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보편성에 기대어 신앙생활을 하면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크기의 응답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다운 복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통로로 올 때가 많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도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예레미아 33장 3절)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로 하나님께서 주실 복의 한계를 결정짓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것이 부족해서, 저것이 부족해서... ’
저 역시 현재 상황과 재능을 근거로 상대방의 가능성을 유추해 보긴 하지만, 사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실 땐 우리가 가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믿는 자들은 기드온의 군사 선발 과정에서처럼 돌려 보내지거나 오히려 낮춰지는 연단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문제를 바라볼 때 성도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한계의 사슬이 끊어져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어쩌면 처음 이 선포는 그저 믿어 보려 애를 쓰는 성도의 몸부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수십, 수백 번 선포해 나가다 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곧 이어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턴 더 이상 그 고백이 억지 선포가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생생한 자기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시작할 때부터 ‘응답 못 받을 것을 준비하며 드리는 태도’를 권하는 메시지보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리 아니하셨어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면 마침내 더 큰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 그리고 무응답처럼 보이는 이 시련의 조각 들이 모두 합쳐져서 종국에는 더 큰 선한 역사를 이루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세요.
우리의 삶은 믿음대로 움직이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무수히 성경을 읽고 읽은 말씀을 실천하려 기도로 몸부림 친다해도 도저히 화가 나서 용납할 수 없는 시간들을 마주하게 될 터인데, 십자가를 붙잡고 한번 두 번 승리의 기록이 쌓이면 얼마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고 작은 상급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맛에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쓰다 보면 어린 양들을 양육하라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당신의 시간과 열정에 비해 실망스런 결과를 보일 것이고, 또 일부는 당신을 찌르며 아프고 노엽게 할 것입니다. 그런 자극에 당신 또한 한두 번쯤은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의 수조차 주님의 십자가 승리 아래 있음을 그대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함부로 구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전하는 메시지에 처음 얼마간은 순종하는 듯 하다가 불순종을 밥먹듯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교묘하게 당신을 험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2~3년, 아니면 한 번더 2~3 년의 세월을 보내면, 당신은 원수를 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임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당신은 본인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주신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서 그와 교제하며 그의 말투와 성격, 사람들을 대하는 매너, 말씀 실천 여부 등등을 종합해보면 미래의 그림자가 보일 것입니다.
'아, 저 분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구나. 함께 해야 겠다. 저 분은 거룩한 척으로 위장했지만 행동은 사탄의 열매만 맺히니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저 분은 봉사와 기도는 하지만 물질적으로는 끝까지 어렵겠구나.'
그러나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기 전에, 먼저 본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확신 있게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 차례 응답을 체험하게 되면 긴가민가하는 마음들이 싹 사라집니다. 먼저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 된 것들이 열려 보이고 나중에는 그에게 올 질병이나 인간관계, 예를 들어 자녀의 미래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여지는 미래의 그림자들을 선포해 두면 세월이 흐른 후 사람들이 당신에게 찾아와서 예견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분, 정말 그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아신 거죠?”
“나 정말 그렇게 되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주 예수를 제대로 믿으라 그래야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는데 기도는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하며, 말씀이라 함은 읽는 것 뿐 아니라 실천까지 포함 된다’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발언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예언의 은사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이치를 통달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그것을 따르거나 거스를 때 따라오는 결괏값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정확히 알면 적게는 한 사람의 미래, 크게는 세계사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의 삶에 대입해서 실제 데이터가 쌓이면 타인의 삶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타인의 것까지 더해져 영적인 빅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은 인공지능이 범접할 수 없는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까지 겸비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화가 나면 일단 화를 내고 나중에 사과를 하면 했지 그 상황에서 즉시 자신의 분노를 내려놓는 경우를 본 기억이 희소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차례로 경험하고도 모자라 끝내 홍해까지 달려가 죽음을 자처한 바로처럼 잘못된 행실을 굽히지 않습니다. '즉시 회개' 그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정말 어려운 미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면 즉시 내려놓을 수 있는 태도, 그것이 복 있는 자의 DNA입니다.
복 있는 자들은 극하게 과열된 상황 앞에서도 성령님의 싸인이 떨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사과도 가능합니다. 분노와 자존심을 내려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복보다 가치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복의 가치를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내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자신이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래도록 봉사하면서도 자기 고집과 성질 하나 꺾지 못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는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사모하는 자라면 말씀 앞에서 '순종'이라 불리는 영적 유연성을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성품이 악해서 못 받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본인이 악하다는 사실조차 몰라서 못 받고, 어떤 이는 성품은 너무 좋은데 '문제 해결과 복을 구하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라' 믿고 있어서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펼쳐도 '하나님께 복을 구하면 안된다. 그 복은 영혼 구원에만 국한 된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주신다는 구절만 있을 뿐, '복을 구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을 제한하시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받을 복의 크기를 제한합니다.
올라타고 내리지 아니하면 그는 종착역인 천국, 천국 역에 도착하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열차가 아니므로 기회가 왔을 때 즉시 올라타야 한다. 1년에 한 번씩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3년에 한 번 또는 5년, 10년에 한 번 꼴로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따금 한 번씩, 하나님의 축복 열차로 갈아탈 수 있는 환승 게이트가 열린다. 축복 열차에 올라타게 되면 영혼은 물론 범사가 잘되고 정서적으로도 강건해지게 된다.(요한삼서 1장2절) 그러나 이런 정보는 천국의 창고를 여는 열쇠가 필요하여 누구에게나 열리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들에게만 들리도록 암호화되어있다. 구원은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물질 축복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늘 화가 나 있다. 그것은 흡사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가인의 모습과도 같다. 실제로 그들 중 상당수가 축복의 하나님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하며 공격한다.
“그럼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 제대로 안 믿는 사람들이란 건가요!”
축복 열차 또한 올라타고 내리지 아니하면 점점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풍요로움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순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차에 올라탈 기회가 날마다 주어지지는 않는다. 인생에 한 번씩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메신저들을 보내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문제에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십니다. 복에 복을 더하길 원하십니다.”
그 타이밍을 잡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체로 사람을 통해서 오게 되는데 사람의 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정보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로마서 10장 17절
먼저,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여는 방법을 아는 이를 만나야 하고, 그가 나로 하여금 그 복을 사모하여 전심으로 부르짖도록 만들 만큼의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날 것이며, 만났다 해도 그가 나에게 그만큼 집중해 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질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실제로 올라본 사람의 가이드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가이드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열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동기까지 부여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그런 메신저를 발견했다면 혈루병 여인처럼 본인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씀의 옷깃을 붙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따금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가이드들이 직접 구원 열차에 탑승하여, 대상자들에게 환승 게이트로 갈아 탈것을 제안하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구원을 전하게 하시듯, 신유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는 신유의 하나님을 전하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에서 나음을 입은 자들에게는 평안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게 하시며 물질 축복 받은 자들 역시 물질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게 하신다.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을 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사람 만큼 구체적일 수는 없다.
“이번 정차역은 축복 열차로 갈아타실 수 있는 순종, 순종 역입니다.”
누군가는 이 음성을 듣고 비판 섞인 시선을 보내며 더러는 무관심한 표정을 보인다. 만일 이 같은 축복 메시지를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기도의 집중을 방해하는 다른 메시지들로부터 귀를 막고 즉시 환승 게이트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 줄 아세요!”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메세지는 그에게 필요해서, 그에게 주신 메세지일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만 솔직히 내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을 것 같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열심히 ‘아멘’으로 화답해 보지만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 나의 직장, 나의 가족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리라 100% 확신하느냐고 묻는다면? 100%는 아닌 것 같은 심정도 우리에게는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도 들고, 직장 걱정도 하고, 가족 걱정도 하고, 노후 걱정도 한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정보이다.
믿음은 들음 즉, 정보를 통해 유발된다.
정보 A : “기도는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정보 B : “기도하면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
교회 안에는 위 두 가지 메시지가 마치 대립하듯 전파되고 있다. 이따금 토론도 펼쳐지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기도를 통해 ‘개인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끊임없이 증거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도는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메시지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누구도 그의 선택을 만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한 것이 아님에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야고보서 4장 2절)
이따금 필자의 책 ‘그 힘 사용설명서’를 읽은 독자들로부터 소감 글을 받곤 한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은 후 더 뜨겁게 기도하게 되었고 삶의 변화도 나타났다’
그동안 정보 A에 노출되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던 이들이 정보 B를 얻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기독교 부흥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성장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물론 기복 신앙 양산이라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러나 부작용만 있었던가? 그저 복이나 받으러 교회에 나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정녕 없었는가?
교회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개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아니지만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 B가 완벽히 차단된 상태에서 정보 A에만 노출된 성도들은 차츰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정보 A가 신학적 진화를 거치면 ‘고통도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핍박받았다. 감사하며 달게 받아라.’ 즉,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기도조차 해보지 않고 받아들이라는 적용이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이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성경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기에 많은 성도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성경에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성경을 고루 읽은 성도들은 신앙이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밸런스 붕괴를 막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도 ‘믿음으로만 받는다’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 그럴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은 줄 알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구절을 오해하여 마음껏 죄를 짓는 상황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겠는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할 때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것은 내 주장에 성경 구절을 맞추는 태도가 아니라 성경 말씀에 내 생각을 맞추는 것이다.
