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속해서 더 큰 응답을 위해 기도하여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거목이 되어가고 있다.
2. 긴장이 풀려서 적당히 신앙생활 하거나 아예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만일 후자라면, 바리새인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도 받아 봤고 성경도 알 만큼 아는 그대는 ‘나도 알 만큼 안다’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릅니다. 교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혈기를 동반한 교만 : 상대방의 메시지에 격하게 반응합니다.
- 낙천적 교만 :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은근히 상대방을 깔보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어떤 메시지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중 된 자들이 당신보다 먼저 된 자’가 되어 추월해 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삶의 결과물들이 기도의 부재로 인해 모래성처럼 사라져 가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을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
과거에 응답받은 경험이 있으면서도 지금은 기도하지 않는 이유?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 기도 응답을 받았던 그때, 그대의 마음속에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당신을 기도 처소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대가 예전처럼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간절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튜브, TV, 게임, 여행, 쇼핑, 사교모임 등 심령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간절할 수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결핍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심령으로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는 자녀를 놓고도 기도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육신의 병으로 아파해도 온전히 기도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녀를 놓고도 기도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죽어가는 상황에도 기도 대신 스마트 폰을 터치합니다. 문제 극복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대신 상황을 잊으려 세상 것에 손을 댑니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기에 ‘그 힘 사용설명서’를 선물하며 편지로 심방하면서 내가 기도하던 그 순간에도 본인은 남자 아이돌 그룹 덕질을 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겠구나.’
자꾸만 몰려오는 부정적 청사진을 외면하려 했지만 기도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 기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얼마 못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청년의 탄식을 기억합니다.
본인이 더 기도했다면 살아나셨을까요?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믿지 않으면 도저히 기도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응답 주실 거라 믿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언제나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했었더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를 때마다 ‘내가 더 기도했었다면 어땠을까’ 남은 삶을 후회로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넉넉합니까. 정말 부족함이 없습니까. 사업, 가족, 인간관계, 건강, 결혼 등 모든 영역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까. 재벌 총수 가문에도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의 삶에만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도 적당히 기도하며 ‘이 정도면 됐다’고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정도 기도했으니 괜찮아. 이만하면 됐어’
과연 그것이 성령님의 음성이겠습니까? 본인 레벨에 맞는 기도를 하십시오. 초심자의 기도와 기도 응답을 경험해 본 당신의 기도 분량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여 이룩한 결과물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당신을 기도의 자리로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임을 당신도 알 것입니다.
당신의 심령은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애통할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복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위로가 당신의 삶에 함께 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는 다짐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습니까? TV, 유튜브, 인터넷을 한다고 해서 지옥을 가진 않습니다. 그러나 ‘샬롬’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세상 재미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 축사 기도를 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실까요? 인터넷 서핑에 빠져 있다가 시간이 되어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예배에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까요? 유행가를 신명 나게 부르며 달려온 목사님의 안수기도에 손을 얹은즉 낫는 성령의 임재가 그려지는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라고 응답의 영광을 선물 받은 당신이 온갖 세상 것들로 가득 차서 그것이 전부 인양 족한 줄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그런 성도를 다시 기도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세요. 당신이 응답을 경험하던 그때의 감격과 평안이 지금 당신의 삶을 덮고 있습니까?
기도의 자리는 축복의 동산이자 당신과 가정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요새입니다. 은혜의 때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간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하실지 모릅니다.
‘생활의 달인’이나 ‘서민갑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에게서 발견 되는 하나의 공통점은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만하면 충분한데도 더 나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 열정이 그들을 최고의 위치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 칼국수집 오픈을 앞둔 한 사람이 있다.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선 끊임 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각각의 재료들을 첨가해보고 빼보고, 늘려보고 줄여보며 맛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맛의 절댓값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 재료비의 손실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최상의 칼국수 맛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있다. 최고의 칼국수를 만들 것이고 그것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칼국수 비법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가족들까지 걱정할 정도로 그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다.
열정은 강요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넌 왜 그렇게 열정이 없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열정은 믿음이 있으면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밤낮으로 고민하며 레시피를 개발하는데 어떻게 맛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오픈한 가게가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한다. 주변에서 눈치를 주면 마지못해 움직이지만 능동성은 없다. 자신의 일인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다. 기도 응답에 확신이 있는 성도는 ‘기도한다고 무조건 응답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보다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메시지를 붙잡고 끊임 없이 기도하게 된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빌립보서의 말씀은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찾아오는 담대함이다. 이 말씀은 전도, 인간관계,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하다.
‘나는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 그런데 그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
‘재계약 하게 해 주셔도 주님의 뜻, 아니어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기도의 시작 단계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재계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주님의 뜻이면 재계약이 될 것이고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아울러, 최선을 다해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을 받았어도 본인이 응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면 재계약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심령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심리적 안정과 평안, 감사를 가능하게 하고 그런 밝은 에너지는 면접 등 구직 활동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대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모처럼 주님께서 주신 휴가를 만끽하며 ‘풍랑 속에서도 잔잔하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좋은 직장을 얻게 되면 그대는 기도로 승리해 본 경험을 토대로 더 큰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충분히 기도하지 않다가 재계약이 되지 않아 퇴사하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혹시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연장이 안 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구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당신을 찾아와 정죄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아, 그때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 건가?’
당신의 에너지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정죄 감과 싸우는데 모두 소진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대충 문제를 해결해 본 사람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구해보려면 구해지는 것이 직장이긴 하니까요.
우리 삶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초.중.고. 대학까지 마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녀는 태어나고 아이 역시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 변변한 응답 한 번 받아 본 기억 없이 살아가는 기독교인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계약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재계약이 된다면,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 없이 직장을 다니게 되겠지요. 실제로 당신은 지금 다니는 회사에 만족하지 못해 옮기고 싶다며 여러 불만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당신의 근무 환경은 다른 이에게 추천해 주고 싶을 만큼 좋습니다. 당신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직장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감사하지 않다가 가장 좋은 사업장을 잃어 본 저로서는 이점이 우려됩니다.
하나님께 새로운 것을 구하는 순서는 먼저, 받은 것에 충분히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더 나은 것을 구하는 태도는 학습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만족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신 환경에 먼저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감사는 더 좋은 것을 받기 전에 반드시 취해야 할 의식입니다.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가난이 정점을 찍던 때, 군에서 막 전역한 내가 차가 필요해서 기도를 드렸더니 얼마 후 실제로 차를 주셨습니다. 곳곳에 녹이 슬다 못해 누르면 짐칸 철판이 부스러질 정도의 트럭이었습니다. 운전석 아래에는 구멍이 조금 뚫려서 달리면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어들어 왔습니다. 은박지 테잎으로 구멍 난 천장을 붙이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행히도 원망 대신 나는 부모님께 배운 대로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구멍 뚫린 차에 테이프를 붙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냥 감사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국내에선 가장 좋은 세단을 탈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차뿐 아니라 그 이전 또 그 이전의 차를 탈 때도 나는 가끔씩 차에 손을 얹고 감사기도를 드려 왔습니다. 어떨 땐 너무 감사해서 차를 꼭 끌어안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차는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차’, 최고의 집 역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교회 비상구 계단 위에 합판을 놓고 잘 때도 그러했고 수영장, 골프장, 휘트니스, 연못과 정원이 있는 50평 아파트에 살 때도 그러했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할 거리를 부르며, 지금 누리는 것들을 지켜 줍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엔 사탄이 틈타서 악인의 꾀를 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누리던 귀한 것들을 해체 시키게 됩니다. 감사는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본인이 받은 복을 세어 보세요. 언제나 최고의 순간은 지금인 이유? 늘 새롭게 하시는 복의 근원 하나님의 영이 그대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당연히 재계약이 될 거라’ 확신하는 그대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이긴 합니다. 아울러 당신의 업무 능력과 성실함을 잘 아는 나로서도 당연히 재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내가 그대의 재계약 이슈를 알게 되었고 함께 기도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분명 함께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것 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결단한 상황에선 ‘확신’과 ‘방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처럼 그대의 마음속에 정말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이번 기도는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있다가 죽어서 보니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짓 믿음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행여 도착지에 들어가지 못할까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달리겠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기도의 불씨를 지키며 달려야 합니다.
