그녀를 전도하기 위해 민원장님은 5년이 넘는 기간을 기도했다. ‘기도할게요’ 말만하지 않고 진짜로 기도했더니 진짜로 응답 주셨다. 그녀를 교회로 인도할 수 있도록 영권을 부어주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의 변화를 거쳐 교회로 향하게 되었다.
첫째 아무래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
둘째 민원장님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인도자인 것 같다.
어떻게 혈연도 아닌 타인을 위해 5년이 넘는 시간을 기도할 수 있었을까.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될 당시, 민원장님 또한 인생의 어둔 터널 속을 지나고 있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살려 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오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 말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했을까. 기도했다.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 아니던가.
누구나 끊임없이 기도하다보면 주님께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만난 민원장님의 눈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 그녀가 들어왔다. 민원장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녀를 전도하기 위해 기도했다. 그러자 주님께선 민원장님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민원장님이 기도했으니 민원장님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민원장님은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바라보면서 기도심지에 불이 붙고 말았다.
“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네.”
자신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눈앞에서 목격한 민원장님은 마침내 ‘그 힘’에 눈을 뜨게 된다. 민원장님은 불과 몇 년 만에 채무를 갚고 14억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다. 돈도 빌려주시는 하나님이 돈은 안 갚아 주시겠는가.
성도들이 기도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은 흡사 성냥이 켜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막 켜진 성냥이 제일 환한 것처럼, 지금 막 기도의 심지에 불이 붙은 성도들은 주변을 압도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한다. 그 모습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구절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다.
어느 날, 민원장이라는 성냥이 켜졌고 그 작은 불꽃 하나가 신집사라는 성냥에 옮겨 붙었다.
막 켜진 성냥의 특성은 첫째 세상 것에 대한 배타성이다. 재밌어 죽겠던 드라마와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저 그렇게 느껴지며, 자연스럽게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둘째 주님 것에 대한 수용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건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 결과 타인의 신앙체험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루트를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며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사람의 성품만큼이나 다양하다.
아직 켜지지 않은 성냥들은 정확히 반대로 행동한다. 여전히 세상에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신앙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든다.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말씀사경회에서는 영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축복에 대해 나누는 자리에선 고난을,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선 축복의 하나님을 언급한다.
본인 입장에선 밸런스를 맞추려는 시도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실상은 분위기파악못하고 이의제기와 반론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교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들이 주님의 뜻 가운데서 행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불편함’이다. 그로 인해 발제자와 주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20절)
어째서 그녀에게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 주어지느냐고 묻는다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3년이 조금 넘는 예배 사수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오로지 기도로서 말이다. 그것은 진로나 금전문제 일수도 있고 가족들의 구원일 수도 있다. 절대로 재정적인 어려움에는 처할 수 없을 만큼 돈 많은 부잣집 딸도, 승승장구 중인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도 각자 자신만의 기도제목을 들고서 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터널 반대편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돈 많은 이들의 인생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부족한 것이 없어 기도하지 않았더니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자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영적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본인은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억울합니다. 저는 분명 기도했단 말이에요.”
형식적으로 주절거리는 식사기도만으로 그 터널을 돌파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생일대의 기도제목이 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살려 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오는 기도의 제목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본인의 심령이 가난한 줄도 모르는 이들은 애통하는 심정으로 기도할 수 없다. 그런 심정으로 기도해 본 경험이 없다면, 그렇게 끝까지 기도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통상적으로 그 터널을 통과하는데 소요 되는 기간은, 새벽기도를 포함하여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 기준으로 1년 이상 소요 되는 듯하다.
그 터널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적 특징은 고립감, 아무리 불러도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 아닌가 따위의 초보적인 신앙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가끔 응답도 주시곤 하지만 그 응답이 삶을 변화시킬 만큼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다. 이를 테면, 기도 했더니 ‘아픈 손목이 깨끗이 나았다. 비가 그쳤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주고 갔다.’ 와 같은 소소한 것들 말이다.
