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는 분들이 느끼는 공통점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뿐이라는 것. 올라가려고 발버둥 쳐야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고 처음부터 현상유지를 목표로 정해 놓으면 반드시 퇴보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런 듯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점점 미워하게 되고, 존중하지 않으면 조금씩 상대방을 무시하게 된다. 선하지 않으면 악이 틈타고 성실하지 않으면 게으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침노하지 않으면 침노 당한다.
신앙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을 추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재미난 것들이 나의 여가를 침노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세속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형통케 하는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고난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듯하다. 나는 돈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과 돈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관찰하며 그렇게 느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의 신앙적 주관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이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내 삶의 문제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제 삶은 그 믿음에 따라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와 다른 신앙적 선택을 틀렸다고 비난하진 않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믿음만이 옳다고 그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믿는 사람은 무조건 가난과 핍박이 함께 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을 가진 분들 또한 자신의 선택을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유일한 구원의 열쇠라는 것에서만 이견이 없다면 우리는 각자의 신앙적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가 관찰하며 보고 느낀 바를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을 믿는 부자들은 모두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제적 부유함을 거부하는 분들은 대체로 물질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부함’이란 기도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갈 수 있다는 메시지에 무조건적인 반감을 보이는 분을 말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불하지 못한 많은 청구서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울 줄 몰랐고, 심지어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돈을 쓸 줄도, 벌 줄도, 관리 할 줄도 모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놀랍게도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쓴 자기 계발서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공통적으로 언급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부(富)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에 그것이 각인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부와 멀어지는 행동을 하게 된다. 돈이 벌릴 만한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며 자신도 모르게 가난해지는 행동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불필요한 소비지출도 포함된다. 본인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절제를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과소비를 하지 않는데요?”
그런 경우에는 주변 가족들이 돈을 가져다 쓴다. 아니면 자동차 수리를 해야 한다거나 병원을 가야 한다거나 사고라도 나서 돈이 모일만하면 계속 써야 할 곳이 생긴다고 말한다.
2.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에 그것이 각인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부유해지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돈을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것이 재미있어 진다.
내게는 과하게 비싼 것은 예뻐 보이지 않는 독특한 안목이 있다. 면세점에서 팬던트로 디스플레이한 이태리 브랜드 가방을 본적이 있다. 꽤 마음에 들어 가격을 보니 모두 합쳐 550만원, 가격을 확인하자 가방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성비를 쇼핑의 기준으로 삼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훈련이 된 것 같다. 선물로 받은 몇 개의 고가품을 쓰고는 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만일 갖고 싶은데 참으려 했다면 어땠을까?
결국은 가서 샀을 것이다. 그렇게 가방부터 벨트까지 사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이제 막 돈이 모이기 시작했던 10여 년 전부터 삶의 습관이 되었었다면 나의 경제적 상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나에게 있는 더 큰 목표가 나의 안목을 바꾸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하다.
“그럼 그 가방이 예뻐 보이지 않나요?”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돈을 주고 살 만큼 가치 있는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이따금 사람들로부터 돈을 어떻게 벌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벌고, 남들보다 많이 안 썼습니다.”
내 주변에는 10년 넘도록 억대 연봉자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많은 ‘과다 대출자’들이 있다.
“저는 이자 포함 한 달에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만 500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자산을 관리한다는 이들이 정작 자신의 자산은 관리하지 못했다. 억대 연봉자 모임에 있는 많은 남성들 가운데 전 재산이 1억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모두 값 비싼 차를 타고 돈 많이 드는 취미를 통해 버는 돈을 모두 소비한다.
이처럼 ‘부유함’에 도달하겠다는 분명한 청사진이 없을 경우 많이 버는 이는 많이 버는 만큼, 적게 버는 이는 적게 버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든 돈을 탕진해 버리게 된다고 다른 책들도 말하고 있다.
부를 인정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돈이 벌릴 만한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성공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나 같이 우연처럼 찾아 온 기회를 붙잡았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그들에게만 기회가 왔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책들은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고 생각이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목표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도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 안에 맞게 바꾸어 보면 이렇게 적용이 된다.
“성도들은 도저히 응답 받을 수 없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기도제목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기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영적인 나태함을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뭐요? 그러면 내가 기도하지 않는 다는 거요? 당신이 봤소?”
“마태복음 7장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습니까. 이 사역을 하면서 쭉 지켜봐 왔습니다. 당신들은 축복 얘기만 나오면 언제나 화부터 내지 않소. 당신들은 마치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못살고 다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소.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에 있고, 그 능력은 사랑과 화평케 하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이 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시오. 당신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지적할 때, 당신의 말투, 표정, 그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소. 사연도 모르면서 타인의 기도제목을 비난하는 그 모습이 화평함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오?”
누군가 자신이 선택한 믿음의 방식에 대해서 간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신앙을 기준으로 타인의 신앙을 비난하려 한다면 그의 메시지에 침노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 우리가 침노해야만 한다. 그들이 극단적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의 풍요를 거부한다면 우리 또한 강경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궁상떠는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궁상떠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삶의 목표를 이루어 주신 적은 없었다. ‘궁상떠는 기도’란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는 하지만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대신, 이루어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은근한 원망,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자기 연민으로 가득차서 눈물짓는 하소연을 말한다. 분명 힘들다고 하면 위로는 주신다. 그런데 위로만으로는 전진을 할 수가 없다.
“강하고 담대하라.”
이 말씀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전진은 시작된다. 슬픈 것도 알겠고 힘든 것도 알겠다. 하지만 슬픔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울고 있는 동안에는 전진을 할 수가 없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믿음만을 가지고서 전신갑주를 착용하고 말씀의 검을 들어야 한다.
이곳은 전쟁터다. 그래서 그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슬픈가? 울고 싶은가? 슬퍼해도 좋고 울어도 좋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 우리의 전진은 늦춰지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사도 바울도 돈 없이 전도하다가 핍박당해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본인이 사도 바울 정도의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팔아 바울처럼 선교여행을 떠나십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까? 차던지 덥던지 둘 중에 하나만 택하십시오.”
한쪽으로만 치우쳐 기도의 몰입을 방해하는 목소리들을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가득 차 있는 거룩함을 가장한 기도를 방해하는 소리를, 침노하지 않으면 본인이 침노 당할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 응답의 비결’에 대해서 함께 알아 볼 건데요.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성도님들의 간증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들을 모아서 정리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통계가 됩니다.
통계를 내는 이유요?
다수에 대한 분석이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응답을 받는 기도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하고, 아울러 기도 생활을 성실히 하시는, 그래서 응답을 많이 받았다는 성도님들의 간증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그분들의 말이 성경을 대신 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영적 세상의 매커니즘을 이 세상 사람들이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고 성경 또한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 깨달음을 공유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요. 큐티 나눔 하는 것처럼 말이죠.
자, 그럼 먼저 기도하는 방법부터 알아 볼까요.두 가지 키워드가 중요합니다.
따라해주세요
간절히!
오래오래!
통계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간절히, 오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절히’와 ‘오래’는 어떤 동기가 있으면 따라오는 현상에 불과해요. 예를 들어 공부할 마음은 없는데 계속 책상에 앉혀 놓으면?
잠이 옵니다. 잠이 오죠.
공부하고 싶은 동기를 먼저 찾게 되면?
오래오래, 간절한 마음으로 알아서 공부합니다.
그렇다면 간절히, 오래 기도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는 뭘까요?
바로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응답 받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의욕이 사라집니다.
응답 받는 다는 믿음이 생기면?
오래오래 기도하게 됩니다.
왜요? 기도하면 응답 주실 것이 분명하니까요
즉, 기도 시간은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지요.
믿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1.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2.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사하셨다는 믿음
3. 기도 응답의 믿음
이 믿음은 다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못 믿는 이들도 있답니다. 그리고 누군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말을 하면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3번 ‘기도 응답의 믿음’ 역시 두 가지로 나뉘는 데요.
A.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음을 믿는 믿음
B. 내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다른 사람이 기도 응답 받은 간증을 믿고 은혜까지 받으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는 경우죠.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씀 드릴 거에요.
이건 모르시는 분이 많더라구요.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다 해도 그 믿음이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 부분 굉장히 중요해요. 엄청난 기도 응답을 경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 본인의 신앙 상태에 따라 그 믿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가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공격하는 생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중에 으뜸, 기도 제목에 대한 불확신입니다
아~~ 내가 이런 걸로 기도해도 되나?
그 염려는 내 기도를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거란 생각에서 시작돼요. 예를 들어, 사람들은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반사적으로 그에게 세속적이라는 비난의 마음을 갖고 심지어 직접 면전에서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구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인간이 하나님 뜻을 어떻게 알죠? 1~2시간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분명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물론 아무 것도 부족할 것 없는 분들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부분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사업 때문에, 취직 때문에 교회를 나와서 기도하던 분들도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돈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 속에서 돈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변화를 만든 것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 신령과 진정으로 다가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자매님들! 남자가 박력 있게 고백 못하고 거절당할까봐 무서워서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주변에 맴돌면 어때요?
그런데 목숨 걸고 사력을 다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죽기 살기로 쫓아 다니면 어떻지요?
하나님은 영이셔서 응답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영혼 없는 기도!
