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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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출애굽 1세대 : 역사상 가장 많은 기적을 단체로, 지속적으로 경험했으나 끝끝내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단체로 멸망한 케이스


그들은 10가지 기적으로 이집트에서 구원 받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목격 했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초자연적 방법으로 공급 받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늘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황상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신앙의 대표적 케이스로 회자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그들은 매번 위기가 올 때마다 '지금까지 계속 도와주셨으니까 이번에도 도와주시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럴 거면 왜 우리를 데리고 왔냐고’ 번번이 불평과 원망을 했다. 


‘위기 때마다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학습 된 그들이 다음번에도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불평도 같이 학습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표현 보다는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상황인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끝없는 자비를 ‘만만함’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출애굽 1세대는 필요를 구할 때 하나님께 한 번도 정중하게 기도로 요청한 적이 없다. 늘 불평으로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알렸다. 심지어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를 못 참고 하나님께서 가장 노여워하시는 송아지 우상도 만들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한 그들은 역사상 가장 크고 다양한 불신앙의 역사를 써 나갔다. 


다양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반드시 신앙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 무서운 줄 몰랐다. 신병 훈련소에서 말끝마다 교관의 명령에 토를 달며 불평을 하는 병사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훈련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우리가 불평을 한다면 그 불평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욥은 친구들이 계속 그를 자극하자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신세한탄을 한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시작 될 것 같은 찰라,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그것을 차단하신다.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훈련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으신다. 또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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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믿음은 크게 상식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범위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우연과 기적들이 반복 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 선교초기 박영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당장 도착해서 묵을 곳도 없던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했다. 옆자리에 한국분이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현지에서 기업체를 운영하는 독실한 크리스찬.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업장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기꺼이 장소를 허락했다. 그리고 선교사역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만남, 우연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 속에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 또는 우연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 같은 섭리를 기대하고 있다면 먼저 믿기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도 그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믿기지 않을지라도 의지적으로 믿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단추입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난폭하고 다혈질인 성격 때문에 경찰서까지 오고 가던 그는 조금만 의견 충돌이 생겨도 언성을 높이기 일쑤여서 친구들도 다 떨어져나가고 가족들까지도 그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주변에서 온유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놀랍게 성품이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안에서, 그의 삶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변화의 원리를 우리는 조금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회사의 대표님과 신입사원이 있습니다. 1개월간의 업무 평가를 마치고 이 둘은 면담을 앞두고 있습니다. 업무 평가서를 보니 신입사원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대표님은 신입사원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A : “자네 장점이 많은 친구더군.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 했네”


B : “자네 이런 문제점이 있던데 그 부분은 주의해 주기 바라네” 

  

A,B 둘 중 어떤 선택이 사원으로 하여금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만들까요? 다행히 대표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제 선택권은 사원에게로 넘어갑니다. 


사원은 대표님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하찮은 립 서비스정도로 생각하며 흘려 넘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사원 본인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만들어 줄까요.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그의 삶은 그가 선택 한대로 흘러 갈 것입니다.

  


믿음을 이렇게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저는 믿음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특성상 당사자가 믿는 범위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선택하는 이들은 상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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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실력 좋기로 소문난 한의사 한 분이 있는데 약값이 꽤나 비쌌다. 그는 자신이 약값을 비싸게 받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환자들은 약값을 비싸게 지불해야 좋은 약이라고 믿어. 비싸게 약을 지어야 제때 약도 잘 챙겨 먹고, 먹지 말란 음식도 가려 먹지. 낸 돈이 아까워서 반드시 효험을 보려고 노력하는 게지. 실제로 그래야 효험이 있어. 그래서 똑같은 약이라도 돈이 많은 사람한테는 더 비싸게 팔아야 해.”


약이 잘 듣는 이유가 비싼 약값 때문이라니…. 

하지만 이 말에는 전혀 근거가 없진 않다. 위약 효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두통이나 복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알약 캡슐을 두통과 복통에 잘 듣는 약이라고 속이고 준다.

빈 알약 캡슐이지만 그것을 복용한 환자에게서 실제로 통증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을 플라시보 알약이라 하며 한때 미국에서는 이 약을 약국에서 판매하기도 했었다.


이 상황을 정리해 보면 

첫째, 사람들의 약효에 대한 믿음은 각자 자신이 지불한 돈의 액수와 비례한다. (많이 지불하고 구입한 약일수록 약효가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둘째, 그들은 각자의 믿음대로 효과를 본다. 