그렇게 1년 이상을 감내하여 마침내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되면,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터널 속에서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늘 주님이 함께 계셨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막 켜진 성냥의 시대가 도래한다.
엘리야 때처럼 기적도 선포된다. 이번엔 혼자만의 소소한 간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을만한, 누가 들어도 기적이라 할 만한 규모의 응답들이 시작된다. 기도하는 예배자의 성냥은 언젠가 반드시 켜지기 마련이다.
[ 오픈 특가 : 피부관리 1회 2만원 ]
수업사이의 공백에 사우나를 가려던 그녀는 현수막에 이끌려 피부관리실의 문을 밀었다. 그녀는 현수막에 숨겨진 주님의 초대장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전 영어과외를 해요.”
“그럼 저는 선생님을 관리 해드릴 테니 선생님께선 제 아들을 가르쳐주시겠어요?”
그렇게 21세기형 물물교환이 시작되었다. 민원장님의 사업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이 꿈은 훗날 그녀로 하여금 바랄 수 없던 중에도 기도하게 만드는 숙명의 기도제목이 된다.
그녀의 삶에 위기가 찾아 왔다. 그녀는 민원장님의 피부관리실에서 알게 된 한 독실한(?) 불교신자에게 자기도 절에 같이 데려가 달라고 요청을 했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을 만큼 당시 그녀는 절박했었다.
다행히 그 불교 신자와 그녀 모두 민원장님 손에 이끌리어, 아니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후일, 불교신자였던 분은 김포에 있는 한 교회에서 권사님이 된다. 주님께선 이 권사님을 통해서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복선을 장치해 두셨다. 일단 권사님 앞에 책갈피를 하고 다시 그녀의 스토리로 넘어가보자.
민원장님은 그녀를 전도하기위해 5년이 넘는 기간을 중보했다. 그 결과, 그녀와 민원장님 사이에 사도행전적인 기적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영적체험의 반복으로 인해 그녀는 교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민원장님과 함께 반포 남서울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된다.
그녀는 거기서 구역장 오집사님을 만났다. 이따금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는 용도로 ‘기도해 봅시다’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구역장님은 그녀를 피상적으로 돕지 않았다. 대체로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서는 적극적인 실천이 동반되는데 주님께서는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실천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정황상 그녀의 구역장 오집사님은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었던 것 같다. 오집사님의 실천을 주님은 어떻게 사용하셨을까.
그녀의 구역장님은 피부관리사를 꿈꾸는 그녀에게 직접 손님이 되어 주었고 다른 손님들도 소개시켜 주었다. 뭐라고 소개를 했는지, 소개를 받은 손님들 또한 다른 손님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이 소개 가운데 그녀의 삶에 큰 힘이 되어 줄 또 한 명의 은인, 박권사님을 만나게 된다. 일련의 과정속에서 그녀는 또 한 번 확신을 갖게 되었다.
‘피부관리, 잘 만하면 정말 좋은 아이템이구나.’
‘난 정말 손 기술이 없구나.’
그녀의 삶은 더욱 악화가 되어 공황증상으로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민원장님은 방배동 지하에 있는 조그만 개척교회를 소개시켜 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새벽기도 삼일만 나가봐”
그녀는 그곳에서 인자한 할머니 이 목사님을 만났다. 이 목사님은 그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관련된 성경구절만 찾아서 읽어 주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아무 힘이 없어요. 말씀이 능력이에요.”
필자도 그 프로그램(?)을 알고 있다. ‘예수보혈’로 시작해서 ‘예수보혈’로 끝나는 그 성구읽기는 한 마디로... 쉽지... 않다. 조용조용하게 일정한 톤으로 성경을 읽어주시면 그야말로 잠이 솔솔 온다. 눈은 천근만근인데 앞에서 읽어주시는 목사님 성의를 봐서 졸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가끔은 목사님 본인도 함께 졸고 계신다는 것.
