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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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낙심하게 만드는 상황보다 더욱 성도를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아직도 낙심 따위나 하는 연약함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낙심하고, 낙심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낙심하며 점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향해 걷다 보면, 종국에는 주님 곁을 떠나게 되는 수순을 밟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님 곁을 떠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복음 15:4~7



연단은 고품질 금속을 제련하는 과정으로 다음과 같다.


불 – 물 –불 – 물 - 불 – 물


열기만이 아니라 냉기 또한 금속의 품질을 높인다. 성도를 제련하는 믿음의 연단은 다음과 같다.


믿음 – 낙심 - 믿음 – 낙심 - 믿음 – 낙심



낙심, 불안 등 연약함으로 반응했던 시간도 성도를 강하게 만드는 한 공정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추가적으로 좌절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악과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그것까지 이미 염두에 둔 설계를 완성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는, 낙심하는 모습 때문에 추가적으로 낙심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유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4


낙심은 불신앙 즉, 죄의 증거다. 그런 이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것이 율법이고 원칙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제 불능상태로 만드는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죄라는 수류탄을 끌어안고 자폭하신 것이다. 나의 죄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곁에 역사하는 죄와 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추가적인 정죄는 불법이며 허상이다. 


생생하게 자신을 짓누르며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사탄이 송출한 홀로그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족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자신을 더욱 괴롭히는 마귀 짓에 동참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그래야만 낙심에서 다시 믿음으로 옮겨 갈 수 있다. 간신히 믿음을 되찾은 후에라도 또다시 낙심에 빠지게 되었을 때 갈팡질팡해도 좋으니 기억하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 욥기 23:10


이 사실을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본인 믿음대로 될 것이다. 연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본인 때문이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 3~4


연단의 크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의 크기와 비례한다. 전리품이 클수록 전쟁도 큰 법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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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여기, 일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있다. 

일은 하고 싶지만 신체적 장애가 있어 못하는 사람, 열심히는 하고 싶지만 불성실이 몸에 배어 못하는 사람. 

어쩌면 후자 역시 ‘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 


신체적 장애로 몸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의지적 장애로 몸과 마음을 본인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알고 보면 그들 또한 인정도 받고 싶고, 성취감도 느껴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데 몸과 마음이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간다. 성실히 일하고 싶은데 자꾸만 핑계가 늘어난다. 기도의 유익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딴생각이 들어온다. 그런데 만약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약속되어 있다면 어떨까? 


‘하루에 5시간씩, 10개월간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하면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

‘하루에 9시간씩, 5년간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삶을 뒤바꿀 만한 금액을 주겠다’

‘하루에 2시간씩, 3년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세계의 민족 위에 뛰어나게 쓰실 것이다’


이러한 보장이 약속된다면 실천은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장이 약속되어 있지 않다 해도 제시된 기간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한다면, 한 분야에 몰입하여 일한다면, 집중하여 기도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긍정적인 성과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에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과거완료형’이어야 한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을 이미 이룬 것처럼 믿어야만 그에 걸맞은 행동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또 믿음은,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꿈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사랑이 넘친다. 나는 이미 영육 간에 풍성하며 성실하고 지혜롭다. 나는 이미 성공했으니 성공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믿음은, 모든 약함을 물리치는 강력한 동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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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성품은 잘못하면 엄중히 벌하시는 공의 즉, 두려움이다.


악한 자들과 그의 자손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고 이 같은 영적 통계치는 인과응보라는 분석데이터를 만들어 냈다. 실제로 권선징악적인 신의 메커니즘은 비단 기독교만의 가르침이 아니다.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는 영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주술자, 무속인 등 영적인 매개가 있고 이들은 모두 죄지은 자를 벌하시는 신의 존재를 전한다. 


그들은 신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거나 짐승을 죽여 속죄를 시도한다. 개중에는 인신 제사를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신은 하나뿐이며 신을 만날 수 있는 통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그들이 알 리 없다. 이처럼 두렵기만 한 신에 대한 존재감은 십자가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십자가를 통해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성품, 그것은 사랑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녀들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직접 찾아 내려온 아버지 같은 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펼쳐진다. 


1. 죄와 회개 사이를 오가며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누리지 못한다. 신앙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늘 힘들고 고난만 따르는 것처럼 생각돼‘도대체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하나도 모르겠을 정도’다. 기도 응답은 고사하고 예수 믿으면 누린다는 마음의 평안조차 없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그러나 빛 되신 주님으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지게 되면 영의 체온도 급속히 떨어져 심령은 떨기 시작한다. 공허감이 못 견딜 정도가 되어야만 비로소 한 번씩 주님께로 되돌아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어느 정도 심령의 체온이 회복되면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을 반복하며 세월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원은 있다. 이른바 부끄러운 구원이다. 구원은 있고 응답은 없는, 이것이 그들의 삶이다. 어떻게든 먹고는 살지만 풍요로움은 없는, 죽지는 않지만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망한 것은 아니나 결코 성공적으로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것이 그들의 삶이다.