약은 동일한데 각자 지불한 돈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오는 이런 현상은 헌금을 드릴 때도 나타나곤 한다. 대전중문교회 장경동 목사님은 이 같은 현상을 설교에서 언급한 바 있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헌금 많이 한 사람에겐 손으로 기도해주고 적게 한 사람에겐 발로 기도해 주겠습니까? 다 똑같이 안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가 다르게 나타납디다.”


성도들에겐 본인이 헌신한 양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헌금이 기도 응답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어느 정도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스스로 봉사하려 하고, 헌금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감동을 무시한 채로는 하나님께 떳떳이 기도도 올리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하나님의 감동을 외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달란트를 맡기실 리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그만큼 자신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증표로도 여길 수 있다. 


반면, 친구들과 만나 만 원짜리 밥을 먹고 오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성도가 주일 헌금은 천 원을 하고 있다면 본인이 하나님께 너무 인색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영적 존재인 하나님은 물질 자체를 받으실 수 없기에 헌금의 액수는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 사람의 정성만이 하나님 앞에 상달 되므로 정성 없는 예물,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의 억지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는 마치 빈 봉투와도 같다. 


뽐내기 위해서, 또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마지못해 드리는 부자의 1000만원보다 진심을 담은 가난한 과부의 소박한 예물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훨씬 더 풍성한 연보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 믿음의 분량만큼 헌신하고자하는 마음이 찾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봉사든 헌금이든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믿음의 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 온다면 그것을 인색함으로 누르지 말고 일단 순종 할 때, 우리의 믿음은 한층 더 성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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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지만 이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함을 알지만 내 모습이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다고 느껴질 때. 야고보서를 보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데 행함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나를 보며 내가 지금 구원받았다고 믿는 이 상황은 혹시 학습된 내용을 앵무새처럼 따라한 결과에 따른 착각은 아닐까. 이렇게 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십자가의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날처럼 십자가를 선택하고 붙드는 믿음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찬송가에는 먼저 예수님을 만난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고백한 가사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찬송가의 가사처럼 지금의 내 모습만으로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믿음, 주의 영이 함께하신다는 믿음,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의 선택이 내일에 대한 염려를 내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으로 바꾸어 줍니다. 또한 그 믿음이 당사자에게 실제로 그런 삶을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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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주님 안에서 기도했다면, 기도한 시간과 비례해서 마음의 초조함이나 슬픔이 점점 작아지며 평안이 찾아온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패턴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기도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평안도 오지 않는다면 기도가 아니라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 저희 집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삶이 왜 이렇게 힘이든가요. 왜 저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요.”


우리는 조금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전 인류를 조건 없이 구원해주지 않으시고 어째서인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자만 구원해 주시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람들은 구원을 하지 않으시는 걸까, 못하시는 걸까. 다행히 성경에는 이에 대한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 하시니라. - 마태복음 13장 58절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기적을 행하셨고 믿지 않으면 그 믿지 않음을 인하여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마가복음 6장5절에는 이런 상황을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응답을 주실 수 없다’ 라는 은유적 표현도 가능케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시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은 구해주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해 보게 된다.



불이 붙은 아파트 난간에 아이가 서서 울부짖고 있다.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 내려”

아이의 아빠가 구명매트리스를 가리키며 아이에게 뛰어 내리라고 소리친다. 불길은 계속 거세지는데 아이는 울기만 할 뿐 뛰어 내리려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아빠는 사람들의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며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쾅쾅쾅, 아빠야, 어서 문 열어”

어째서인지 아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맨몸으로 불길을 뚫고 지나간 팔 다리는 이미 거뭇하게 익어가고 있고 폐에도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한다.

“쾅쾅쾅쾅쾅, 제발 문 좀 열어”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문을 열어주면 내가 들어가서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역설적으로,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실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영적 세계의 일을 인간이 100% 이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상당부분을 비유와 상징으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사정, 그 입장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여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신세한탄을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이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기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면 믿어야 한다. 


동정심으로 믿음을 대신 할 수 없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 믿어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믿어야 한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고 당연히 그 기도는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을 선택했다면, 그 믿음을 붙잡고 있다면 눈물과 슬픔은 기쁨과 담대함으로 변해가기 시작 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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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스포츠 꿈나무 선발 대회가 열렸다. 선발된 아이들에게는 최상의 훈련 프로그램이 제공 된다. 사실상 엘리트 코스다. 선발대회라고는 하지만 워낙 어린 아동들이어서 실력차이는 거기서 거기. 실력보다는 체격 좋은 아이들이 뽑힌다. 하지만, 대회에서 선발된 아이들은 최상의 훈련환경을 제공 받기 때문에 스포츠 명문 초등학교에 가게 될 확률이 높다. 