확실한 것일수록 방심할 확률은 크고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톤의 폭발력이면 충분해 보이는 곳일지라도 10톤, 100톤 아니 가지고 있는 모든 기도 폭탄을 쏟아붓는 습관이 승리를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했음에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 제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기도 제목인데도 기도응답이 없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탓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계보를 잇게 됩니다. 나는 옳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사탄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응답 되지 않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탓하는 순간 가인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를 덮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은 찔림이 와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이들은 같은 찔림이 왔을 때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서 죽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군중들은 예수님도 돌로 치려 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온유하라. 겸손하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명백한 성경 속 말씀을 전하는 자를 향해 분노하거나, 그저 상대방이 그럴싸한 구절을 찾아서 본인 생각대로 선지자 흉내 내는 거라고, 이것은 성경 말씀은 맞긴 하지만 나에겐 해당되는 말이 아닐 거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자들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를 덮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의 삶을 주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복음 1:1)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척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전하는 자가 볼품없고 하찮아 보여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다면 무릎을 꿇는 자세,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들려 있는 말씀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은혜의 때에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심판의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들을 입맛대로 평가하며 선별하다 보면 결국 그의 곁에는 ‘쓰지만 약이 되는 말씀’을 전해 줄 메신저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삶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그는 온유와 자비가 아니라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떨 땐 적용이 되고 어떨 땐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말씀이면 순종하고 보는 것이 복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혈기를 부린 적이 없습니다.”
불평하는 것, 타인에게 은근슬쩍 짜증을 부리며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 등등 경미하더라도 에너지 자체가 예수님의 성품에 반하는 것이라면 악의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나는 상대방을 질투한 적 없는데요?”
상대방의 성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 시기, 질투, 미움의 씨앗입니다. 씨앗은 방치하면 언젠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어둠의 열매가 임하기 시작하면 평안이 사라지고 근심 걱정하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시름시름 아프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기력하게 되며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되려다 말고 되려다 말며 허송세월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응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있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응답을 받을 만한 그릇은 기도와 말씀, 정확히는 말씀대로 살 때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아직 그릇이 준비 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기도하고 작은 것부터 순종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소리가 차단되어 숨소리만 남겨지게 된다. 거기서 더욱 깊은 기도로 들어가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어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하늘인지, 우주인지, 다리에 쥐가 나는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간간이 들리던 주변 소음마저 의식할 수 없을 정도다.
전두엽이 활성화되고 미간은 묵직한 느낌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뜰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하나님께 나의 음성을 전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일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의 뇌가 주님의 보좌에 블루투스처럼 연결된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면 들으시겠구나.’
그러나 나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편이 더 유익함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하늘 보좌로부터 데이터들이 전송되기 시작하면 영.혼.육이 차례로 떨려오기 시작한다. 정보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믿음까지 다운로드 되고 있음에,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은 엄청난 희열을 경험한다.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저에게 맡기신 다고요?’
영적 존재와 교감하며 느끼는 깊은 신비로움과 새로운 사실을 경험할 때 느껴지는 감동이 어우러져, 조명 없는 방에서조차 빛보다 밝은 빛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동을 걸어야 한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1초에 두 번씩 ‘주여’를 외쳐보기도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도 친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는 기도도 찬양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한 낮은 존재의 몸부림일지 모른다. 성경 읽다가 유튜브 찬양을 틀어 놓고 통성으로 기도를 시도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는 녹음된 파일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와 비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나와의 대화에서 주님이 듣기 원하시는 것은 오직 나의 목소리, 나의 생각, 내 입술의 찬양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틀어 놓는 것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어쩌면 그것은 그저 당신을 하나님 앞에 집중상태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보조 장치일지 모른다.
상황에 따라 기도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것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 음악이다. 틀어 놓은 CCM이 기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곡의 멈춤과 새로운 곡으로 전환 될 때, 가사나 비트가 의식되어 애써 만든 집중 상태가 깨진 적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에 몰입이 되지 않을 땐 재생 버튼을 멈춰 볼 것을 권한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기도 음악 없이 기도했다. 그때의 영성이 지금보다 못하지 않음을 공감하지 않는가.
본인 목소리다. 통성기도는 기도를 시작할 때 잡념을 날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통성기도는 내가 하나님만 의식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의식하는 자는 통성기도를 할 수 없다. 부끄럽고 쑥스럽고 민망해하느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인을 의식하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번에 날려주는 에너지가 ‘간절함’이다. 간절한 상황에 놓인 성도가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때 영혼을 울리며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의미로운 통성기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시점부터는 오히려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깊은 기도를 막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어쩐지 힘들게 느껴질 땐 묵상 기도로 전환해 보자. 단번에 깊은 기도로 빨려 들어가지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분이라는 점이다. 또한 영의 세계는 매우 민감한 센서와 같아서 사소한 잡념 하나로도 집중상태가 흐트러 지곤 한다. 당연히 소음도 집중 상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음은 외부 소음뿐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까지 포함한다.
기도도, 예배도, 말씀을 읽는 것도 하루 아침의 노력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신앙은 장기전이 맞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실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기전으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온힘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언제 응답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힘을 다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도 응답 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면 기도할 의욕은 더욱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을 단기전으로 대하는 자세입니다. 전쟁과 전투라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무수한 전투의 결과로 전쟁이라는 포괄적 개념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또한 끊임없는 단기전투의 승리로 영적 전쟁이라는 거대 개념의 승패가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단기전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날마다 펼쳐지는 크고 작은 죄의 유혹 앞에서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1년 동안 온힘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 뒤에도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에 아무런 응답도 없고, 성품은 조금도 주님을 닮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 1년을 싸워 낼 에너지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태도, 기도의 응답을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이미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시겠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겠지, 다른 교인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내일의 삶을 맞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어떻게든 열매가 있어야 내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작더라도 죄와 싸워 이긴 데이터가 있어야 내일의 더 큰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와, 이게 정말 되네! 말씀대로 살았더니 내 삶에도 변화들이 나타나네. 내게도 승산이 있구나.”
반복적으로 단기전에서 승리를 경험하며 전진하다 보면 마침내 작은 고지 전투에서 최후 승리를 손에 얻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꼳혀진 깃발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상급을 받아 본 성도는 보다 큰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이 되어 갑니다.
"죄의 유혹이 너무도 강력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저 빛나는 십자가를 바라 볼 것입니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우리가 이 전투에 확신을 가지고 임해도 되는 까닭은 전쟁의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승리가 확정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긴 싸움을 왜 내가 또 싸워야 하는 건가요?”
그것은 주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들게 다가오는 이 모든 삶의 무게는 전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된 자상한 아버지의 훈련 프로그램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전투와 맞닥뜨리게 될 위험이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기도의 응답은 믿은대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장기전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응답받아야 할 사람처럼 급박한 에너지로 기도해야만 강력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 상태로 기도하다보면 주님께서 그 상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꾸준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내가 기도했던 그 응답은 아니더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고 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흔적을 남기십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단다. 이렇게 너의 기도를 듣고 있단다.'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바로
1. 응답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다.
2.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유익한 것으로 응답을 주신다
는 간증입니다. 이 같은 간증은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 본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AI로 인해 사라지게 될 업종 리스트가 이미 발표되었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타당성 있는 근거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며 준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어째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가? 도대체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4차 산업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변동성이다. 앞으로 어떤 신소재가 우리의 삶에 혁신을 가져올지 짐작 정도나 해볼 뿐 누구도 미래를 온전히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변동성을 대하는 최선의 준비는 어떤 변화에도 대처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척박함 속에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의미한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며, 주어진 상황 앞에서 가장 효율적인 행동 양식을 선택하게 만드는 탁월한 지혜이다.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지혜를 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 그 지혜를 힘입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아직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 속에서도 기도하지 않고 대충 살았던 전과가 있다.
많은 이들이 공부도, 기도도 하지 않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바 있다.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부하지 않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적당히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대충 출석 일수만 채우면 학교 또한 대충 졸업장을 준다. 그렇게 대충대충 노력이나 기도 없이 살아도 살아지는 삶을 살아 본 이들은 어떤 문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다른 대안을 찾아가며 대충 살아가게 된다.
