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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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

우리는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도가 잘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는 걸까요? 못하는 걸까요?



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당사자가 고의적으로 그 행동을 할 의사가 없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만 사실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직접적인 이유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인이 확신하는 일에 대해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응답의 확신이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이 구분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기도 응답에 대해 확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도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은 없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가장 먼저 기도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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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

우리의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그 증거로 어느 한쪽이 약해지면 반대쪽도 함께 약해진다.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에 병이 들면 얼마 후 그것이 건강악화로 이어진다. 몸에 병이 들어 건강이 좋지 않으면 신경도 쇠약해지고 잠도 푹 잘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 둘 중에 어느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도 함께 강해진다. 마음을 강하게 먹는 순간 없던 에너지가 생겨서 밥도 잘 먹고 운동도 하게 된다. 몸이 건강해지면 평소 예민하게 반응하던 상황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너그럽게 반응하게 된다. 

  


이 둘은 너무도 닮아 있다. 그래서 이 둘을 훈련시키는 원리도 동일하다. 둘 다 적당한 미션을 꾸준히 반복하면 강해진다. 몸의 경우 달리기, 줄넘기 등의 운동과제를 꾸준히 실천하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점점 강한 체력을 갖게 된다.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독서, 단어암기, 그 외에 학습하고자 하는 내용을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점점 정신력도 강해진다. 운동실력만 느는 것이 아니라, 학습하려는 내용만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힘도 생긴다. 근력, 의지력, 지구력, 집중력 등 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며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세상을 살아 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 다양한 능력이 생긴다. 



이 같은 훈련을 한 뒤에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몸과 정신, 둘 다 마찬가지. 휴식은 단순히 훈련으로 과열 된 열기를 식혀 주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휴식 또한 엄연히 몸 또는 정신을 단련하는 훈련의 한 과정이다. 


일례로 몸을 키우는 바디빌더들의 경우, 신체 한 부분을 훈련한 뒤에는 그 부분을 하루 또는 이틀간 쉬게 해준다. 이렇게 쉬게 하는 이유는 쉴 때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다. 근육은 훈련을 할 때 커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훈련을 견딘 후 쉬는 동안 커지게 된다. 


호된 무게를 경험한 몸이 다음에 또 있을지 모를 무게에 대비해서 근육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휴식 없이 고강도 운동을 계속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근 손실이 발생한다. 오히려 근육량이 줄어들고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정신은 어떨까. 정신도 훈련 후 쉬는 동안 성장할까? 


사실 그것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그러나 계속 정신을 혹사시키면 망가진다는 증거는 있다. 우울증상, 예민함 등 부정적 감정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행동들이 정신적인 휴식도 필요함을 증명하고 있다. 몸이 지쳐 쉬려는 사람이 휴식에 방해를 받으면 예민하게 반응한다.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사람 또한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이따금 정점에 오른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보도되곤 한다. 그들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쉬는 중이었다.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째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휴식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누구나 회복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은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 한다. 어째서 영적인 존재라고 할까? 


여기 죄의 깊은 물속이 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이 죄의 깊은 물속으로 점점 가라앉게 된다. 그렇게 죄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서 죄가 그를 완전히 덮어 버리게 되면 영의 호흡이 차단된다. 즉,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죄를 짓는다. 마치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가만히 있으면 자연 발생적으로 나쁜 생각이 든다. 성경은 나쁜 생각도 죄라고 했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죄의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이 깊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 기도의 발버둥이다. 기도로 손과 발을 휘저어야 죄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죄의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영은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당연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자! 이 증상.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기분.’ 어디서 많이 듣던 증상 아니던가. 


우리 주변에는 공황증상, 심한 경우 공황발작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이들이 있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산소 앞에서 숨이 막히는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공황발작까지는 아니어도 가벼운 숨 막힘 증상, 우울 증상 정도를 경험한 이들은 꽤 많다. 이들이 경험한 증상의 공통점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 즉, ‘숨 막힘’이다. 

  

공기 중에 이토록 많은 산소가 있는데 어째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영의 호흡이 차단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그토록 숨이 막혀할까.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한 시각 장애인 앞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다.


“이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앞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필자가 느낀 바로는 공황증상 또는 심한 우울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섬세하고 오히려 평균보다 마음이 여렸던 것 같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유독 이들만 숨 막힘 증상을 느끼는 걸까. 어쩌면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했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제자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앞을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앞을 볼 수 없는 이유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앞을 볼 수 없던 그는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마음이 병들어 영적인 호흡곤란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 또한 주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한 후, 이를 통해 마음이 상한 자를 회복시켜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곤 한다.


영적인 호흡이 차단되어 무기력과 우울감, 때로는 심한 공황증상으로 괴로워하던 이들은 살리시는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서 즉각 체험할 수 있다. 이런 기도는 응답도 빠르다. 


“주님, 마음에 평안을 주세요.”


이 짧은 기도의 반복이 놀랍도록 큰 회복을 가져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우울증상은 '나 좀 살려달라'는 영혼의 SOS 신호다. 나름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나름 성경도 읽는데 마음은 계속 불안하다면 스스로 죄의 깊은 물속에서 빠져나올 만한 여력이 없는 상태일 수 있다. 그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예배에 참석하다보면 반드시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이란 단순히 나아져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강렬한 에너지의 폭발로 회복을 넘어 주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인생의 반전을 의미한다. 