안 받으시는게 아니라 못 받으세요. 영이시라 그래요
그러니까 자신이 1퍼센트도 원하지 않는 해외 선교를 위해 진정성이 전혀 없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은퇴 후에도 경비실 2교대로 일하는 우리 아빠, 물만 닿으면 시큰거리는 관절염 손으로 식당 설거지 하시는 엄마를 위해 펑펑 울며 최선을 다해 드리는 기도가 영이신 하나님께는 더 잘 들릴 수 도 있습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흠냐 흠냐...
저도 이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요.
일단 그렇게 기도의 응답을 통해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더 주님께로 다가가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해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방주로 인도해 가시죠.
구원은 때로는 일시적으로, 또 때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함부로 남의 기도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어요. 돈이 필요하면 주실 것이고 많이 필요하면 많이 주실 거에요.
탕자처럼 되면 어떻게 하냐구요? 염려하지 마세요. 먼저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시니까요. 이것을 ‘성화’라고 하지요. 예수님을 닮아가며 거룩해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도자는 결국 응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물론 A를 기도했는데 B를 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아시죠? 그런 경우는 당연히 A보다 B가 훨씬 좋은 플랜이라서 그렇게 해 주신 거에요. 언제나 세월은 진실을 말해주지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통계적으로 간증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셔서 나에게 가장 유익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
자, 이제 타인의 기도 제목을 비방하면 안되는 이유, 확실히 알겠죠? 무조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세요. 마찬가지로 그 기준을 자신에게도 그래도 적용하는 거에요. 나도 성도잖아요. 예외 일리 없지요. 그러니까 그냥 원하고 바라는 간절한 무엇인가가 떠오른다면 그냥 기도하세요. 주님께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도록 인도해 주실 거에요.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은 사회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계신 필자의 아버지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느 추운 겨울 날,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던 한 노인을 부축해서 교회로 오셨다. 부모님은 교회헌금으로 그가 거주할 수 있도록 고시원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랜드 신우회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그에게 틀니를 선물했다. 그리고 최노인, 아니 최성도님께 박스를 주워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직접 돈을 주면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최성도님이 박스 줍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두 분도 함께 박스를 주워서 주곤 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박스를 줍다 넘어져 팔이 심하게 부러지고 입원까지 하셔야 했지만 최성도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비밀로 했다. 얼마 전, 최성도님은 목사님들께 통장에 5백만 원이 넘게 있다고 웃으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설교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곤 한다. 과연 최성도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런 성도님들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말이다.
“너어어무 가난하면 믿음 생활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할 리야 없겠지만 힘든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해도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되지 않으면, 심지어 계속 그런 상태가 일말의 발전 없이 유지되면 불신앙의 마음이 찾아 올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지. 사탄아 물러가라.’
“하아!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죄송해요 주님. 에잇! 사탄아 물러가라.’
저는 이것을 싸구려 전투라고 부릅니다. 모름지기 영혼구원과 더 큰 비전을 위한 전투가 아니라 고작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다퉈야 하는... 가난하면 현실이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자녀가 먹고 싶어 하는 것 하나 못 사주게 된 부모로서의 입장, 돈 때문에 벌어지는 가족 간 생이별, 그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을 불렀던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그런 두 분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며 느낀 소감이 그러했습니다.
“너무 가난하면 믿음 생활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
사람이 너무 잃을 것이 없으면 막 나가는 마음도 생깁니다. 될 대로 돼라.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만나고도 한동안 그랬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하얀 피부 때문에 약해보였나 봅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와 시비를 거는 아이들. 싸우기보다는 당해주는 쪽을 선택하던 저는, 저희 집이 그렇게 된 뒤부터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도가 지나쳐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으니까요. 싸움이 거듭될수록 더욱 거칠어지는 성품, 처음에는 싸우는 것이 힘들더니 나중에는 참는 것이 힘들어져서 나도 나를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경찰서에 간적이 있습니다. 스무 살 초반, 좌회전을 하려고 서있는데 버스운전기사가 저에게 어째서인지 욕설을 해왔습니다. 저 나름대로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버스기사는 분이 안 풀렸는지 내려서 제 머리를 툭툭 치더군요. 참지 못하고 또 경찰서에 가게 되었습니다.
꽤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코와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는 버스기사에 비해 너무도 멀쩡한 저의 상태는 한 눈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짓게 했습니다. 버스기사가 저를 구속시키라며 소리를 질러 대던 그 순간, 저는 염치없게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말없이 기도만 하고 있던 그 때, 조사를 하던 경찰관이 버스기사에게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이렇게 어린애를 교도소 보내서 인생 망치고 싶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먼저 때렸다면서요. 그럼 쌍방폭행이에요. 아저씨가 얘 구속시키라고 하면 얘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니 이 얼굴을 보시고 얘길 하세요. 어떻게 쌍방 폭행입니까.”
“보니까 이 친구도 팔이 엄청 부었구만.”
경찰관의 말을 듣고 제 팔을 보니 오른쪽 이두박근 부위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저는 통증 하나 없는 그 부위가 왜 부어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경찰관의 중재로 저는 경찰서를 나오게 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은 차마 쓸 수가 없네요.
그렇게 풀려난 뒤, 기도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십자가가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죄송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십자가를 외면하려 했지만 눈을 감으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눌러 붙은 핏자국, 저의 주먹이 버스기사를 칠 때마다 귓가에는 둔탁한 망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손발을 꽉 웅크리며 ‘잘못했습니다. 으으으,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회개는 한동안 밥맛도 잃을 만큼 혹독했습니다. 돼지저금통을 뜯은 돈을 들고 버스기사를 찾아가 최선을 다해 사과를 했고, 주님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수 없이 다짐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또 그런 시험이 찾아왔다면 아마도 저는 또 그랬을 겁니다. 분명 저는 또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고치지 못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다른 성도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 뱉는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어떤 권사님처럼, 어쩌면 저 역시도 저만의 나쁜 습관을 평생 가지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다루시는 주님의 방법은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돈다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무렵, 저는 기도하면 응답주시는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응답해 주시는,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 속에서 저는 감히 예수님을 완벽히 닮아보고자 하는 소망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사내가 가만히 있는 저에게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제가 없으면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상황이라 처음으로 싸움을 피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보잘 것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이유, 제가 잘못해도 너무 심하게 벌주시지 않는 이유를... 제가 잘해서가 아니고, 세상에서 얻어터지기만 하며 살아온 저이기에 차마 불쌍해서 엄하게 대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렇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멍청하리만큼 순하던 한 소년이 그토록 강퍅하게 변해버린 사실을 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으시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저 마음 아파하시며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그를 다듬어 가셨습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있고 없고, 내가 얼마나 그분과 함께 하는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의 삶, 나의 모든 상황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당연히 죄의 유혹 앞에서도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업무적 성과와 신앙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마음껏 기도해서 주님의 능력과 임재를 느끼는 삶을 사는 것만이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고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수강생 100명을 돌파한 노하우를 묻는 다른 학원장들의 물음에 이렇게 답변하는 강원장이었다. 주일날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고 했다. 누가 봐도 그녀는 완벽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처음 학원을 시작할 때, 엘리트 영어교사와 동업체제로 시작했다가 수강생이 많아지자 교사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수강생이 없던 시절에는 3백만원 넘는 급여를 줘야 할 교사를 한푼 안주고 쓰다가 수강생이 많아져서 3백만원 이상을 나눠줘야 할 상황이 되자 내보낸 것이다. 얼마 후에는 학원을 둘로 나누어 한 쪽을 수학학원으로 임대를 주었다가 수학학원이 잘되자 또 쫓아내고 본인이 운영을 했다.
야곱의 삼촌 같은 그녀의 악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학원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그녀의 학원은 지금도 잘되고 있고 여전히 새벽기도를 다니고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한다.
이따금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간증하고 다니던 사업가가 얼마 후 좋지 않은 이슈로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경우를 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망하지 않고 승승장구 중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그동안 회개 했을까? 혹시 구원 받지 않은 그냥 종교인인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어째서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질문을 나에게로 돌리자 의문이 풀린다. 사과를 훔치다 잡혀온 도둑이 바나나를 훔치다 잡혀온 도둑을 비웃으며 말했다.
“이 도둑놈아, 너는 어떻게 바나나를 훔칠 수 있니?”
강원장은 바나나 도둑인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사과, 포도, 망고 등 강원장 못지 않은 과일 도둑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도둑들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들이 나타나는가?
돈을 떠나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이 발견 된다. 예배를 드리다보면 꼴에 은혜 받았다고 눈물도 찔끔거린다. 악어의 눈물? 아니다. 나 같은 도둑놈 속에도 진짜 예수그리스도가 있다. 아, 그렇구나. 임마누엘의 약속이 있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본인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고 귀한 약속이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부러움을 넘어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도 억울해 할 것 없다. 분명 그들도 과일을 훔쳤을 것이고 그들 역시 주님을 믿으면 같은 은혜를 주실 테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전 인류의 구속사라는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원장, 그 사업가, 나, 때로는 이렇게 개인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이해가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철저히 내 편이시다. 이기적이어도, 다혈질이어도, 욕심 많아도... 문득 궁금해지는 사실이 있다.
“영적 성숙과 돈을 버는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가?”
결혼도 안하고 한 평생을 오빠의 선교지에 헌금을 보냈던 영애님은 충분한 저축을 하지 못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자의 몸으로 공사장에서 자재를 옮기는 일을 한다. 젊었을 때 화장품가게로 큰돈을 벌었던 그녀는 선교헌금을 평균 이상으로 드렸지만 재정상태는 오히려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평생 새벽기도를 빠진 적 없고 언제나 교회에서 봉사에 앞장섰던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선교지에 헌금을 보낸다.