취업 또한 마찬가지, 원하는 직업을 놓고 될 때까지 기도하기보다는 적당히 취직되는 직장을 찾아 입사한다. 그렇게 살아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삶이었기에 굳이 기도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결혼 상대자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 기도 없이 만난 연인을 사랑이라 믿으며 식사기도 하듯 대충 기도해 보고 결혼한다. 그렇게 행복 반, 불행 반, 아니 어쩌면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결혼 생활을 하며 그 모든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많은 이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보다는 행복하게 살아 보기 위한 노력 들로 채워진다. 사랑이라 믿어 평생 사랑하기로 약속한 사람과 사랑은커녕 그저 다투지 않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본다. 기도만 빼고...
그렇게 기도 없이 살다가 부모가 되면 자신의 기도하지 않는 신앙을 자녀에게 대물림시킨다.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기도 한번 하지 않고 자녀가 자신과 같은 인생 코스를 밟아 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본다. 이대로라면 자녀의 대학 등록금조차 모을 수 없음을 이미 3년 전, 5년 전부터 알았음에도 기도하며 준비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으며 기도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의 삶에 예외는 없다. 결국, 때가 되면 기도 대신 대출을 쓰게 되고 대학을 졸업한 자녀의 첫 시작은 대출 상환 의무와 함께 시작된다. 이렇듯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제외한 모든 시도를 해본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아간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앞에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정도가 기도 응답의 전부라 믿는다. 삶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기도의 능력은 들어만 보았지 직접 경험해 본 바 없기에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들에게 기도 응답의 연관 키워드는 #이론 #이상 #우연 #나와는 #해당없음. 누군가의 기도 응답 간증은 로또 당첨자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사실 기도는 어렵다. 정말 어렵긴 하다. 어려운 어떤 과제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기도다. 그러나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차라리 기도부터 시작해보라. 우선순위가 정리될 것이다. 일정 시점부터는 모든 문제를 동시에 다루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면 기도하라.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기도하라.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다면 기도부터 시작하라.
세상의 철학과 종교는 ‘내려놓음’을 권면한다. 고상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과제 앞에서 도전자의 멘탈을 보호하기 위한 포기이며 항복선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려놓음’은 ‘지원요청’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능자를 향한 SOS 이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제는 에너지를 소모 시키지만 기도는 도전자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기도하면 할수록 차오르는 에너지는 삶의 모든 과제를 능히 감당하게 만든다. 믿음, 열정, 신념, 목표의식, 책임감, 집중력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거론되는 긍정적인 그 힘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공급받는 통로는 기도이다.
인생의 위기는 대체로 예측이 가능하고,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다. 기도로 준비된 미래는 모든 변동성을 대처할 수 있는 능동적 유동성으로 빈틈없이 예비 될 것이다.
‘기도 부흥’ 사역으로 집중해서 드리기로 한 시간이 차고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또다시 천만원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이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영적인 현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키워드를 동반하는 듯 했다.
#동시다발적 #타이밍 #우연치고는 #기가막힌
우선 사탄의 역사가 그러하다. 나쁜 상황에, 나쁜 사람이 나타나서, 나쁜 짓을 한다.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다.
[욥기 1장 中]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낙타를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집이 무너져 주인의 자녀들이 죽었나이다.
하나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 필요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 근처를 지나가다가 식사나 같이 할까 하는 마음에 어머니가 시무하시는 교회에 들렀는데 크게 넘어져서 옴짝 달싹 못하고 계셨다. 상황이 심각하여 어머니를 업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김집사님이 들어오셨다.
“근처에 올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집사님과 함께 근처에 있는 큰 정형외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부러진 것은 아니고 인대만 살짝 늘어나셨네요. 내려가셔서 MRI 찍으시면 됩니다.”
“네? 인대만 살짝 늘어났는데 왜 MRI를 찍나요?”
“수술을 해야 할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인대가 살짝 늘어났는데 왜 수술을 하나요?”
“그럼 MRI도 찍지 않고 바로 수술 들어가요?”
과잉진료를 유도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만일, MRI를 찍은 후 수술을 하라고 해도 이 의사의 말을 신뢰할 자신이 없었다. MRI가 있는 곳에 가면 MRI부터 찍으려고 할테니 아무래도 MRI가 없는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MRI가 없는 병원을 찾겠는가.
“아! 그러고보니 우리 아들이 다리 다쳤을 때 갔던 정형외과가 있어요. 거기는 MRI가 없어요.”
동행했던 김집사님의 안내로 찾아간 병원의 원장님은 엑스레이를 찍은 후 덤덤히 말했다.
“인대만 조금 늘어나신 거라 반 깁스만 해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다리는 아주 잘 회복되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처음 들렀던 병원에 갔던 지인들은 모두 수술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그 시간에 없었다면 어머니는 최소한 과잉진료, 심한 경우 멀쩡한 다리를 칼로 찢어서 수술까지 할 뻔했던 것이다.
“책을 쓰길 원하신다면 집필을 하며 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주세요.”
‘그 힘 사용설명서’를 집필하기 전 나는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었다.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서 지인을 통해 외국인 대상 임대사업 제안이 들어왔다. 안 할 이유가 없는 조건, 아니 안 하면 바보라고 할 정도의 조건이었다. 나는 크게 손이 안가는 임대사업을 하며 무난히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투자대비 수익률이 매우 좋다며 국민북스의 대표님과 실장님도 함께 이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인들로부터 투자하고 싶다는 제안을 계속 받아왔던 터였다. 나는 제안을 받아 들였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기존 사업체를 매각했다. 그러나 실장님과 함께 새로운 물건을 찾던 도중 ‘사드 미사일’ 이슈가 터졌다.
그 여파로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겼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임대사업자들의 매출이 급감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관광객 수는 회복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관련 분야의 판매단가는 여전히 예전처럼은 회복되지 않았다. 반면, 그 비즈니스는 비교적 쉽게 돈이 된다는 소문이 나서 경쟁업체가 과하게 늘어나 앞으로도 예전과 같은 수익률은 회복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내가 계속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면 이 모든 마이너스 이슈를 전부 경험했을 것이다. #우연치고는 #기가막힌 #타이밍에 빠져 나온 것이다.
‘그 힘 사용 설명서’ 출간 후, 기도부흥 사역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시간이 채워질 즈음 생각지도 못했던 스카웃 제의를 받아 이전업무인 보험사에 복귀하게 되었다.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동시다발적 #타이밍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게 또 다시 천만원 정도 되는 급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업무 복귀한 4월 한 달 동안 보험사에서 발생한 소득은 약 2000만원으로 마감 되었다. 두 번째 달인 5월에는, 이미 첫 째주부터 2000만원을 넘어서고 있다.
아울러 보험사에 업무 복귀한 달에 또 다른 스카웃 제안을 받아 4월 달부터 (주)제*** 등기이사로 위임되어 월 300만원의 추가 소득이 발생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치 사역 때문에 발생했던 소득의 공백을 두 배로 채워주시려는 듯 공교롭게도 첫 급여가 같은 타이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법칙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험사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득의 근거 때문이다. 4월 한 달 동안 지인을 통한 계약은 불과 1건뿐, 나머지는 모두 이달에 처음만난 고객들로부터 체결된 계약이다.
“제 담당 설계사님이시죠?”
가입시킨 설계사가 퇴사하여 나에게 수금 이관된 고객이었다. 앳된 목소리의 27세 여성 고객은 20만원정도 되는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서 보험이 해약 될 위기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 받은 고객은 자신의 동생과 친척들을 하나하나 소개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개는 소개를 낳았다.
남편 암보험을 들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온 시흥에 사는 고객에게 방문 했을 때는 예기치 않게 8개의 계약이 더 나와서 총 9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보험업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걸려 온 전화로 이 정도의 계약을 체결하는 일은 매우 희소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우연들이 일상처럼 늘 있어왔다.
이것은 MDRT협회 최고 등급인 Top of the table 인증서이다. 한 해 동안 4억 4천만원 이상을 번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나는 보험사에 입사한 이후로 한 번도 MDRT기준을 놓친 적이 없다.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전국 사원 매출 순위표에서 1위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기도 했다.
필자 한 사람의 매출이 지점 전체 사원의 매출을 합친 것 보다 많은 경우도 있었다.