 

 설교가 마음에 안 들고, 찬양이 은혜가 되지 않아도 염려 할 필요가 없다. 예배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없는 할아버지 목사님이 설교하고, 할머니 전도사님이 찬양인도를 해도 참석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정신도 쉴 때 성장하는가. 그러하다. 그러나 정신의 쉼은 오직 주님 곁에서만 가능하다. 주님 곁에서 자야만 휴식이 가능하고 성장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몸이 편하면 기도하지 않는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주님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몸은 쉴 때 회복과 성장이 되지만, 정신은 쉴 때 썩고 퇴보하게 될 확률이 크다. 이런 연유로 우리의 정신은, 고난을 겪어야 주님을 만나 진정한 쉼을 얻고 성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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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


누구나 해결 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서 본능적으로 취하게 되는 행동은 기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단순히 기도의 형식을 갖춘 주절거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식사기도를 포함해서 평소에도 적당히 기도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간절함’ 이다.

  

문제가 생겼는데 자신이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눈을 뜨기 마련이다. 우리가 보거나 들은 바에 의하면 다급할 때 기도가 잘되더라는 성도들의 간증이 즐비하다. 


다급함이 간절함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간절함이 무엇보다 강력한 기도의 동기가 되곤 한다. 그러므로 결핍, 아픔, 목표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나의 간절함을 촉발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기도의 깊은 경지로 이끄시는 ‘부르심’일 수 있다. 

  


‘주님께 간구하다’라고 할 때의 ‘간구’는 ‘간절히’와 ‘구하다’가 합성된 것이다. 간구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마음의 소원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도록, 그리고 상대방이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담은 행동이다. 간구하는 사람에겐 그 사람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동반된다.

  

- 소리치고 부르짖게 되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신경이 쓰이지 않으며 끈질기게 아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간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도, 자신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간구하려는 대상, 즉 하나님만 보일 뿐이다. 성경에는 응답 받을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쟁취하다시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제발 제 딸의 병을 고쳐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셨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간구했다.


“주여, 개들도 주인 상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결국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칭찬하며 부탁을 들어 주셨다. 처음에 그녀의 간구는 거절을 당했지만 그녀의 지속적인 간절함이 상황을 변화 시킨 것이다.



응답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한 또 다른 사례는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달아 내린 친구들의 경우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의 거절을 수긍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친구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조차 없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무엇이 새 신자나 다름없던 이들로 하여금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어 물러섬 없는 간구를 하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간절함’이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은 그들의 간절함을 촉발했다.

  

“주님, 고쳐 주세요. 아니 제발,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를 해결해 줄 이는 예수님 밖에 없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그들은 망설일 겨를도 없었다. 절망적일수록, 긴급할수록 사람들은 간절해지고, 그 간절함은 강력한 기도의 동기가 된다. 


“에서 형이 저를 죽이겠다며 400명을 거느리고 저에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당신을 붙잡은 이 손을 절대로 놓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때문에 뜻을 돌이키시는 모습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사람이 칭찬까지 받는 상황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이런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긴급한 위기의 순간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그 때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안 들어주시면? 실망하면?”


정말 다급한 순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냥... 저절로... 기도하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하게 된 이유 역시 기도가 아니면 버틸 수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제대한 후에도 우리 집의 경제적 여건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었다. 농장에서 수확한 토마토를 등산객들에게 팔아야 동생의 차비를 챙겨 줄 수 있는 날도 있었다. 토마토가 팔리지 않으면 동생은 학교를 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아버지, 형을 따라다니며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급여를 받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업이나 취직에 필요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형 덕분에, 아버지 덕분에, 친척 소개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친구들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뿐이었다.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기도 밖에 할 수 없던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함을 담아 무릎을 꿇었다. 

  


나는 억대연봉자 모임의 회원으로, 그 중에서 가장 높은 클래스로 등재 되어있다. 내 인생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2006년 이후와 그 이전으로 구분된다.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2006년 이후부터는 도전하는 분야마다 예외 없이 억대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을 사용할 줄 몰랐던 2006년까지의 나는 간신히 급여 100만 원 가량을 받던 회사원이었다. 

  

사실 주님 앞에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구원이 뭔지 십자가가 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구원 받지 않은 교인이었으리라. 그러나 간절한 기도가 나를 하나님께로 집중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게 된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바로 구원의 십자가였다.

  

어떤 이들은 ‘기복신앙’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의 기도를 제한하려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교든, 성화든 모든 거룩한 행동은 주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선교를 요구하고, 거룩함을 강요해 봤자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명기4장 29절)

  

간절함은 가장 원초적인 동기다. 간절함은 복잡한 잡념을 간단명료하게 정리시켜 준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으앙”하고 터트리는 울음과도 같다. 그 부르짖음은 부모의 관심과 보살핌을 이끌어 낸다.

 

‘어! 내가 우니까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네! 옆에 누군가 나를 돕는 존재가 있나보다.’


아이는 필요할 때마다 부르짖어 부모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반면, 구하려 할 때 마다 이런저런 간섭으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울지 않는 아이, 즉 기도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간절함은 뚜렷한 목표가 있을 때 더욱 힘을 받게 된다. 간절할수록 오래 기도하게 되고, 기도 시간이 늘어 갈수록 응답 받을 확률은 높아진다. 간절함을 촉발시킬 수 있는 도구가 ‘선교’라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에 따라 아직 선교를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주님, 저를 좀 봐주세요. 제 말을 들어 주세요.’ 