스포츠 명문 초등학교를 간 학생들은 스포츠 명문 중·고등학교에, 스포츠 명문 중·고등학교에 간 학생들은 계속해서 스포츠 명문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매우 높다. 스포츠 명문대학에 진학한 이들중 다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이 프리미어리거가 된 것은 어린 시절에 그들의 체격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격이 좋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 아이들 때는 2~3개월만 먼저 태어나도 체격 차이가 크다. 


특히 1월에 태어난 아이와 같은 해 12월에 태어난 아이의 체격은 차이가 크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대부분 1~2월생들이며 이는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종목 별로, 구단별로 선수들의 실명과 생년월일 리스트를 첨부했다. 1~2월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11~12월생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



살다보면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들이 있다. 성공한 사람 중에는 운이 좋거나 단순히 부모님을 잘 만나서 성공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운 좋게 얻은 성공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있지도 않았던 자신의 인생관과 성공 노하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끼워 넣기도 한다. 강의 당사자도 실천해 본적 없는 삶의 지혜(?)가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청중의 가슴에 파고든다. 



동전 던지기 대회가 열려서 1만 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동전을 던져서 그림이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간단한 룰이다. 경기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1만 명이 5천 명, 5천 명이 2500명…. 이렇게 해서 마침내 16강전이 열리게 됐다. 온 국민의 관심이 16명의 참가자들을 향하게 되고 캐스터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들을 추켜세운다.


“드디어 16명이 선발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죠.”


계속해서 8강전, 준결승전을 거쳐 최후의 우승자가 나왔다. 방송사에서 우승자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우승자께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동전 던지기를 잘하게 되었나요?”

“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 만 번 이상 동전을 던집니다. 하루 종일 동전 던지기만 생각했죠.”


얼마 후 우승자는 ‘나는 이렇게 동전을 던졌다’라는 제목으로 전국을 돌며 동전던지기 노하우와 삶의 열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데일 도튼의 저서 ‘자네, 일은 재미있나?’에 소개 된 ‘동전 던지기대회’를 약간 각색해서 소개했다. 


만약 이 동전 던지기 대회를 동일한 멤버로 다시 개최한다면 어떻게 될까? 보나마나 수상자들 리스트에 대규모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어차피 동전은 던지면 앞 또는 뒤가 나오게 되어있어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너도나도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어쩌다 보니 당선 된 우승자’ 라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포장지에만 집중한다.



타인과 자신을 견주며 타인의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나만의 강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성공한 누군가로부터 ‘성공의 비법’을 배우려하지만 나는 그가 될 수 없고 나의 상황은 그의 환경과 같을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장점을 살리고 나의 단점을 제한하여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가장 큰 에너지의 원천은 본인의 성공을 확신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뚜렷하면 상황에 필요한 스킬은 누구에게서나 발휘되기 마련이다.


어느 세일즈 고수는 손 편지로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당시 사용했던 방법이 지금도 효과가 있을까?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만큼의 효과가 있을까? 


우리는 고수의 손 편지, 노하우, 그가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본 받으려하기보다 그에게 그런 훌륭한 행동을 끊임없이 하게끔 만드는 그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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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을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초현실적인 감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믿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지의 감각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고유의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냄새는 코의 후각을 통해, 소리의 존재는 귀의 청각을 통해 확인된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기능이 손실되어 소리를 전혀 들어 본적이 없는 안들림씨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상에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까?”

“네.”

“당신은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당신은 소리를 들어 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소리의 존재를 확신합니까?”

“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글로, 수화로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말을 믿습니까?”


태어 날 때부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안들림씨의 ‘소리에 대한 지식’은 타인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안들림씨가 사람들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안들림씨에게는 소리가 존재 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들림씨가 “난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소리는 존재한다. 


사람은 타인의 말을 통해 자신이 직접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다. 이것은 우리 안에 소리를 주관하는 청각기관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믿음을 관장하는 기관이 내재 되어 있다는 증거다. 


사람들은 타인이 주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전에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을 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사건 앞에서 자신의 이권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보게 박씨, 자네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있다는구먼. 축하해.”

“아이고 그래유? 이게 웬일이래유.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유.”

박씨는 뛸 듯이 기뻐서 사람들과 축하잔치를 열었다.