천만원 짜리 믿음을 소유하게 된 뒤로는 대체로 그 정도의 돈을 벌게 되었다. 그것은 보험사에 입사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필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오히려 내 힘을 쓰면 쓸수록 다양한 부작용만 발생되었다. 이를 테면 관리자를 뽑아 사업체를 맡겨두고 나가서 다른 사업을 하면 맡겨둔 사업체의 매출이 급감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없었다.
‘기도부흥’ 사역 중, 과거 70만원짜리 믿음을 소유하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에 급여 1천만원은 그야말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 청년이 1천만원짜리 믿음을 소유하기까지의 과정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의 영적인 감각을 깨우기 위해 무일푼, 무능력 할 때의 내 모습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방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사용하는 영적인 감각을 되찾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의 책 그힘사용설명서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사촌동생 진만이가 나를 찾아왔다. 함께 건축사업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진만이는 형들과 함께 건축에 참여해서 이미 적지 않은 자산을 형성한 상태였다. 형들이 건축으로 잘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제대로 검토도 못 해 보고 있었는데 진만이를 통해 성공의 규모와 실체를 정확히 확인하게 되었다.
벌써 4개째의 자회사를 분사시킨 상태였고 이제 막 출범한 신설법인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건축이라니 위험하지 않은가. 당연히 누구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만이는 몇 개월간 나를 설득했다. 일과시간에도 틈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형, 일단 하루만 나와 봐.”
마지못해 찾아 간 나에게 진만이는 여러 현장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 보면 볼수록 안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업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제안의 홍수 속에서 수 없이 검토와 거절을 반복하다보니 어느 덧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절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특별한 반론도 없이 거절만 하는 나에게 진만이가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호형도 잘 됐고 은이형도 잘 됐고 창이형, 택이형, 원이형도 다 잘 됐고 나도 잘 됐는데 형만 안 될 것 같아? 형만 망할 것 같아? 형들이랑 같이 지을 거고, 망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건데 형들이 그렇게 망할 것 같아?”
그리고 나서 진만이는 우리 현장이 아닌 다른 업체들이 분양한, 변두리에 위치한 현장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형, 이렇게 외진 곳에 지어 놓은 집들도 전부 다 팔렸어. 새로 지은 집들 중에 몇 년 동안 안 팔리고 방치 된 집 본적 있어? 이제 형들은 바빠져서 다른 사람들 안 챙겨주는 거 알지? 나도 나중에 바빠지면 형들처럼 내일 하느라고 바빠서 형한테 이런 얘기해줄 시간도 없을 거야. 내가 나중에 형들처럼 성공해 있으면 그때 가서 나를 보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형들은 망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면 망할 리가 없다. 그리고 진만이는 형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만이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건축은 망하지 않으면 돈을 번다. 많이... 형들과 함께 하면 나도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하지 않으면 돈을 번다. 많이... 그것이 건축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형들은 이미 지난 10년간 건축을 해 왔다. 그런데 내가 들어오자마자 망할까? 하필 내가 들어오자마자 딱 그 타이밍에? 내가 그렇게 복이 없는 사람인가?’
찰나의 순간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안목을 열어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라고...
즉시로 주님께서 주시는 차분함이 나를 덮었다. 주변이 고요해지며 포근한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읽히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과 함께 그 비전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별과 모래로 예를 들어가며 최대한 아브라함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시던 그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작년부터 나는 경기도 모처 지하철역 인근 4개의 건축 공사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내가 억지로 만든 기회가 아니라 순조롭게,아니 강권적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연말을 기점으로 나는 드디어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퇴근 후에는 기도부흥 사역과 관련된 업무가 기다린다. 주말에는 건축업에서 해야 할 업무를 한다. 동시에 건설 관련 자격증들을 취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며 동시에 더 발전된 미래를 위한 발판을 준비한다. 주님을 만난 뒤로 쭉 그렇게 살아왔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힘을 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사용하면 가능하다. 새로운 자리에 앉아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 새로운 업무에 적합한 상태로 그때 마다 적합한 세팅이 이루어진다. 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을 책과 블로그를 통해서 나누고 있다.
내 힘을 빼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능력 주시는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4:13)
그는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축구는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비대한 몸 때문만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실제 공을 차며 직접 축구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축구 관련 기술과 정보를 찾아보며 혼자 공부한 결과 이론적인 면에선 완벽한 축구 전문가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축구를 하지 못한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쌓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과 기도에 응답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적당히 기도도 하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기도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고 배울 만큼 배웠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일부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의 기도응답 간증을 들으며 부러워만 한다.
그 성도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에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그 사실이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천은 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기도에 대해 이론만 배운 데에서 오는 부작용 때문은 아닐까.
복싱을 예로 들어 보려한다. 복싱은 이론과 실기가 결합된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론만 배워서는 링 위에 설 수가 없다. 상대방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패배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링 위에서 벌어지는, 사탄과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격투기와도 같다. 따라서 기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대한 책과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기도 시간을 대신한다. 그렇게 기도에 대한 이론이 쌓여가는 만큼 ‘자신이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도 커져간다. 문제는 본인이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커져 갈수록 설교를 통해 은혜 받을 확률, 즉 기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 목사님 설교는 영 진부해서 들을 수가 없군. 저렇게 뻔한 설교를 하다니...’
잘 알고 있다는 교만으로 가득 찬 그는 어느 누구의 설교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점점 더 은혜 받기 힘든 상태가 되어간다. 어느덧 그는 어지간한 설교로는 아무런 동기부여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에게 신앙적인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의 설교가 요구된다. 그는 마치 약물에 중독 된 사람처럼 계속해서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설교를 찾아다닌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한 번 간신히 은혜를 받았다 해도 역시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고 동기부여만 받는 것에 습관, 아니 중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머리만 잔뜩 커진 사람을 지도해 줄 스승은 없다. 그는, 스스로 동기부여 받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는 한 절대로 자신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된 고전 설교들을 들어보면 설교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단순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 받습니다. 여러분도 간절히 기도하시면 응답 받으실 줄 믿습니다’ 정도의 단순구조이다.
오늘날처럼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혁신적인 보충설명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한 설교 말씀을 듣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으며 기도했다. 적어도 지금의 성도들보다는 훨씬 더 많이 기도했던 것은 여러 정황상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기도의 응답과 영적인 체험들이 따랐었던 것도...
당시의 설교는 ‘기도하라’는 일차원적 권유와 ‘아멘’이라는 심플한 순종의 조합으로 열매를 거두었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성도들은, 신학지식의 보편화를 통해 당시의 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이제 어지간한 설교로는 동기부여는커녕, 설교비평 당하기 딱 좋은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 설교하는 목사님? 아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머리만 잔뜩 커져버린 성도 본인이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덕분에 타인에게 말씀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개인적인 신앙성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학대학에 가서 내 개인적인 신앙 열정은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만 같다.
설교자가 된 후, 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나도 모르게 분석하게 되곤 한다. 신학대학을 가기 전엔 없던 증상이다. 이것은 내가 은혜 받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뿐이다.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다 해도,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다면 기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지난 번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이번에 새로 도전하는 문제에 대한 기도에 있어서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일 수 있다. 믿음은 선택의 문제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도 그 논리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믿음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유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꾸만 지식으로 믿음에 접근하려고 하면 그것은 곧 그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방식이 된다. 이 방면에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님의 제자 도마이다. 도마는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창 자국을 집적 만져봐야만 주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믿음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9절)
설명을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믿을 수 있는 확률은 더 멀어지기 일쑤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논리적 답변과 증거를 요구하던 이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사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심지어 이들은 다양한 영적 현상을 목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신유의 현장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한 기도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미 기도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도의 실천뿐이다.
과거에 응답받은 경험이 있다면 현재 그대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1. 계속해서 더 큰 응답을 위해 기도하여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거목이 되어가고 있다.
2. 긴장이 풀려서 적당히 신앙생활 하거나 아예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만일 후자라면, 바리새인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도 받아 봤고 성경도 알 만큼 아는 그대는 ‘나도 알 만큼 안다’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릅니다. 교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혈기를 동반한 교만 : 상대방의 메시지에 격하게 반응합니다.