무엇이든 좋으니 일단 매달리며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필요하다. 예수님께 찾아 왔던 수많은 환자들, 그들도 처음부터 선교의 도구로 자신을 써달라고 기도하며 나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만났던 순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불신자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과정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정식루트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간절해지는 법이다. 간절함은 분명 강력한 기도의 동기가 된다. 그 간절함을 들고 다른 종교에 가면 누구를 만나게 될까? 


언젠가부터 교회 내에서 기도를 구분 짓는 메시지들이 퍼져나가서 지금은 일반화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해라.’


그 말을 이해할 만한 영성이 준비되지 않은 교인들이 타 종교나 세상으로 귀의하고 있다. 한때, 기도깨나 하던 기도의 용사들이 기도를 내려놓고 쉬고 있다. 일단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좋으신 하나님께로 가는데 나쁜 것이 올 리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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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

드디어 기도의 하드웨어를 완성하는 ‘그 힘 사용설명서 따라잡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브리스가 간사를 소개드립니다. 쉽고 편하게 가이드 합니다. 모두가 우습게 볼만한 작은 행동을 꾸준히 실천해서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큰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평소 브리스가가 강조하는 모토는 ‘단순하게, 체계적으로’입니다. 단순화, 체계화가 필요한 이유는 실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사실 현대인들 중에 성공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실천! 


실천에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화, 체계화된 매뉴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브리스가와 함께 기도훈련을 하게 되면 충분히 그리고 꾸준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그 힘 사용설명서 따라잡기’ 시작해 볼까요.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소프트웨어) + 단순한 실천(하드웨어)이 필요하지요. 오늘은 하드웨어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단순한 실천의 반복! 정말 중요합니다. 


어느 조직이든 항상 말만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지켜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들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미련해 보일만큼 단순한 실천을 반복하던 사람들에게서 찬란한 열매가 발견됩니다. 



'한 번에 30분기도' vs '10분씩 3번 기도' 


어떤 것이 더 좋을까요? 쓰임새가 다릅니다. 사탄의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갑자기 튀어 나오면? 재빠르게 10분 기도의 총을 꺼내서 탕! 탕! 쏴야 합니다. 적의 주요시설물을 파괴해야 할 때는 오랜 시간 드리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면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문제 앞에서도 담대히 행할 수 있는 영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깊은 기도로 충만해진 영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뭘까요? 


바로 조금씩이라도 자주 드리는 기도입니다. 영성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이것은 곧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가 유지되면 주님께 받은 은혜 또한 계속 유지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진흙그릇으로 비유하지요. 주님께서 예쁘게 빚어 놓으신 우리는 아직 굳어진 상태가 아니라 살다보면 흠집도 생기고 자꾸만 모양이 찌그러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면 성령님께서 다시 그릇의 모양을 바로잡아 주신답니다. 깊은 기도로 그릇이 빚어지고, 틈틈이 드리는 기도로 그릇의 형태가 유지됩니다.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다보면 마침내 견고하게 굳어져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죠.


힘든 순간에 따로 조용한 공간에 들어가서 10분 이상 묵상기도를 해보세요. 왜 10분이냐고요? 


복잡하던 생각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분 정도는 기도드릴 필요가 있어요. 기도 시간이 10분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몸에 약효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구약과 신약.



오랜 기도 VS 조금씩 자주 기도,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을 통해 효과가 검증된 기도훈련방법입니다. 하단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10분이상 기도하는 방법] 보러가기


처음 기도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링크의 방법대로 기도시간 10분을 채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비전을 주세요.


“10분만 기도하면 인생이 달라 질 거야.”

그렇게 해서 10분 알람이 울리면 다시 이렇게 말해보세요.

“조금만 더 기도할까? 힘들면 언제든지 중단해도 좋아.”


이렇게 자신을 설득해서 조금씩 기도 시간을 갱신해 보세요. 때때로 기도시간 신기록에도 도전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블로그 또는 다이어리에 기록으로 남기세요.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시작 됩니다.



예 ) 기도시간 기록 방법

제목 : 그 힘 사용설명서 따라잡기 1일

2022. 2.4 

5:00 ~ 6:00 

9:00 ~ 9:10 

12:20 ~ 12:35 

21:00 ~ 22:30 



세상에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지요. 기록이 쌓여갈수록 세상 어떤 교육으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기록을 남기세요.


“아, 대충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네요. 제 나름대로 응용할게요.”

“노노노! 이것만큼은 응용하지 마시고 그대로 실천해 보세요.”


“사실 실천하려는 과제가 너무 많아서요.”

“그 심정 저도 잘 알죠. 읽는 책마다 이거해라 저거해라... 다 내려놓고 기도 한 가지만 함께 실천해 봅시다.”


1. 도전하면, 최소한 도전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 휘트니스 이용권을 끊어 놓으면 1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운동을 하게 된다. 


2. 10분밖에 못해도 괜찮다. 며칠씩 기도 못한 날도 있을 수 있다. 괜찮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기도를 아예 잊어버리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거룩한 환경이 거룩한 나를 만든다.


3. 카페 하단에 있는 '사명자 기도 노트'에 기도시간 기록을 남긴다. 이 습관이 기적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반드시 기록하고 삶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변화에 깜짝 놀랄 준비하시라! 