가장 성경적인 것은 성경처럼 양쪽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양쪽 메시지를 다 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당신이 정보 A에 눌려 있었다면 이제부터 당신이 들어야 할 정보는 B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보호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것, 그 두 번째는 이성과 양심의 작용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위기의 순간에 가장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더 악화될 것을 우려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런 심리적 공황 상태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곤 한다. 그러므로 위기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평안’한 마음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외람된 가정이지만 만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던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무도 없는 감옥 속에서 그처럼 마음의 ‘평안’을 지키며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문제를 극복하려 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인내’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평안’의 믿음은 우리에게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받는다.
양심은 주관적이기에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떤 이는 가족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영향을 받는다. 다른 어떤 이는 길거리에 껌 종이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다. 경중을 떠나 이들이 느낀 죄책감은 스스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느낀 감정이고, 그 감정의 무게만큼 기도도 영향을 받게 된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도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증상은 성령 받은 성도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질수록 양심의 기준은 더욱 엄격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과응보 (因果應報) : 원인에는 결과가 따른다. 즉, 죄에는 벌이 따른다.
우리는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법’으로 옮겨졌다.
은혜 :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주어지는 선물.
성경에는,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다 마침내 복을 받는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원했던 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다가갔던 이들 중 상당수는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변화되지 않았잖소.”
“가룟 유다를 선택할지 베드로를 선택할지, 사도바울을 선택할지 브리스가를 선택할지, 정보 A를 선택할지 정보 B를 선택할지 그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당신의 구원이 그러했던 것처럼...”
필자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이 축복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고난 속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듯했다. 나는 성도들이 축복의 주님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보 B를 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정보 A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A 정보원들의 전갈을 받고 있다.
아직 믿음이 어린 성도는 하나님께 원하는 바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누군가는 고난 속에서 구원의 주님을 만나서 성화를 이루어가고, 다른 누군가는 평안 가운데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 사람마다 역사하시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구원과 축복. 하나님께는 각 개인에게 맞는 맞춤 플랜이 있다.
사탄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사탄은 각각 개인이 지닌 다양성을 수렴하여 그들에게 어울리는 최적화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려 든다. 사람마다 사탄이 역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사망과 멸망. 사탄에게도 각 개인에게 맞는 맞춤 플랜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성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신다. 물질을 주시는 것이 성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주신다. 그러나 오히려 물질을 주는 것이 독이 된다면 주시지 않는다. 도저히 좋은 말로해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난도 허락하신다.
형통함과 고난,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이 두 가지 도구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의 값은 놀랍게도 동일하다. 주님의 섭리가운데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정한 복을 받고 싶다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 순종하면 그 순종의 퍼즐로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사탄의 개입 또한 다르지 않다. 형통함과 고난,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이 두 가지 도구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 값은 놀랍게도 동일하다. 사탄의 역사가운데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멸망을 완성시킨다.
사탄은, 우선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고, 이미 구원 받은 이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만든다. 구원이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내안에 들어오시는 사건을 말한다. 즉 구원이란 모든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복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은 능력이 내안에 임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면, 정말 주님을 영접한 것이 맞다면 당사자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잘되게 된다.
물론 잘된다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 될 수 있다. 복음전파가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사도바울에게는 조난과 수감생활조차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삶을 고난으로 얼룩졌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24절)
분명한 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는 것은 결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균등한 선물이 아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삶의 무게에 눌려 힘겨워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 또한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이 믿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믿음을 붙든 성도는 찬송하게 된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라.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내가 일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책임져 주실 주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은 오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고 최선을 다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사탄의 간섭 아래 있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행동양식을 취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는 확신이 없으니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왜? 어차피 열심히 일해도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증거는 확신과 평안, 사탄의 영에 눌려 있다는 증거는 매사에 불확신과 초조함이다.
사탄의 수법을 요약해 보려한다. 사실 우리는 사탄의 수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당하는 이유는 매번 새로운 응용버전을 가지고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이미 경험해 본적이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 다른 사건, 다른 환경이라 번번이 넘어지지만 알고 보면 본질은 언제나 똑같은 문제였다. 사탄의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같은 문제를 들고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라고 보내주신 좋은 인연을 모조리 쫓아내게 만든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모든 만남을 분리시키려 든다. 때때로 상대방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도록 만들어 서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서로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매뉴얼 중 하나이다.
둘째,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사탄은 성도들이 문제해결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람이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결국은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그의 안에 계신 복의 근원 때문에 반드시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 게임, 당구, 골프, TV시청 등등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하지만 내가 그것에게 시간을 할애한 만큼 그것들에게 내가 선택 당하게 된다. 정도가 심해지면 그것들이 나를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쯤 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의 종이 되어 그것들이 우리를 부를 때마다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종인가. 나는 누구에게 나를 드리고 있는가.”
불의의 병기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드려야 한다. 즉,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 당구장에, 골프장에, 컬렉션에 하듯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드린 만큼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된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할수록 순종이 수월해지는 선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반사적으로 그에게 세속적이라는 비난의 마음을 갖고 심지어 직접 면전에서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자 되면 타락한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라.”
틀린 말이 아니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사람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기도는 방향을 잃곤 합니다.
"그래서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분명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중요한 사실은 처음에는 사업 때문에, 취직 때문에 교회를 나와서 기도하던 분들도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속에서 돈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변화를 만든 것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으로 예배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혼을 다해 기도할 만큼의 간절한 마음은 타인의 강요나 가르침에 의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진심으로 원하는 소망 또는 아픔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게 될 때 우리의 간절함은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과 성화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은 주님을 만난 사람, 그리고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의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연결 되어 있으려면 여호와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단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제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드리는 대상과 신에게 연결하는 중보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다른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기도는 틀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빨리 걸을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길에 서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워 올수록 그들은 처음보다는 한결 예수님을 닮아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제단에 불을 지피는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거짓 거룩으로 무장한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음성을 차단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은 발전을 합니다. 21세기 신학도 그렇게 발전을 해왔습니다. 1960년, 70년,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학적 지식수준은 상당해 보입니다. 이렇게 지적인 수준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데 영적인 수준은 어떨까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기도를 통해 '들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아졌는데 알고 있는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상. 많은 목회자분들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시간이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현재 성도들의 영적인 퇴보와 기도시간이 줄어든 것이 과연 무관한 일일까요?
걷지도 못하는데 뛰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초심자가 첫째 주부터 ‘저 죽어가는 열방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기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분히 인간적인 기대감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가 주님을 만나면 비로소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담배 끊고, 술 끊고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나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배에 나오면, 주님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해결 될 일이라고...
타인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비난과 간섭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삭개오를 대하던 예수님의 방식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너와 함께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었든 일단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아프면 부모님께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부모님께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아직 어린아이인데 말은 마치 장성한 분량에 이른척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분들 중에는 아예 기도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은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아직은 자신의 현실의 문제가 눈에 보이는데 자꾸만 그것을 정죄하니까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되는 상황. 영성은 기도할 때 깊어지는 것인데 기도하지 않는 이에게 어떻게 영적인 성장의 계기가 마련이 되겠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장소로 사람들을 향하게 하는 것은 누군가의 근엄한 비평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제목에 걸맞은 그릇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표현했다. 과연 기도 안하는 것이 죄일까? 죄라면 어째서 죄일까?
사실 기도의 부재자체가 직접적인 죄일 리는 없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됨은 물론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구원의 3단계]
1. 구원에 대한 정보 :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 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말씀을 듣지 않고 생활의 지혜 같은 교양강좌 설교만 들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구원 받으려면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보혈에 집중해야만 한다.
2. 믿기로 선택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듣자마자 1초 만에 믿음이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님을 믿기로 선택했다 해도 지금 당장 믿음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올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당사자가 믿기로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가이드, 주님께서 당사자의 마음속으로 입장하시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장 20절)
3. 믿음이 온다 :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믿음의 강도를 100%로 가정해 보자.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면서 단번에 100%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 10% 미만의 믿음만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예 1%도 믿지 않으면서 분위기 때문에 앵무새처럼 영접기도문을 따라서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기로 선택하면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들어오신 후, 주님께서는 당사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신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해놓고도 계속 불확신과 싸우는 교인들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 어쩌면 그런 이들에게는 ‘믿음이 생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번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찾아와서 ‘나는 구글의 경영진입니다.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습니다.’라고 제안한다 해도 당신은 곧 바로 그 자리에서 믿습니다하고 그를 따라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가 진짜 구글의 경영진인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조사를 통해 그가 정말 구글의 경영진인지를 확인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번엔 선뜻 그를 따라 나설 수 있을까. 분명 또 다른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할 것이다.
‘구글 경영진이 나를 왜? 뭔가 함정이 숨어 있을 거야.’
하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당신과 만나 식사도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시간을 함께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로소 당신은 그를 믿고 따라나서게 될 것이다.