고등학교 때, 방황하던 나를 주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5년 간 묵묵히 중보기도 해준 친구가 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봐온 신앙인들 중에 가장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지는 가정을 꾸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들 부부의 신앙적 면을 존경한다.
한 가지 문제를 꼽자면 빚이 1억이 넘었고 점점 늘어난다는 점. 특별히 그럴 만한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이 주신 집에서 시작했고, 유능한 남편은 한 번도 빠짐없이 중견 간부급 연봉을 가져 다 주었다. 해외여행도 간적 없고, 사치는 둘 다 원래부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사교육비 지출도 없었다.
결국 찾아낸 원인은 지나치게 자주 ‘마트에서 푸짐한 장’을 봐 온다는 것. 그녀는 그렇게 장을 봐서 본인들도 푸짐하게 먹고 전도대상자들을 초대해서 푸짐하게 먹이고 나눠준다. 그렇게 마이너스가 10년 이상 쌓이니 그런 결과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의 자녀가 푸짐하게 먹고 나눔 좀 했다고 집이 거덜 나서야 되겠는가.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그녀의 돈에 대한 이중 잣대였다. 그녀는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벌려하지만 큰돈이 들어 올만한 기회는 모두 거절한다. 충분히 할 수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돈이 안 되는 일을, 돈이 안 되는 만큼만 한다. 또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방통대에 입학을 해서 가장 집중이 필요한 시기에 집중력을 스스로 분산시키기도 했다.
그녀의 착하고 점잖은 남편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없이 한숨만 지을 뿐 그 이상의 책망은 없다. 친구와 내가 이견을 보이는 단 한 가지 영역은 경제관이다.
“돈이 있어야만 하나님일 하냐?”
나는 친구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누구보다 행복한, 돈 만 없지 모든 것을 다 갖춘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녀를 보며 나는 확신을 갖는다.
“신앙과 돈은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품은 1등급인데 재물은 최하등급인 사람이 있다. 성품 좋다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지만 언제나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돈이 들어 올만한 기회는 기가 막히게 피해가고 누군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자신만의 논리로 호의를 거절한다. 그는 칭찬과 존경 받는 삶을 살지만 늘 가난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
“난 돈에 관심 없어. 돈이 일만 악의 근원이야.”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믿고 있는 그 결정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존재에게 속아서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라면? 평생을 그 존재에게 속아서 가난하게 살아왔다면?
반대로 성품은 최하등급이지만 재물만큼은 1등급인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인간성이 좋지 않다고 혹평을 받을지라도 돈은 확실히 많이 번다.
“저 사람만큼은 꼭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인간만큼은 폭삭 망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다. 여기서 우리는 재물을 벌어들이는 능력이 다른 성품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어쨌거나 그들은 본인들의 믿음(?)대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현상은 교회 바깥도 마찬가지다. 세상 역시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책, 방송, 세상은 온통 믿음대로 되는 법칙으로 떠들썩하다.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있다.
‘가장 먼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부자에 대한 나쁜 편견을 깨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위선을 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다 착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그들은 돈이 어쩌다 가져올 불행을 과장되게 묘사하는데 익숙하다. 돈이 많으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또한 많다. 부자는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됐다고 매도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드는 순간 우리들은 그 목표에 흠집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잘못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목표가 달성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 부자아빠의 진실게임 中
“로또에 당첨 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당첨되기 이전의 경제적 상태로 되돌아갔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 모으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던 부자가 사업실패로 전 재산을 날리고 심지어 빚까지 졌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부자는 빚 청산은 물론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이 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한 사람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위 두 케이스는 극과 극의 대조적인 상황이지만 본질자체는 동일하다. 지닐 자격이 없는 자는 줘도 지니지 못하고, 자격이 있는 자는 뺏겨도 다시 되찾게 된다.
재산을 잃었던 백만장자가 얼마 후 또 다시 백만장자가 되곤 하는 이유는 그가 ‘백만장자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본인의 생각은 본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면에 숨어 있는 가난뱅이 자아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들을 밀쳐내고 있다.
정황상 믿음대로 되는 그 법칙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중력처럼, 하나님을 안 믿어도 긍정적인 재물관이 있는 사람은 돈을 잘 벌고, 하나님을 잘 믿어도 재물관이 부정적인 사람은 가난해진다는 추측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못 되 보이는 집사님의 사업번창을 보며 어째서 저런 죄인에게, 나는 만져 본 적 없는 큰돈을 주시냐고 묻는다면 주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진정 나는 그 집사님보다 모든 면에서 의로운가? 가난함과 부유함, 결국 ‘의로움’의 차이가 아니라 구하지 아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은 정수기 필터처럼 구정물과 같은 영혼을 맑은 생수로 변화 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만능 수리공처럼 못 쓰게 된 영혼도 가지고 오면 쓸 만한 것 이상으로 고쳐 주신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이 물이나 물건이라면 그래도 최대한 좋은 것으로 골라서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들고 갈 수 밖에 없다.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 예수님 만남 ⇨ 바울의 선교를 돕던 브리스가처럼 살게 해주세요.
구정물, 고물 같은 기도가 예수님의 필터링을 거쳐 거룩한 기도가 된다. 많이 가져 오면 많이 변화시켜 주시고, 계속 가져오면 계속 변화시켜 주신다. 인간적인 기도 역시 주님의 필터링을 거쳐 영적인 기도로 변화 된다.
예수님 = 말씀
성 화 =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나의 일부가 되어 가는 과정
읽은 말씀이 녹아들어 나의 일부가 되도록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이다. 성화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하다고 많은 경험자들이 간증하고 있다.
“말씀을 충분히 읽고 기도해야해. 땔감이 있어야 불이 활활 타지.”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씀이다. 말씀을 읽지 않고 기도만 하면 태울 수 있는 거룩한 땔감이 없어서 다분히 인간적인 기도만 하게 된다. 말씀을 읽다가 깨달음에 한계가 올 때마다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리면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 할머니의 평소 지론이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야 말씀을 깨달을까, 아니면 말씀을 깨달아야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도해야 말씀을 깨닫게 될까. 말씀을 깨달아야 기도하게 될까?
조직신학에 심취하다 보면 간과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조차 완벽하게 알 수 없듯 하나님의 섭리, 각각의 개인에게 다가오시는 방법, 순서를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없다.
‘하나님 뜻이 아닌가 봐’
우리는 조금 기도하다가 결과가 없으면 기도를 내려놓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조금 더 기도해서 그것을 가져가길 원하시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기도하고 응답 받아가며 점점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그토록 기도를 하라고 하실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은 끝나는 것 아닌가.
첫째, 성화에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품까지 주님을 닮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주님을 만난 그 기쁨 또한 결국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 때부터 성도는 옛사람의 본성에 남아있던 죄의 유혹에 반응한다.
술 마셨던 사람은 다시 술이 당기고 성격이 괴팍했던 사람은 다시 혈기가 끓어오른다. 이기적인 사람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 역시 그런 자신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인가. 자신의 못 된 성품은 고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못 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한 변화의 증거가 아닌가. 정죄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자꾸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만 서면 자신의 죄와 허물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죄와 허물이 십자가 공로보다 클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시인하는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평안의 밸런스를 조정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영적추락은 바닥을 다졌다. 더 이상의 마이너스는 없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성화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장은 언제나 ‘참 잘했어요.’ 이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는다.
보나마나 또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벌점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벌점을 지불하셨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기도해야만 가능한 변화이다.
둘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설마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길 바란다. (물론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한 것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도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째서 그런 이들이 생겨나고 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말씀이다. 말씀을 읽은 만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풍성해진다. 그 지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일이고 성령님은 기도를 통해 움직이신다.
말씀과 깨달음 사이에 기도라는 매개체가 있다.
그러나 구원 받지 않은 이들은 '구원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그렇게 기도하게 만들까?
우선, 그가 관심 있고 간절하게 느끼는 기도제목에 공감하는 것이다. 가르치려 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문제일 수도 있고 비전일 수도 있다.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체험이 아예 없는 신앙은 무결합니까? 이 세상에 모든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모두 위험한 성도들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성도에게는 체험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면요?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와 응답 속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이 눈뜨곤 한다.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주님,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 에너지로 주님을 알기 위해 더욱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다 마침내 주님을 알게 되면 나오는 아름다운 찬양고백.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1년 지나면 무조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학교가 아니라 기준을 통과해야만 진학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1학년 동급생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따금 5~6학년 믿음의 선배님들이 자신의 믿음 노하우를 간증할 때가 있다.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당연히 물질 축복을 받은 이들도 있다.
고학년들은 모두 연단을 거친 이들이다. 어려움 가운데서 아무리 기도해도 형통은커녕 하나님께서 상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믿음의 연단 말이다. 그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한 선배가 입을 떼기 시작한다.
“여러분, 기도하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형통케 해주십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1학년 동급생들이 일어나 그 선배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형통하려고 예수님 믿나욧!”
“하나님 믿는다고 전부 다 잘되고, 부자 됩니까?”
“아니 그럼, 가난한 사람은 전부 믿음이 없다는 겁니까?”