- 낙천적 교만 : 격하게 반응하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은근히 상대방을 깔보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어떤 메시지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중 된 자들이 당신보다 먼저 된 자’가 되어 추월해 가는 모습을 계속해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삶의 결과물들이 기도의 부재로 인해 모래성처럼 사라져 가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을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
과거에 응답받은 경험이 있으면서도 지금은 기도하지 않는 이유?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 기도 응답을 받았던 그때, 그대의 마음속에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당신을 기도 처소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대가 예전처럼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간절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튜브, TV, 게임, 여행, 쇼핑, 사교모임 등 심령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간절할 수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결핍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심령으로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는 자녀를 놓고도 기도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육신의 병으로 아파해도 온전히 기도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녀를 놓고도 기도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가 죽어가는 상황에도 기도 대신 스마트 폰을 터치합니다. 문제 극복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대신 상황을 잊으려 세상 것에 손을 댑니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기에 ‘그 힘 사용설명서’를 선물하며 편지로 심방하면서 내가 기도하던 그 순간에도 본인은 남자 아이돌 그룹 덕질을 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겠구나.’
자꾸만 몰려오는 부정적 청사진을 외면하려 했지만 기도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 기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얼마 못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청년의 탄식을 기억합니다.
본인이 더 기도했다면 살아나셨을까요?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믿지 않으면 도저히 기도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응답 주실 거라 믿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언제나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했었더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를 때마다 ‘내가 더 기도했었다면 어땠을까’ 남은 삶을 후회로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넉넉합니까. 정말 부족함이 없습니까. 사업, 가족, 인간관계, 건강, 결혼 등 모든 영역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까. 재벌 총수 가문에도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의 삶에만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도 적당히 기도하며 ‘이 정도면 됐다’고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정도 기도했으니 괜찮아. 이만하면 됐어’
과연 그것이 성령님의 음성이겠습니까? 본인 레벨에 맞는 기도를 하십시오. 초심자의 기도와 기도 응답을 경험해 본 당신의 기도 분량이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여 이룩한 결과물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당신을 기도의 자리로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임을 당신도 알 것입니다.
당신의 심령은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애통할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복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위로가 당신의 삶에 함께 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는 다짐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습니까? TV, 유튜브, 인터넷을 한다고 해서 지옥을 가진 않습니다. 그러나 ‘샬롬’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세상 재미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 축사 기도를 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실까요? 인터넷 서핑에 빠져 있다가 시간이 되어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예배에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까요? 유행가를 신명 나게 부르며 달려온 목사님의 안수기도에 손을 얹은즉 낫는 성령의 임재가 그려지는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라고 응답의 영광을 선물 받은 당신이 온갖 세상 것들로 가득 차서 그것이 전부 인양 족한 줄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그런 성도를 다시 기도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세요. 당신이 응답을 경험하던 그때의 감격과 평안이 지금 당신의 삶을 덮고 있습니까?
기도의 자리는 축복의 동산이자 당신과 가정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요새입니다. 은혜의 때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간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하실지 모릅니다.
‘생활의 달인’이나 ‘서민갑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에게서 발견 되는 하나의 공통점은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만하면 충분한데도 더 나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 열정이 그들을 최고의 위치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 칼국수집 오픈을 앞둔 한 사람이 있다.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선 끊임 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각각의 재료들을 첨가해보고 빼보고, 늘려보고 줄여보며 맛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맛의 절댓값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 재료비의 손실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최상의 칼국수 맛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있다. 최고의 칼국수를 만들 것이고 그것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칼국수 비법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가족들까지 걱정할 정도로 그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다.
열정은 강요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넌 왜 그렇게 열정이 없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열정은 믿음이 있으면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밤낮으로 고민하며 레시피를 개발하는데 어떻게 맛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오픈한 가게가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한다. 주변에서 눈치를 주면 마지못해 움직이지만 능동성은 없다. 자신의 일인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다. 기도 응답에 확신이 있는 성도는 ‘기도한다고 무조건 응답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보다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메시지를 붙잡고 끊임 없이 기도하게 된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빌립보서의 말씀은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찾아오는 담대함이다. 이 말씀은 전도, 인간관계,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하다.
‘나는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 그런데 그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
‘재계약 하게 해 주셔도 주님의 뜻, 아니어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기도의 시작 단계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재계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주님의 뜻이면 재계약이 될 것이고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아울러, 최선을 다해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을 받았어도 본인이 응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기도했다면 재계약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심령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심리적 안정과 평안, 감사를 가능하게 하고 그런 밝은 에너지는 면접 등 구직 활동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대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모처럼 주님께서 주신 휴가를 만끽하며 ‘풍랑 속에서도 잔잔하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좋은 직장을 얻게 되면 그대는 기도로 승리해 본 경험을 토대로 더 큰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충분히 기도하지 않다가 재계약이 되지 않아 퇴사하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속에는 ‘혹시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연장이 안 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구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당신을 찾아와 정죄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아, 그때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 건가?’
당신의 에너지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정죄 감과 싸우는데 모두 소진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대충 문제를 해결해 본 사람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구해보려면 구해지는 것이 직장이긴 하니까요.
우리 삶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초.중.고. 대학까지 마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녀는 태어나고 아이 역시 기도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 변변한 응답 한 번 받아 본 기억 없이 살아가는 기독교인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계약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재계약이 된다면,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 없이 직장을 다니게 되겠지요. 실제로 당신은 지금 다니는 회사에 만족하지 못해 옮기고 싶다며 여러 불만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당신의 근무 환경은 다른 이에게 추천해 주고 싶을 만큼 좋습니다. 당신은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직장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감사하지 않다가 가장 좋은 사업장을 잃어 본 저로서는 이점이 우려됩니다.
하나님께 새로운 것을 구하는 순서는 먼저, 받은 것에 충분히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더 나은 것을 구하는 태도는 학습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만족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신 환경에 먼저 감사를 해야 합니다. 감사는 더 좋은 것을 받기 전에 반드시 취해야 할 의식입니다.
부모님의 사업 부도로 가난이 정점을 찍던 때, 군에서 막 전역한 내가 차가 필요해서 기도를 드렸더니 얼마 후 실제로 차를 주셨습니다. 곳곳에 녹이 슬다 못해 누르면 짐칸 철판이 부스러질 정도의 트럭이었습니다. 운전석 아래에는 구멍이 조금 뚫려서 달리면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어들어 왔습니다. 은박지 테잎으로 구멍 난 천장을 붙이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행히도 원망 대신 나는 부모님께 배운 대로 감사를 선택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구멍 뚫린 차에 테이프를 붙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냥 감사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국내에선 가장 좋은 세단을 탈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차뿐 아니라 그 이전 또 그 이전의 차를 탈 때도 나는 가끔씩 차에 손을 얹고 감사기도를 드려 왔습니다. 어떨 땐 너무 감사해서 차를 꼭 끌어안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차는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차’, 최고의 집 역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교회 비상구 계단 위에 합판을 놓고 잘 때도 그러했고 수영장, 골프장, 휘트니스, 연못과 정원이 있는 50평 아파트에 살 때도 그러했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할 거리를 부르며, 지금 누리는 것들을 지켜 줍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엔 사탄이 틈타서 악인의 꾀를 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누리던 귀한 것들을 해체 시키게 됩니다. 감사는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본인이 받은 복을 세어 보세요. 언제나 최고의 순간은 지금인 이유? 늘 새롭게 하시는 복의 근원 하나님의 영이 그대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당연히 재계약이 될 거라’ 확신하는 그대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이긴 합니다. 아울러 당신의 업무 능력과 성실함을 잘 아는 나로서도 당연히 재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내가 그대의 재계약 이슈를 알게 되었고 함께 기도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분명 함께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것 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결단한 상황에선 ‘확신’과 ‘방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말씀처럼 그대의 마음속에 정말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세요.
이번 기도는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을 받은 줄 알고 있다가 죽어서 보니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짓 믿음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행여 도착지에 들어가지 못할까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달리겠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기도의 불씨를 지키며 달려야 합니다.
확실한 것일수록 방심할 확률은 크고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톤의 폭발력이면 충분해 보이는 곳일지라도 10톤, 100톤 아니 가지고 있는 모든 기도 폭탄을 쏟아붓는 습관이 승리를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성도라면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을 모를 수는 없다. 하지만 계속 죄를 지으면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
불확실은 모든 영적 행보를 차단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부모 잃은 아이처럼 영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된다.