세월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발전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퇴보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더 나은 내일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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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

사람들은 팔다리를 잃은 이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수영을 할 수 있게 된 모습을 대단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큰 노력 없이 수영을 하고 달릴 수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감흥이 없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그것들이 없었을 때의 불편함과 비교해 보며 감사를 연습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감사 훈련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사를 모르고 사는 이들에게는 이런 초보적인 감사의 연습이 필요하다.


셀 수 없이 많은 세포들의 연합체인 우리 몸이 일말의 혼란 없이 한 방향으로 일사분란하게 걷는 것은, 또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경이로운 장관이다. 당신은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야 겨우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다른 누군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숨 쉬듯 편안하게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는 자신이 얼마나 유리한 조건에 서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부여 된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히 여기듯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을 당연히 여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당신은 누군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마음껏 바라보며 달리고, 만지며 원하는 만큼 소리도 지를 수 있다. 장애를 의지로 극복하는 것은 분명 박수 받아 마땅할 대단한 일이다. 당신은 그 대단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세상은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곤 한다. 그런 세상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당신은 어쨌거나 대단하다. 


우리는 장애인들이 비범한 성공을 이룬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도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였을 것이다. 남들은 노력조차 필요 없을 손가락 움직이는 동작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걷는 동작하나를 위해서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신체부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머릿속 생각으로만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수없이 생각을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걸을 수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일어설 수 있다.” 


그렇다면 일어설 수 있는 우리는, 걸을 수 있는 우리는, 이 튼튼한 팔과 다리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을까. 평범함을 넘어선다는 것은 정상적인 범위에 머무르겠다는 말이 아니다. 


평범함 = 정상, 정상적인 행동 = 평범한 결과

특별함 = 비정상, 비정상적인 행동 = 특별한 결과


비정상적으로 보일 만큼 특별한 행동의 실천이 특별한 결과를 낳는다. 남들의 눈에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서는 평범함을 넘어설 수 없다. 필자가 모든 수익 통로를 잃고 보험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의 이야기다.


자신이 도전하는 영업 분야에서 생존가능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처음 입사 했을 때 지인을 찾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로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지인들만 몽땅 가입시키고 더 이상 영업 대상자를 찾을 수 없게 되면 회사를 그만 둔다. 회사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본인과 그의 지인들에게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지인은 가장 마지막에...”

어쩌면 이것은 모든 영업자가 모든 영업 분야에 적용해야 할 기본 중에 기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것을 원칙으로 했었기 때문에 신입사원 시절, 생면부지의 고객들에게서 계약을 체결 받아야만 했다. 관리자는 나에게 나의 지인리스트를 적어달라고 했다. 나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원칙을 깨고 지인을 찾아간다.”

“보험업을 포기한다.”

“기도한다.”


나는 관리자의 요청을 거절하고 3번을 선택했다.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보일정도로 기도했다. 그 때 내가 기도하는 모습은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내가 목표로 정해 놓은 실적이 적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반복 기도했다. 


식사하며, 걸으며, 운전하며,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했다. 집중기도의 영향 때문에 나도 모르게 머리가 끄덕여지고 미간과 눈꺼풀은 지그시 눌려 있기 일쑤였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2400, 2400, 2400, 2400”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이따금 소리가 입 밖으로 세어 나와 옆 자리의 승객들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 내가 속으로 하는 기도를 들었었다면 호되게 나를 책망했으리라.


“아니 무슨 기도가 마법주문인가요?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게...”


나도 알고 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해도 들으신다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만 말해도 들으시지만 나의 영혼은 한 번만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수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이번 목표는 이것이다.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


가급적 사람들과의 대화까지 피해가며 나는 나의 세포들에게 소리치곤 했다. 며칠에서 몇 개월 사이마다 새롭게 갱신되는 세포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염원하며... 얼마 전까지 경험한 실패와 상실감에 뒤덮여 있을 나의 세포들에게 승리의 세포분열을 촉구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세포들로 채워졌고 첫 번째 달부터 지점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나 한 사람의 실적이 지점 모든 사람의 실적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적도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으며 연도대상 및 억대 연봉자 모임 최고 등급 달성자로 등재되었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비정상적이게 보일정도로 기도한다면, 아니 그렇게 기도해야만 평범함을 넘어서는 특별한 나로 갱신될 수 있다. 반복된 깊은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목표가 나를 위해 있는지 내가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준다. 


마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끼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최상의 몰입을 실현시켜 준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누구든 이렇게 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특별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의견이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세상의 책과 다큐멘터리들은 이 공식, 이 특별한 기술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책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의 근본적 개념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복잡다기한 현대문명을 사는 우리가, 특별한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큼 한 분야에 집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최선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제목만이라도 단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하고 명료하나 분명한 기도의 반복이 거듭될수록, 몸이 나에게 복종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던, 그러나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성화의 첫 단추이기도하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시는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TV를 보지 않을 수 있고, 스마트폰을 유익한 방향으로만 사용할 수도 있다. 운동도 할 수 있고 날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공부도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꾸준히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꾸준히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한 제약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기도, 기도를 오래 할 수 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욱 오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기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기도가 힘들게 느껴진다. 도무지 내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을, 남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일만큼 단순한 기도의 반복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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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1-17

우리는 성령 충만의 이점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성령에 충만해진 상태를 분석해 보려한다.