불량하기로 소문난 일진 복학생들이다. 지난 번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자기 발로 학교를 나왔다고 들었는데 1학년만 30년째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꼭 사람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누군가를 지적하며 자기를 나타내려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우리 학교 학생이 맞나 의심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 때문에 학교 결석하는 애들까지 생겨서 담임선생님이 금식기도까지 했다고 들었다.
“친구야, 너는 축복 얘기만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부터 나니? 그럼 하나님의 컬렉션에는 돈 없는 사람만 있어야 된다는 거야? 네 마음속 깊은 곳을 한번 들여다 봐봐. 너에게 그런 마음을 주는 존재가 과연 하나님의 영이 맞는지."
"너는 지금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못살고 다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아.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에 있다던데... 그 능력은 사랑과 화평케 하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이 된다는데... 그렇게 말할 때 너의 말투, 표정을 보렴. 그리고 너 때문에 불편해하는 주변 친구들을 한 번 둘러봐. 안타깝지만 누구도 너에게서 사랑, 화평, 온유 같은 성령의 열매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때 하늘에서 직접 현물로 내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먼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삶에 응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임하는 건강한 루트는 말씀입니다.
[이상적인 신앙성장 로드맵]
말씀을 듣는 중에 믿음이 임한다. → 그 믿음을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려 할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말씀부터 듣게 하십니다. 자꾸 내 귀에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들려온다면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가 들려오고 선교에 대한 메시지가 들려온다면 그것에 대한 결단을 원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축복 받았다는 메시지가 자꾸 나에게 들려온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으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장을 열어보지도 않고 찢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 ‘예수 믿으면 삶이 윤택해지고, 예수 믿으면 자신의 삶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는 메시지가 들려 올 때마다 모조리 차단을 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가난도 훈련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을 조장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중에 ‘축복’이라는 단어만 들리면 거부반응이 들면서 귀가 닫히는 이유는 뭘까요?
아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이 안 되서 그런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닫는 역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오케스트라에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연주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연주합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또한 자신이 만난 주님을 연주할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이라는 테마로 밤마다 열리는 이 작은 음악회로 우리를 초대하고 또 듣게 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조언인 줄 믿고 따랐는데 결과적으로 상황만 더 악화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 땐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나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상대방의 권모술수였던 것이다.
반란을 꿈꾸던 환관이 왕의 근위병들을 따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 중에 왕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있다는 정보가 있소. 그대들은 지금 당장 칼을 내려놓으시오.”
“그럴 수 없소. 우리는 이 칼로 왕을 지켜야 하오.”
“아직도 모르겠소. 왕의 명령이란 말이오. 왕은 그대들 중 누군가가 칼로 자신을 암살할까봐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오. 어서 칼을 내려놓으시오.”
그럴 듯한 명분에 근위병들은 하나 둘씩 지니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결국 그들은 왕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오”
“인생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업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줄 아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려 했지만 어쩐지 예전처럼 기도가 잘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몹시 죄송하고 못 마땅했다. 이제 막, 새롭게 기도의 용사로 태어나려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둘 기도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문제를 위해서 기도 하던 때에는 기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일에 해당하는 기도도 함께 드리곤 했었는데... 꿈과 직업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어느새 영혼 구원을 위해서도 펑펑 눈물까지 쏟으며 기도하곤 했었는데...’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릎을 꿇어도 예전 같은 기도의 간절함이 없다. 기도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눈이 떠진다. 심지어 이제는 삶의 문제들이 터져도 그것들을 위해서조차 예전처럼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욥의 세 친구들의 조언은 옳은 말이었지만 욥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욥을 위로하려고 온 그들은 욥을 더욱 낙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던 욥을 자극까지 하고 말았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맞는 말도 상대에 따라 틀린 말이 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정죄와 비판들이 교인들을 내쫓고 있다. 많은 새 신자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계하듯 가르치려드는 그 집사님, 권사님이 보기 싫어서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가장 큰 누가 되는 행동을 했다. 상황과 결과로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모르게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오”
지극히 성경적이고 흠 잡을 것 없는 이 말로 인해 기도의 열정이 식어 버렸다는 성도들의 탄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상황과 결과로 볼 때 그런 말들이 좋은 영향력만을 끼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도는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삶의 문제 해결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 또한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유지 되어야 할 이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다.
성경은 밸런스의 책이다. 가장 중요한 구원 역시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구절과 ‘믿어서만 될 일이 아니라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상반 된 구절이 한권의 책 속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이 두 가지 유형의 말씀이 지닌 본질적 의미는 놀랍게도 동일하다.
두 말씀의 의미를 균형 있게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쪽을 아예 버리고 다른 한쪽만을 붙잡게 되면? 위험하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간섭과 비판으로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지게 된 기도. 어긋난 기도의 밸런스를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선배,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며 기도하지 않았다.
생활의 달인, 서민 갑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이 되는데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할 법도 한데 그들은 계속해서 더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합니다. 그런 열정이 그들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지요. 그들은 어떻게 그런 열정을 갖게 된 걸까요?
여기 칼국수 집 오픈을 앞두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서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각의 재료들을 첨가해보고 빼도 보고, 늘려도 보고 줄여도 보며 맛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맛의 절대 값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 버려지는 재료의 손실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최고의 칼국수 맛 집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과정들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최고의 칼국수를 만들 것이고 그 칼국수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올 것이 분명하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칼국수 비법을 완성시켜야겠다는 욕심에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습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가족들이 ‘좀 쉬엄쉬엄하지 그래요.’ 걱정 할 정도로 그의 업무에 대한 열정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열정은 강요에 의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넌 왜 그렇게 열정이 없어?’
확신이 없으니까요. 열정은 믿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밤과 낮으로 각각의 재료를 아주 조금씩 줄여 보기도하고 늘려보기도 하고 점점 더 최상의 맛을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어떻게 맛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만든 정말 맛있는 음식을 파는 집이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근무시간에 하루 종일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합니다. ‘TV 그만보고 일 좀 하라’고 하면 마지못해서 하는 척 하지만 이미 능동성은 없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의 일인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나태함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은 하지만,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판국에 그 이상의 투자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우리가 기도의 열정이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에 확신이 있는 성도는 ‘기도한다고 무조건 응답 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보다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붙잡습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선택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빌립보서의 말씀은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찾아오는 담대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전도, 인간관계, 비즈니스를 포함하는 우리가 도전하려는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스스로를 1%도 신뢰 할 수 없어 열정이 나오지 않던 사람일지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내가 아닌 그분을 신뢰하는 그 믿음 때문에 도전할 수 있고, 그 크기만큼 삶의 진보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재물관리능력이 없는 자녀에게 필요 이상의 부와 명예를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재물관리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 생기면 허랑방탕한 삶을 살 기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됨됨이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차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성화(聖化)라 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사람의 결심과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와 기도는 뗄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된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영과 육을 모두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편안하고 행복하게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죄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사망과 고난, 저주 아래에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주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처음 너희에게 베풀었던 축복을 회복시켜 주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땅으로 내려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본인이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인간들이 완수해야 할 모든 과업을 대신 처리해 주신 것이다.
그 후로부터 누구든 차별 없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그것이 실상이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의(義)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 증표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었는데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머물러 계시면서 인간들이 다시금 저주받을 행동을 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축복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신다.
이것은 더 이상 사탄이 자녀들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곁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굳건한 의지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지만 성령 또한 육체의 일을 거스르므로 성도들 개개인의 영적 성장에 맞춰 축복을 받게 되는 놀라운 밸런스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 갈 수 있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 더 정확히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가시가 박힌 발로는 힘껏 뜀을 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지속적인 찔림이 오기 때문인데, 그 찔림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성령님의 촉구이다.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완벽한 이끌림을 받는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한다. 성령 충만이 필요한 이유는 본질상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겐 세상이 주는 부와 권력을 선한 곳에만 사용하는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놓으셨다. 세상 사람들은 이 특별한 힘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자신의 꿈과 목표도 이루며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만 생각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욕망의 실현이 가져올 부작용까지 미리 알고 계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식 공간을 성령님께 내어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설계하신 분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만드는 성화의 도구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시는 모든 축복을 담기에 부족함 없는 그릇’으로 만들어가는 단련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우리가 재물을 위해 기도하면 단순히 재물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유지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성품도 함께 얻게 된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처음부터 무조건 다 주시지 않고 적절히 절제하시면서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기도로 사람을 연단(鍊鍛) 시키시는 목적은 첫째, 성도 본인을 받은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모든 훈련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훈련과정 또한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만큼 더 많은 기도 시간이 요구된다.
둘째, 기도로서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함이다. 훈련된 성도는 나중에 더 큰 인생의 문제가 닥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자녀는 마침내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기복 신앙으로 빠지는 것을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일즈 분야에서 이렇게 적용된다.
‘매출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사업을 하는 분들이 느끼는 공통점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뿐이라는 것. 올라가려고 발버둥 쳐야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고 처음부터 현상유지를 목표로 정해 놓으면 반드시 퇴보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런 듯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점점 미워하게 되고, 존중하지 않으면 조금씩 상대방을 무시하게 된다. 선하지 않으면 악이 틈타고 성실하지 않으면 게으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침노하지 않으면 침노 당한다.