2. 처음 주신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며 그대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높임을 받는 (신명기 28장 1~14절) 위치까지 올라서게 된다. 처음엔 마음의 평안 정도가 전부이며 그 외에 삶에 이렇다 할 응답은 없다. 여전히 가난하고 문제 또한 그대로다. 그러나 마음 상태는 달라져 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서 보이지 않던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여기서 더욱 기도에 정진하면 생활에 꼭 필요한 소소한 응답들이 펼쳐진다. 그렇게 계속해서 순종의 강도를 높이며 기도 시간을 늘려가다 보면 사람들에게 힘 있게 증거 할 만한 굵직한 기도의 응답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한 기도 응답과 삶의 증거들을 간증하며 본인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게 된다. 항상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을 살게 되므로 늘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살아 있다.


죄와 교만으로 방종하면 낮추시고 꾸짖으시는 두려운 하나님! 두려움에 눌려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워할 때면 위로하며 일으키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사랑과 공의 앞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밸런스이다.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되는, 이것은 영적인 본능이다. 이를 정죄감이라 한다. 정죄감의 순기능은 죄가 죄됨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죄감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정죄감에 사로잡힌 자는 마음껏 성공을 향한 도약을 시도할 수 없다. 주님 뜻대로 살아 보려는 선한 의지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밸런스는 정죄감에 눌려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원동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1~2절)


실패한 게임에 새로운 코인을 넣듯, 우리의 실패는 리셋되고 또 다시 리셋되어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누군가에게는 공의로 다가와 고난의 채찍으로 사망의 잠을 깨우시는 고맙지만 두려운 하나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풍요와 복을 더하시며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풍성한 사랑의 예수님,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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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0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는 대체로 우리가 자초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일부는 우리가 자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탓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찾아온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은 자신의 삶을 파괴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울 뿐이지요.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남은 에너지를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쓸 것인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할 것인지. 


“예수 믿어도 계속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완벽하게 닮도록 점차 훈련 강도를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점점 훈련 강도가 높아진다고요? 이럴 바엔 차라리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본인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꾸만 자신을 화나게 하는 환경에 노출되는 이유는 본인이 다혈질이기 때문일 수 있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시험에 들어 화를 펄펄 내는 와중에도 또 다른 누군가는 잠잠하게 묵상기도로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피해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1장 13절)


그렇다면 이런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훈련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다. 악한 성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모조리 쳐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1장 中


그러나 훈련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그러니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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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9

문제) 어떤 것이 정답일까?


A.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환경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B. 환경은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철수가 스스로 변하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주변 환경 즉,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이면 어떻게 될까. 여전히 철수를 게으른 문제아 취급을 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반대로 모든 가족들이 철수의 변화를 위해 응원하며 배려해도 철수가 변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가족들은 계속해서 철수를 위한 배려를 이어갈 수 있을까?


줄탁동기 [ 啐啄同機 ]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 (두산백과)


문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노크에 문을 연 사람들은 새 생명을 얻음과 동시에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변화는 강력하여 환경의 영향조차 받지 않는다. 그렇게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내가 변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이들을 내 생각대로 변화시키려 들면 분란만 야기 될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나 요즘 머리 결이 풍성해진 거 같지 않아?”

동의해 달라는 질문 같아서 다희는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미진은 격앙된 음성으로 자신이 요즘 하고 있는 두피 관리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탈모 예방 효과까지 있대”

사실 다희의 눈에는 미진의 머릿결에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다희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와!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좋아졌구나.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더라.”

“정말? 더 열심히 관리해야겠네.”


미진은 틈이 날 때마다 빗질을 했고 더 나아가 두피에 좋은 마사지 방법까지 인터넷으로 찾아서 꾸준히 실천했다. 몇 개월 후 미진의 모발 컨디션은 누가 봐도 최상이 되어 있었다.


미진은 좋은 친구 덕분에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때론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우나 락커룸에서 동건이 민준에게 물었다.

“나 요즘 몸 좋아진 거 같지 않냐?”


“전혀 모르겠는데?”

“이상하다. 나 요즘 계속 운동하고 있는데, 이거 봐 복근도 생겼잖아.”

“복통이겠지”


민준의 빈정거림에도 동건은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했다. 고강도 운동은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 식단조절이 가장 힘들었다. 3주 후, 동건은 다시 민준에게 물었다.

“근육이 좀 선명해지지 않았냐?”


