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포를 해보지만 자녀의 현재 모습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본인 역시 스스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선생님께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뿐이지요.
아이들도 본인들이 얼마나 부족한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 말해주며 마치 이미 훌륭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대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로젠탈 효과를 통해서 확인 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자녀의 실망스런 현재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부모가 그런 노력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 믿음의 흔들림이 없다면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도 흔들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흔들림이 없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와도 끊임없이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너를 바꿀 믿음이 없다면 나의 믿음으로 너를 살게 해줄게. 너는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에 대한 이 믿음을 놓지 않을게”
이쯤에서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유부단했던 겁쟁이 시몬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겁쟁이 시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바위 같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한 것은, 베드로 본인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가장 연약했던 자를 오히려 그 방면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는 설교였다. 그 날부터 나는 주님께 신유의 은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던 건강정보가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TV나 영화보다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여서 틈만 나면 건강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둘째,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정보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졌다. 특히, 한의사 김정혜 교수님과의 만남은 필자의 삶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쳤다. 나는 교수님과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며, 환자들을 진료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셋째, 후천적 재능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이니 당연히 연습량이 많아졌다. 그 결과 배우려는 내용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나는 단기간에 침구사 자격증과 경락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더 이상 나는 체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주변에 자주 체하는 사람과 머리 아픈 사람을 모두 고쳤다. 어느덧, 체하는 것과 두통 이 두 가지는 확실히 다스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25년 간 두통을 앓고 있던 노수영님과의 대화이다.
“300만원 어치 약도 먹어보고 안 해본 게 없습니다.”
“두통의 경우, 검진결과 특별한 병명이 없는 경우라면 첫째 수분 섭취부족, 둘째 환기부족, 셋째가 체기로 인한 두통, 넷째 스트레스 중에 하나입니다. 3~4번의 경우, 대개 괄사 한 두 번이면 좋아집니다.”
실제로 그녀는 단 한번에 수십년 된 두통이 없어졌다고 이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배동 행복한 교회에서 봉사 할 때, 걷지 못해 업혀 온 노인 한 분이 필자를 통해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서 모두를 놀라게 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오랜 기간 병원을 다녀도 딱히 차도가 없던 분들이 단 1~2회 만에 좋아진 간증들을 쏟아 냈었다. 오십견으로 2년간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던 문영주 장로님은 단 한 번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뛰어 다니며 기뻐하시기도 했다.
배운 기간에 비해 좋은 성과들이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대할 때 기도하며 임했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셨다.
‘뭉친 것을 풀면 반드시 처음보다는 좋아진다.’
일단, 처음보다는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차분히 경락 선을 따라 환자가 아파하는 부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풀어나갈 수 있었다.
‘반드시 풀 수 있고 반드시 풀겠다.’
주님께서 주시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풀어나가다 보면 예외 없이 차도가 있었다. 현대인들 중에는 병원에서 검진을 해도 특별한 병명이 없는 경우가 꽤 있다. 환자 입장에선, 본인은 분명 아픈데 병원에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병이 생기기 전단계로 보기도 한다. 예컨대 크기가 10이 되어야만 검진기에서 발견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병의 크기가 1~9까지이면 검진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입장에선 병이 커가는 단계이므로 분명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 검진결과는 ‘이상 없음’이다.
검진결과에서 특별한 진단명이 없음에도 발생하는 통증은 대체로 일종의 ‘막힘’또는 ‘뭉침’에서 시작된다. 사실 이 단계는 병증이 깊어진 단계가 아니므로 발병하기 전보다는 치료가 용이하다. 그래서 뭉친 부분을 찾아서 풀어주면 대부분 좋아진다. 뭉친 것을 푸는 방법은 스트레칭과 경락마사지등의 물리요법이 있으며 이는 환자들 본인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병원치료로 효과를 보지 못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몸에는 지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증상을 고칠 수 있는 지도를 가르쳐 드릴 테니 집에 가셔서 꼭 하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건강문제는 습관 때문에 생긴 것이니 습관도 함께 고쳐야 재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은사라 하면 뜨거운 불을 받거나 손으로 기도를 해주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런 방식으로 은사를 주신 적이 없다. 모든 은사를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주셨다.
무슨 그런 은사가 있냐고, 그런 게 무슨 은사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응답받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받은 은사의 최대 장점은 기복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은사자들이 상담 온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밀리다시피 기도를 해주다가 여러 부작용이 생기곤 한다.
예컨대, 성령의 은사는 자판기처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딱딱 맞춰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는 영적 컨디션에 따라 발현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침묵하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응답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가 앞에 있으면 은사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주관이 섞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얻은 은사는 기복이 없어서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다. 가장 큰 유익은 이렇게 응답받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모든 삶의 문제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익숙해진다. 시시때때로 기도하며 필요한 업무스킬을 동일한 방법으로 배워 나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이 배운 은사를 다른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다. 가르쳐 주고 훈련시켜서, 함께하는 동역자로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전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 역할이 된다. 믿음이 어린 자들에게는 ‘산에 올라가서 불을 받고 내려오라’는 말보다 기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재능을 구하라는 메시지가 훨씬 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체험을 한 초창기, 다양한 영적체험이 있었다. 기도 중에 환상 본 것을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다음 날 일어나는 등의 사건이었다. 성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런 체험을 환영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우연의 일치로, 직접 지켜보지 않은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생각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약간 이상하게 보는 듯 했다. 게다가 그런 체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체험을 해도 안 믿을 사람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않았다.
한 때, 나 또한 다른 신학생들처럼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곤 했다.
“능력을 주소서.”
그 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다.
‘말씀이 능력이다.’
그 뒤로 나는 주님께 말씀의 은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워낙 숫기가 없던 나였다. 고교시절, 어렵던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를 종로에 있는 스피치 학원에 보내셨다. 하지만, 나의 수줍음은 학원조차 하루 만에 도망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시는, 아니 훈련시키시는 주님의 방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특별한 영적체험이 아니었다.
‘먼저 성경에 익숙해져라. 이해되지 않아도 그냥 읽어라.’
읽고 싶은 신학서적이 너무도 많아서 고민하고 있을 땐, ‘차라리 성경만 읽으라’는 확신을 주시기도 했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 기법을 배우려 심취해 있을 때면 ‘설교는 그와 내가 만난 이야기다. 나를 만난 이야기를 배우려 하지 말고 성경 속에서 너도 나를 찾으라.’ 이처럼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 받은 레마는 나에게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먼저 네가 들어도 재미있을 만한 원고를 만들라.’
“저는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요.”
‘새로운 깨달음도 재미가 될 수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그 힘에 사로잡힌 나는 넘치는 에너지로 족히 백번은 넘을 원고 수정을 거쳐 마침내 내가 보기에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는 완벽한 상태로 만들었다. 완성된 원고를 보며, 역시 완벽히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수 없이 연습했다. 필자가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 본 막내 삼촌 이광욱 목사님의 말이다.
“나는 네가 원래부터 말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네. 와! 그렇게 준비하면 못할 수가 없겠다. 하하하”
완벽함을 추구하다보면 끝이 없을 것만 같아보여도 그렇지 않다. 비등점이 오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 세상에 내 놓으면 반드시 만족할 만한 결과 값이 얻어진다.
말씀의 은사를 구하던, 그러나 사람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수줍음 많던 청년은 말로 먹고사는 직업에서 억대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고객을 만나기에 앞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만한 원고가 써질 때까지 무수한 수정과 자료 수집을 거친다. 그렇게 해서 스크립트가 완성되면 그것이 내 입술의 언어가 될 때까지 책상 앞에서, 차 안에서, 운동하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반복한다.
같은 방법으로 필자의 육성을 받은 사원들 중에 억대 연봉자들이 나오기도 하였으며 사업자문을 받은 자영업자들은 매출의 향상을 보였다. 최근에는, 철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 시작한 피부 관리실 하나를 주님께서 주신 이 방식을 통해 안정권에 진입시킬 시킬 수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하루에 5개씩만 외우라고, 5개씩이라도 꾸준히 하면 1년에 1500개가 넘는 단어를 외울 수 있다고, 1500개면 대부분의 일상회화는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너는 말했지.
‘5개씩 외워서 언제 영어하겠냐고, 10개씩도 충분히 외울 수 있다고...’
그러더니 10개도 모자랐는지 20개씩 외우겠다고 암기량만 늘리고는 며칠 후부터 아예 단어에 손도 대지 않았어. 아마도 지쳤던 거겠지.
그리고 5년이 흘렀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하루에 한 개씩만 외워도 1,000개 이상의 단어를 암기했을 시간이지. 그랬다면 지금 내가 영어회화를 준비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긴 시간을 흘려보냈어.