신앙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을 추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재미난 것들이 나의 여가를 침노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세속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형통케 하는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고난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듯하다. 나는 돈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과 돈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관찰하며 그렇게 느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의 신앙적 주관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이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내 삶의 문제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제 삶은 그 믿음에 따라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와 다른 신앙적 선택을 틀렸다고 비난하진 않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믿음만이 옳다고 그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믿는 사람은 무조건 가난과 핍박이 함께 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을 가진 분들 또한 자신의 선택을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유일한 구원의 열쇠라는 것에서만 이견이 없다면 우리는 각자의 신앙적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가 관찰하며 보고 느낀 바를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을 믿는 부자들은 모두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제적 부유함을 거부하는 분들은 대체로 물질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부함’이란 기도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갈 수 있다는 메시지에 무조건적인 반감을 보이는 분을 말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불하지 못한 많은 청구서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울 줄 몰랐고, 심지어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돈을 쓸 줄도, 벌 줄도, 관리 할 줄도 모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놀랍게도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쓴 자기 계발서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공통적으로 언급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부(富)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에 그것이 각인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부와 멀어지는 행동을 하게 된다. 돈이 벌릴 만한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며 자신도 모르게 가난해지는 행동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불필요한 소비지출도 포함된다. 본인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절제를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과소비를 하지 않는데요?”
그런 경우에는 주변 가족들이 돈을 가져다 쓴다. 아니면 자동차 수리를 해야 한다거나 병원을 가야 한다거나 사고라도 나서 돈이 모일만하면 계속 써야 할 곳이 생긴다고 말한다.
2.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에 그것이 각인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부유해지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돈을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것이 재미있어 진다.
내게는 과하게 비싼 것은 예뻐 보이지 않는 독특한 안목이 있다. 면세점에서 팬던트로 디스플레이한 이태리 브랜드 가방을 본적이 있다. 꽤 마음에 들어 가격을 보니 모두 합쳐 550만원, 가격을 확인하자 가방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성비를 쇼핑의 기준으로 삼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훈련이 된 것 같다. 선물로 받은 몇 개의 고가품을 쓰고는 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만일 갖고 싶은데 참으려 했다면 어땠을까?
결국은 가서 샀을 것이다. 그렇게 가방부터 벨트까지 사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이제 막 돈이 모이기 시작했던 10여 년 전부터 삶의 습관이 되었었다면 나의 경제적 상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나에게 있는 더 큰 목표가 나의 안목을 바꾸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하다.
“그럼 그 가방이 예뻐 보이지 않나요?”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돈을 주고 살 만큼 가치 있는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이따금 사람들로부터 돈을 어떻게 벌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벌고, 남들보다 많이 안 썼습니다.”
내 주변에는 10년 넘도록 억대 연봉자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많은 ‘과다 대출자’들이 있다.
“저는 이자 포함 한 달에 기본적으로 나가는 돈만 500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자산을 관리한다는 이들이 정작 자신의 자산은 관리하지 못했다. 억대 연봉자 모임에 있는 많은 남성들 가운데 전 재산이 1억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모두 값 비싼 차를 타고 돈 많이 드는 취미를 통해 버는 돈을 모두 소비한다.
이처럼 ‘부유함’에 도달하겠다는 분명한 청사진이 없을 경우 많이 버는 이는 많이 버는 만큼, 적게 버는 이는 적게 버는 대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든 돈을 탕진해 버리게 된다고 다른 책들도 말하고 있다.
부를 인정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돈이 벌릴 만한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성공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나 같이 우연처럼 찾아 온 기회를 붙잡았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그들에게만 기회가 왔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책들은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고 생각이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목표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도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 안에 맞게 바꾸어 보면 이렇게 적용이 된다.
“성도들은 도저히 응답 받을 수 없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기도제목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기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영적인 나태함을 합리화 하려는 것이다.”
“뭐요? 그러면 내가 기도하지 않는 다는 거요? 당신이 봤소?”
“마태복음 7장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습니까. 이 사역을 하면서 쭉 지켜봐 왔습니다. 당신들은 축복 얘기만 나오면 언제나 화부터 내지 않소. 당신들은 마치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못살고 다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소.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에 있고, 그 능력은 사랑과 화평케 하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이 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시오. 당신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지적할 때, 당신의 말투, 표정, 그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소. 사연도 모르면서 타인의 기도제목을 비난하는 그 모습이 화평함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오?”
누군가 자신이 선택한 믿음의 방식에 대해서 간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신앙을 기준으로 타인의 신앙을 비난하려 한다면 그의 메시지에 침노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 우리가 침노해야만 한다. 그들이 극단적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의 풍요를 거부한다면 우리 또한 강경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궁상떠는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궁상떠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삶의 목표를 이루어 주신 적은 없었다. ‘궁상떠는 기도’란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는 하지만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대신, 이루어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은근한 원망,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자기 연민으로 가득차서 눈물짓는 하소연을 말한다. 분명 힘들다고 하면 위로는 주신다. 그런데 위로만으로는 전진을 할 수가 없다.
“강하고 담대하라.”
이 말씀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전진은 시작된다. 슬픈 것도 알겠고 힘든 것도 알겠다. 하지만 슬픔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울고 있는 동안에는 전진을 할 수가 없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믿음만을 가지고서 전신갑주를 착용하고 말씀의 검을 들어야 한다.
이곳은 전쟁터다. 그래서 그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슬픈가? 울고 싶은가? 슬퍼해도 좋고 울어도 좋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 우리의 전진은 늦춰지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사도 바울도 돈 없이 전도하다가 핍박당해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본인이 사도 바울 정도의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팔아 바울처럼 선교여행을 떠나십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까? 차던지 덥던지 둘 중에 하나만 택하십시오.”
한쪽으로만 치우쳐 기도의 몰입을 방해하는 목소리들을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가득 차 있는 거룩함을 가장한 기도를 방해하는 소리를, 침노하지 않으면 본인이 침노 당할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 응답의 비결’에 대해서 함께 알아 볼 건데요.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성도님들의 간증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들을 모아서 정리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통계가 됩니다.
통계를 내는 이유요?
다수에 대한 분석이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응답을 받는 기도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하고, 아울러 기도 생활을 성실히 하시는, 그래서 응답을 많이 받았다는 성도님들의 간증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그분들의 말이 성경을 대신 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영적 세상의 매커니즘을 이 세상 사람들이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고 성경 또한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 깨달음을 공유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요. 큐티 나눔 하는 것처럼 말이죠.
자, 그럼 먼저 기도하는 방법부터 알아 볼까요.두 가지 키워드가 중요합니다.
따라해주세요
간절히!
오래오래!
통계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간절히, 오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절히’와 ‘오래’는 어떤 동기가 있으면 따라오는 현상에 불과해요. 예를 들어 공부할 마음은 없는데 계속 책상에 앉혀 놓으면?
잠이 옵니다. 잠이 오죠.
공부하고 싶은 동기를 먼저 찾게 되면?
오래오래, 간절한 마음으로 알아서 공부합니다.
그렇다면 간절히, 오래 기도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는 뭘까요?
바로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응답 받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의욕이 사라집니다.
응답 받는 다는 믿음이 생기면?
오래오래 기도하게 됩니다.
왜요? 기도하면 응답 주실 것이 분명하니까요
즉, 기도 시간은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지요.
믿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1.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2.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사하셨다는 믿음
3. 기도 응답의 믿음
이 믿음은 다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못 믿는 이들도 있답니다. 그리고 누군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말을 하면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3번 ‘기도 응답의 믿음’ 역시 두 가지로 나뉘는 데요.
A.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음을 믿는 믿음
B. 내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다른 사람이 기도 응답 받은 간증을 믿고 은혜까지 받으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는 경우죠.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씀 드릴 거에요.
이건 모르시는 분이 많더라구요.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다 해도 그 믿음이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 부분 굉장히 중요해요. 엄청난 기도 응답을 경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 본인의 신앙 상태에 따라 그 믿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가 응답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공격하는 생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중에 으뜸, 기도 제목에 대한 불확신입니다
아~~ 내가 이런 걸로 기도해도 되나?
그 염려는 내 기도를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거란 생각에서 시작돼요. 예를 들어, 사람들은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반사적으로 그에게 세속적이라는 비난의 마음을 갖고 심지어 직접 면전에서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구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인간이 하나님 뜻을 어떻게 알죠? 1~2시간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분명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물론 아무 것도 부족할 것 없는 분들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부분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사업 때문에, 취직 때문에 교회를 나와서 기도하던 분들도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돈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 속에서 돈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변화를 만든 것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 신령과 진정으로 다가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자매님들! 남자가 박력 있게 고백 못하고 거절당할까봐 무서워서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주변에 맴돌면 어때요?
그런데 목숨 걸고 사력을 다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죽기 살기로 쫓아 다니면 어떻지요?
하나님은 영이셔서 응답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영혼 없는 기도!
안 받으시는게 아니라 못 받으세요. 영이시라 그래요
그러니까 자신이 1퍼센트도 원하지 않는 해외 선교를 위해 진정성이 전혀 없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은퇴 후에도 경비실 2교대로 일하는 우리 아빠, 물만 닿으면 시큰거리는 관절염 손으로 식당 설거지 하시는 엄마를 위해 펑펑 울며 최선을 다해 드리는 기도가 영이신 하나님께는 더 잘 들릴 수 도 있습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흠냐 흠냐...
저도 이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요.
일단 그렇게 기도의 응답을 통해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더 주님께로 다가가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해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방주로 인도해 가시죠.
구원은 때로는 일시적으로, 또 때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함부로 남의 기도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돼요.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어요. 돈이 필요하면 주실 것이고 많이 필요하면 많이 주실 거에요.