“말라서 그래. 원래 멸치들이 금방 근육 생겼다가 금방 없어지고 그래. 운동 한 달만 쉬어봐라. 근 손실 와서 다 없어질 거다”


동건은 운동을 포기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동을 하려 할 때마다 민준이 한 말들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운동 한 달만 쉬어봐라. 다 없어질 거다.’


힘들게 운동하고 식단관리 하는 것에 비해 어쩐지 몸은 변하지 않는 것만 같다고 느껴졌다. 동건의 컨디션이 바닥을 찍던 어느 날, 그는 결국 운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타인의 의견을 구하는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저 이번에 신학대학에 가려고 하는데 목사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는데 기도 좀 부탁드립니다.”


본인이 하는 일에 뚜렷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타인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반론을 펼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미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것은 믿음이 약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이다. 믿음으로 굳건히 선 사람은 행동에 앞서 망설이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열매 없이 목회를 하다가 시련 앞에서 중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도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열매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빵을 굽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빵틀이다. 빵틀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빵틀부터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빵틀이 필요하다. 믿음대로 빵 모양은 달라질 것이다. 갖춰진 빵틀에 재료를 채워 넣었다면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반드시 빵이 나온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빵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자의 마음은 설렐 것이다. 이제 곧 갓 구운 빵이 나올 터인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에겐 구워진 빵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의 결과를 기대하는가. 새벽기도 알람 소리에 눈을 뜨려 할 때, 부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이 떠지는가. 그 믿음이 없다면, 설렘이 없다면 빵틀부터 점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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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국내 사이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대체 이 따위 멍청한 수작에 누가 속아 넘어갈까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놀랍게도 그것들 하나하나가 1만 명 이상의 영혼을 거덜 낸 전적이 있다. 


사이비의 교리는 대체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만큼 속이 빤히 보이는 조악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이비종교 따위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걸까?


그들에게 믿음을 주는 영적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악한 영이 주는 믿음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힘으로는 그를 회유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들어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사탄이 주는 악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사망으로 이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형통해지는 것처럼 (요삼1: 2) 사이비에 제대로 빠지면 영혼이 잘못됨과 같이 그의 삶 또한 엉망진창이 된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사업도 번성하고 자녀와 가정도 잘 된다는 말에 냉소를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런 경우, 입장을 바꿔 반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탄을 믿으면 영혼이 망가지고 삶도 망가지게 되는 것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꿔서 생각해 보자. 사탄이 아닌 하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될까? 영혼이 잘 되고 삶도 잘 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 믿음이 없으면 다른 믿음이 들어가게 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믿어도 사업은 실패하고 자녀와 가정도 힘들어 진다는 믿음 말이다.

 

교회를 전혀 다녀 본적 없는 사람, 성경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 할 때면 앞길이 구만리처럼 느껴지고 막막한 심정이 든다. 


‘이 사람이 어느 세월에 주님을 영접할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그러나 믿을 사람은 불과 1년도 안 되어 주님을 영접하기도 한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이 믿어진다고 말한다. 사실, 성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반면, 몇 년이 지나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 중에는 믿음을 가져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이들도 있다. 열심히 성경공부도 했지만 그의 배움은 그를 믿음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저도 믿고 싶지만 도저히 안 믿어지는 걸 어떡합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누구는 믿어지고 누구는 믿어지지 않는 걸까. 이것은 지능의 차이일까.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양쪽 진영에 영재와 둔재가 골고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전도를 할 때마다 전도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주님의 역할이다.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된 자들은 하나 같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나는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영적인 정보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본인이 듣고 있는 정보와 관련된 믿음이 오게 된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생명을 살리는 믿음이 오고, 사탄의 메시지를 접하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터무니없는 사이비종교의 교리가 믿어지기 시작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잘못된 믿음을 받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믿어지는 본인의 상태가 신기하지 않은가. 


성경에 기록 된 초현실적인 에피소드들이 믿어지는 이 상황, 이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걸 어쩌겠는가. 의문은 있지만 의심은 들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믿게 된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나의 믿음의 시작점을 찾아보려 한다. 모태신앙이지만 주님을 영접한 것은 20대 초반이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 필자는 군대 보일러실에서 매일 아침 혼자 새벽예배를 드렸고 성경을 꾸준히 읽었다.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은 청년이 그렇게 혼자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성경책을 땅바닥에 팽개쳤다가 얼른 주워서 먼지를 털고 즉시 회개했던 기억이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은근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긴 했었다.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복을 구걸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던 중 내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모든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미심쩍었던 성경의 에피소드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만든 장치리라 믿어졌다. 어쩌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역겨운 메시지를 접하게 되어 잠깐 혼란이 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믿음은 원상 복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사업부도로 힘들어진 재정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다는 진심어린 고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도자가 되어 다른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고 싶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처음 하나님을 믿어 보기로 시도할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변화였다. 