이제 똑 같은 시행착오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부터라도 내가 하는 말을 존중해 줬으면 해. 다른 것은 몰라도 미래의 일은 미래에 있는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 네가 해야 할 일을 내일의 나에게로 미루지 마. 네가 먹은 설거지거리부터 네가 바로바로 처리하렴.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자꾸만 나에게 미루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할 수가 없어. 그리고 내가 튀김이랑 크림 도넛 좀 그만 먹으라고 했지?
오늘 병원 갔더니 지방간이라더라. 이 뱃살, 나보고 어떻게 빼라는 거니.
그래도 난 너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어. 너의 검소함.
과거의 영선언니가 명품가방을 엄청 사 댔나봐. 화장품도 비싼 것만 사서 쓰고...
지난번에는 수입 차 할부금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네가 알뜰살뜰 저축까지 해준 덕분에 아버지 틀니도 해드리고 부모님 해외여행도 보내드리고..
정말 고맙다.
이런! 편지지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이제 마무리해야할 것 같아.
너 나비효과라는 영화 기억나지. 너의 작은 날개 짓이 나에게는 태풍이 되어 돌아오니까 뭐든 한 가지 행동을 꾸준히 하기 전에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라.
특히 삶에 독이 될 만한 것은 삼가 해 줘. 네가 날마다 빈둥거리면 나는 빈둥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네가 도넛을 하루에 1개씩 꾸준히 먹으면 1년 후의 나는 정확히 365개의 도넛을 적립 받게 되고, 네가 하루에 100개씩 스쿼트를 해주면 1년 후의 나는 36500개의 스쿼트를 한 몸이 돼.
그러니 잘 부탁할게. 과거의 나!
- 2030년 7월 2일 미래의 너로부터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안녕, 나 준이야. 과거의 너란다.
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지켜 줄 너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나 또한 너에게 더 많은 자원을 보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난, 나를 가두기로 했어. 좋아하던 영화, TV, 심지어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도 끊었어. 너를 위해,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 시켰어.
사실은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놀고 싶지만 이렇게 시간을 아껴 준비한 자원들이 미래의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아. 미래의 네가, 나의 가족들과 풍요로운 삶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난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할 힘이 생겨. 덕분에 지금 난 결핍은 느끼지만 가난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었어.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난 금전적으로 많이 어렵기는 해. 영화를 끊은 것도, 친구들과의 만남을 줄인 것도 사실은 돈 때문인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
내가 이렇게 너에게 글을 쓰는 이유는 너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어서야. 물론 넌 이미 주님을 안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주님은 네가 아는 그 이상이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기에 세상사람 누구도 결코 주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거야.
오히려 주님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에 빠져 주님을 전혀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되어 버릴지도 몰라. 항상 명심하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린도전서 10장 12절)
주님을 만난 나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TV, 영화, 세상 친구들과의 모임을 멀리하게 되었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구속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되고, 일일 연속극을 챙겨 보지 않아도 돼. 이제 나는, 내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할 수 있고, 자기계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아무래도 나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된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예전의 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죄를 짓게 되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형벌로부터 영원한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죄를 멀리하게 되었어.
나는 네가 이 구원의 기쁨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을 완벽히 설명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볼게. 예전의 내가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죄를 짓고 싶어 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데 오히려 죄를 짓고 싶지 않아 진거지. 주일학교 때부터 배웠던 것처럼 나는 아무래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 같아.
주님을 만나기 전의 난, 옛 사람이 나에게 강요하는 수많은 엔터테인먼트를 의무처럼 수행해야 했었어.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의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함을 느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손 대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기쁨과 거기서 파생되는 강렬한 에너지, 그로부터 이어지는 삶의 변화를 네가 끝까지 이어가길 원해.
나는 네가 성공한 뒤에도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신 주님을 소중히 간직하며 그 분과 동행하길 원해.
오늘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주님, 그리고 미래의 너를 있게 한 근원이 주님이심을 영원히 기억하기를 소망하며...
여차하면 발을 뺄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순 없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일사각오로 정진한 사람만이 평균을 넘어서는 탁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따금 사탄의 낚시 바늘이 우리의 입술을 꿰뚫을 때가 있다. 이 바늘 끝에서 벗어나려면 또 얼마나 격렬한 기도의 파닥거림이 필요할지를 계산해보면 도저히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
우리는 기도로 파닥거릴 수밖에 없고 파닥거려야만 한다. 우리에게 기도는 옵션이 아니다. 믿음이 없다고? 어쩌겠는가 믿음까지 달라고 파닥거릴 수밖에...
조금씩 천천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가 진행될수록 믿음이 오고 마침내 상황에서 오는 고통마저 즐길 수 있는 담대함이 온다. 이렇듯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결국 나를 더욱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만들어 모든 소망을 이루게 할 것임을 믿는, 믿음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믿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답을 구할 필요도 없어진다. 자신 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신하게 된다. 마음이 평안해지며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선다. 그 때부터는 이리저리 한 눈 팔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의 집중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집중을 하면 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기 마련인 자신만의 특별한 천재성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라며 상담을 청해오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상담과 함께 예배참여, 성경읽기, 기도 등의 몇 가지 신앙미션을 제안한다.
말씀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기도를 권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는 그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막상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예배참여, 성경읽기, 기도 이 세 가지 중 한가지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떤 상담도 그저 성도간의 수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를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아마도 스마트 폰을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며, 친구들 만나서 수다를 떠는 등 평상시 하던 행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어쩌란 말인가?
시험공부를 안 하면서 성적 떨어 질까봐 불안하다고하면 어쩌란 말인가. 일해야 할 사람이 놀고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불안하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해야 할 일을 안 하면서 불안하다고 말하면 어쩌란 말인가.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성적 향상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고, 급여는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며 믿음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불안하면 불안함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불안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만 있으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있다.
절박함, 간절함은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곤 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이 있다.
“그 땐 정말 절박했었습니다.”
말만하고 도무지 행동 즉,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심한 경우 성인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밥값조차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이러하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이런 의견도 있다. 한 선교단체에 임원으로 있는 어느 형제님의 말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나태함을 덮으려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다른 목회자는 이 같은 성도들을 일컬어 우리 안에 갇힌 맹수를 빗대어 ‘교회 안에서만 포효하는 호랑이로 비유’하기도 했다. 연로한 노부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데 자신은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며 하나님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 담벼락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상에는 분명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주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태함을 피해 적당히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이들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족, 직장, 친구들로부터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번쯤 스스로를 점검해 봐야 한다는 사인일 수 있다.
직장도 구하지 않고,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교회 내에서 열심히 봉사를 한다고는 하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늘 불안하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어째서 마음이 그리 불안할걸까. 실패감과 상실감에 짓눌려 있는 그에게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에서 오는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성경말씀에 이론적으로 능통하나, 본인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그 말씀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이뿐 아니라 이들은 모든 실천에 취약하다. 말씀실천, 기도실천, 업무실천, 운동실천, 공부실천... 누군가 조심스레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 해도 그들의 나태는 꺾이지 않는다.
그들 또한 그런 자신의 무능하고 의지박약한 모습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신의 나태함을 본인의 손으로는 도저히 꺾지 못한다. 도대체 이들이 이토록 실천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나태함 때문일까?
“요즘 젊은것들은 절박함이 없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박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기에 절박하지 않을 뿐이다. 헝그리하지 않은데 어찌 헝그리 정신을 갖겠으며 절박한 상황이 아닌데 어찌 절박한 심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책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절박하지 않은데 억지로 절박한 마음을 가지려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의식주가 해결 된 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절박함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태해서 그래요.”
그러나 다방면에서 나태한 사람은 없다. 나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성실하다.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성실한 영역이 있다.
“응답 못 받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다.”
상대방의 영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정죄’라고 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것을 교회는 분위기상 금하고 있다. 하지만, 정죄가 과연 나쁘기만 한걸까. 타인에게 적용하면 분쟁의 도구가 되지만 본인 스스로에게 적용하면 수련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조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 못 받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 믿음만 있다면 응답 받는다는 말 아닌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다.”
→ 충분히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면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 있는 상태의 사람들을 살펴보자. 먼저 행동이 유발된다. 예를 들어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적이 좋아질 거란 믿음이 있는 학생은 공부에 최선을 다하게 되고, 스스로 몸짱이 될 거란 확신이 있는 이들은 끈기 있게 운동을 할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행동에 필요한 동기도 유발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적당히 시늉만 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생길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 기도다. 둘째 선포다. 주님께 기도하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반복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믿음이 올 때까지!