가장 큰 특징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평안하고 기쁨이 넘치며 그 상태가 유지된다. 인내심이 평소와는 비할 수 없이 강해져서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자극 앞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사랑과 자비, 용서를 비롯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용이해진다. 


약간의 흥분 상태인 것 같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다. 마치 강한 흥분 상태에서 분출되는 아드레날린과 수면을 유발하는 멜라토닌이 공존하는 상태와도 같아서 평소의 자신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던, 소위 말하는 초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면 그것은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정우씨,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타인의 눈에도 좋아 보이는 내 모습, 그것은 타인에게 알 수 없는 기대감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큰 이점이 된다. 한 마디로 성령 충만한 상태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저마다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특정한 조건이 되었을 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이 결국은 ‘집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한 가지 문제에 사활을 걸고 집중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중이 어려운 이유는 집중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집중할 것을 찾느라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상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저는 지금 취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을 위해 집중해서 기도하지 않는 건가요?”

“사실은 취직하려는 곳이 다 마음에 안 들어서요.”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마음이 내키지 않네요.” 


롱궤는 주변일대가 온통 커피콩으로만 둘러싸인 에디오피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마을을 벗어나 본적이 없다. 롱궤가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고민해 봤자 콩을 따거나 굽거나 운반하거나 커피에 관련된 노동일 것이다. 그는 그것 밖에 아는 것이 없다.


“커피콩을 따는 일은 일당 1달러인데 1달러로는 저희 가족 모두를 먹일 수 없어요. 로스팅은 일당이 많긴 한데 자격증 따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해요. 시험 준비하는 동안 먹고 살 일도 걱정이구요. 커피를 운반하는 일은 트럭이 있어야 할 수 있는데 트럭구입은 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 랍니다.”


10년 뒤 다시 롱궤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마을 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어지간한 부자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재력가가 되어 있었다.

“롱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커피콩만 따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할 여건도 되지 않았지요. 트럭을 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구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만 드렸습니다. 왜냐면 기도 밖에 할 게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냥 저희 가족을 지켜 달라고 저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만 기도드렸습니다.”


롱궤는 커피 유통으로 누구보다 큰돈을 벌게 되었다. 커피 유통은 그가 기도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그런 기회를 얻게 되었을까? 


기도했다면 그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서든 올 수 있다고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간증하고 있지 않은가.



성공자들의 성공 속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섞여 있다. 언제나 그러하고 예외는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메커니즘을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좋은 것들을 찾아다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가져다주시곤 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또 내가 들고 있는 선택지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장 이상적인 선택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해 주세요.”

“그런 기도는 추상적입니다. 기도 제목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한 그 구체적인 기도제목들은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정해진 것인가요?”


기도의 진정한 능력은 평소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개입될 때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 커피콩을 따거나, 굽거나, 운반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아가다보면 나의 능력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봉착할 때가 있다. 또는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풀었던 문제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답이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인생에 정해진 답이 없다는 이 말을 우리는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우리는 늘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Best는 무엇일까?


상담학에서 정의 하는 가장 좋은 상담은 클라이언트가 본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것이다. 본인의 문제에 가장 적합한 답을 찾아 낼 확률은 자기 자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내가 전혀 생각해 낼 수 없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런 문제 앞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서만 답을 찾으려 한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앞에서도 본인의 테두리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생각해 낼 수 있는 해답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보편화된 것들로는 다른 이들로부터 특별한 반응을 얻을 수 없다. 


“Think different." 


다르게 생각하라는 문구에 세계인들은 공감을 표했다. 차별화, 혁신, 변화를 모토로 누구나 특별한 것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정한 창의성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틀을 완전히 깨는 것이어서 사실상 평소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고,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살면서 자신의 힘과 경륜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도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예레미아 33장 3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구절은 바로 ‘네가 알지 못하는’ 이라는 부분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 평범함을 넘어서려면 특별해야 하고 특별함을 원한다면 반드시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떤 것이 최상의 선택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다는 것은 결국 가장 최상의 답을 구하는 행위가 된다. 너무 구해야 할 것이 많다면, 너무 선택할 것이 많아서 고르기가 망설여진다면, 그래서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면, 게다가 그 모든 것들이 그 밥에 그 나물뿐이라면,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보자. 


그리하면 내가 알지 못했던 강력한 내가 될 것이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오르고 경험해 보지 못한 컨디션으로 능히 그 아이디어를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마저 뿜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사모하십시오. 사모하고 또 사모하십시오. 그 분은 인격이시기에 우리 인간들처럼 자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마음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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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1-16

1970년대 ~ 1990년대 초까지인 걸로 기억합니다. 