처음 믿기로 선택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믿음이 나를 살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믿음은 모두 동일해 보여도 각각 종류가 다르다. 이를테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다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르다. 하나님은 믿지만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기도응답의 전제 조건이 믿음인데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지 않겠는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또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도를 위한 기도만 응답된다고 믿는 믿음과 삶의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도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다. 전자만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마태복음 9장 29절)

 

믿음이 생기는 순서는 

첫 번째, 말씀을 접하는 것이고 

두 번째, 접한 말씀을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유지하고 있다 보면 

세 번째, 믿음이 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내가 믿어 주는 것 같겠지만 언젠가 그 선택이 나를 대신해서 나의 무거운 삶을 대신 살아내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죄 짐을 맡아 주시고, 내 모든 괴로움과 삶의 무거운 짐을 나 대신 감당하시는 경이로운 광경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앙 초기,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내게도 믿음의 시련이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주님을 영접했고 새벽예배를 포함,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주님 중심으로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기도의 응답이 시작되어 시온의 대로를 달려 본 후에도 믿음의 시련은 찾아왔다. 세상말로 표현하면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싶은 상황도 있었다. 그때마다 부정적인 믿음이 영혼에 엄습해 오곤 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신학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목회를 하지 않아서 벌주시는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들 던 그 때,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며 임마누엘의 믿음을 내려놓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다른 믿음이 들어 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만 기도를 멀리해도 즉각적으로 삶에 반향이 일어나는 나의 삶은 결국 평범 이하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믿음을 붙들고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언제나 좋은 것만 주신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녀들을 다루지 않으신다.”


나는 이 믿음을 선택했고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고 있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 새로운 안목이 열리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과정 가운데 실상을 알게 되었다. 내가 믿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붙들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놓지 않으셨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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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사람들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능력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이 그 힘을 쉽사리 꺼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신 앞에 50층 높이만한 흙덩어리가 50개 쯤 있다. 당신은 혼자서 이 흙덩이를 모두 덤프트럭에 옮겨 담아야 한다. 다행히 당신에게는 굴삭기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신은 굴삭기를 운전할 줄 모른다. 당신의 선택은?

 

A. 평소 사용하던 삽을 내려놓고 굴삭기 운전방법을 배우러 간다.

B. 평소에 하던 대로 삽을 들고 삽질을 시작한다.

 

인생에는 삽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흙덩이들이 있다. 굴삭기를 사용해야만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그런 문제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삽을 드는 ‘성실함’이 아니라 굴삭기를 배우기 위해 삽을 내려놓는 ‘결단’이다. 


 

굴삭기 운전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은 평소 즐기던 취미들을 끊으려는 시도이다. 새로운 배움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TV, 게임, 스마트폰, 사람들과의 수다 등등... 현재 자신의 삶과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몰아내보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이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좌절한다. 그리고 다시 삽을 잡는다.


“역시 난 안돼.”

 

사람의 내면은 비울 수 없다.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는다. 


"고깔모자를 쓴 고릴라를 상상하지 마세요!"


눈을 감고 시도해 보라. 당신은 고깔모자를 쓴 고릴라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좀처럼 떠나지 않으려는 그를 내 쫓기 위해서는 포켓볼치는 너구리가 필요하다. 너구리가 신중한 표정으로 공을 치는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고릴라는 보이지 않게 된다. 


미움, 원망, 후회, 우울 등등 모든 감정은 비우려 노력해도 비워지지 않는다. 그런 감정들을 없애는 방법은 사랑, 감사, 만족, 기쁨 등 다른 감정들로 대체하는 것뿐이다. 


사실 사람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컵 하나 조차도 비울 수 없지 않은가. 컵 속의 물을 비워보라. 공기가 들어 찰 것이다. 그렇다면 공기가 들어 찬 컵은 어떻게 비울 것인가. 역시 다른 물질을 채워 넣는 방법 밖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나쁜 습관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그것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영미는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 억대연봉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영미가 스마트 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억대연봉자가 되어야만 한다. 한 달에 1천만 원 이상이 벌리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녀는 자연스레 스마트 폰 중독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1천만 원이 적다면 3천만 원은 어떤가. 매월 그 정도의 소득이 들어오는 현실을 살고 있다면 영미는 더 이상 스마트 폰이 제공하는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억대연봉자가 아닌걸요? 억대연봉자가 되려면 전문지식을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역시 스마트 폰부터 끊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지금이 바로 영미 안에 잠들어 있는 굴삭기, 즉 잠재의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다. 영미가 굴삭기 운전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굴삭기 운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부터 믿어야 한다. 부정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그 어떤 유익한 배움도 온전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여자가 무슨...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아? 배우는 동안 생활비는? 만약 실패하면 그동안 노력한 시간은? 여태 뭐하나 제대로 성공한 적도 없으면서 또 뭘 한다고?” 