마지막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다보면 자신이 ‘어쩐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더 예뻐해 주시고 상급 또한 주실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이것은 자기 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보상심리에 가깝다.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을 잘 주실 것 같은 믿음이 오며, 그 믿음은 충분한 기도의 동기가 된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해도, 잘 못해도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죄를 저지르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영적인 본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없애는 것은 바로 불순종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학생은 선생님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선생님을 밝은 미소로 대할 수 있게 만든다. 선생님 또한 그런 그들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반면, 비행청소년들은 본인들이 혼날 짓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칭찬이나 상급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을 못 마땅해 할 거란 생각이 강해지면 일종의 신념, 즉 믿음이 된다. 그 믿음은 곧 적대감과 배타적 심성을 형성하여 실상을 만들어 낸다. 정말로 사람들이 본인을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상급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이치로 예배를 잘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구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긴다. 이렇게 예배를 잘 드리니 주님께서 자신을 기뻐 받으실 것 같은 기대감이 기도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주님 앞에서 부르짖는 것을 방해하던 모든 사탄의 족쇄들이,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부흥을 부르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평범한 행동 패턴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반면 평범하지 않은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즉,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저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믿음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믿음이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기에 믿음이 있는 사람, 특히 믿음이 강한 사람을 보면 이상히 여긴다. 그렇다면 어째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걸까.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아, 시끄러워요!”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저리 가세요!”
“오직 믿음, 오직 예수”
분명, 이런 사람을 보면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 거기에는 적당한 혐오감도 포함 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저런 식의 주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보인다. 융통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입장조차 배려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믿음만은 확실해 보인다.
“당신은 저 광인처럼 보이는 사람만큼의 믿음이 있습니까? 당신은 저 분처럼 뛰어나가서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부르짖을 두둑한 믿음이 있습니까.”
“제가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저거 민폐잖아요. 저거 기독교 욕 먹이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예화가 있다.
“전도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불구덩이에 있는 사람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불구덩이에 빠진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 만난 후,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었습니까?”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고상하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구사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전해야겠다는 의지가 이성보다 약한 사람은 침묵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오직 예수,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예수님 안 믿으면 큰일 납니다.”
스무 살 초반, 출근 할 때마다 신정네거리역에서 잠깐씩 거리복음을 전했었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담대하지도, 멋지지도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숫기 없는 목소리로 소심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하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나와 눈길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는 점이다. 얼마나 표정이 굳어있고 목소리는 어색했는지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힘겨운 시도를 했던 것은 값없이 받은 귀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면 더 큰 일감을 맡기실 것 같은 기대감과 순종하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주님께서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실 것만 같은 풋풋한 두려움이 공존했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주셨고 그것에 순종할수록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조금씩 효율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 발전은 나에게도 해당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런 식으로는 단 한명도 전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믿음은 인류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나 한사람을 위한 것이다. 복음 전파는 복음을 전달하는 기능이외에도 순종하는 당사자를 훈련시키는 기능이 있다. 신정네거리역 앞에서 소심한 복음을 전하던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 떨지 않는다.
사람 앞에 일대일로 마주하면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수줍음 많던 조리사청년이 말로 먹고사는 직업에서 억대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고교시절, 그렇게 어렵던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종로에 있는 스피치 학원에 보내셨다. 하지만, 그의 수줍음은 학원조차 하루 만에 도망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제 사람들 앞에서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믿음이란 1차적으로 본인을 점령하고,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자신이 먼저 완벽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것은 설득력보다 중요하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하면 된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라. 그러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어.”
“오직 예수”
“그럼 죽어도 좋단 말이냐?”
“오직 예수”
“우선 안 믿겠다고 하고 나와서 다시 믿으면 될 것을... 융통성이 없구나.”
그 융통성의 결과가 신사참배였다. 대한민국을 복음화 시킨 것은 융통성과 이성에 사로잡힌 지식형 설교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일갈하는 융통성 없는 선배님들의 거룩한 열정이었다.
역사 속에서, 아니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문을 당하다 죽임을 당하고 있다. 동시에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고문했던 간수들 중에 상당수가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들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들은 말은 고작 ‘오직 예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시오.’ 정도의 말이었을 텐데 무엇이 이들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뒤 흔들어 놓은 것일까.
특별한 삶을 살길 바란다면 평범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믿음 앞에서 우리는 정상적일 필요가 없다. 아니 정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택적으로 비정상을 터치해야 한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소리 지르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성도의 기도가 경망스럽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주님께 온전히 집중해 보라. 모든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쳐 보라. 걱정, 분노, 스마트폰, 약속 등등 계속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임의적으로 털어내려 몸부림치다 보면 어느새 정상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핍박은 대중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고치려하고 공격하려 한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그들의 내면에서는 무수한 다짐의 반복이 진행 되고 있는 상태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표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완벽히 집중상태에 이른 사람은 집중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남들의 시선? 상관할 여력이 없다. 모든 에너지 소모를 차단하고 목표에 집중한다.
언쟁과 변명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삶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삶의 성과들을 이룩한 사람들을 보라. 남들, 심지어 가족들의 일조차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일 밖에 몰라요.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지요.”
업무성과도 최고, 다른 부분에서도 최고라면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10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에 집중한 결과, 한 가지 영역에서조차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다.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선택과 집중이라는 과제 앞에서 최선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비로소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알아 볼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도와 운동에는 공통점이 많다. 예를 들어 운동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다 보면 체력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도 함께 강해진다. 기도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면 영성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도 강해진다.
하기 싫다고 계속 안하면? 습관이 된다. 하기 싫어도 계속 하면?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싫지만은 않다. 힘들게만 느껴지던 것에서 나름의 재미도 발견한다. 기도도 운동도 마찬가지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극한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때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개 더 !”
휘트니스 센터의 퍼스널 트레이너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일 것이다. 간신히 목표로 하는 개수를 채우면 그들은 외친다.
“자, 마지막으로 한 개 더!”
한 개를 더해도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다.
“한개만 더, 한 개만 더!”
그렇게 반복하다 정말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 없을 때 비로소 그들은 바벨을 붙잡아 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몸이 극한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들어올리는 ‘한 개 더’가 근육의 성장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육은 더 큰 힘을 쓸 일이 생겼다고 판단 될 때 몸에 들어 온 영양소를 저장이 아닌, 성장을 위해 쓰기로 결정한다.
“휴! 죽을 뻔 했네. 아무래도 근육 량을 더 늘려야겠군.”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겁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 쏟고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하겠는데 한 번 더 힘을 내서 도전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뚜렷한 성장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다. 바쁜 시간을 무릅쓰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갈 때, 이젠 더 이상 기도할 힘도 의지도 없다고 느껴질 때, 한 번 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는 기도의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신앙은 눈에 띄는 성장을 반복한다.
사실 성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성장은 본래 재미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의 캐릭터를 키우는 것도 재밌어서 사람들은 중독된다. PC방에서 며칠 간 잠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다가 죽은 청년의 안타까운 소식을 기억할 것이다. 캐릭터를 키우는 게임은 그 재미가 중독을 야기할 정도다. 지속적으로 그 게임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게임 속 캐릭터의 성장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본래 무엇인가를 성장 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현실 속의 나는 현실의 나를 자양분으로 하기에 캐릭터가 성장하면 할수록 실제의 나는 죽어간다.
현실의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아직, 재미를 발견 못해서 그렇지 현실의 내가 성장하는 모습은 훨씬 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게임도 배우기 전에는 재미가 없다.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게임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나를 키우는 그 재미에 빠지면 마치 온라인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끊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운동중독, 일중독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스스로가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보인다.
바디빌더들은 오늘 내가 하는 운동으로 보다 더 좋은 근육을 얻게 될 자신의 미래의 몸을 믿음으로 확신한다. 업무에 밤낮으로 몰두하는 이들은 오늘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얻어질 풍성한 성과들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그 믿음과 확신이 남들에게는 재미없는 업무를 끊을 수 없는 재미로 바꾸어 준다.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의 징표는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서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보다 위치적 우위에 있다고 느낄 때 뭔가 잘 보이고 싶다는 기대심리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위축’은 오히려 본인의 이미지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할 뿐이다.
기도는 나의 주관자가 전능자임을 항상 잊지 않게 만들어 준다. 전능자 하나님의 동행, 임마누엘의 확신이 몸에 밴 사람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예의와 당당함이 조화를 이룬 사람은 특별한 아우라를 풍긴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바라 볼 때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기도를 하면 가장 먼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그러면 이전에 좋던 것이 예전처럼 좋지가 않다. 믿음이 눈을 뜰 때, 본능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거시적 관점이다. 도박에 미친 사람은 이 짓을 계속하면 나중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가 보인다. 그러면 결국은 중단하게 된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 또한 이 단순한 하루가 쌓여 가져오게 될 미래의 풍성함이 생생하게 보인다. 내가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신바람이 난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미세한 발전과정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양자물리학의 한 이론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과거의 나, 현실의 나, 미래의 내가 모두 연결 되어 즉시즉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불성실하면 오늘의 나도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오늘 내가 성실하면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서서히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즉시 바꾼다.