부흥강사들의 메시지 방향성이 기도를 오로지 만사형통, 개인 문제해결을 위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메시지가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적으로 깨어있는 소수의 메신저들로부터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면 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국내외 역사 속에서 종교가 권력과 연합할 때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아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또한 예외 일 수 없음을 로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절대다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한 쪽으로 치우쳤음을 시사하는, 즉 밸런스의 붕괴를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기득권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가진 자들이 반대편에 선 소수를 핍박하는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처음, 기도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퍼져 나가기 시작 했을 때 그 메시지 역시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형통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그 메시지 역시 처음엔 소수의 목소리였고 그래서인지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홍수로 범람한 강같이 되어 시대를 집어 삼키는 강력한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우연처럼 때를 같이하여 한국의 경제성장도 찾아 왔습니다. 세계인들이 말하는 한강의 기적, 최단기간 막대한 성과를 이룩한, 그래서 찬란한 경제성장이라는 미사여구를 사용해도 조금도 과하다 하지 못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부흥은 그렇게 때를 같이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여기서도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영양과잉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성인질환처럼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전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해마다 실시되던 말씀 사경회가 부흥사들이 인도하는 부흥회로 대체되었고 개중에는 성도들에게 반말이나 욕설까지 일삼는 강사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얼마나 잘 뜯어내는가를 통해 부흥 강사료가 책정 될 정도가 되었고 이 삯꾼들의 만행이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여기저기 알려 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강사님, 저희가 교회건축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번 부흥회 잘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목사님, 얼마나 원하십니까? 몽땅 서원하게 만들어서 매달 꼼짝 없이 헌금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들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대화가 이단 사이비가 아닌 정상적인 몇몇 교회에서도 오고 갔다는 사실은 당시 많은 교인들을 놀라 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기복 신앙으로 치우쳐 버린 시대적 상황에서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부흥강사는 비주류였을지 모릅니다. 당시 그것은 대중들이 찾는, 즉 돈이 되는 메시지가 아니었기에 강사료를 수입으로 하는 부흥사들에게는 소외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소수의 목소리가 점점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또 세상을 덮는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다시 말씀 중심으로 가기를 부르짖게 되었고 지구촌 곳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거룩함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대적 트렌드 즉, 권력과 신앙이 합쳐지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밸런스가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메신저를 보내신다. 그것은 언제나 대세에 역행하므로 비주류일 수밖에 없다. 비판도 받는다. 욕도 먹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기는 것은 대세에 역행하는 하나님 편에 선 비주류였다. 


이제 한국교회 내에서는 기도를 삶의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마음 놓고 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도하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다면 비판과 정죄를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반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라고 말을 한다면? 무난히 중간은 갑니다. 적어도 욕은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은 분명 영적으로 성숙해진 증거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할 만큼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초심자들의 설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공급 될 수 있는 통로들이 상당 부분 차단되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동기’입니다. 동기가 부여 되지 않으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동기부여 없이도 사람을 교회 의자에 앉혀 놓을 수는 있지만, 그사람을 하나님께 진실 된 마음으로 기도하며 부르짖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주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부모님’ 또는 ‘아픈 자녀’ 아니면 ‘자신의 처지’ 일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나쁜 결과가 올수 없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께로 정하고 진심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했던 사람들 중에 나쁜 성적표를 받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이며 진심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구더기 무섭다는 핑계로 장을 못 담그겠다는 게으른 아낙처럼, 일부 성도들은 감당치도 못할 거룩을 흉내 내다가 아예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 선한척하는 것을 위선(僞善)이라 합니다. 입으로는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은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평신도들은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박한 성경지식만으로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성경의 시대적 상황까지 줄줄 암기하지만 할 거, 안 할 거 다하고 다니며 본인들의 연약한 영성을 조금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며 우울해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신적 나약함의 대명사격인 우울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인데, 어째서 그토록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말씀이 능력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며들게 만드는 화학작용이 필요합니다. 그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임을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필요한데 운동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목이든 상관없으니 일단 운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넌 무슨 운동을 좋아하니?”

“전 농구요.”

“그래. 그럼 일단 농구부터 시작해보자.”


기도가 필요한데 기도하지 않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 역시 ‘일단 기도’입니다. 일단 기도하면, 일단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토록 하기 싫던 모든 삶의 과제들이 할 만하다 느껴지고, 나중에는 즐겁고 보람까지 느낄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호평이 따라옵니다. 


강한 사람을 측정하는 척도는 더 이상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도래 했습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본인 삶의 주도권조차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합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본인의 신체도 원하는 만큼 단련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력을 강하게 만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기도, 일단 기도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은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타인과 세상에게 넘어가 있던 내 삶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넘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드렁하던 선교가, 나와는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던 하나님의 일이 점점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느껴집니다. 어느새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과 사탄에게 넘어가 있던 내 영혼의 관심사가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나에게 넘어왔던 주도권을 다시 주님께로 넘겨드리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도하면 그것이 한결 수월해 집니다. 


기도하면, 그래서 정신력이 강해지면 TV를 끊을 수 있고, 스마트 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성경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해지고, 자기 계발을 위해 꿈만 꾸고 실천은 하지 못했던 운동도, 공부도 모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이 곧 나의 뜻이 되고,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어느새 주님의 뜻과 다르지 않게 되었음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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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Church
2023-01-16

“2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껏 응답다운 응답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다운 기도를 해 보신적은 있으신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도의 기준이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도다운 기도를 실천하면 대체로 응답다운 응답들이 삶에 펼쳐지기 마련이다. 만일 충분한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지금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은 기도의 실천을 위한 동기부여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독려하지는 않고 위로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응답을 못 받은 것도 응답입니다. 기도했으면 그걸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더 좋은 결과로 인도해 주시겠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말들이 기도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A를 요청 드렸지만 엉뚱하게도 B를 주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때로는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보니 그것이 더 탁월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성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간증하게 된다.


“기도응답 못 받은 것이 응답이더라.”  


그러나 제대로 기도하지 않은, 실상은 기도를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에게 이런 위로의 메시지는 해당사항이 없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훈계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조금은 엄한 권면의 메시지일지 모른다.