그러나 영미의 컵이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떤 부정도 그녀를 운전대에서 끌어 내릴 수 없다. 처음엔 서툴게 흙을 퍼 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정주부가 칼질하듯 편하게 굴삭기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내면에 잠든 굴삭기를 깨워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든 사람들은 많다. 어떤 이는 운동으로, 어떤 이는 요리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청소를 통해 자신의 잠재의식을 활성화시켰다. 잠재의식은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지만 한 가지에 집중할 때 능력이 극대화 된다. 따라서 초보자들은 한 가지에 집중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상대평가보다는 자신과의 약속만 지키면 되는 절대평가가 좋다. 운동이라는 포괄적인 개념보다 마라톤 완주, 줄넘기 200개처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어떤 이는 앉았다 일어나는 하체 운동에 몰입해서 자신의 굴삭기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그 경험을 가지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트레이너가 되었다. 


"와! 나도 할 수 있잖아."


턱걸이 50개, 책 100권 읽기처럼 노력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목표들을 달성함으로 인해 무기력했던 삶에 활기를 찾고 굴삭기를 사용하게 된 사람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누군가는 스쿼트로, 또 다른 누군가는 달리기로 자신만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 있다. 

 


믿음의 초보자라면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다. 먼저 달라지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변화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 믿음은 삶의 어떤 분야에도 적용이 가능해진다. 


"다른 것도 도전해 보자. 지금처럼 하면 될 거야."


그렇다면 어떤 것을 가장 먼저 선택하면 좋을까. 믿음의 첫 단추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호불호가 없는 완벽한 터닝 포인트,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이 가장 많이 추천하고 있는 터닝 포인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가장 먼저 영혼을 소생케 하고 소생케 된 영혼은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본인의 영혼이 잘 되었던 것처럼 범사 또한 형통하게 되어 감을 경험하게 된다 (요한삼서 1장 2절) 


그리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 자신의 삶에 함께 해주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전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이다. (사도행전 1장 8절) 

 


다시 영미에게로 돌아가 보자. 영미가 억대 연봉자가 되려면 믿음의 스쿼트를 시작해야 한다. 


“구령은 앉으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어서면서 억대연봉자 되겠다.”


구령은 바꿔도 좋다. 단, 예수님을 끊임없이 부르며 원하는 목표가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 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믿음의 선포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의 스쿼트를 천 개, 만 개씩 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믿음이 오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모든 굴삭기 오너들이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매뉴얼이다. 당신이 억대연봉자가 되길 원한다면,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믿음으로 억대 연봉자의 하드웨어를 갖추는 것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긍정적인 믿음으로만 가득 차 있던 인간의 마음은 죄를 지음과 동시에 부정적인 믿음으로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사망의 권세아래서 부정으로 가득 차버린 인간이라는 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채워져야만 모든 부정들을 몰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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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아이가 태어나면 저절로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반복학습을 통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우고 그것은 이내 후천적 본능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부정적인 어른이 된다. 부정적인 어른들의 가르침은 다시 아이에게 대물림 된다.


“저는 만화가가 될 거예요.”

“안 된다. 그거 하면 밥 굶는다.”


“저는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 그럼 일단 성적부터 올려야지.”


부모는 아이에게 도전 정신보다 두려움부터 깨닫게 만든다. 아직 아이는 어려운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믿음이 없기에 꿈을 포기하고 만다.


“제 말이 틀렸나요? 공부도 안하는데 어떻게 의사가 됩니까.”

“공부를 잘 해야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되고 싶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공부도 안하는 녀석이 입만 살아서 의사되겠다고 말하면 의사가 됩니까?”

“첫 걸음마는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모든 행동에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필요하다. 특히 사람을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기가 필요하다. 억지로 매를 때려서라도 아이의 성적을 어느 정도는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상위권 성적은 당사자가 능동적으로 공부를 해야만 거둘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공부에 대한 능동적 의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수 있겠지만 ‘믿음’을 빼 놓을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공부할 수 있겠는가.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즉, ‘열심’이라는 행동은 ‘믿음’이라는 동기의 부산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미 어른이 되어 부정적인 세상에 동화되어 버린 사람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있다. 잘못 꿰어진 첫 번째 단추를 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믿음의 단추를 채워보자. 아무런 단추도 채워지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주변인들의 칭찬은 아이의 믿음에 촉매역할을 한다.


우연히 몰입을 통해 한 분야에서 성과를 냄 → 주변인들의 칭찬 → 더욱 몰입하게 됨 → 탁월한 전문성


“와! 잘했다.” (처음 한 것 치고는 잘했다는 뜻)

‘응? 잘했다고? 내가 이것을 잘하는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진 아이는 그 일에 몰입하게 되고 얼마 후, 진짜로 잘하는 사람이 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재들의 탁월한 수행능력이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그들이 지능이 높게 태어나서 그런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게 태어난 천재들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천재들도 존재한다. 반면, 어린 시절 영재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탁월함이 사라진 경우들도 있다. 