가장 먼저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니 당연히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으니 죄와 싸울 힘은 더욱 약해진다.
반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는 죄로 인해 파생되는 어떤 권세로부터도 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멀리한다.
완벽히 자유로운 상태에서도 죄가 아닌 주님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은 진짜 믿음이 있어야만 받는다.
위대한 응답의 시작, 구원의 주님을 만나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기도했음에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 제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기도 제목인데도 기도응답이 없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탓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계보를 잇게 됩니다. 나는 옳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사탄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응답 되지 않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탓하는 순간 가인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를 덮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은 찔림이 와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이들은 같은 찔림이 왔을 때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서 죽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군중들은 예수님도 돌로 치려 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온유하라. 겸손하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명백한 성경 속 말씀을 전하는 자를 향해 분노하거나, 그저 상대방이 그럴싸한 구절을 찾아서 본인 생각대로 선지자 흉내 내는 거라고, 이것은 성경 말씀은 맞긴 하지만 나에겐 해당되는 말이 아닐 거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자들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를 덮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역사했던 영이 그의 삶을 주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복음 1:1)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척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전하는 자가 볼품없고 하찮아 보여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다면 무릎을 꿇는 자세,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들려 있는 말씀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은혜의 때에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심판의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들을 입맛대로 평가하며 선별하다 보면 결국 그의 곁에는 ‘쓰지만 약이 되는 말씀’을 전해 줄 메신저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삶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그는 온유와 자비가 아니라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떨 땐 적용이 되고 어떨 땐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말씀이면 순종하고 보는 것이 복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혈기를 부린 적이 없습니다.”
불평하는 것, 타인에게 은근슬쩍 짜증을 부리며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 등등 경미하더라도 에너지 자체가 예수님의 성품에 반하는 것이라면 악의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나는 상대방을 질투한 적 없는데요?”
상대방의 성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 시기, 질투, 미움의 씨앗입니다. 씨앗은 방치하면 언젠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어둠의 열매가 임하기 시작하면 평안이 사라지고 근심 걱정하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시름시름 아프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기력하게 되며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되려다 말고 되려다 말며 허송세월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응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있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응답을 받을 만한 그릇은 기도와 말씀, 정확히는 말씀대로 살 때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아직 그릇이 준비 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기도하고 작은 것부터 순종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 좀(?) 하는 성도에게 통성기도는 기본이긴 하다.
그러나 정말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소리가 차단되어 숨소리만 남겨지게 된다. 거기서 더욱 깊은 기도로 들어가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어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하늘인지, 우주인지, 다리에 쥐가 나는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간간이 들리던 주변 소음마저 의식할 수 없을 정도다.
전두엽이 활성화되고 미간은 묵직한 느낌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뜰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하나님께 나의 음성을 전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일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의 뇌가 주님의 보좌에 블루투스처럼 연결된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면 들으시겠구나.’
그러나 나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편이 더 유익함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하늘 보좌로부터 데이터들이 전송되기 시작하면 영.혼.육이 차례로 떨려오기 시작한다. 정보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믿음까지 다운로드 되고 있음에,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은 엄청난 희열을 경험한다.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저에게 맡기신 다고요?’
영적 존재와 교감하며 느끼는 깊은 신비로움과 새로운 사실을 경험할 때 느껴지는 감동이 어우러져, 조명 없는 방에서조차 빛보다 밝은 빛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동을 걸어야 한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1초에 두 번씩 ‘주여’를 외쳐보기도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도 친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는 기도도 찬양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한 낮은 존재의 몸부림일지 모른다. 성경 읽다가 유튜브 찬양을 틀어 놓고 통성으로 기도를 시도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는 녹음된 파일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와 비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나와의 대화에서 주님이 듣기 원하시는 것은 오직 나의 목소리, 나의 생각, 내 입술의 찬양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틀어 놓는 것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어쩌면 그것은 그저 당신을 하나님 앞에 집중상태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보조 장치일지 모른다.
상황에 따라 기도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것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 음악이다. 틀어 놓은 CCM이 기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곡의 멈춤과 새로운 곡으로 전환 될 때, 가사나 비트가 의식되어 애써 만든 집중 상태가 깨진 적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에 몰입이 되지 않을 땐 재생 버튼을 멈춰 볼 것을 권한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기도 음악 없이 기도했다. 그때의 영성이 지금보다 못하지 않음을 공감하지 않는가.
본인 목소리다. 통성기도는 기도를 시작할 때 잡념을 날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통성기도는 내가 하나님만 의식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의식하는 자는 통성기도를 할 수 없다. 부끄럽고 쑥스럽고 민망해하느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인을 의식하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번에 날려주는 에너지가 ‘간절함’이다. 간절한 상황에 놓인 성도가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때 영혼을 울리며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의미로운 통성기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시점부터는 오히려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깊은 기도를 막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어쩐지 힘들게 느껴질 땐 묵상 기도로 전환해 보자. 단번에 깊은 기도로 빨려 들어가지는 경우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분이라는 점이다. 또한 영의 세계는 매우 민감한 센서와 같아서 사소한 잡념 하나로도 집중상태가 흐트러 지곤 한다. 당연히 소음도 집중 상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음은 외부 소음뿐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리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신앙이 장기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기도도, 예배도, 말씀을 읽는 것도 하루 아침의 노력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신앙은 장기전이 맞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실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기전으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온힘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언제 응답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힘을 다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도 응답 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면 기도할 의욕은 더욱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을 단기전으로 대하는 자세입니다. 전쟁과 전투라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무수한 전투의 결과로 전쟁이라는 포괄적 개념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또한 끊임없는 단기전투의 승리로 영적 전쟁이라는 거대 개념의 승패가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단기전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날마다 펼쳐지는 크고 작은 죄의 유혹 앞에서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1년 동안 온힘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 뒤에도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에 아무런 응답도 없고, 성품은 조금도 주님을 닮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 1년을 싸워 낼 에너지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태도, 기도의 응답을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이미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시겠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겠지, 다른 교인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내일의 삶을 맞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어떻게든 열매가 있어야 내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작더라도 죄와 싸워 이긴 데이터가 있어야 내일의 더 큰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와, 이게 정말 되네! 말씀대로 살았더니 내 삶에도 변화들이 나타나네. 내게도 승산이 있구나.”
반복적으로 단기전에서 승리를 경험하며 전진하다 보면 마침내 작은 고지 전투에서 최후 승리를 손에 얻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꼳혀진 깃발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상급을 받아 본 성도는 보다 큰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이 되어 갑니다.
"죄의 유혹이 너무도 강력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저 빛나는 십자가를 바라 볼 것입니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우리가 이 전투에 확신을 가지고 임해도 되는 까닭은 전쟁의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승리가 확정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긴 싸움을 왜 내가 또 싸워야 하는 건가요?”
그것은 주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들게 다가오는 이 모든 삶의 무게는 전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된 자상한 아버지의 훈련 프로그램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전투와 맞닥뜨리게 될 위험이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기도의 응답은 믿은대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장기전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응답받아야 할 사람처럼 급박한 에너지로 기도해야만 강력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 상태로 기도하다보면 주님께서 그 상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꾸준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내가 기도했던 그 응답은 아니더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고 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흔적을 남기십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단다. 이렇게 너의 기도를 듣고 있단다.'
이런 경험을 한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바로
1. 응답받지 못한 것도 응답이다.
2.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유익한 것으로 응답을 주신다
는 간증입니다. 이 같은 간증은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 본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키오스크에 대체 된 계산원들처럼 누군가의 일자리가 대체 될 것이다.
AI로 인해 사라지게 될 업종 리스트가 이미 발표되었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타당성 있는 근거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며 준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어째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가? 도대체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4차 산업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변동성이다. 앞으로 어떤 신소재가 우리의 삶에 혁신을 가져올지 짐작 정도나 해볼 뿐 누구도 미래를 온전히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변동성을 대하는 최선의 준비는 어떤 변화에도 대처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척박함 속에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의미한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며, 주어진 상황 앞에서 가장 효율적인 행동 양식을 선택하게 만드는 탁월한 지혜이다.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지혜를 부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 그 지혜를 힘입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아직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 속에서도 기도하지 않고 대충 살았던 전과가 있다.