놀랍게도 이 졸린, 아니 능력의 성경읽기로 몇 사람의 심령이 회복 되었는지 모른다. 심령의 회복은 곧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먼저 그 교회의 성도인 송집사님, 김집사님 부부가 있다. 가정 경제 파탄의 원인을 모두가 김집사님의 남편에게만 돌리며 이혼을 권유하던 때에 당시 두 부부가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였던 이전도사님이 말했다.
“가족은 위기가 왔을 때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돕는 것이잖아요. 지금까지는 남편이 가족을 위해 일했으니 이젠 남편을 위해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나 기도해 보세요.”
김집사님은 집 앞 골목에서 떡볶이 노점을 열었고 이전도사님은 기꺼이 단골손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김집사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집사님의 가족은 살던 집에서 내쫓겨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집사님은 당시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기도해 봅시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김집사님은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다.
“기도해 봅시다.”
김집사님은 이전도사님과도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기도해 보자는 답변이었다.
며칠 후, 김집사님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트럭이 이전도사님을 들이 받고 운전사가 차만 놔두고 도망을 친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그러나 다행히도 전도사님은 곧 의식을 되찾았다. 1개월 넘도록 입원해 있던 전도사님은 퇴원 후 가장 먼저 김집사님을 찾았다.
“집사님,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었어요.”
전도사님은 1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보상금으로 받은 160만원에서 헌금을 제하고 남은 돈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녀는 전도사님 가족이 사업부도로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지금은 간신히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전도사님이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피 값을 그녀에게 내민 것이다. 한사코 거부하는 김집사님에게 전도사님은 말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야.”
김집사님 부부는 그 돈을 보증금으로 단칸 월세 방을 얻어 새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도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 두 부부는 기꺼이 첫 번째 성도가 되어 주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된 김집사님은 당시의 채무를 갚고 서울 방배동에 본인 명의의 집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그녀에게 이목사님을 소개한 민원장님 또한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다. 경제 및 가정의 어려움으로 심신마저 붕괴되어 버린 민원장님은 성경읽기와 기도를 통해 심신의 회복을 거쳐 무너졌던 가정과 경제를 회복시켰다. 불과 몇 년 만에 채무를 해결하고 지금은 14억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다.
교수, 학생, 자영업자, 샐러리맨, 부자와 가난한 자 다양한 사람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회복을 받고 자신들의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 남겨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생활보호 대상자, 차상위계층 뿐이었다. 덕분에 목사님 부부는 20년 목회생활 동안 단 한 번도 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급여는커녕 자녀들이 보내온 헌금과 용돈, 남편이 농사지어 번 몇 푼 안 되는 돈까지 모두 목회에 쏟아 붓고도 모자라 가족들 모르게 대출까지 받았다.
그런 가난한 교회에 그녀, 지금의 신집사님이 오게 된 것이다. 3일만 참석해 보려던 그녀의 발걸음은 결국 3년이 되었다. 그녀와 목사님, 두 사람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말씀을 읽었다.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노숙자였던 최성도님의 자립을 돕다가 목사님의 팔이 심하게 부서져 버린 것이다. 최성도님에게 스스로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위해 추운 겨울날 함께 박스를 줍다가 미끄러져 벌어진 일이다. 말씀 읽기가 당연히 중단 될 줄 알았는데 목사님은 팔에 기브스를 하고 변함없이 그녀와 함께 했다.
그렇게 말씀을 들으며 그녀도, 그녀의 삶도 함께 변해갔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예배시간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 금요, 새벽예배까지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예배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배자의 기도가 응답되기 시작했다.
요즘 그녀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그녀의 건강과 외모까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직업의 특성상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남을 돌볼 수 없는 그녀, 지인들은 볼 때마다 그녀의 빠른 외모변화에 놀라움을 표할 정도다. 아무래도 그녀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형통해져가는 듯하다.