탕자처럼 되면 어떻게 하냐구요? 염려하지 마세요. 먼저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시니까요. 이것을 ‘성화’라고 하지요. 예수님을 닮아가며 거룩해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기도자는 결국 응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물론 A를 기도했는데 B를 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아시죠? 그런 경우는 당연히 A보다 B가 훨씬 좋은 플랜이라서 그렇게 해 주신 거에요. 언제나 세월은 진실을 말해주지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통계적으로 간증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셔서 나에게 가장 유익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
자, 이제 타인의 기도 제목을 비방하면 안되는 이유, 확실히 알겠죠? 무조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세요. 마찬가지로 그 기준을 자신에게도 그래도 적용하는 거에요. 나도 성도잖아요. 예외 일리 없지요. 그러니까 그냥 원하고 바라는 간절한 무엇인가가 떠오른다면 그냥 기도하세요. 주님께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도록 인도해 주실 거에요.
자 그럼 기도하러 가보실까요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부자 되면 타락한다.”
“그럼, 가난하면 죄 안 짓습니까?”
“너어어무 가난하면 믿음 생활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은 사회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계신 필자의 아버지 말씀이다.
아버지는 어느 추운 겨울 날,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던 한 노인을 부축해서 교회로 오셨다. 부모님은 교회헌금으로 그가 거주할 수 있도록 고시원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랜드 신우회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그에게 틀니를 선물했다. 그리고 최노인, 아니 최성도님께 박스를 주워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직접 돈을 주면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최성도님이 박스 줍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두 분도 함께 박스를 주워서 주곤 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박스를 줍다 넘어져 팔이 심하게 부러지고 입원까지 하셔야 했지만 최성도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비밀로 했다. 얼마 전, 최성도님은 목사님들께 통장에 5백만 원이 넘게 있다고 웃으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설교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곤 한다. 과연 최성도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런 성도님들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말이다.
“너어어무 가난하면 믿음 생활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할 리야 없겠지만 힘든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해도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되지 않으면, 심지어 계속 그런 상태가 일말의 발전 없이 유지되면 불신앙의 마음이 찾아 올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지. 사탄아 물러가라.’
“하아!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죄송해요 주님. 에잇! 사탄아 물러가라.’
저는 이것을 싸구려 전투라고 부릅니다. 모름지기 영혼구원과 더 큰 비전을 위한 전투가 아니라 고작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다퉈야 하는... 가난하면 현실이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자녀가 먹고 싶어 하는 것 하나 못 사주게 된 부모로서의 입장, 돈 때문에 벌어지는 가족 간 생이별, 그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을 불렀던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그런 두 분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며 느낀 소감이 그러했습니다.
“너무 가난하면 믿음 생활하는 것도 힘든 것 같아”
사람이 너무 잃을 것이 없으면 막 나가는 마음도 생깁니다. 될 대로 돼라.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만나고도 한동안 그랬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하얀 피부 때문에 약해보였나 봅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와 시비를 거는 아이들. 싸우기보다는 당해주는 쪽을 선택하던 저는, 저희 집이 그렇게 된 뒤부터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도가 지나쳐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으니까요. 싸움이 거듭될수록 더욱 거칠어지는 성품, 처음에는 싸우는 것이 힘들더니 나중에는 참는 것이 힘들어져서 나도 나를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경찰서에 간적이 있습니다. 스무 살 초반, 좌회전을 하려고 서있는데 버스운전기사가 저에게 어째서인지 욕설을 해왔습니다. 저 나름대로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버스기사는 분이 안 풀렸는지 내려서 제 머리를 툭툭 치더군요. 참지 못하고 또 경찰서에 가게 되었습니다.
꽤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코와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는 버스기사에 비해 너무도 멀쩡한 저의 상태는 한 눈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짓게 했습니다. 버스기사가 저를 구속시키라며 소리를 질러 대던 그 순간, 저는 염치없게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말없이 기도만 하고 있던 그 때, 조사를 하던 경찰관이 버스기사에게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이렇게 어린애를 교도소 보내서 인생 망치고 싶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먼저 때렸다면서요. 그럼 쌍방폭행이에요. 아저씨가 얘 구속시키라고 하면 얘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니 이 얼굴을 보시고 얘길 하세요. 어떻게 쌍방 폭행입니까.”
“보니까 이 친구도 팔이 엄청 부었구만.”
경찰관의 말을 듣고 제 팔을 보니 오른쪽 이두박근 부위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저는 통증 하나 없는 그 부위가 왜 부어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경찰관의 중재로 저는 경찰서를 나오게 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은 차마 쓸 수가 없네요.
그렇게 풀려난 뒤, 기도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십자가가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죄송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십자가를 외면하려 했지만 눈을 감으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눌러 붙은 핏자국, 저의 주먹이 버스기사를 칠 때마다 귓가에는 둔탁한 망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손발을 꽉 웅크리며 ‘잘못했습니다. 으으으,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회개는 한동안 밥맛도 잃을 만큼 혹독했습니다. 돼지저금통을 뜯은 돈을 들고 버스기사를 찾아가 최선을 다해 사과를 했고, 주님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수 없이 다짐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또 그런 시험이 찾아왔다면 아마도 저는 또 그랬을 겁니다. 분명 저는 또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고치지 못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다른 성도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 뱉는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어떤 권사님처럼, 어쩌면 저 역시도 저만의 나쁜 습관을 평생 가지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다루시는 주님의 방법은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돈다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무렵, 저는 기도하면 응답주시는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응답해 주시는, 기도와 응답의 선순환 속에서 저는 감히 예수님을 완벽히 닮아보고자 하는 소망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사내가 가만히 있는 저에게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제가 없으면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상황이라 처음으로 싸움을 피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보잘 것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이유, 제가 잘못해도 너무 심하게 벌주시지 않는 이유를... 제가 잘해서가 아니고, 세상에서 얻어터지기만 하며 살아온 저이기에 차마 불쌍해서 엄하게 대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렇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멍청하리만큼 순하던 한 소년이 그토록 강퍅하게 변해버린 사실을 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으시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저 마음 아파하시며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그를 다듬어 가셨습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있고 없고, 내가 얼마나 그분과 함께 하는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의 삶, 나의 모든 상황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당연히 죄의 유혹 앞에서도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업무적 성과와 신앙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마음껏 기도해서 주님의 능력과 임재를 느끼는 삶을 사는 것만이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고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전 정말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새벽기도 나가는 것 밖에는...”
순식간에 수강생 100명을 돌파한 노하우를 묻는 다른 학원장들의 물음에 이렇게 답변하는 강원장이었다. 주일날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고 했다. 누가 봐도 그녀는 완벽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처음 학원을 시작할 때, 엘리트 영어교사와 동업체제로 시작했다가 수강생이 많아지자 교사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수강생이 없던 시절에는 3백만원 넘는 급여를 줘야 할 교사를 한푼 안주고 쓰다가 수강생이 많아져서 3백만원 이상을 나눠줘야 할 상황이 되자 내보낸 것이다. 얼마 후에는 학원을 둘로 나누어 한 쪽을 수학학원으로 임대를 주었다가 수학학원이 잘되자 또 쫓아내고 본인이 운영을 했다.
야곱의 삼촌 같은 그녀의 악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학원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그녀의 학원은 지금도 잘되고 있고 여전히 새벽기도를 다니고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한다.
이따금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간증하고 다니던 사업가가 얼마 후 좋지 않은 이슈로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는 경우를 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망하지 않고 승승장구 중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그동안 회개 했을까? 혹시 구원 받지 않은 그냥 종교인인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어째서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질문을 나에게로 돌리자 의문이 풀린다. 사과를 훔치다 잡혀온 도둑이 바나나를 훔치다 잡혀온 도둑을 비웃으며 말했다.
“이 도둑놈아, 너는 어떻게 바나나를 훔칠 수 있니?”
강원장은 바나나 도둑인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사과, 포도, 망고 등 강원장 못지 않은 과일 도둑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도둑들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들이 나타나는가?
돈을 떠나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이 발견 된다. 예배를 드리다보면 꼴에 은혜 받았다고 눈물도 찔끔거린다. 악어의 눈물? 아니다. 나 같은 도둑놈 속에도 진짜 예수그리스도가 있다. 아, 그렇구나. 임마누엘의 약속이 있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본인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고 귀한 약속이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부러움을 넘어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도 억울해 할 것 없다. 분명 그들도 과일을 훔쳤을 것이고 그들 역시 주님을 믿으면 같은 은혜를 주실 테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전 인류의 구속사라는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원장, 그 사업가, 나, 때로는 이렇게 개인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만 이해가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철저히 내 편이시다. 이기적이어도, 다혈질이어도, 욕심 많아도... 문득 궁금해지는 사실이 있다.
“영적 성숙과 돈을 버는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가?”
결혼도 안하고 한 평생을 오빠의 선교지에 헌금을 보냈던 영애님은 충분한 저축을 하지 못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자의 몸으로 공사장에서 자재를 옮기는 일을 한다. 젊었을 때 화장품가게로 큰돈을 벌었던 그녀는 선교헌금을 평균 이상으로 드렸지만 재정상태는 오히려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평생 새벽기도를 빠진 적 없고 언제나 교회에서 봉사에 앞장섰던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선교지에 헌금을 보낸다.
고등학교 때, 방황하던 나를 주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5년 간 묵묵히 중보기도 해준 친구가 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봐온 신앙인들 중에 가장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지는 가정을 꾸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들 부부의 신앙적 면을 존경한다.