그렇다면 과거는 어떨까. 과거는 바꾸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과거도 바꿀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당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와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과거의 한 지점에 서 있다.
못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들에게 좀 더 따뜻하지 못했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사치스러웠던 과거, 불성실했던 과거, 그리고 기도하지 않았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왔다.
문득, 베드로 후서 3장에 기록 된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또 2천 년 전에 한 번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 이전과 이후에 태어난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어쩐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인들이 기도를 하듯, 종교가 없는 이들도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무한 반복해서 기도와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다.
우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사실은 믿음대로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서점이나 강사들 중에 ‘성공’ 또는 ‘꿈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강사들을 보라. 단 한명도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이 법칙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가 없다.
성공자들의 인터뷰나 자서전을 보라. 모두가 자신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힘의 근원이 이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과학자들조차도 믿음의 법칙의 타당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특히, 사람의 생각과 말이 실제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연구들을 읽어 나가다보면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일반인들이 ‘귀신이 있다, 없다’와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논리적 근거 없이 자기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초등학생들의 언쟁과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과학자들이 각자의 이론적 토대를 놓고 의견 대립하는 모습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저명한 과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이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믿음대로 된다는 그 법칙을 누구도 비과학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부정적인 쪽을 선택한 사람은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자신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언쟁은 그 힘에 대한 토론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산속에 호랑이를 보았다는 다수의 사람이 있고, 그럴 리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는가. 당신이 그 산속을 지나가야 하는 여행자라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믿음대로 된다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간증하고 전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다. 새끼 때부터 낳아준 부모를 전혀 보지 못하고 고아로 자란 치타도 성체가 되면 엄청난 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있는 이유는 치타에게 부모의 유전적 특징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 힘을 통해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본인이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던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믿음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고 이것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축복일까?
하나님의 주권아래 통치 받는 삶이 필요한 이유는 본질상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세상이 주는 부와 권력을 선한 곳에만 사용하는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놓으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특별한 힘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자신의 꿈과 목표도 이루며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완벽히 조절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몹시 가난했던 사람이 갑자기 큰돈이 생기니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많은 돈으로 죄만 짓고 다니다가 자신의 인생은 물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주변에 얼마나 많던가.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만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욕망의 실현이 가져올 부작용까지 미리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식공간을 성령님께 내어 드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사탄이 준, 물질의 부유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축복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지혜를 우리는 성령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성령님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직접 설계하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나를 지으신 분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배우려는 열망보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 속에 감춰진 사탄의 의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는 진정한 축복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한복음 10장 10절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세상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이것을 통해 초자연적 현상을 체험 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은 동일하다.
그 중에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으며 사회에서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사이비 종파도 있고, 종교가 전혀 없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 모든 종교에는 기도와 응답이라는 공통된 행동이 있고 이에 대한 체험 수기는 놀랍도록 일치한다.
교회 내에도 성령 받은 자 있고 못 받은 자 있듯이 무속인들 사이에도 귀신 받은 자 있고 못 받은 자가 있다. 성령 받은 자중에도 성령 충만한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 있듯이 무속인들 또한 그러하다.
귀신 충만한 무속인들은 실제로 과거사를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미래를 맞추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5명의 무속인이 한 사람의 미래 점괘를 내놓으면 전부 다르다.
미래는 하나님만의 고유영역이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예언기도라는 명칭으로 시험의 합격유무나 사업의 성패, 배우자감 등을 묻고 답하는 것을 교회 내에서도 극도로 경계한다.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 있든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약속만을 말씀할 뿐, 미래에 대한 구체적 예측을 허락하는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사실은 점쟁이들의 미래 점괘가 들어맞을 때가 꽤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 된 일인가. 믿음의 법칙에 답이 있다.
[교회안의 믿음의 메커니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 아멘으로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난다.
점술가가 내 과거사를 족집게처럼 맞추었다. 귀신 충만한 이들은 귀신이 가르쳐줘서 맞췄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리적 스킬, 속칭 말발로 뭉뚱그려 말하다보면 순진한 사람들이 얻어 걸린다.
“와~ 대박, 신통하시네요.”
이때 마음의 문이 확 열리며 그 점술가의 말이면 무엇이든 아멘으로 받을 준비가 된다.
[귀신들의 믿음의 메커니즘]
“이번 선거 대박 날거야.”
→ 아멘으로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난다.
문제는 이들이 좋은 일만 예견하는 것이 아닌데 있다.
“차 조심해.”
공포 마케팅은 세일즈역사 속에서 검증 된, 전통적인 판매 방식중에 하나다. 이런 경고의 말은 무시하고 싶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활짝 열린 그의 영이 그 죽음의 말씀(?)을 덥석덥석 아멘으로 받아 삼킨다. 이것은 마치 성령 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닌데... 천만원!”
“네? 제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점집 문 앞을 나선 후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어떤 차를 조심해야하지? 버스? 택시? 아니면 운전을 하지 말라는 건가? 아냐, 혹시 나 말고 다른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얼마 후, 그가 붙든 믿음이 삶에 실제로 상황을 끌어 들인다. 이때부터 그는 그 점술가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게 된다. 귀신에게 완벽하게 복속된 것이다.
그에게 정말 신통력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확률의 법칙으로 보아도 10명, 20명, 매일 저주의 씨앗을 뿌리다보면 옥토 같은 마음 밭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돌아오게 되어있다. 단 한건만 건져도 1년 치 연봉, 아니 어쩌면 몸통에 빨대를 꽂혀 평생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처럼 소득을 제공해 줄 테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결국 본인 믿음이다.
누군가 저주를 퍼부어도 그것을 모두 튕겨 낼 수 있다면 그것이 그의 삶에서 어떤 물리, 화학 반응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의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커져버렸다. 재미로 한두 번 점집을 들락거리다가 어쩌다 제대로 믿음의 문이 열리면 인생의 주관자가 바뀌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영혼 구원'이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순전히 복을 추구하는 도구로만 종교를 선택한다해도 교회는 합리적 선택이다. 교회는 악재를 예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악재를 피하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아들아, 너는 정말 좋은 아이야. 너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믿음의 선포를 해보지만 자녀의 현재 모습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본인 역시 스스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선생님께 사랑과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뿐이지요.
아이들도 본인들이 얼마나 부족한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 말해주며 마치 이미 훌륭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대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로젠탈 효과를 통해서 확인 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자녀의 실망스런 현재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부모가 그런 노력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 믿음의 흔들림이 없다면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도 흔들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흔들림이 없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와도 끊임없이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너를 바꿀 믿음이 없다면 나의 믿음으로 너를 살게 해줄게. 너는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에 대한 이 믿음을 놓지 않을게”
이쯤에서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유부단했던 겁쟁이 시몬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겁쟁이 시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바위 같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한 것은, 베드로 본인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20대 중반, 신유의 은사를 받았었다. 아니 지금도 나에게는 그 은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달란트)를 주시는 방식은 대체로 정보와 훈련을 통해서다.
A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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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재미를 발견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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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반복 훈련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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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실력향상
20대 초반, 예민한 성격 때문에 체하는 것이 일상이던 나는 설교 중에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가난했던 사람에게는 재물 얻는 은사를 주시고, 괴팍했던 사람에게는 온유의 은사를 주시고, 아팠던 사람에게는 신유의 은사를 주신다.”
가장 연약했던 자를 오히려 그 방면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는 설교였다. 그 날부터 나는 주님께 신유의 은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던 건강정보가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TV나 영화보다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여서 틈만 나면 건강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둘째,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정보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졌다. 특히, 한의사 김정혜 교수님과의 만남은 필자의 삶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쳤다. 나는 교수님과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며, 환자들을 진료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셋째, 후천적 재능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이니 당연히 연습량이 많아졌다. 그 결과 배우려는 내용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나는 단기간에 침구사 자격증과 경락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더 이상 나는 체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주변에 자주 체하는 사람과 머리 아픈 사람을 모두 고쳤다. 어느덧, 체하는 것과 두통 이 두 가지는 확실히 다스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25년 간 두통을 앓고 있던 노수영님과의 대화이다.
“300만원 어치 약도 먹어보고 안 해본 게 없습니다.”
“두통의 경우, 검진결과 특별한 병명이 없는 경우라면 첫째 수분 섭취부족, 둘째 환기부족, 셋째가 체기로 인한 두통, 넷째 스트레스 중에 하나입니다. 3~4번의 경우, 대개 괄사 한 두 번이면 좋아집니다.”
실제로 그녀는 단 한번에 수십년 된 두통이 없어졌다고 이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배동 행복한 교회에서 봉사 할 때, 걷지 못해 업혀 온 노인 한 분이 필자를 통해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서 모두를 놀라게 했던 일도 있었다.