“이보게 박씨, 미안하네. 자네 땅이 아니고 옆의 박영감네 땅이라는 구만.”

“뭐시유? 그럴 리가 없슈.”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에게 말했다.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뭐시유? 그럴 리가 없슈.”


대부분의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처럼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일단 인정하지 않으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천국에 들어 갈 자신이 없는데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상황은 심각해진다. 자신이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그다지 듣고 싶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천국에 들어갈 자신은 없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간을 내기도 귀찮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당연히 천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무서울 때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는 행동과 흡사하다. 후각으로 냄새를, 청각으로 소리를 인지하듯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 할 수 있다. 귀가 아닌 다른 신체기관으로 소리를 확인 할 수 없듯이 믿음이 아닌 다른 것들, 이를 테면 논리나 기적, 체험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분의 크신 능력을 알기 원한다면 먼저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과는 달리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육체라는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고 오신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바로 그 예수라는 역사 속 실존인물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면,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노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막상 눈앞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본다 해도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 될 때만 마음의 문을 연다. 


자신들의 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어 줄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던 유대인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수많은 기적을 눈앞에서 보여준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욕심으로 점철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그때 가서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다. 


체험이 신앙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체험을 기반으로 시작된 신앙은 지속적인 체험을 요구하고, 점점 더 자극적이고 잦은 체험을 원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정상적인 루트는 체험이 아니라 믿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테스트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


딸기의 맛을 말과 글로 설명 할 수는 있지만, 가장 확실하게 그 맛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입에 넣고 먹어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체험 할 수 있는 방법은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행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듯,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기적이 행해지는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해의 틀 안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과 그 분의 섭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한다. 


아울러 하나님은 ‘나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는 너무나도 좋은 분’이라는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가다가 겪게 되는 난관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여러 정황 속에서 우리는 늘 이 고백을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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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1


일하고 싶지만 신체적 장애가 있어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싶지만 불성실이 몸에 배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경우에도 ‘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체적 장애로 보행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의지적 장애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일하고 싶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성취감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것도 알겠고 공부도 잘하고 싶은데 내가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성실히 일하고 싶은데 자꾸만 핑계가 많아집니다. 기도의 유익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하루에 4시간씩, 10개월 공부하면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확실한 약속


하루에 10시간씩, 5년만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삶을 뒤바꿀만한 금액을 보수로 주겠다는 확실한 약속


하루에 2시간씩, 3년간 기도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 나게 쓰실 것이다는 확실한 약속


이렇게 확실한 보장이 약속 된다면 실천은 훨씬 더 수월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이런 보상에 대한 약속은 없지만 책상에 앉아 하루에 4시간씩, 10개월을 공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루에 10시간씩, 5년간 한 분야에 몰입한다면? 


하루에 2시간씩, 3년간 기도한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래서 믿음은 ‘과거 완료형’입니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을 이미 이룬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모든 연약함을 물리치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또한 믿음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자신이 꿈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은 삶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성공했으니 성공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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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1

마가복음 9장에는 귀신들린 아이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귀신 때문에 제 아이가 몇 번이고 죽을 뻔 했습니다. 할 수 있으시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좀 도와주세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이의 아버지는 처음엔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더니 곧바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덧붙인다. 


그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어야만 자녀를 고칠 수 있다고 하시기에 급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일단 “내가 믿나이다”라고 무작정 말했다. 하지만, 그 때 아이의 아버지에겐 실제로 믿음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그런 상태를 깨닫고 곧바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첫 번째는, 믿음은 없는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결단의 표현이었다. 


두 번째에는, 믿음만 있으면 아이를 고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없는 자신의 상태를 한탄하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담겨져 있다. 

  

 “내가 믿고자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이렇듯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 믿음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은 ‘믿음이 있으면’ 이라는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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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1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가다가 풍랑 때문에 믿음이 잠깐 흔들려서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었던 경험이 있다. 


만일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울 때도 그런 ‘믿음의 흔들림’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했는데 만약 안 일어나지면 어떻게 하지?’

  

아마도 그토록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혹자는 아는 것 보다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면 오히려 ‘아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의심 없이 확신하는 정보를 이야기 할 때 ‘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 역시 그러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에 태양이 있음을 알 듯 하나님이 계심을 안다. 이처럼 응답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달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 주실 것을 알고 담대함으로 선포 할 수 있다. 


베드로의 스승인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또한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선포를 통해 세상을 시작하셨다. 믿음의 선포 속에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던 능력이 깃들어 있다. 선포하는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예수님 역시 믿음으로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병자들을 고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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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