최고 중에 최고를 가리는 세계대회 참가자들의 기록을 보면 기록에 큰 차이가 없어 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는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능력차이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고 후천적인 노력으로 실력을 갖춘 이도 있을 것이다. 즉,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렇게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법을 알게 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새롭게 도전하는 분야에서 경력자들을 따라잡고 이내 앞지른다. 


우리는 이들의 방식을 배워야하지만 ‘성인’이 되어버린 그들의 메커니즘은 이미 유기체적인 역동성을 띄므로 분리해서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걸음마부터 시작해보자.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 아이의 역할은 우리이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빌립보서 4장 13절)


마치 어린 아이처럼 모든 믿음의 말씀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멘, 믿습니다. 맞아요. 저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처음 내뱉은 ‘할 수 있다’는 이 고백은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 그러나 믿음의 기준에서 볼 때 그 고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딛으며 믿음의 전진을 시도하는 경이로운 광경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안 믿어지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안 믿고 있으면 끝까지 안 믿게 된다. 처음엔 누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긴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믿음이 없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불신자들 가운데서 믿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믿음의 DNA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우월한 영적유전자는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증명이 되기 시작한다.


A단계: 처음엔 억지로라도 믿는 것이다. 

믿어져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전진은 시작된다. 이것은 전기의 작동원리를 몰라도 누구든 스위치를 누르면 전구에 불이 켜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불신앙과 믿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믿음의 고백을 선택하며 걸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정말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믿음은 아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믿음의 형질이 바뀌어가는 과정일 뿐.



B단계: 슬슬 믿음이 오기 시작한다. 

슬슬 기쁨이 오고 더 이상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아도 저절로 긍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도 하는데 네가 왜 못해’ 따위의 상투적인 응원문구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믿음의 고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 안에 거하며, 끝까지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그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나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 왜 못 하겠냐. 남들도 다 하는데... 내겐 주님이 계신데...”


똑 같은 고백인데 영향력이 다르다. 그것은 내가 내 뱉은, 살아있는 나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점점 문제 해결의 실마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믿음대로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표정이 밝아지고 음성에는 힘이 들어간다.



C 단계: 다시 믿음이 흔들린다. 

믿음이 사라진 것 같다. 혼란스럽다. 여기서 다시 믿음을 붙잡기로 결단하면 A단계로 간다. 다시 B, C 그리고 또 다시 A부터 C까지를 반복한다. 이것을 연단이라 한다.


연단하다 :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다.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을 반복해서 경험시키는 이유는 그래야만 강하고 쓸모 있는 도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최종단계: 그냥 다 믿어진다. 

이전 단계가 ‘가능성, 실마리’가 보여야만 믿음이 오는 단계였다면 (부정적인 사람은 가능성이 보여도 믿지 않는다) 믿음의 최종단계에 이르게 되면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믿음이 온다. 


가능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믿어진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크기의 과업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상태가 된 것이다. 

부정의 땅에서 긍정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안 믿어져서 안 믿었던 것과는 반대로 믿어져서 믿게 된다. 이 믿음은 날이 갈수록 굳세어지며 삶의 모든 영역에 고루 분포되기 시작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면 그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덮어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믿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지니 죄를 지을 수 없고, 설령 죄로 넘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여전히 믿어지니 죄악이 예전처럼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업무 현장을 덮기 시작한다. 



일반인의 뇌 구조 : 책을 쓰고 싶다. 하지만, 내가 책을 쓸 수 있을까? 출판사에서 받아 줄까? 출판사는 어떻게 공략하지? 집필은 얼마나 걸릴까? 아무도 안 읽어주면 어떻게 하지? 등등...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을 포기하게 만든다. 


믿음인의 뇌 구조 : 책을 쓰고 싶다. 그래 쓰자. 기도하며 진행하면 쓸 수 있겠지. 좋은 결과도 있을거야. 설령 좋은 결과가 없다해도 이렇게 원고를 써 본 것 자체가 인생의 값진 경험이 될 것은 분명 하니까



일반인이 믿음인이 되는 방법은 기도를 통한 믿음의 선포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부정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 이런 믿음의 선포는 세상을 역행하는 것과 같아서 운명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긍정적인 말만 하고 다녀보라. 뭔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거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의 끈을 쥐고 있는 것이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의 저항운동은 반드시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저항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의 조롱이 어느덧 존중으로 바뀌어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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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오래전 친구에게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라는 게임을 배운 적이 있다. 