한 가지 문제를 꼽자면 빚이 1억이 넘었고 점점 늘어난다는 점. 특별히 그럴 만한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이 주신 집에서 시작했고, 유능한 남편은 한 번도 빠짐없이 중견 간부급 연봉을 가져 다 주었다. 해외여행도 간적 없고, 사치는 둘 다 원래부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사교육비 지출도 없었다.
결국 찾아낸 원인은 지나치게 자주 ‘마트에서 푸짐한 장’을 봐 온다는 것. 그녀는 그렇게 장을 봐서 본인들도 푸짐하게 먹고 전도대상자들을 초대해서 푸짐하게 먹이고 나눠준다. 그렇게 마이너스가 10년 이상 쌓이니 그런 결과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의 자녀가 푸짐하게 먹고 나눔 좀 했다고 집이 거덜 나서야 되겠는가.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그녀의 돈에 대한 이중 잣대였다. 그녀는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벌려하지만 큰돈이 들어 올만한 기회는 모두 거절한다. 충분히 할 수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돈이 안 되는 일을, 돈이 안 되는 만큼만 한다. 또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방통대에 입학을 해서 가장 집중이 필요한 시기에 집중력을 스스로 분산시키기도 했다.
그녀의 착하고 점잖은 남편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없이 한숨만 지을 뿐 그 이상의 책망은 없다. 친구와 내가 이견을 보이는 단 한 가지 영역은 경제관이다.
“돈이 있어야만 하나님일 하냐?”
나는 친구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누구보다 행복한, 돈 만 없지 모든 것을 다 갖춘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녀를 보며 나는 확신을 갖는다.
“신앙과 돈은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품은 1등급인데 재물은 최하등급인 사람이 있다. 성품 좋다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지만 언제나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돈이 들어 올만한 기회는 기가 막히게 피해가고 누군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자신만의 논리로 호의를 거절한다. 그는 칭찬과 존경 받는 삶을 살지만 늘 가난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
“난 돈에 관심 없어. 돈이 일만 악의 근원이야.”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믿고 있는 그 결정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존재에게 속아서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라면? 평생을 그 존재에게 속아서 가난하게 살아왔다면?
반대로 성품은 최하등급이지만 재물만큼은 1등급인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인간성이 좋지 않다고 혹평을 받을지라도 돈은 확실히 많이 번다.
“저 사람만큼은 꼭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인간만큼은 폭삭 망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다. 여기서 우리는 재물을 벌어들이는 능력이 다른 성품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어쨌거나 그들은 본인들의 믿음(?)대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현상은 교회 바깥도 마찬가지다. 세상 역시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책, 방송, 세상은 온통 믿음대로 되는 법칙으로 떠들썩하다.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있다.
‘가장 먼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부자에 대한 나쁜 편견을 깨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위선을 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다 착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그들은 돈이 어쩌다 가져올 불행을 과장되게 묘사하는데 익숙하다. 돈이 많으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또한 많다. 부자는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됐다고 매도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드는 순간 우리들은 그 목표에 흠집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잘못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목표가 달성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 부자아빠의 진실게임 中
“로또에 당첨 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당첨되기 이전의 경제적 상태로 되돌아갔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 모으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던 부자가 사업실패로 전 재산을 날리고 심지어 빚까지 졌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부자는 빚 청산은 물론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이 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한 사람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한두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위 두 케이스는 극과 극의 대조적인 상황이지만 본질자체는 동일하다. 지닐 자격이 없는 자는 줘도 지니지 못하고, 자격이 있는 자는 뺏겨도 다시 되찾게 된다.
재산을 잃었던 백만장자가 얼마 후 또 다시 백만장자가 되곤 하는 이유는 그가 ‘백만장자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본인의 생각은 본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면에 숨어 있는 가난뱅이 자아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들을 밀쳐내고 있다.
정황상 믿음대로 되는 그 법칙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중력처럼, 하나님을 안 믿어도 긍정적인 재물관이 있는 사람은 돈을 잘 벌고, 하나님을 잘 믿어도 재물관이 부정적인 사람은 가난해진다는 추측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못 되 보이는 집사님의 사업번창을 보며 어째서 저런 죄인에게, 나는 만져 본 적 없는 큰돈을 주시냐고 묻는다면 주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진정 나는 그 집사님보다 모든 면에서 의로운가? 가난함과 부유함, 결국 ‘의로움’의 차이가 아니라 구하지 아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주일학교 때부터 백번도 넘게 부른 찬양 하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물 ⇨ 예수님 만남 ⇨ 포도주
나 ⇨ 예수님 만남 ⇨ 변화 된 나
예수님은 정수기 필터처럼 구정물과 같은 영혼을 맑은 생수로 변화 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만능 수리공처럼 못 쓰게 된 영혼도 가지고 오면 쓸 만한 것 이상으로 고쳐 주신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이 물이나 물건이라면 그래도 최대한 좋은 것으로 골라서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습 그대로 들고 갈 수 밖에 없다.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 예수님 만남 ⇨ 바울의 선교를 돕던 브리스가처럼 살게 해주세요.
구정물, 고물 같은 기도가 예수님의 필터링을 거쳐 거룩한 기도가 된다. 많이 가져 오면 많이 변화시켜 주시고, 계속 가져오면 계속 변화시켜 주신다. 인간적인 기도 역시 주님의 필터링을 거쳐 영적인 기도로 변화 된다.
예수님 = 말씀
성 화 =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나의 일부가 되어 가는 과정
읽은 말씀이 녹아들어 나의 일부가 되도록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이다. 성화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하다고 많은 경험자들이 간증하고 있다.
“말씀을 충분히 읽고 기도해야해. 땔감이 있어야 불이 활활 타지.”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씀이다. 말씀을 읽지 않고 기도만 하면 태울 수 있는 거룩한 땔감이 없어서 다분히 인간적인 기도만 하게 된다. 말씀을 읽다가 깨달음에 한계가 올 때마다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리면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 할머니의 평소 지론이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야 말씀을 깨달을까, 아니면 말씀을 깨달아야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도해야 말씀을 깨닫게 될까. 말씀을 깨달아야 기도하게 될까?
조직신학에 심취하다 보면 간과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조차 완벽하게 알 수 없듯 하나님의 섭리, 각각의 개인에게 다가오시는 방법, 순서를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없다.
‘하나님 뜻이 아닌가 봐’
우리는 조금 기도하다가 결과가 없으면 기도를 내려놓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조금 더 기도해서 그것을 가져가길 원하시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기도하고 응답 받아가며 점점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그토록 기도를 하라고 하실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은 끝나는 것 아닌가.
첫째, 성화에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품까지 주님을 닮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주님을 만난 그 기쁨 또한 결국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 때부터 성도는 옛사람의 본성에 남아있던 죄의 유혹에 반응한다.
술 마셨던 사람은 다시 술이 당기고 성격이 괴팍했던 사람은 다시 혈기가 끓어오른다. 이기적인 사람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 역시 그런 자신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인가. 자신의 못 된 성품은 고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못 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한 변화의 증거가 아닌가. 정죄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자꾸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만 서면 자신의 죄와 허물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죄와 허물이 십자가 공로보다 클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시인하는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서 평안의 밸런스를 조정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영적추락은 바닥을 다졌다. 더 이상의 마이너스는 없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성화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장은 언제나 ‘참 잘했어요.’ 이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는다.
보나마나 또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벌점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벌점을 지불하셨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기도해야만 가능한 변화이다.
둘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설마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길 바란다. (물론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한 것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도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째서 그런 이들이 생겨나고 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말씀이다. 말씀을 읽은 만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풍성해진다. 그 지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일이고 성령님은 기도를 통해 움직이신다.
말씀과 깨달음 사이에 기도라는 매개체가 있다.
그러나 구원 받지 않은 이들은 '구원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그렇게 기도하게 만들까?
우선, 그가 관심 있고 간절하게 느끼는 기도제목에 공감하는 것이다. 가르치려 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문제일 수도 있고 비전일 수도 있다.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체험이 아예 없는 신앙은 무결합니까? 이 세상에 모든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모두 위험한 성도들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성도에게는 체험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면요?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와 응답 속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이 눈뜨곤 한다.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주님,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 에너지로 주님을 알기 위해 더욱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다 마침내 주님을 알게 되면 나오는 아름다운 찬양고백.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을 6년제 초등학교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1년 지나면 무조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는 학교가 아니라 기준을 통과해야만 진학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1학년 동급생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따금 5~6학년 믿음의 선배님들이 자신의 믿음 노하우를 간증할 때가 있다.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당연히 물질 축복을 받은 이들도 있다.
고학년들은 모두 연단을 거친 이들이다. 어려움 가운데서 아무리 기도해도 형통은커녕 하나님께서 상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믿음의 연단 말이다. 그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한 선배가 입을 떼기 시작한다.
“여러분, 기도하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결국은 형통케 해주십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1학년 동급생들이 일어나 그 선배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형통하려고 예수님 믿나욧!”
“하나님 믿는다고 전부 다 잘되고, 부자 됩니까?”
“아니 그럼, 가난한 사람은 전부 믿음이 없다는 겁니까?”
불량하기로 소문난 일진 복학생들이다. 지난 번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자기 발로 학교를 나왔다고 들었는데 1학년만 30년째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꼭 사람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누군가를 지적하며 자기를 나타내려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우리 학교 학생이 맞나 의심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 때문에 학교 결석하는 애들까지 생겨서 담임선생님이 금식기도까지 했다고 들었다.