믿음이 생기는 필요충분조건 = 시간 + 횟수
영적 존재인 인간은 이미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느끼려하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느끼려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너무도 생생하게...
그래서일까? 세계 모든 문화권에는 죄와 죄 값을 사함 받으려는 속죄 제사, 즉 일종의 예배가 있다. 그들은 짐승의 피, 또는 인간의 피를 흘린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피로는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고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 없이 많은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이 사실은 두려워 떨고 있다. 명상을 하면 할수록, 수행과 고행을 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며 지옥은 느껴지는데 막상 지옥을 벗어날 방법을 모르겠는 것이다. 그 때 거짓말 같이 구글의 CEO, 아니 이 세상의 최고경영자이신 주님께서 함께 천국가자고 손을 내미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라.”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간다는 말, 너무 고맙지만 너무 엄청나서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주님과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선교지도 따라다니며 동행하다보면 믿음이 생긴다. 함께한 시간 + 횟수가 증가할수록 믿음이 굳건해진다. 처음엔 나의 주인으로, 어떨 땐 친구로, 부모님으로, 마침내 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을까. 예배, 그리고 기도.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서 주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조사해보면 조사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믿게 된다.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 당신은 커피숍에서 어떤 커피를 고르는가. 커피 입문단계라면 아메리카노 보다는 라떼 종류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심지어 커피가 아니라 주스를 선택한다 해도 당신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커피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주님의 커피숍에서 커피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 이를테면 질병의 치유, 시험합격, 취업, 사업성공 같은 것을 구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커피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젠가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어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당사자의 선택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믿었더니 상당부분 믿음대로 되었다.
부모님의 사업부도로 무너져버린 집안형편을 다시 되돌려 달라는, 철저히 기복주의적인 기도로 시작되었던 고등학생의 신앙생활. 그런 그가 예수님이 너무 좋다며 신학대학을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필리핀과 미얀마, 한국의 미자립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지출하게 될 줄을, 지금 이렇게 기도에 대한 칼럼을 쓰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었을까.
주님을 영접하기 전, 주님께서 우리 가족의 아픔과 필요를 모른척하며 선교만을 강요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다면 나 역시 주님을 모른 척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해도 주님을 떠나진 못할 것이다. 아프다고 울기야 하겠지만,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고 주님을 원망하며 감히 화도 낼 수 있겠지만 주님을 떠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주님 뜻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당사자의 선택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언젠가부터 영적인 체험을 구하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교회 내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뭐든 적당한 것이 좋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들은 말한다.
“적당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미쳐야 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 하나님의 일에 사람들의 생각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얼마 안 가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현대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마음껏 복을 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마음껏 영적인 체험을 간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준 미달의 저속한 기복주의 신앙인들과 무당의 주술에 가까운 예언 기도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체험도 마음껏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바 구하지 않는 것은 받을 수 없다.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배척하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에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도 남용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부작용이 그것들이 가진 주요 기능은 아니지 않은가. 그 모든 것들은 본래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과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의 부작용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라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증상은 맞는 걸까.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에 참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과연 부작용이 있을까.
타 종교에서도 기도라는 행위가 있고 그들 또한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한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기도로 영의 문을 열면 그 통로를 통해 본인이 기도했던 대상이 찾아와서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적인 체험들은 결말이 좋지 않다. 그 모든 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행해지는 일이기에 축복인 듯 보여도 결말은 어떤 식으로든 새드 엔딩을 보게 되어 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고난들이 결과적으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는 해피엔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런 반복 속에서 성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로마서 5장의 고백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삶이 허락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셨고, 덕분에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맞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을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복을 받게 된다.
오히려 영의 세계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재단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좋으신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가 독이 되어 우리에게 피드백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은, 믿은 만큼 당사자의 삶에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기복 신앙과 신비주의는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려하여 충분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올바른 신앙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 무조건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뭐가 그리 복잡하오. 기복 신앙? 신비주의? 난 그런 건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주님께 기도하면 좋다는 것이오”
주님을 추구하는 삶에 적당히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복을 구하고, 적당한 체험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늘 그렇듯 사탄은 성도들의 호흡과 같은 기도를 일단 어떻게든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비주의라서 안 되고, 기복 신앙이라 안 되고, 바빠서 안 되고, 아파서 안 되고,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심지어 교회 봉사하느라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기도 없는 사역이, 봉사가, 목회가 과연 주님의 일일까?
“아무거나 하나 걸려라”
사탄이 뿌려 놓은 다양한 지뢰에 얻어걸리면... 기도할 수 없게 된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실감하지 않을 만큼만 하게 된다.
사탄의 지뢰가 이토록 다양한 반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분석하고, 구분하고, 재단하려 할 때 우리는 완벽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수준 높은(?) 기독교인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사탄의 고급 지뢰에 발목을 잃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모든 성도는 신비주의자여야 할지 모른다. 피조물인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만큼 신비한 분이 또 어디 있을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신비로움으로 가득 찰 때 우리의 신앙은 힘을 얻게 된다.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을 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기한 사탄의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문제 아닌가. 망조가 단단히 든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 때문에 이토록 좋으신, 신비한 하나님을 터부시하고 배척해도 괜찮은 것일까.
신학에서 말하는 특별 계시는 성경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성경 말씀이 일반 계시가 되고, 성경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나타나는 개인적인 응답이 특별계시가 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일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즉, 레마일 수도 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주님의 특별계시를 받게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신비한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의 음성을 따라 힘든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소원의 항구에 도착해 있게 된다. 그러나 개인에게 주시는 레마를 들을 수 없어도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되 개인에게 주시는 각각의 레마보다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것에도 충분한 권세가 있다.
마음껏 기도하고 싶고 마음껏 복을 구하고 싶다면, 그래서 신비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성도가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벌이는 모든 에피소드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그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라면 기복 신앙, 신비주의 등등 누군가가 멋대로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 자유하자.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실로 다양하다. 그래서 성도마다 주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전부 다르다.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방식 또한 그러하다. 구원을 주시는 방법,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어 가시는 방법 모두 개인마다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과정 즉, 구원과 성화라는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가 기도이다. 사람마다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방식과 성화를 이루어가는 훈련 과정이 다른 만큼 기도 제목 또한 같을 수 없다. 즉, 같은 상황에 처해도 사람마다 기도 제목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성도가 다른 성도에게 ‘당신의 기도는 틀렸다고,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다른 존재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셈이 된다.
최근 기독교인들은 기도 시간이 갈수록 줄고 있음을 공감하며 이것을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 시간을 줄어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기도를 지나치게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든 까닭도 있다. 언젠가부터 교회 내에서 타인의 기도를 비난하는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을 위해서만 기도해라.”
그러나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기도를 따로 구분 짓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간구는 기도였고 그때의 기도들이 한데 모여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있게 했다. 그 기도 속에는 영적인 추구도 있었지만 굶주림에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는 청원과 자녀들의 형통을 위하는즉, 오늘날 기복 신앙이라고 말할 만한 기도의 제목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따로 분류하여 책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부모 세대의 기도로 자녀들은 부모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부유함은 자신은 물론 부모, 그리고 자녀들을 돌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낯선 메시지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도는 잘못되었습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거룩함으로 포장한 그 메시지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부모 세대의 기도로 부요케 된 2세대는 더 이상 기도를 삶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2세대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나와 있다. 3세대들은 사회 다방면에서 실패의 행진을 하고 있다. 부모는 커녕 자신조차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진 그들은 ‘자녀를 낳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다’하며 3포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1세대의 시대적 배경 :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허허벌판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뿐이었다. 기도뿐이라서 기도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녀 세대가 부(富)를 쌓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했다.
2세대의 시대적 배경 : 풍요의 세대,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생을 하면 고생한 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우리 땐 이랬어.’라는 말로 자신의 업무적 성과를 자랑하면 3세대들에게 꼰대라는 비평을 받게 된다.
3세대의 시대적 배경 : 찬란함과 암울함이 공존하는 시대, 외적으로는 가장 풍요롭고 내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빈곤한 기형적인 사회가 도래했다.
2세대가 스스로 노력해서 부모와 자녀들을 돌볼 만큼의 경제력을 갖추었던 반면, 3세대는 부모의 돈으로 교육을 받고도 서른 살이 넘도록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다가 부모의 돈으로 결혼을 한다.
문제와 마주치면 해결하기 위해 의지를 가다듬는 대신 포기해야 할 이유부터 찾는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할 명분을 찾는데 익숙하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한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못 낳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한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것도 자살에 대한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글로벌한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한국은 자살할 정도로 힘든 국가가 아닌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가 되어있다.
그러나 3세대들의 변명은 핑계가 아니다. 광기 어린 세상은 1년 만에 1억짜리 집을 2억으로 만들고 몇 년 후 또 3억짜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을 바라보는 무일푼의 3세대는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을 느낀다.
입을 것, 먹을 것 줄여가며 10년을 모아서 집을 사러 가면 집값은 다시 10년간 일해서 모아야 살 수 있을 만큼 올라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면 어마어마한 이자 때문에 은행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마저도 정책 잘못 만나면 크나큰 손실을 피할 수 없다.