많은 이들이 공부도, 기도도 하지 않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바 있다.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부하지 않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적당히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대충 출석 일수만 채우면 학교 또한 대충 졸업장을 준다. 그렇게 대충대충 노력이나 기도 없이 살아도 살아지는 삶을 살아 본 이들은 어떤 문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다른 대안을 찾아가며 대충 살아가게 된다.
취업 또한 마찬가지, 원하는 직업을 놓고 될 때까지 기도하기보다는 적당히 취직되는 직장을 찾아 입사한다. 그렇게 살아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삶이었기에 굳이 기도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결혼 상대자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 기도 없이 만난 연인을 사랑이라 믿으며 식사기도 하듯 대충 기도해 보고 결혼한다. 그렇게 행복 반, 불행 반, 아니 어쩌면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결혼 생활을 하며 그 모든 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많은 이들의 결혼 생활이 행복보다는 행복하게 살아 보기 위한 노력 들로 채워진다. 사랑이라 믿어 평생 사랑하기로 약속한 사람과 사랑은커녕 그저 다투지 않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본다. 기도만 빼고...
그렇게 기도 없이 살다가 부모가 되면 자신의 기도하지 않는 신앙을 자녀에게 대물림시킨다.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기도 한번 하지 않고 자녀가 자신과 같은 인생 코스를 밟아 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본다. 이대로라면 자녀의 대학 등록금조차 모을 수 없음을 이미 3년 전, 5년 전부터 알았음에도 기도하며 준비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으며 기도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의 삶에 예외는 없다. 결국, 때가 되면 기도 대신 대출을 쓰게 되고 대학을 졸업한 자녀의 첫 시작은 대출 상환 의무와 함께 시작된다. 이렇듯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제외한 모든 시도를 해본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아간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앞에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정도가 기도 응답의 전부라 믿는다. 삶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기도의 능력은 들어만 보았지 직접 경험해 본 바 없기에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들에게 기도 응답의 연관 키워드는 #이론 #이상 #우연 #나와는 #해당없음. 누군가의 기도 응답 간증은 로또 당첨자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사실 기도는 어렵다. 정말 어렵긴 하다. 어려운 어떤 과제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기도다. 그러나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차라리 기도부터 시작해보라. 우선순위가 정리될 것이다. 일정 시점부터는 모든 문제를 동시에 다루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면 기도하라.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기도하라.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다면 기도부터 시작하라.
세상의 철학과 종교는 ‘내려놓음’을 권면한다. 고상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과제 앞에서 도전자의 멘탈을 보호하기 위한 포기이며 항복선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려놓음’은 ‘지원요청’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능자를 향한 SOS 이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제는 에너지를 소모 시키지만 기도는 도전자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기도하면 할수록 차오르는 에너지는 삶의 모든 과제를 능히 감당하게 만든다. 믿음, 열정, 신념, 목표의식, 책임감, 집중력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거론되는 긍정적인 그 힘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공급받는 통로는 기도이다.
인생의 위기는 대체로 예측이 가능하고,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다. 기도로 준비된 미래는 모든 변동성을 대처할 수 있는 능동적 유동성으로 빈틈없이 예비 될 것이다.
‘기도 부흥’ 사역으로 집중해서 드리기로 한 시간이 차고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또다시 천만원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이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영적인 현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키워드를 동반하는 듯 했다.
#동시다발적 #타이밍 #우연치고는 #기가막힌
우선 사탄의 역사가 그러하다. 나쁜 상황에, 나쁜 사람이 나타나서, 나쁜 짓을 한다.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다.
[욥기 1장 中]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낙타를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집이 무너져 주인의 자녀들이 죽었나이다.
하나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 필요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 근처를 지나가다가 식사나 같이 할까 하는 마음에 어머니가 시무하시는 교회에 들렀는데 크게 넘어져서 옴짝 달싹 못하고 계셨다. 상황이 심각하여 어머니를 업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김집사님이 들어오셨다.
“근처에 올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집사님과 함께 근처에 있는 큰 정형외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부러진 것은 아니고 인대만 살짝 늘어나셨네요. 내려가셔서 MRI 찍으시면 됩니다.”
“네? 인대만 살짝 늘어났는데 왜 MRI를 찍나요?”
“수술을 해야 할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인대가 살짝 늘어났는데 왜 수술을 하나요?”
“그럼 MRI도 찍지 않고 바로 수술 들어가요?”
과잉진료를 유도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만일, MRI를 찍은 후 수술을 하라고 해도 이 의사의 말을 신뢰할 자신이 없었다. MRI가 있는 곳에 가면 MRI부터 찍으려고 할테니 아무래도 MRI가 없는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MRI가 없는 병원을 찾겠는가.
“아! 그러고보니 우리 아들이 다리 다쳤을 때 갔던 정형외과가 있어요. 거기는 MRI가 없어요.”
동행했던 김집사님의 안내로 찾아간 병원의 원장님은 엑스레이를 찍은 후 덤덤히 말했다.
“인대만 조금 늘어나신 거라 반 깁스만 해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다리는 아주 잘 회복되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처음 들렀던 병원에 갔던 지인들은 모두 수술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그 시간에 없었다면 어머니는 최소한 과잉진료, 심한 경우 멀쩡한 다리를 칼로 찢어서 수술까지 할 뻔했던 것이다.
“책을 쓰길 원하신다면 집필을 하며 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주세요.”
‘그 힘 사용설명서’를 집필하기 전 나는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었다.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서 지인을 통해 외국인 대상 임대사업 제안이 들어왔다. 안 할 이유가 없는 조건, 아니 안 하면 바보라고 할 정도의 조건이었다. 나는 크게 손이 안가는 임대사업을 하며 무난히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투자대비 수익률이 매우 좋다며 국민북스의 대표님과 실장님도 함께 이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인들로부터 투자하고 싶다는 제안을 계속 받아왔던 터였다. 나는 제안을 받아 들였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기존 사업체를 매각했다. 그러나 실장님과 함께 새로운 물건을 찾던 도중 ‘사드 미사일’ 이슈가 터졌다.
그 여파로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겼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임대사업자들의 매출이 급감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관광객 수는 회복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관련 분야의 판매단가는 여전히 예전처럼은 회복되지 않았다. 반면, 그 비즈니스는 비교적 쉽게 돈이 된다는 소문이 나서 경쟁업체가 과하게 늘어나 앞으로도 예전과 같은 수익률은 회복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내가 계속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면 이 모든 마이너스 이슈를 전부 경험했을 것이다. #우연치고는 #기가막힌 #타이밍에 빠져 나온 것이다.
‘그 힘 사용 설명서’ 출간 후, 기도부흥 사역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시간이 채워질 즈음 생각지도 못했던 스카웃 제의를 받아 이전업무인 보험사에 복귀하게 되었다.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동시다발적 #타이밍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게 또 다시 천만원 정도 되는 급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업무 복귀한 4월 한 달 동안 보험사에서 발생한 소득은 약 2000만원으로 마감 되었다. 두 번째 달인 5월에는, 이미 첫 째주부터 2000만원을 넘어서고 있다.
아울러 보험사에 업무 복귀한 달에 또 다른 스카웃 제안을 받아 4월 달부터 (주)제*** 등기이사로 위임되어 월 300만원의 추가 소득이 발생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치 사역 때문에 발생했던 소득의 공백을 두 배로 채워주시려는 듯 공교롭게도 첫 급여가 같은 타이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법칙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험사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득의 근거 때문이다. 4월 한 달 동안 지인을 통한 계약은 불과 1건뿐, 나머지는 모두 이달에 처음만난 고객들로부터 체결된 계약이다.
“제 담당 설계사님이시죠?”
가입시킨 설계사가 퇴사하여 나에게 수금 이관된 고객이었다. 앳된 목소리의 27세 여성 고객은 20만원정도 되는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서 보험이 해약 될 위기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 받은 고객은 자신의 동생과 친척들을 하나하나 소개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개는 소개를 낳았다.
남편 암보험을 들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온 시흥에 사는 고객에게 방문 했을 때는 예기치 않게 8개의 계약이 더 나와서 총 9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보험업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걸려 온 전화로 이 정도의 계약을 체결하는 일은 매우 희소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우연들이 일상처럼 늘 있어왔다.