당시, 오랜 기간 병원을 다녀도 딱히 차도가 없던 분들이 단 1~2회 만에 좋아진 간증들을 쏟아 냈었다. 오십견으로 2년간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던 문영주 장로님은 단 한 번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뛰어 다니며 기뻐하시기도 했다.
배운 기간에 비해 좋은 성과들이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대할 때 기도하며 임했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셨다.
‘뭉친 것을 풀면 반드시 처음보다는 좋아진다.’
일단, 처음보다는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차분히 경락 선을 따라 환자가 아파하는 부위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풀어나갈 수 있었다.
‘반드시 풀 수 있고 반드시 풀겠다.’
주님께서 주시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 듯 하나하나 풀어나가다 보면 예외 없이 차도가 있었다. 현대인들 중에는 병원에서 검진을 해도 특별한 병명이 없는 경우가 꽤 있다. 환자 입장에선, 본인은 분명 아픈데 병원에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병이 생기기 전단계로 보기도 한다. 예컨대 크기가 10이 되어야만 검진기에서 발견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병의 크기가 1~9까지이면 검진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입장에선 병이 커가는 단계이므로 분명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 검진결과는 ‘이상 없음’이다.
검진결과에서 특별한 진단명이 없음에도 발생하는 통증은 대체로 일종의 ‘막힘’또는 ‘뭉침’에서 시작된다. 사실 이 단계는 병증이 깊어진 단계가 아니므로 발병하기 전보다는 치료가 용이하다. 그래서 뭉친 부분을 찾아서 풀어주면 대부분 좋아진다. 뭉친 것을 푸는 방법은 스트레칭과 경락마사지등의 물리요법이 있으며 이는 환자들 본인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병원치료로 효과를 보지 못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몸에는 지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증상을 고칠 수 있는 지도를 가르쳐 드릴 테니 집에 가셔서 꼭 하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건강문제는 습관 때문에 생긴 것이니 습관도 함께 고쳐야 재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은사라 하면 뜨거운 불을 받거나 손으로 기도를 해주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런 방식으로 은사를 주신 적이 없다. 모든 은사를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주셨다.
무슨 그런 은사가 있냐고, 그런 게 무슨 은사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응답받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받은 은사의 최대 장점은 기복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은사자들이 상담 온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밀리다시피 기도를 해주다가 여러 부작용이 생기곤 한다.
예컨대, 성령의 은사는 자판기처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딱딱 맞춰서 나타나지 않는다. 은사는 영적 컨디션에 따라 발현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침묵하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응답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가 앞에 있으면 은사자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주관이 섞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얻은 은사는 기복이 없어서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하다. 가장 큰 유익은 이렇게 응답받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모든 삶의 문제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익숙해진다. 시시때때로 기도하며 필요한 업무스킬을 동일한 방법으로 배워 나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이 배운 은사를 다른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다. 가르쳐 주고 훈련시켜서, 함께하는 동역자로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전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 역할이 된다. 믿음이 어린 자들에게는 ‘산에 올라가서 불을 받고 내려오라’는 말보다 기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재능을 구하라는 메시지가 훨씬 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체험을 한 초창기, 다양한 영적체험이 있었다. 기도 중에 환상 본 것을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다음 날 일어나는 등의 사건이었다. 성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런 체험을 환영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우연의 일치로, 직접 지켜보지 않은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생각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약간 이상하게 보는 듯 했다. 게다가 그런 체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체험을 해도 안 믿을 사람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않았다.
한 때, 나 또한 다른 신학생들처럼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곤 했다.
“능력을 주소서.”
그 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다.
‘말씀이 능력이다.’
그 뒤로 나는 주님께 말씀의 은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워낙 숫기가 없던 나였다. 고교시절, 어렵던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를 종로에 있는 스피치 학원에 보내셨다. 하지만, 나의 수줍음은 학원조차 하루 만에 도망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시는, 아니 훈련시키시는 주님의 방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특별한 영적체험이 아니었다.
‘먼저 성경에 익숙해져라. 이해되지 않아도 그냥 읽어라.’
읽고 싶은 신학서적이 너무도 많아서 고민하고 있을 땐, ‘차라리 성경만 읽으라’는 확신을 주시기도 했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 기법을 배우려 심취해 있을 때면 ‘설교는 그와 내가 만난 이야기다. 나를 만난 이야기를 배우려 하지 말고 성경 속에서 너도 나를 찾으라.’ 이처럼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 받은 레마는 나에게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먼저 네가 들어도 재미있을 만한 원고를 만들라.’
“저는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요.”
‘새로운 깨달음도 재미가 될 수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그 힘에 사로잡힌 나는 넘치는 에너지로 족히 백번은 넘을 원고 수정을 거쳐 마침내 내가 보기에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는 완벽한 상태로 만들었다. 완성된 원고를 보며, 역시 완벽히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수 없이 연습했다. 필자가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 본 막내 삼촌 이광욱 목사님의 말이다.
“나는 네가 원래부터 말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네. 와! 그렇게 준비하면 못할 수가 없겠다. 하하하”
완벽함을 추구하다보면 끝이 없을 것만 같아보여도 그렇지 않다. 비등점이 오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 세상에 내 놓으면 반드시 만족할 만한 결과 값이 얻어진다.
말씀의 은사를 구하던, 그러나 사람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수줍음 많던 청년은 말로 먹고사는 직업에서 억대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고객을 만나기에 앞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만한 원고가 써질 때까지 무수한 수정과 자료 수집을 거친다. 그렇게 해서 스크립트가 완성되면 그것이 내 입술의 언어가 될 때까지 책상 앞에서, 차 안에서, 운동하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반복한다.
같은 방법으로 필자의 육성을 받은 사원들 중에 억대 연봉자들이 나오기도 하였으며 사업자문을 받은 자영업자들은 매출의 향상을 보였다. 최근에는, 철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 시작한 피부 관리실 하나를 주님께서 주신 이 방식을 통해 안정권에 진입시킬 시킬 수 있었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안녕, 나 정혜야. 미래의 너란다.
난 지금 영어 회화 연습 중인데 무진장 애를 먹고 있어.
너 5년 전에 하루에 영어단어 5개씩 외우겠다고 결심한 적 있었지?
꾸준히 좀 하지 그랬니. 내가 그랬잖아.
‘무리하지 말고 하루에 5개씩만 외우라고, 5개씩이라도 꾸준히 하면 1년에 1500개가 넘는 단어를 외울 수 있다고, 1500개면 대부분의 일상회화는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너는 말했지.
‘5개씩 외워서 언제 영어하겠냐고, 10개씩도 충분히 외울 수 있다고...’
그러더니 10개도 모자랐는지 20개씩 외우겠다고 암기량만 늘리고는 며칠 후부터 아예 단어에 손도 대지 않았어. 아마도 지쳤던 거겠지.
그리고 5년이 흘렀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하루에 한 개씩만 외워도 1,000개 이상의 단어를 암기했을 시간이지. 그랬다면 지금 내가 영어회화를 준비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긴 시간을 흘려보냈어.
이제 똑 같은 시행착오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부터라도 내가 하는 말을 존중해 줬으면 해. 다른 것은 몰라도 미래의 일은 미래에 있는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 네가 해야 할 일을 내일의 나에게로 미루지 마. 네가 먹은 설거지거리부터 네가 바로바로 처리하렴.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자꾸만 나에게 미루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할 수가 없어. 그리고 내가 튀김이랑 크림 도넛 좀 그만 먹으라고 했지?
오늘 병원 갔더니 지방간이라더라. 이 뱃살, 나보고 어떻게 빼라는 거니.
그래도 난 너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어. 너의 검소함.
과거의 영선언니가 명품가방을 엄청 사 댔나봐. 화장품도 비싼 것만 사서 쓰고...
지난번에는 수입 차 할부금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네가 알뜰살뜰 저축까지 해준 덕분에 아버지 틀니도 해드리고 부모님 해외여행도 보내드리고..
정말 고맙다.
이런! 편지지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이제 마무리해야할 것 같아.
너 나비효과라는 영화 기억나지. 너의 작은 날개 짓이 나에게는 태풍이 되어 돌아오니까 뭐든 한 가지 행동을 꾸준히 하기 전에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길 바라.
특히 삶에 독이 될 만한 것은 삼가 해 줘. 네가 날마다 빈둥거리면 나는 빈둥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네가 도넛을 하루에 1개씩 꾸준히 먹으면 1년 후의 나는 정확히 365개의 도넛을 적립 받게 되고, 네가 하루에 100개씩 스쿼트를 해주면 1년 후의 나는 36500개의 스쿼트를 한 몸이 돼.