집값의 상승과 하락 사이에서 배팅을 잘못하면 몇 년간 저축해서 모은 돈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이 되어 버렸고 이곳에 살고 있는 이상 누구도 배팅을 피할 순 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배팅을 한 셈이 된다.
그 결과, 통장에 가만히 2억을 저축해 두면 몇 년 후 2억으로 살 수 있던 아파트가 4억이 되어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은행에 안전하게 넣어두었더니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2억이 1억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저축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을지 모른다.
누구도 투기에 동참하지 않은 대가로 발생하는 현금자산의 가치 하락을 지켜낼 완벽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어설프게 전문가에게 의존하려 했다가는 전문가를 사칭한 사기꾼의 배만 불려 줄 뿐이다. 3세대들은 정부 정책과 집값의 등락 여부를 족집게처럼 예측해야 한다. 판단의 착오는 곧 가정 경제의 10년 퇴보를 의미한다.
전문가? 집을 가진 전문가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 하고 집이 없는 전문가는 집값이 더 떨어질 거라 말한다. 판단에 도움을 줄 진정한 전문가를 그들은 찾을 수 없다. 설령 진짜를 만났다 해도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그들에게는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은 물가 상승률을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을 단기간에 벌어들이는 것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창업을 하면 대체로 망하는 시대, 취직을 하면 근근이 먹고는 살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는 없는 시대, 양극화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늙어 죽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뿐이다. 1세대들이 이를 입증하지 않았던가. 3세대, 아니 우리는 1세대가 겪은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신개념 황무지에 서 있다.
“주님!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도 모시고 결혼도 하고 싶어요. 자녀들도 키우고 싶어요. 저를 인도해 주세요.”
풍요로워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 3세대들이다. 그러나 3세대들은 기도를 그렇게 사용하도록 배우지 않았다. 그들은 기도를 선교를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선교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 다운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에게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문제 앞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다른 이를 만났을 때는 “삶의 문제 해결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이 밸런스가 일부 신자들의 편협된 공격으로 붕괴돼버렸고 성도들은 기도할 의욕을 잃고 말았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간섭과 비판이 기도를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기도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 덕분에 평신도들의 신학 지식이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당 못할 정도의 성장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지식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비평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지식을 얻는 사람은 그 지식에 걸맞은 인격 또한 겸비되어져야 합니다.
신앙 인격이 동반되지 않은 사람에게 신학 지식의 증가는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신무기만 장착시켜 주는 격이 되곤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임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성도들의 적용과 나눔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습니다. 당사자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소중한 추억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밖에서 적들을 향해 휘둘러야 할 진리의 검을 지체들을 향해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 그렇게 해석하는 거 아닙니다!”
한 사람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법을 배웠고, 또 다른 사람은 내포된 영적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해석을 배웠다. 둘 중 누가 맞을까?
둘 다 맞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 중에 분쟁이 시작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그 지식으로 인해 은혜를 잃어가는 성도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 불신앙
언젠가부터 교회 내에서 이런 공식이 성립된 듯 보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구절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의 말씀으로도 적용할 수 있고,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영생의 말씀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이 구절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라는 영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로 사용하면 안 되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교회 온 첫날부터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으니까요.
감정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외식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현미잡곡에 배춧잎만 툭툭 썰어 넣어 끓인 죽을 삼시 세끼, 365일 먹어도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들 합니다.
감정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만 있다면 여행이나 문화생활은 가장 생산성 없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안 믿어질 때 청소년들은 방황합니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고 끊임없이 말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부모님이 해준 것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도저히 안 믿어져서 못 믿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내 삶의 문제, 내 가족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분이다? 그렇게만 이해한 새 신자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감정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만나려면 ‘진심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1%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기도 제목을 놓고 입만 뻥긋거리며 한두 마디, 기도하는 둥 마는 둥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라서 그 기도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프도록 나를 자극하는 내 삶의 문제들을 놓고 혼이 빠질 정도로 간절하게, 죽도록 간절하게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로 천국 가는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 동행 속에서 사람들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의 약속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 가슴 벅찬 사랑이 예배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배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 플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거의 모든 성도가 머리로는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겠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영적 슬럼프를 경험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처음 주님을 만나던 그때처럼...
삶의 문제 회복을 위해서 조금도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만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정말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 분들은 삶으로 증명이 되지요. 그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하고 있다면 증거가 없을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기도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의 능력으로 증명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은 누군가를 지적하고 교회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말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인에게서 풍겨지는 그 특유의 푸근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도는 당연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느 한구석에도 성경을 그렇게만 해석하라는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라는 구절은 있지만 개인의 비전과 눈앞에 놓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속 믿음의 조상들은 다 부자였고, 모든 왕들 또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은 만사형통했습니다.
"뭐, 당연한 것 아닌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가"
마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때는 구약시대였기 때문에 상황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근거 구절은 무엇입니까?"
만사형통, 기독교인들이 많이 싫어하고 경계하는 용어가 돼서 설교시간에는 사용하기조차 힘든 단어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만사형통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만든 이 상황이 과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역사일까요?
세상 것을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난 후, 평균 이하로 세상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드라마 광이 TV를 안 보게 된다거나 쇼핑에 중독되었던 사람이 더 이상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삶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예수님을 만난 후의 내 모습이다. 주님을 만난 후부터 진정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이렇듯 상대방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누군가의 비판 섞인 참견이 아니다.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세상 것은 다 배설물입니다. 주의 나라만 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선교비로 보내드리던 배설물은 이번 달부터 그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질에 관심이 없고 선교에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선교를 위해서만 기도하면 된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물질을 추구하는 그 마음 자체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차라리 물질을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무엇이 되었든 본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기도에 집중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기도를 하지 않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필 부분은 선교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물질 봉사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부류이다. 이렇게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의 후원자도 아닌 성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까.
사실 선교 일선에서 활동하는 사명자 타입은 보통 크기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분들이 많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보여지는 바로는 사명자뿐 아니라 후원자들도 적게 느껴진다. 선교를 위해서도, 선교 지원을 위해서도 목숨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째서 후원자 타입들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는 돈 많이 벌어서 선교하는 것이 꿈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것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를 실천하는 진정한 후원자들이 얼마나 될까.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사명자 들이 말했다. 그들은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문제는 사명을 감당할 믿음이 없고, 실천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할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꽤 근사한 말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할 정도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그만한 믿음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창검을 들고 휘두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검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른 성도만이 들고 휘두를 수 있는 매우 무거운 것이다.
“영차, 영차, 아이고 이거 꼼짝도 안 하네”
어린아이가 100킬로그램짜리 덤벨을 들려 했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기력이 학습된 아이는 다시는 덤벨을 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는 1킬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무게를 늘려갔어야 했다.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단 기도를 하게 되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도하게 된다. 즉 아무리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만 기도하려 해도 결국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 갈수록 ‘주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비율이 점차 커져가게 된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훈련시켜 가신다.
만일 선교에 관심이 없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조차 기도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상당수 교인이 아예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명자든, 후원자든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은 일단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명자 타입인지 후원자 타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도할 때 처음부터 선교 또는 목회 관련 일들이 보이고 기도가 술술 나오거나, 세상 것에 대한 염려나 관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그 마음,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일 수 있습니다."
"반면,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려 해도 자꾸만 취업, 회사 등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가 생각이 나서 기도에 집중을 방해한다면 아직은 후원자 타입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많이 벌어 많이 선교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바꾸어보십시오. 그 고백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기도는 훨씬 더 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전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균형 있게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 가지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한 쪽을 다른 쪽보다 더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더 추구하는 메시지의 영향을 더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 그리스도인의 고난만 집중적으로 전하는 성도가 있다. 또 그 옆에 그리스도인의 축복만 집중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족한 두 사람의 조합으로 하나의 밸런스를 맞추신다. 덕분에 듣는 성도 입장에서는 양쪽 메시지를 모두 다 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각각의 불균형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귀하게 쓰임 받는 한 쌍의 완벽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만일, 축복을 받고 싶다면 조금 더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조금 더 축복을 사모하고, 조금 더 축복을 구하여, 더 많은 축복을 세상에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된다면 본인은 저절로 가장 큰 축복의 수혜자가 됩니다"
"반대로 계속해서 예수 믿는 자들의 고난과 시련, 핍박에 대해서만 사람들에게 전하고 다니면 가장 힘든 것은 그 메시지의 통로, 즉 본인 스스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은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명자도, 후원자도 하나님의 자녀다. 사명자는 후원자를 존중하고 후원자는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담대히 선포하고 겸손하게 구해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인생은 사명자도 후원자도 아닌, 그 무엇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1%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재능을 사용하시긴 합니다.