이것은 MDRT협회 최고 등급인 Top of the table 인증서이다. 한 해 동안 4억 4천만원 이상을 번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나는 보험사에 입사한 이후로 한 번도 MDRT기준을 놓친 적이 없다.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전국 사원 매출 순위표에서 1위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기도 했다.
필자 한 사람의 매출이 지점 전체 사원의 매출을 합친 것 보다 많은 경우도 있었다.
천만원 짜리 믿음을 소유하게 된 뒤로는 대체로 그 정도의 돈을 벌게 되었다. 그것은 보험사에 입사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필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오히려 내 힘을 쓰면 쓸수록 다양한 부작용만 발생되었다. 이를 테면 관리자를 뽑아 사업체를 맡겨두고 나가서 다른 사업을 하면 맡겨둔 사업체의 매출이 급감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없었다.
‘기도부흥’ 사역 중, 과거 70만원짜리 믿음을 소유하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에 급여 1천만원은 그야말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 청년이 1천만원짜리 믿음을 소유하기까지의 과정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의 영적인 감각을 깨우기 위해 무일푼, 무능력 할 때의 내 모습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방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사용하는 영적인 감각을 되찾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의 책 그힘사용설명서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사촌동생 진만이가 나를 찾아왔다. 함께 건축사업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진만이는 형들과 함께 건축에 참여해서 이미 적지 않은 자산을 형성한 상태였다. 형들이 건축으로 잘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제대로 검토도 못 해 보고 있었는데 진만이를 통해 성공의 규모와 실체를 정확히 확인하게 되었다.
벌써 4개째의 자회사를 분사시킨 상태였고 이제 막 출범한 신설법인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건축이라니 위험하지 않은가. 당연히 누구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만이는 몇 개월간 나를 설득했다. 일과시간에도 틈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형, 일단 하루만 나와 봐.”
마지못해 찾아 간 나에게 진만이는 여러 현장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 보면 볼수록 안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업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제안의 홍수 속에서 수 없이 검토와 거절을 반복하다보니 어느 덧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절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특별한 반론도 없이 거절만 하는 나에게 진만이가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호형도 잘 됐고 은이형도 잘 됐고 창이형, 택이형, 원이형도 다 잘 됐고 나도 잘 됐는데 형만 안 될 것 같아? 형만 망할 것 같아? 형들이랑 같이 지을 거고, 망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건데 형들이 그렇게 망할 것 같아?”
그리고 나서 진만이는 우리 현장이 아닌 다른 업체들이 분양한, 변두리에 위치한 현장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형, 이렇게 외진 곳에 지어 놓은 집들도 전부 다 팔렸어. 새로 지은 집들 중에 몇 년 동안 안 팔리고 방치 된 집 본적 있어? 이제 형들은 바빠져서 다른 사람들 안 챙겨주는 거 알지? 나도 나중에 바빠지면 형들처럼 내일 하느라고 바빠서 형한테 이런 얘기해줄 시간도 없을 거야. 내가 나중에 형들처럼 성공해 있으면 그때 가서 나를 보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형들은 망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면 망할 리가 없다. 그리고 진만이는 형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만이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건축은 망하지 않으면 돈을 번다. 많이... 형들과 함께 하면 나도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망하지 않으면 돈을 번다. 많이... 그것이 건축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형들은 이미 지난 10년간 건축을 해 왔다. 그런데 내가 들어오자마자 망할까? 하필 내가 들어오자마자 딱 그 타이밍에? 내가 그렇게 복이 없는 사람인가?’
찰나의 순간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안목을 열어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라고...
즉시로 주님께서 주시는 차분함이 나를 덮었다. 주변이 고요해지며 포근한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읽히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과 함께 그 비전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별과 모래로 예를 들어가며 최대한 아브라함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시던 그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작년부터 나는 경기도 모처 지하철역 인근 4개의 건축 공사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내가 억지로 만든 기회가 아니라 순조롭게,아니 강권적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연말을 기점으로 나는 드디어 내 소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퇴근 후에는 기도부흥 사역과 관련된 업무가 기다린다. 주말에는 건축업에서 해야 할 업무를 한다. 동시에 건설 관련 자격증들을 취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며 동시에 더 발전된 미래를 위한 발판을 준비한다. 주님을 만난 뒤로 쭉 그렇게 살아왔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내 힘을 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을 사용하면 가능하다. 새로운 자리에 앉아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 새로운 업무에 적합한 상태로 그때 마다 적합한 세팅이 이루어진다. 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을 책과 블로그를 통해서 나누고 있다.
내 힘을 빼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능력 주시는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4:13)
축구에 대해 공부는 하지만 축구는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축구는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비대한 몸 때문만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실제 공을 차며 직접 축구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축구 관련 기술과 정보를 찾아보며 혼자 공부한 결과 이론적인 면에선 완벽한 축구 전문가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축구를 하지 못한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쌓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과 기도에 응답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적당히 기도도 하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기도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고 배울 만큼 배웠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일부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의 기도응답 간증을 들으며 부러워만 한다.
그 성도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에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그 사실이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천은 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기도에 대해 이론만 배운 데에서 오는 부작용 때문은 아닐까.
복싱을 예로 들어 보려한다. 복싱은 이론과 실기가 결합된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론만 배워서는 링 위에 설 수가 없다. 상대방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패배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링 위에서 벌어지는, 사탄과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격투기와도 같다. 따라서 기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에 대한 책과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기도 시간을 대신한다. 그렇게 기도에 대한 이론이 쌓여가는 만큼 ‘자신이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도 커져간다. 문제는 본인이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커져 갈수록 설교를 통해 은혜 받을 확률, 즉 기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 목사님 설교는 영 진부해서 들을 수가 없군. 저렇게 뻔한 설교를 하다니...’
잘 알고 있다는 교만으로 가득 찬 그는 어느 누구의 설교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점점 더 은혜 받기 힘든 상태가 되어간다. 어느덧 그는 어지간한 설교로는 아무런 동기부여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에게 신앙적인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의 설교가 요구된다. 그는 마치 약물에 중독 된 사람처럼 계속해서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설교를 찾아다닌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한 번 간신히 은혜를 받았다 해도 역시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고 동기부여만 받는 것에 습관, 아니 중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머리만 잔뜩 커진 사람을 지도해 줄 스승은 없다. 그는, 스스로 동기부여 받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는 한 절대로 자신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된 고전 설교들을 들어보면 설교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단순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 받습니다. 여러분도 간절히 기도하시면 응답 받으실 줄 믿습니다’ 정도의 단순구조이다.
오늘날처럼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혁신적인 보충설명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한 설교 말씀을 듣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으며 기도했다. 적어도 지금의 성도들보다는 훨씬 더 많이 기도했던 것은 여러 정황상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기도의 응답과 영적인 체험들이 따랐었던 것도...
당시의 설교는 ‘기도하라’는 일차원적 권유와 ‘아멘’이라는 심플한 순종의 조합으로 열매를 거두었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성도들은, 신학지식의 보편화를 통해 당시의 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이제 어지간한 설교로는 동기부여는커녕, 설교비평 당하기 딱 좋은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 설교하는 목사님? 아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머리만 잔뜩 커져버린 성도 본인이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덕분에 타인에게 말씀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개인적인 신앙성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학대학에 가서 내 개인적인 신앙 열정은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만 같다.
설교자가 된 후, 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나도 모르게 분석하게 되곤 한다. 신학대학을 가기 전엔 없던 증상이다. 이것은 내가 은혜 받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뿐이다.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다 해도,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다면 기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지난 번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이번에 새로 도전하는 문제에 대한 기도에 있어서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일 수 있다. 믿음은 선택의 문제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도 그 논리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믿음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유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꾸만 지식으로 믿음에 접근하려고 하면 그것은 곧 그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방식이 된다. 이 방면에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님의 제자 도마이다. 도마는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창 자국을 집적 만져봐야만 주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믿음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9절)
설명을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믿을 수 있는 확률은 더 멀어지기 일쑤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논리적 답변과 증거를 요구하던 이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사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심지어 이들은 다양한 영적 현상을 목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신유의 현장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한 기도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미 기도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기도의 실천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