스타는 온라인에 접속된 다른 사람의 기지를 파괴하는 게임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스타열풍이었다. 친구들은 물론 명절에 친척들끼리 모여도 함께 스타를 하러 PC방에 가곤 했었다. 그래도 나는 스타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분위기상 배워야하나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한 친구의 끈질긴 설득으로 나는 PC방에 앉아 스타를 배우게 되었다.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친구는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딴 생각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 참다못한 친구가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게임을 못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초딩들보다 더 못 한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나는 스타를 즐기는 유저가 되어 있었다. 잘하는 편이라고 말하는 유저를 이길 때도 있었다. 갑자기 실력이 향상된 이유는 연습량이 늘었기 때문이고, 연습량이 늘어난 이유는 스타의 재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골프 배우라는 말을 주기적으로 듣고 있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꼭 배워야 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즈니스를 하는데 왜 골프가 필요한지를 모르겠다. 내겐 골프가 공부처럼 느껴진다. 시도를 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잡념이 집중을 방해했다. 그런 나에게 지인들은 말했다.


“계속 하다보면 재미있어질 거야.”


그러나 나는 재미있어질 때까지 ‘재미없음’을 감내해야 할 필요성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골프는 배우지 못했다. 골프를 중단하게 된 이유는 골프의 재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성도들은 기도와 성경읽기가 어렵고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도 그 재미를 발견하기까지는 일정 시간이 걸린다. 세상 것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무조건 재미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도록 그것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그래서 항상 세상 것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세상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 것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도 공평하게 기회를 드려보면 어떨까. 사실 성경 읽기가 처음부터 재미있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도파민 분비라는 보상체계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특정 목표를 달성하면 뇌에서는 그 보상으로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흥분과 만족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컨대, 게임등 인터넷에서 ‘강아지 사진’을 검색하면 몇 초만에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얻음과 동시에 약간의 도파민을 보상으로 받는다. 이렇게 짧은 행동으로 쉽게 도파민을 얻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긴 시간이 소요되는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없다. 현실에서는 가상현실 세계처럼 빠르게 보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온라인 세상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 역시 이 보상체계 때문이다. 온라인은 사람들이 빠르게 중독되도록 보상체계를 조작해 놓은 장소이다. 그곳에선 누구나, 세상에서 실패자로 낙인이 찍힌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접속하면 할수록 그의 뇌는 현실을 살 수 없는 구조가 된다. 

 


현실 속 훈련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보상 물질을 공급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떨까? 


기도는 기도응답이라는 보상을 받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령님의 개입을 통해 느껴지는 난이도가 달라지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성령님의 역할명은 ‘보혜사’ 즉, 도우시는 하나님이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교관역할을 하시는데 성도들이 낙심해서 포기하지 않도록 보상속도를 조정하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쁨으로 훈련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스스로 기도 훈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랜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조차도 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성도들이 말하는 공통적인 간증이 있다.


‘새 신자 때는 응답을 잘 주셨다.’


새 신자 때의 경험담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 도움이 필요한 그 순간에 딱 맞춰서 돕는 손길을 보내신다. 

-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답을 때마침, 목사님 또는 다른 루트를 통해 즉시 듣게 하신다.

- 심지어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생각만 해도 그것을 먹게끔 해 주셨다.

 

비록 소박하긴 하지만 이런 사건을 통해 새 신자는 친밀하신 주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새 신자란 주님을 만난 성도를 말한다. 즉, 교회는 다니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성경을 읽으면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을 만났었지만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린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성경을 읽다보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마치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래된 부부처럼, 성경을 읽다보면 주님과의 재회가 가능해진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 특유의 재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 것에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특별한 가치이다. 자신이 점점 똑똑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을 보면 혼자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이 점점 특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평안을 경험하고 안정감을 느끼며 뜬금없이 기쁨이 샘솟기도 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 처음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는 정말 지독하게 재미없는 행위일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눈까지 감고 있어야 하니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하지만 기도가 거듭될수록 하나님과의 연결 속에서 엄청난 도파민, 아니 엔도르핀, 아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하고 강력한 기쁨,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강력한 호르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세상은 이미 죽을병 조차 낫게 만드는 기적의 호르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몸속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용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호르몬, 그 이상의 어떤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우리에게 있던 것이고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시스템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의 연결 속에서 그 메커니즘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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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2-06

우선 과거를 바꾸는 법부터 알아보자. 


양자물리학의 한 이론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과거의 나, 현실의 나, 미래의 내가 모두 연결 되어 즉시즉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불성실하면 오늘의 나도,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오늘 내가 성실하면 미래의 나도 그러하다. 서서히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즉시 바꾼다. 그렇다면 과거는 어떨까. 과거는 바꾸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과거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와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과거의 한 지점에 서 있다. 못 이룬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들에게 좀 더 따뜻하지 못했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사치스러웠던 과거, 불성실했던 과거, 그리고 기도하지 않았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과거를 바꾸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과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아도, 계속해서 다시 부정적인 쪽으로 되돌려 놓는 세력이 있다. 