그러나 보편성에 기대어 신앙생활을 하면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크기의 응답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다운 복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통로로 올 때가 많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도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예레미아 33장 3절)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로 하나님께서 주실 복의 한계를 결정짓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것이 부족해서, 저것이 부족해서... ’
저 역시 현재 상황과 재능을 근거로 상대방의 가능성을 유추해 보긴 하지만, 사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런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실 땐 우리가 가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믿는 자들은 기드온의 군사 선발 과정에서처럼 돌려 보내지거나 오히려 낮춰지는 연단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문제를 바라볼 때 성도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한계의 사슬이 끊어져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어쩌면 처음 이 선포는 그저 믿어 보려 애를 쓰는 성도의 몸부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수십, 수백 번 선포해 나가다 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곧 이어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턴 더 이상 그 고백이 억지 선포가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생생한 자기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시작할 때부터 ‘응답 못 받을 것을 준비하며 드리는 태도’를 권하는 메시지보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리 아니하셨어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면 마침내 더 큰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 그리고 무응답처럼 보이는 이 시련의 조각 들이 모두 합쳐져서 종국에는 더 큰 선한 역사를 이루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세요.
우리의 삶은 믿음대로 움직이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무수히 성경을 읽고 읽은 말씀을 실천하려 기도로 몸부림 친다해도 도저히 화가 나서 용납할 수 없는 시간들을 마주하게 될 터인데, 십자가를 붙잡고 한번 두 번 승리의 기록이 쌓이면 얼마 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고 작은 상급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맛에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쓰다 보면 어린 양들을 양육하라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당신의 시간과 열정에 비해 실망스런 결과를 보일 것이고, 또 일부는 당신을 찌르며 아프고 노엽게 할 것입니다. 그런 자극에 당신 또한 한두 번쯤은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의 수조차 주님의 십자가 승리 아래 있음을 그대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함부로 구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전하는 메시지에 처음 얼마간은 순종하는 듯 하다가 불순종을 밥먹듯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교묘하게 당신을 험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2~3년, 아니면 한 번더 2~3 년의 세월을 보내면, 당신은 원수를 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임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당신은 본인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주신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서 그와 교제하며 그의 말투와 성격, 사람들을 대하는 매너, 말씀 실천 여부 등등을 종합해보면 미래의 그림자가 보일 것입니다.
'아, 저 분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구나. 함께 해야 겠다. 저 분은 거룩한 척으로 위장했지만 행동은 사탄의 열매만 맺히니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저 분은 봉사와 기도는 하지만 물질적으로는 끝까지 어렵겠구나.'
그러나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기 전에, 먼저 본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확신 있게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 차례 응답을 체험하게 되면 긴가민가하는 마음들이 싹 사라집니다. 먼저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 된 것들이 열려 보이고 나중에는 그에게 올 질병이나 인간관계, 예를 들어 자녀의 미래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여지는 미래의 그림자들을 선포해 두면 세월이 흐른 후 사람들이 당신에게 찾아와서 예견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그분, 정말 그렇게 되었어요. 어떻게 아신 거죠?”
“나 정말 그렇게 되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주 예수를 제대로 믿으라 그래야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는데 기도는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하며, 말씀이라 함은 읽는 것 뿐 아니라 실천까지 포함 된다’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발언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예언의 은사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이치를 통달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그것을 따르거나 거스를 때 따라오는 결괏값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정확히 알면 적게는 한 사람의 미래, 크게는 세계사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의 삶에 대입해서 실제 데이터가 쌓이면 타인의 삶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타인의 것까지 더해져 영적인 빅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은 인공지능이 범접할 수 없는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까지 겸비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화가 나면 일단 화를 내고 나중에 사과를 하면 했지 그 상황에서 즉시 자신의 분노를 내려놓는 경우를 본 기억이 희소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차례로 경험하고도 모자라 끝내 홍해까지 달려가 죽음을 자처한 바로처럼 잘못된 행실을 굽히지 않습니다. '즉시 회개' 그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정말 어려운 미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면 즉시 내려놓을 수 있는 태도, 그것이 복 있는 자의 DNA입니다.
복 있는 자들은 극하게 과열된 상황 앞에서도 성령님의 싸인이 떨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사과도 가능합니다. 분노와 자존심을 내려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복보다 가치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복의 가치를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내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자신이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래도록 봉사하면서도 자기 고집과 성질 하나 꺾지 못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는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사모하는 자라면 말씀 앞에서 '순종'이라 불리는 영적 유연성을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성품이 악해서 못 받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본인이 악하다는 사실조차 몰라서 못 받고, 어떤 이는 성품은 너무 좋은데 '문제 해결과 복을 구하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라' 믿고 있어서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펼쳐도 '하나님께 복을 구하면 안된다. 그 복은 영혼 구원에만 국한 된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주신다는 구절만 있을 뿐, '복을 구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을 제한하시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받을 복의 크기를 제한합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열차가 찾아온다.
올라타고 내리지 아니하면 그는 종착역인 천국, 천국 역에 도착하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열차가 아니므로 기회가 왔을 때 즉시 올라타야 한다. 1년에 한 번씩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3년에 한 번 또는 5년, 10년에 한 번 꼴로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따금 한 번씩, 하나님의 축복 열차로 갈아탈 수 있는 환승 게이트가 열린다. 축복 열차에 올라타게 되면 영혼은 물론 범사가 잘되고 정서적으로도 강건해지게 된다.(요한삼서 1장2절) 그러나 이런 정보는 천국의 창고를 여는 열쇠가 필요하여 누구에게나 열리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들에게만 들리도록 암호화되어있다. 구원은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물질 축복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늘 화가 나 있다. 그것은 흡사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가인의 모습과도 같다. 실제로 그들 중 상당수가 축복의 하나님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하며 공격한다.
“그럼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 제대로 안 믿는 사람들이란 건가요!”
축복 열차 또한 올라타고 내리지 아니하면 점점 삶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풍요로움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순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차에 올라탈 기회가 날마다 주어지지는 않는다. 인생에 한 번씩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메신저들을 보내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문제에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십니다. 복에 복을 더하길 원하십니다.”
그 타이밍을 잡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체로 사람을 통해서 오게 되는데 사람의 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정보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로마서 10장 17절
먼저,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여는 방법을 아는 이를 만나야 하고, 그가 나로 하여금 그 복을 사모하여 전심으로 부르짖도록 만들 만큼의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날 것이며, 만났다 해도 그가 나에게 그만큼 집중해 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질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실제로 올라본 사람의 가이드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가이드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천국 창고를 열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동기까지 부여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그런 메신저를 발견했다면 혈루병 여인처럼 본인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씀의 옷깃을 붙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따금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가이드들이 직접 구원 열차에 탑승하여, 대상자들에게 환승 게이트로 갈아 탈것을 제안하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구원을 전하게 하시듯, 신유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는 신유의 하나님을 전하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에서 나음을 입은 자들에게는 평안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게 하시며 물질 축복 받은 자들 역시 물질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게 하신다.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을 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사람 만큼 구체적일 수는 없다.
“이번 정차역은 축복 열차로 갈아타실 수 있는 순종, 순종 역입니다.”
누군가는 이 음성을 듣고 비판 섞인 시선을 보내며 더러는 무관심한 표정을 보인다. 만일 이 같은 축복 메시지를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기도의 집중을 방해하는 다른 메시지들로부터 귀를 막고 즉시 환승 게이트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 줄 아세요!”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메세지는 그에게 필요해서, 그에게 주신 메세지일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만 솔직히 내 기도에는 응답해 주시지 않을 것 같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열심히 ‘아멘’으로 화답해 보지만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 나의 직장, 나의 가족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리라 100% 확신하느냐고 묻는다면? 100%는 아닌 것 같은 심정도 우리에게는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도 들고, 직장 걱정도 하고, 가족 걱정도 하고, 노후 걱정도 한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정보이다.
믿음은 들음 즉, 정보를 통해 유발된다.
정보 A : “기도는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정보 B : “기도하면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
교회 안에는 위 두 가지 메시지가 마치 대립하듯 전파되고 있다. 이따금 토론도 펼쳐지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기도를 통해 ‘개인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끊임없이 증거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도는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메시지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누구도 그의 선택을 만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한 것이 아님에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야고보서 4장 2절)
이따금 필자의 책 ‘그 힘 사용설명서’를 읽은 독자들로부터 소감 글을 받곤 한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은 후 더 뜨겁게 기도하게 되었고 삶의 변화도 나타났다’
그동안 정보 A에 노출되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던 이들이 정보 B를 얻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기독교 부흥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성장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물론 기복 신앙 양산이라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러나 부작용만 있었던가? 그저 복이나 받으러 교회에 나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정녕 없었는가?
교회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개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아니지만 개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 B가 완벽히 차단된 상태에서 정보 A에만 노출된 성도들은 차츰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정보 A가 신학적 진화를 거치면 ‘고통도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핍박받았다. 감사하며 달게 받아라.’ 즉,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기도조차 해보지 않고 받아들이라는 적용이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이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성경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기에 많은 성도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에 대한 반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성경에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성경을 고루 읽은 성도들은 신앙이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밸런스 붕괴를 막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도 ‘믿음으로만 받는다’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 그럴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은 줄 알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구절을 오해하여 마음껏 죄를 짓는 상황을 막기 위한 장치가 아니겠는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할 때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것은 내 주장에 성경 구절을 맞추는 태도가 아니라 성경 말씀에 내 생각을 맞추는 것이다.