“제대로 기도는 해보셨습니까.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구약시대부터 대중들의 니즈(needs)를 채워주고 환대를 받으려는 거짓 메신저들이 존재해왔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만 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부작용으로 죄의 값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는 것에 책망을 들어야 할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두둔해주는 메시지들을 듣고 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문제 제일 많이 일으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도만 하는 사람! 말씀을 본인이 직접 읽지 않고 성경공부만한 사람! 둘 다 막상막하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 본인도 실천 못할 딱딱한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용하며 마구 정죄하고 상처를 입힌다. 


말씀을 목숨 걸고 실천해 보려 한 사람은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본능적으로 왜 기도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필연적으로 어떤 동기가 되었든 일단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사탄은 성도들의 기도를 막기 위한 다양한 부비트랩을 설치했고 그것들로 인해 성도들은 기도를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탄의 전략은 상당부분 유효했다. 


이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도의 응답은 전설 속에서나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광야 같은 삶속에서 자신들을 돌보시며 전진을 이끄시는 영도자가 아니다. 그저 미운 사람이나 용서하게 해주시고 다툰 사람들 간에 개입해서 화해나 돕는 감성만을 관장하는 신으로 한계를 짓고 있다. 


세상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마음껏 자신의 필요를 구하며 힘차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게 발견 된다. 사후에 펼쳐 질 일을 배제하고 현재의 모습만을 놓고 보면 어떤 면에선 다른 종교인들이 더 신을 믿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들은 본인들이 믿는 신에게 자신들의 필요를 구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걸까? 


기도하는 방법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응답 받는 기도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진 못한 듯하다. 그래서 20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응답다운 응답을 받은 기억이 없는 성도들이 심심치 않다.


어떤 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자신들의 실질적인 마음 속 고민은 털어 놓지 못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먼 아버지인 듯하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종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눈치 밥 먹는 서자? 


세상에 어느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게, 그것도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부자인 부모에게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지 못하겠는가. 


감히 구하지 못하겠어서 죄송해하고 갈등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게 된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솝우화에 등장했던 여우를 발견한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내가 울타리를 못 넘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세상 것은 모두 배설물이야. 내가 응답을 못 받을까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개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정죄하고 다니던 교인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몇몇 성도님들이 그로부터 돈을 빌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토록 신앙심을 강조하던 그가 어째서 하나님을 두고 사람들을 찾아다녔던 걸까?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느껴져서는 아닐까? 


평소 교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고하던 분이 어째서 돈 빌려 달라는, 상대방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해야만 했을까. 어떤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어야 했다. 아니 하나님께만 기도 했어야 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리 없다는 생각은 분명 나를 위축되게 만든다. 그러면 도와 달라는 말이 잘 떨어지지 않게 된다. 기도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은 나의기도 의지를 꺾어 놓는다.


기도자들 중에는 가족들의 생계가 위협 받는 상황 속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어 하나님께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가장들도 섞여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이겠는가?



문제) 주님의 관점에 서서 다음 문제를 풀어 보시오.


미선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에 4시간만 자며 일을 해도 저축은커녕 자녀들의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싱글 맘이다. 미선이 교회에 나와서 의식주와 직장, 집 등 다분히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 부르짖고 있기에 누군가 그녀에게 마태복음 6장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 주었다.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해보고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성도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세요. 그렇게 하면 그 모든 것을 자매님께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태도가 문제를 유발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6장을 주신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서 2장에 대한 묵상]

만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에 4시간만 자며 일을 해도 저축은커녕 자녀들의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싱글 맘에게 ‘평안해라. 따뜻하게 하고 지내라. 얼굴이 이게 뭐냐 밥 좀 잘 먹어라.’ 하며 그에게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도움이 되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처한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동기’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자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최초의 동기는 무엇일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들을 기도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최초의 동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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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6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잡혀가는 현장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숨어서 기어이 예배를 드린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예배를 드리려는 걸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소리 없이 기도나 하고 따로 성경이나 읽으며 조용하게 지내면 잡혀가지는 않을 텐데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때로는 찬양까지 부르며 굳이 예배를 드리려는 걸까.


그것은 예배의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느낀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그것을 느껴 본 사람은 예배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누군가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사모하는 마음의 부재 때문이다. 누군가는 목숨까지 걸며 드리는 그 귀한 예배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속히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 축도도 끝나지 않은 예배당을 황급히 빠져 나온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예배를 건성으로 드립니까.”

“글쎄요. 아마도 저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예배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강렬하게 하나님을 사모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천국소망일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처음에는 각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 또는 마음의 소원일 수도 있다.


“그런 걸 위해서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세요.”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기대되지 않아요. 아프신 우리 어머니만 자꾸 생각나는 걸요.”


예배에 실패하는 이유, 그것은 ‘간절함의 부재’ 때문일 수 있다. 새벽기도에 실패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간절함의 크기가 새벽잠이 주는 달콤함보다 작기 때문이다.

둘째 새벽기도를 너무 만만하게 봤기 때문이다. 


기도는 분명 하나님의 일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의, 즉 자신의 능력을 보태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적절한 기도 + 자신의 노력 = 응답’ 이라는 공식을 적용하곤 한다.