그러니 잘 부탁할게. 과거의 나!
- 2030년 7월 2일 미래의 너로부터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안녕, 나 준이야. 과거의 너란다.
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지켜 줄 너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나 또한 너에게 더 많은 자원을 보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난, 나를 가두기로 했어. 좋아하던 영화, TV, 심지어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도 끊었어. 너를 위해,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 시켰어.
사실은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놀고 싶지만 이렇게 시간을 아껴 준비한 자원들이 미래의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아. 미래의 네가, 나의 가족들과 풍요로운 삶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난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할 힘이 생겨. 덕분에 지금 난 결핍은 느끼지만 가난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었어.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난 금전적으로 많이 어렵기는 해. 영화를 끊은 것도, 친구들과의 만남을 줄인 것도 사실은 돈 때문인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
내가 이렇게 너에게 글을 쓰는 이유는 너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어서야. 물론 넌 이미 주님을 안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주님은 네가 아는 그 이상이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기에 세상사람 누구도 결코 주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거야.
오히려 주님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에 빠져 주님을 전혀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되어 버릴지도 몰라. 항상 명심하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린도전서 10장 12절)
주님을 만난 나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TV, 영화, 세상 친구들과의 모임을 멀리하게 되었어.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구속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되고, 일일 연속극을 챙겨 보지 않아도 돼. 이제 나는, 내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할 수 있고, 자기계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아무래도 나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된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예전의 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죄를 짓게 되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형벌로부터 영원한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죄를 멀리하게 되었어.
나는 네가 이 구원의 기쁨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을 완벽히 설명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볼게. 예전의 내가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죄를 짓고 싶어 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데 오히려 죄를 짓고 싶지 않아 진거지. 주일학교 때부터 배웠던 것처럼 나는 아무래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 같아.
주님을 만나기 전의 난, 옛 사람이 나에게 강요하는 수많은 엔터테인먼트를 의무처럼 수행해야 했었어.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의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함을 느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손 대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기쁨과 거기서 파생되는 강렬한 에너지, 그로부터 이어지는 삶의 변화를 네가 끝까지 이어가길 원해.
나는 네가 성공한 뒤에도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신 주님을 소중히 간직하며 그 분과 동행하길 원해.
오늘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주님, 그리고 미래의 너를 있게 한 근원이 주님이심을 영원히 기억하기를 소망하며...
- 2002년 3월 30일 과거의 너로부터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가 파닥거린다. 한마리가 운 좋게 풀려난다.
모든 물고기가 풀려나기 위해 파닥거리지만, 파닥거린다고 해서 모두가 바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파닥거리지 않고 있으면 100% 잡혀 죽게 된다. 그러므로 물고기 입장에서 파닥거리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믿음 또한 그러하다. 우리에게 믿음은 옵션이 아니다. 이따금 기도응답 여부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곤 한다.
“기도하면 정말 응답해 주실까요?”
질문 속에서 불신앙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진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질문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응답 못 받을 것 같으면 기도 안하시려구요?”
불확신은 믿음이 아니다. 즉, 믿음이 없다는 증거일 수 있다. 또한 믿음이 없으면 응답도 없다.
응답을 받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은 믿음의 반대, 불신앙의 증거이다.
“저도 기도하고 싶은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불확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시험기간에 시험공부를 안 하면 불안해진다. 일해야 할 사람이 놀고먹으면 불안해진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불안해진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를 안 하면 불안해진다.
다시 말해 믿음이 없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확신, 염려, 불신앙은 기도하면 해결된다. 불확신, 염려, 불신앙은 기도해야만 해결된다.
믿게 해주셔야 주님을 영접하겠다 - 먼저 주님을 영접해야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겨야 기도할 수 있다 - 먼저 기도해야 믿음이 생긴다
“제가 이걸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여차하면 발을 뺄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순 없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일사각오로 정진한 사람만이 평균을 넘어서는 탁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따금 사탄의 낚시 바늘이 우리의 입술을 꿰뚫을 때가 있다. 이 바늘 끝에서 벗어나려면 또 얼마나 격렬한 기도의 파닥거림이 필요할지를 계산해보면 도저히 기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
우리는 기도로 파닥거릴 수밖에 없고 파닥거려야만 한다. 우리에게 기도는 옵션이 아니다. 믿음이 없다고? 어쩌겠는가 믿음까지 달라고 파닥거릴 수밖에...
조금씩 천천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가 진행될수록 믿음이 오고 마침내 상황에서 오는 고통마저 즐길 수 있는 담대함이 온다. 이렇듯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결국 나를 더욱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만들어 모든 소망을 이루게 할 것임을 믿는, 믿음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믿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답을 구할 필요도 없어진다. 자신 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신하게 된다. 마음이 평안해지며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선다. 그 때부터는 이리저리 한 눈 팔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의 집중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집중을 하면 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기 마련인 자신만의 특별한 천재성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라며 상담을 청해오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상담과 함께 예배참여, 성경읽기, 기도 등의 몇 가지 신앙미션을 제안한다.
말씀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고, 기도를 권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는 그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 중에 막상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예배참여, 성경읽기, 기도 이 세 가지 중 한가지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떤 상담도 그저 성도간의 수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를 실천하지 않는 이들은 아마도 스마트 폰을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며, 친구들 만나서 수다를 떠는 등 평상시 하던 행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어쩌란 말인가?
시험공부를 안 하면서 성적 떨어 질까봐 불안하다고하면 어쩌란 말인가. 일해야 할 사람이 놀고먹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불안하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해야 할 일을 안 하면서 불안하다고 말하면 어쩌란 말인가.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성적 향상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고, 급여는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며 믿음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불안하면 불안함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불안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만 있으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있다.
절박함, 간절함은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곤 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이 있다.
“그 땐 정말 절박했었습니다.”
말만하고 도무지 행동 즉,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심한 경우 성인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밥값조차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이러하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이런 의견도 있다. 한 선교단체에 임원으로 있는 어느 형제님의 말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나태함을 덮으려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다른 목회자는 이 같은 성도들을 일컬어 우리 안에 갇힌 맹수를 빗대어 ‘교회 안에서만 포효하는 호랑이로 비유’하기도 했다. 연로한 노부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데 자신은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아쓰며 하나님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 담벼락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상에는 분명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주의 길을 가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태함을 피해 적당히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이들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족, 직장, 친구들로부터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은 한번쯤 스스로를 점검해 봐야 한다는 사인일 수 있다.
직장도 구하지 않고,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교회 내에서 열심히 봉사를 한다고는 하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늘 불안하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어째서 마음이 그리 불안할걸까. 실패감과 상실감에 짓눌려 있는 그에게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에서 오는 기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성경말씀에 이론적으로 능통하나, 본인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그 말씀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이뿐 아니라 이들은 모든 실천에 취약하다. 말씀실천, 기도실천, 업무실천, 운동실천, 공부실천... 누군가 조심스레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 해도 그들의 나태는 꺾이지 않는다.
그들 또한 그런 자신의 무능하고 의지박약한 모습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신의 나태함을 본인의 손으로는 도저히 꺾지 못한다. 도대체 이들이 이토록 실천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나태함 때문일까?
“요즘 젊은것들은 절박함이 없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박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기에 절박하지 않을 뿐이다. 헝그리하지 않은데 어찌 헝그리 정신을 갖겠으며 절박한 상황이 아닌데 어찌 절박한 심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책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절박하지 않은데 억지로 절박한 마음을 가지려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의식주가 해결 된 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절박함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태해서 그래요.”
그러나 다방면에서 나태한 사람은 없다. 나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성실하다.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성실한 영역이 있다.
“응답 못 받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다.”
상대방의 영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정죄’라고 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것을 교회는 분위기상 금하고 있다. 하지만, 정죄가 과연 나쁘기만 한걸까. 타인에게 적용하면 분쟁의 도구가 되지만 본인 스스로에게 적용하면 수련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조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 못 받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 믿음만 있다면 응답 받는다는 말 아닌가.
“충분히 기도하지 않아서다.”
→ 충분히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면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 있는 상태의 사람들을 살펴보자. 먼저 행동이 유발된다. 예를 들어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적이 좋아질 거란 믿음이 있는 학생은 공부에 최선을 다하게 되고, 스스로 몸짱이 될 거란 확신이 있는 이들은 끈기 있게 운동을 할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행동에 필요한 동기도 유발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적당히 시늉만 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생길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 기도다. 둘째 선포다. 주님께 기도하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반복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믿음이 올 때까지!