가장 성경적인 것은 성경처럼 양쪽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양쪽 메시지를 다 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당신이 정보 A에 눌려 있었다면 이제부터 당신이 들어야 할 정보는 B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보호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것, 그 두 번째는 이성과 양심의 작용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위기의 순간에 가장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더 악화될 것을 우려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런 심리적 공황 상태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곤 한다. 그러므로 위기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평안’한 마음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외람된 가정이지만 만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던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무도 없는 감옥 속에서 그처럼 마음의 ‘평안’을 지키며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문제를 극복하려 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인내’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평안’의 믿음은 우리에게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의 양심에 영향을 받는다.
양심은 주관적이기에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떤 이는 가족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영향을 받는다. 다른 어떤 이는 길거리에 껌 종이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다. 경중을 떠나 이들이 느낀 죄책감은 스스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느낀 감정이고, 그 감정의 무게만큼 기도도 영향을 받게 된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도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증상은 성령 받은 성도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질수록 양심의 기준은 더욱 엄격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과응보 (因果應報) : 원인에는 결과가 따른다. 즉, 죄에는 벌이 따른다.
우리는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법’으로 옮겨졌다.
은혜 :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주어지는 선물.
성경에는,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다 마침내 복을 받는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원했던 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다가갔던 이들 중 상당수는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변화되지 않았잖소.”
“가룟 유다를 선택할지 베드로를 선택할지, 사도바울을 선택할지 브리스가를 선택할지, 정보 A를 선택할지 정보 B를 선택할지 그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당신의 구원이 그러했던 것처럼...”
필자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이 축복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고난 속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듯했다. 나는 성도들이 축복의 주님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보 B를 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정보 A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A 정보원들의 전갈을 받고 있다.
아직 믿음이 어린 성도는 하나님께 원하는 바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6절)
사람들마다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누군가는 고난 속에서 구원의 주님을 만나서 성화를 이루어가고, 다른 누군가는 평안 가운데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 사람마다 역사하시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구원과 축복. 하나님께는 각 개인에게 맞는 맞춤 플랜이 있다.
사탄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사탄은 각각 개인이 지닌 다양성을 수렴하여 그들에게 어울리는 최적화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려 든다. 사람마다 사탄이 역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사망과 멸망. 사탄에게도 각 개인에게 맞는 맞춤 플랜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성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신다. 물질을 주시는 것이 성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주신다. 그러나 오히려 물질을 주는 것이 독이 된다면 주시지 않는다. 도저히 좋은 말로해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난도 허락하신다.
형통함과 고난,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이 두 가지 도구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의 값은 놀랍게도 동일하다. 주님의 섭리가운데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정한 복을 받고 싶다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 순종하면 그 순종의 퍼즐로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사탄의 개입 또한 다르지 않다. 형통함과 고난,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이 두 가지 도구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 값은 놀랍게도 동일하다. 사탄의 역사가운데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멸망을 완성시킨다.
사탄은, 우선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고, 이미 구원 받은 이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만든다. 구원이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내안에 들어오시는 사건을 말한다. 즉 구원이란 모든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복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은 능력이 내안에 임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면, 정말 주님을 영접한 것이 맞다면 당사자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잘되게 된다.
물론 잘된다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 될 수 있다. 복음전파가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사도바울에게는 조난과 수감생활조차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삶을 고난으로 얼룩졌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24절)
분명한 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는 것은 결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균등한 선물이 아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삶의 무게에 눌려 힘겨워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 또한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이 믿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믿음을 붙든 성도는 찬송하게 된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라.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내가 일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책임져 주실 주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은 오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고 최선을 다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사탄의 간섭 아래 있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의 행동양식을 취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게 된다는 확신이 없으니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왜? 어차피 열심히 일해도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증거는 확신과 평안, 사탄의 영에 눌려 있다는 증거는 매사에 불확신과 초조함이다.
사탄의 수법을 요약해 보려한다. 사실 우리는 사탄의 수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당하는 이유는 매번 새로운 응용버전을 가지고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이미 경험해 본적이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 다른 사건, 다른 환경이라 번번이 넘어지지만 알고 보면 본질은 언제나 똑같은 문제였다. 사탄의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같은 문제를 들고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라고 보내주신 좋은 인연을 모조리 쫓아내게 만든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모든 만남을 분리시키려 든다. 때때로 상대방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도록 만들어 서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서로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매뉴얼 중 하나이다.
둘째,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사탄은 성도들이 문제해결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람이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결국은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그의 안에 계신 복의 근원 때문에 반드시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 게임, 당구, 골프, TV시청 등등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하지만 내가 그것에게 시간을 할애한 만큼 그것들에게 내가 선택 당하게 된다. 정도가 심해지면 그것들이 나를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쯤 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의 종이 되어 그것들이 우리를 부를 때마다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종인가. 나는 누구에게 나를 드리고 있는가.”
불의의 병기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드려야 한다. 즉,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 당구장에, 골프장에, 컬렉션에 하듯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드린 만큼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된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할수록 순종이 수월해지는 선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반사적으로 그에게 세속적이라는 비난의 마음을 갖고 심지어 직접 면전에서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자 되면 타락한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라.”
틀린 말이 아니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사람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기도는 방향을 잃곤 합니다.
"그래서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분명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중요한 사실은 처음에는 사업 때문에, 취직 때문에 교회를 나와서 기도하던 분들도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던 사람의 마음속에서 돈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의 변화를 만든 것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으로 예배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혼을 다해 기도할 만큼의 간절한 마음은 타인의 강요나 가르침에 의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진심으로 원하는 소망 또는 아픔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게 될 때 우리의 간절함은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과 성화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은 주님을 만난 사람, 그리고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의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연결 되어 있으려면 여호와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단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제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드리는 대상과 신에게 연결하는 중보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다른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기도는 틀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빨리 걸을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길에 서서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워 올수록 그들은 처음보다는 한결 예수님을 닮아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제단에 불을 지피는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거짓 거룩으로 무장한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음성을 차단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은 발전을 합니다. 21세기 신학도 그렇게 발전을 해왔습니다. 1960년, 70년,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학적 지식수준은 상당해 보입니다. 이렇게 지적인 수준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데 영적인 수준은 어떨까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기도를 통해 '들은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아졌는데 알고 있는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상. 많은 목회자분들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시간이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현재 성도들의 영적인 퇴보와 기도시간이 줄어든 것이 과연 무관한 일일까요?
걷지도 못하는데 뛰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초심자가 첫째 주부터 ‘저 죽어가는 열방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기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분히 인간적인 기대감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가 주님을 만나면 비로소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담배 끊고, 술 끊고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나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배에 나오면, 주님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해결 될 일이라고...
타인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비난과 간섭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삭개오를 대하던 예수님의 방식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너와 함께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었든 일단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아프면 부모님께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부모님께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아직 어린아이인데 말은 마치 장성한 분량에 이른척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분들 중에는 아예 기도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은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아직은 자신의 현실의 문제가 눈에 보이는데 자꾸만 그것을 정죄하니까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되는 상황. 영성은 기도할 때 깊어지는 것인데 기도하지 않는 이에게 어떻게 영적인 성장의 계기가 마련이 되겠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장소로 사람들을 향하게 하는 것은 누군가의 근엄한 비평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제목에 걸맞은 그릇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표현했다. 과연 기도 안하는 것이 죄일까? 죄라면 어째서 죄일까?
사실 기도의 부재자체가 직접적인 죄일 리는 없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됨은 물론 구원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구원의 3단계]
1. 구원에 대한 정보 :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 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말씀을 듣지 않고 생활의 지혜 같은 교양강좌 설교만 들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구원 받으려면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보혈에 집중해야만 한다.
2. 믿기로 선택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듣자마자 1초 만에 믿음이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님을 믿기로 선택했다 해도 지금 당장 믿음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올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당사자가 믿기로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가이드, 주님께서 당사자의 마음속으로 입장하시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장 20절)
3. 믿음이 온다 :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믿음의 강도를 100%로 가정해 보자.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면서 단번에 100%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 10% 미만의 믿음만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예 1%도 믿지 않으면서 분위기 때문에 앵무새처럼 영접기도문을 따라서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기로 선택하면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들어오신 후, 주님께서는 당사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신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해놓고도 계속 불확신과 싸우는 교인들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 어쩌면 그런 이들에게는 ‘믿음이 생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번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찾아와서 ‘나는 구글의 경영진입니다.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습니다.’라고 제안한다 해도 당신은 곧 바로 그 자리에서 믿습니다하고 그를 따라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가 진짜 구글의 경영진인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조사를 통해 그가 정말 구글의 경영진인지를 확인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번엔 선뜻 그를 따라 나설 수 있을까. 분명 또 다른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할 것이다.
‘구글 경영진이 나를 왜? 뭔가 함정이 숨어 있을 거야.’
하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당신과 만나 식사도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시간을 함께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로소 당신은 그를 믿고 따라나서게 될 것이다.
믿음이 생기는 필요충분조건 = 시간 + 횟수
영적 존재인 인간은 이미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느끼려하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느끼려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너무도 생생하게...