그녀는 이따금 '돌보지 못해 엉망이 되어 가던 본인의 건강까지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곤 한다. 새삼 느낀다. 하나님의 자상함 속에는 전능자답지 않은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촘촘한 장치들로 구성된 이 축복의 메커니즘에서 하나의 벽돌을 빼면 지금의 결과 값은 나오지 않는다. 마치 성경에서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장구한 세월 속에서 놀랍도록 맞아 떨어져가고 있는 오늘 날의 모습처럼, 그녀의 삶도 그렇게 예수 십자가의 기.승.전 그리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녀의 시선이 홍보 현수막을 향하던 때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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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주님의 초대장은 누구 앞에나 펼쳐져 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사람들은 대체로 응답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될 때 기도를 시작한다. 아예 응답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는 기도자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라도 대통령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어떤가.
“선교하게 현금 1조를 주세요.”
나름 거룩한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그래도 역시 진지하게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루어질만한 가능성이 보일 때 기도하기 시작한다.
신 집사님의 기도제목은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창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첫째, 피부관리실을 창업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없다.
둘째, 창업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낮에는 영어과외, 밤에는 맥도날드 알바를 하는 그녀는 피부 관리실을 오픈한다 해도 손님이 어느 정도 차서 임대료 등을 부담하고 수입을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소득의 공백을 견딜 수 있는 여유가 없다. 누군가 대신 오픈준비를 해주지 않는 이상 그녀의 창업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셋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손맛이 없다. 다시 말해 손기술이 없다.
손맛이 얼마나 없는지 교회 식구들이 손님까지 소개시켜 주며 그녀를 전적으로 도와주려 했었지만 재구매가 일어나지 않아 결국 중도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창업을 하려고 한다. 오픈할 수 있을까. 오픈해도 망하지 않고 잘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기도 중에 집사님이 자꾸 생각이 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싶어서 일단 여쭤보러 왔습니다. 저희 기도팀원에게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기도부탁을 하고 왔습니다.”
그녀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 아들 K였다. 그녀는 K와 안면정도만 있을 뿐 따로 식사를 해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함께 피부관리실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그녀는 가난한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올해로 78세를 맞은 그녀의 교회 담임목사님은 20년 목회 생활동안 단 한 번도 급여를 받아 본적이 없었다. 목사님은 믿었던 부목회자에게 속아서 모든 재정을 사용하고 빚까지 지고 있었다. 목사님은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며 전도도 하면서 남은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의 아들 K는 부모님의 창업을 극구 반대했다.
“그 연세에 뭔가를 하신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20년 목회하신 댓가가 겨우 이것인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런 K의 마음을 돌이킨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부모님의 상급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면서 기뻐하셨을 부모님의 모습들도... 어떤 부모는 술과 도박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어떤 부모는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데,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저축을 하셨으니 감사해야겠지요. 또한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오픈 준비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신 집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실 올해 신년기도제목으로 피부관리실을 하고 싶다고 써냈었어요. 너무나도 하고 싶긴 하지만, 저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요.”
그녀는 피부관리실 창업에 동참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K에게 이야기했다.
“제가 다 준비했습니다.”
K는 개인사업체뿐 아니라 기업컨설팅까지 다양한 경영자문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해 그를 통해 미리 준비시켜 두셨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는 기술도 없는걸요. 사람들이 저보고 손맛이 없다고들 하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것은 못했었어요.”
“아, 그 문제라면 더욱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손기술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대부분 상향평준화가 됩니다. 한번 연습해서 안 되면 열 번, 열 번해서 안 되면 백번 그러다보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손기술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습능력과 전달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습능력과 전달능력이요?”