 

문제)

A와 B, 둘 중 어떤 것이 우선일까?

  

A.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환경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 

B. 환경이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한다.

 


철수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주변 환경 즉,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이면 어떻게 될까. 여전히 철수를 다혈질에 게으른 무능력자 취급을 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반대로 주변 모든 가족들이 철수의 변화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철수가 전혀 변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가족들은 계속해서 철수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수 있을까.

 

줄탁동시 [ 啐啄同機 ]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 (두산백과)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노크에 응답한 사람들은 새 생명을 얻음과 동시에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변화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며 매우 강력하여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변화 받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내가 변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중요한 요소가 빠졌다. 강권적인 주님과의 만남. 그 원동력이 없으면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님과의 만남이 기반 되지 않은 이들을, 내 생각대로 변화시키려들면 각종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한다. 

 


구원을 받게 되면 곧이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장이 시작된다. 성장 속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장 즉, 성화의 속도는 각자 주님 닮기를 사모하는 강도와 비례한다. 이는 기도를 통해 가속화 된다. 혹시 나 혼자만 강하게 연단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래서 왜 나만 이렇게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억울한 마음이 드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누구보다 간절히 주님 닮기를 소망하기 때문일 수 있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받기를 사모하기 때문일 수 있다. 

 


본인 뿐 아니라 타인까지 주님을 닮도록 변화시키려 드는 이유는 또 있다. 아무리 내가 변하려고 노력해도 자신이 속한 환경, 예컨대 가족들이 그대로면 본인도 결국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어떻게든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변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주님을 만난 성훈은 자신의 과격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성훈이 온유한 모습을 보이자 그의 가족들은 점점 더 강도를 높이며 그를 화나게 만든다. 성훈은 가족들에게 부탁했다. 주님 닮기 원하니 나를 자극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의 행동 뒤에는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계략이 있음을 성훈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알아도 참아지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참다못한 성훈은 자꾸만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가족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참다 폭발한 성훈은 평소보다 몇 배 더 날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화내는 사람 옆에 있으면 당연히 화를 낼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므로 온유함을 추구하는 성훈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온유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그것은 온유함을 추구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환경조성 운동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은혜가 있는 곳에는 사탄의 역사도 강하게 임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패턴이라 부른다. 

 

- 모처럼 운동을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감기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 처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자동차 수리비가 나가게 되었다.

- 남편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그날따라 계속 화나게 만든다.

 


뭔가 부정적인 행동을 중단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시작하려 할 때면 세상은 우리의 변화를 방해하려 든다. 이런 세상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어디에서 올까? 믿음은 들음에서 생성된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하시는 조치는 선지자 즉, 메신저를 보내서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메신저를 만나곤 한다. 그것은 설교일수도 있고 유튜브 영상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메신저들이 있다. 그러나 패턴은, 아니 사탄은 모처럼 만난 메신저와의 거리를 떨어뜨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첫째, 메신저의 단점을 보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단점을 고쳐서 쓰시기 보다는 강점을 들어서 사용하신다. 만일 단점이 완벽히 제거된 사람만 사용하신다면 아마도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행동까지 완벽한 메신저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말씀을 들을 때에는 상대방이 전하는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의 생활태도와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둘째, 메신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어떤 이는 모처럼 좋은 메신저를 만나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본인을 멀리하도록 만든다. 무례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반복해서 떠나가게 만들거나 실천 없는 불성실한 태도로 멘토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가능성 제로의 사람으로 비춰져서 멘토로 하여금 돕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 정황상 변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변화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변화를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단다. 이전의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단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는 개가 될 수 없다.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죄인인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듯, 죄인이므로 죄를 짓는 것이다. 죄인이 선행을 하면 어떻게 될까. 선행하는 죄인이 된다. 


“좋은 일을 하면 상쇄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사람은 살인을 저질러도 무죄인가요?”


이미 저지른,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을 크고 작은 죄의 값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는 어떤 선한 행동을 해도 죄인이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종자 자체가 바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이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로마서 11장 17절)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시기에 모든 시제를 한 선상에서 바라보시며 조정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의 변화는 과거완료형이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그렇게 확정 되는 것이다. 구원도, 성화도, 이미 확정이 되며 누구도 이것을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붙들고만 있으면 우리는 꾸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의 통로를 차단해버리면 바뀐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다시 부정적인 방향으로 되돌려지기 시작한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데 (요한복음 1장1절) 말씀을 차단했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5절)

 

   


The Power Church

대한예수교장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