그래서일까? 세계 모든 문화권에는 죄와 죄 값을 사함 받으려는 속죄 제사, 즉 일종의 예배가 있다. 그들은 짐승의 피, 또는 인간의 피를 흘린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피로는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고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 없이 많은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이 사실은 두려워 떨고 있다. 명상을 하면 할수록, 수행과 고행을 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며 지옥은 느껴지는데 막상 지옥을 벗어날 방법을 모르겠는 것이다. 그 때 거짓말 같이 구글의 CEO, 아니 이 세상의 최고경영자이신 주님께서 함께 천국가자고 손을 내미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라.”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간다는 말, 너무 고맙지만 너무 엄청나서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주님과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선교지도 따라다니며 동행하다보면 믿음이 생긴다. 함께한 시간 + 횟수가 증가할수록 믿음이 굳건해진다. 처음엔 나의 주인으로, 어떨 땐 친구로, 부모님으로, 마침내 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을까. 예배, 그리고 기도.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서 주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조사해보면 조사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믿게 된다.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 당신은 커피숍에서 어떤 커피를 고르는가. 커피 입문단계라면 아메리카노 보다는 라떼 종류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심지어 커피가 아니라 주스를 선택한다 해도 당신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커피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주님의 커피숍에서 커피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 이를테면 질병의 치유, 시험합격, 취업, 사업성공 같은 것을 구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커피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젠가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어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당사자의 선택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믿었더니 상당부분 믿음대로 되었다.
부모님의 사업부도로 무너져버린 집안형편을 다시 되돌려 달라는, 철저히 기복주의적인 기도로 시작되었던 고등학생의 신앙생활. 그런 그가 예수님이 너무 좋다며 신학대학을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필리핀과 미얀마, 한국의 미자립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지출하게 될 줄을, 지금 이렇게 기도에 대한 칼럼을 쓰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었을까.
주님을 영접하기 전, 주님께서 우리 가족의 아픔과 필요를 모른척하며 선교만을 강요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었다면 나 역시 주님을 모른 척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해도 주님을 떠나진 못할 것이다. 아프다고 울기야 하겠지만,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고 주님을 원망하며 감히 화도 낼 수 있겠지만 주님을 떠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주님 뜻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당사자의 선택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언젠가부터 영적인 체험을 구하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교회 내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뭐든 적당한 것이 좋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들은 말한다.
“적당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미쳐야 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 하나님의 일에 사람들의 생각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얼마 안 가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현대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마음껏 복을 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마음껏 영적인 체험을 간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준 미달의 저속한 기복주의 신앙인들과 무당의 주술에 가까운 예언 기도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체험도 마음껏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바 구하지 않는 것은 받을 수 없다.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배척하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에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도 남용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부작용이 그것들이 가진 주요 기능은 아니지 않은가. 그 모든 것들은 본래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과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의 부작용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라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증상은 맞는 걸까.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에 참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과연 부작용이 있을까.
타 종교에서도 기도라는 행위가 있고 그들 또한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한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기도로 영의 문을 열면 그 통로를 통해 본인이 기도했던 대상이 찾아와서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적인 체험들은 결말이 좋지 않다. 그 모든 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행해지는 일이기에 축복인 듯 보여도 결말은 어떤 식으로든 새드 엔딩을 보게 되어 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고난들이 결과적으로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는 해피엔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런 반복 속에서 성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로마서 5장의 고백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삶이 허락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셨고, 덕분에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맞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을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복을 받게 된다.
오히려 영의 세계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재단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좋으신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가 독이 되어 우리에게 피드백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은, 믿은 만큼 당사자의 삶에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기복 신앙과 신비주의는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려하여 충분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올바른 신앙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붙잡고 기도하면 무조건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뭐가 그리 복잡하오. 기복 신앙? 신비주의? 난 그런 건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주님께 기도하면 좋다는 것이오”
주님을 추구하는 삶에 적당히란 있을 수 없다. 적당히 복을 구하고, 적당한 체험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늘 그렇듯 사탄은 성도들의 호흡과 같은 기도를 일단 어떻게든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비주의라서 안 되고, 기복 신앙이라 안 되고, 바빠서 안 되고, 아파서 안 되고,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심지어 교회 봉사하느라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기도 없는 사역이, 봉사가, 목회가 과연 주님의 일일까?
“아무거나 하나 걸려라”
사탄이 뿌려 놓은 다양한 지뢰에 얻어걸리면... 기도할 수 없게 된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실감하지 않을 만큼만 하게 된다.
사탄의 지뢰가 이토록 다양한 반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분석하고, 구분하고, 재단하려 할 때 우리는 완벽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수준 높은(?) 기독교인들을 위해 특별 제작한 사탄의 고급 지뢰에 발목을 잃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모든 성도는 신비주의자여야 할지 모른다. 피조물인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만큼 신비한 분이 또 어디 있을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신비로움으로 가득 찰 때 우리의 신앙은 힘을 얻게 된다.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을 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기한 사탄의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문제 아닌가. 망조가 단단히 든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 때문에 이토록 좋으신, 신비한 하나님을 터부시하고 배척해도 괜찮은 것일까.
신학에서 말하는 특별 계시는 성경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성경 말씀이 일반 계시가 되고, 성경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나타나는 개인적인 응답이 특별계시가 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일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즉, 레마일 수도 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주님의 특별계시를 받게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신비한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의 음성을 따라 힘든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소원의 항구에 도착해 있게 된다. 그러나 개인에게 주시는 레마를 들을 수 없어도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되 개인에게 주시는 각각의 레마보다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것에도 충분한 권세가 있다.
마음껏 기도하고 싶고 마음껏 복을 구하고 싶다면, 그래서 신비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성도가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벌이는 모든 에피소드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그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라면 기복 신앙, 신비주의 등등 누군가가 멋대로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 자유하자.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실로 다양하다. 그래서 성도마다 주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전부 다르다.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방식 또한 그러하다. 구원을 주시는 방법,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도록 이끌어 가시는 방법 모두 개인마다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과정 즉, 구원과 성화라는 과정에 사용되는 도구가 기도이다. 사람마다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방식과 성화를 이루어가는 훈련 과정이 다른 만큼 기도 제목 또한 같을 수 없다. 즉, 같은 상황에 처해도 사람마다 기도 제목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성도가 다른 성도에게 ‘당신의 기도는 틀렸다고,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다른 존재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셈이 된다.
최근 기독교인들은 기도 시간이 갈수록 줄고 있음을 공감하며 이것을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 시간을 줄어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기도를 지나치게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든 까닭도 있다. 언젠가부터 교회 내에서 타인의 기도를 비난하는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의 나라와 주의 일을 위해서만 기도해라.”
그러나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기도를 따로 구분 짓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간구는 기도였고 그때의 기도들이 한데 모여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있게 했다. 그 기도 속에는 영적인 추구도 있었지만 굶주림에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는 청원과 자녀들의 형통을 위하는즉, 오늘날 기복 신앙이라고 말할 만한 기도의 제목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따로 분류하여 책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부모 세대의 기도로 자녀들은 부모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부유함은 자신은 물론 부모, 그리고 자녀들을 돌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낯선 메시지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도는 잘못되었습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거룩함으로 포장한 그 메시지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부모 세대의 기도로 부요케 된 2세대는 더 이상 기도를 삶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2세대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나와 있다. 3세대들은 사회 다방면에서 실패의 행진을 하고 있다. 부모는 커녕 자신조차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진 그들은 ‘자녀를 낳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다’하며 3포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1세대의 시대적 배경 :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허허벌판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뿐이었다. 기도뿐이라서 기도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자녀 세대가 부(富)를 쌓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했다.
2세대의 시대적 배경 : 풍요의 세대,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생을 하면 고생한 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우리 땐 이랬어.’라는 말로 자신의 업무적 성과를 자랑하면 3세대들에게 꼰대라는 비평을 받게 된다.
3세대의 시대적 배경 : 찬란함과 암울함이 공존하는 시대, 외적으로는 가장 풍요롭고 내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빈곤한 기형적인 사회가 도래했다.
2세대가 스스로 노력해서 부모와 자녀들을 돌볼 만큼의 경제력을 갖추었던 반면, 3세대는 부모의 돈으로 교육을 받고도 서른 살이 넘도록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다가 부모의 돈으로 결혼을 한다.
문제와 마주치면 해결하기 위해 의지를 가다듬는 대신 포기해야 할 이유부터 찾는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할 명분을 찾는데 익숙하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한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못 낳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한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것도 자살에 대한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글로벌한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한국은 자살할 정도로 힘든 국가가 아닌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가 되어있다.
그러나 3세대들의 변명은 핑계가 아니다. 광기 어린 세상은 1년 만에 1억짜리 집을 2억으로 만들고 몇 년 후 또 3억짜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을 바라보는 무일푼의 3세대는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을 느낀다.
입을 것, 먹을 것 줄여가며 10년을 모아서 집을 사러 가면 집값은 다시 10년간 일해서 모아야 살 수 있을 만큼 올라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면 어마어마한 이자 때문에 은행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마저도 정책 잘못 만나면 크나큰 손실을 피할 수 없다.