“많은 분들이 어느 정도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 노력을 멈춥니다. 아시다시피 공부하기를 멈추는 순간, 발전은 중단되고 퇴보가 시작되지요. 인체를 다루는 일이라 끊임없이 연구하며 공부해야하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고객에게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달능력도 필요합니다. 제가 듣기로 집사님은 20년 이상을 교사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학습능력과 정보 전달능력을 이미 갖추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손기술보다 더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개월간 돕겠습니다. 안되면 2개월, 그 후로도 계속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앞으로 손 기술이 부족하다는 말은 다시는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믿음대로 되니까요.”
생각보다 그녀의 손 기술은 빠르게 개선되었다. K는 두 번 만에 그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찾아내었고 기술은 즉시 개선되었다. 1개월 남짓 트레이닝을 마치고 샵을 오픈 하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녀의 천사들이 가장 먼저 방문을 했다. 그녀가 전에 다니던 남서울교회 식구들이었다. 새 신자였던 그녀를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 그녀들은 말했다.
“와! 신 집사. 정말 잘하네.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어.”
동시에 그동안 말 못했던 애정 어린 푸념도 쏟아졌다.
“손맛이 워낙 없어서 소개하기가 애매 했었는데 이제 소개 많이 해야겠다.”
“피부 관리실 하는 게 꿈이라고 기도 부탁을 해서 기도를 하긴 했었지만, 사실 어느 세월에 응답 될까 솔직히 좀 그랬었어. 그런데 진짜 할렐루야다. 집사님”
오픈 2주차부터 그녀의 샵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리를 받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게, 동료, 손님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준비 시키셨을까.
앞서 우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응답 받을 가능성이 있어보일 때 기도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나눈바 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기도를 시작했었다. 당시 어린 초보 신자나 다름없던 그녀가, 그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상황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20여년 이상, 꾸준히 과외로 고소득을 올리던 그녀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과외는 줄고 어머니는 큰 부채를 만드신 후 치매까지 앓게 되신 것이다. 빚과 병원비를 감당하던 그녀에게 공황증세가 찾아왔고 응급실에 가게 될 정도까지 되었다.
이 정도 데미지만으로 스스로 인생을 로그아웃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게 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 초심자인 그녀에게 믿음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가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보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기도 밖에 할 수 없던 상황. 그녀의 기도는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고 돈 많이 주시면 선교할게요 같은 비전을 담은 고급기도도 아니었다. 그녀의 기도는 명료했다. 그리고 절박했다.
“살려주세요. 우리 가족을 지켜 주세요.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게 저를 지켜주세요.”
차곡차곡 작은 응답들이 쌓여갔고 그녀는 변화되어갔다. 변화된 그녀의 모습은 친구와 가족들을 교회로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짐작컨대 그런 크고 작은 응답 속에서 그녀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렇게 영혼이 회복 된 그녀는 삶의 무게에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다. 억대 연봉자였던 그녀가 거리낌 없이 과거의 드레스를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편의점 알바, 맥도날드 야간 근무를 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미래를 꿈꾸는 것을 포기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현실의 무거운 짐을 다른 가족들에게 몽땅 지우고 공부하는 백수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의 무게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미래까지 준비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도했더니 주님이 준비시켜 주셨다.
나약해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을 그녀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자 어떤 척박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를 지킬 수 있고,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전문성을 통해 탁월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요즘 그녀가 심상치 않다. 진행하는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의 생생한 도우심도 체험했다. 이따금 그녀에게 당부하곤 한다.
“아무래도 집사님께서는 축복의 사이클 안에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대체로 2~3년 정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두 부류로 갈라지더군요. 끝까지 예배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늘 높이 독수리처럼 나는 사람, 슬금슬금 예배에 소홀해지다가 성장이 멈추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집사님은 지금처럼 예배를 꼭 붙들고 가셔야 합니다.”
그녀는 수년 전부터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맥도날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오래 전 믿음의 선배들이 사용했다던 ‘교회에서 잠자기’를 시전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바에 의하면 이런 경우 주님께서는 잠자는 시간도 기도시간으로 쳐주신다는 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