마지막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다보면 자신이 ‘어쩐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더 예뻐해 주시고 상급 또한 주실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이것은 자기 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보상심리에 가깝다.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을 잘 주실 것 같은 믿음이 오며, 그 믿음은 충분한 기도의 동기가 된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해도, 잘 못해도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죄를 저지르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영적인 본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없애는 것은 바로 불순종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학생은 선생님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선생님을 밝은 미소로 대할 수 있게 만든다. 선생님 또한 그런 그들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반면, 비행청소년들은 본인들이 혼날 짓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칭찬이나 상급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을 못 마땅해 할 거란 생각이 강해지면 일종의 신념, 즉 믿음이 된다. 그 믿음은 곧 적대감과 배타적 심성을 형성하여 실상을 만들어 낸다. 정말로 사람들이 본인을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상급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이치로 예배를 잘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구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긴다. 이렇게 예배를 잘 드리니 주님께서 자신을 기뻐 받으실 것 같은 기대감이 기도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주님 앞에서 부르짖는 것을 방해하던 모든 사탄의 족쇄들이,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부흥을 부르짖게 될 것이다.
정상적이라는 표현은 평범하다는 표현과도 일정부분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평범한 행동 패턴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반면 평범하지 않은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즉,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저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믿음 또한 그러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믿음이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기에 믿음이 있는 사람, 특히 믿음이 강한 사람을 보면 이상히 여긴다. 그렇다면 어째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걸까.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아, 시끄러워요!”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저리 가세요!”
“오직 믿음, 오직 예수”
분명, 이런 사람을 보면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 거기에는 적당한 혐오감도 포함 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저런 식의 주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보인다. 융통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입장조차 배려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믿음만은 확실해 보인다.
“당신은 저 광인처럼 보이는 사람만큼의 믿음이 있습니까? 당신은 저 분처럼 뛰어나가서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부르짖을 두둑한 믿음이 있습니까.”
“제가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저거 민폐잖아요. 저거 기독교 욕 먹이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예화가 있다.
“전도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불구덩이에 있는 사람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불구덩이에 빠진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 만난 후,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었습니까?”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고상하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구사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전해야겠다는 의지가 이성보다 약한 사람은 침묵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오직 예수,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예수님 안 믿으면 큰일 납니다.”
스무 살 초반, 출근 할 때마다 신정네거리역에서 잠깐씩 거리복음을 전했었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담대하지도, 멋지지도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숫기 없는 목소리로 소심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하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나와 눈길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는 점이다. 얼마나 표정이 굳어있고 목소리는 어색했는지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힘겨운 시도를 했던 것은 값없이 받은 귀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면 더 큰 일감을 맡기실 것 같은 기대감과 순종하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주님께서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실 것만 같은 풋풋한 두려움이 공존했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주셨고 그것에 순종할수록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조금씩 효율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 발전은 나에게도 해당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런 식으로는 단 한명도 전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믿음은 인류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나 한사람을 위한 것이다. 복음 전파는 복음을 전달하는 기능이외에도 순종하는 당사자를 훈련시키는 기능이 있다. 신정네거리역 앞에서 소심한 복음을 전하던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 떨지 않는다.
사람 앞에 일대일로 마주하면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수줍음 많던 조리사청년이 말로 먹고사는 직업에서 억대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고교시절, 그렇게 어렵던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종로에 있는 스피치 학원에 보내셨다. 하지만, 그의 수줍음은 학원조차 하루 만에 도망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제 사람들 앞에서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믿음이란 1차적으로 본인을 점령하고,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자신이 먼저 완벽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것은 설득력보다 중요하다.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하면 된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라. 그러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어.”
“오직 예수”
“그럼 죽어도 좋단 말이냐?”
“오직 예수”
“우선 안 믿겠다고 하고 나와서 다시 믿으면 될 것을... 융통성이 없구나.”
그 융통성의 결과가 신사참배였다. 대한민국을 복음화 시킨 것은 융통성과 이성에 사로잡힌 지식형 설교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일갈하는 융통성 없는 선배님들의 거룩한 열정이었다.
역사 속에서, 아니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문을 당하다 죽임을 당하고 있다. 동시에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고문했던 간수들 중에 상당수가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들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들은 말은 고작 ‘오직 예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시오.’ 정도의 말이었을 텐데 무엇이 이들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뒤 흔들어 놓은 것일까.
특별한 삶을 살길 바란다면 평범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믿음 앞에서 우리는 정상적일 필요가 없다. 아니 정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택적으로 비정상을 터치해야 한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소리 지르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성도의 기도가 경망스럽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주님께 온전히 집중해 보라. 모든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쳐 보라. 걱정, 분노, 스마트폰, 약속 등등 계속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임의적으로 털어내려 몸부림치다 보면 어느새 정상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핍박은 대중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고치려하고 공격하려 한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그들의 내면에서는 무수한 다짐의 반복이 진행 되고 있는 상태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표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완벽히 집중상태에 이른 사람은 집중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남들의 시선? 상관할 여력이 없다. 모든 에너지 소모를 차단하고 목표에 집중한다.
언쟁과 변명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삶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삶의 성과들을 이룩한 사람들을 보라. 남들, 심지어 가족들의 일조차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일 밖에 몰라요.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지요.”
업무성과도 최고, 다른 부분에서도 최고라면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10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에 집중한 결과, 한 가지 영역에서조차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다.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선택과 집중이라는 과제 앞에서 최선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비로소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알아 볼 수 있게 되며 나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운동효과 포스팅 : 운동하며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 기록
건강식품 포스팅 : 건강식품 섭취 시 나타나는 건강상 변화 기록
기도효과 포스팅 : 기도하며 나타나는 삶의 변화 기록
기도와 운동에는 공통점이 많다. 예를 들어 운동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다 보면 체력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도 함께 강해진다. 기도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면 영성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도 강해진다.
하기 싫다고 계속 안하면? 습관이 된다. 하기 싫어도 계속 하면?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싫지만은 않다. 힘들게만 느껴지던 것에서 나름의 재미도 발견한다. 기도도 운동도 마찬가지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극한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때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개 더 !”
휘트니스 센터의 퍼스널 트레이너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일 것이다. 간신히 목표로 하는 개수를 채우면 그들은 외친다.
“자, 마지막으로 한 개 더!”
한 개를 더해도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다.
“한개만 더, 한 개만 더!”
그렇게 반복하다 정말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 없을 때 비로소 그들은 바벨을 붙잡아 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몸이 극한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들어올리는 ‘한 개 더’가 근육의 성장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육은 더 큰 힘을 쓸 일이 생겼다고 판단 될 때 몸에 들어 온 영양소를 저장이 아닌, 성장을 위해 쓰기로 결정한다.
“휴! 죽을 뻔 했네. 아무래도 근육 량을 더 늘려야겠군.”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겁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 쏟고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하겠는데 한 번 더 힘을 내서 도전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뚜렷한 성장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다. 바쁜 시간을 무릅쓰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갈 때, 이젠 더 이상 기도할 힘도 의지도 없다고 느껴질 때, 한 번 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는 기도의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신앙은 눈에 띄는 성장을 반복한다.
사실 성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성장은 본래 재미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의 캐릭터를 키우는 것도 재밌어서 사람들은 중독된다. PC방에서 며칠 간 잠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다가 죽은 청년의 안타까운 소식을 기억할 것이다. 캐릭터를 키우는 게임은 그 재미가 중독을 야기할 정도다. 지속적으로 그 게임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게임 속 캐릭터의 성장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본래 무엇인가를 성장 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현실 속의 나는 현실의 나를 자양분으로 하기에 캐릭터가 성장하면 할수록 실제의 나는 죽어간다.
현실의 나를 성장시켜야 한다. 아직, 재미를 발견 못해서 그렇지 현실의 내가 성장하는 모습은 훨씬 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게임도 배우기 전에는 재미가 없다.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게임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나를 키우는 그 재미에 빠지면 마치 온라인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끊을 수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운동중독, 일중독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스스로가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보인다.
바디빌더들은 오늘 내가 하는 운동으로 보다 더 좋은 근육을 얻게 될 자신의 미래의 몸을 믿음으로 확신한다. 업무에 밤낮으로 몰두하는 이들은 오늘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얻어질 풍성한 성과들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그 믿음과 확신이 남들에게는 재미없는 업무를 끊을 수 없는 재미로 바꾸어 준다.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의 징표는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서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보다 위치적 우위에 있다고 느낄 때 뭔가 잘 보이고 싶다는 기대심리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위축’은 오히려 본인의 이미지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할 뿐이다.