집값의 상승과 하락 사이에서 배팅을 잘못하면 몇 년간 저축해서 모은 돈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이 되어 버렸고 이곳에 살고 있는 이상 누구도 배팅을 피할 순 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배팅을 한 셈이 된다.
그 결과, 통장에 가만히 2억을 저축해 두면 몇 년 후 2억으로 살 수 있던 아파트가 4억이 되어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은행에 안전하게 넣어두었더니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2억이 1억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저축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을지 모른다.
누구도 투기에 동참하지 않은 대가로 발생하는 현금자산의 가치 하락을 지켜낼 완벽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어설프게 전문가에게 의존하려 했다가는 전문가를 사칭한 사기꾼의 배만 불려 줄 뿐이다. 3세대들은 정부 정책과 집값의 등락 여부를 족집게처럼 예측해야 한다. 판단의 착오는 곧 가정 경제의 10년 퇴보를 의미한다.
전문가? 집을 가진 전문가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 하고 집이 없는 전문가는 집값이 더 떨어질 거라 말한다. 판단에 도움을 줄 진정한 전문가를 그들은 찾을 수 없다. 설령 진짜를 만났다 해도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그들에게는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은 물가 상승률을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을 단기간에 벌어들이는 것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창업을 하면 대체로 망하는 시대, 취직을 하면 근근이 먹고는 살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는 없는 시대, 양극화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늙어 죽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뿐이다. 1세대들이 이를 입증하지 않았던가. 3세대, 아니 우리는 1세대가 겪은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신개념 황무지에 서 있다.
“주님!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도 모시고 결혼도 하고 싶어요. 자녀들도 키우고 싶어요. 저를 인도해 주세요.”
풍요로워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 3세대들이다. 그러나 3세대들은 기도를 그렇게 사용하도록 배우지 않았다. 그들은 기도를 선교를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선교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 다운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에게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문제 앞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다른 이를 만났을 때는 “삶의 문제 해결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이 밸런스가 일부 신자들의 편협된 공격으로 붕괴돼버렸고 성도들은 기도할 의욕을 잃고 말았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간섭과 비판이 기도를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기도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있다.
“그 구절이 그렇게 사용하는 구절인 줄 아십니까! 영적으로 해석해야지요!”
체계적인 성경공부 덕분에 평신도들의 신학 지식이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당 못할 정도의 성장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지식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비평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지식을 얻는 사람은 그 지식에 걸맞은 인격 또한 겸비되어져야 합니다.
신앙 인격이 동반되지 않은 사람에게 신학 지식의 증가는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신무기만 장착시켜 주는 격이 되곤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임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성도들의 적용과 나눔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습니다. 당사자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소중한 추억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밖에서 적들을 향해 휘둘러야 할 진리의 검을 지체들을 향해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 그렇게 해석하는 거 아닙니다!”
한 사람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법을 배웠고, 또 다른 사람은 내포된 영적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해석을 배웠다. 둘 중 누가 맞을까?
둘 다 맞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 중에 분쟁이 시작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그 지식으로 인해 은혜를 잃어가는 성도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개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 불신앙
언젠가부터 교회 내에서 이런 공식이 성립된 듯 보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구절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의 말씀으로도 적용할 수 있고,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영생의 말씀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이 구절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라는 영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로 사용하면 안 되는 걸까요?
모든 사람이 교회 온 첫날부터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으니까요.
감정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외식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현미잡곡에 배춧잎만 툭툭 썰어 넣어 끓인 죽을 삼시 세끼, 365일 먹어도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들 합니다.
감정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만 있다면 여행이나 문화생활은 가장 생산성 없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안 믿어질 때 청소년들은 방황합니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고 끊임없이 말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부모님이 해준 것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도저히 안 믿어져서 못 믿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내 삶의 문제, 내 가족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분이다? 그렇게만 이해한 새 신자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감정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만나려면 ‘진심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1%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기도 제목을 놓고 입만 뻥긋거리며 한두 마디, 기도하는 둥 마는 둥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라서 그 기도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프도록 나를 자극하는 내 삶의 문제들을 놓고 혼이 빠질 정도로 간절하게, 죽도록 간절하게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로 천국 가는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 동행 속에서 사람들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의 약속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 가슴 벅찬 사랑이 예배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배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 플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거의 모든 성도가 머리로는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겠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영적 슬럼프를 경험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처음 주님을 만나던 그때처럼...
삶의 문제 회복을 위해서 조금도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만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정말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 분들은 삶으로 증명이 되지요. 그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하고 있다면 증거가 없을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기도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증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의 능력으로 증명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은 누군가를 지적하고 교회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말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인에게서 풍겨지는 그 특유의 푸근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도는 당연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느 한구석에도 성경을 그렇게만 해석하라는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라는 구절은 있지만 개인의 비전과 눈앞에 놓인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속 믿음의 조상들은 다 부자였고, 모든 왕들 또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은 만사형통했습니다.
"뭐, 당연한 것 아닌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가"
마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때는 구약시대였기 때문에 상황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근거 구절은 무엇입니까?"
만사형통, 기독교인들이 많이 싫어하고 경계하는 용어가 돼서 설교시간에는 사용하기조차 힘든 단어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만사형통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만든 이 상황이 과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역사일까요?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
→ 사명자 타입 : 물질에 관심 없는 선교사 형
→ 후원자 타입 : 물질에 관심 있는 선교 지원 형
주님을 만난 후 가치관에 커다란 지각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세상 것을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던 사람이 주님을 만난 후, 평균 이하로 세상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드라마 광이 TV를 안 보게 된다거나 쇼핑에 중독되었던 사람이 더 이상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삶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예수님을 만난 후의 내 모습이다. 주님을 만난 후부터 진정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이렇듯 상대방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누군가의 비판 섞인 참견이 아니다.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세상 것은 다 배설물입니다. 주의 나라만 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선교비로 보내드리던 배설물은 이번 달부터 그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질에 관심이 없고 선교에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선교를 위해서만 기도하면 된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물질을 추구하는 그 마음 자체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차라리 물질을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무엇이 되었든 본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기도에 집중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기도를 하지 않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필 부분은 선교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물질 봉사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부류이다. 이렇게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의 후원자도 아닌 성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까.
사실 선교 일선에서 활동하는 사명자 타입은 보통 크기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분들이 많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보여지는 바로는 사명자뿐 아니라 후원자들도 적게 느껴진다. 선교를 위해서도, 선교 지원을 위해서도 목숨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째서 후원자 타입들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는 돈 많이 벌어서 선교하는 것이 꿈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것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를 실천하는 진정한 후원자들이 얼마나 될까.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사명자 들이 말했다. 그들은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문제는 사명을 감당할 믿음이 없고, 실천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할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하십시오.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꽤 근사한 말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주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할 정도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그만한 믿음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창검을 들고 휘두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검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른 성도만이 들고 휘두를 수 있는 매우 무거운 것이다.
“영차, 영차, 아이고 이거 꼼짝도 안 하네”
어린아이가 100킬로그램짜리 덤벨을 들려 했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기력이 학습된 아이는 다시는 덤벨을 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는 1킬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무게를 늘려갔어야 했다.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단 기도를 하게 되면 ‘주의 나라’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도하게 된다. 즉 아무리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만 기도하려 해도 결국은 ‘주의 나라’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 갈수록 ‘주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비율이 점차 커져가게 된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훈련시켜 가신다.
만일 선교에 관심이 없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조차 기도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아예 기도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상당수 교인이 아예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명자든, 후원자든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은 일단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명자 타입인지 후원자 타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도할 때 처음부터 선교 또는 목회 관련 일들이 보이고 기도가 술술 나오거나, 세상 것에 대한 염려나 관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그 마음,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일 수 있습니다."
"반면,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려 해도 자꾸만 취업, 회사 등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가 생각이 나서 기도에 집중을 방해한다면 아직은 후원자 타입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많이 벌어 많이 선교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바꾸어보십시오. 그 고백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기도는 훨씬 더 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전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균형 있게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 가지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한 쪽을 다른 쪽보다 더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더 추구하는 메시지의 영향을 더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 그리스도인의 고난만 집중적으로 전하는 성도가 있다. 또 그 옆에 그리스도인의 축복만 집중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족한 두 사람의 조합으로 하나의 밸런스를 맞추신다. 덕분에 듣는 성도 입장에서는 양쪽 메시지를 모두 다 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각각의 불균형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귀하게 쓰임 받는 한 쌍의 완벽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만일, 축복을 받고 싶다면 조금 더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조금 더 축복을 사모하고, 조금 더 축복을 구하여, 더 많은 축복을 세상에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된다면 본인은 저절로 가장 큰 축복의 수혜자가 됩니다"
"반대로 계속해서 예수 믿는 자들의 고난과 시련, 핍박에 대해서만 사람들에게 전하고 다니면 가장 힘든 것은 그 메시지의 통로, 즉 본인 스스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은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명자도, 후원자도 하나님의 자녀다. 사명자는 후원자를 존중하고 후원자는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담대히 선포하고 겸손하게 구해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인생은 사명자도 후원자도 아닌, 그 무엇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1%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