“친구야, 너는 축복 얘기만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부터 나니? 그럼 하나님의 컬렉션에는 돈 없는 사람만 있어야 된다는 거야? 네 마음속 깊은 곳을 한번 들여다 봐봐. 너에게 그런 마음을 주는 존재가 과연 하나님의 영이 맞는지."
"너는 지금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못살고 다 가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아.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닌 능력에 있다던데... 그 능력은 사랑과 화평케 하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이 된다는데... 그렇게 말할 때 너의 말투, 표정을 보렴. 그리고 너 때문에 불편해하는 주변 친구들을 한 번 둘러봐. 안타깝지만 누구도 너에게서 사랑, 화평, 온유 같은 성령의 열매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때 하늘에서 직접 현물로 내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먼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삶에 응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임하는 건강한 루트는 말씀입니다.
[이상적인 신앙성장 로드맵]
말씀을 듣는 중에 믿음이 임한다. → 그 믿음을 붙들고 인내한다. → 삶에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려 할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말씀부터 듣게 하십니다. 자꾸 내 귀에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들려온다면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가 들려오고 선교에 대한 메시지가 들려온다면 그것에 대한 결단을 원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축복 받았다는 메시지가 자꾸 나에게 들려온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으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장을 열어보지도 않고 찢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 ‘예수 믿으면 삶이 윤택해지고, 예수 믿으면 자신의 삶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는 메시지가 들려 올 때마다 모조리 차단을 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가난도 훈련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을 조장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중에 ‘축복’이라는 단어만 들리면 거부반응이 들면서 귀가 닫히는 이유는 뭘까요?
아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이 안 되서 그런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닫는 역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오케스트라에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연주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연주합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한 사람은 어떨까요. 그 또한 자신이 만난 주님을 연주할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이라는 테마로 밤마다 열리는 이 작은 음악회로 우리를 초대하고 또 듣게 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결과를 통해서 상대방의 감춰진 의도가 확인 될 때가 있다.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조언인 줄 믿고 따랐는데 결과적으로 상황만 더 악화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 땐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나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상대방의 권모술수였던 것이다.
반란을 꿈꾸던 환관이 왕의 근위병들을 따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 중에 왕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있다는 정보가 있소. 그대들은 지금 당장 칼을 내려놓으시오.”
“그럴 수 없소. 우리는 이 칼로 왕을 지켜야 하오.”
“아직도 모르겠소. 왕의 명령이란 말이오. 왕은 그대들 중 누군가가 칼로 자신을 암살할까봐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오. 어서 칼을 내려놓으시오.”
그럴 듯한 명분에 근위병들은 하나 둘씩 지니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결국 그들은 왕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오”
“인생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업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줄 아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려 했지만 어쩐지 예전처럼 기도가 잘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몹시 죄송하고 못 마땅했다. 이제 막, 새롭게 기도의 용사로 태어나려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둘 기도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문제를 위해서 기도 하던 때에는 기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일에 해당하는 기도도 함께 드리곤 했었는데... 꿈과 직업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어느새 영혼 구원을 위해서도 펑펑 눈물까지 쏟으며 기도하곤 했었는데...’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릎을 꿇어도 예전 같은 기도의 간절함이 없다. 기도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눈이 떠진다. 심지어 이제는 삶의 문제들이 터져도 그것들을 위해서조차 예전처럼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욥의 세 친구들의 조언은 옳은 말이었지만 욥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욥을 위로하려고 온 그들은 욥을 더욱 낙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던 욥을 자극까지 하고 말았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맞는 말도 상대에 따라 틀린 말이 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정죄와 비판들이 교인들을 내쫓고 있다. 많은 새 신자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계하듯 가르치려드는 그 집사님, 권사님이 보기 싫어서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가장 큰 누가 되는 행동을 했다. 상황과 결과로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모르게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오”
지극히 성경적이고 흠 잡을 것 없는 이 말로 인해 기도의 열정이 식어 버렸다는 성도들의 탄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상황과 결과로 볼 때 그런 말들이 좋은 영향력만을 끼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도는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삶의 문제 해결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 또한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유지 되어야 할 이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다.
성경은 밸런스의 책이다. 가장 중요한 구원 역시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구절과 ‘믿어서만 될 일이 아니라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상반 된 구절이 한권의 책 속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이 두 가지 유형의 말씀이 지닌 본질적 의미는 놀랍게도 동일하다.
두 말씀의 의미를 균형 있게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쪽을 아예 버리고 다른 한쪽만을 붙잡게 되면? 위험하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간섭과 비판으로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지게 된 기도. 어긋난 기도의 밸런스를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선배,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며 기도하지 않았다.
생활의 달인, 서민 갑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이 되는데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하면 충분할 법도 한데 그들은 계속해서 더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합니다. 그런 열정이 그들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지요. 그들은 어떻게 그런 열정을 갖게 된 걸까요?
여기 칼국수 집 오픈을 앞두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서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각의 재료들을 첨가해보고 빼도 보고, 늘려도 보고 줄여도 보며 맛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맛의 절대 값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 버려지는 재료의 손실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최고의 칼국수 맛 집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과정들을 감당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최고의 칼국수를 만들 것이고 그 칼국수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올 것이 분명하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칼국수 비법을 완성시켜야겠다는 욕심에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습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가족들이 ‘좀 쉬엄쉬엄하지 그래요.’ 걱정 할 정도로 그의 업무에 대한 열정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열정은 강요에 의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넌 왜 그렇게 열정이 없어?’
확신이 없으니까요. 열정은 믿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밤과 낮으로 각각의 재료를 아주 조금씩 줄여 보기도하고 늘려보기도 하고 점점 더 최상의 맛을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어떻게 맛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만든 정말 맛있는 음식을 파는 집이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근무시간에 하루 종일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합니다. ‘TV 그만보고 일 좀 하라’고 하면 마지못해서 하는 척 하지만 이미 능동성은 없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의 일인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나태함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은 하지만,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판국에 그 이상의 투자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우리가 기도의 열정이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에 확신이 있는 성도는 ‘기도한다고 무조건 응답 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보다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붙잡습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선택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빌립보서의 말씀은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찾아오는 담대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의 범위는 말 그대로 전도, 인간관계, 비즈니스를 포함하는 우리가 도전하려는 모든 것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스스로를 1%도 신뢰 할 수 없어 열정이 나오지 않던 사람일지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내가 아닌 그분을 신뢰하는 그 믿음 때문에 도전할 수 있고, 그 크기만큼 삶의 진보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가장 간결한 믿음의 메커니즘이라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하면 줄 부모가 있는가’라는 예화는 설교에 자주 인용된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재물관리능력이 없는 자녀에게 필요 이상의 부와 명예를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재물관리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 생기면 허랑방탕한 삶을 살 기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됨됨이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차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성화(聖化)라 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사람의 결심과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와 기도는 뗄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된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영과 육을 모두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편안하고 행복하게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죄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사망과 고난, 저주 아래에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주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처음 너희에게 베풀었던 축복을 회복시켜 주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땅으로 내려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본인이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인간들이 완수해야 할 모든 과업을 대신 처리해 주신 것이다.
그 후로부터 누구든 차별 없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그것이 실상이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의(義)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 증표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었는데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머물러 계시면서 인간들이 다시금 저주받을 행동을 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축복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신다.
이것은 더 이상 사탄이 자녀들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곁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굳건한 의지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지만 성령 또한 육체의 일을 거스르므로 성도들 개개인의 영적 성장에 맞춰 축복을 받게 되는 놀라운 밸런스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 갈 수 있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 더 정확히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가시가 박힌 발로는 힘껏 뜀을 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지속적인 찔림이 오기 때문인데, 그 찔림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성령님의 촉구이다.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완벽한 이끌림을 받는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한다. 성령 충만이 필요한 이유는 본질상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겐 세상이 주는 부와 권력을 선한 곳에만 사용하는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놓으셨다. 세상 사람들은 이 특별한 힘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자신의 꿈과 목표도 이루며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만 생각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욕망의 실현이 가져올 부작용까지 미리 알고 계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식 공간을 성령님께 내어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설계하신 분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만드는 성화의 도구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시는 모든 축복을 담기에 부족함 없는 그릇’으로 만들어가는 단련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우리가 재물을 위해 기도하면 단순히 재물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유지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성품도 함께 얻게 된다.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처음부터 무조건 다 주시지 않고 적절히 절제하시면서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기도로 사람을 연단(鍊鍛) 시키시는 목적은 첫째, 성도 본인을 받은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모든 훈련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훈련과정 또한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만큼 더 많은 기도 시간이 요구된다.
둘째, 기도로서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함이다. 훈련된 성도는 나중에 더 큰 인생의 문제가 닥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자녀는 마침내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기복 신앙으로 빠지는 것을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봉사, 헌금, 다양한 신앙적 열심.
이만하면 꽤 노력했다고 생각 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보상도 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참 많이 잘못했을 때 아무런 벌도 주지 않고 기다려 주시던 순간을 기억해 봅니다.
인과응보 (因果應報)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던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법’으로 옮겨진 우리입니다.
은혜 :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주어지는 선물.
하나님께서 적격자였던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어가신 이유는 야곱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임을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됐든, 하나님의 치유가 됐든,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시며 천국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