기도는 나의 주관자가 전능자임을 항상 잊지 않게 만들어 준다. 전능자 하나님의 동행, 임마누엘의 확신이 몸에 밴 사람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예의와 당당함이 조화를 이룬 사람은 특별한 아우라를 풍긴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바라 볼 때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기도를 하면 가장 먼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그러면 이전에 좋던 것이 예전처럼 좋지가 않다. 믿음이 눈을 뜰 때, 본능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거시적 관점이다. 도박에 미친 사람은 이 짓을 계속하면 나중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가 보인다. 그러면 결국은 중단하게 된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 또한 이 단순한 하루가 쌓여 가져오게 될 미래의 풍성함이 생생하게 보인다. 내가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신바람이 난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미세한 발전과정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양자물리학의 한 이론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과거의 나, 현실의 나, 미래의 내가 모두 연결 되어 즉시즉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불성실하면 오늘의 나도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오늘 내가 성실하면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서서히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즉시 바꾼다.
그렇다면 과거는 어떨까. 과거는 바꾸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과거도 바꿀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당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와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과거의 한 지점에 서 있다.
못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들에게 좀 더 따뜻하지 못했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사치스러웠던 과거, 불성실했던 과거, 그리고 기도하지 않았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왔다.
문득, 베드로 후서 3장에 기록 된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또 2천 년 전에 한 번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그 이전과 이후에 태어난 전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어쩐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할 수 있다’는 암시를 무한 반복해서 생기는 기적
신앙인들이 기도를 하듯, 종교가 없는 이들도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무한 반복해서 기도와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다.
우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사실은 믿음대로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서점이나 강사들 중에 ‘성공’ 또는 ‘꿈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강사들을 보라. 단 한명도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이 법칙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가 없다.
성공자들의 인터뷰나 자서전을 보라. 모두가 자신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힘의 근원이 이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과학자들조차도 믿음의 법칙의 타당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특히, 사람의 생각과 말이 실제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연구들을 읽어 나가다보면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일반인들이 ‘귀신이 있다, 없다’와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논리적 근거 없이 자기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초등학생들의 언쟁과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과학자들이 각자의 이론적 토대를 놓고 의견 대립하는 모습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저명한 과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이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믿음대로 된다는 그 법칙을 누구도 비과학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부정적인 쪽을 선택한 사람은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자신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언쟁은 그 힘에 대한 토론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산속에 호랑이를 보았다는 다수의 사람이 있고, 그럴 리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는가. 당신이 그 산속을 지나가야 하는 여행자라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믿음대로 된다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간증하고 전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다. 새끼 때부터 낳아준 부모를 전혀 보지 못하고 고아로 자란 치타도 성체가 되면 엄청난 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있는 이유는 치타에게 부모의 유전적 특징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 힘을 통해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본인이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던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믿음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고 이것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축복일까?
하나님의 주권아래 통치 받는 삶이 필요한 이유는 본질상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세상이 주는 부와 권력을 선한 곳에만 사용하는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놓으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특별한 힘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자신의 꿈과 목표도 이루며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완벽히 조절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몹시 가난했던 사람이 갑자기 큰돈이 생기니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많은 돈으로 죄만 짓고 다니다가 자신의 인생은 물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주변에 얼마나 많던가.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만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욕망의 실현이 가져올 부작용까지 미리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식공간을 성령님께 내어 드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사탄이 준, 물질의 부유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축복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지혜를 우리는 성령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성령님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직접 설계하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나를 지으신 분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배우려는 열망보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 속에 감춰진 사탄의 의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는 진정한 축복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한복음 10장 10절
2. 타 종교의 기도응답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세상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이것을 통해 초자연적 현상을 체험 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은 동일하다.
그 중에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으며 사회에서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사이비 종파도 있고, 종교가 전혀 없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 모든 종교에는 기도와 응답이라는 공통된 행동이 있고 이에 대한 체험 수기는 놀랍도록 일치한다.
교회 내에도 성령 받은 자 있고 못 받은 자 있듯이 무속인들 사이에도 귀신 받은 자 있고 못 받은 자가 있다. 성령 받은 자중에도 성령 충만한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 있듯이 무속인들 또한 그러하다.
귀신 충만한 무속인들은 실제로 과거사를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미래를 맞추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5명의 무속인이 한 사람의 미래 점괘를 내놓으면 전부 다르다.
미래는 하나님만의 고유영역이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예언기도라는 명칭으로 시험의 합격유무나 사업의 성패, 배우자감 등을 묻고 답하는 것을 교회 내에서도 극도로 경계한다.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 있든지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의 약속만을 말씀할 뿐, 미래에 대한 구체적 예측을 허락하는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사실은 점쟁이들의 미래 점괘가 들어맞을 때가 꽤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 된 일인가. 믿음의 법칙에 답이 있다.
[교회안의 믿음의 메커니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 아멘으로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난다.
점술가가 내 과거사를 족집게처럼 맞추었다. 귀신 충만한 이들은 귀신이 가르쳐줘서 맞췄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리적 스킬, 속칭 말발로 뭉뚱그려 말하다보면 순진한 사람들이 얻어 걸린다.
“와~ 대박, 신통하시네요.”
이때 마음의 문이 확 열리며 그 점술가의 말이면 무엇이든 아멘으로 받을 준비가 된다.
[귀신들의 믿음의 메커니즘]
“이번 선거 대박 날거야.”
→ 아멘으로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난다.
문제는 이들이 좋은 일만 예견하는 것이 아닌데 있다.
“차 조심해.”
공포 마케팅은 세일즈역사 속에서 검증 된, 전통적인 판매 방식중에 하나다. 이런 경고의 말은 무시하고 싶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활짝 열린 그의 영이 그 죽음의 말씀(?)을 덥석덥석 아멘으로 받아 삼킨다. 이것은 마치 성령 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닌데... 천만원!”
“네? 제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점집 문 앞을 나선 후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어떤 차를 조심해야하지? 버스? 택시? 아니면 운전을 하지 말라는 건가? 아냐, 혹시 나 말고 다른 가족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얼마 후, 그가 붙든 믿음이 삶에 실제로 상황을 끌어 들인다. 이때부터 그는 그 점술가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게 된다. 귀신에게 완벽하게 복속된 것이다.
그에게 정말 신통력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확률의 법칙으로 보아도 10명, 20명, 매일 저주의 씨앗을 뿌리다보면 옥토 같은 마음 밭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돌아오게 되어있다. 단 한건만 건져도 1년 치 연봉, 아니 어쩌면 몸통에 빨대를 꽂혀 평생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처럼 소득을 제공해 줄 테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결국 본인 믿음이다.
누군가 저주를 퍼부어도 그것을 모두 튕겨 낼 수 있다면 그것이 그의 삶에서 어떤 물리, 화학 반응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의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커져버렸다. 재미로 한두 번 점집을 들락거리다가 어쩌다 제대로 믿음의 문이 열리면 인생의 주관자가 바뀌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영혼 구원'이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순전히 복을 추구하는 도구로만 종교를 선택한다해도 교회는 합리적 선택이다. 교회는 악재를 예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악재를 피하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만일, 그런 곳이 있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아래 3가지 항목은 모두 ‘믿음’을 전제로 한다.
1. 하나님께 기도해서 받는 응답
2. 타 종교의 기도응답
3. ‘할 수 있다’는 암시를 무한 반복해서 생기는 기적
기도 생활을 오래 한 어르신 중에는 성도들에게 무조건 적인 아멘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분들이 있다. 부정적인 말은 일절 꺼내지 못하게 한다. 그 모습은 독선적이고 때로는 무지해 보이기까지 하다.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죠?”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니까 응답을 못 받지.”
기도 응답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다 당사자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만 돌려서 상대방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는 어떨까.
“할머니 굿 한다고 될까요?”
“어허! 그런 소리 하덜 말어. 부정 타니께.”
“성공적인 자기 암시는 자신이 성공한 긍정적인 모습만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겁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그것에 절대 동의하지 마세요. 긍정적인 상황만 생각하세요.”
믿음과 응답이 발동하는 기술적 원리로만 설명한다면 위 세 가지는 동일해 보인다. 하지만 그 믿음이 오는 근원이 다르다. 여기서 나타나는 차이는 생사를 구분 지을 만큼 크다.
1. 하나님께 기도해서 받는 응답
하나님은 응답을 주실 때 믿음으로 응답해 주신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다보면 먼저 믿음을 주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문제는 아직 해결 되지 않았는데 불안하던 마음이 평안해진다.
산처럼 보이던 문제가 콩알만큼 작아 보이거나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온다.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통해서 내 삶에 유익한 역사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온다.
또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에게 더 유익하게 인도해 주실거라는 믿음이 있어 감사가 나온다. 즉, 상황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다. 이것은 기도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다.
인생의 큰 곤란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진보의 시작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해보라. 거의 모든 이들이 이 능력이 삶에 나타나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소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 믿음이, 사실은 생명을 살리는, 더 나아가 위기를 극복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의 근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도 응답의 메커니즘 ]
기도한다 → 믿음이 온다.
→ 그 믿음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린다.
→ 응답이 내 삶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