“기도만 한다고 되나. 본인도 노력해야지.”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뿐,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십자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 한다. 우리는...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한다. 온전히 믿을 사람 없는 세상을 살아 온 우리로서는 버릴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은 도움은커녕 거치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인간에게는 본능처럼 떠오르는 수 없이 많은 죄의 충동이 있다. 성경은 마음으로 지은 죄 역시 동일한 죄라고 정의한다. 즉,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움, 시기, 질투... 눈을 깜빡이지 않을 수 없듯 우리는 나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는 죄의 열매만 맺히는 걸까?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알려야만 한다.


“주님, 이 싸움은 제가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행불능 상태를 인정하고 자신을 완벽히 내려놓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께서 삶에 개입을 시작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성품을 바꿀 수 없고 습관을 버릴 수 없다. 참아 볼 수는 있지만 참는 것은 늘 한도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바꿀 수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 능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현장은 바로 전도이다. 전도, 도대체 왜 그렇게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일까. 전도 하면서 많은 분들이 경험 했을 것이다. 불신자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여간해서는 교회에 따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포기 상태가 되어 나의 모든 행위를 중단한 후, 오로지 기도만 하고 상대에게 찾아간 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엄마, 난 엄마가 나랑 같이 교회를 다녔으면 좋겠어. 이번 주부터 나랑 교회가자.”


단순한 한마디 말이 지금까지 그 긴 세월동안 어떤 말에도 요지부동이던 전도 대상자의 심금을 울린다. 성령님께서 주장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수 없으며 그분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도 없다. 


기도만 하면 안 되고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은 타당성 있고 성실한 발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깊은 영의 세계를 접하게 될수록 명확해지는 사실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기도 밖에 없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기도만 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명료한 간구가 필요하다. 불순물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원초적인 부르짖음은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1차원적인 간구로부터 시작 될 수도 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 그것에 어떠한 잡념도 섞지 말고 기도해 보라.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주실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구하다보면 당신의 간절함은 더욱 순도를 높이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간절함, 이것은 충분히 강력한 기도의 동기가 된다.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찾는 열망이 우리를 다시 교회로 이끈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도, 금요일도, 날이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새벽마다 잠을 깨워 예배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아버지시다. 간절히 구하고 간절히 사모하자. 하나님의 선물을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능히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여호와를 인정하는 자를 인정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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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6

“저는 아무래도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한 이웃님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포스팅한 신앙의 흔적들로 볼 때 기도하는 방법을 모를 리 없어 보였다. 그는 오랜 기간 믿음 생활을 했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말하게 된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었으리라.

‘다들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데 어째서 나는 응답이 없지?’


동일한 질문에서 누군가는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을 탓한다. 그러다 포기하거나 좌절하고 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으려 한 것 같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능력도 있으시지. 만일 나한테만 응답이 없다면 분명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 거야.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저는 아무래도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가끔 받곤 한다. 그런 분들의 특징을 꼽자면 하나같이 기도를 알 만한 분들이라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만한 분들이 기도에 대해서 묻는 아이러니. 최근에는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그러니까 절대로 기도하는 방법을 모를 리 없는 분으로부터 동일한 질문을 받았다.


P형제는 자신의 현재 상태, 하고 있는 노력,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는 모습, 조금씩이라도 진일보하고 있다는 소식을 비밀댓글로 전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는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내적 갈등까지 전할 때도 있었다. 이 또한 성장 과정의 일부이기에 그런 갈등이 반가웠다. 지금까지 신앙 성장 중 갈등 없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양육 방식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도 그런 연단을 거쳤고, 거기서 끝까지 ‘믿음’을 선택하고 놓지 않은 이들은 예외 없이 믿음의 열매를 거두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잘 나오던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성적 우수자들과 교육 전문가들의 말이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쉽게, 편하게, 빠르게 성적을 올리려 하지만, 공부의 달인들은 성적과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비례한다고 말한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기도는 무릎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은 시간과 비례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다른 성도의 응답 간증을 들으며 부러워한다. 그 하나님께서 내 삶에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그것이 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기도가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기도가 몹시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성공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방법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 관리 능력’이다. 자기 관리를 쉽게 하는 방법은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처음,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킬 수 있는 행동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어려울수록 편안하게.’


스마트폰에 타이머 기능이 있다. 10분으로 맞추고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하루에 1번 이상 기도한다. 하루에 10분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10분은 하자는 의미다. 10분을 하고 더 할 수 있으면 시간을 늘려간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늘렸는데 기도하기가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10분만이라도 기도하도록 한다. 하루도 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훈련이다.


단, 걸으면서 하는 기도 또는 운전하면서 하는 기도 등은 ‘10분 기도 시간’에 포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적어도 10분 이상을 드리는 것이다. 혹시 어제 기도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틀 치 20분을 하면 될까? 5일이면 50분을 하면 될까? 


아니다. 그렇게 밀린 숙제처럼 쌓아 놓다 보면 아예 포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과감하게 용서하라. 오늘 넘어질 수 있지만 내일 새로 시작하면 된다. 며칠간 태만할 수 있지만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지나간 과오를 묻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훈련 방식이다. 하루에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 시간은 10분이다.


매일 10분씩 기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사탄의 엄청난 방해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10분 기도가 결코 10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우리의 기도를 방치하면 그것은 30분, 1시간을 넘어 마침내 우리의 삶과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사탄은 그동안 우리 삶에 만들어둔, 기도를 훼방하는 수많은 장치들이 무너지도록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기도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어떻게든 훼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오하고 기도의 결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24시간, 365일 평생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것을, 누군가의 간증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내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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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